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자! 미래유산] ⑫의정부 ‘KSC 노동회관’, 미군 부대 한국인 노동자의 애환 품은 집결지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 테죠.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 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년(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 편집자주 반세기 이상 미군 기지가 주둔했던 의정부시. 8개의 부대가 모두 떠나고 최근에는 방치됐던 공여지까지 전부 반환 결정되며 도시재생 훈풍이 불고 있다. 오랫동안 각인돼 있던 군사도시 이미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날이 얼마 안 남은 셈이다. 그나마 미군 부대에서 일했던 한국인 노동자 단체 사무실이 남아 꿋꿋하게 지역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지키자! 미래유산> 열두 번째에 소개할 ‘전국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KSC(이하 KSC 노동회관)’다. ◆ 선정적으로 보이지만 의미 있는 노동회관 KSC 노동회관은 의정부동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미군 기지 캠프 레드클라우드와 캠프 스탠리의 부지 반환 소식으로 떠들썩했던 3월 중순께 찾은 이곳 일대는 도시재생과는 거리가 먼 듯 다소 침체된 분위기였다. 활기없는 상가 거리를 걷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여느 상가 건물과 달리 전면에 단체 로고를 내걸고, 커다란 인물 부조까지 달고 있는데, 여기가 바로 KSC 노동회관이다. 건물 앞에 서서 올려다보니 부조가 꽤 선정적이다. 중요 부위를 나뭇잎으로만 가린 알몸의 남성 세명을 상당히 입체감 있고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누군가는 낯부끄럽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 부조는 이곳의 상징이다. 미군 부대에서 노예 노동으로 피눈물 흘린 한국인 노동자들이 집결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부조에서 양 끝 남성의 손도 주목해야 한다. 숫자 2와 5를 각각 나타내고 있는데, KSC 노동회관 지부 결성일인 1964년 2월 5일의 날짜를 뜻하는 것이다. 당시 지부 결성부터 건물 설립까지 목전에서 지켜본 KSC 노동회관 2대 지부장 김규호(85)씨는 “전란 후 미군 부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의정부뿐만 아니라 판문점, 부산까지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임금도 제대로 못 받고 대우도 형편없으니 모여서 대책 회의할 공간이 필요했다. 1964년에 우리 노조가 결성되면서 4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이곳에 지부 건물을 지어 올렸다. 공사비만 780만 원이 들었다. 당시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한국인 노동자가 뭉쳤다는 것을 알리려고 건물에 노동자상을 새겨 넣고 결성 날짜를 손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체로 표현한 이유에 대해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있다”고 덧붙였다. 제3공화국 시기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면, 노동조합 결성 및 지부 건물을 갖춘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건이다. 그만큼 의정부에서 주한 미군에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의 세력이 매우 컸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형태의 건물은 완공 후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을 테다. 하지만 주한미군 한국인 노조사무실이라는 특성상 정부가 용납한 것으로 보인다. ◆ 인권 짓밟힌 굴곡의 역사 속에 탄생 주한미군 한국인 노동자는 6·25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주둔하며 탄생했다. <주한미군 한국인 노동조합 20년사>에 따르면, 미국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작전업무를 지원할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전투지역에서는 많은 주민이 피난 가고 노동인력 조달은 어려웠다. 1950년 7월 14일 전시 근로 동원법이 공포됐고, 길거리에서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끌고 가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제 징용된 이들을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 corps)’이라 불렀다. 일정한 복무기간도 없이 징용당한 그들은 탄약 및 보급품 수송, 도로건설 및 보수, 전사자 및 부상자 후송 등의 일을 했다. 한국노무단이 작전수행에 이바지한 공로는 컸지만 보상은 물론 국가적 인정도 받지 못했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된 후에도 한국노무단은 101노무단에 편성돼 유엔군의 일을 계속 도왔다. 그들에 대한 처우는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정도로 열악했다. 외래미와 콩나물국 한 사발 지급이 전부였고, 낡은 막사에 집단 수용되며 노예처럼 부려졌다. 근무 중 사망하거나 불구자가 돼도 보상은커녕 길거리에 내던져졌다. 이 같은 참상은 1955년 사회에 알려졌고 ‘징발보상령’과 ‘자유징집제’가 공포됐다. 한국노무단은 자유노동자의 신분이 됐지만 인권과 처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한·미 행정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의 정당한 법 적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군을 상대로 한 노동쟁의는 빈번해졌고, 1959년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연맹’의 창설로 이어졌다. 이후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해산됐다가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이하 외기노조)’으로 명칭을 바꿔 재건됐다. 중앙 노조가 재건되자 지역 노조의 창설도 잇따랐다. 1965년 2월 5일 의정부, 동두천, 파주 지역의 노무단이 결성해 의정부동 현 위치에 설립한 게 바로 ‘전국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KSC’ 지부다. 설립 당시 조합원은 4천여 명(전체 종업원의 약 80%에 해당)에 달했다. 전국에서 세 번째로 큰 지부였다. 이들은 결성 이후 임금 인상과 부당 해고 철회 등 미군에 근무하는 한국인 노동자의 권익보호 활동을 했다. ‘전국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KSC’ 지부에는 현재 총 2천180명의 근로자 중 조합원 1천500명이 남아있다. 이들은 주한 미군이 의정부에서 철수하고 화성, 평택 등으로 이전하자 함께 옮겨 가 근무하고 있다. ◆ 세월의 흔적 역력한 모더니즘 양식 한국노무단의 간절함으로 탄생한 건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전면은 조합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디자인이지만, 전체적으로 기능에 충실한 3층 높이의 모더니즘 양식이다. 규모는 321㎡ 크기의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형태다. 외벽은 세월의 풍화를 맞아 균열이 나고 페인트칠이 벗겨졌다. 건물 뒤편은 더욱 심각하다. 부식된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가 벽면 군데군데 움푹 패여 있다. 현재 1층에는 오토바이 판매 업체가 들어와 사용하고 있다. 그 많던 주한 미군 노동자들이 이제는 의정부에 없는 탓에 사무실 공간을 줄이고 임대를 준 모양이다. 사무실은 지부장 및 간부들이 오가며 2층만 활용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역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곳곳에 금이 가고 60년대 유행하던 나무 벽장도 그대로다. 회의실에는 60년대 미군 부대에서 목수로 근무하던 조합원이 직접 만들었다는 단상도 남아있다. 목재였던 창문만 샤시로 교체했다고 한다. 창문이 변형 됐지만 건물 전체의 구조는 신축 당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보존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노동조합사 및 사회적 가치 큰 문화유산 어두운 시대적 상황에서 건설된 KSC 노동회관. 미군 부대 노동자들의 아픈 역사가 담긴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2014년에는 아름다운 경기건축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이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크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라고 있다.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전쟁 후 외국 기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한인 사회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건 불법이거나 반정부 운동이라 인식됐다. 그 시절 조합을 결성하고 건물을 지은 것은 노동조합사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가 아주 크다. KSC 노동회관 건물은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여인천 전국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KSC 현 지부장은 “많이 낡았지만 전통이 있는 노동회관이라 최대한 보존하려 하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등록문화재 지정에 대해선 조합원 모두와 의논하고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이라고 전했다. 주한 미군 노동자의 역사를 짧게 훑기만 해도 숨찰 정도로 KSC 노동회관 건물에는 격동의 한국사가 응축돼있다. 미군 부대도 한국인 노동자도 지금은 의정부에 없지만, 건물은 역사를 품은 현장을 보존하며 지역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버티고 있다. 머지않아 발생할 재개발 물결 속에 훼손되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⑪남양주 ‘옛 금곡역’, 경춘선 남양주 구간 유일하게 남은 폐역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 테죠.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 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년(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 편집자주 경춘선,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백발 노신사들은 그 옛날 남양주 홍유릉으로 소풍 갈 때 들렸던 기차역을 추억하고, 중년들은 대학 시절 엠티의 명소였던 가평과 청평 등으로 떠났던 기차 여행을 그리워한다. 청춘들을 실어 나르던 완행열차는 멈추고, 경춘선은 복선 전철로 탈바꿈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시간이 그만큼 단축됐지만 낭만의 거리는 예전만 못하다. 그나마 남아있는 몇 안 되는 폐역사가 사진 촬영지나 데이트 코스로 사랑받으며 열차가 다니던 시절 향수를 자극한다. 이 중 경춘선 남양주 구간에 유일하게 남은 폐역 ‘금곡역’은 홍유릉 소풍의 추억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개발 사업으로 이곳마저도 존치 여부가 불투명하다. <지키자! 미래유산> 열한 번째는 경춘선 열차의 흔적을 돌이켜볼 수 있는 ‘옛 금곡역’을 재조명한다. ◆ 교회로 활용되며 보존되고 있는 폐역‘옛 금곡역’은 신 역사(현 전철 금곡역)에서 800m가량 떨어진 금곡동 삼거리에 위치해 있다. 지난 15일 찾은 이곳 일대는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되며 행복주택 건설공사가 한창이어서 인부들과 공사차량으로 인해 번잡했다. 공사장에 가려진 탓에 기차역은 이제 큰 길가에서 보이지 않는다. 도로변과 공사장 사이 야트막한 언덕길 위로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역사 앞에 서니 삼각 지붕에 매달린 하얀색 십자가와 ‘성시교회’라고 적힌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래에는 ‘금곡역’ 간판이 붙어 있다. 폐역이 된 후 교회로 활용되고 있는 모양새다. 폐역 건물은 250㎡ 규모의 단층 박공지붕(책을 엎어놓은 모양의 건축 양식) 형태다. 붉은색 벽돌과 빛바랜 파란색 기와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건물 뒷면에서 보면 굴뚝이 왼쪽에 하나 설치돼 있다. 역사에서 사용하던 창고도 문만 낡았을 뿐 예전 그대로다. 아쉬운 점은 내부 구조다. ‘타는 곳’이라 적힌 출입구로 들어가 보니 대합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교회 예배당과 북 카페로 바뀌어 있었다. 천장과 벽, 창문 모두 개보수해놔 예전 모습은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역사 공용 화장실만 표지판과 함께 그대로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박영환 성시교회 담임목사는 “2010년 폐역 되고 3년 지나서 코레일과 임대계약 맺고 들어왔다. 처음엔 유리창 다 깨져있고 난장판이어서 창문도 수리하고 여기저기 손을 볼 수밖에 없었다. 천장과 벽 개보수는 원래 여기서 오리고깃집을 차리려던 사람이 해놨는데 식당 허가를 못 받아 우리 교회가 인계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행복주택 짓기 시작할 무렵 금곡역도 재개발 구역에 속해 철거 얘기가 나왔다. 그때부터 제가 역사 건물이 보존 가치 있다고 주장했고, 교회를 계속 운영하고 있어서 여기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부가 변형된 건 안타깝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큰 결함이 없고, 교회 덕에 철거되지 않은 채 보존되고 있어 근대유산으로 손색없어 보인다. ◆ 관광 및 교통 요충지의 상징...홍유릉 소풍의 추억금곡역 폐역은 한국 철도사뿐만 아니라 남양주 지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금곡동이 예부터 주요 관광 및 교통 요충지였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남양주시지편찬위원회가 2000년 발행한 <남양주시지>에 따르면 경춘선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9년 우리 민족자본으로 만든 첫 철도다. 조선총독부가 이미 철도가 설치된 철원으로 강원도청을 옮기려 하자, 이에 반발한 춘천의 부자들이 사재를 털어 서울 청량리와 강원도 춘천을 잇는 철도를 만든 것이다. 당시 건설된 철도는 대부분 일제의 자원 수탈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경춘선은 국가 균형 발전을 목적으로 자족적인 노력에 의해 건설됐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렇게 민간 자본으로 개통한 경춘선은 70여 년 동안 수많은 이들의 사연을 담고 산을 따라, 강을 따라 달렸다. 누군가는 이 열차를 타고 춘천으로 데이트를 갔을 테고, 누군가는 군 입대를 하러 가며 이별의 눈물을 삼켰을 테다. 특히 경춘선 관내의 세 번째 역인 금곡역은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근처에 있는 홍유릉 덕에 소풍 명소로 인기를 끌면서 학생들로 연신 북적였다. 주말에도 홍유릉으로 야유회를 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역사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1975년 동아일보에는 홍유릉 이용객이 금곡역 플랫폼에서 술에 취해 춤췄다는 등 관광객들의 향락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금곡동 주민 지병석(80)씨는 "옛날부터 홍유릉이 역사탐방의 명소이자 대표적인 소풍지였다"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보려고 서울에서 학생들과 청춘 남녀들이 많이 왔다. 금곡역에서 기념사진 찍고 추억 남기는 아이들 때문에 맨날 북새통을 이뤘다"고 증언했다. 남양주 주민들에게도 금곡역은 각별한 존재였다. 1939년 7월 20일, 경춘선의 개통에 따라 당시 ‘금곡리역’이라는 이름으로 역사가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과 춘천을 오갈 수 있게 됐다. 교통편이 열악한 동네에 생긴 편리한 대중교통 시설로 주민의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린 셈이다. 그 시절 역사는 기와가 올라가고 단청이 칠해진 조선식 건물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1958년 10월 25일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준공됐다. 역명은 행정구역의 변화로 1993년 7월 1일 금곡리역에서 금곡역으로 변경된 것이다. ◆ 자전거도로에 남겨진 열차 플랫폼과 기관사 전용 계단이처럼 이용객이 많은 경춘선이었기에 복선전철화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99년에 착공한 전철은 2010년 12월 21일에 개통했다. 이전에 무궁화호가 하루 38회 가량 운행했던 것에서 137회로 대폭 증가하며 춘천에서 수도권으로의 출퇴근도 가능해졌다. 덜컹이는 레일 위를 달리던 경춘선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경춘선 남양주 구간에 있던 사릉역과 평내호평역도 철거되고 이제 유일하게 남은 건 금곡역뿐이다. 금곡역 건물 뒤편에 놓여있던 기찻길은 철로를 걷어내고 자전거도로로 재조성됐다. 이마저도 행복 주택 건설공사로 도로 반이 잘려 나가 자전거를 타는 라이더들이 불편해하는 눈치다. 반가운 건 기차를 타고 내렸던 플랫폼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승강장 2개소가 있던 자리와 ‘춘천 방면’, ‘청량리 방면’이라 적힌 색 바랜 안내판이 여기가 선로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폐역에서 춘천 방면을 따라 걷다 보면 자전거도로 우측 갓길에 낡은 계단도 있다. 열차에 탑승하기 위한 기관사 전용 보조계단이다. 계단 주변으로 보호펜스가 설치돼 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열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지만, 금곡역 폐역 건물과 관련 구조물들이 남아 경춘선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도시재생 사업에 원형 보존 불투명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던가. 상권의 쇠퇴와 주거지 노후화로 활력을 상실한 금곡동에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도시재생 개발 구역에 속한 옛 금곡역도 3년 전부터 철거냐 보존이냐 갈림길에 몰려 시달려 왔다. 그동안 성시교회가 활용하고 있어 철거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향후 존치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현재 소유주인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금곡역 폐역 부지를 남양주시에 매각하기 위한 협의를 진행하며, 교회에 퇴거 압박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철도공사 관계자는 “지금 남양주시와 구 금곡역 부지 매각에 대해서 협의 중인 건 맞지만 완전히 결정된 사항은 아니다. 교회가 정식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에서 폐역을 무단 점거하고 있는 상황이라, 내보낸 후 매각 절차를 진행할 수 있어 퇴거 통보를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영환 성시교회 담임목사는 “2013년부터 6년간 임대계약 맺고 지내다 2019년 계약이 만료됐다. 이후 매년 사용료를 내면서 폐역사를 관리하며 활용하고 있는데, 시에서 이곳을 매입하려고 코레일에 저를 빨리 내보내라 압박하는 것 같다. 공문을 여러 차례 받긴 했지만 아무런 타협 없이 강제 퇴거할 순 없다. 우리가 나가고 나면 자전거 박물관을 만든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도 역사 건물 외관 이외에 훼손된 곳이 많은데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 않겠냐”며 퇴거 요청에 응할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남양주시는 금곡역 폐역 부지를 매입해 리모델링 하겠다는 계획이다. 남양주시 관계자는 “종교 단체가 퇴거를 안 해 구체적인 건립부지 기록화 용역 수립을 못하고 있지만 능내역처럼 리모델링 할 예정”이라고 했다. 기자가 입수한 <금곡동 도시재생 뉴딜사업 계획서>에 따르면, 금곡역 폐역은 카페 또는 자전거 라이더들의 쉼터로 활용될 예정이다. 자료에는 “구 금곡역이 역사성이 있는 장소이지만 넓은 부지를 활용해 금곡동과 홍유릉의 콘셉트와 연동되는 브랜딩이 필요하다”고 적시돼 있다. 학계는 리모델링으로 인해 훼손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교수는 "용도는 세월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폐역을 자전거 박물관으로 만들어도 문제 될 건 없다. 다만 질곡의 역사를 가진 서정적 가치가 있는 곳인 만큼 원형 보존은 물론 역사 문화 환경을 테마로 재생되는 게 전제돼야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서 안정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제언했다. 오랜 세월 동네 사람들의 발이자 관광 요충지로써 굴곡진 역사를 보내다가 폐쇄된 구 금곡역. 세월의 흐름이 역력한 낡은 건물과 빛바랜 플랫폼의 팻말까지,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이곳을 현대인들은 아끼고 사랑한다. 너무 빠른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며 안정과 휴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찬란했던 경춘선의 역사와 문화를 우리 후손들이 계승할 수 있도록 원형 보존할 수 있을지, 등록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을지... 산적한 숙제가 남았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⑩여주 ‘폐금광’, 금덩이가 넘쳐났던 황금광 시대의 흔적 (下)

지키자! 미래유산 열 번째는 금 열풍이 대단했던 여주시 금사면의 오래된 산업유산 폐금광에 대해 상하편으로 나눠 조명한다. 상편에서 다룬 소유리 '팔보광산' 갱도에 이어 하편은 상호리 '여수금산'의 갱도를 단독 공개한다. ☞상편 기사 보기 (下)상호리 여수금산 ◆ 소유리-상호리 잇는 갱도...아이들 통학길로 사용 소유리 위쪽에는 산이 높고 지형이 험한 마을상호리가 있다. 먼 옛날 호랑이가 많이 살아 '범실'이라 불렸는데, 사실 이 마을은호랑이보다 금이 더 넘쳐났다고 한다. 금을 채취하던 광산은여수금산이라 불린다. 상호리 여수금산으로 통하는 갱도 위치는 소유리 팔보광산의 갱도보다 소문이 방대해 찾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사찰 뒤편에 있다더라, 축사 뒤 산등성 밑으로 가면 된다 등등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준 방향대로 숲을 헤집고 다녔지만, 입구가 막힌 갱도로 추정되는 곳만 발견될 뿐 멀쩡한 갱도를 찾는데 번번히 실패했다. 우여곡절 끝에 갱도를 직접 가봤다는 금사면 토박이 주민 A씨를 만나 여수금산의 갱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놀라운 건 갱도 입구가 상호리 주민 B씨의 개인 주택 내부 지하실에 있다는 점이다. 오래전 갱도가 있는 터를 구매한 B씨가 갱도 입구를 막지 않고 집을 지어 올린 탓에 이 같은 모습이 됐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도 위치를 잘 모르게 된 이유다. 보존이 되어 다행이지만 이제는 집 주인 외에 그 누구도 자유롭게 갱도를 볼 수 없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집 주인 B씨의 허락을 받아 집안으로 들어가니 1층 우측에 바로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부터는 전기를 연결해 놓지 않아 내려갈수록 깜깜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폰 불빛에 의존해 계단을 꽤 오래 내려가니 굴이 나왔다. 소유리 굴보다 훨씬 크고 넓다. 입구부터 바닥에 물이 고여 있고, 갈수록 물이 차올라 안으로 깊게 들어갈 순 없었다. 금사면지에 따르면 이 굴은 250m 길이로 산 너머 소유리로 연결된다. 주민 A 씨는 지금은 중간에 막혔지만 그전까지는 이 굴을 통해 건너편 소유리 아이들이 상호리로 통학을 했다고 증언했다. 도로가 없던 시절엔 이 갱도가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주민 A씨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간 갱도의 끝은 실제로 소유리 막골(일제강점기 막을 치고 광부들이 살았던 광산촌) 고개에 남아 있었다. 입구에 철문을 달아 막아놨지만 손쉽게 열린다. 지금도 여름철만 되면 근처에 거주하는 농부들이 농산물 저장시설로 이용하며 드나들고 있다고 한다. 갱도 앞은 밭이고, 굴 안에 들어가면 농산물을 쌓아놓는 나무판자가 벽에 세워져 있어 그 흔적이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여수금산은 1865년 영남 지방에서 온 사금부 김모씨가 찾아와 약수가 솟는 암벽 사이에서 많은 황금을 발견하면서 금광 채굴이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전국 3위의 채굴 실적을 올릴 정도로 매우 큰 규모였다. 이 마을은 약 300여 호의 광산촌으로 성황을 이루다가 1967년경 폐광됐다. ◆ 금이 넘쳤던 역사의 한 페이지, 금방아와 전기 발전소 상호리 갱도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알로하가든 이라는 카페가 나온다. 여기도 주목해야 될 것이 카페 부지가 금방아(금을 빻던 곳)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곳 주인 권혁진(79)씨에 의하면 카페 건물 왼쪽에 있는 3층 높이의 원형 건물 자리에서 금제련을 했다. 권 씨는 3층에서부터 금방아가 돌아갔다. 맨 위층에서 굵고 큰 금덩이를 작게 부수어 2층으로 보내고, 다시 기계로 잘게 빻아 1층으로 보낸 다음 수은을 뿌려 금을 채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금이 넘쳐나고 굉장했다. 폐광된 건 금이 없어서가 아니라, 굴이 깊게 들어갈수록 채광비가 많이 들고, 그 시기 수입까지 시작하며 단가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금이 있다고 주장했다. 광산 덕에 1960년대부터 이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고, 전기 발전소는 카페 앞마당에 있었다.권 씨는마을에 금광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는 광부가 천여 명에 이르렀고, 이 광산들의 존재로 금사면 재정은 다른 지역보다 여유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여수시사에는 권 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1953년 전국 주요공장 광산명부에 의하면 여주에 있는 광산의 매장량이 약 4만 톤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다. 그 시절 황금 열풍이 불었던 것도, 마을이 번창하게 된 것도 그만큼 매장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학계 및 전문가 제언 ◆ 등록문화재 및 문화관광자원 활용 가치 높아 산 전체가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고 여러 개의 굴 입구가 있는 금사면 폐금광. 긴 세월에 자연적으로 무너져 닫힌 갱도처럼 남아있는 갱도들도 언제 훼손될지 모른다. 주민들은 방치되고 있는 금사면 금광 갱도를 여주시에서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시켜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소유리 마을이장 박수헌 씨는 금광이 있는 산을 포함해 소유리 땅 대부분 밀양 박씨 종중 소유다. 20년 전부터 미등기 상태로 거주했던 이들이 거의 다 떠나고 마을의 발전이 낙후됐다. 여주시에서 나서서 광명동굴처럼 관광자원 될 수 있도록 힘써줘야 마을이 되살아나지 않겠냐고 호소했다. 다행히 학계와 문화계는 해당 굴이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커 등록문화재는 물론 문화관광자원 활용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평가한다. 지난 2004년 여주 금광을 조사한 조용훈 한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는 남아있는 갱도들은 여주의 금 채굴에 대한 상징적 흔적으로, 역사성과 지역성을 내포하고 있어 등록문화재 가치가 충분한 문화유산이라며 여주시에서 의지를 갖고 용역을 의뢰해 실측 조사 및 정비부터 하고,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게 먼저다. 지정 후 예산을 확보해 금광 전시관 건립 등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지역 관광 측면에서도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이날 동행한 안동희 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역시 갱도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보니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는 판단이 든다며 보존가치가 충분해 보이고, 여주 금광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여주 환경부와 실태조사를 계획해 보겠다고 전했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⑩여주 ‘폐금광’, 금덩이가 넘쳐났던 황금광 시대의 흔적 (上)

금덩이가 탐이 나 몰래 삼킨 광부가 금덩이에 붙은 독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여주시 금사면에서 내려오는 속설이다. 황금광 시대라 불렸던 1930년부터 1970년 사이 동네는 금이 많이 나와 흥성했고,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처럼 금을 둘러싼 소동과 애환도 넘쳤다. 지금도 마을에는 그 시절 우리나라 광업사를 엿볼 수 있는 옛 금광이 남아있다. 소유리 팔보광산과 상호리 여수금산이다. 비록 폐광된 지 오래돼알아보기 어렵지만 갱도 흔적은 또렷하다. 지키자! 미래유산 열 번째는금 열풍이 대단했던 금사면의 오래된 산업유산 폐금광이다. (上)소유리 팔보광산 ◆ 6.25 전쟁 때 마을 주민이 피신했던 갱도 금사면은 예부터 금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 지명도 그래서 금사(金沙)다. 아직도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금사면 북쪽에 위치한 소유리와 상호리에 금광으로 통하는 갱도가 여러 군데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지난 3일 기자는 안동희 여주문화원 사무국장과 함께 소문의 근원지를 방문해 금광 흔적을 찾아 나섰다. 먼저 소유리로 향했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한참을 헤매다 우연히 만난 소유리 마을이장 박수헌(78)씨의 안내로 팔보광산으로 통하는 갱도를 찾을 수 있었다. 위치는 마을 회관 옆길을 따라 소유산으로 약 2km 올라가야 된다. 밀양 박씨 묘역을 지나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 사이에 가려져 있어, 박씨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굴의 형태는 뚜렷이 남아있다.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갱도 안으로 들어가 봤다. 입구는 높이가 약 2m이며, 들어갈수록 크고 높아진다. 빛이 들어오는 약 10m 이후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 박 씨가 준비해온 헤드랜턴과 스마트폰 불빛에 의존한 채 진입했다. 바닥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 운동화가 다 잠길 정도였는데, 그나마 겨울이어서 이 정도라 한다. 안으로 150m쯤 들어가자 굴의 높이가 약 5m로 부쩍 높아졌고, 천장과 벽에는 박쥐들이 가득 붙어있다. 주변에는 나무 지지대 등 금 채취와 관련한 흔적이 남아있다. 랜턴을 비추다 보니 군데군데 노란빛이 도는 돌도 눈에 들어왔다. 금일 수도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던 박 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금 캐러 다니시고, 난 어릴 때 여기 와서 돌 쌓으며 놀고 그랬어. 그때 이 굴에서 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어른들이 똥구덩이라고 불렀다니까. 금 욕심나서 금덩어리를 먹고, 집에 와서 이틀 뒤에 대변 봐서 금을 훔친 광부들도 있었다며 팔보광산에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동굴 벽 양옆에 움푹 파인 곳도 여러 개 보였다.박 씨는6.25 전쟁 때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해 생활한 흔적이라고 했다.몇 발짝 더 걸으니 앞이 막혀있다. 세월이 흘러 흙과 돌이 무너져 내려 막힌 탓인지이 갱도의 길이는 약 200m로 길지는 않다. ◆ 팔보광산의 두 번째 갱도 그리고 복대기 터 이곳을 빠져나와 팔보광산으로 통하는 또 다른 갱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두 번째 갱도는 마을회관에서 멀지 않은 아시바 야적장 부근에 있다. 굴 입구에는 각종 자재가 쌓여있어 들어갈 수 없었지만 높이는 약 2m로 앞서 본 갱도와 비슷하다.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이 갱도가 남아있는 굴 중 가장 크고,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길다고 추측한다. 박 씨에 의하면 야적장 자리는 원래 복대기(금을 채취하고 남은 광석 찌꺼기)가 있었던 곳이다. 바로 앞 연못은 금을 제련하는데 사용했고, 마을회관 옆에 금광 관리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향토지 상호리지에는 1939년 찍은 이 관리사무소 사진이 실려 있지만 지금은 잔디가 깔려 있고 언제 헐렸는지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처럼 갱도의 흔적은 2곳이나 뚜렷하게 남아있지만, 현재 금광까지는 확인하기 어려워 팔보광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다. 여주군(현 여주시)에서 1989년 발간한 여주군지를 살펴보면 1970년 팔보광산(삼정광업소) 금 생산량은 150t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팔보광산이 언제까지 운영됐는지에 대한 자료도 정확하지 않다. 여주문화원에서 1998년 발행한 금사면지에는 1932년 개광되었고, 6.25 이후 폐광됐다고 간략하게 적혀있을 뿐이다.하편에 계속..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⑨의왕 ‘한국한센복지협회’, 경기도 마지막 남은 한센인 입원시설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 테죠.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 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년(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 편집자주 나병 혹은 문둥병으로 불렸던 ‘한센병’. 과거 사회적 편견으로 인권유린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이 질병이 언제부터인가 일반인들에게 점점 잊히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한센병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곳이 있다. 의왕시 오전동에 위치한 ‘사단법인 한국한센복지협회’다. 경기도에 유일하게 남은 한센인 입원시설을 갖춘 특수의료기관이라 환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곳인데, 이제는 50년 가까이 머물렀던 터에서 떠나야 할 위기에 처했다. <지키자! 미래유산> 아홉 번째는 한국한센복지협회에 얽힌 회환의 역사를 돌아본다. ◆ 일제강점기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가 모태 지난 17일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한국한센복지협회를 찾았다. 이곳은 모락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성 라자로 마을의 초입에 있다. 정문에 들어서니 입원실이 바로 보였고 그 위에 병원과 협회 사무실로 사용되는 본관이 나왔다. 병원은 한센병의 주 진료과목인 피부과와 성형외과, 치과, 정형외과 진료가 통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한국한센복지협회의 뿌리는 1928년 4월에 설립된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朝鮮癩病根絶策硏究會)’다. 본관 건물 2층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가 이곳의 모태임을 알리는 취지문이 붙어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1928년 나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 사회적 격리로 병균을 방지하고 민중 보건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 시국에 조선총독부가 재정 부족을 이유로 나병 환자들에 대한 시설 확충에 난색을 표하자, 조선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구라사업(나병 환자를 돕는 활동) 단체가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다. 당시 조선의 나병 환자는 1만 명이 넘었으나, 이들을 치료하고 돌볼 수용 시설은 전국에 3~4곳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외국인 선교사 등이 설립한 시설까지 다 합해도 그 많은 환자를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가 발족했고, 앞장섰던 인물은 최흥종 목사다. 취지문에 적힌 위원은 모두 38명이다. 명단을 들여다보면 윤치호, 안재홍, 송진우 등 당대의 각계 명망가가 상당수 눈에 띈다. 이들은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전국 한센병 환자를 격리할 대규모 수용소 건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순탄치 못했다. <사랑과 봉사로 이어 온 한국한센복지협회 60년사>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선교자들과 조선인들의 구라사업을 못마땅하게 여겨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의 모금운동을 방해하는 한편 1932년 ‘조선나예방협회’를 조직해 소록도를 세계에서 가장 큰 한센 시설로 만들고 환자들을 강제 격리시켰다. 결국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는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해방 후 1948년 9월 대한나예방협회로 계승되었다가, 1956년 10월 대한나협회로 개칭했다. 이후 1976년 9월 현재의 부지에 재단법인 한국나병연구원을 설립하고, 1982년 4월 한국나병연구원을 흡수·통합했다가 1984년 1월 대한나관리협회로 이름을 바꿨다. 오늘날의 한국한센복지협회 명칭은 2000년 7월부터 사용했다. 나병을 한센병으로 고쳐 부르기로 한 해가 2000년이다. ◆ 성 라자로 마을에 기틀을 잡은 사연 숱한 변화를 겪은 한국한센복지협회가 현재 위치에 기틀을 잡은 건 ‘나환자의 대부’로 불렸던 이경재 신부 덕분이다. 이경재 신부는 1952년 한국 최초 천주교 나환자 복지시설인 성 라자로 마을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헌신적으로 한센인들의 터전을 마련한 사제다. 그는 1975년 4월 12일 보건사회부에서 성 라자로 내의 부지 11,484㎡를 한국한센복지협회(당시 대한나협회)에 50년간 무상 임대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한센인 복지에 큰 보탬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건물은 ‘일본선박진흥회’의 도움으로 세워졌다. 본관 입구 동판에는 그 사실을 알리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 연구원은 우리나라 나사업을 돕기 위하여 일본선박진흥회가 정부에 기증한 기금으로 건립되었으며, 일부 의료 시설은 일본국내 다수 독지가의 기금으로 설치된 것임. 1976년 9월” 일본선박진흥회는 ‘일본재단’의 전신이다. 일본재단은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설립한 극우단체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한국의 한센병 관련 지원에 상당히 힘을 쏟았는데, 한국한센복지협회 건립 비용으로만 1억 5천만 엔을 제공했다. 건물 기공은 1975년 12월 9일이며, 준공은 1976년 9월 24일이다. 준공식에는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석해 기념식수를 했다. 이후 현 일본재단의 회장 사사카와 요헤이(笹川陽平, 사사카와 료이치 아들)가 방문해 이를 알리는 표지석이 협회 마당의 해당 나무 앞에 놓여 있다. 협회 직원에 따르면 원래는 나무로 만들어진 기념비였으나, 90년대 후반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최근 석재로 바꿔놓은 것이라 한다. ◆ 한센인의 고통과 시련의 삶이 녹아있는 시설 협회는 2층 콘크리트 건물로 된 본관과 병동(입원실), 교육관, 기숙사, 연구실 등 총 4,104㎡ 규모의 시설을 갖췄다. 먼저 본관과 병동은 각각 입구 정면에서 보면 긴 장방형의 개별 건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본관과 ‘ㄷ’ 형태의 병동이 북두칠성 모양처럼 이어져 있다. 창문은 수평으로 길게 배열돼 있고, 현관 포치(돌출된 입구)는 사각기둥이 지지하는 보편적인 구조다. 외벽은 새로 페인트칠해 깨끗해 보이지만 내벽 곳곳에 금이 가는 등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병동은 경기도에 유일하게 남은 한센인 입원 시설이다. 29개의 병상을 운영하고 있고, 지금은 평균연령 80세인 한센병 환자 7명이 입원해 있다. 나균 배양하는 연구시설도 함께 붙어있는데 건물 외관을 보면 기다란 굴뚝이 눈에 띈다. 굴뚝과 연결된 곳으로 가보면 소각장도 있다. 몇몇의 직원은 환자복을 태우는 용도라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과거 병동 내 난방 시설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본관 뒤편으로 가면 ‘평화개발기념관’ 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이 있다. 연구원과 직원들이 생활하던 기숙사로 방 5개와 화장실 1개를 갖추고 있다. 현재는 이용자가 없는 빈 건물로 굳게 닫혀있다. 이 건물에도 기념 동판이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축사는 세계종교적평화부의 평화개발기근의 취지에 찬동하여 일본국 송록신도대화산(松綠神道大和山) 신도가 매월 18일을 평화예방일로 정하여 일식을 결하고 일욕을 물리쳐서 헌금한 것으로 건설된 것이다. 1978년 9월.” 위 내용을 보면 기숙사 건물은 협회 준공식 2년 후 ‘송록신도대화산’이라는 일본 종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따로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협회 건물들을 건립할 무렵 한국의 재정 여건 상 일본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기숙사에서 좌측 아래로 내려가면 서고 및 한센병 교육 장소로 쓰이는 교육관이 나온다. 이 건물에서 주목할 점은 외부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은밀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교육관 입구에서 왼쪽 뒤편으로 돌아가면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스산한 느낌을 주는 계단을 내려가면 쇠문이 달린 방 2개가 나란히 있다. 쇠창살이 둘러쳐져 있는 창과 변기를 갖추고 있는 공간은 마치 교도소의 독방을 연상시킨다. 김영선 한국한센복지협회 전략기획부 팀장은 “부랑아 한센인이나 문제 있는 한센인을 강제 수용하던 시설로 알고 있다”며 “교도관도 실제로 근무를 했다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한센복지협회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시절 한국의 한센인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짐작게 해 준다. ◆ 2025년 무상임대 계약 만료에 부지 이전 위기 교육관과 기숙사 사이 정원에는 나병 퇴치와 예방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83년 건립한 ‘구라탑(求癩塔)’과 김도일 한국나병연구원 초대원장의 흉상이 나란히 있다. 이렇듯 한국한센복지협회 모든 장소에는 한센인의 역사가 짙게 새겨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협회는 이곳을 떠나야 할 위기에 처했다. 오는 2025년 4월이면 이경재 신부와 맺은 무상임대 계약이 만료되기 때문이다. 부지 소유주인 천주교 수원교구는 1988년부터 2009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보건복지부를 통해 부지 반환을 요구해 왔다. 이에 협회 측은 이전을 하려 노력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1996년 국비 23억 원을 확보해 충북 청원군 소재 부지에 이전을 추진했으나 지역주민 반대로 무산돼 국비를 반납했고, 1998년에는 현 부지 인근 사유지를 매입해 건물 신축을 추진했으나 천주교 수원교구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2003년 법원 경매 물건으로 나온 광주시 소재 병원에 입찰을 시도했으나 보유 재원 부족으로 무산됐다. 한국한센복지협회 관계자는 “소유주가 이미 오래전부터 부지에서 나가달라 공문을 보내며 압박하고 있지만 갈 곳이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이 현안에 대해 적합한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협회에선 보건복지부와 긴밀하게 논의 중이다. 또 한센인의 복지·환경 개선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국민권익위원회와의 업무공조를 추진하고, 대책 마련을 위한 창구를 범정부적으로 넓혀가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협회가 이전하게 되면 남은 건물들은 훼손될 것이 자명하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부지 반환 요청서에 성당을 새로 짓는 등 교세 확장에 따른 종교 용도로 활용하고자 이전이 필요함을 밝혔기 때문이다. 학계에선 한국한센복지협회 건물 대부분 기능 위주로 간결하게 지어지고, 모더니즘 양식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어 근대 건축물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특히 한센인의 역사가 배어 있는 공간이기에 보전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교수는 “건축적 가치는 별개라 하더라도 일본의 지원을 받아 한센병 퇴치에 힘썼던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장소를 그대로 지워서는 안 된다. 뜻을 같이 할 신부님을 찾아보거나 보전 방안 모색이 시급하다”고 했다. 한때 10만 명에 육박했던 국내 한센병 환자는 2021년 말 기준 8천574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한국한센복지협회에 입원하는 환자도 2021년 기준 16명에서 7명으로 2배 이상 줄었다. 환자 대부분이 고령이어서,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한센병은 역사 속의 질병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한센인들의 치료를 돕고 사회 복귀를 도모하려는 노고가 서린 장소를 지킬 수 있도록 방도를 강구해야 할 시점이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⑧수원 ‘구 농촌진흥청’, 정조대왕 뜻을 계승한 근대농업 발상지

수원을 농업기술 메카로 자리매김 시킨 농촌진흥청. 비록 2014년 전주로 이전했지만, 사용했던 터와 건물들은 권선구 서둔동에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새 주인들이 들어와 여기저기 손보고, 문화재 가치가 있는 근대건축물인 구 도서관까지 철거해 위용이 예전만 못하다. 본관과 남은 건물도 언제 훼손될지 모른다. 지키자! 미래유산 여덟 번째는 정조시대부터 대한제국 시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온 한국 농업의 산실 구 농촌진흥청을 재조명한다. ◆ 정조대왕의 농업개혁 정신이 깃든 터 지난 10일 한때 수원을 상징했던 구 농촌진흥청을 찾았다. 정문에 들어서니 본관 건물이 바로 보였다. 2000년대 초반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농업은 생명 농촌은 미래라고 적힌 캐치프레이즈가 그대로 적혀있지만, 지금은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가 사용하고 있고 일부 공간은 농업기술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농진청의 역사는 정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원문화원에서 2019년 발행한 수원의 옛 건물과 문화에 따르면 정조대왕(조선 제22대)은 재위 2년째에 국가 운영의 근간인 농사가 가뭄 때문에 날로 피폐해지는 현실을 걱정하며 신하들에게 해결책을 물었다. 사람의 근력으로 토지에서 생산되는 재물을 늘어나게 하는 것이 농사다. 농사는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국가의 경제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니, 농사에 대한 의견을 올려라 이 같은 질문에 다산 정약용이 내놓은 답은 농책(農策)이다. 정조는 농책을 토대로 1799년 수원화성의 서쪽에 백성들이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축만제(祝萬堤)를 축조했다. 축만제는 여기산(麗妓山) 아래 있는 인공호수로, 서호(西湖)라고도 불린다. 축만제가 조성된 후 백성들은 가뭄이 들어도 안정된 농업을 영위할 수 있었다. 현재는 시민들의 쉼터인 서호공원으로 이용되고 있고 옆에 농진청이 자리하고 있다. 농진청은 바로 정조의 호호부실(戶戶富實) 꿈이 담긴 농업개혁 뜻을 바로 그 자리에서 계승한 셈이다. 축만제는 2016년 국제배수위원회(ICID)에서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정조대왕의 농업정책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8년 전 농진청이 전주로 이전해 건물만 남았지만 한국 농업의 뿌리로서 상징성은 변함없다. ◆ 대한제국 시기 설치된 권업모범장서 근대 농업 새출발 대한제국 시기에는 이곳에 권업모범장을 창설해 농사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어 왔고, 이후 농촌진흥청이 설치돼 그 맥을 이어왔다. 농촌진흥 50년사에 따르면, 1884년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종합농업시험장인 농무목축시험장이 서울 인근에 존재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일제 통감부는 우리나라 농업구조를 개편시켰다. 고종 43년인 1906년 4월 통감부권업모범장관제를 발표하고, 같은 해 6월 15일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수원군 일형면 서둔리였던 이곳에 권업모범장(초대장장 혼다 신스케)이라 명칭한 농업기관을 창설했다. 축만제가 있는 너른 들판을 낀 이곳은 정조대왕 이래 한반도 전통농업의 요람 구실을 했던 터여서 일제 역시 이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나보다. 이렇듯 한국 근대농업은 역사지리적 특징을 매개로 같은 장소에서 새 출발 한 셈이다. 일제는 당시 농민들에게 농사개량이라고 주입시켰지만 사실은 농업을 일본 자본주의 체제로 확고하게 편입시키기 위한 것으로써 일본의 농법을 그대로 이식했다. 통감부권업모범장관제에는 권업모범장은 우리나라 농업의 발달개량을 위한 시험, 물산의 조사와 농업상에 필요한 물료의 분석과 감정, 종묘 등의 배부 등을 관장 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권업모범장은 시험조사보다는 지도권장에 중점을 두고 운영됐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다시 조선총독부 산하가 됐다. 학자들은 권업모범장이 우리나라 농업발전에 기여한 바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 수행에 있어서 첨병 구실을 한 기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곳이 권업모범장이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현재 본관 앞마당 정원에 보존돼 있다. 표석은 세 개다. 가장 왼쪽 기단 위에 대를 세운 직육면체 화강석과 가운데 마름모 기둥에는 한자로 勸業模範場(권업모범장)이라 음각돼 있다. 1906년 권업모범장이 세워질 때 길 가 쪽으로 설치되었던 표석인 듯하다. 1990년 농진청 국립식량과학원 답작(논농사)포장 공사현장에서 출토됐다. 맨 오른쪽은 표석이라기보다는 흉상을 세웠던 모양을 하고 있다. 1998년 농진청 공사현장에서 출토됐는데 얼굴 형태는 없이 글자가 적힌 기둥만 발견됐다. 현재의 직원들은 권업모범장 초대장장의 흉상이 있었던 동상이라 짐작하고 있다. 권업모범장은 1929년 9월 농사시험장으로 개칭됐고, 일제 말기인 1944년 농업시험장으로 개편했다. 해방 후인 1946년엔 미 군정청에 소속된 중앙농사시험장이 되었다가, 1957년엔 농사원이 발족했다. 농촌진흥청이 된 것은 1962년 4월 1일이다. 이처럼 이름과 명칭은 숱한 변화를 겪었다. 기구와 조직도 많이 바뀌었으나, 한국 농업의 근대화와 과학적 발전을 꾀한다는 기본 목적만큼은 권업모범장 시절 이래 한결같았다. 권업모범장 표석은 이 모든 과정을 말없이 지켜봤을 것이다. ◆ 역사성건축성 뛰어난 본관과 구 농사시험장 몇몇의 농진청 직원들은 본관이 권업모범장이 시작된 자리라 추정하고 있다. 본관 신축은 1958년 유엔계발계획(UNDP)의 한국농업진흥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당시 명칭으로는 농사원이다. 전체 공사는 1959년 착공해 1962년 완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본관은 김정수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의 설계로 1961년 10월에 준공됐다. 건물 규모는 6,285㎡다. 원래는 3,104㎡로 현재 보다 작게 지어졌으나 나중에 증축했다. 1962년 완공 후 사진과 대조해 보면 좌우 양측이 증축된 것을 알 수 있다. 좌우로 길게 지어진 본관 건물은 학교 건물을 연상시킨다. 정문으로 진입해 앞면을 보면 2층 건물로 보이지만 뒤에서 보면 지하 1층이 더 있는 총 3층의 건물이다. 현관 포치(돌출된 입구)는 가느다란 기둥 6개가 지지하는 구조다. 포치 상부는 T자형의 얇은 지붕이 길게 덮여 있다. 흰색으로 길게 이어진 수평 벽면에 수직으로 긴 유리창이 건물 끝에서 끝까지 이어져있다. 학자들은 이 건물이 근대건축이 갖춰야 할 몇 가지 원칙 중 평활한 입면(외벽), 수평으로 긴 창이라는 조항을 충실히 실행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문 옆에는 농진중앙회와 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라는 현판이 붙은 적벽돌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현재 농진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건립됐으며, 1944년 농사시험장 종합분석실로 사용됐다. 이후 세종사업단이 이용했다. 규모 649㎡의 2층으로 된 이 건물은 농진청 담장 쪽에 가까이 위치해 있고 현관이 외부 도로 쪽을 향해있다. 전면을 조적조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형미를 살리고 흰색 칠을 해 놓았으나, 옆면과 뒷면은 한눈에 붉은 벽돌임을 알 수 있다. 외벽 상단을 살펴보면 굴뚝이 뒷면에 두 개, 옆면에 하나 설치돼 있다. 학계는 중앙정부가 보유한 시설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의 일제강점기 건물로 역사적 보존가치가 크다고 평가한다. ◆ 농진청 구 농사시험장 등록문화재 지정 추진 본관 오른쪽에도 한국 근대건축사의 대표 건축물로 평가받았던 1960년대 건물 옛 도서관이 있었다. 그러나 2019년 10월 14일 철거되고 그 자리는 지금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철거 후 학계와 정계에서는 근대 문화유산 일부가 허무하게 사라진 걸 크게 아쉬워하며, 가치를 몰라보고 없앤 농진청을 강하게 질타했다. 더불어 남은 본관과 구 농사시험장 건물마저 철거될까 우려하고 있다. 안국진 경기도 문화재위원(수원시정연구원 박사)은 농업의 본고장에 농진청 시설이 남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가치가 있다. 당시 엘리트주의라고 하는 우리 건축계를 이끌었던 초창기 건축가의 작품성도 여기 녹아 있다. 국가등록문화재로도 손색이 없기 때문에 농진청이 이를 인지하고 보존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일침했다. 이에 대해 지난 15일 농촌진흥청 측은 구 농사시험장 건물에 대해선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중부작물부 업무시설로 사용하고 있는 본관동 건물은 문화재 지정 시 시설 개보수 등의 어려움이 있어 지금처럼 보존할 예정이라고 공식적인 답변을 내놨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⑦화성 ‘남양고등학교’, 전쟁 통에 주민이 돌을 날라 지은 교육시설

화성시 남양읍에는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돌을 날라 손수 지은 교육기관이 있다. 바로 남양고등학교다. 교육의 불모지였던 동네에 건립된 첫 공립학교였으며, 지금도 당시 본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역 정서의 뿌리가 된 이곳이 이제는 노후되어 개축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키자! 미래유산 일곱 번째는 훼손 위기에 처한 남양고 옛 본관을 재조명한다. ◆ 배움의 집념이 탄생시킨 돌교실 지난 7일 남양고를 찾아 남양읍 교육 역사의 발자취를 들여다봤다. 여느 학교처럼 3~4층 높이의 '一 자형' 교실 건물과 기숙사, 체육관 등이 널찍널찍 자리 잡은 모습이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학교 풍경을 보다 보면, 현대식 교실 앞 중앙에 658㎡ 크기의 오래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남양고의 보물, 옛 본관이다. 돌로 지어져 돌교실이라 불리던 본관 건물에서 남양고의 역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기록은 많지 않다. 준공 표지판마저없어 착공일과 완공일도 알 수 없다. 한국전쟁 때 지어졌다는 사실만 중견 관리자나 알고 있는 정도다. 교내에서는 본관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지만, 다행히 공사에 참여했던 주민이 근처에 살고 있어 만날 수 있었다.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본관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지어졌다. 홍영표(82남양3리)씨는6.25 전쟁나고 여기 일대 교육시설이 아예 없었어. 그때 면장이 정영덕씨 였는데 그 양반이 학교를 설립하자고 마을 사람을 불러 모은 거야. 이 동네 저 동네 어른이고 학생이고 죄다 부역으로 가서 학교 건설에 참여하게 된 거지. 신남리에 있는 석산에 지게 지고 가서 돌을 날라 지었거든. 공사는 몇 년 걸렸어. 말도 마. 나도 아버지랑 가서 돌 날랐는데 엄청 힘들었어. 내가 열세살때쯤이었을 거야라며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홍 씨가 언급한 면장은 남양고 설립자와 일치한다. 정문 오른편에는 설립자를 기리는 '송호 정영덕 선생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남양면장으로 활동하면서 주민들과 협심해 학교를 지은 정영덕에 관한 이야기는 남양 중고등학교 50년사에도 기록돼있다. 내용에 따르면 1950년 3월 31일 정영덕은 사립학교를 세우기 위해 역원을 구성했으나, 재단의 열악성 때문에 공립학교인 남양고등공민학교(중학교 다닐 시기를 놓친 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칠 건물이 없어 인근 다른 기관 건물을 차용해 운영했다. 같은 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지만 정영덕은 교육열이 더욱 불타올라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제대로 된 학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전쟁 와중에도 주민들은 동네에 학교 건물이 생긴다는 기쁨에 한마음 한뜻이 되어 흙 한짐, 돌 한짐씩 날라 초창기 석조 건물(본관)을 짓는데 공헌했다. 완공 후1953년 4월 22일 남양중학교로 개교했다. 남양고등공민학교 학생 187명(2학년 147명, 3학년 40명)을 편입시키고, 1학년 120명을 새로 모집해 총 307명이 입학했다. 당시에는 서신, 송산, 마도, 비봉, 팔탄, 장안 지역에서 모두 남양으로 중등교육을 받으러 왔다. 이후 학교로서의 면모를 점차적으로 갖추어 나가자 1954년 1월 23일 이 학교는 다시 남양고등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개교는 같은 해 4월 9일이다. 전쟁의 참혹함과 절망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남양 지역 주민에게 남양고는 희망 그 자체였을 터다. 당장 내일의 생사도 불확실한 와중에 왜 그리 학업에 매달렸을까 싶겠지만, 생존을 위한 처절하고도 매우 현실적인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단정하고 견고한 고전주의 건축양식 주민의 땀방울로 탄생한 본관 외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돌의 질감이 그대로 보인다. 형태는 운동장을 마주한 긴 장방형의 나지막한 단층 건물이다. 내부는 후면에 복도를 둔 편복도식으로,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6개의 공간을 배열했다. 이 공간은 설립 초창기 307명의 학생이 교실로 사용했을 테지만 지금은 행정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관 포치(돌출된 입구)는 원기둥 2개와 사각기둥 2개가 지지하는 별도 구조다. 포치 상부에는 페디먼트(삼각형으로 된 박공벽)로 장식했다. 창문은 수직으로 긴 오르내리창이다. 원래는 목재였으나 알루미늄 새시 창으로 바꾸고 철망을 달았다. 외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연통 기둥 7개와 하단에 방형의 환기구 구멍이 12개가 있다. 마룻바닥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통풍을 위해 뚫어놓은 것으로 보인다.지붕은 일식 평기와 형태지만 90년대 개보수했다고 한다. 곳곳에 금이 가고 지붕과 창문 등 일부가 변형되었지만 건물 전체의 구조는 신축 당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단정한 기둥이 반복되며 대칭을 이루어 질서정연한 고전주의 양식을 당대 사정에 맞게 절충했다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개축 논란에 동문회 반발 70년간 남양읍 주민들에게 배움의 터전이 된 남양고 옛 본관이 최근에는 개축하자는 움직임이 있어 논란이 됐다. 발단은 지난해 5월 교육청이 추진하는 그린 스마트 미래학교에 선정되면서다. 그린 스마트 미래학교는 지은 지 40년 이상 된 노후 학교를 개축 또는 리모델링하는 사업이다. 2020년 학교 측은 본관을 비롯한 4층짜리 동관 교실 건물 등 안전진단 결과 E등급(즉각 사용 금지하고 보강 또는 개축 필요)을 받자 해당 건물을 폐쇄했다. 개축 공사 기간 학생들이 임시로 사용할 모듈러 교실도 설치한 상태다. 이를 알게 된 학교 동문회에서 본관은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양고 1회 졸업생이자 총동문회장 한성민(87)씨는 학생들과 주민들이 2년 넘게 지게 지고 돌을 날라 직접 지은 건물인데, 그걸 없앤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건축적 가치는 별개로 하더라도 힘든 역사의 고비를 넘어 새 역사가 시작된 의미 깊은 장소다. 동문들도 본관 건물을 자랑스러워하며 아낀다. 꼭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 측에서도 학교를 방문해 본관 건물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상황이 이러하자 개축 대신 리모델링하는 방향으로 변경됐다. 김종성 남양고등학교 교감은 사실 본관을 개축해 교사동으로 만드는 것을 희망했었는데, 문화적 가치가 있다는 의견에 따라 경기도교육청에서 리모델링으로 결정해 진행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 의견과 동문회의 반대가 이 건물을 살려낸 셈이다. 하지만 리모델링을 할 경우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자명하다. 한번 훼손되면 복원도 어려워 전문가도 이를 우려하고 있다. 안국진 경기도 문화재위원(수원시정연구원 박사)은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잘 남아있는 건축 요소들이 훼손되면 추후 복원 및 문화재 지정은 어려워진다. 어떤 방식으로 리모델링이 진행될지 모르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먼저 문화재 등록 신청을 통해 문화재위원회의 의견부터 들어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존치 시킬 부위와 수리할 부분 등 세세한 방침을 주기 때문에 훼손 시키지 않는 선에서 보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남양고등학교 옛 본관은 향토사적으로, 교육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아 보인다. 전쟁 당시 정부가 학교 재건에 투입할 여력이 없는 상태에서 주민들이 마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곧 닥칠 훼손가능성을 예방해야 한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⑥이천 ‘공동우물’, 주민 이야기가 샘솟던 동네 방송국

어느 노인이 집 근처에 물이 잘 나오는 우물이 있어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되자 길손이 들끓었다. 이를 귀찮게 여긴 노인이 동냥 온 스님에게 길손이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우물을 메우라고 했다. 노인이 그대로 했더니 살림도 망해버렸다. 이천시에서 내려오는 전래동화 이상한 우물의 내용이다. 우물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를 교훈 삼듯 주민들은 지금도 마을의 공동우물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특히 설성면에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관리하며고사까지지냈던 공동우물 두 개가 있다. 예부터 없어서는 안 될 생명수이자 빨래터로, 그리고 소통과 만남의 장소로 마을 주민의 삶에 녹아든 오래된 생활유산 공동우물을 들여다보며 지키자! 미래유산 여섯 번째 여정을 시작한다. 장천3리 찬샘물 ◆ 유배된 사헌부 장령 유승조가 이용한 우물 눈이 내리고 한파특보가 발효된 지난 19일, 한천(우리말 지명 찬샘골)으로 불리던 장천3리를 찾았다. 마을에 도착하니 입구 길가에 보호수로 지정된 커다란 향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올해 수령 330년 된 이 나무 바로 아래는 마을의 옛 이름을 딴 우물 찬샘물이 있다. 찬샘물은 폭길이 모두 약 1.6m, 깊이 3m인 방형평면 형태의 석조우물이다. 슬레이트 지붕이 덮여있고 주변에 칸막이를 둘러서 정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우물은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샘물이라고 알려졌다. 이를 증명하듯 영하의 날씨에 주변 저수지가 꽁꽁 얼어붙은 순간에도 우물물은 얼지 않았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진녹색 물이끼가 가득하다. 해마다 물을 퍼내고 청소한다고 하더니 한참 된 모양이다. 우물 뒤편 골목에 사는 강병예(88)씨는 저래 봬도 깨끗한 물이여. 스물세 살에 여기로 시집와서 여태 쓰고 있어. 다른 집은 상수도 쓰지만 난 우물물이 좋더라고. 작년인가 우리 아들이 마을 남자들이랑 기름 사다가 양수기로 진일 퍼내고 약 넣고 청소했어. 바위 속에서 나오는 물이 워낙 많아서 물이끼도 엄청 껴. 날이 풀려야 또 청소하지.라며 현재도 사용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찬샘물 곁에는 우물의 역사를 기록한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유적비를 살펴보면 연산군 때 이곳으로 유배되었던 유승조가 이용한 우물임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90년 전 연산 10년 갑자(1504년) 연산군의 음란한 정치는 백성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이 포악한 정치에 항거한 선비가 있었으니 사헌부 장령 유승조였다. 그의 맵고 매서운 상소는 연산군의 미움을 사두 번이나 이곳 찬샘골로 유배되었다. 불의는 망하고 정의에 횃불은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중종이 등극하니 사면되어 중용되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칠서를 언해하여 후학을 훈육하고 성리학을 후세에 남기었도다. 이 나무와 우물은 유배 당시 충의와 청아함을 자랑함이다. 이 우물은 사방 5m의 넓은 암반에서 솟는 물을 바가지로 떠서 식수로 사용되어오다, 1935년 현재의 모습으로 부락민이 축조하였고 암반이 깊게 파여진 것은 1950년 6월 25일 사변시 장천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삼천여 명의 피난민의 두레박에 의해 파였으며, 이 물은 차고 맑아 약수로도 널리 알려졌고 그래서 부락의 지명도 한천곡으로 불리고 있으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옛날부터 우물의 치성제를 매년 정월초에 부락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여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518년이나 된우물이다. 유승조의 후손들이 최근까지도 이곳에 살았으며, 찬샘물을 신성하게 여겨 매년 음력 정월에 우물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 고사 때 청소하면 아들 낳고, 재앙이 생기면 물이 넘친다 이천문화원에서 1997년 발간한 이천시 설성면 문화유적 민속조사 보고서에는 우물고사와 얽힌 재미있는 속설도 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샘을 말끔히 퍼내어 청소하는데, 이때 샘 청소를 하고 물을 마신 이는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청소하려는 아낙네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용덕 장천3리 이장은 이 동네 사람들이 아들이 많았어. 딸은 별로 없었고. 10년 전에는 50가구 살았는데, 다들 우물물을 신성하게 여기고 먹어서 전부 아들만 낳았다는 얘기가 나왔지라고 전했다. 마을에 재앙이 있을 때는 물이 넘쳤다는 전설도 있다. 설성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발간한 설성 옛이야기 책에는 마을에 큰 위험이 닥쳤던 임진왜란 때와, 6.25전쟁 때 물이 넘쳤다고 쓰여있다. 장천3리 주민들에게 성스러운 장소였던 찬샘물. 신성함을 믿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우물의 신빙성이 더해지는 듯하다. 행죽2리 대동우물 ◆ 동네 소문 넘치던 공동 빨래터의 추억 발걸음을 옮겨 행죽2리로 향했다. 이 마을에도 여전히 물이 솟아나 동네 자랑거리인 대동우물이 있다. 설성초등학교 바로 앞 논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자처럼 파란 지붕을 씌워 놓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고, 우물가에는 수령 200년이 넘는 향나무가 있다. 향나무가 우물의 수호나무라면 은행나무는 수문장인 셈이다. 대동우물은 원형 형태의 석조우물이다. 겉으로 드러난 우물 높이는 60cm, 지름은 160cm 가량 된다. 깊이는 4m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모내기를 할 때쯤 물을 퍼내고 청소를 했다고 하니 꽤 깊은 탓에 힘들었을듯하다. 이 우물도 장천3리 찬샘물처럼 여름은 차고 겨울엔 따뜻해 얼지 않는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이끼가 심하게 껴 물이 새까맣게 보였다. 청소 안 한 지 오래라는 의미다. 물 위에는 헌 바가지가 놓여있고 바닥에는 철수세미가 떨어져 있다. 최근에도 어떤 아낙이 설거지를 하고 간 모양이다. 바가지로 물을 떠보니 우물 색과는 다르게 깨끗하다. 우물가엔 수신기념비(水神紀念碑)라 새겨진 표석이 있다. 높이 72cm, 폭 18.5cm, 두께 11.5cm의 작은 비석이다. 대정 8년 8월이라 적힌 연대가 또렷이 보인다. 1919년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그해 여름 세워진 것이다. 대동우물의 독특한 점은 빨래터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우물에서 흘러내린 물로 빨래를 할 수 있도록 원형의 석조우물에 수로를 연결해 사각 웅덩이를 만들어놨다. 가운데가 약간 휜 빨래판 형태의 콘크리트 발판을 4개 가로질러 놓아 빨래하기 좋게 해놓았다. 우물에서 넘쳐 나와 빨래터를 거친 물은 논으로 그대로 흘러드는 구조다. 이 빨래터는 마을 아낙네들에게 이야기가 샘솟던 동네 방송국이기도 했다. 마을 언저리에 사는 남언년(82)씨는 저 우물에선 물이 항상 넘쳤어. 옛날에 50~60 집이 살았는데 죄다 여기로 와서 물 길어가고 빨래했어. 모여서 빨래하다 보면 동네 소문 다 알고, 누구 집에 무슨 일 났는지 속속들이 들을 수 있었지. 방송국이나 다름없지 뭐.그때가 재미있었어. 그리워라고 회상했다. 지금도 큰 이불 빨래는 이곳에 와서 하는 아낙이 있다고 한다. 매일 물지게 지고 오는 이들로 우물가가 복작이고, 빨래터에선 아낙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며 빨래 방망이를 휘두르는 풍경이 절로 연상된다. ◆흉사 징조로 붉게 물들고, 꽃이 피었던 신성한 우물 대동우물 역시 예부터 고사를 지내왔다. 이천시 설성면 문화유적 민속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해마다 정월이 되면 우물 앞에 제상처럼 시루떡과 소머리를 차려놓고, 나이 많으신 분이 축문을 쓰고 제복을 갖춰 입은 다음 제사를 지냈다. 제사 후에는 대동 사물놀이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대동우물을 중심으로 제관을 따라 돌면서 사물패와 함께 뚫어라 뚫어라 샘구멍 뚫어라, 솟아라 솟아라 펑펑 솟아라라고 외쳤다. 제사를 지낸 덕인지 이 우물의 물은 가뭄 때도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단, 마을에 흉사가 생길 징조로 물이 뒤집히고 붉게 물든 경우가 있어서 주민들은 각별히 신성시한다. 우물에 얽힌 전설이 있냐고 묻자 남 씨는 왜정 때인가. 우물 안에서 꽃이 두 송이가 피었데. 무슨 꽃인지는 몰라. 동네서는 그 꽃을 꺾어가면 부자 된다는 소문이 나고 외지에서도 구경을 왔데. 한데 웬 과부가 소문 듣고 꽃을 잘라갔다 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죽었다 들었는데 욕심내다 화 당한 거지라고 말했다. ◆ 관정 등 보존 위기...역사유적으로 남겨야 행죽2리로 들어서는 입구 도로변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한적한 시골 마을 가운데 있는 공동우물과 빨래터가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그림 같다. 물 길어 다니고, 손 빨래를 하느라 고단했지만 정겨웠던 시절, 그 추억의 한 장면으로 버려두기엔 아까운 풍경이다. 주민들도 지역의 옛 생활풍습과 정체성을 담고 있는 우물을 앞으로도 잘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여러 문제가 생겨 불만이 생기고 있다. 정광교 행죽2리 이장은 몇 년 전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우물 바로 옆에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관정을 파 놨어. 여름에 모내기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잖아. 논에 댈 물을 늘린다고 수맥을 딱 찔러서 우물물이 바닥까지 내려가. 지하수 자체도 오염됐어. 우물물도 다 오염됐으니 못 먹지. 관정을 폐쇄하든지 조치가 필요해라고 토로했다. 이어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야. 동네에 2만여 평 정도 물류창고가 들어오는데 설 지나면 공사하려고 흙을 다 파낸다고 하더라고. 한데 우물이 있는 논이 있잖아. 서울 사는 논 주인이 공사장 흙으로 논을 메꾸겠다고 연락 온 거야. 그래서 내가 우물 부지 100평만이라도 팔라고 했는데 안 판다더라고. 보존하기 힘들어졌어. 마을이 경제적으로 가난한 편이야. 자체 능력으로는 힘들어. 땅이 문제야라고 하소연했다. 우물 꼴이 말이 아니게 된 게 안타깝다. 주민들은 이천시를 비롯해 학계 및 전문가 등 많은 곳에서 관심을 갖고 보존 방안을 마련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박진호 인하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우물은 마을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다. 주민 문화의 태동을 일으키는 중요한 유산인데, 방치하지 않고 오랜 세월 유지하며 고사를 지냈던 점, 특히 비석까지 존재하는 점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이어 "인천 연수구에 있는 백제시대의 우물 비류정이 역사유적된 것처럼 이천의 두 우물도 역사유적으로 남기는 게 가능해 보인다고 제언했다. 유명 위인들의 유적지나 사찰만이 문화유산이 아니다. 그 옛날 민중들이 먹고살기 위해 치열하게 개간하며 일구어 온 흔적도 소중한 우리 유산이다. 우물을 지금까지 사용하며 보존하고자 하는 주민의 의지를 보며, 새삼 우리 생활 속에 밀착해 온 소중한 생활유산에 대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⑤용인 ‘영화지’, 용서받지 못할 매국노 송병준의 흔적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 송병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정미칠적 중 하나인 민족 반역자다. 용인시 양지면에는 그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다. 옛 별저 터에 유일하게 존치된 정원 연못 영화지다. 지금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연못인지 모를 정도로 볼품없지만 들여다볼수록 화려했던 옛 자취가 또렷하다.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송병준의 유산이기에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뼈아픈 역사를 증명하는 증거물이다. 지키자! 미래유산 다섯 번째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악인의 흔적 영화지를 재조명한다. ◆친일 거두의 영광과 오욕을 비춘 유일한 증거 연못 금박산 자락에 자리한 추계리 239번지. 송병준의 99칸짜리 별저가 있던 자리다. 별저는 오래전 허물어지고 현재는 양지온누리 교회라는 종교시설로 탈바꿈된 상태다. 지난 11일 기자는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송병준의 흔적인 정원 연못이 아직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정원 연못은 교회로 들어가는 진입로 오른쪽에 있다. 도로변 가로수 중간쯤에 영화지(映華池, 화려함을 비추는 못)라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눈이 쌓여있고 잡풀과 갈대가무성해, 표지석이 없었다면 연못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어 만들어진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송병준이 이곳에 별저를 지은 시기가 1905년경으로 알려져 있어 영화지 역시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멀찌감치 서서 정원을 한눈에 담으니 영화지 형태가 다소 특이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타원형 연못이 합쳐진 8자 모습이다. 그리고 큰 못 가운데 둥근 섬을 조성한 원도형 구조를 갖췄다. 이는 민간정원에서 볼 수 있는 방지원도형(사각형 못에 원형의 섬을 만든 전통적 형태)의 구조와는 사뭇 다르다. 지형을 변형시키지 않고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연못 가장자리를 따라 이중으로 정교하게 쌓인 석축이 보인다. 세월의 무상함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린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된 상태다. 작은 연못의 석축을 따라 옛 벌저가 있던 서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금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들이도록 설계된 취수구까지 식별이 가능하다. 표석 반대편인 북쪽에는 팔각정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주춧돌이 모서리마다 2개씩 16개가 둥글게 배치돼 있고, 가운데 작은 주춧돌 2개가 세워져 있다. 큰 연못 안쪽에 조성된 섬의 윤곽도 뚜렷하다. 수령 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는 이곳이연못의 섬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용인문화원에는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하는 옛 사진이 있다. 사진에는 팔각정 쪽에서 소나무가 심어진 섬으로 연결되는 아치형 다리가 놓여있다. 나무로 만들어졌던 다리라 무너졌는지 지금은 철제 다리가 놓여 있다. 영화지를 감싸고 있는 숲을 둘러보면 소나무, 비자나무, 측백나무, 상수리나무 등 다양한 고목들이 있다. 그중 수령이 오래된 금송 한 그루가 발견돼 놀라움을 안겼다. 동행한 김 국장에 따르면 금송은 오직 일본 남부지방에서만 자라는 침엽수다. 일왕을 상징하기도 하며,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를 모셨던 관재로 사용된 귀한 나무다. 현재 영화지 금송의 경우 어른 두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상태다. 김 국장은 생장 속도가 느린 특성을 감안해 송병준이 심은 100년 넘은 금송일 것이라 추정했다. 김장환 국장은 국립공주박물관 앞뜰에 일제 강점기에 식재된 세 그루의 금송이 자라고 있다. 수령 80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송으로 알려졌는데,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영화지의 금송이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송병준이 일본으로부터 친일 행각에 대한 감사의 선물로 받았거나 일본을 상징하는 이 나무를 직접 가져다 심었을 것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영화지의 규모는 약 991㎡로 꽤 큰 편이다. 현재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자리에 별저의 정문이 있었고, 주차장 자리가 안채였던 것을 감안하면, 영화지는 10만 평 규모였다는 별저의 위용을 한껏 높여주는 구실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친일 거두의 영광과 오욕을 비추었던 유일한 증거인 셈이다. ◆ 일진회의 본거지로 쓰인 별저...거대한 군사요새 이토록 화려한 연못을 지어놓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송병준. 그가 이곳에 별저를 지은 연유는 무엇일까.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2008년 발간한 발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살펴보면 대규모 친일조직을 만든 것과 관련이 있다. 송병준은 1891년 4월까지 양지현감을 지내다 갑오개혁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1894년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노다 헤이지로로 창씨개명 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5년 통역관으로 조선에 돌아왔다. 그리고 일진회를 조직하고, 추계리에 대저택을 지었다. 목재는 광주군 도척면의 큰 한옥을 헐어 우마로 옮겼다 한다. 조선총독부 총독이나 이완용 등 친일파들도 이곳을 자주 찾아와 공사를 지원했다고 전해진다. 10만여 평의 부지에 금박산 능선을 따라 높은 담장을 쌓고 본채만 99칸으로 완성된 별저는 결국 일진회의 본거지가 됐다. 발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유적지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설명돼 있다. 송병준이 일진회 고문의 직함을 갖고 별저에 머물 당시, 일진회원 400여 명과 일본 낭인 수십 명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들은 용인과 여주를 잇는 신작로(현 42번 국도)를 강제 개설하고 식료품 운반(일본으로 유출)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때론 저항하는 주민이나 항일지사를 잡아다 고문을 자행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별저 부근에서는 일진회원들과 의병과의 교전이 자주 일어나 다수가 사상했다. 일진회 회원 800여 명이 의병활동에 위협을 느껴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했으며, 그 후 50명의 일본군이 상주했다. 일진회원 800여 명, 일본군 50여 명이 상주할 정도였으니 거대한 군사요새였던 셈이다. 일진회는 일제로부터 막대한 활동자금을 지원받으며 온갖 매국 행각을 벌였다. 일본에 외교권 위임을 주장하는 '일진회 선언문'까지 발표했는데, 이는 일본으로 하여금 을사늑약을 강요케 하는 명분을 주었다. 송병준은 일본 우익 흑룡회와 손잡고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와 협력하면서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나섰다. 1907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어전회의에 칼을 차고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협박하고 양위를 종용했다. 정미7조약 강제 체결에 앞장선 정미칠적의 우두머리도 그였다. 이 같은공로로 1910년 일왕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1920년 백작으로 승작 됐다. 1925년 송병준은 추계리 별저에서 사망했다. 죽은 후에도 추계리 뒷산에 묻혔으나 비난을 두려워한 후손들에 의해 파묘되어 흔적조차 없다. 그의 많은 재산과 백작 작위는 장남인 송종헌에게 물려졌다. 해방 후 송종헌은 별저와 전답을 처분해 서울로 피신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됐다. ◆ 친일행위 반면교사로 삼을 교육의 장으로 2008년에는 송병준과 관련된 석비가 양지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발견됐다. 송병준이 친군장위영영관이 되었던 시기(1891년)에 제작된 선정비와 아들 송종헌이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물려받으며 만든 기념비다. 송종헌이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하며 팔굉일우라 쓴 비석도 함께 있었다. 돌에 새긴 악업의 기록인 이들 비석은 현재 구 용인문화원에 보관되며 역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반면 별저 정원의 연못 영화지는 안타깝게도 표지석과 함께 방치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고 있다. 더욱이 소유주가 온누리선교재단이기에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때문에 문화계는 부끄러운 역사 현장을 보존해 증거물로 삼길 바라고 있다. 김장환 국장은 볼품없이 퇴락해 버렸지만, 전체적인 구조가 크게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조선시대 민간정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경기도에는 능원 외에 이렇다 할 민간정원이 없어 영화지는 민간정원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송병준의 악행과 일제의 조선 침략을 증거하는 역사적 장소이기에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크다며 시급히 복원하고 지방 문화재로 지정해 친일의 반면교사로 삼을 교육장으로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랑스러운 역사만 미래유산 대상이 아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유산이다.나라를 팔아 온갖 권세를 누렸던 송병준의 악업을 엿볼 수 있었던 영화지. 별저에 이어영화지마저 사라지기 전에 송병준의 악업을 후손에게 알려줄 방도를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④연천 ‘한탄철교’, 일제 수탈과 분단의 아픔 흐르는 철도유적

남과 북의 접경지대인 연천군에는 일제강점기와 분단시대의 상징물인 철도유적이 존재한다. 한탄철교다. 무심하게 보면 그저 폐철교에 불과하지만, 연천 군민에겐100년이 넘는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철교를 만들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강제 동원되고, 완성된 후엔 산업 물자를 수탈당하는 수송로로 쓰였다. 피난시절엔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오가며 동고동락했다. 이런 아픔을 간직한 철교가 이제는 철거 위기에 놓였다. 지키자! 미래유산 네 번째는 근대문화유산 한탄철교를 재조명한다. ◆일제 물자 수탈의 흔적...108년 켜켜이 쌓인 역사 경원선 초성리역과 한탄강역 사이에 놓인 한탄철교. 지난 5일 찾아간 이곳은 폐쇄되어 황량한 모습이었다. 3년 전만 해도 통근열차가 지나다녔는데 이제는 겨울 철새들만 드나들고 있으니 씁쓸해진다. 38선을 알리는 돌비석을 뒤로 한 채 철교 끄트머리에 서서 바라보니 레일과 침목이 모두 해체된 상태였다. 사람도, 기차도 더 이상 지날 수 없는 지금의 철교는 조용히 흐르는 강물에 못다한 이야기를 그저 풀어놓을 뿐이다. 한탄철교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 8월 16월 완공됐다. 길이 244m, 너비 4.5m, 중력식 콘크리트 교각 9개로 이뤄졌다. 중력식이란 교각 자체의 무게로 강물을 지탱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 철교는 일본인들의 핍박 속에 노동력을 착취당한 연천 지역 주민들의 희생으로 탄생했다. 연천군지편찬위원회가 2000년 발행한 향토지 연천군지에 따르면 일제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후 기존 철도노선의 개량과 동시에 새로운 철도선을 급격히 부설해 나갔다. 조선의 많은 산업 물자를 일본 본국으로 실어나르는 수단으로 쓰기 위해서다. 특히 연천군은 교통로 상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동북 지역을 연결하는 분기로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나 지형적으로 본로보다 유리한 탓에 일제는 경원선 및 철도 부설을 거침없이 확장해나갔다. 경원선이지나는 한탄철교도 이때 설치됐다. 이 과정에서 경원선이 지나는 연천 지역의 주민들은 끊임없이 노동력을 징발당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철교와 경원선은 서울과 원산을 오가면서 수탈당한 물자를 실어나르는 주요 기간시설이 됐다. 연천군에서 재배한 쌀, 광산에서 산출된 금과 은도 철교를 따라 옮겨졌다. 일제로부터 항시 주목을 받은 수송로였다. ◆해방 후 물물 교환 위해 상인들이 드나든 철교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후 연천군은 청산면, 백학면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38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고, 소련군이 진주했다. 소련군은 공산당 조직을 강화하고, 인민위원회를 정비했다. 이후 1947년 소련군의 합의에 의해 38선상에서 남북교역이 이뤄졌다. 연천 상인들은 북어, 오징어, 인삼 등을 가지고 와 남한의 의약품, 전기용품, 광목 등과 물물 교환했다. 이때 한탄철교로 상인들이 지나다니고 피난민이 건너왔다는 것을 전곡리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들었다. 이준오(90세)씨는 "해방 당시에 이 철길(한탄철교)로 사람이 왔다 갔다 했고, 38선이 생겼어도 사람을 막지 않았어. 그냥 드나들었다고. 서로 담배도 사 오고 약도 사다 주고 했었어. 전쟁 일어나기 전에는 남한으로 피난 오는 사람도 있었지. 거기(철교)를 밤에 몰래 건너기도 하고, 한탄강을 건너야 되니까 다리를 지키는 사람을 매수해가지고 넘어왔어"라며 생생하게 기억했다. 한귀동(87세)씨는 "거기서(한탄철교) 물물교환했다는 얘기 들었어. 그때는 북한 사람 남한 사람 왕래가 막 되니까 그런 걸 했다는 거야. 북에서는 흐물흐물한 동태 말린 거로 여기서는 옷가지나 신발로 교환을 해서 왔다 갔다 한 거지"라고 했다. ◆ 625전쟁 당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 한국전쟁 개전 당시 인민군은 경원선을 따라 남침했다. T-34 전차를 앞세운 13만 5천여 명의 병력이었다. 그중 인민군 16연대는 전곡리에서 한탄강을 건너 38선 남쪽 청산면 초성리를 점령했다. 1950년 10월 8일 초성리에 주둔 중인 국군 8사단은 전곡리로 진입하며 다시 인민군에 맞섰다. 당시 인민군 27연대가 있었으나, 8사단에 밀려 북쪽으로 계속 후퇴했다. 전곡리와 초성리 사이 한탄강을 건너기 위해 지나야 했던 한탄철교는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던 것이다. 8사단은 계속 북상해 10월 9일에는 연천면을 장악했다. 해방 이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소속되어 남한의 통치권 밖에 있던 38선 이북 연천 지역에 국군이 처음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남북 분단의 상징물이 된 한탄철교 교각에는 아직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다. 철로 밑으로 피했던 주민들을 향해 쏜 총탄 자국은 대부분 보수가 이뤄졌지만 곳곳에는 여전히 포탄 흔적이 있다. 휴전 후에는 많은 육교가 파괴된 탓에 사람들은 한탄철교로 다녀야만 했다. 한귀동(87세)씨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휴전되고 얼마 안 있다가 난 후생 사업을 다녔어. 25중대라고 의정부 육군단 헌병대에 파견 나가 있었지. 그때 여기(연천) 와서 군용차에 나무 싣고 가는데 육교가 없잖아. 다 끊겨서 한탄철교로 왔다고. ◆전철 연장 공사로 철거 위기...주민들 보존운동 전개 108년 유구한 세월 속 한탄철교는 한적한 시골 동네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봐 왔다. 그런 철교가 이제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국가철도공단이 서울과 연천을 잇는 경원선 전철 연장공사를 시행하면서 폐선(한탄강역) 구간을 철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탄강역에 위치한 한탄철교의 레일과 침목은 이미 3㎞나 해체된 상태다. 다행히 한탄철교의 소중함을 알아본 주민들의 반발로 철거 작업은 잠시 중단됐다. 연천지역에서 활동하는 온골라이온스클럽 회원 등 일부 군민이 철교 보존운동을 전개하며 공론화에 앞장섰다. 현미경 온골라이온스클럽 회장은 일제강점기에 신설된 한탄강 철교는 625전쟁, 남북분단 등 역사적 가치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적이다. 전쟁 시 선조들이 한탄강 철교를 넘어 북에서 남으로 피난했고 지금도 연천에 터를 잡고 살고 계신다고 밝혔다. 또 이런 가치를 알지 못한 채, 쓸모가 없어졌다고 선로를 철거하는 철도 당국의 한심한 역사관이 안타깝다. 심지어 철거하면서 교량 볼트도 마구잡이 떨어트려 놓은 채 제대로 수거도 안 해갔다. 100년 넘은 역사적 유물에 대한 인식 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뼈아픈 역사와 동족상잔의 아픔을 되새기기 위해 관광자원이나 후손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 회장은 지난달 24일 청와대 게시판에도 철거를 막아달라는 청원을 올리고, 주민들과 함께 서명운동까지 병행하고 있다. 청원글에는 5일 기준520여 명이 동의한 상태고, 서명운동에는 1천여 명의 주민이 동참했다. 왕규식전 연천군의원도 38선에 위치한 철교는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치러진 곳이라 그 의미가 더욱 깊다며 보존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문가 역시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해도 될 만큼 미래세대에 남길 만한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박영석 명지대학교 토목환경공학과 교수는 100년 이상 운행해온 철교로서 철도역사와 근대 교통사를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역사성을 갖고 있어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문화유산으로 남겨두면서 연천군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연천군은 학계의 평가와 주민 반대 여론이 고조되자 보존 방안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관련 기관과의 협의, 철도 유휴부지 활용에 대한 공단 심사 절차, 보수 및 보존 비용 문제, 세부적인 활용방안 등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할 전망이다. 국가철도공단 측은한탄철교 구조물과 관련이 없는 궤도 레일, 침목만 다른 공사에 재사용하기 위해 철거한 것이라며 철교 보존에 대해 주민들의 관심이 높아진 만큼 교량 활용계획 등을 연천군과 적극 협조하여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주민의 힘으로 당장의 철거 위기는 모면한 한탄철교. 이제 해체된 철로를 어떻게 살려낼지, 등록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을지 등의 산적한 숙제가 남았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③가평 ‘청평댐’, 우리가 몰랐던 근로보국대 희생의 흔적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문을 보유한 가평 청평댐에는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가 있다. 겉보기엔 그저 육중한 토목건축물일 뿐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가슴 아픈 역사가 또렷하게 보인다. 80여년 전 댐을 만들기 위해 강제 동원된 지역 주민들, 혹독한 노동에도 공사를 강행한 일본, 그리고 6.25 전쟁이 남긴 파손과 반복된 복구작업까지. 산업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청평댐을 지키자! 미래유산 세 번째로 소개한다. ◆1944년 완공 속 새겨진 질곡의 역사 눈이 날리고 강물이 얼어붙은 날, 청평면에 위치한 청평수력발전소를 찾았다. 도착하니 길이 470m, 높이 31m나 되는 거대한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북한강 수계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청평댐이다. 청평댐은 전력 생산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발전용 댐이다. 물이 흘러내리는 수문만 24개다. 수문은 1년에 1~2번가량 홍수기에만 열고 평상시에는 닫혀 있으며 발전소 쪽에 있는 취수문비를 열어 발전을 하고 있다. 총 4기의 발전소를 갖추고 있고, 최대 발전 용량은 13만 9천600㎾다. 이는 4만 6천500여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이다. 청평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부모 세대가 공사에 참여해 만들어졌다고 어렴풋이 기억한다. 현재는 청평댐을 기억하는 이들이 작고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지만, 다행히 댐 공사에 참여했던 주민의 생전 인터뷰를 담은 향토지가 남아있다. 가평군사편찬위원회가 2006년 간행한 가평군지다. 여기에 수록된 이태용(1913년생달전리)씨의 증언에 의하면 댐 건설은 근로 보국대가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보국대라고 청평발전소 지을 때, 거기도(청평댐도) 각 군에서 전부(동원)해서 한 건데 나도 50여 일 동안을 (일)했는데. 거기 가서 곡괭이질, 삽질하고 기술 있는 사람은 남포 하는 사람도 있고. 난 그냥 삽질 50일 동안 했는데, 일당은 생각이 안 나. 27살 때(1939년)인데 그건 돈 바라고 하는 건 아니야. 군에서 나오라 해서. 배가 고파서 (했지). 날랜 사람들은 (밥을)푹 담아가지고서 어느새 4~5번씩 빈 그릇이 나왔지. 점심, 저녁을 주었어. 성(姓)도 다 갈았지. 우리는 키모토(木本)로, 집안이 다 갈았었어. 해방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 가평군지에 의하면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중이었던 일본은 인천에 있는 군수공장 전력 공급이 다급해지자 북한강 유역에 청평댐 건설을 계획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대용량의 전력 확보가 가능해 수력발전소를 짓기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1939년 8월 한강계의 전원개발을 위한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 설립 및 댐 건설에 착수했다. 공사는 하청 건설사 카지마구미(鹿島組)가 진행했다. 해당 공사에 투입된 노동력은 근로 보국대(조선인 노동력 수탈기구)라는 미명 하에 강제 동원된 지역 주민들이다. 학생, 여성, 노인, 농부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하게 끌려 나와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주로 공사에 소요되는 모래와 자갈을 북한강 물에 씻는 작업에 투입됐다. 기초가 탄탄한 댐을 만들려면 골조부터 세척해야 한다는 방침 때문이었다. 청평댐이 오늘날도 튼튼한 이유가 골조를 깨끗이 씻어 썼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을 감수해야 했던 그들의 희생으로 1943년 청평댐이 완공됐다. (9,800㎾ 용량의 12호기가 각각 7월, 10월에 완성) 청평댐이 생김으로써 북한강에 면적 12.5㎢, 저수량 1억 8천500만 톤 규모인 청평호반이 형성됐다. 그 결과 많은 근로 보국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현재 발전소 본관 앞 언덕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공난자공양비(工難者供養碑)라는 기념비가 있다.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한강수력전기 주식회사는 청평발전소 공사를 소화 14년 9월 착수해서 4년 동안 진행했다. 동원된 인원은 연 300만 명이다. 그들의 공로로 준공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증거를 남긴다. 공사 과정에서 홍수 방지나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노동은 매우 힘들었으며 그때 조난당한 사람은 실제 기록에 의하면 43명이다. 준공하면서 이곳에 희생자들의 명단을 표시한다. -소화 18년 9월 1일 한강수력전기 주식회사 청평건설사무소장 비석 왼쪽 상단 네 번째 이름이 위치한 자리는 무언가에 맞아 깨진 듯 움푹 파여있다. 6.25 전쟁 때 훼손된 자국이라 한다. 지울 수 없는 질곡의 역사를 일제가 속죄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가 희생자들을 잊지 않도록 복원이 필요해 보인다. ◆댐 건설 때 자재 운반의 흔적 교각 청평댐 앞 아래쪽에는 정체 모를 구조물이 있다. 총 7쌍으로 이뤄진 콘크리트 기둥들이다. 북한강 건너편의 강안에서 발전소 쪽을 향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세워진 모습이다.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무런 단서가 없어 그동안 사람들은 수위를 확인하기 위한 구조물일 것이다, 심미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냐 등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심지어 발전소 관계자들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살펴보면 해당 구조물은 교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댐을 건설할 때 자재나 장비를 실어 나르기 위해 공사장에 설치한 다리였다. 보수공사 이후 다리는 부서지고 현재는 교각만 남은 것이다. 이 교각으로 노동자들의 공사 작업 단서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극심한 피해...걸레로 누수 막은 보수공사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며 청평댐의 주인은 대한민국이 됐다. 하지만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으로 청평댐이 북한 치하에 넘어가 발전실의 대부분이 파괴됐다. 한국전력공사의 한국전기백년사에 따르면 청평수력발전소는 1950년 9월 28일 수복됐으나, 1951년 중공군의 침입으로 발전을 중지하고 직원들은 남으로 피난했다. 그 후 국군의 북진으로 같은 해 3월 초 재수복했으나 피해는 극심했다. 수문 전부 파편화 관통으로 누수가 심했고 문비조작전동기 5대, 조작함 7대, 변압기 전부가 파손됐다. 복구는 1951년 7월부터 여러 차례 실시됐다. 하지만 전시 상황과 당시 기술로 제대로 된 보수가 진행될 리 만무했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발행한 수차와 원자로 사보에 실린 김종주 전 한전부사장 회고담에는 해마다 많은 양의 걸레로 수문 옆 틈새 누수를 틀어막았다는 일화도 있다. 1956년 10월 어느 휴일, 수상에는 걸레를 가득 실은 작업선이 떠 있고, 잠수부는 작업선과 연결된 고무호스에 생명을 의지한 채 걸레 틀어막기 작업을 했다. 그런데 고무호스가 수문과 수문지주 사이에 끼어 잠수부를 끌어올리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행히 공기 공급 기능이 되었고 신속한 조치로 무사히 구조됐다 말도 안 되는 원시적인 방법이다. 열악한 재정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걸레를 사용한 물막이공사에만 의존했던 것이다. 당시 청평수력을 운영하던 조선전업의 상황이 어땠을지 가늠할 수 있는 사례다. ◆발전소의 역사를 지켜본 은행나무와 수위계 발전소 본관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어른 두세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의거목이다. 나무에는 1926년 생이라고 새겨진 작은 돌이 올려져 있다. 1943년 준공 당시에 이미 17년 된 나무라고 한다. 2022년 현재 수령 96년이 된 것이다. 댐의 탄생과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인 셈이다. 또 4호기로 향하는 길 3분의 1지점 아래에는 오래된 수위계가 설치돼 있다. 연도 표식이 따로 있지 않아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댐과 같은 콘크리트 시설물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 댐이 지어질 때 같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노후됐지만 상태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모습이다. 방수구 수위계 옆 외벽에는 홍수 표식도 있다. 범람한 강물로 검게 변한 흔적과 연식으로 한국전쟁 이후 침수 수난을 몇 차례나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66년 이전 표식이 불명확하다 것이다. 검게 변한 흔적 상단은 표식이 지워지거나 아예 없다. 은행나무와 수위계를 비롯해 홍수 표식계는 댐의 역사를 담은 발전소의 귀중한 재산이다. 하루 속히 표식을 명확히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병엽 청평수력발전소 관리팀장은 발전소 내에서도 홍수 표식의 중요성은 안다. 그래서 표식이 없거나 지워진 연식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중일전쟁과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적 상황에서 건설된 청평댐. 아픈 역사와 군국주의가 연결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학계에서는 청평수력발전소와 댐 부속시설이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크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라고 있다. 문화재청도 2005년 청평수력발전소에 대해 문화재로서 가치평가 후 등록문화재 추진 계획을 세운 바 있다. 그러나 미지정됐다.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수력발전소는 화천이 유일하다. 화천수력발전소는 2004년 9월 4일 국가등록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됐다. 지정된 이유는 1944년 준공된 전력 공급을 위한 시설로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기념비적인 산업시설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양훈도 경기문화재단 박사(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청평수력발전소가 미지정된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화천발전소 만큼 미래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다. 등록문화재 지정과 견학코스 등의 개발로 역사관광자원화 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와 관련 이병엽 청평수력발전소 관리팀장은 발전소 운영에 문제가 없다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②군포 ‘둔대교회’, 118년 역사 계몽운동의 산실

군포시 둔대동에는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시설이 하나 있다. 지키자! 미래유산 두 번째 여정에 소개할 근대건축물 둔대교회'다. 여느 교회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무심코 본 이들은 관심조차 없겠지만, 농촌계몽운동의 역사를 조금 안다면 둔대교회는 진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초라하지만 의미 있는 예배당 반월저수지 인근 작은 마을에서 수리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왠지 사찰이 나올 법한 곳에 교회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자동차 한대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길 따라 이정표대로 100m쯤 더 오르니 십자가가 달린 아치형 철기둥이 서 있다. 여기가 바로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 불리는 둔대교회(현 둔대케노시스교회)다. 교회는 현대식 웅장한 교회에 비하면 아주작고 초라하다. 마치 시골집 같아 입구에 십자가 기둥이 없었다면 교회임을 알아차리기어려웠을 것이다. 낯선 차가 마당에 들어서니 강아지 두 마리가 요란하게 짖는다. 아무도 없는지계몽운동의 현장 둔대교회 방문을 환영합니다라고 예배당 벽에 걸린 현수막만이 반겨줄 뿐이었다. 교회 예배당은 53㎡ 규모의 한식 목구조 형태다. 페인트칠을 새로 했는지 건물 외벽은 비교적 깨끗하다. 반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들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지붕은 한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진각 형태에 서까래만으로 이뤄진 홑처마다. 여기에 종도리, 주심도리, 대량이 있는 삼량가(三樑架) 구조다. 추녀 부분 서까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통한옥에서 주로 사용하는 선자서까래(부챗살 모양)가 아닌 말굽서까래(방사형)로 배열한 것이 눈에 띈다. 말굽서까래는 선자서까래를 제대로 걸 수 없는 서민들의 살림집이나 추녀가 긴 우진각 지붕에서 사용됐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가옥 느낌이다. 특이한 점은 예배당의 출입문이 우측면에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정면 출입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이는 건립 당시 서양 건축문화의 영향을 받아 장방형으로 지어진 특성과 좌측면에 산을 등지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4개의 계단을 올라 문고리를 당겨보니 예상대로 굳게 닫혀있다. 한참 뒤 교회에 온 변인숙 부목사의 도움으로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예배당은 현재 계몽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어 벽면 가득 교회 역사(계몽 운동의 발자취)에 관한 스크린이 걸려있다. 야학교실이라고 적힌 호롱불도 바닥에 여러 개 놓여있다. 교회를 찾는 이가 많지는 않지만 방문하는 이들에게 근대시대 야학을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내부 구조다. 천장과 벽 모두 샌드위치 판넬로 보수해놔 서까래나 상량 기록 등 예전 모습은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교회 관계자들은 내부 벽체가 조적벽으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좌측면 내부 벽이 마감 없이 조적벽으로 노출된 것을 통해서다. 창문 역시 목재창이었던 것을 알루미늄 창호로 변경했다고 한다. 변인숙 부목사는 2003년 단열 때문에 고쳤는데 골조는 예전 그대로다. 창문 틈으로 판넬 안쪽이 보이는데 일본 신문으로 벽지를 바른 흔적도 있다.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역사를 보존했을 텐데 아쉽다고 했다. 교회 앞마당 구석에는 종탑도 세워져 있다. 본디 목재로 된 지지대였으나, 유지를 위해 80년대 철근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종탑 안의 종은 없다. 3.1운동 때 일본인들이 떼 갔다고 한다. 대신 마당 뒤편에는 예전의 종소리를 그리워하는 주민들을 위해 10년 전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종탑이 있다. 교회의 유일한 유물로 남아있는 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썼다고 알려진 손종이다.손종은 예배시간이나 공부시간을 알리기 위해 들고 다니며 울리던 종이다. 나무 손잡이에 금이 가 있지만 종소리는 여전히 맑고 청아하다. 예배당과 종탑이 많이 훼손된 건 안타깝다.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큰 결함은 없어 근대건축물로 가치가 있어 보인다. ◆ '박씨 고택'에서 시작된 예배 그리고농촌계몽운동 둔대교회는 한국 교회 건축사뿐만 아니라 군포 근대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배당 외벽에 걸린 현수막 내용대로 농촌계몽운동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대한감리회에서 발행한 둔대교회 역사 자료에 따르면, 둔대교회는 1902년 군포 지역 일대에서 가장 부자였던 박영식 씨의 집 사랑채(현재 교회 아래 자리하고 있는 향토 유적 1호 박씨 고택)에서 시작됐다. 박 씨는 당시 5세였던 어린 손주 용덕 씨에게 신교육을 시키려고 배재학당 출신 황삼봉 선생을 독선생(가정교사)으로 초빙했다. 그런데 황 선생은 단순히 독선생에 머물지 않고 계몽운동을 활발하게 병행해 용덕 씨뿐 아니라 주민들까지 모아 예배와 교육을 실시했다. 이를 본 박 씨는 1903년 봄 둔대동 354번지에 작은 토담(초가로된 흙집 교회)을 짓고 거기서 예배를 보도록 했다. 이후 1910년 12월 박 씨는 자신의 집 뒷산 기슭인 둔대동 434번지를 기증하고 1936년 교회를 신축했다.그 자리가 바로 현재 남아 있는 둔대교회 예배당 자리다. 기증한 땅의 토지대장 명단에는 주학준, 박성만, 박돌이, 박선용, 주순원, 이용현, 김규풍, 김경준, 김덕민 등 총 13명이 공유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목회자가 전도와 교육을 이동하면서 행했기에 개인을 지정하지 않고 마을의 신도들과 토지를 공유하는 방법으로 기증한 것으로 추측된다. 경술국치 이후 교회는 몇 차례 곤욕을 치렀다. 군포 지역 31운동 중심지라는 이유로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령의 교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31운동 당시 일본 순사들이 교회 문에 못질을 해서 폐쇄시키고, 종소리에 주민들이 몰려와 만세운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종탑의 종도 떼어갔다. 나뭇단을 가져와 불을 지르기도 했다. 다행히 불이 타다 말아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증언한 분들이 모두 작고해서 뒷받침할 증거는 부족하다. 박 씨의 후원과 황 선생에 의해 시작된 둔대교회 교육 활동은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야학으로 정착됐다. 1935년 감리회보에 따르면 당시 교회 야학 학생이 50명, 신통자 2명, 교사 3명이었고, 교장은 박인기 장로(박용덕 씨 동생)였다. 이후 625전쟁 때는 인근 반월국민학교가 불타버려 소실되자 임시교사 구실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625 직후 반월저수지가 조성될 때는 마을이 수몰되는 것도 지켜봤다. 둔대교회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이후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118년 동안 한자리에 서 있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굴곡을 같이 한 의미있는 장소인 것이다. ◆ 상록수 최용신의'샘골교회'와 밀접한 관계 둔대교회는 1907년에 세워진 안산 샘골교회와도 인연이 깊다.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 선생은 농촌계몽의 필요성을 느끼고 1931년 샘골교회로 와서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학생들을 가르칠 건물을 지을 곳이 없어서 힘들어하자, 1932년 박용덕 씨가 본인 소유의 부지 3천471㎡를 기증해 샘골교회 강습소가 설립됐다. 샘골 지역의 근대 교육이 성행하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이는 독립운동가 염석주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고 알려졌다. 최용신 선생도 4km 떨어진 둔대교회를 여러번 다녀갔다. 오늘날에는 안산과 군포로 나뉘어 있지만 당시엔 걸어서 다닐만한거리였다. 똑같이 감리교 소속인 두 교회는 연합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연합집회를 열기도 했다. 함께 계몽운동을 실천하며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 원형 복원 및정확한 설립 기록 찾아야 한 세기 이상 지속된 교회사는 그 자체로 중요한 향토사다. 문제는 둔대교회의 경우 설립 연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감리회에서 교회 역사를 기록한 자료에도 ▲1902년 예배 및 교육 시작 ▲1903년 봄 토담교회 설립 ▲1910년 12월 교회 부지 기증 ▲ 1936년 8월 교회 신축 등 연도 외 날짜가 불명확하다. 설립일을 인증하는 현판도 없다. 그 시절 조용히 계몽운동을 하던 장소인 만큼 현판을 만들어 걸기 어려운 건 당연했을 것이다. 교회 관계자도 그저 토담 자체가 현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으려면 확실한 기록이 있어야 한다. 교회 측에서도 이를 인지하고 입증 자료를 찾는데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우선 강인태 담임목사가 찾아낸 1975년 12월 28일 교회 당회록에는 창립일에 대한 추측을 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김금준 집사가(박용덕씨의 배우자) 당회원들이 모두 있는 곳에서 이야기함으로 73년 된 것이 확인됨 이라고 증언한 부분이다. 1975년으로부터 73년 전이면 1903년경이다. 당시 당회장 김광원 전도사의 도장까지 찍힌 이 회의록이 둔대교회 건축을 가늠하는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1976년 12월 26일 당회록에는 창립 날짜를 알 길이 없어 12월 11일로 당회에서 결정하고 그 주일을 축제일로 한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현재 둔대교회 주보에는 교회 창립일이 1903년 3월 1일로 명시돼 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확인해보니 1987년 1월 1일 당회에서 김금준 집사가 1903년 봄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예배당을 지었다고 증언하고, 3.1운동 때 관여한 점을 빌어 결국 설립 일자를 1903년 3월 1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기록이 입증 자료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강인태 목사는 둔대교회가 문화재로 지정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계몽운동의 현장이다. 잘 유지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알리는 장소로 활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는설립 연혁을 입증할 자료가 확실히 있다면 문화재로써 충분한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안국진 경기도 문화재위원(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은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이라 장소성에 크게 의미가 있고,한옥 양식의 건물을 교회로 썼다는 점에서 교회 발전사에 문물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건축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다만 원형의 모습을 갖춰야 근대건축물로 더욱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제언했다. 둔대교회는 유서 깊은 신앙의 성소다. 설립 입증 자료를 찾는 것도 시급하지만, 과거 모습과 비교 연구를 통해 훼손된 곳을 복원하는 등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다. 글사진=황혜연기자

[지키자! 미래유산] ①수원 ‘영신연와’, 국내 마지막 남은 호프만 가마식 벽돌공장

현재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은 어느 정도 있을까. 경기연구원에서 2015년 조사한 경기도 근대건조물 조사 및 관리방안에 따르면 당시 547개의 근대건축물이 존재했다. 시설별로 살펴보면 교육시설 54개, 군사유산 35개, 산업기반시설 29개, 산업시설 44개, 상업시설 47개, 업무시설 44개, 종교시설 107개, 주거시설 59개 등이다. 이후 경기도에서2018년조사한 경기도 건축자산 목록 총괄표 및 기초조사 자료에는 근대건축물이 총 430개로 집계됐다. 조사기관은 다르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근대건축물이 사라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두 보고서의 책장을 넘기며 현존하는 건축물을 추려봤다. 시간이 많이 지난 상황이라 이들의 현존 파악이 다소 불명확했지만, 멸실된 건축물 외에도 우수건축자산으로 꼽힌 것도 꽤 많다. 이 중 건축물의 용도, 원형 보존 상태,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근대건축물을 찾아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소개한다. 시작은 서수원의 산업문화유산으로 빼놓을 수 없는 벽돌공장 영신연와다. 칼바람이 부는 궂은 날,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에 위치한 영신연와를 찾아갔다. 도착하니 아파트 15층 높이(약 40m)의 기다란 굴뚝이 한눈에 들어왔다. 196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 생산 공장 영신연와의 굴뚝이다. 산업화 당시에는 이 굴뚝에서 연기가 멈추지 않을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루 5만 장이 넘는 벽돌을 생산할 정도로. 여기서 만들어낸 그 많은 벽돌은 그 시절 주택학교공공기관 등 다양한 건물에 두루 쓰였다.지역의 건축사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자재였던 것이다. 공장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아봤다. 1992년 문을 닫았으나 현재 5천775㎡ 면적(건축물 1천902㎡)에 가마터, 출하 창고, 무연탄 야적장, 초벌 야적장, 점토 채취장, 노동자 숙소 등 당시의 시설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여러 업체가 공장 터를 임대해 쓰고 있어 어수선했다. 부지 한쪽은 건설회사가 건설장비를 두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고물상이 자리 잡았다. 벽돌 출하 창고로 쓰이던 공터는 중고 자동차 회사가 차량의 적치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공장이 자리한 일대는 진흙투성이다. 군데군데 얼음이 녹아 흙탕물이 고였고 신발에는 진흙이 가득 묻었다. 점토 채취장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니 그럴 만도 하다. 벽돌의 주재료가 되는 진흙이 풍부해 이곳에 공장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공장에서 점토 채취부터 생산까지 한 번에 이루어진 걸 실감케 했다. 신발을 털며 공장 뒤편으로 가니 가마터 입구가 나온다. 가까이서 보니 굴뚝을 제외한 공장 건물은 세월의 풍파를 맞은 듯 낡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험해 보였다. 살이 에일 듯 세찬 바람에 녹슬고 허물어진 슬레이트 지붕이 들썩이며 삐거덕~ 덜그럭~ 스산한 소리까지 낸다. 멈춘 지 오래인 가마의 쇠잔한 모습도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이 가마는 1858년 독일의 화학자가 개발한 호프만 가마다. 연료비 절감, 대량 생산 등의 특징으로 소성기술의 혁신을 일으켰다. 현재국내 유일하게 남은 것이어서 역사적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현정 수원과학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호프만 가마는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설비다. 근대 시대를 대표한 건축 재료 생산으로 건설 기술을 알 수 있다. 또 현대 공장과 다른 외관으로 60년대 조형 미학이 있어 문화유산으로 희소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지금은 가마 주변으로 각종 적치물과 폐기물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어 전체적인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아마 벽돌공장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본다면 그저 낡은 흉물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루속히 건물 보존을 위한 조치와 주변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내부도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모든 문이 막혀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외벽에 사다리를 놓고 가마 상부로 올라갔다. 놀랍게도 석탄함과 투탄구, 댐퍼 조절장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당시 벽돌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명불허전, 미래유산답다. ◆ 노동자의 삶이 깃든 숙소에 아직 3가구 거주 공장 건물에서 나와, 영신연와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숙소로 가봤다. 팔 뻗으면 지붕에 닿을 듯 야트막한 가옥이다.공장에서 생산한 적벽돌로 지어졌다고 한다. 총 4개의 동이 종렬로 배치돼 있는 형태다. 한동마다 방 1칸, 부엌 1칸이 전부인 5평 남짓의 여러 세대가 좁고 긴 골목을 끼고 일자형으로 붙어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나가야 주택과 유사하다. 1930년대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 기지로 사용할 계획에 대규모 공장과 산업시설을 건설했고, 그에 따른 노동자를 수용하려 지은 일본식 다세대 노무자 주택이 나가야다. 따라서 영신연와 노동자 숙소는 구조나 시공방법이 근대 한국 노동자 주택의 역사와 직결되어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숙소는 황폐화된 모습이다. 부서지고 깨지고 폐기물이 나뒹군다. 그 누구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없다. 당연히 아무도 살지 않겠거니 하고 들어갔는데, 몇몇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비교적 멀쩡한 문 앞에 무언가를 담아 보관 중인 고무대야가 있고, 줄에 걸어 말리고 있는 나물도 보였다. 또 어느 집 입구에는 텃밭과 오토바이도 서 있었다. 텃밭을 서성대니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곳에 묵고 있는 영신연와 노동자 이영식씨(70)다. 숙소에 홀로 살고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공장 폐쇄 후 다 떠나고 여기에 나랑 집사람, 그리고 다른 동에 두 세대가 더 살고 있다. 자녀들은 다 출가했다. 우린 이곳이 삶의 터전이고 갈 곳도 없다. 가능하다면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본래 이곳 노동자 숙소에는 50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비록 부엌 하나에 방 하나로 된 좁은 공간이었지만 부모님을 모시거나 자녀들과 함께 사는 세대도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살던 숙소는 어느새 조용해졌다. 새 돈벌이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은 세월이 가져다준 무게를 짊어지다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3가구만 남았다. 노후된 건물에서 여름엔 선풍기 하나에, 겨울엔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하며. 남은 이들에게 영신연와 숙소는 어려운 형편에 맞춰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집인 셈이다. ◆ 도시개발 논리에 철거위기...'풍전등화' 신세 영신연와 같은 형태의 벽돌공장은 10여 년 전만 해도 전국적으로 수십 개 가량 있었지만 모두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영신연와 조차 존폐 위기에 놓였다. 2010년 민간이 추진하는 도시개발사업구역 내 포함돼 철거 대상물로 지정된 것.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몇 년째 수 백번, 수 천번 부쉈다, 말기를 반복한다. 그야말로 풍전등화 신세다. 수원시도 시민 의견에 공감해 보존 방안을 찾고자 백방으로 뛰고 있다. 하지만 실제 보존 가능성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영신연와 건축물이 있는 부지가 사유지라 소유주가 건물을 헐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개발을 원하는 주민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수원시 관계자는 영신연와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해도 될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다며 문제는 현재 민간인 소유라서 사유재산인 만큼 동의 없이 함부로 지정할 수가 없다. 이미 가치 조사, 기록화 사업을 해놓고, 도시개발 조합 측을 설득하고 있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막연히 보존하자는 목소리만으로는 설득력을 얻기란 어려워 보인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주민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벽돌공장 부지를 활용할 방안을 함께 고민하면 수원지역 도시개발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주민들은 영신연와 보존이 재개발에 마이너스 영향이 없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역을 가치 있게 만든다는 확신이 서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며 수원시가 도시 계획을 수립할 때 주민들에게 손해 가지 않도록 용적률을 보장해주는 방법이 있다. 공익을 위해 보존하는 만큼 벽돌공장 부지를 제외하더라도 주민들이 원하는 아파트 세대 수를 지을 수 있는 방침을 정해주면 되는 것이라고 제언했다. 또 고색동 일대 재개발 시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녹지를 지금 그려진 방식이 아니라 영신연와를 포함하는 쪽으로 대체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영신연와 부지를 공원으로 몰아주게 되면 보존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익도 추구하면서 도시개발사업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수원시 도시계획 위원회의 역할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일침 했다.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 영신연와. 산업화시대 대표적인 가옥 양식에서 외장재로 주로 사용하던 빨간 벽돌을 굽던 가마터는 후손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 보존만 된다면 지역의 가치를 높이고, 새로운 도심 재생 사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개발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의지가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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