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구(徐有)는 양주목사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다. 할아버지는 대제학을 지내고 고사신서(攷事新書)를 쓴 서명응,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쓴 서호수다.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군수와 관찰사를 지냈다. 이후 부제학, 이조판서, 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양한 농업 서적을 남겼다. 1798년 정조 22년, 임금이 할아버지인 영조가 적전(籍田)을 직접 경작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방 관리들에게 농서(農書)를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서유구는 각 도에 농학자를 둬 농업 기술을 조사·연구하도록 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농서를 편찬할 것을 제안했다. 농사 기술과 경작법을 다룬 행포지(杏浦志), 농업과 유통을 소개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농업 경제에 관한 경계책(經界策) 등이다. 할아버지의 고사신서와 아버지의 해동농서를 포함해 국내외 900여 가지 농업 서적을 참고해 만년에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완성했다. 이것은 18 여년에 걸쳐 완성한 농업 백과전서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 제공
이범영(李範英)은 1890년 포천군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신(新)문학을 접해 서울 보광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군 주사에 임명됐다. 1910년 8월 국권 피탈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보성 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보성 전문학교 남형우 교수의 권유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단체인 대동 청년단에 가입했다. 대동 청년단은 1909년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 청년 단체다. 1916년에 졸업한 후 청성학교(현 송우초등학교)를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20년 귀국 후 민족 교육을 재개하여 강화학원, 경상북도 김천시 광명학교, 경상남도 밀양시 정진학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창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계속했다. 1928년에 민족 자본 형성을 위해 농민을 위한 소비조합을 창립했으나 2년 만에 일제에 의해 해체됐다. 해방 후 한국 독립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영양군수·병산 중학교장 등을 역임했다. 포천시에 화산고등학교(현 경북중학교)를 설립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악정(惡政)을 규탄, 한때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포천문화대전 제공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뛰어났다. 8살 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지어 신동으로 알려졌다.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다. 친정집에 옥사(獄事)가 있는 등 연속되는 불운에서 오는 고뇌를 시를 쓰며 달랬다. 그녀는 섬세한 필치로 여성 특유의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인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했다. 선조(宣祖) 22년(1589) 3월 19일 27세로 요절했다. 작품의 일부는 허균에 의해 중국에 전해져 난설헌집으로 간행돼 격찬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묘는 광주시에 있다. 허난설헌의 묘는 현재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중부고속도로 개설로 1985년 현 위치로 이전됐다. 문인석을 제외한 묘비·장명등·상석·망주석·둘레석은 근래에 만들어졌다. 묘비의 비문은 국어학자 이숭녕이 지었고,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시비(詩碑)가 서있다.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으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 전면에 나란히 있다. 광주시 제공
민영환(1861~1905)은 구한말 대신이다. 고종 15년(1878)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주미전권대사 등을 거쳤다. 1896년에는 특명 전권공사(외교관의 하나인 공사의 정식 명칭)로 임명되어 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했다. 서양의 근대적인 문물제도와 근대화한 모습을 보고 돌아온 뒤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하면서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친일 각료들과 대립각을 세우며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했다. 일본이 을사조약(1905)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의정대신 조병세 등과 함께 조약에 찬동한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에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대한제국 백성들과 각국 공사, 그리고 고종 황제에게 고하는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택에서 자결했다. 이 유서는 그의 유품과 함께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전시돼 있다. 민영환의 묘가 용인 마북근린공원 내 있다. 본래 수지구 풍덕천동 토월마을에 있었으나, 1942년에 후손들이 옮겼다. 봉분 뒤쪽에 사성(莎城)이라고 하는 높은 둔덕을 쌓고 그 위에 담을 설 치한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용인시 제공
독립운동가. 이천 출생. 부모의 이혼으로 상심하여 14세 때 입산했다. 3년 동안 중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간청으로 하산했다. 1923년 상해로 건너가 사관학교를 마치고 만주에 가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했다. 다시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6년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 황해도 평산의 김상렬·함성호 등에게 군자금을 요청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경했다. 그해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울 동소문파출소를 습격하고 수원으로 피신했다. 9월 7일 유택수와 함께 은행 습격을 모의하고 안성에 도착했지만 거사를 하지 못하고 부호 박승륙의 집에 가서 600원을 강탈하고 이천으로 피신했다. 그해 10월 21일 단독으로 이천군 식산회사(殖産會社)를 습격하려다 주재소가 옆에 있음을 보고 먼저 주재소를 습격했다. 수원에 은신하다가 유택수와 함께 상경해 전당포를 습격했다. 아버지가 죽자 수원에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이천으로 갔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3년의 예심 끝에 1928년 5월 사형이 언도됐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1984년 이천읍에 동상이 건립됐다. 이천시 제공
조선 문신, 의병장. 호는 중봉(重峯). 김포 출생.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을 매일 갔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1587년 동인 정여립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를 지었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가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해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일본사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ㆍ김경백ㆍ전승업 등과 의병 1천 690여 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왜군과 전투를 벌여 모두 전사했다. 후세에 이를 금산전투라 일컬어 숭모하게 됐다. 옥천의 표충사, 김포의 우저서원 등에 제향됐다. 김포시 제공
본관은 함종(咸從). 어재연은 조선 말 구미 열강이 침략했을 때 서해안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이천시 율면에서 어용인(魚用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2년 관계에 진출하여 대구영장이 되고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ㆍ장단ㆍ회령부사 등을 거쳤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부중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격분한 민중들에 의해 불을 지른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이 군함 4척에 1천130명의 병력을 이끌고 1871년 4월 3일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신미양요는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배경으로 우방 미국과 최초의 무력충돌을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때 어재연은 강화영 진무중군(鎭撫中軍)이 돼 침공한 미국함대의 병력을 막게 되었다. 당시 조선군 243명이 전사한 치열한 전투에서 주역인 어재연장군과 어재순(魚在淳) 형제의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은 나라사랑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율면 산성리에 있는 생가는 이천시와 그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생가 언덕위에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충장사(忠壯祠)가 있다. 이천시 제공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의. 파주시 진동면에 묘가 있다. 허준은 우리나라가 낳은 대표적인 명의·의학자로서 한의학 중흥의 거봉이자 동양의 의성으로 이름이 높았다.선생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내의원에 들어간 후 혜민서 봉사를 거쳐 전의로 발탁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어의로서 왕을 의주까지 모셨으며 1604년 호성공신3등에 1606년 양평군에 봉해졌다.또한 사후에 숭록대부에 올라 의인으로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복직되었다. 저서로는 동의보감, 언해두창집요 등이 전한다.16년의 연구 끝에 간행된 동의보감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청나라 등에서도 간행 보급돼 동양의학의 성전이 됐다. 그 동안 선생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 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됐다. 파주시 제공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寗).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서울 순화방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했다.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이이에게 질문하면서 서신을 주고 받았다. 1582년(선조 15)까지 관직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에 가자하여 병조참지,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를 하사받았다. 그의 관계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툰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고, 또 허화완병을 건의한 이정암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그길로 사직,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에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ㆍ정사조 등이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엄견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그가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돼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 추증됐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의 죽림서원, 창녕의 물계서원, 해주의 소현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파주의 파산서원 등이 있다. 파주시 제공
본관은 파평.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 윤관은 고려 예종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이다. 윤관의 묘는 사적 제323호로 지정돼 파주에 있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이다.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해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했다. 대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하게 했다. 윤관은 문무를 겸한 공신이었다. 세상을 뜬 후에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됐다.세월이 흐르면서 묘의 소재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1764년 윤관의 구비파편(舊碑破片)이 발견된 후 영조가 봉분을 새로 조성하고 치제(致祭)하게 함으로써 윤관의 묘소임이 공인됐다. 파주시 제공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 평택 이충동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510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다. 중종반정 이후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흐름이었다. 전적ㆍ감찰ㆍ예조좌랑을 역임,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에 입각,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했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꿨다.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급진적인 개혁으로 홍경주ㆍ남곤ㆍ심정 등 훈구파는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했다.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했다. 결국 조광조는 투옥, 사사됐다.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그 뒤 신원돼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됐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은 사당과 서원을 설립했다. 평택시 제공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호는 매죽헌. 사육신의 한 사람이며, 파주 수정봉 서쪽 덕내곡에 서당 터가 있었다.1438년 급제, 1447년 문과중시에 장원 후 집현전학사ㆍ수찬 등을 역임했다.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두를 편찬하고 경연관이 돼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음청에서 정인지ㆍ최항ㆍ박팽년ㆍ신숙주ㆍ강희안ㆍ이개 등과 함께 요동에 유배돼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황찬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제도를 연구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케 했다.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협의했으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의 밀고로 체포돼 거열형을 받았다. 문집으로 성근보집이 있다. 파주시 제공
본관은 나주, 호는 다산.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출생. 다산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한 탁월한 학자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다. 다산은 22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오르며 정조에게 발탁된다. 수원 화성을 건설하라는 정조의 명을 받고 거중기를 직접 고안, 화성의 공사기간과 경비를 대폭 단축시키며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무리했다. 다산은 여러 천주교 관련 서적에 심취하며 서양과학과 신앙을 공부했다. 이때부터 서양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실사구시’를 주장했으나 기존 관리들에 의해 비난받았다. 정조 사후 다산은 18년 유배 생활 동안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쓰며 실학을 집대성했다. 유배 생활을 마친 후에는 글을 정리하며 75세 사망할 때까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의 저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남양주시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