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영 칼럼] 외교라는 고급 마케팅 기술에 대한 조언

“국가의 이익을 위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외교의 사전적 의미다. 즉, 외교란 국가의 이익을 바탕에 깔고 주권국가 간의 평화적인 방법으로 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종의 고급 마케팅 기술인 것이다. 마케팅 측면에서 보면 본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는 버리고 일부는 취하면서도 가장 이익이 됨 직한 사안에 심혈을 기울이는 게 기본이다. 그렇기에 외교는 양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마주해야 하며 미리 예단해 많은 것을 내어 줄 필요는 없으나 많은 것을 얻어 왔을 때 외교적으로 성공했다고 통상적으로 얘기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를 자처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는 어떠한가?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어 왔을까? 우선 일본과의 외교 성과를 한번 보자. 애석하게도 방일 정상회담을 통해 기억나는 단어는 ‘제3자 변제’, ‘후쿠시마 농산물 수입’ 등 우리가 준 선물 보따리에 반해 물잔의 반을 채우면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우리라던 당찬 외교적 포부와는 전혀 다르게 강제징용, 독도의 교과서 기술 등 국가적 자존심은 사라지고 굴욕적 외교에 대한 청구서만 잔뜩 받고 돌아왔다. 이를 증명하듯 광복 이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일본과의 외교에 대해 시국선언이 릴레이로 이뤄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한두 곳의 대학도 아니고 시대의 거울이라 할 수 있는 대학교수들이 학교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이러한 시국선언을 릴레이로 진행한 경우가 또 있을까? 그렇다면 이를 계기로 한 번쯤은 외교정책을 되짚어봐야 했다. 하지만 수많은 교수의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그러지 않았다. 이번 방미의 성과는 무엇인가? 대통령실과 여당은 역대급 성과라며 벌써 온 거리에 현수막으로 방미 성과를 자찬하고 있다. 하지만 방미 전부터 대통령실 도청 문제로 인해 동맹임을 의심케 하는 일들이 벌어졌으며 방미 전에 가졌던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를 통해 전 국민은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이전부터 ‘바이든, 날리면’의 듣기평가에 이어 “주어가 생략됐다”는 독해평가까지 해야 했다. 이로 인해 현재 경제적, 안보적 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한 중요한 방문임에도 미국과의 회담으로 인한 줄다리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고 힘이 빠져버려 외교적 성과는 시작부터 엉망진창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방문의 실제적 효과는 있었을까?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를 자처했던 대통령인 만큼 안보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경제 쪽에서 무언가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나 반도체지원법 등 굵직한 문제가 많이 있었음에도 너무 안보 문제에 치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성과를 만들지 못했다. 7조원대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으나 오히려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 지난 2년간 133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누가 봐도 손해가 막심한 거래다. 오죽하면 대통령의 의회 연설에서 미국 내 한국 기업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얘기할 때 모든 의원이 기립 박수를 쳤겠는가? 이것만 봐도 누가 이익을 본 거래인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역대급 성과라고 자찬하고 있는 안보에서도 미국이 요구하는 진영론적 국제관계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적 아니면 아군’이라는 인식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북·중·러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며 특히 북한의 무력시위와 핵 개발이 오히려 거세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사실상 핵 공유’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미국은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는 것만 봐도 미국은 겉은 손을 맞잡은 동맹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대리전으로 직접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게 한다는 화려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외교는 ‘적 아니면 아군’이라는 가치보다는 실리다. 당연히 미국과의 동맹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는 미국과의 평등한 입장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외교는 상황을 좋게 만드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상황 악화를 방지하는 것도 중요함을 명심하라. 제발 미국에만 편중돼 있는 ‘서방외교’가 아닌 전 세계 누구와도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사방외교’를 하라.

[윤준영 칼럼] 쿠오 바디스, 대한민국?

요한복음서 13장 36절, 시몬 베드로가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도미네, 쿠오 바디스?·Domine, quo vadis?).” 예수께서 답하시길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쿠오 바디스’는 고대 로마의 부패와 잔인함을 묘사한 서사시로 출간된 지 10년 만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향락을 일삼고 국정을 돌보지 않으며 시적 영감을 얻기 위해 로마에 불을 지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수로를 통해 급박하게 대피하는 장면과 같은 네로 궁정의 퇴폐적인 향연이나 초기 기독교도들이 겪는 박해 등의 생생한 묘사가 일품인 작품이다. 네로 황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로마시민들이 폭도로 변하자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먹이로 주고 불태워 죽이기도 하며 살육쇼를 벌인다. 이를 영화화한 영화 ‘쿼바디스’에서 네로 황제는 “난 군중의 목이 딱 한 개였으면 좋겠어. 그걸 잘라 버리게”라는 소름 돋는 대사까지도 날린다. 고대 왕정시대에나 가능한 폭력적인 정권과 말로를 보여주는 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이다. 현재의 대한민국과 비교해 생각해 보자.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왕정시대에나 가능했다고 생각했던 참혹한 국가폭력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대한민국을 감싸고 있다. 일관된 기조의 국정운영 철학이 없다 보니 지향하는 바 없이 우왕좌왕하며 삐걱거리는 일이 허다해 ‘국정난맥’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으며 국정 운영의 기본 3요소인 ‘정책’, ‘인사’, ‘소통’ 모두가 불협화음뿐이다. 전 정부와의 차별로 소통을 강조하며 시작했던 ‘도어스테핑’은 어느샌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오히려 미국 국무부 국가별 인권보고서에는 대통령실과 여권의 언론에 대한 과도한 대응이라며 ‘폭력적’이라고 했고 인사는 장관부터 얼마 전 발생했던 국가수사본부장 자리까지 참사라고 할 지경으로 망가졌으며, 정책은 대표적으로 주 69시간제 근로에 대해 정부, 대통령, 대통령실 모두 다른 얘기로 우왕좌왕하며 중심을 못 잡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반도체 위기로 7개월째 수출은 급감해 사상 최악의 무역적자를 연일 경신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대비는 없고, 더욱이 얼마 전 친일외교 논란으로 역사적 인식과 민족적 자부심마저 흔들리고 있는 지경이다. 이에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중요한 일들은 다 입법이 필요하다. 간절한 목표가 있으면 야당이 원하는 걸 좀 주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걸 할 텐데 지금 정부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 그래서 국회 의석이 적어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 노태우 대통령 때도 여소야대였다지만 그때와 달리 통과시키고자 하는 법이 없어 소수파이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이런 여당 처음 봤다”라고까지 말한다. 특히 일본과의 정상회담에 대해 종교계와 학계, 심지어 학생들까지도 유례없는 릴레이 시국선언을 하는 상황임에도 그들을 ‘반일감정으로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으로 치부하고 일본은 연일 정상회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한국 정부를 믿어 달라”는 얘기뿐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이 소통 자체가 부재다. 과연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quo vadis, korea?).” 안타깝지만 이런 상황들을 정리해 생각해 본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혼란의 연속으로 흡사 고대 로마 네로 황제 시대와 다를 것이 없다. 정치판에는 아첨꾼들이 판을 치고 민생을 돌보지 않으며 국정 운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로마의 기독교인처럼 정치색을 씌워 박해한다. 그렇다면 왕정시대에 네로 황제가 마지막까지 행복했는가? 국가적 폭력과 독재는 그 끝이 명확하다. 영화의 마지막처럼 로마시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위정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현명하고 강한 의지를 지녀 지금은 촛불이지만 예수께서도 말하신 대로 나중에는 모두가 따라와 들불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윤준영칼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이념의 차이와 지배층 및 피지배층의 견해차로 인한 갈등을 정치적 이슈화해 이익을 챙기려 하는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해 분명히 존재한다. 일제강점기가 그러했고 6·25전쟁이 그러했으며 5·18민주화운동과 제주4·3사건도 그러했다. 일제강점기는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고 6·25전쟁 또한 국가와 국가 간의 갈등이었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과 제주4·3사건은 사회가 불안정한 시기에 자국민을 향해 정치적 반공 정서를 부각하며 “북한이 개입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이용해 본인들의 정치적 세력을 단합시키고 적대 감정이 남아있는 북한이라는 곳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로 자행됐던 국가폭력이었기에 어떤 의미로 본다면 오히려 일제강점기나 6·25전쟁보다 더 잔혹하고 무거운 정치적 사건이다. 지난 13일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로 나선 모 의원은 제주 4·3평화공원을 방문해 “4·3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씨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고 얘기하며 진상조사가 이뤄지기까지 오랜 세월 제주도민 사회를 ‘색깔론’으로 괴롭혀 온 ‘제주 4·3 북한 지령설’을 또 꺼내 화두가 됐다. 곧바로 관련 단체들은 성명서를 내며 사과를 촉구했지만 “나는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4·3사건을 유발한 장본인은 김일성이라고 배워 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와 보수정권 모두에서 이념을 초월하며 인정해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기념일을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닌 탈북 국회의원이 부정했다. 오히려 단 한 번의 실언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과를 요구하는 관련 단체의 입장이 무색하게 이후의 합동연설회와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속적으로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고, 기자회견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얘기하는데 뭐가 망언이고 뭐가 피해자들과 희생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된다”고 강조하며 말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해당 의원의 발언에 선관위에서도 “선관위원이 해당 의원에게 지역 민심이나 국민 정서에 반하는 언행은 삼가줄 것을 구두로 공식 전달했다”고 MBC와의 통화에서 밝혔다. 전 세계 유일한 이념의 차이로 인한 분단국가 대한민국! 그렇기에 아직도 이념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한국 사회의 주요한 정치적 이슈이기에 교육현장에서는 통일을 강조하면서도 한국의 주적은 북한이라고 가르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의 헌법 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돼 있어 북한까지도 우리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실질적 지배를 하고 있지 않은 이북 5도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에서 도지사 및 시장, 군수를 임명한다. 이 말은 통일은 분명한 민족적 과제이지만 우리의 주적은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북한 정권이지 북한 주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나라는 북한이 무력 도발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 정권에 대한 규탄을 하면서도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4·3사건을 북한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모 의원은 다르다. 해당 의원은 소위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정권의 최일선에 있었던 분이었고, 북한의 엘리트층으로 단 한 번도 배고픔을 느낀 적이 없었던 분으로 정확히 얘기하면 우리가 인도적 입장으로 대해야 하는 북한의 일반 주민이 아니고 우리의 주적인 북한 정권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분이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배워온 내용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며 망언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북한에서 배워온 모든 것이 본인 말대로 사실이라는 얘기인가? 그런 논리라면 얼마 전 북한에서 조사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2위인 북한을 두고 152위인 대한민국으로의 망명을 왜 선택했는가? 북한이 정상 국가가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 망명을 선택해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나 되신 분이 북한 체제에서 학습하고 배워 온 내용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망언이 아니라는 발언은 상당히 모순적이며 상식 밖이다. 그동안 많은 그릇된 이념과 신념, 이념 간의 대립과 정치적 분쟁으로 우리는 같은 민족임에도 서로를 많이도 죽이고 다치게 했다. 그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죽어 버린 망자의 명예까지 2차로 죽음에 이르게 하지 말라. 해당 의원뿐만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정치인 모두에게 명한다. 제발 “더 이상 죽이지 말라.”

[윤준영 칼럼] 교육은 정치의 대상 아니다

2021년 5월16일,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이틀 앞둔 이날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5·18은 현재도 진행 중인 살아있는 역사이며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이 우리 국민 가슴에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머니투데이에 “(5·18이) 지금의 헌법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드는 원동력”이라며 “역사의 교훈을 새겨 어떤 독재에도 분연히 맞서야 한다. 독재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게 자유민주주의”라고 했다. 자유민주주의와 5·18정신을 강조하며 자유와 정의를 앞세워 윤 전 검찰총장은 그로부터 약 1년 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2023년 신년사를 통해 화두로 던진 윤석열 대통령의 교육개혁으로 새해 벽두부터 연일 시끄럽다. 특히 5·18민주화운동의 교육과정 삭제는 불과 1년 전 “5·18정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숭고한 정신으로 국민 전체가 공유하는 가치로 떠받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며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前文)에 삽입하는 데 찬성한다”고까지 했던 대통령의 발언으로 볼 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역사의 교훈이며 국민 전체가 공유하는 가치라고 강조했던 발언대로라면 오히려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그토록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5·18 교육을 강화하고 강조해야 하는 사안이 아닌가? 러닝메이트제 추진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러닝메이트제는 시·도지사 선거를 하면 공동 등록한 교육감이 자동으로 선출되는 제도로 사실상 시·도지사가 교육감을 지명하는 것으로 정당 공천을 금지하고 있는 기존 직선제를 완전히 뒤엎는 내용이다. 보수정권이 탄생할 때마다 나온 교육감 러닝메이트제 추진은 지난 MB정권에서도 시도했던 일로 교육의 정치화와 편 가르기만 두드러지는 모양새라는 지적이 강해 그동안 무산됐는데, 광역단체장이 12 대 5로 보수의 우세가 강했던 이번 선거에서조차 진보 교육감이 아홉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눈엣가시인 진보 교육감들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도 러닝메이트제를 화두로 던진 듯하다. 하지만 교육은 미래의 대한민국을 육성하는 ‘백년지대계’가 아닌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의 목표가 다를 수는 있지만 12년 동안 공교육 체제 안에서 배우고 학습해 나아가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정권이 최대 세 번 바뀔 수 있는데 이때마다 학습해 온 목적과 방향이 다르다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생각을 정권의 입맛대로 바꿔 강조하거나 축소해 가르친다면 자라나는 학생들이 사실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관을 지닐 수 있겠는가. 하물며 헌법 전문에 삽입하는 것도 찬성한다던 윤석열 정부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후 거의 대부분의 세월 동안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명예회복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금 이들에게 상처를 주려 하는가. 정치적 관점이 아닌 교육적 관점으로 본다면 오히려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올바르게 기록하고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 아닐까. 물론 교육부는 이번 사건이 해프닝이라고 땀 흘리며 변명하고 있지만 이주호 장관은 이미 MB정부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삭제를 지시한 바 있어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금번 교육개혁에서 나온 5·18민주화운동, 성평등, 성소수자, 노동존중교육 등의 용어 삭제나 교육감 러닝메이트 같은 이 모든 상황이 정치적인 목적이기에 정치가 교육에 개입되는 현실이 현직 교육자로서 너무나 안타깝다. “교육의 진정한 목적 중의 하나는 부단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인간을 두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맨델 크레이턴은 말했다. 교육을 정치적으로 보고 득과 실을 판단하지 말고 역사적 상황과 사실 속에서 부단히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 능동적 역사관과 가치관을 가지는 아이들을 길러내도록 교육만큼은 정치의 정쟁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라.

[윤준영 칼럼] 대통령의 가치관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은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투영되고 우리는 그가 지니는 가치관으로 사람을 예측하거나 판단한다. 폴란드 출신의 심리학자 밀턴 로키치는 가치관에 대해 ‘특정한 행동 방식, 존재 양식이 그 반대의 것보다 개인적,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하다는 기본적인 신념’이라고 말하며 가치관은 옳고 그름, 바람직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을 선호하고 선택해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는 준거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통령이 가지는 가치관은 어떠할까. 최초의 출퇴근 대통령, 홍수 피해와 10·29 참사라는 국가적 재난, 노동계와의 협상, 야당과의 예산안 협의, 해외순방 등을 보며 대통령의 생각과 태도는 대한민국이 나아가는 방향이며 국민들의 생활과 직결돼 있기에 그동안 보여 온 대통령의 언행을 통해 대통령의 가치관을 생각해 봤다. 첫 번째로는 언론관이다. 첫 용산 출퇴근 시대를 연 대통령답게 그는 언론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약속하며 첫 출근날부터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을 시작했고, 대통령의 첫 대답은 “일해야죠”라는 웃음 띤 얼굴이었다. 하지만 8월 미국 순방을 계기로 이 모든 것이 변했다. 정부와 여당은 대통령의 욕설을 보도하며 대통령을 비판했던 언론에 ‘가짜뉴스’라는 프레임을 씌워 항의와 보복을 강행했고, 대통령은 사적으로 가까운 관계라며 특정 언론과는 사유재산이 아닌 전용기에서 환담을 나눌 정도로 가깝게 지내나 비판적인 언론은 국익을 이유로 탑승도 배제했으며 대통령에게 이에 대한 사유를 따져 묻는 기자와 대통령실은 언성을 높이며 언쟁까지 벌였다. 그 결과는 잠정적 출근길 문답의 폐지이며 국익을 이유로 대통령의 회담과 활동에 대한 취재도 대통령실에서 주는 사진과 내용으로만 보도하라고 하고 있다. 맘에 안 드는 언론에 눈과 귀를 철저히 막았다. 두 번째로는 노동관이다. 불과 6개월 전인 6월10일, 화물연대 총파업 돌입 나흘째 되던 날 대통령은 “노동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은 정치인이 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쟁점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정부의 중립을 강조한 후 나흘 뒤인 6월14일 화물연대와 국토교통부의 협상이 타결됐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현재 정부는 노동계와의 대화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노동계에 매정하게 권력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 여당은 소위 ‘노란봉투법’에 대해 ‘황건적 보호법’이니 ‘불법파업 조장법’이니 하는 자극적인 언사로 몰아가고 안전운임제와 일몰제의 법제화를 부르짖는 노동자를 외면하며 국제노동기구(ILO)가 화물연대 업무개시명령에 대해 정부의 의견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직접 ‘범죄행위’라는 말로 강경 대응을 시사했다. 운송 거부를 범죄행위라고 대통령이 직접 정의 내린 것이다. 대통령은 본인의 말처럼 노동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다만 비정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정치관이다. 대통령은 여당의 지도자가 아니고 국민 모두의 지도자가 돼야 함에도 6개월 동안 여당의 지도부와 심지어 ‘윤핵관’이라고 불리는 인사들과는 부부 모임을 할 정도로 가까이 지내면서 야당의 지도부와는 단 한 차례도 면담하지 않았다. 임기 초반부터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코앞에 둔 지금까지 협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거대 야당이 협조해 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은 책임 있는 자세로 설득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협치는 고사하고 야당과는 아예 담을 쌓겠다는 얘기다. 우리는 사상 초유로 맘에 안 드는 언론에는 눈과 귀를 막고 맘에 안 드는 노동자에게는 비정하며 맘에 안 드는 정치인에게는 담을 쌓고 있는 이분법적 가치관을 지닌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대통령의 가치관은 ‘내 편 아니면 적’이다. 이분법적인 가치관을 지닌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편이 아니라도 부디 많은 국민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민주주의는 죽었다

논어를 보면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체계에 대해 물었고 공자는 답했다. “첫째, 식량을 충족시키고 둘째, 군비를 충분히 하고 셋째, 백성들을 믿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공은 다시 “만부득이하여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셋 중에서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무기를 버려라”라고 했다. 자공이 또 묻기를 “만부득이하여 또 하나 더 버려야 한다면, 나머지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양식을 버려라. 자고로 삶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그러나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공자의 말을 넓은 의미의 현대식 표현으로 바꾼다면 국가보다는 정권이, 백성보다는 국민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기에 이를 현대식 의미로 표현한다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정권은 성공할 수 없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말이기에 꼭 자유롭지 않고 폭압적일 수도 있어 다수의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는 때로 어이없는 결정을 하게 된다. 프랑스 철학의 거장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에서 “민주주의는 신을 모독하고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죽였고, 히틀러와 같은 인물을 지도자로 선출해 전쟁을 이끌기도 한다”며 국가의 주인인 국민 다수가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모순을 역설한다. 하지만 심지어 공산 독재 정권을 포함해 자유롭지 않고 폭압적인 모순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래서 아무리 다수를 차지해 정권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투표로 인한 선택이기에 국민들이 시시각각 정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여론에 지도자들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국 다수의 국민이 바라보는 바로미터이고 ‘다수에 의한 지배’의 상징성에 있어서도 여론은 무시할 수 없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매주 지도자에 대한 지지도와 정책의 찬반을 체크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한번 보자. 분명 윤석열 대통령은 근소한 차라 할지라도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획득했고,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투표를 통한 선택이었기에 그 결과는 5년이 지속돼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다수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가졌어도 그 뜻을 국정에 반영해야 그것이 비로소 대통령 스스로가 연신 입에 담고 있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여론이라는 것은 투표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단 한 번의 결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 않고 국민들의 계속적인 참여를 통해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지속적으로 알려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권 창출 5개월 만에 지지율이 30%도 되지 않음에도 “지지율은 신경 쓰지 않는다.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한다면 그 국민은 대체 누구이며, 본인을 지지해 주는 30%만이 국민인가. 거의 49%의 선택을 받아 정권을 창출했음에도 불구하고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30%도 안 되는 지지율로 떨어진다는 것은 결국 본인을 선택했던 국민들도 본인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특정 정당의 수장이 아닌 국민의 수장이기 때문에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이 정녕 국민을 위하고 있는가. 30%의 국민만을 보고 가는 대통령을 가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애석하게도 이미 죽었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노란봉투법’을 아십니까?

‘노란봉투법’. 노조의 파업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안으로 2014년 법원이 쌍용차 파업 참여 노동자들에게 47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한 시민이 언론사에 4만7천원이 담긴 노란 봉투를 보내온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로 인해 시작된 해당 법안은 노조법상 손해배상 책임이 면제되는 합법 파업의 범위를 확대하고 노동자 개인에게는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핵심이었으나 19, 20대 국회에서 연이어 폐기됐고 현재 21대 국회에도 발의돼 계류 중이다. 얼마 전 다리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0.3평의 조그만 철골 감옥에 하청업체 노동자가 스스로를 가둔 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 놓고 목숨을 걸어가며 투쟁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이다. 노사 양측의 극적인 타결로 문제가 해소되나 싶었지만 사측인 대우조선해양은 파업을 벌인 하청노조 집행부 5명에게 불법 파업을 이유로 47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배상금액은 1인당 95억원으로 근로조건 향상을 외치며 최저임금 수준의 200만원을 받는 노동자에게 월 200만원씩 400년을 갚으라는 건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한 금액으로, 노동자에게는 거의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다. 소송에서 승소한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받을 수 없는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사측은 하청노동자에게 배상금을 받아 손실을 메울 목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표면적 이유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불법 파업을 근절한다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노조 길들이기’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부터 국민의힘 의원, 대통령실까지 모두 이 사건에 대해 단호한 메시지를 내고 있기에 대선 당시부터 노조와 대립각을 세우는 발언을 쏟아내고 부자감세를 실행하고 있는 대통령을 생각해 보면 상식선에서 ‘불법 파업 근절’이라는 이유보다는 ‘노조 길들이기’라는 명분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당연히 불법 파업은 근절돼야 한다. 하지만 법은 사람을 이롭게 할 때 가치가 있는 만큼 그 판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누구를 이롭게 하는 것인가를 판단하는 게 아닌가. 교섭 당사자가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한 대우조선해양이나 원청이 대화에라도 나섰다면 손해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도급계약에서 이미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결정됐다는 이유로 헌법이 보장하는 파업권조차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 모순의 계약서 앞에서는 불법이 돼버린다. 결국 법과 원칙을 강조해 불법과 합법으로 나눠 판단했다고 하지만 원청과 하청 사이의 구조를 정당화하는 불합리하고 나쁜 법을 지키기 위해 손해배상이라는 더 나쁜 법이 이를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모두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노란봉투법은 시작부터 생겨난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 모순의 룰을 현재의 잘못된 잣대로 판단하지 말자는 얘기로, 노조의 불법을 다 면책하자는 것이 아니고 원청과 하청의 잘못된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권성동 의원은 이를 두고 “불법 파업을 조장하는 ‘황건적 보호법’에 불과하다”는 모욕적인 발언까지 했다. 그렇다면 황건적의 난 당시에 황제와 사적 관계를 이용해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환관과 외척이 그들의 폭정으로 인해 좌절과 실의에 빠진 선량한 농민인 황건적보다 낫다는 이야기인가.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 명언이 숨어 있다. “뭉치면 백성이요 흩어지면 도적이다.” 대통령실이나 여권의 정치인들이 이 영화를 봤다면 노란봉투법이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이 시기에 뭉쳐 있는 백성의 절규를 단 한 번만 되돌아보라. 진정 그들이 흩어진 도적이 되길 원하는가.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공감

공정과 상식을 정부 기치로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00여일이 지났다. 그러나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한 득표율이 무색하게도 역대 최단시간 동안 지지율이 20%로 급락했으며, 심지어 미국의 모닝컨설트가 11일 공표한 전 세계 22개국 정상들에 대한 지지도 조사에서는 긍정 평가가 19%로 전 세계 꼴찌의 불명예를 안았다.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들에게 많은 기대감으로 높은 지지율을 받을 수 있는 임기 초반에 무엇이 이러한 사태를 만들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대통령 및 보좌진들의 공감(共感, empathy)능력의 결핍이 불러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공감이란 ‘아, 그럴 수 있겠다’, ‘이해가 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등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상대방의 느낌, 감정, 사고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해된 바를 정확하게 상대방과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기에 공감이라는 영단어 ‘empathy’는 문자 그대로 안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감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능력은 단순히 학습으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함께하고 말 그대로 상대방 안으로 들어가서 고통이나 감정을 이해하려는 반복적 노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지는 것이다. 수해 현장에 노란색 점퍼를 입고 기자들과 보좌진들을 대동해 방문하고 “내가 사는 아파트가 고지대인데도 1층에 벌써 침수가 시작이 되더라”라고 얘기하며 수재민들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말한 것은 사태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특히 여당의 지도부는 수재민을 돕겠다고 출동한 현장에서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등과 같은 망언을 뱉어냈다.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대통령과 국민을 위해 ‘오직 민생’을 외치는 여당이 공감능력이 있다면 단순히 사고현장에 나타나 보여주기식으로 ‘공감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항상 사태가 발생한 후에 공감한다고 하는 말과 행동은 결국 언제, 어디서든 그 한계를 드러내 문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고자 2017년도에 제정된 국가기념일이다. 말 그대로 국가의 행사이고 당연히 국가의 수장인 대통령이 주체해야 하는 행사임에도 대통령은 어떠한 메시지도 내놓지 않았다. 여당은 저녁 6시가 돼서야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는 이 아픈 역사의 외침이 절대 잊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라며 “피해자 할머니들의 편에 서서 증언과 역사적 기록을 수집하고 연구를 지원하겠다. 인권과 평화, 자유를 위해 외쳤던 소중한 역사들을 잘 보존하고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참석도 하지 않고 대통령이 어떠한 메시지도 내놓지 않은 이 상황에서 이러한 논평을 과연 공감한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 대통령은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잠시 속일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비법은 실체가 없고, 편법은 오래가지 못하며, 꼼수는 언젠가 더 큰 후유증과 역풍을 부른다는 얘기이다. 단순한 보여주기로 사람들을 잠시 동안 혹세무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감과 진정성이 없다면 이는 절대 오래갈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무엇이 진정 인도주의적인가?

지난 13일 대통령실은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을 통해 북송된 탈북자를 언급하며 "만약 귀순의사를 밝혔음에도 강제로 북송을 했다면 이는 국제법과 헌법을 모두 위반한 반인도적, 반인륜적 범죄행위"라고 밝혔다. 불과 3년전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국정원, 통일부 등 정부부처도 기존의 입장을 철회했으며, 심지어 외교부는 "보편적 국제 인권 규범의 기준에 비춰볼 때 당시 정부의 답변은 부족하거나 부적절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답변서 작성 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점을 대외관계 주관부처로써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반성의 입장까지 내놓았다. 북한의 영토와 북한주민은 분명 우리의 헌법에도 나와 있듯 대한민국의 영토와 주민이라는 인식에는 부정하지 않는다. 남북은 분명 우리의 의지보다는 국제관계의 질서에 의해 나누어졌고 현재에도 우리의 의지보다는 국제관계 힘의 질서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렇듯 특수한 상황이기에 북한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가 ‘인도주의’이다. 인도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인종, 민족, 국가, 종교 따위의 차이를 초월하여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꾀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사상이나 태도”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남북의 특수관계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 지곤 했다.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기아로 굶주리는 북한주민에게 쌀 등을 지원한다던지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하지 않는다는 것에 당연히 찬성하는 입장이다. 다만,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꾀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남북의 특수한 상황에서 상황마다 다르다. 분명 본인의 진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합동조사 내용을 보며 그들은 동료 16명을 무참히 살해한 흉악범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는 현재의 정부가 판단하기에 그러한 흉악범을 우리사회에 두는 것이 과연 우리나라의 안녕과 복지를 꾀한다고 판단한다는 것인가? 만약 우리 동포라 하더라도 한국인 부모님께 미국에서 태어난 이중국적자인 속칭 Komerican이 미국에서 저지른 살인범죄를 피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우리나라 정부는 어떻게 할까? 이런 경우에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동포이기에 보호를 명목으로 미국으로의 소환을 하지 않는 것이 인도주의적인가? 특히 이번에는 북한 문제만 얘기하면 늘 ‘퍼주기만 한다’, ‘굴욕적 외교다’라는 원색적 비난을 일삼았던 국민의힘이 이번 문제에 대해 국정감사와 특검까지 거론하는 모습은 ‘과연 인도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기에 충분하다 본다.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Whats the Right Thing to Do?)』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에 대해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닌 지속적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하여 상황이 정의를 만든다는 말을 하고 있다. 결국 법의 해석보다는 처해 있는 상황에서의 상황적 판단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기준이 된다는 얘기이다. 지금 우리에게 처해있는 ‘인도주의’라는 상황이 그러하다. 분명히 국가를 운영하는 주체는 국정운영의 기조가 있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한다”고 얘기하며 이번 탈북어민 북송문제를 제기했다. 인도주의적, 인륜적 차원에서 북한에 송환되었을 때 북한어민이 받을 불이익을 잘 알기에 같은 동포로써 북한 주민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북송을 금지 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사회의 안녕과 복지를 꾀하기 위해 법의 부재로 인해 사라져간 수많은 생명들의 생명과 인권을 위한 중대재해처벌법을 기업의 투자심리가 위축 된다고 해명하며 개정하겠다고 하지 말라. 우리 동포의 인권 이전에 우리 국민의 인권을 먼저 인도주의적으로 판단하라.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파티는 끝났다(The party was over)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발표됐다. 현지시간으로 10일 발표된 미국의 CPI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8.6% 상승했으며 초 인플레이션 시대였던 1981년 12월 이후 41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물가가 올라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시장의 예측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한가? 5월 기준 우리나라의 CPI도 글로벌금융위기가 있었던 2008년 9월 이후 13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이며, 5%대로 올라온 것도 13년 9개월 만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도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최대의 물가인상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요즘의 경제기사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물가 얘기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14일 물가안정을 위해 정부의 가용정책을 총동원 한다고 했으며, 16일에는 경제부총리 주재로 금융당국의 수장들이 한데 모여 비상 거시경제금융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회의에서는 ‘물가안정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라고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말하며 현재의 상황이 엄중하다고 하고는 있으나 감세정책 이외에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정부와 여당은 말로는 ‘민생안정’, ‘물가안정’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과거’만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다. 법인세, 부동산 보유세 인하, 52시간제와 중대재해처벌법 등 문재인 정부 이전으로의 회기만 보이며 위기에 대한 새로운 비전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에 16일, 한국국제경제학회 학술대회에서 원로경제학자들은 “물가를 안정시키려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관세를 0%로 하고 부가가치세를 깎아주는 현재의 물가 안정책이 그렇지 않아도 높은 원달러 환율을 더 높게 만들 가능성이 있고, 재정 수입을 줄어들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하며 중산층과 서민층을 위해 윤석열 정부가 관세와 부가가치세를 내린 것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물론 최근의 물가상승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과 글로벌공급망 위기가 주요 원인이기에 지금 정부의 탓은 아니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위기인 이러한 엄중한 시기에 감세를 통한 인플레이션 대응과 같은 지엽적인 방식으로는 단기적 관점에서만 효과가 있지 물가상승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관점인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15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는 연방기준금리를 0.75%p 올리는 소위 ‘자이언트 스텝’ 금리인상을 1994년 11월 이후 28년 만에 처음으로 단행했다. 3월부터 시작된 금리인상이 5월 인상, 금번 6월 인상을 거치며 미 기준금리는 2020년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경제침체를 막기 위해 유지한 기존 제로(0)금리에서 1.50~1.75%로 높아졌다. 이로써 우리가 우려하는 한국과 미국의 금리 역전현상이 다음 달 13일 금통위에서 우리나라 금리를 0.25%p 올리고 같은 달 27일 FOMC에서 ‘빅스텝’을 밟는 다음달이면 현실화 되어진다. 금리역전현상이 발생하게 되면 지금도 떨어져 있는 원화가치가 더 떨어지면서 현재에도 심각한 물가 인상이 더욱더 심화 될 수도 있다. “물가를 못 잡는 정권은 버림받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3월 31일 국민의힘 초선 의원 7명과 점심을 하면서 한 말이다. 새로운 정권의 2022년! 대통령 당선의 파티는 끝났고(The party was over) 이제는 고통을 해결해야 할 시간이다. 글로벌 위기상황에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윤석열 정부의 경쟁상대는 이미 지나가버린 문재인 정권이 아니다. 위기를 명확히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거시적으로 마련하여 말이 아닌 새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을 진정으로 보여줘야 하는 시간이다.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공정한 24시간에 대한 상식적 판단

지난 11일, 공정과 상식을 강조하던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첫 출근이 시작됐다. 서울시민 1천만명의 출근과 맞물려 같은 시간대에 출근하는 대통령의 첫 출근길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통령은 “글쎄 뭐 특별한 소감은 없습니다. 일해야죠”라고 당당하게 답변했다. 언론들은 일제히 대통령의 첫 출근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대통령의 출근길에 대해 서초에서 용산간 7㎞를 8분 소요해 출근했기에 우려했던 교통체증과 교통혼잡은 없었다는 우호적인 기사가 대부분의 언론사 메인기사로 등장했다. 심지어 ‘첫 출근 이상 無’라는 제목의 기사도 나왔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날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인 서울행정법원이 인용한 대통령 집무실 인근의 집회 허용에 대해서 언론들은 ‘시위몸살예고’, ‘주민들 날벼락’ 등 자극적인 언사를 마구 쏟아냈으며 13일에는 법원의 판결은 언급도 하지 않은 채 경찰이 집회를 금지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교통혼잡의 책임이 마치 시민단체에게 있는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며 물타기를 하는 듯 보였다. 대통령 탓의 정체는 문제가 없고 집회로 인한 정체는 이렇게 냉담하게 선택적으로 쓰는 언론의 기사가 불편해져 대통령의 출퇴근에 대해 시간적 관점에서의 기회비용으로 논평을 해보고자 한다. 과연 대통령 비서실과 언론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대통령의 출퇴근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까? 비록 대통령 출퇴근에 소요된 시간은 8분이라 하더라도 이는 차량에 탑승해 하차하는데 소비되는 시간이 8분이라는 것이다. 출발 전·후 교통통제를 감안하고, 서울시민의 바쁜 아침시간이 8분의 통제로 인해 정체가 풀리는데 최소 30분 이상 더 소요된 것을 감안하면, 청와대에 있었다면 날아가지 않을법한 서울시민 천만명의 시간이 기회비용으로 날아가는 셈인 것이다. 또한, 그 시간은 직장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힘든 학업으로 밤을 새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등교시간과도 맞물려 있기에 학생시절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아침의 1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대통령 본인의 첫 출근 소감에서 말했듯이 대통령으로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시민들의 출근과 등교의 불편을 야기하면서 시간을 빼앗아도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최소한 후보 시절 강조했던 공정과 상식이 있다면 대통령 본인도 출퇴근을 몇 십년간 했던 직장인이었기에 충분히 상식으로 알 수 있었을 바, 청와대를 나와 본인의 준비되지 않은 집무실 이전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불편을 야기하고 바쁜 아침시간을 빼앗은 점에 대해 사과를 먼저 했어야 했다. 대통령 출퇴근으로 인해 기회비용으로 빼앗은 것은 시민들의 시간만이 아니다. 출퇴근의 교통을 통제하기 위해 매일 동원되는 수많은 경찰들의 기회비용도 계산해 보라. 과연 이것이 언론들이 말하는 대로 단순 8분의 시간만으로 ‘첫 출근 이상 無’라 얘기 할 수 있는 상황인가? 우리 모두 윤 대통령의 기치로 내놓은 공정과 상식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길 바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정한 24시간이고 인간의 존엄에 있어 경중을 가릴 수 없기에, 대통령 한 명에게는 8분이지만 서울시민 천만명에게 8분의 시간을 매일 출퇴근의 기회비용으로 빼앗은 것으로만 계산해 보라. 윤석열 대통령은 준비되지 않은 청와대 이전으로 인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천만 서울시민의 8분 즉, 8천만분씩을 서울시민에게 빼앗은 것이다. 그렇기에 청와대를 나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했어야 했다. 대안이 없는 행동에 대해서는 무고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다. 인간에게는 모두 공정한 24시간이기에 상식적 판단이 무엇인지 대통령에게 기대해 보겠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칼럼] 행복한 대통령, 불행한 국민

지난 3월9일, 대한민국의 5년을 책임질 20대 대통령으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됐다. 탄핵으로 현 정권에서는 진행하지 못했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10년만에 다시 재개됐고 이제 그 활동을 마무리한다. 지난 약 2개월 간의 인수위 활동을 지켜보던 필자의 눈에는 윤석열 당선인이 후보 시절 늘 강조하던 “국민만 바라보겠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매일 행복감에 취해 웃고 있는 대통령과 다르게 불행이 예감됐다. 우선, 지난 2개월 간 인수위가 발표한 핵심 단어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이 청와대 이전 뿐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심장인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하겠다는 목적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것을 탓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국내·외적으로 위기의 순간인 이때 성급히 집무실을 꼭 이전해야만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냐는 것이다. 이전에 따른 비용도 문제이거니와 기존 수십 년 간 역대 대통령들이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하던 공간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이전한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국민들만 바라본다는 대통령 눈에는 인수위에서 주장하듯 국정운영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보일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한술 더 떠 최근에는 관저 논란까지 일고 있다. 인수위에서는 대통령 관저로 기존에 낙점해뒀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대통령 관저로 쓰겠다는 기존 계획을 한 달 만에 철회하고 외교장관 공관을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아닌 용산으로 집무실 이전,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아닌 외교장관 공관으로 관저 이동 등 두 차례나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정치권에서 제기돼 온 “성급하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대통령이다”라는 우려가 현실로 될까 불안했다. 특히나 이번 관저 이전에 대해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검토 할 당시 이미 공관이 노후화된 것에 대해 리모델링을 이야기 하며 “수수한 당선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인수위가 “다방면 고려”라고 선회하다 이제는 민주당에서 제기하는 배우자리스크에 대해 “배우자가 후보지를 둘러보는 게 왜 문제인가?”라고 반박하며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감과 실망감은 더더욱 커져갔다. 국방과 외교는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국제 질서의 불안함, 북한의 미사일 도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 등 굵직한 문제가 산적해 있는 지금 이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에서 사용하고 있던 시설에 대한 정확한 대체를 마련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취임 10여일 전에 계획을 선회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며 국민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동안 멀쩡히 운영하던 청와대 영빈관을 놔두고 굳이 고급호텔에서 만찬을 여는 등 역대 대통령 취임식 중 가장 큰 비용인 33억원이 투입될 것이라는 기사는 코로나19로 인한 국제 경기 침체의 상황에서 진행하는 행사라고 보기에는 공정과 상식을 기치로 낸 정부의 첫 시작으로 부적절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국민들은 향후 5년을 책임 질 새 대통령에게 임기 시작 전부터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매일을 행복에 도취해 움직이는 대통령과는 반대로 불안함을 느껴 행복할 수 없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 분석학자 디어도어 루빈은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행복하지 않은 대통령을 원하는 국민은 없다. 대통령이 행복해야 국민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대통령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국민은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대통령을 원한다. 행복하지 않은 국민을 가진 대통령은 무엇을 하더라도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새 정부에게 당부해 본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칼럼]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다

최근 경제뉴스를 핫하게 달구는 용어가 있다. 바로 스테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다. 스테그플레이션은 경기침체인 스태그네이션(stagnation)과 지속적 물가상승의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다. 보통 호황 때는 인플레이션이, 불황 때는 지속적 물가하락의 디플레이션(deflation)이 발생하지만 스태그플레이션은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물가마저 오르게 되는 상황으로 케인즈혁명이라고 불리며 그 당시 잘나가던 거시경제학을 한 번에 종식시키며 하이에크를 세계최고의 석학 자리에 올려놓고 노벨경제학상까지 받게 만들어 준 바로 그 경제괴물의 끝판왕 개념이 스테그플레이션이다. 하지만 하이에크조차도 명확한 스테그플레이션의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전 세계 모든 경제학자는 이 괴물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러한 괴물의 징조가 국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징후로 한국석유공사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난 7일 국내로 수입되는 원유기준인 두바이유 가격이 지난해 말 대비 62.3% 급등했다고 발표했으며,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제제 대상에 에너지 거래가 포함 될 경우 국제유가가 더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뿐만 아니라 원자재 가격도 급등하고 있어 물가상승의 압력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스테그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이를 대변하듯 얼마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안철수 인수위원장은 스테그플레이션의 초기 징후가 감지되는 바 충분한 손실보상과 재정건전성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대책 마련에도 속도를 내야한다고 주문했다고 했다. 그러나 안 위원장의 말뜻을 살펴보면 스테그플레이션의 해답이 없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손실보상과 재정건정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사실상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손실보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코로나19에 대한 소상공인 지원으로 50조원 손실보상을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후보시절부터 약속했다. 결국 50조원이나 되는 막대한 예산은 국민들의 세금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세금의 감면을 약속했던 정부이기 때문에 세금을 마음대로 올릴 수도 없다. 아무리 다른 복지비용을 축소한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전체예산의 약 8%나 되는 50조원이나 되는 비용을 감축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국채발행 밖에는 답이 없다. 하지만 국가채무비율이 2021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47.3%로 이미 전문가들의 우려수준인 40%를 넘어선 상황이기에 국채 발행도 만만치 않다. 더욱이 국채를 발행하게 되면 재정건정성은 당연히 악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국채를 늘려간다면 선심성 복지와 지원을 늘리려는 시도로 국채가 증가했다고 문재인 정권을 정권 내내 공격했던 본인들의 말에 모순이 된다. 이것이 안 위원장의 손실보상과 재정건정성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말은 서로가 모순되는 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렇게 대안이 없는 공약을 실천으로 옮기려다 보니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준비 부족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소상공인 지원은 허울뿐인 지원이고, 50조원이나 되는 국채를 통해 재정건정성은 더욱 나빠지게 돼 두 마리 토끼를 둘 다 놓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긴다. 또한, 이러한 지원으로 스테그플레이션을 극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준비부족의 공약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우를 범할까 걱정이 된다. 공약은 지킬 수 있을 때 빛을 발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차기정부가 선거를 위해 공약한 정책에 본인들의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칼럼] 진실인가, 정의인가

우리는 종종 일상에서 사실인데 뭐가 문제야?라는 말을 쓰고 들어왔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의로우며 공공의 안녕과 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과연 사실은 항상 정의로울까? 2020년도 6월에 개봉한 결백이라는 영화가 있다.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과연 법은 다 정의의 편에 서 있는가?, 과연 사실만이 정의인가?라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며 이 사회에서 가지는 정의의 시스템 오류로 인해 뒷맛이 씁쓸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법이 지배하는 법치주의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법은 만인 앞에 공정해야 하고 공공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한 시스템이며, 이러한 법이 사실(fact)을 넘어 진실(truth)되고 정의(justice)롭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이러한 질문을 뱉어내지 못했다. 과연 사실과 진실은 항상 같은 말이며, 진실은 항상 정의의 편일까?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진실과 정의라는 말과 마주하게 된다. 진실의 사전적 의미는 거짓 없는 사실로 사실은 실제의 일을 뜻하며, 정의는 마땅하고 공정한 것을 말한다. 공공의 안녕과 이익을 위해 마땅하고 공정하게 되기 위해 거짓 없는 사실이 필요하겠지만 사실이 과연 정의로운가?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No다. 과연 사실만을 말하는 세상은 정의롭고 공공의 안녕과 이익에 부합할까? 필자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실제로 교육역사제도생활 등 모든 분야에 있어 사실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며 전혀 정의롭지 않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손쉽게 알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는 범죄자를 연행할 때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다 하는 말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이를 미란다 원칙이라 한다. 1966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례로 제정된 이 원칙은 미란다라는 청년이 납치, 강간혐의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은 상태로 조사를 받으며 본인이 죄에 대해 자백을 하고, 자백자술서를 직접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술거부권과 변호인선임권 등의 권리를 고지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던 일을 계기로 생겼다. 아무리 인권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이 경우 중범죄에 대해 사실은 정의로 결론됐는가? 사실이 난무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뚱뚱한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하는 것, 머리가 나쁜 사람에게 머리가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 등을 사실이라는 이유로 얘기한다면 이 또한 정의로운가? 변하지 않는, 거짓 없는 사실을 우리는 진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원인(cause)이고 정의는 결과(effect)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정의로우려면 그 과정에서의 공동체의 공동선(共同善)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마이클 샌델은 공동체 내에서의 안녕과 이익을 위한 노력의 결과가 정의이기에 모든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 정의는 없다는 말을 한다. 이는 시대적, 상황적으로도 언제든 정의는 변할 수 있다는 말로, 거짓 없는 사실로 변하지 않는 진실과는 대조되는 말이다. 물론 진실을 외면한 정의는 살아남을 수는 없다. 진실과 정의가 늘 같으면 더 없이 좋겠지만 진실과 정의가 늘 합치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진지하게 공공의 안녕과 이익을 위해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진실한 세상인지 아니면 정의로운 세상인지를.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라는 말이다. 사회지도층이라면 법률에 나와 있지 않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이를 행하지 않을 때에는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비난을 받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분명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담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자유로운 시장만이 개인과 국가를 부자로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한 자유로운 개인의 이익추구라는 이기심이 결국 부의 원천이고 이를 통해 개인과 국가가 모두 성장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면서 아담스미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은 기업이고 이러한 기업의 가치는 주가로 결정된다. 그리하여 현재의 주식시장을 아담스미스의 주장에 대입해 보면 돈을 벌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기심이 집약적으로 집중돼 자유롭게 개인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끝판왕인 셈이다. 주식을 사는 사람 파는 사람 모두 하루 종일 움직이는 숫자놀음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환호를, 반대로 누군가는 눈물을 머금는다. 그렇다면 주식시장도 아담스미스의 주장대로 위법하지 않다면 자유롭게 본인의 이기심을 발휘해서 이익만 추구하면 되는 것일까? 최근 카카오페이 경영진의 스톡옵션 매도 사태를 한번 보자. 호재라고 생각되어 대대적으로 기업홍보를 하던 코스피 200지수에 편입된 당일 다수의 경영진이 한꺼번에 주식을 팔아치운 것은 아마도 주식시장이 생긴 이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 부정적인 장중 여론을 의식해 시간외 대량매매로 팔아치운 것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경영진 개인들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 한 일이며 어떠한 불법적 요소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로 인한 나비효과는 기업전체에 악영향을 줬고, 특히 기업을 믿고 투자한 개미투자자들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기업의 경영진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개인이기에 위법하지 않게 본인의 이익을 추구했다 하더라도 과연 이러한 행동은 정당한 것일까? 경영진들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도 문제지만 이른바 고래라고 불리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개인들의 도덕적 해이도 문제다. 만약 민간인이었다면 그냥 묻혔겠지만, 최근 모 대통령후보 배우자가 주가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과연 이것이 위법, 부당한 일인지는 조사를 해봐야 하겠지만 국민(개미)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서는 후보자의 배우자가 특정집단(고래)들과 과거 행한 일이 과연 정당하고 문제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인간은 무한경쟁의 경제 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해 나가기에 우리의 경제시스템은 마치 정글과 같다고도 혹자는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 사나운 정글 같다 하더라도 정글의 맹수도 힘이 있다 하여 아무 때나 함부로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라. 법률이 없는 사회는 문명화가 되지 않은 사회이지만, 도덕심이 없는 사회는 동물의 사회와 같다. 우리 스스로를 동물로 만들지 말자.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진정한 사과는 결국 본인을 위한 것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실수와 잘못을 연속적으로 행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벽의 선에 모든 것을 놓고 판단하다 보면 지나온 세월은 항상 실수와 잘못의 연속으로 후회만 남게 되고, 후회는 반성으로 이뤄져 본인의 삶을 더 발전시키는 토대를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할 만큼 우리의 삶에서 반성은 발전과 반전의 훌륭한 기회가 되곤 한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은 자아성찰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행해진 잘못은 사과로 표현돼야 한다. 사과는 반성의 결과이며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과정에서 보이는 진정성을 보고 상대방은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은 삶이 복잡하고 어렵다 느껴질 때 어린 시절 배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시작하는 단순한 지침 앞에 문제를 놓아보라. 삶의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가 아니라 바로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정정당당하게 겨뤄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면 용서를 구하라는 등 중요한 철학을 말해주고 있다. 지난 26일,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의 아내 김건희 씨가 본인의 허위이력에 대한 공식 대국민 사과를 기자회견을 통해 전달했다. 유력한 대선후보의 아내이기에 당연히 여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기자회견의 내용에 모든 국민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필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몇 번을 다시 들어보았으나 결국 자신의 사담과 남편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신파만 존재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사과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잘못해 사과하는 건지 명확해야 한다. 과정이 어떠했던지 간에 김건희 씨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에서 박사라는 최고의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 후보의 부인인데 이런 분이 하는 어법과 내용으로 보기에는 누구에게 무엇을 사과하는 내용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윤석열 후보와 관련한 사과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개 사과로 한차례 사과에 대한 진정성에서 오해를 받은 상황이라면 사과의 자세와 태도에 본인이 아닌 배우자라 할지라도 신중했어야 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 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 행동은 네 습관이 된다.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습관들은 하나의 가치로 완성되고 그 가치는 결국 인생을 완성해 주는 중요한 과정이 된다. 반복되는 사과의 진정성 시비가 붙을 때마다 국민은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의 기본적인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의심이 깊어질수록 국민의 피로감은 더해지고 불신은 누적돼 후보자 본인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다시 한 번 유치원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 보라. 우리는 분명 사과는 상대방에게 명확하고 진정성 있게 하라고 배웠다. 명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우리가 서로 실수하고 잘못을 하는 존재이기에 내가 앞으로 저지를 실수나 잘못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 되어준다. 그러므로 결국 사과의 가장 큰 수혜자는 본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통해 본인의 가치와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노동의 진정한 가치

독일의 저명 철학자인 페터 비에리(Peter Bieri)는 저서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에서 노동은 물질적 자립이라는 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준다고 말하며, 일 없이는 인간의 존엄도 없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하지만 MZ세대에게 이러한 얘기는 일명 꼰대들의 라떼처럼 느껴지곤 한다.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박탈된 N포세대로 대표되는 MZ세대들에게 노동은 그저 가치의 창출일 뿐이고, 가치의 창출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폐쇄된 공동체 안에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나면 가치가 상승하게 되는 특성상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노동과 화폐의 가치는 달라진다. 이를 증명하듯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일명 코린이(코인+어린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며 코인 투자에 대한 광풍이 전 대학가를 뒤흔들고 있다. 각 대학에는 코인동호회까지 등장하며 마치 새로운 기회처럼 MZ세대에게 다가오고 있다. 얼마 전 전국경제인연합조사에서는 20~30대 10명 중 4명이 암호화폐에 투자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변해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노동이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땀 흘려 일하는 노동과는 거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그도 그럴 것이 투자ㆍ투기로 부자가 된 사람이 주변에 적지 않으며, 기성세대들이 땀 흘려 일하는 직장이 이제 MZ세대에게는 부업이 되고 있다는 뉴스 등을 볼 때 암호화폐 시장은 달콤하고 솔깃하다. 경험을 강조하는 기성세대에 비해 MZ세대는 가능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가치평가의 수단으로 그들에게 암호화폐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최악의 실업난과 부동산가격 폭등으로 인해 청년들이 암호화폐에 투자를 많이 하는 것은 기회의 불평등이 낳은 결과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기성세대의 대표적 투자처로 여기던 아파트는 부동산 폭등으로 인해 MZ세대들에게 꿈만 같은 이야기이며, 노동력을 제공할 취업의 문턱은 점점 좁아져 자본주의 경쟁시장에서 MZ세대가 기성세대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발휘할 영역이 디지털 기반의 암호화폐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MZ세대가 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할 탈출구로 암호화폐를 선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들에게 암호화폐는 단순한 투자 수단을 넘어 화폐 이상의 가치이며 계층 이동의 사다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적 사고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부인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우리는 분명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저서 국부론을 통해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 생기므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량으로 정해야 한다고 정의했다. 현재보다 싼 값에 매수해 시간을 투입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노력으로 고부가가치를 이루고 있다고 암호화폐 투자자들은 말하지만, 과연 이것을 노동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또한 모든 사람들이 투자를 통해서만 부를 축적해 나간다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생산이 없는 사회에서 부의 축척이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과연 그런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노동은 생산이다. 투자는 생산이 아닌 소비에 가깝다는 점을 명심하며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소망해 본다.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