영일정씨 판결사공파·승지공파 동춘묘역은 인천시기념물이다. 인천 연수구 동춘동 영일정씨의 판결사공·승지공파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인 1607년 승지 정여온(1570~1632)이 부친 정제(1540~1607)의 묘소를 연수구 청량산 밑에 모신 후부터라고 전해 온다. 이후 10대(代) 400년 이상 인천에서 가계를 이어온 대표적 종중(宗中)이다. 묘역 내에는 17기의 묘소(일부 묘소 제외)와 묘비, 문인석, 석양, 망주석, 상석 등 석물 66점이 보존돼 있다. 이들 석물은 조선 중기~후기 미술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묘제 양식의 기본 상식을 알 수 있고, 당시의 문화와 생활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지대하다. 문화재청 제공
심복사 능인전 안에 모셔진 이 불상은 고려 말에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노인(千老人)이 덕목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고 전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낮게 표현돼 있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 귀가 크고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옷깃과 소매깃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안정되고 단정한 모습으로 전체적인 조형이 도식화된 이 불상은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정제두 묘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인천시기념물이다. 정제두(1649~1736)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다. 그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중신의 천거로 30여차례나 요직에 임명됐으나, 거의 다 거절하고 주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묘역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62의5 길 바로 옆에 있다. 묘역은 완만한 경사지에 사성이 없이 용미만이 길게 돼 있고, 그 앞에 원형 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하계 부분에는 좌우에 민무늬로 된 상단에 띠를 2개 두른 망주석과 금관조복에 양관을 한 문인석이 있다. 신대우가 글을 짓고, 서영보가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김포시 월곶면과 강화도성이 위치한 강화읍 갑곶리를 배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건넜던 사실이 있고, 병자호란 때에는 봉림대군이 임금을 모셨던 곳이기도 하며,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갯벌만 있었으나 1419년 세종 때 건축공사를 담당하던 박신이 통진현에 유배됐을 당시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1900년대 초까지 500여년간 강화도와 육지를 오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통행시설로 이용됐다. 현재는 해안가 철조망으로 인해 접근이 불가능하다. 문화재청 제공
삼거리고인돌군은 인천 강화군에 있는 청송시대 무덤으로, 인천시기념물이다. 삼거리 진촌마을 앞산인 고려산 서쪽 능선상에 북방식 고인돌무덤 9기가 일렬로 분포돼 있다. 어떤 고인돌무덤은 덮개돌 위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파여 있는데 이러한 모양을 남한에서는 성혈이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별자리와 연관 짓고 있다. 작은 구멍이 있는 고인돌무덤의 크기는 높이 2.80m, 너비 0.90m. 두께 0.38m다. 고인돌무덤 가까이에 는 돌을 떼낸 흔적이 남아 있는 채석장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대형 범종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뒀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아래 띠(下帶)는 구슬 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윗 띠(上帶)와는 다르게 덩굴 무늬를 뒀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존 상태가 좋고 조각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은 인천 강화군에 있는 인천시 기념물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인돌은 강화읍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인화리 방면으로 가다 송해면과 하점면 경계지점을 지나 부근리~망월간 도로의 중간지점, 고려산 북쪽에서 흘러내린 주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해발 15m 정도의 낮은 지대의 밭에 위치해 있다. 고임돌이 기울어져 무너져 내린 것을 현재는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동서 방향의 고인돌을 바로 세우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린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북쪽 방향에는 마감돌이 유실되지 않고 보존돼 있어 점골 고인돌은 물론 강화지역에 분포한 고인돌의 구조와 형태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유적이다. 문화재청 제공
회암사지 영역의 동쪽 지역에 위치하는 건물지 내부에서 2기가 남북으로 나란히 발굴됐다. 건물지 내부에는 맷돌뿐 아니라 서쪽 전면에서 대형수조 2기도 함께 발굴돼 이곳의 용도는 주로 취사와 관련된 시설일 것으로 추정 하게 됐다. 회암사는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왕실과 밀접하게 관계를 유지하며 전국 최대의 가람으로 조영됐던 만큼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이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제사터로, 인천시 기념물이다. 천제암궁지는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제사그릇(제기)과 제사물건(제물)을 준비하던 재궁이 있던 곳이다.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 목은 이색이 지은 시를 쓴 현판이 있었고,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물며 하늘에 제를 지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천제암궁터는 삼단의 석축으로 돼 있으며, 넓이는 70평 정도로 부근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인 금표와 우물들이 남아 있다. ‘여지도서’ 등 옛 문헌에는 ‘천재암’이나 ‘천재궁’으로 표기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다.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었고, 비몸 양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비몸 양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 양식이다. 권주(權鑄)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돼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돼 있다. 건립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년)이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봉천대는 인천 강화군 하점면에 있는 231.3㎡ 규모의 유적건조물로 옛 봉수시설이며, 1995년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봉천대는 봉천산 꼭대기에 설치해 하늘에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빌었던 곳으로, 벽돌을 쌓아올려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사다리꼴 형식을 하고 있다. ‘강도지’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했던 곳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봉화를 켜두는 봉화대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파주 덕은리에서는 20여기의 탁자식 고인돌과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터가 함께 발견됐다. 가장 큰 고인돌의 덮개돌 길이는 3.3m, 너비 1.9m로 조개날돌도끼(양인석부)와 숫돌 등이 나왔다. 그 아래에서는 선사시대 긴 네모꼴의 움집터가 나왔는데 깊이 40∼90㎝, 길이 157㎝, 너비 370㎝에 이른다. 벽을 따라 작은 기둥 구멍이 있고, 화덕자리가 2개가 있다. 벽이 불에 탄 자국과 바닥의 재로 보아 집이 불에 타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긴 네모꼴 집터는 서울 역삼동, 파주 교하리 유적에서도 보이는 형태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화도진지는 인천 동구 화도진공원에 있는 유적건조물로, 1990년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진은 진영(鎭營)을 줄여 부르는 말로 지방의 군사를 관리하던 지방관제의 하나다. 화도진은 조선 후기 자주 나타나는 서구의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장도포대와 논현포대를 관장했다. 화도진의 설치는 인천 항구의 개방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비해 조정에서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만들도록 해 1879년 완성됐다. 그러나 갑오개혁에 따른 군대 관리제도 개혁으로, 진이 철폐되고 건물도 철거됐다. 화도진은 1882년 5월과 6월에 한미수호통상조약과 한영·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1982년 화도진을 그린 ‘화도진도’를 보고 옛 건물을 복원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년)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 12년(1812년)에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 시설인 여장을 둘렀다. 당시의 성문에는 취예루, 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 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됐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있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통사회에서 농악은 크게 세 가지 존재방식을 갖는다. 첫째, 대보름 무렵에 하는 당산굿이나 마당 밟기와 같은 의식과 관련된 농악, 둘째, 두레꾼과 함께 김매기 등에서 치던 두레굿과 같이 노동과 관련된 농악, 셋째, 판굿과 같이 놀이와 관련된 농악이 그것이다. 현재 전승되는 갑비고차농악은 이 중 놀이와 관련된 판굿 형태의 농악이며, 이 안에서 농사일을 놀이로 재현하는 농사굿 놀이가 주 내용을 이룬다. 이런 농사굿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 보이는데 지역적으로 먼 강화에서 비슷한 내용의 농악이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76세에 소백산에서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등과 비교할 만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 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했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인천 서구지역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정조 13년(1789년) 서곶면이라는 방리가 기록돼 남아있다. 그 후로 행정구역 명칭이 서곶으로 개편되면서 지금까지도 긴 역사를 이어오며 소중한 농경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인천 서구의 농경문화의 발달은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서곶들노래’는 인천 서곶지역의 농민들이 옛날부터 모심기와 김매기를 할 때 부르던 소리 농요로 모찌기, 모심기 소리는 꺾음조의 소리로 부드러움을 자랑한다. 매기 소리는 애벌, 두벌, 세벌매기로 나눠져 농군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경쾌한 리듬의 선창의 짧은 장단과 후창의 긴 장단의 교창으로 이뤄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남시 춘궁동에 있는 5층 석탑으로 2단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뒀는데, 남쪽 면이 부서져 있어 그 안쪽으로 커다란 기둥돌이 들여다 보인다. 이 탑의 특징은 탑신부에서 드러난다. 첫층 몸돌이 2단인데, 아랫단을 4개의 네모난 돌로 두고, 그 위에 1장의 돌을 얹어 놓았다. 구조상 불규칙적인 면이 많지만, 각 부분 끝맺음마다 규칙성이 느껴지고, 탑신의 비례도 조화롭다. 지붕돌 모서리의 치켜올려진 정도나 기단을 2단으로 구성한 점 등 통일신라 후기 석탑양식의 전형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붕돌 받침수가 3∼4단으로 줄어든 점이나, 기단 가운데에 새긴 기둥의 수가 줄어든 것 등으로 미뤄 고려 전기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예부터 관혼상제의 4대 의례를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실행해 왔다. 그중 상례의 절차는 전국적으로 비슷하나 지방에 따라 변형됐다. 인천근해 도서지방은 지세가 고르지 못할 뿐 아니라 경기도, 황해도와 인접해 있으며 생활수단도 어업으로 이어가고 있어 상여소리도 경기도, 황해도의 민요와 뱃노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상여소리는 초혼 및 운구, 행상, 산오름과 외나무다리 넘어가기, 가래소리와 회다지소리, 고별소리로 구성된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창대리를 둘러싼 산줄기의 서쪽 사면에 동향으로 자리한 집이다. 조선시대 창대리의 모든 논과 밭을 관리하고 조세를 거둬들이는 박씨 성을 가진 세력가의 집으로 전해졌다. 현재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교당 정법사로 쓰이고 있다. 안채의 부엌을 입식으로 바꾼 것 외에는 다시 지은 흔적이 없다. 가구를 이루는 목재의 상태가 좋고, 목재를 잘 다듬어 사용한 집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됐다. 대략 19세기에 지어진 경기도 지역 중상류 주거층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문화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