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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1. 민족 운명과 함께한 수원농림高 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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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1. 민족 운명과 함께한 수원농림高 학생운동

‘창살없는 감옥’ 깨고… 미래지향적 민족국가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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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수원농림학교 입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수원에 농업전문학교가 설립되다

수원은 수도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였다. 특히 경부선 개통으로 이른바 ‘일일생활권’으로 재편됐다. 이때가 바로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이전부터 수원인들은 자주적인 국민국가 수립을 위해 국제적인 연대의 일환으로 민족교육을 표방했다. 화성학원•삼일여학교•삼일학교 등을 통한 인재 양성에 매진한 사실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정부도 부국강병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교육입국을 위한 대안을 모색했다.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법령 정비와 아울러 1904년 9월에는 서울 수진동에 농상공학교 설립을 알렸다. 1906년 9월에는 농과를 독립시켜 농상공부가 관장하는 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로 이름을 변경한 후 이듬해 수원에 새로운 교사를 만들었다. 바야흐로 수원의 농업교육 전성시대를 알렸다. 

1908년에 수의학 속성과 증설과 1910년에는 일제의 한국 병합에 따라 농림학교를 권업 모범장에 부속시키고 권업모범장장이 교장을 겸임했다. 1918년 3월에는 조선총독부 전문학교관제 공포로 수원농림학교가 3년제 농업전문학교로 개편됐다. 1927년 6월에는 실업보습학교 교원양성소와 이듬해 4월에 실업보습학교를 부설했다.

당시 한민족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자제들 중 우수한 인재는 이곳으로 쇄도했다. 물론 유복한 부모를 둔 ‘금수저’들은 일본이나 미국 등지로 유학하는 분위기였다. 장밋빛 희망을 가슴에 가득히 안고, 그런만큼 민족적인 차별과 멸시, 더욱이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식민지 현실을 타개하려는 의욕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했으리라. 모순된 현실 타파는 자신들에게 부여된 최소한 의무로서 인식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 교육현장에서 민족차별을 인식하다

3•1운동을 경험하면서 학생들은 한민족이 처한 ‘서글픈’ 현실을 너무나 절감했다. 하지만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은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마침내 학생들은 1923년 5월3일부터 7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휴교를 단행했다. 이어 6•10만세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민족의식이 크게 고양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이들은 순종 인산일 즈음 휴학을 결정했다. 

학생들은 ‘①학생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여 줄 것-무적격자 다카키•와다•사이토에 대한 배척 ②3학기를 2학기제로 개정해 줄 것 ③(협소한) 교사를 신축해 줄 것’ 등 3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당황한 학교 당국은 폐교마저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고압적인 처사에 분노한 학부모와 수원인들은 이를 수습하는 데 분망했다. 학교에서 이들의 수습안을 수용하자 일본인 학생들 일부는 크게 반발했다. 한일 학생들 사이에 긴장 관계 속에서 민족운동 활로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밀결사 건아단과 조선개척사 조직은 새로운 학생운동을 위한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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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수원농림학교 졸업생들이 졸업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 학생비밀결사가 민중운동과 호흡하다

1926년 농학과 김찬도, 김성원 등 10여명은 조선인학생담화회를 매개로 여름방학 중 수양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당시 농촌사회 재건을 위한 금주와 금연을 강조하는 등 농촌사회 부활을 위한 실천적인 강령을 강조했다. 또한 조선농민사와 함께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와 민중계몽에도 동참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위한 건아단 조직으로 계승됐다. 이들은 농민 대중의 민지 계발을 통한 새로운 사회건설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주요 내용 중 하나는 한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단군기원의 연호’ 사용이었다. 또한 일본 유학생단체인 조선농우연맹과 자매결연을 맺을 만큼 외부 세계와의 소통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 농촌 개발에는 오로지 조선인 스스로의 힘으로 괭이를 들음에 있다”는 주장이 건아단의 이상과 일치한다고 공감하고 수원지부를 뒀다.

이 단체는 방학을 이용해 순회강연을 개최하는 등 깊은 연대감을 표시했다. 1927년 7월 회원들은 8일간 함경도와 강원도 등지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도처에 일본인들이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하고 있음에 자극돼 결사를 보강하게 됐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기초로 다수의 농민들을 모아 광대한 미간지를 개척해 이상적 농촌을 건설하고 이곳에 독립운동을 뿌리 내린다는 목표아래, 우선 농민의 자각과 단결을 촉성시키기 위해 배우고 알리는 농민교양기관을 설치했다. 또한 비밀결사인 조선개척사의 합법적인 단체인 계림흥농사를 위장했다. 표면적인 목적은 ‘이익배당 배제, 조직원 공동생활 보장, 조직원 자녀교육비 공동부담 실시, 국내 주요 적당한 지역에 공동출자 농장 설치’ 등이었다. 이는 재학생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동문과 농고학생 등을 포섭하려는 의도였다. 곧 ‘이상촌’ 건설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 미래지향적인 민족국가 건설을 꿈꾸다

지식인 중심인 학생운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질서에 부응하려는 몸부림은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조선의 대중은 농민이 8할을 차지한 만큼 농민으로 더불어 조선독립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의식 아래, “농민 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를 건설한다”는 강령은 이를 방증한다. 

수원군 안룡면 고견리를 비롯한 부근의 여러 마을에도 농민야학을 설치해 김찬도, 권영선 등의 주도 아래 다수 학생들이 야학운동에 참여했다. 야학의 작문 시간에 글을 지어 농민조합과 비슷한 단체를 조직하도록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8년 여름 김성원이 김해공립농업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어 시간에 단체 주의를 선전하다가 발각돼 경찰에 붙잡혔다. 이어 두 단체를 두 반으로 나눠 내적으로는 정치 예속과 경제 파멸을 여실히 조사한 후 통계를 작성하고, 이를 외국에 발표해 국제 문제를 일으키자는 계획을 세웠다. 사건이 확대돼 9월에 조직이 발각되자, 경찰 취조를 거쳐 육동백(임과 3년), 김찬도(농과 3년), 김익수(농과 3년), 황봉선(농과 3년), 김민찬(농과 2년), 남영희(농과 2년), 고재천(농과 3년), 권영선(농과 3년), 우종휘(농과 3년), 김봉일(농과 3년), 백세기(임과 3년) 등 11명은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경찰의 취조가 진행되는 동안 학교 측이 5명을 출학, 6명을 무기정학에 처했다.

■ 공동체적인 삶을 실현하다

사태에 즈음한 한국인 학생 46명(5명의 결석자 제외)은 학교 측에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했다. “①교장의 훈시는 군대와 경찰을 믿고 학생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교육자가 취할 태도가 못 되는 것이다. ②9월1일 학생을 실습장으로 내보내고 경찰이 무단 수색하게 했다. ③검거된 학생들의 범죄가 확정되기 전에 퇴학 처분을 시켰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학교에 퇴학원서를 제출하고 귀향하며 저항했다. 이 사건은 18개월간의 예심 기간이 지난 뒤 김찬도, 권영선만 보안법 위반으로 공판에 회부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면소됐다. 조선개척사는 국내에서 전문학교급의 학생비밀결사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 이후 재학생들은 독서회 등을 통해 대중운동과 연대를 더욱 견결하게 이어 나갔다.

공동운명체로서 소중한 학교생활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이다.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라는 현실은 스스로가 주체적인 삶을 향한 여정이 무엇인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미래를 향한 희망의 빛은 오늘에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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