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오복서점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수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잠도 아니라는 기쁨이여!”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썼다. 타오르는 장미는 벌써 봄을 전송한다. 이즈음 나는 어반스케치 수강생들과 향교로를 걸으며 카페 시인과 농부까지 산책을 한다. 그냥 눈산책이고 종점 시농에서 스케치를 하는 나들이 코스다. 오랜만에 수강생들과 오복서점에 들렀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조각가 류인전을 보러 갔던 인사동의 모란미술관처럼 긴장감이 있다. 그런데 계단 벽에 ‘5월31일 오복서점은 문을 닫습니다’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자주 이용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내적 쉼터를 잃은 것 같은 허전함이 몰려왔다. 1990년 문을 열었다니 33년째다. 행궁 앞 여민각 건너편에서 시작했는데 광장 조성으로 수용되자 19년 전 지금의 장소로 옮겨온 것이라고 안정철 사장님은 지그시 얘기한다. 아날로그적 책의 유산이 한 시대를 마감하는 느낌이다. 나는 이곳에서 희귀한 시집들을 발견하고 흐뭇한 적이 많았다. 오늘 획득한 누렇게 무르익은 시집 두 권은 이 서점의 마지막 유물이 될 것 같다. 1988년판 김남주의 ‘나의 칼 나의 피’, 고정희의 ‘이 시대의 아벨’ 1984년판이다. 아, 나의 소박한 황금빛 이삭줍기는 봄날의 꿈처럼 지나가는구나.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유달동 로망스

어쩌다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목포의 눈물’은 유달산에 올라가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이난영의 노래와 항구의 우수를 느끼게 하는 근대적 미학이 흐르기 때문이다. 아파트 일색인 수도권의 도시와는 다른 풍정은 나지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기대고 있는 이 도시의 내재율이요 힘이다. 구도심의 남도아리랑이라는 식당에서 홍어삼합에 애탕을 곁들였다. 물론 목포 막걸리 한잔도. 본고장에서 맛보는 정통음식들은 지역의 문화적 에너지를 모두 가져가는 느낌이다. 평화의 소녀상이 보이는 뒤로 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일본 영사관이 있다. 나는 이곳을 몇 번 봤지만, 뒤란에 방공호가 있는 줄은 몰랐다. 긴 굴속으로 들어서자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해 파놓은 방공용 땅굴이 그대로 남아있어 소름이 돋았다. 거리에 내려서자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과 적산가옥들이 즐비한 곳에 예쁜 현대적 카페들이 산뜻하게 들어왔다. 유달동의 로망스, 오늘은 수강생 이영에씨가 그렸다. 내성적이며 잔잔한 그녀는 퀼트, 프랑스자수, 뜨개질 등 수공예에 능하여 모두가 신사임당 같다고 칭찬한다. 그녀의 그림이 더욱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별을 심는 농부-칠보산 도토리 교실

칠보산은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된 다년생 식물 칠보치마의 자생지이며 개구리알을 볼 수 있는 습지를 품고 있다. 또한 산자락 메타세쿼이아 숲과 황구지천을 거느린 그린벨트로 인해 아직 전원풍경이 살아있는 곳이다. 오래전 나는 칠보산 자락에서 도토리 교실을 만났다. 기울어진 낡은 한옥이었다. 이곳의 마을 공동체는 환경운동과 시민농장을 일구며 주민들과 야학까지 하는 사랑방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환경을 주제로 전시를 하기도 했다. 필자도 참여해 본적이 있는 아주 재미있는 마당이었다. 이런 도토리 교실을 15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이가 자작나무라고 불리는 이진욱 선생이다. 그는 대기업에서 중견 관리자로 근무했으나 천성이 자연인이라 사직하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그는 신춘문예 작가이기도 한 시인이다. 수행자이거나 구도자처럼 도시 농부의 길을 가는 그의 미소가 늘 신선하다. 그를 따르는 자연 속 아이들과 도시 농부들과 텃밭을 일구며 생태 글쓰기, 자연물 목공 교실, 숲 생태프로그램도 하며 까망이(흑염소) 몇 마리와 청계 몇 마리와 토끼들과 함께 살아간다. “봄이 오면 땅을 일구고 밤하늘 빛나는 별을 심는다. 아주 먼 곳에서 가져온 오랜 씨앗을 파묻는다”라고 쓴 그의 시집, ‘별을 심는 농부’처럼....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격동의 시기, 대한제국이 독립을 유지하는 방법은 중립국으로 가는 길이었고 그 길에 동반자로 삼은 나라가 벨기에였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중립국을 선언하기도 했으나 이 정책은 일본에 의해 무력으로 짓밟혔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대한제국의 중립국화는 실패하고 말았다. 벨기에 영사관은 1905년 중구 회현동에 있던 것을 1980년 지금의 남현동으로 이전 착공했다고 한다. 신고전주의 양식,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만들어진 유서 깊은 건물이 참으로 아득하다. 11년 전 군산에서 스케치 여행을 할 때 나는 아름다운 옛 군산세관을 보았고 벨기에에서 수입한 적벽돌로 지어졌다는 해설판이 기억났다. 이전한 벨기에 영사관은 내부를 새롭게 꾸몄고 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이라는 명판을 달고 있다. 시각적으로 지루한 화이트 큐브만 바라보다가 이렇게 고색창연하고 아기자기한 방으로 장식된 전시장을 보니 색다른 여유와 품위가 느껴졌다. 전시장 창밖으로 하얀 벚꽃이 꽃비가 돼 먼 시절의 환영처럼 흩날린다. 따스한 봄볕을 들여놓은 전시장은 포근한 나무 복도로 이어진 2층까지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 선생의 웅혼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높은 천장 아래 오래전의 상설 전시처럼 잘 어우러져 고요한 적멸의 조형을 감상시켜 주고 있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목련꽃 필 때

모든 꽃이 일시에 피어났다. 요즘은 순서 없이 피어나 라일락도 벚꽃도 개나리와 진달래와 함께 온 세상을 물들인다. 주말에 잠깐 팔달산과 광교산 길의 벚꽃 구경을 했다. 그냥 지나가 버릴 것만 같아 부랴부랴 한꺼번에 올봄의 꽃들을 한가득 들여놓았다. 봄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목련꽃이다. 벌써 양달의 목련은 노추하게 꽃잎을 모두 떨궈 놓았다. 목련이 지면 왠지 봄이 저무는 것만 같다. 우아하고 풍만한 목련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생명체 중 하나라고 한다. 무려 1억4천만년 전 공룡시대 화석에서도 흔적을 남겼다고 한다. 목련은 백목련과 자목련이 있지만 나는 흐드러진 청순함의 백목련보다 좀 더 세련되고 우아해 보이는 자목련이 좋다. 나는 해마다 상습적으로 목련꽃을 스케치북에 담아 놓는다. 이유 없이 목적 없이 그냥 그리고 싶다. 그리고 봄날엔 늘 마종기 시인의 연가를 되뇌며 흩어지는 꽃잎 향기와 함께 봄을 떠났다. 전송하면서 살고 있네. 죽은 친구는 조용히 찾아와 봄날의 물속에서 귓속말로 속살거리지,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 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 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꽃을 몰래 배우네. (연가9-1)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수원매교동-서흥여인숙

수원시 매교동에 있는 서흥 여인숙이다. 여관보다 한 단계 낮은 게 여인숙이었다. 모텔이나 호텔보다도 그야말로 여행자가 피곤한 짐을 풀고 하룻밤 묵어 가는 순수 숙소의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술만 판다면 옛날의 주막과 비슷한 영역 같은. ‘월세방 있음’ ‘특실완비’라는 간판과 알림 스티커가 더덕더덕 붙어 있는 모습이 사뭇 정겹다. 40년 전 교동으로 처음 이주했을 때부터 봐 왔던 것 같다. 행랑채 안쪽으로 들어가니 하회마을이나 무섬의 고택에서나 볼 수 있는 ㅁ자형 구조의 방이 다닥다닥 마주하고 있었다. 이곳의 특실은 어떠할지 궁금했다. 의외로 방은 남아 있지 않다고 했는데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이 월세살이를 하기 때문이었다. 방문 앞에 신발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이 서정적인 풍경을 오늘은 수강생 한이수씨가 그렸다. 정면 구도로 회화적이면서도 어반스케치적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그녀는 미대를 가지는 못했지만 학창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을 많이 받아 왔다고 한다. 필력과 색채 운용이 보통이 아니다. 늦지 않은 발걸음은 그녀가 즐겁고 행복하게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그 옛날 청춘의 색을, 하얀 도화지 위에 한가득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봄이 오는 길목-진천 농다리

어릴 적 내가 살던 시골길은 긴 냇가를 끼고 있었다. 얼음이 얼면 우리는 겨울 내내 송판에 철사 줄을 매단 스케이트를 만들어 얼음판을 지쳤다. 겨울방학과 봄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오면 책보자기를 어깨에 가로질러 매고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혼자 노래를 불렀다. 시냇물은 졸졸졸졸 고기들은 왔다 갔다 버들가지 한들한들 꾀꼬리는 꾀꼴꾀꼴 노래를 부르며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 생각. 외삼촌 생각. 동심 속에도 옛날이 있고 추억을 그리워했다니. 헤르만 헤세 유년의 이야기처럼. 봄이 흐른다. 봄은 물소리 같다. 진천 세금 천의 농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돌다리라고 한다. 고려 초엽에 축조한 것이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매우 견고하게 놓여 있는데 여러 가지 설화까지 있어 역사성과 농다리라는 미학적 아름다움까지 겸비하고 있다. 또한 돌의 뿌리가 서로 물리도록 한 건 쌓기식 축조 방식은 이 다리가 하나의 건축물이라는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재래식 다리의 종류는 섶다리, 외나무다리, 돌다리, 줄다리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 징검다리라는 말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산골 아이로 자라온 나로서는 징검다리를 참 많이도 건넜다. ‘조오심 조오오심 징검다리 건너던~’ 하고, 긴 머리 소녀라는 노래를 부르던 시절도 건너왔다. 개울마다 얼었던 물이 녹아 눈부신 윤슬을 이루고 있다. 봄은 스프링, 탄력 있게 한 해를 뛰어오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소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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