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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8.안성군 원곡·양성면서 연합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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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8.안성군 원곡·양성면서 연합만세운동

농기구 손에 쥐고... ‘조국광복’ 열기 들불처럼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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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광복을 향해 횃불을 들다

문화민족으로서 강한 자긍심을 가진 선조들은 일제 침략에 맞서 다양한 영역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의병운동, 근대교육운동, 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조국광복’을 향한 열기는 전혀 반감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국제정세에 부응한 자유와 평화를 향한 움직임은 마침내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동시에 한민족의 강렬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역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첫걸음을 내딛다

서울·평양 등 7곳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곧바로 인근 지역으로 확산됐다. 쓰나미와 같은 질풍노도는 한반도는 물론 국외 한인사회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안성에서는 크게 안성읍내, 죽산지역, 서안성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914년 4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양성·죽산 3개 군은 안성군으로 통합됐다.

신호탄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일이 지난 3월11일에 양성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일어났다. 50여명의 학생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운동장을 돌았다. 주도한 인물은 보성전문학교 남진우와 선린상업학교 고원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학생들에게 서울의 상황을 알리는 동시에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사들의 설득으로 만세시위는 교내에서 맴도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독립을 향한 열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주민들을 자극했다.

■ 조국광복을 향해 힘찬 진군이 시작되다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는 3월 하순부터 커다란 활화산으로 용틀임하기 시작했다. 최은식·이덕순·이근수 등은 고종의 국장에 참례해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귀향했다. 각지에서 전해지는 소식은 이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침묵을 깬 이들은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참여를 독려했다. 이때 천안 출신인 홍찬섭(일명 홍창섭)은 처가집에 왔다가 합류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3월28일부터 4월1일까지 동리 단위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산발적인 만세시위는 4월1일 밤을 계기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약 1천명이나 참여한 원곡만세운동은 서막을 알렸다. 시위 군중은 오후 8시께 등불이나 횃불을 들고 내가천리 면사무소 앞으로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다음 “이제부터 면장을 끌어내어 태극기를 주어 선두에 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경찰주재소로 가자”라고 했다. 시위대는 면장 남길우와 면서기 정종두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으로 향했다. 양성면과 경계인 성은고개(현 만세고개)에 이르러 주동자들은 차례로 등단해 시위군중을 격려하는 연설을 토해냈다.

같은 날 양성면에서도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마을별로 뒷산에서 전개하던 시위군중은 면소재지인 동항리로 집결해 약 1천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면사무소,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렸다. 참가한 마을은 덕봉리를 비롯해 산정리·도곡리·추곡리 등이었다. 질서정연한 만세시위에 경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후 10시께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고 귀가하려는 찰나였다. 이때 원곡면민들 합류로 2천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양성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동시에 돌을 던졌다. 기세에 눌린 경찰들이 도망하자 주재소 사무실, 기숙사, 각종 문서와 기물 등을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이어 양성우편소로 가서 서류와 집기를 불태우고 전화선마저 절단했다. 면사무소의 물품을 파괴하고 서류 등도 불태웠다. 이어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과 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해 가옥을 파괴하고 가구류와 기물들을 파괴·소각했다.

■ 일제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하다

양성·원곡의 연합만세시위는 일제 당국에게 경악과 곤혹스러움을 안겨 주었다. 무단통치에 순종할 줄 알았던 한민족이 일시에 전면적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4월3일 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79연대 소속 장교 이하 25명은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서안성지역에 투입됐다.

경찰은 원곡면장에게 농사철임을 감안해 경찰서장의 연설을 듣고 나면 사면해 농사를 짓도록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16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성들을 4월19일 현재의 원곡초등학교 뒷산에 모이도록 가족·친지들을 설득했다. 이 말을 믿었던 시위 참가들 중 상당수는 지정된 장소에 모였지만 상황은 바람과 달리 돌변했다. 일본군은 주위를 포위한 뒤 몽둥이 등으로 일방적인 폭행을 가했다. 저항하거나 도주하려는 사람은 발포로 3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간단한 심문을 마친 후 361명은 상투를 줄줄이 묶어서 안성경찰서까지 약 30리를 동물처럼 학대하면서 끌고 갔다. 6월1일에는 군병력 36명이 파견돼 구속된 시위군중을 갖은 학대와 고문을 가한 후 127명을 기소했다. 뿐만 아니라 파괴·소실된 행정기관 재산과 일본인의 피해까지 부담시켰다. 정신적·육체적·물질적 고통과 공포심을 주민들에게 안겨 주는 야비한 보복으로 일관했다.

■ 역사적인 한 페이지로 기록되다

대중화·일체화·비폭력화는 민족대표가 내건 행동강령이었다. 대중화·전국화는 운동 과정에서 이뤄졌으나 평화적인 만세운동은 진행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일제 군경은 총칼을 휘두르고 발포함에 따라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현장에서 격분한 시위군중은 몽둥이, 낫, 괭이 등 농기구와 돌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 조국광복을 위해 안성군 연합만세운동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함께 치열하게 저항했던 3대 실력 항쟁지 중 하나였다. 1천200여호에 불과한 지역에서 2천여명이나 가담한 사실은 주민들의 강고한 결속력과 투철한 항일의식을 유감없이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로 항쟁을 통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1919년 4월1일부터 2일까지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고 해방구를 쟁취했다. 들불처럼 일어난 만세운동은 식민지배의 모순과 난맥상을 일깨우는 생활현장이자 교육현장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어디까지나 손아귀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반대로 한인들의 일본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굳은 의지도 결단코 일본의 결심만큼 못하지 않으리라”라는 어느 서양인의 기록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일제 군경의 악랄하고 천인공노할 만행에 대한 인간적인 분노는 우리들의 심금을 울린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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