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산곡동 영단주택 관련 유물은 인천 부평역사박물관에 있는 인천시 등록문화재이다. 영단주택은 1940년대 초반 인천육군조병창의 근로자 사택으로 조성돼, 광복 후에는 미군기지, 부평4공단 근로자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근현대 부평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성을 담고 있다. 영단주택 관련 유물은 인천육군조병창 근로자의 공동주택이 광복 이후 일반에 불하된 정황, 당시 주택거래방식과 물가(토지 및 주택 가격, 정부수입인지세) 등 시대상과 영단주택에 대한 당시 인식, 관련 지명, 관련기관(조선주택영단, 대한주택영단, 대한주택공사)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사료다. 도시개발로 사라져 가는 영단주택과 관련한 실물자료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돼 인천시 등록문화재로 등록할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의 셋째 아들 안양군 이항(1480~1505)과 부인 능성 구씨(1480~1556)의 합장묘다. 안양군묘는 처음에 유배지였던 거제도에 있다가 능성 구씨 부인의 상소에 따라 중종 15년(1520년) 현재의 경기 남양주 지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1900년 고종이 명성황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지역으로 이장했다. 양쪽으로 망주석, 문석인, 양석이 각 1쌍씩 배치돼 있어 사대부 묘역의 전형적인 석물 구성을 갖췄다. 문화재청 제공
일제강점기 인천육군조병창 관련 유물은 인천 부평역사박물관에 있는 인천시 등록문화재다. 인천육군조병창은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인천 부평에 설치한 한강 이남 최대 규모의 군수제조시설로, 이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 및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조병창 근로자의 생활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인천육군조병창 관련 유물은 인천육군조병창 건설을 위한 토지매입 관련 문서부터 생산된 무기, 조병창 근로자의 서간(엽서)까지 인천육군조병창의 시대상(역사성)과 유물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어 보존가치가 있다. 일제 지배정책의 성격, 침략 전쟁과 강제동원 실상, 인천시 지역사와 지역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인천시 등록문화재로 보존,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선돌은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 시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자연석이나 자연석을 일부 다듬어 세워 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고인돌과 함께 세워진 선돌은 무덤 공간임을 알리려는 묘표석(墓表石)의 기능을 하며,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선돌은 벽사 또는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마을 수호물이다. 경계와 이정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처리 선돌’은 산 흐름이 끝나가는 구릉에 위치해 청미천과 그 주변의 들판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선돌은 화강암질 편마암을 이용해 다소 넓적하게 가공했으며, 윗부분은 평평하다. 처리 선돌은 청미천과 그 주변의 농사지을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얕은 구릉에 세워져 있어 풍요와 관련된 숭배 대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금풍양조장은 인천 강화군에 있는 산업시설로, 지난해 10월 인천시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건립된 금풍양조장은 지상 2층, 연면적 433㎡ 규모로 근대 공장의 건축양식이 보존·유지되고 있다. 건축 당시 원형을 대체로 유지하고 개항기 이후 강화도 지역의 산업화(양조산업) 과정 및 변화·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현재 양조장 1층에는 100년 이상 된 우물과 왕겨를 사용한 벽체가 남아있다. 2층에는 누룩을 띄우던 창고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하우현 일대는 청계산과 광교산이 위치한 덕에 박해를 피해 모여든 천주교인들의 교우촌이 형성됐다. 1894년 5월 초가 목조 강당 10칸이 건축됐으며, 1900년 하우현은 왕립 본당에서 분리됐다. 이후 1906년 하우현성당사제관이 지어졌다. 일반적인 성당과 달리 성당 뒤편에 성당과 나란히 사제관이 위치해 있다. 팔작지붕의 목구조와 석조벽체 그리고 온돌을 갖춘 입식 공간 구성 등에서 독특한 한양 절충식 근대 건축 유산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구 미쓰이(三井)물산 인천지점은 인천 중구 신포로에 있는 1930년대 유적건조물로, 지난해 인천시 시도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구 미쓰이 물산 인천지점은 본동(2층∙369㎡)과부속동(1층∙138㎡)으로 이뤄져 있으며 본동은 한국근대문화관기획전시관으로, 부속동은 수장고로 각각 활용 중이다. 조적조와 목조트러스가 결합한 건축양식과 정면의 고전건축 의장요소 등을 통해 근대건축의 과도기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고 상사(商社)건축의 중요한 요소인 물류창고가 부속채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인천시 등록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제7대 국왕세조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세조는 계유정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의 업적을 남긴 뒤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한 정희왕후 윤씨는 성종 14년(1483년)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 무덤방은 돌방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 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문화재청 제공
소래역사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협궤 증기기관차 ‘혀기-7형’은 1952년에 수원 기관차사무소에서 조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협궤용 증기기관차로 1978년까지 수인선 등에 운행됐다. 협궤 증기기관차는 수인선·수여선 운행 중단 이후 대부분 폐차됐고, 현재 국내에 6량만 현존하고 있다. 이 중 혀기-7형은 원형 보존상태가 양호해 국가적으로도 문화재로 보호할 희귀성이 있다. 현재 실제 운행됐던 소래역과 소래철교 인근에 전시되고 있어 소래포구만의 독특하고 지역적인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기에 수원과 인천 사이에 도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오지 등을 통과하는 노선으로서 서민들의 발이 되고 주민들과 애환을 함께한 수인선 협궤 증기기관차는 인천의 근현대 지역사를 보여주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대표적인 유물로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 제공
안표(1710~1773)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정숙(定叔)이다. 1754년(영조 3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에 봉직하다가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됐고, 1763년 헌납(獻納)이 돼장령(掌令)을 거친 뒤, 1764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대사간, 병조참의 등을 거쳐 여주목사를 지냈다. 교지에는 안표가 1754년 증광문과에 급제할 때 받은 홍패로 통덕랑 안표가 문과 병과 제9인으로 급제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 7월11일 개통, 1995년 12월31일까지 운영됐으며 수인선 폐선 이후 대부분 폐차해 전국에 5량만 남아 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협궤 객차(18028호)는 1969년 제작해 수인선에서 운행하다가 1995년 운행이 중단됐다. 2018년 인천박물관에서 1량을 인수받아 적합한 보전 처리를 통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현재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갖춘 협궤객차는 철도박물관에 있는 2량 외에 인천시립박물관에 있는 18028호가 유일하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기에 수원과 인천 사이에 도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오지 등을 통과하는 노선으로서 서민들의 발이 되고 주민들과 애환을 함께한 수인선 협궤 객차는 인천의 근현대 지역사를 보여주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아미타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꽉 채워 배치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19, 20세기 서울과 경기 지역 괘불도의 도상을 보여주고 있다. 수화승 상규가 그린 유일한 괘불도이면서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상규의 만년의 화풍을 살필 수 있다. 또 상규의 제자이자 근대기 단청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자성만봉이 금어로 인정받고 처음 임했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자유공원 플라타너스는 2015년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수령 측정 결과 130년 이상 돼, 인천시 보호수로 지정(2015년 6월29일) 관리하고 있다. 플라타너스는 주로 가로수로 식재돼 시야 확보를 위한 전지작업으로 원형이 훼손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는 인천 개항기 역사를 간직하고 인천상륙작전의 포화 속에서도 현재까지 버텨 오며 근현대사의 역사를 지켜온 산증인인 자연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높이 30.5m, 둘레 4.7m에 이르는, 고유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로서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1920년에 세워진 이 석교는 중앙 부분이 양 끝에 위치한 입구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시각적으로 둥근 곡선을 보여 우리나라의 전통 다리인 우물마루 돌다리 형태를 따른다. 교판석 중앙에 새겨진 ‘강매리교 경신신조(江梅里橋 庚申新造)’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전통 교량 축조 방식과 구조가 근대기까지도 꾸준히 유지·전승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도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민간 통행용 우물마루 돌다리이자 고양시에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리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문화재청 제공
영일정씨 판결사공파·승지공파 동춘묘역은 인천시기념물이다. 인천 연수구 동춘동 영일정씨의 판결사공·승지공파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인 1607년 승지 정여온(1570~1632)이 부친 정제(1540~1607)의 묘소를 연수구 청량산 밑에 모신 후부터라고 전해 온다. 이후 10대(代) 400년 이상 인천에서 가계를 이어온 대표적 종중(宗中)이다. 묘역 내에는 17기의 묘소(일부 묘소 제외)와 묘비, 문인석, 석양, 망주석, 상석 등 석물 66점이 보존돼 있다. 이들 석물은 조선 중기~후기 미술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묘제 양식의 기본 상식을 알 수 있고, 당시의 문화와 생활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지대하다. 문화재청 제공
심복사 능인전 안에 모셔진 이 불상은 고려 말에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노인(千老人)이 덕목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고 전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낮게 표현돼 있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 귀가 크고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옷깃과 소매깃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안정되고 단정한 모습으로 전체적인 조형이 도식화된 이 불상은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정제두 묘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인천시기념물이다. 정제두(1649~1736)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다. 그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중신의 천거로 30여차례나 요직에 임명됐으나, 거의 다 거절하고 주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묘역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62의5 길 바로 옆에 있다. 묘역은 완만한 경사지에 사성이 없이 용미만이 길게 돼 있고, 그 앞에 원형 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하계 부분에는 좌우에 민무늬로 된 상단에 띠를 2개 두른 망주석과 금관조복에 양관을 한 문인석이 있다. 신대우가 글을 짓고, 서영보가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김포시 월곶면과 강화도성이 위치한 강화읍 갑곶리를 배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건넜던 사실이 있고, 병자호란 때에는 봉림대군이 임금을 모셨던 곳이기도 하며,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갯벌만 있었으나 1419년 세종 때 건축공사를 담당하던 박신이 통진현에 유배됐을 당시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1900년대 초까지 500여년간 강화도와 육지를 오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통행시설로 이용됐다. 현재는 해안가 철조망으로 인해 접근이 불가능하다. 문화재청 제공
삼거리고인돌군은 인천 강화군에 있는 청송시대 무덤으로, 인천시기념물이다. 삼거리 진촌마을 앞산인 고려산 서쪽 능선상에 북방식 고인돌무덤 9기가 일렬로 분포돼 있다. 어떤 고인돌무덤은 덮개돌 위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파여 있는데 이러한 모양을 남한에서는 성혈이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별자리와 연관 짓고 있다. 작은 구멍이 있는 고인돌무덤의 크기는 높이 2.80m, 너비 0.90m. 두께 0.38m다. 고인돌무덤 가까이에 는 돌을 떼낸 흔적이 남아 있는 채석장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대형 범종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뒀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아래 띠(下帶)는 구슬 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윗 띠(上帶)와는 다르게 덩굴 무늬를 뒀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존 상태가 좋고 조각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