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완 선생은 1885년 12월27일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5년 창간된 기독신보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 기독교계를 배경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여 정동제일교회에 전도사 및 조선중앙YMCA 위원 등으로 활동을 했다. 1919년 2월, 박희도의 권유로 3·1 만세운동에 합류한 선생은 2월27일 낮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 참석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됐고, 3월1일 오후 2시 종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열린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에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기독신보, 신생명 등 기독교계 언론을 통해 언론 계몽활동에 전념하다가, 1925년 4월 신생명이 폐간되자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남상목 선생은 1876년 4월 12일(고종 13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유교가문인 의령남씨 진희(普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동천(東泉), 자는 문일(文一)이다. 선생은 가학으로 한학을 수학하여 경학은 물론 주역과 병서류에도 조예가 깊었다.특히 충과 효의 실행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남상목 선생이 29세 되던 해인 1904년 그의 고향인 낙생면까지 일제의 수탈이 자행됐다.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강제로 조선인의 인력과 재원을 수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은 경기도 용인 일대 및 충북 지역에 걸쳐 일본군과의 수차례 전투에 참가한 의병장으로 경기도 안성으로 진격, 승리를 거두었으나 밀고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로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1908년 11월 판교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느릿골에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박시창 선생은 1903년 11월 경기도 시흥에서 백암 박은식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 박은식의 민족정신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1916년 서울 오성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의 지인을 따라 해삼위로 건너갔다. 그때부터 선생은 부친 박은식이 1925년 11월 타계할 때까지 그를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1925년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에 입교했다. 아울러 선생은 의열단과도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이는 선생이 후일 의열단이 주축이 됐던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에 참여해 활동하게 되는 인연이 됐다. 이후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에 임명돼 이후 많은 한국 교포들이 몰려있던 상해 및 인근지역 교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한적 사병들의 귀국 알선에도 진력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오의선 선생은 경기도 용인군 원산면 죽릉리에서 1889년 12월8일 태어났다.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맞설 훌륭한 신지식을 갖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판단해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의 명치대학에 입학했다. 선생은 동경 유학생들이 만든 조직체, 학우회 주최로 웅변대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민족자결이란 주제로 열변을 토로하고, 민족자결주의의 원칙 하에 우리 민족도 반드시 광복을 이루어 자주국가를 세우자고 호소했다. 선생은 한국으로 돌아와 31운동이 고조되는 시기 4월에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됐으며 의정활동을 하는 등 광복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민긍호 선생은 명성황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의 일족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97년 선생은 진위대에 입대해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이 감행되자 서울 시위대와 지방 진위대 장병들은 이를 거부하며 반일 무장투쟁을 전개해 갔다. 선생은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허준, 이경삼 등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여주를 기습해 경무분견소를 포위, 공격한 후 이곳 일본 경찰과 그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선생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가평을 거쳐 서울 근교까지 진출했다.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함으로써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도 후원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신숙 선생은 1885년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천도교종학강습소 강사, 천도교중앙총부 도사실 서계원을 거쳐 1914년에는 천도교 대구대교구장, 1917년에는 다시 중앙총부 대종사 종법원 겸 의사원으로 활약했다.1919년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계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추진하자 선생은 2월 27일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지휘 아래 김영륜과 함께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했다. 또 선생은 독립단체와 독립군을 일원화해 체계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토록 하기 위해 1920년 북경으로 가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키도 했다. 자유당 시절 선생은 민주혁신당 중앙위원장,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대표지도위원, 광복동지회 부회장으로 독재정권과 투쟁하였다. 1961년 4·19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됐으며, 과도내각이 들어서면서 실시된 7·29총선에서 철원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선생은 갑작스런 중풍으로 쓰러져 약 1년간 치료 끝에 약간 호전됐으나 끝내 완치되지 못하고, 1967년 11월 22일 가회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1854년 1월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김동식 선생은 을사조약에 따른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항일 의병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등 일제침략이 심화되자 선생은 1907년 8월 전북 진안에서 이석용 의진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인 항일 의병투쟁에 나섰다. 이석용 의진과 함께 의병 연합체인 호남참의맹소에도 참여하고 진안을 중심으로 순창, 장수, 남원, 임실 등지를 옮겨다니며 일제 군경과 끊임없이 교전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1909년 3월경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고, 임실을 거점으로 재기를 도모하여 가던 중 1909년 12월27일 국권회복을 이루지 못한 원통함을 안은 채 순국하고 말았다. 국가보훈처 제공
왕산 허위 선생은 1854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07년 9월 연천, 적성, 철원 등지를 무대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선생은 주로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각지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친일매국분자들을 소탕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다.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선생의 의병활동이 활발했으며 최후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천명하며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후 1908년 경기도에서 체포된 선생은 서울로 압송됐으며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을 당해 55세에 순국했다. 당시 검사는 사후 시신을 거둘 이가 있냐고 묻자, 선생은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도 무방하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답했다고 한다. 국가보훈처 제공
조성환 선생(1875~1948)은 25세가 되던 해인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무관들이 군대의 주요 요직을 차지, 일제와 친일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권력을 악용, 군부를 부패시키고 있었다.이에 격분한 선생은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 특사되어 참위로 임관됐으나 얼마 뒤 군대에 환멸을 느껴 결연히 군을 떠났다.선생은 1931년 12월24일 제2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윤기섭, 조완구, 조소앙 등과 같이 임시의정원의원(경기도 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던 1937년에는 주석 이동녕을 도와 군사정책을 강화해 갔으며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신익희(1894~1956) 선생은 1894년 6월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3ㆍ1운동을 목격한 선생은 곧 서울에서의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제자인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학생 강기덕(康基德)과 연희전문학교의 학생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해 3월5일 남대문역 서울역 앞 만세시위를 추진 지휘케 했다. 이에 따라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2차 독립 만세시위가 남대문역 앞에서 대규모로 전개됐는데, 이 시위는 3월3일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배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 3ㆍ1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이로써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된 선생은 3월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중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키도 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신석구 선생은 1914년 경기도 가평구역장으로 활동하며 암암리에 국민계몽활동을 했다. 그리고 1918년 11월부터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에 피검될 때까지 서울 수표교 교회 목사로서 전도를 통해서도 활동했다. 1910년대 선생의 전도를 통한 국민계몽활동은 곧 항일의식의 고취요 독립운동의 전파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활동의 연계선상에서 선생은 1919년 2월 같은 감리교 목사인 오화영의 권유로 31운동 추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선정되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년 3월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국가보훈처 제공
박자혜 선생은 1895년 12월11일 경기도에서 태어나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했다. 간호부 근무 당시 3·1만세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하고 선생도 직접 3·1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동 병원의 의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이강년 선생은 1858년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의 집에서 자랐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에 임명돼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 물러나 고향에 은거했다. 향리에서 은거하며 학문에만 열중하던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했다. 선생은 항쟁운동을 하다 1907년 11월 흩어져 있던 각 의진에 통문을 띄워 전국 의진들이 경기도 양주에 모일 것을 호소하고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했고 선생은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됐다. 선생은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장마비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선생은 복사뼈에 탄환을 맞아 적에게 사로잡혀 1908년 교수형을 선고받고 일생을 마쳤다. 국가보훈처 제공
김한종 선생은 1917년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장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충청도지부를 경기, 인천 등에 확대하면서 본격적으로 대한광복회의 독립전쟁준비전략을 실행해 갔다. 우선 충청도와 경기도에 연락 거점을 마련했다. 즉 예산, 연기, 인천에 곡물상을 개설해 이를 광복회 본부 및 지부와의 연락 및 활동 거점으로 활용한 것이다. 1918년 1월 27일 선생은 조직이 탄로나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의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후 선생은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은 뒤, 경성복심법원과 대구 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국가보훈처 제공
김하락 선생은 1846년 12월 14일 경북 의성(義城)에서 의성 김씨 운휘(運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이 일어나자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고 국모(國母) 복수를 이루고자 결심했다. 선생은 평소 의기 투합했던 동지들과 경기도 이천에서 거의하기로 결정했다. 포군 100여 명을 선발한 선생은 이들을 앞세워 의병을 모집했다. 900여 명의 의진 편성이 끝나자 선생은 곧 친일정권과 일본군 타도에 나섰다. 그리하여 같은 해 1월 18일 백현(魄峴)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방에서 협공하여 수십 명을 사살했고, 패주하는 잔여 병력을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국가보훈처 제공
김규식 선생은 1882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의 장교로서 부위(오늘날 중위)로 근무하다 1907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 당하자 만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지역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은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결성하였다.김규식 선생은 연수현 태평촌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신민부 민정파의 정당조직인 고려국민당의 군사부위원이 되어 한인의 자치를 통해 독립운동 역량을 확보해 나갔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 중앙위원회가 북만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을 끌어모으는 과정에서도 부위원장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송학선 선생은 1897년 2월 19일 서울 천연동에서 태어나 1922년부터 애오개 마루턱 북아현동(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에 이주하였다. 선생이 반일 감정을 느낀 것은 매우 어렸을 때부터였다고 한다.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고 그를 본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선생은 조선총독을 제거하기로 해 독립의지를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1926년 융희황제 돌아가신 후 빈소가 마련된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칼을 품고 일제 총독을 기다렸다. 선생은 사이토 총독 얼굴을 찾아내고 거사 실행했지만 불행하게도 사이토로 생각하고 처단한 사람은 사이토 총독과 체격과 생김새가 비슷한 일본인민회 이사 사토였다. 이 일로 사형선고를 받은 선생은 나라를 강탈한 일제 총독을 처단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채 짧은 생을 마무리 했다.
박은식(朴殷植)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대(十三道倡義隊) 결성이 모두 이은찬 선생의 지략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군의 장령(將領) 임명도 모두 이은찬 선생이 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은찬 선생의 주도로 1907년 11월 각 도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여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으며, 동시에 서울 진공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 같다. 그해 12월부터 두 달여 동안 13도 창의군은 서울 근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동대문 밖 10리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냈다. 이은찬 선생은 의진을 정비한 뒤 경기북부 연합의병의 결성도 추진했다. 이들 경기북부 연합의병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면서 효과적인 공격력을 발휘하기 위한 전략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조시원(趙時元) 선생은 1904년 10월23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서 태어났다. 1928년에 선생은 한구(漢口)에서 결성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창립에 참가해 간부의 일원으로 국제적인 항일선전운동에 주력했다. 그 해에 상해남방대학 역사사회학과를 졸업한 조시원 선생은 만주로 가서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梁世奉장군과 협의하여 함께 동만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하여 무장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만주 흥경현민립중학교 학감으로 3년 동안 육영사업에도 종사하고, 중국대공보(中國大公報), 시민일보(市民日報) 기자 등 직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9년에 선생은 북경으로 가서 여기서 1925년에 조직된 항일비밀운동단체인 다물단에 가담하여 이규준(李圭俊), 이해천(李海天) 선생 등과 같이 상해, 천진(天津), 북경 등지에서 친일주구배 등의 숙청공작을 전개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엄항섭 선생은 1898년 9월1일 승지를 지낸 엄주완(嚴柱完)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현 산북면) 주록리이다. 그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1919년에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보성법률상업학교는 보성전문학교의 옛 이름으로,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이었다. 엄항섭 선생이 보성법률상업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민이 일어나 조국의 자주독립을 부르짖는 것을 보면서, 엄항섭 선생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가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세워져 있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엄항섭 선생은 거기서 김구 선생을 만났고,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국가보훈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