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를 빛낸 역사인물] 구한말 대신 민영환

민영환(1861~1905)은 구한말 대신이다. 고종 15년(1878)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주미전권대사 등을 거쳤다. 1896년에는 특명 전권공사(외교관의 하나인 공사의 정식 명칭)로 임명되어 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했다. 서양의 근대적인 문물제도와 근대화한 모습을 보고 돌아온 뒤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하면서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친일 각료들과 대립각을 세우며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했다. 일본이 을사조약(1905)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의정대신 조병세 등과 함께 조약에 찬동한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에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대한제국 백성들과 각국 공사, 그리고 고종 황제에게 고하는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택에서 자결했다. 이 유서는 그의 유품과 함께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전시돼 있다. 민영환의 묘가 용인 마북근린공원 내 있다. 본래 수지구 풍덕천동 토월마을에 있었으나, 1942년에 후손들이 옮겼다. 봉분 뒤쪽에 사성(莎城)이라고 하는 높은 둔덕을 쌓고 그 위에 담을 설 치한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용인시 제공

[경기도를 빛낸 역사 인물] 어재연(1823~1871)

본관은 함종(咸從). 어재연은 조선 말 구미 열강이 침략했을 때 서해안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이천시 율면에서 어용인(魚用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2년 관계에 진출하여 대구영장이 되고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ㆍ장단ㆍ회령부사 등을 거쳤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부중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격분한 민중들에 의해 불을 지른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이 군함 4척에 1천130명의 병력을 이끌고 1871년 4월 3일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신미양요는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배경으로 우방 미국과 최초의 무력충돌을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때 어재연은 강화영 진무중군(鎭撫中軍)이 돼 침공한 미국함대의 병력을 막게 되었다. 당시 조선군 243명이 전사한 치열한 전투에서 주역인 어재연장군과 어재순(魚在淳) 형제의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은 나라사랑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율면 산성리에 있는 생가는 이천시와 그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생가 언덕위에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충장사(忠壯祠)가 있다. 이천시 제공

[경기도를 빛낸 역사 인물] 우계 성혼(1535~159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寗).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서울 순화방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했다.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이이에게 질문하면서 서신을 주고 받았다. 1582년(선조 15)까지 관직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에 가자하여 병조참지,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를 하사받았다. 그의 관계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툰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고, 또 허화완병을 건의한 이정암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그길로 사직,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에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ㆍ정사조 등이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엄견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그가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돼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 추증됐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의 죽림서원, 창녕의 물계서원, 해주의 소현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파주의 파산서원 등이 있다. 파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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