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안개는 어떤 맛일까?
“물안개는 아무데서나 매일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더 신비로운 거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애주가 선배는 뜬금없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을 운 좋게 보면 삶이 달달해지는 것 같지만 금방 사라져버려서 씁쓸해지는 게 물안개라고. 그런 점이 꼭 술과 닮았다고.
달콤 쌉싸름할 것 같은 물안개의 맛을 수제 맥주로 재현한 ‘맥주 덕후’가 있다. 바로 경기도 가평군 상면에 브루펍(맥주를 현장에서 만들어 파는 맥주 양조장)을 차린 크래머리 브루어리 이지공 대표(42)다.
지난 3일 이른 아침 이 대표를 만나기 위해 기자가 찾은 크래머리 브루어리는 조용하고 한적한 휴가지 느낌이었다. 이곳은 매일 오전 11시부터 밤 10시까지 맥주를 즐기러 온 이들을 위한 소통의 장으로 변신한다.
공간은 브루어리와 펍으로 이뤄졌다. 실내 펍과 브루어리에 앞서 야외 비어가든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커다란 캠프파이어용 화덕과 캠핑의자, 벽 따라 놓여있는 테이블이 호젓한 캠핑장을 연상케 한다.
반갑게 맞아주며 안내하는 이 대표도 마치 캠핑장을 설명하는 듯했다. 밤에는 비어가든 한 가운데서 모닥불을 피워 ‘불멍’하며 맥주를 즐길 수도 있다고. 상상만 해도 힐링이 될 것 같다. 주변도 공원에 온 듯 ‘초록초록’ 하다. 사방에 숲이 보이고 근처에는 북한강 지류인 조종천과 아침고요수목원, 경기도잣향기푸른숲이 있다. 숲과 물이 좋은 동네니 맥주 맛도 기대할 만하다.
■수제 맥주 제조 과정 구경은 덤
보기 드문 장점도 있다. 건물이 탁 트인 통창으로 이루어져 있어 야외 비어가든에서도 실내 펍에서도 양조장이 훤히 들여다보여 수제 맥주 제조 과정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내친김에 기자는 양조장 안에 들어가 맥주를 만드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청결. 이 양조장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이 단어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수제 맥주는 깨끗한 환경에서 만들지 않으면 이상한 맛이 날 수 있는데 작업장은 물론 장비 세척, 캔 세척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양조장에서 모든 공정을 처음부터 볼 수는 없었지만 기계 안에서 끓고 있거나 캔에 담기는 모습들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맥주 양조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공정을 거친다. 첫 번째 단계는 당화다. 탱크 안에 곡물을 넣어 분쇄한 후 미지근한 물에 한 시간 이상 두어 당분을 뺀다. 식혜를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공정이라 이해가 쉽다. 두 번째는 여과조를 통해 곡물 건더기를 걸러내는 과정이고, 세 번째는 자비조에서 살균과 수제 맥주 핵심 원료인 ‘홉’을 넣는다. 네 번째는 침전조에서 홉 찌꺼기를 걷어내고 맑은 빛깔의 맥주를 얻어낸다. 다섯 번째는 발효다.
이렇게 맥주가 완성되면 마지막으로 병입 단계에 들어간다. 세척된 무균 상태의 캔에 맥주를 담고 라벨링 하면 제품으로 탄생하는 것. 맥주를 마실 줄만 알았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전혀 모르는 이들도 이 과정을 보게 되면 맥주가 새롭게 느껴질 듯하다.
■맥주가 ‘지역色’을 입으면 생기는 일
그렇다면 물안개를 재현한 수제 맥주는 대체 어떤 맛일까. 맥주 이름은 ‘가평물안개’다. 가평 조정천에서 피어나는 흐릿한 물안개처럼 헤이지한 IPA(인디아 페일 에일) 맥주라고 알려지며 주목을 받았다. 브랜드 이름을 알린 1등 공신인 셈.
가평 지역의 특수성을 담은 로컬맥주인 만큼 궁금증은 컸다. 하지만 펍 한켠에 있는 맥주 냉장고 속에는 ‘가평물안개’가 없었다. 필스너 맥주만 조금 남아 있을뿐.
이 대표는 “가평물안개의 경우 매달 3천 캔을 생산하지만 금방 품절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기서 취급하는 수제 맥주는 20종이 넘지만 ‘가평물안개’ 가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아직 5% 미만"이라고 밝혔다. 공급이 확대되는 속도보다 수요가 더 빠르게 늘고 있는 것. ‘가평물안개’ 인기를 실감함과 동시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눈 뜨자마자 고속도로를 달려 찾아왔지만 '가평물안개'는 구경도 못해보고 가게 생겼으니 막막해진 느낌이랄까.
'가평물안개’의 인기 비결에 대해 이 대표는 “국내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스타일의 맥주였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컸다. 달콤하고 헤이지한 맛이 젊은 여성층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헤이지한 맛은 대체 어떤 건지 더 아리송해진다. 그런 기자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 대표는 직원들에게 전화를 돌려 출고 준비 중인‘가평물안개’ 한 캔을 부랴부랴 공수해왔다.
덕분에 귀한 ‘가평물안개’를 접할 수 있었다. 캔을 따자마자 ‘이거 과일 맥주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달콤한 과일향이 느껴졌다. 이 대표가 설명한데로 헤이지한 느낌은 유리잔에 맥주를 따른 후 색을 보고 알았다. 황금빛의 맑은 색이 아닌 특유의 탁함(?) 이랄까.
살짝 맛을 보니 쓴맛도 도드라지지 않았다. 맥주 본연의 단맛, 쓴맛, 과일맛 등이 전체적으로 잘 어우러져, 어느 한맛이 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수제 맥주 특유의 깊고 진한 풍미가 일품이었다. 알코올 도수는 6.5%. 술에 약한 사람도 별 거부감이 없을 만한 ‘착한 도수’다.
■역경 속 노력으로 얻어낸 ‘최우수 로컬 크리에이터’
이 같은 수제 맥주 개발로 크래머리는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해 발굴한 로컬 크리에이터 로컬푸드 부문 최우수팀으로 뽑혔다. 그래서인지 이 대표를 본 첫 느낌은 성공한 창업가의 여유로움이 묻어났다고 해야 할까. 간혹 그를 보고 ‘강남에 빌딩 몇 채 있으시겠다’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손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의 부러운 시선을 받기까지 그도 숱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다.
세간에는 창업 전 ‘번듯한 은행원’이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은행에서 인턴만 오래 했을 뿐 취업 실패의 쓴맛을 톡톡히 봤다. 서른이 되도록 한국에선 번듯한 일자리를 얻지 못했고 결국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난 독일에서 현재 동업 중인 이원기 공동대표를 만나 수제 맥주의 세계로 들어온 것.
수제 맥주 만들어 파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2015년 한국에 돌아와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다가 안산에서 30평 남짓하게 시작했지만 당시 대중화되지 않은 시장이어서 불가능했던 유통과 저조한 매출로 어려움을 겪었다. 코로나19로 소상공인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지만 그래도 지난해 연매출 약 9억 7천여 만원을 달성했다.
그렇기에 이 순간에도 로컬 크리에이터를 꿈꾸며 창업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그는 신신당부했다. 이 대표는 “노력 많이 했는데도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이제 성장하기 시작한 저희 모습만 보고 헛물켜는 분 있으실까 우려된다. 로컬로 타깃을 잡는다면 무리하게 따라 하지 말고 특정 전략을 세워 특징이 부각되는 방법을 추구하라"고 했다. 조언마저도 아로마향의 수제 맥주 같았다.
글·사진=황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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