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묻고, 탐구하고, 발견하라

대학에서 기독교 관련 교양수업을 강의하는데 이번 학기에 가장 많은 학생이 수강신청을 하고 강의실에서 질문 공세도 쏟아지고 있다. 아마 새학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여러 종교의 동아리나 단체가 학생들에게 접근하고 다양한 콘텐츠에서 종교와 관련된 부정적인 묘사들과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영상들이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첨단 과학이 발전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상한 교리와 속임수로 권력을 만들어 자신들을 신처럼 따르게 하는 거짓된 사람들과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7장 15~16절에는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는 예수의 말씀이 기록돼 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 떼와 같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것처럼 그들의 행동을 보고 진짜 예언자인지 가짜 예언자인지 알 수 있다”(현대인의 성경)고 말한다. 교묘하게 접근해 미혹하고 노략질하는 이들에게 현혹되지 않고 나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접근해 미혹한 거짓된 이들에게 100% 잘못이 있지만 신도들 혹은 신도 지원자들은 맹목적 믿음이 아닌 비판적 성찰, 지속적인 의심과 탐구를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의 잘못 가운데 하나는 질문과 의심을 죄로 여기고 폄하하며 때론 무시해 왔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주체가 될 때 자신만의 새로운 신앙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알고, 입으로 고백하며 긍정이면 천국, 부정이면 지옥이라는 유아기적 차원이 아니다. 지속적인 교리 공부와 의례, 의식에 참여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이 변화할 때 비로소 그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 에드문트 후설은 ‘대상’과 ‘의식’ 사이에서 ‘판단중지(Epoche)’를 해야만 현실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종교현상학으로 접근하면 ‘종교적 대상’을 ‘의미화’하기 전에 여러 사실을 괄호 안에 넣고 판단을 유보해 보는 것이다. ‘괄호 안에 넣기’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차근차근 따져 ‘사실 그 자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종교가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판적 성찰과, 의심과 질문을 허용해야 한다. 의심 많은 제자 ‘도마’와 연관된 도마복음에서 이렇게 말한다. “추구하는 자들은 찾을 때까지 계속 추구하라”, “네 눈에 보이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 그리하면 너에게 가리워진 것이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숨긴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찾을 때까지 추구하고, 어떤 대상을 깨달을 때까지 깊이 인식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라고 역설한다.

[삶과종교] 동정 부부의 사랑 이야기

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가 있었다면 동양에선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 이야기가 회자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 역사상 매우 특별한 커플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동정 부부’라 부르는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부부의 이야기다. 사실 ‘동정+부부’라는 서로 모순되는 두 마디가 이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수도자처럼 하늘나라를 위해 주님께 오롯이 몸을 바치기로 한 젊은이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됐다. 당시 사회적 관습에 따라 결혼적령기에 이른 남녀가 독신으로 지내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의 형식을 거쳤다. 한 지붕 밑에서 이 젊은 남녀가 4년 동안을 함께 살면서도 두 사람은 처음부터 하느님과 상대방에게 약속한 동정을 지켜냈다. 그리고 둘은 두어 달 사이로 나란히 순교했다. 그래서 누구는 이들을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백합”이라고, 누구는 “한국 순교사의 가장 찬란한 진주”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진짜 가능한 일인가? 이순이 루갈다는 감옥에서 곧 맞이할 죽음 앞에 자신의 속 이야기를 어머니께 써 보낸다. 이후 이 편지는 박해 시대 때 신앙인들이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장 많이 읽은 글이 됐고, 신앙의 후손들이 이 글을 끊임없이 필사하고 널리 전한 덕분에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석처럼 남게 됐다. “제가 여기로 온 후, 평소에 마음에 두고 걱정하던 일을 이루었습니다. 9월에 와서 10월에 우리 두 사람이(동정을 지키기로) 발원 맹세하고 4년 동안을 실제로 남매처럼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대략 10번이나 심한 유혹을 당하여 (서약을 지키기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피를 흘려 이루신 공로의 힘에 의지하여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 일에 관해서 마음을 쓰실 것 같아 이렇게 말씀드리니, 저 자신을 대하시듯 이 글을 반갑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동정 부부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 옥중편지) 이들은 당시 서학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됐고, 신 때문에 양반이든 노비든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접한다. 태생부터 신분이 정해진 사회, 양반과 노비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리와 불평등 속에서 이러한 가르침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신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인간 상호 간의 사랑과 존중이라는 귀중한 모범도 발견할 수 있다. 상대방이 가고자 하는 길, 그리고 그가 신께 드린 서약을 존중하고 그것을 지켜 주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이겨낸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은 자신을 희생할 때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자신을 태우며 세상과 이웃에 빛이 돼주는 초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들은 가슴속 깊이 이 성경 구절을 새기며 살지 않았을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삶과 종교] 자공이 미워하는 사람

당신은 어떤 사람을 꺼리고, 싫어하는가? 논어 ‘양화(陽貨)’편에 보면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는 공자의 질문에 제자 자공은 “남의 것을 훔쳐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사람을 미워하고, 겸손하지 않은 것을 용맹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며, 들춰내는 것을 정직하다 여기는 자를 미워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중에서 자공이 첫 번째로 거론한 대상인 “남의 것을 훔쳐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사람(惡徼以爲知者)”이 오늘 이야기할 주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 창작물을 표절해 자신의 것처럼 내세우는 사람, 자공은 이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표절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잊을 만하면 정치인이나 유명인의 학위논문 표절 문제가 언론을 장식한다. 학자들의 표절로 유명 저널과 유명 대학들이 홍역을 치르는 일도 드문 모습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학생들에게서 표절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왜 표절이 잘못된 행위인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할 때는 어떻게 출처를 밝혀야 하는지 설명해줘도 여전히 표절한 과제물을 제출하는 학생들이 있다. 카피킬러 같은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사용하겠다고 밝혀도 근절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는 ChatGPT까지 등장했으니 표절과의 전쟁을 치러야 할 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된 원인을 디지털 기술의 탓으로 돌린다. 인터넷 안에 수많은 정보가 넘쳐 나고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검색만 잘하면 몇 초 안에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됐다. Ctrl-V와 Ctrl-C로 그 자료를 내 것처럼 만드는 일도 쉬워졌다.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같은 자료는 흡사 나를 가져다 쓰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표절하기 쉬운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디지털 기술 안에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해도 사람이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폐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표절이 쉬워진 만큼 왜 표절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먼저 표절은 내가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스스로 내던져 버리는 일이다. 다음으로 표절은 지식을 도둑질하는 행위다. 남의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기도 하다. 나아가 표절하는 행태가 만연하면 그 사회는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이 글이 과연 저 사람이 쓴 글일까’ 의심하게 되고 ‘다른 사람이 쓴 걸 가져다 쓰면 어때? 좀 바꾸면 그만이지’ 하며 타인의 노력을 가로채는 일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만약 표절한 사람이 적발되지 않아 좋은 성적을 받게 된다면 학교 교육도 위기를 맞을 것이다. 자공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걱정하는 것이다. 비단 표절만이 아니다. 남의 아이디어와 공로를 훔치는 사람들, 그것을 자신의 성과인 양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가져올 신뢰의 위기를 우려하는 것이다. 당장은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공동체를 흔들 수 있는 사안임을 경고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남의 것을 훔쳐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사람을 미워합니다”라고 엄숙히 말하는 거다. 이는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내용이 아닐까.

[삶과 종교] 인생은 자기 복대로 산다

옛날 옛적에 왕이 있었다.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잠결에 두 명의 신하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됐다. 한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옷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사는 것은 모두가 왕의 은혜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흐뭇한 감정이 일어났다. 그런데 다른 신하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사는 것은 왕 덕분이 아니다. 모두 자기 복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두 신하의 대화를 듣고 왕은 생각했다. “그래, 다 자기 복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있긴 하다. 하지만 막상 신하의 입에서 왕의 덕택으로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복으로 편하게 산다고 말을 들으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구나.” 살짝 감정이 상했지만 이런 일로 신하를 꾸짖는다면 오히려 체면이 구겨질 것 같았다. 그래서 왕은 이런 결정을 내렸다. “왕의 은혜로 편하게 산다고 말한 저 신하에게 큰 상을 내려줘야겠구나. 그래서 자기 복대로 살아간다고 말한 저 신하의 배를 아프게 해줘야지. 허허허.” 왕은 잠에서 깬 척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왕비에게 편지를 썼다. 왕비에게 당부하기를 ‘이 편지를 배달한 신하에게 값진 보물을 상으로 주시오’라고 적은 뒤 단단히 밀봉했다. 그리고 ‘왕의 은혜로 살아간다’라고 말한 신하를 불러 그에게 편지를 주며 왕은 명령을 내렸다. “이 편지를 곧바로 왕비에게 전해다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말고 반드시 그대가 갖다 드려야 하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왕이 궁전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는데 한 신하가 곁에 와서 왕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다. “왕이시여, 얼마 전에 왕비께서 왕의 선물이라며 큰 보물을 내리셨습니다. 황송하고 감사하옵니다.” 왕이 고개를 들어 그 신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선물을 받았다고 인사를 한 그 신하는 ‘편하게 사는 것은 왕의 은혜가 아니라 다 자기 복대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한 얄미웠던 신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선물을 주고 싶었던 신하에게 보물이 간 것이 아니라, 서운하게 느꼈던 얄미운 신하에게 보물이 내려갔으니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왕은 사람을 불러 이전에 편지 배달을 시켰던 신하를 데려오게 하고는 전후 사정을 질문했다. 그 신하가 대답했다. “왕이시여, 그날에 제가 왕비에게 드릴 편지를 가지고 급히 길을 걷다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코피를 쏟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됐습니다. 이에 편지를 제가 직접 갖다 드리지 못하고 옆에 지나가던 저 신하에게 대신 부탁한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사정을 모두 이해한 왕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 자기가 지은 복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내가 저 신하에게 보물을 주고자 했음에도 결국 받는 자는 따로 있었구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왕의 권력이지만, 국왕의 힘도 복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구나.” 옛날 옛적 동화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실제 인생을 살다 보니 ‘복’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노력한 만큼 잘 안 풀릴 때도 있고, 때로는 전혀 바라지 않았는데도 놀라운 성과를 거둘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복을 만드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내 인생을 개척하는 주인공은 결국 나 자신이다.

[삶과 종교] 나도 틀릴 수 있다

학생들과 토론수업을 진행할 때의 일이다. 한 학생이 자신이 조사한 통계를 갖고 기업의 사업 다각화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혔다. 이에 다른 학생이 그 기업은 중소기업을 잠식하는 형태이기에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찬반 논의가 격렬해 진행하는 교수로서 진땀을 빼기도 했다. 때때로 우리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아시타비(我是他非)’의 명제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전 세계가 오랜 시간 진통을 겪고 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옳고 우크라이나와 서방이 틀렸다고 생각할 것인데, 우크라이나와 서방도 러시아에 대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어려운 시기 민생을 살펴야 할 정치인들이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분열을 일삼는 탓에 국민들의 피로도가 상당하다. 누구든지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이 나뉠 수 있는데 항상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가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배한다. 비슷한 의미를 지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의미의 ‘내로남불’이란 용어가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았는가.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이 나타나 있다. 고린도에 있는 신앙공동체는 왜 분쟁이 있었을까? 대표적으로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와의 분리다. 바울은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가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 교회와의 신앙적인 갈등으로 결국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나서게 됐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도 분파가 생겼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었다(고전 1:12).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파가 나뉘었고, 자신들이 속한 분파만이 옳고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분리와 분파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권의 상황은 자국과 정당의 이익이 우선하는 영역이니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에까지 ‘아시타비’와 ‘내로남불’의 문법이 가득하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을 염려해 타인과 거리를 두고 거부하는 문법, 빈부격차의 심화로 등장한 수저계급론과 갖가지 논쟁의 문법,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문법, 남녀·세대·노사·지역 간의 갈등과 충돌의 문법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나만 맞고, 나와 같은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만 옳다는 ‘아시타비’의 생각과 행동은 동질성의 폭력을 야기한다. 나와 생각 및 입장이 다른 사람의 특이성과 차이성, 고유성과 다름은 수용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거절과 분리, 심하게는 차별과 혐오에까지 이르게 된다. ‘아시타비’의 그릇된 문법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은 “나도 틀릴 수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미래의 이상적인 인간을 ‘위버맨쉬(Übermensch·초인)’라고 불렀다. ‘위버(Über)’는 ‘위’ 또는 ‘넘어서’를, ‘멘쉬(mensch)’는 ‘사람’을 뜻한다. 즉, ‘인간을 넘어선 인간’이며 모든 관습과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갖춘 존재이고, 편견에서 벗어나 세상을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이와 반대 개념인 ‘인간말종’을 언급하는데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시시한 존재,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 없는 존재’다. 이는 자신에 대해 깊은 성찰과 회의를 하지 못하기에 자기 극복을 통한 발전도 결코 있을 수 없다. 니체는 이런 인간말종을 천민, 다수, 짐승 떼 등으로 불렀다.   인간은 이러한 인간말종과 위버멘쉬 사이에 존재한다. 때때로 나 자신을 경멸하면서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는 겸허한 성찰과 행동을 통해 위버멘쉬로의 도약이 절실히 필요하다.

[삶과 종교] 진정한 복수

요즘 복수 드라마 ‘더 글로리(The glory)’가 화제다. 학창 시절 왕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복수 이야기다. 기존 복수극과 다르게 이 드라마에서는 칼 한 자루 나오지 않는다. 대신 과거 괴롭힘을 당한 주인공이 복수라는 자기만의 정의 실현을 위해 20년 동안 철저히 준비하며 원수와 그의 삶을 파괴하려 한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 드라마는 사실 학교폭력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 사회 병폐 현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는 ‘더 글로리’에 대해 “학교폭력이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잔혹한 행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밝혔다. 순수한 어린 학생들에게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고질적으로 굳어 버린 학교폭력의 행태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가해 학생이 자신의 행위가 잘못이라고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 보복이 두려워 이웃들에 말할 수 없는 피해 학생의 입장, 범죄 수준이 아닌 그저 학생들 간의 사소한 갈등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이 처한 비정상적인 가정환경과 교육환경, 어린 학생을 처벌할 수 없는 법의 사각지대 등 여러 문제가 엉켜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폭력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약자와 강자, 부유함과 가난함, 다수와 소수 등과 같은 환경이 누군가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상황으로 연결되기 쉽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폭력에는 인간을 마치 물건처럼 취급하는 사회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모든 형제들’ 24항). 진정한 복수는 무엇일까? 드라마 주인공은 “타락할 나를 위해! 추락할 너를 위해!”라며 복수의 서막을 알린다. 그러나 그 복수의 결말은 나와 원수 모두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만 가슴속 깊이 남지 않을까. 정답은 잘 모르지만 성경에서 그 힌트를 찾고 싶다. 성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 30-37)가 나온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있고, 무심하게 그 사람 곁을 지나가던 사제(제사장)와 레위인(제사장을 돕는 계층)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명망이 있는 직업군이다. 철저히 자기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사회적 위치만을 신경 쓰는 이들이기에 길가에 버려진 사람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사회적 지위도 없고,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방인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상처 입은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여정을 중단하고 계획을 수정해 그를 돕는다. 어쩌면 진정한 복수는 원수, 그리고 그의 악행과 상관없이 내가 당당해지는 삶이 아닐까 싶다. 나를 추락시키려 했던 원수의 뜻과 달리 하느님께서 창조한 ‘나’라는 소중한 존재가 추락하지 않고, 추락할 수 없으며, 또 보란 듯이 당당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많은 이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추락하지 않고, 추락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과 행동이 진정한 복수의 서막이 아닐까 싶다.

[삶과 종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집, 학교, 직장, 사회, 그 어느 곳에서든 타인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정서적인 교류뿐 아니라 함께 팀을 이뤄 구체적인 일들을 해나간다.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가 나의 성공과 실패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니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람을 파악하는 일이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을 가까이에 두고 나쁜 사람은 멀리 해야 하니 말이다. 문제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사람을 파악하는 일이 쉬웠다면 상대방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일은 드물었을 것이다. 상대방 때문에 당황하는 일도, 실망하거나 배신당하는 일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사람을 살피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 왔다. 동양에서도 오래전부터 이와 관련한 가르침이 전해오는데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보자. “그 하는 것을 보고, 그 말미암은 이유를 살피며, 그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본다면 사람이 어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먼저 ‘그 하는 것을 본다’란 외부로 드러난 그 사람의 행동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행동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보면 어느 정도 사람됨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속마음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위선자여서, 혹은 이해타산을 따져서 착한 척 행동할 수 있다. 반대로 선한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어 나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공자가 ‘그 말미암은 이유를 살피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다.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가?’, ‘저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를 면밀하게 살피다 보면 그 사람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공자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보라’다. 어떤 사람을 친구로 두는가, 어떤 사람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가,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그가 무엇을 갈구하고,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보면, 또 어떤 것을 충족했을 때 가장 만족감을 느끼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추구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를 다 했다고 해서 내가 저 사람을 다 알았다고 자신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옥은 사흘만 불에 넣어 보아도 품질을 알 수 있지만 사람은 7년은 족히 기다려야 가릴 수 있다”고 했다. 아니, 7년도 부족할 수 있다. 20년 넘게 믿고 의지하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 일도 있으니 말이다. 그 사람과 오랫동안 지내오며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예상을 깨뜨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공자의 이 가르침은 한 번에 판단하고 결론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 이렇게 상대를 살펴보라는 당부로 봐야 한다. 더욱이 공자의 이 말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가름할 때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면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사람의 스타일에 맞춰줘야 한다. 그럴 때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가 편안하게 생각하고 즐기는 것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지 않을까?

[삶과 종교] 새해를 맞이하여 크게 웃자

설 명절이 지났다. 다 같이 맞이한 설날이라도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르리라. 새로운 한 해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나간 한 해가 아쉽고 더 먹은 한 살 나이가 울적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으리라. 한자리에 모이는 가족들 생각에 즐거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안 볼 수만 있다면 서로 보기 싫다는 사람도 있으리라. 명절 연휴에 신나게 놀고 편히 쉴 달콤한 계획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히려 명절 휴일이 퍽퍽하고 가슴 무겁게 철렁거렸던 사람도 있으리라. 다 같이 맞이했던 설날이라도 이토록 느끼는 심정이 저마다 다른 색깔과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그래도 웃어야 한다. 인생이란 그렇더라. 높은 산과 같다고.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평지를 거닐 때도 있다. 꽃길이 펼쳐 질 때도 있고 울퉁불퉁한 돌길이 드러날 때도 있다. 산길을 걷는 것은 한결같지 않다. 인생길도 그렇다. 삶의 걸음 앞에 놓인 길 자락이 한결같지 않다. 저마다 가고 있는 산길도 사람마다 다르다. 보송보송한 흙길로 가는 사람도 있고, 컥컥 숨이 차오르는 바위산도 있다.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길은 아니지만 결국 내 앞에 놓인 길인 것을. 그래서 이왕 걸을 길이면 조금이라도 웃으면서 가자. 어차피 가야 할 길인데 인상 팍팍 쓰면서 걸을 것인가. 결국은 가야 할 길인데 노래라도 부르고 흥겨워하면서 웃으며 갈 것인가.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의 길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으면서 웃으며 갈지, 울면서 갈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입니다.”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말씀이 참 좋아서 내용은 기억한다. 그래 어차피 갈 거라면 웃으며 가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인생이 퍽퍽해서 웃을 힘도 없습니다.” 그 말도 맞다. 세상 힘든 사람이 오죽 많은가. 뉴스를 보기가 싫어진다. 온통 괴로운 이야기뿐이다. 그런데 그게 세상의 현실이다. 현실이 괴롭다고 마냥 먼 산만 보겠는가. 불교에서는 우리 중생이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부른다. 사바세계의 뜻은 ‘참아야만 살 수 있는 세계’라는 뜻이다. 교회 다니던 분에게 사바세계의 뜻을 설명하니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스님. 제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사바세계의 뜻이 마음에 확 와 닿습니다.” 인생의 연륜이 깊어진 분들일수록 동감하는 말씀이 있다. “인생 살아 보니 내 뜻대로만 살아가지가 않더라. 인생 잘 사는 법이 어디 있겠냐. 힘들고 답답해도 꾹 참고 사는 게 인생이지. 어떻게 내 마음대로만 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다. 참아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웃을 힘도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밥 먹을 힘은 있다. 잠잘 힘도 있다. 어디로 놀러 갈 힘도 있다. 남 욕할 시간도 있다. 하다 못해 숨 쉴 힘이라도 있잖은가. 그냥 웃을 뿐이다. 아무리 괴롭고 답답해도 나의 웃음조차 앗아갈 수는 없다. 웃음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화가 나면 화를 좀 낼 수도 있다. 짜증 나면 짜증 낼 수도 있다. 정말 욕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웃어야 한다.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내 마음을 닦아 줘야 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늘 현재일 뿐이다. 순간 순간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단 웃어야겠다. 그리고 자꾸 웃도록 노력해야겠다. 늘 웃을 수 있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기를. 모든 분들이 행복하기를 기도해본다.

[삶과 종교] 거룩한 항해

인생의 의미를 ‘항해’에 빗대곤 한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인생은 항해’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지대넓얕’의 작가 채사장은 TV 강연에서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라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하며 인생을 열심히 살았는지, 아니면 그저 생존했는지 구분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산 것인지, 다만 생존한 것인지 그 누구도 평가할 자격과 기준은 없다. 사실 세네카도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 않았는가. 세네카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새해를 시작하며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해 계획하고 준비한다. 그러나 인생의 항해에서 자주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항해는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인생의 항해를 떠남에 있어 가정, 직장, 사회, 국가, 종교, 세계 등 수많은 배를 타야 하고 배에 함께 탄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 새해를 맞아 내가 속한 공동체와 대한민국이라는 배의 항해가 출발부터 험난하다. 물가와 금리가 치솟아 서민경제는 태풍을 맞은 듯하고 정치적인 분위기는 풍랑이 이는 바다처럼 어수선하다. 이런 항해를 지속하다가는 우리가 함께 타고 있는 배가 난파하거나 침몰할 위기에 봉착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2023년 항해를 위한 해법은 무엇인가? 단언하면 거룩한 항해다. 창세기 18장에는 낯선 자를 대접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섭씨 5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걸어오는 낯선 사람 세 명을 발견한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낯선 이들은 위험한 존재였으나 아브라함은 신발도 신지 않고 뛰쳐나가 낯선 자들을 맞이한다. 아브라함은 주위 사람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처지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환대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하는 것, 그들에게 자리를 주고, 그 자리의 불가침성을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는 공리주의적 사람관을 경계하는 대목이고 거룩을 이루는 삶이다. ‘거룩’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카도쉬(kadosh)’인데 ‘구별’, ‘다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흔히 세속과 구별돼 신의 말씀에 입각해 나 자신의 생활을 바로잡는 것을 거룩이라고 한다. 나아가 거룩이란 나와 다른 낯선 이와 편안하지 않은 것을 배척하지 않고 그것을 깊은 사유와 배려를 통해 섬김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 즉 구별과 다름,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나를 챙기면서 이웃을 챙기는 것.” 그것이 거룩한 삶의 핵심이다. 2023년 우리 삶의 항해가 이러한 거룩으로 점철된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에 뿌듯한 성취와 보람이 있을 것이다.

[삶과 종교] 2023년 올해의 운세

매년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이 사주팔자를 통해 자신의 운세를 내다 보려 한다. ‘올해에는 대박이 났으면’, ‘올해에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하고 자신의 미래에 기운을 불어넣어 줄 운세를 기대한다. 그러나 누구나 매번 좋은 운세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또 좋은 운세가 나왔다 해서 좋은 결과로만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명리학이 지닌 일종의 공식에 따라 사람의 운을 예측할 수 있을 뿐, 사람의 미래에는 여러 변수가 깔려 있고, 그 운세를 다스리는 마음가짐과 처신 또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명리학에 따르면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일지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송강호 배우가 관상가 역할로 등장하는 영화 ‘관상’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봤을 뿐, 파도를 움직이는 바람을 봐야 했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것 그 너머에 사람의 힘으로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장 8절)고 이야기한다. 쉽게 말해 만사가 우리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바람의 방향을 살피고, 그 바람을 주관하는 이의 의도를 헤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람이 생기게 된 원인과 바람이 초래할 결과, 그리고 수많은 변수까지 인간이 모두 파악할 수 없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바람이 어디서 불고 어디로 가는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또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 앞에 인간은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기후변화에 따른 재난 발생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그 변화를 관찰하고 예측하려 한다. 누구든지 죽음의 순간을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지만 의료기술의 발달로 사고와 병으로 인한 고통을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다. 보이는 것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고 동시에 인간은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만약 누군가가 미래를 알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래를 안다는 것은 미래가 미리 정해져 있으며, 미래를 완전히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게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닥칠 미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념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미래를 아는 이는 추앙받을 것이고, 급기야 그는 종교를 만들고 신이 되려 할 것이다. 절대적 운명론을 믿는 현대판 사이비종교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미래를 아는 것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미래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길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미래를 짐작하기 위해 과거를 살피고, 과거에 했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2023년 운세에 대해 누군가의 조언을 듣기보다 자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해 나가는 것은 어떨까.

[삶과 종교] 연초에 공자를 돌아보다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수업에서 자주 공자의 가르침을 언급하곤 한다. 그런데 의문이 들 것이다. 아무리 공자가 훌륭한 성인(聖人)이고 좋은 말을 많이 남겼다고 해도 2천500년이 흐른 지금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공자가 살던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명의 발달 수준이야 당연히 비교도 안 되겠지만, 오늘날과 유사한 점이 많다. 공자의 춘추시대는 기존의 가치관이 전복되고 무한경쟁이 펼쳐졌던 시기다. 인간다움이 상실되고, 이익과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 풍조가 강했다. 일상의 평범한 삶이 위협받고 불확실성은 나날이 가중되고 있었다. 공자의 사상은 이러한 시대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그는 극단적 환경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인간을 우려하고, 무엇이 사람다운 것인지, 무엇이 사람다운 삶인지를 성찰하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각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나를 둘러싼 소중한 관계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마음의 중심을 잡으라고 강조한 점이다. 오늘날 불확실성이 갈수록 짙어지고 사회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지고 있다. 3년 전 우리의 생활방식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순식간에 ‘올드 노멀’이 돼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화를 앞서 예측하고 대응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상상하지 못한 미래가 언제든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역량을 갖추는 길밖에 없다. 올바르게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주관과 편견을 배제한 채 신속하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힘이 절실해졌다. 이런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 공자의 가르침은 곱씹어볼 만하다. 공자는 “제멋대로 억측하지 않았고,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단언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내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마음이 평탄하게 넓어야 한다고 당부했고, 내 마음을 살펴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반성하라고 강조했다. 남들이 보고 듣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도 흐트러지지 말라고 이야기했고, 화를 옮겨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지금 이 순간의 최선은 무엇인지,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를 고민하고 행동하라는 중용(中庸)은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을 집약해 보여준다. 이를 통해 공자는 각자 삶의 주체가 되길 바랐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풍요롭든 가난하든 내가 결정하지 못하는 삶, 내가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된 2023년, 올해도 우리는 수많은 거시적, 미시적 문제들과 마주해야 한다. 불확실성도 여전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공자의 가르침은 우리가 이 시대를 뚫고 나아갈 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삶과 종교] 마음을 정화하는 최고의 명상법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한 사람들에게 명상을 자주 권한다. 여러분에게 ‘자비명상’을 소개하겠다. ‘자비의 명상’은 내 마음을 정화하는 최고의 명상법으로 손꼽힌다. 자비명상은 아주 간단하다. 만약 자비명상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하루 10분만이라도 지속적으로 연습한다면 아주 놀라운 체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먼저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되고, 의자 또는 침대 위에 앉아도 된다. 그냥 편안하게 앉으면 된다. 원한다면 누워서 해도 된다. 누워서 자비명상을 하면 불면증에 매우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눈을 감고서 편안하고 고요하게 호흡을 시작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억지로 호흡을 조절하려 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호흡을 점점 고요하게 내려놓는다. 그리고 본격적인 자비명상에 들어간다. 먼저 당신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남을 사랑할 수 있다.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주문을 외운다.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마음속으로 정말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간절히 집중해본다.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같은 구절을 충분히 외운 뒤에 대상을 바꿔 다음과 같이 되새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으로 편안하게 외운다. 어느 정도 외운 뒤에 다시 대상을 바꾼다. 이제부터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나를 화나게 한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나를 화나게 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화나게 했던 사람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며 에너지를 보낸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잘 안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 감정도 사실 습관화돼 나타나는 심리 작용이다. 억지로라도 자꾸 하다 보면 실제로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사람에 대한 화났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가는 기적을 맛보게 된다. 이제 가장 어려운 관문이 남았다. 이번 단계를 완벽하게 마스터한다면 당신의 마음 공부 수준은 아주 깊고 높아질 것이다.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워본다.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에서 굉장히 어렵고 힘들어한다. 어떤 분은 도저히 그 사람을 위해 행복의 에너지를 보내줄 수 없다며 흥분하고 부정하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꼭 명심하기 바란다. 자비명상은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이다. 여러분이 ‘나를 괴롭힌 그 나쁜 놈’에게 행복하라고 에너지를 보낸다 해서 그 사람이 진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비명상은 철저히 ‘내 마음을 정화’하는 탁월한 수행법이다. 당신이 그토록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 사람’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기원해줄 때, 그 순간 당신 마음에 억압된 ‘화’와 ‘부정적 에너지’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자비명상은 굉장한 ‘마음 치유의 약효’가 담겨 있다. 지금까지 배운 자비명상을 잠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 “나 자신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2단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3단계, “나를 화나게 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4단계,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비명상을 끝내고 마무리할 때 다음과 같이 외운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삶과 종교] 공생의 원리

대학에서 학생들이 선호하는 강의를 일컬어 ‘꿀강’이라고 한다. ‘꿀강’의 조건은 학점을 후하게 주는 강의나 출석 확인을 하지 않는 강의, 그리고 조별토의나 팀프로젝트 없이 혼자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강의가 해당된다. 물론 모여서 팀을 이뤄 소통하고 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들도 있으나 개인주의가 극대화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넘어 나와 이질적인 것은 거부하는 ‘면역적 거리두기’까지 치닫고 있다. 함께 존재하고, 상생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어려워진 시대이다. 교육공학자들은 혁신적인 수업을 위해 ‘나와 너’가 함께 팀을 구축해 토의하고, 프로젝트를 설계하며 만들어 가는 일을 권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너는 너’, ‘나는 나’의 태세로 교수자의 강의를 듣고, 시험 때 적당히 암기해 괜찮은 점수와 학점을 받는 수업을 ‘꿀강’이라 여긴다. 이러한 꿀강만 찾다 보면 다른 이와 만나 상생을 위해 협력하고, 서로 이득을 주는 관계의 ‘공생’ 역량은 둔화해 잠재성과 능력은 영글지 않고 썩어갈 것이 자명하다. 코로나 시국이 종식되는 양 ‘코로나 이후’를 준비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현실은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바이러스와도 ‘공생’해야만 하는 상황인데 하물며 지구에 생존하는 인간과 모든 생태계의 ‘공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생(symbiose)’을 실현할 수 있을까? 단언하면 다른 생명체의 ‘다름’과 ‘차이’를 끌어안아야 한다. 국가, 인종, 종교, 성별, 세대, 외모, 정치, 경제, 문화 등 수많은 차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이 차이로 인해 불편함, 심지어 폭력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이 역사에서 많이 일어났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탄’의 의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은 이를 ‘성육신(incarnation)’ 또는 말씀인 ‘로고스(logos)’가 육신이 된 ‘화육’이라고 말한다. 성육신과 화육의 특징은 상대방 혹은 대상에 들어가 변화하는 ‘작용인의 역할’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로고스의 말씀이 임하면 창조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예수와 만난 이들, 그분의 말씀이 임한 곳에 무수히 많은 창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세리, 창녀, 과부, 병자, 회당장, 백부장, 로마 군인 등이다. 올해 성탄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이 온 인류에게 임해,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을 실현하는 창조적 변화를 소망한다. 신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생각하며 내가 네가 돼 ‘다름’과 ‘차이’를 끌어안고, 차별과 혐오, 분쟁과 폭력을 멈추는 성탄이 되기를…. 낮고 천한 말구유를 기억하고, 지극히 작은 자들과 어려운 곳을 돌보는 성탄이 되기를…. 그것이 성탄의 핵심인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양승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 및 교목

[삶과 종교] 미리 크리스마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기쁜 마음으로 서로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건넨다. 종교를 막론하고 ‘크리스마스’라는 표현은 이제 자연스러운 말이 됐다. 과연 어떤 뜻일까? 크리스마스는 영어의 ‘christ’와 ‘mass’의 합성어이다. ‘christ’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구원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이다. ‘mass’는 라틴어 동사 ‘파견하다(mittere)’가 명사화된 ‘파견(missa)’에서 따온 것으로, 가톨릭의 핵심 전례인 미사를 뜻한다. 즉, 크리스마스는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미사’라는 의미로,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고 하면 ‘즐거운 그리스도의 미사 되세요!’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성탄절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신이 인간이 된 사건이며 동시에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모두 지닌 존재가 이 세상에 온 사건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개념이기에 하나의 신비로 이해한다. 성경은 이렇게 소개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피서 2, 6-7).” 신이 우주 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가까워지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돼, 우리 인간에게 파견된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는 죽기 직전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며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밝힌다. 제자들도 스승처럼 가서 이웃들의 발을 닦아주는 봉사자가 되라고 말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의 첫째가는 제자이며 천국의 열쇠의 권한을 지닌 베드로의 후계자, 교황을 ‘종들의 종(servus servum)’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로 신이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파견된 이유, 그리고 당신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한 이유 역시 우리도 그분처럼 이웃들을 섬기고 봉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성탄절이 되면 아기 예수상을 모신 구유를 흔히 보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모습은 2천년 전부터 시작된 전통은 아니다. 1223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당에 마구간을 만들고 구유와 나귀를 놓으면서 시작됐다. 이는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한 아기 예수의 겸손함과 동시에 신이 인간이 되었지만, 누구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아주 나약한 아기의 모습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이는 우리에게 가장 낮은 곳, 가장 가난한 곳, 가장 보잘것없는 곳에 예수가 있고, 그곳에 우리의 도움과 사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올해는 ‘메리 크리스마스(즐거운 그리스도의 미사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단지 형식적인 인사치레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크리스마스에 담긴 의미처럼 나보다는 가족과 이웃을 위해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연말연시가 됐으면 한다. “미리 크리스마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주량을 정해 놓지 말기

이달 초,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초등학생이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대낮에 만취 상태였던 운전자는 뺑소니 의혹까지 받고 있다. 4년 전, 단속 기준을 높이고 음주운전자를 가중 처벌하는 일명 ‘윤창호법’이 도입됐지만 이러한 비극적인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음주운전뿐만이 아니다. 주폭 등 다른 주취 범죄도 여전하다. 범죄는 아니더라도 지난해 알코올 관련 사망자가 하루 평균 13.5명(통계청 ‘2021년 사망원인 통계’)에 이르는 등 술로 인해 우리가 입는 피해는 막심하다. 그런데 이 문제는 만만치 않다. 개인, 사회, 국가가 전방위적으로 노력하더라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가능했다면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술에 대해 고민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술을 폐기할 수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순 있다. ‘술 권하는 사회’, ‘술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 알코올 중독 치유를 지원하고 주취 범죄에 엄격히 대응하는 등 제도적 대응도 필요하다. 개인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술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다잡아야 하는데, 여기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만한 가르침이 있다. 논어의 ‘향당’편에 보면 ‘유주무량 불급란(唯酒無量 不及亂)’이란 구절이 나온다. 공자는 술에 대해 양을 정해 놓지 않았지만,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평소 내 주량은 어느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한데 주량이 소주 한 병이면 한 병을 마시는 동안에는 긴장을 풀고 있다. 그 정도로는 취해 흐트러질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통 때는 괜찮았던 음주량인데 어떤 날은 일찍 취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주량을 넘겼는데 멀쩡한 날도 있다. 그날의 몸 상태와 기분에 따라 취하는 시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 소주 한 병이 주량이라도 매일같이 한 병을 마셔대면 몸에 탈이 나고 심지어 중독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주량을 내세우며 술 마시는 것을 합리화하곤 한다. 따라서 공자의 말처럼 내가 마실 ‘술의 양’을 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 얼마나 마실지의 기준은 ‘나의 평소 주량’이 아니라 ‘지금 나의 상태’가 돼야 한다. 공자가 술을 마실 때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현재의 몸 상태에 맞게 음주를 제어했다는 뜻이다. 많이 마시든 적게 마시든 ‘이러다가 취할 것 같은데’라는 기미가 보이는 순간, ‘내가 흐트러질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멈췄다는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면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시는 상황이 된다. 물론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술을 마실 때는 주량을 믿지 말고 나의 정신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적절한 시점에 자제하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술에 끌려다니거나 술로 인해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즐거운 술자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연말 송년회에서도 ‘술의 양을 미리 정해 놓지 않았지만,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는 공자의 태도를 기억해 주시길!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삶과 종교] 발밑을 비추어 본다

뜨거웠던 여름날이 엊그제였는데 어느새 한파를 코앞에 두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찾아올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흐르는 물보다 빠른 것이 시간이요, 쏜살같이 빠른 것이 세월이라고.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이제는 세월 흘러가는 것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마냥 아찔하다. 옛날 옛적에 어떤 노인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당도했다. 염라대왕을 본 노인이 덜덜 떨며 말했다. “대왕님, 제가 이렇게 속절없이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저승에 올 줄은 몰랐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3명의 천사를 보여주고 세 번의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대는 왜 알지 못했는가?” 노인이 당황하며 물었다. “대왕님, 언제 3명의 천사를 보내고 언제 세 번의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염라대왕이 말했다. “첫 번째 천사는 나이든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굽고 이가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된 사람을 만났을 때, ‘젊음은 영원하지 않구나. 나도 언젠가 저렇게 늙겠구나’라고 왜 생각하지 않았는가?” 염라대왕이 또 말했다. “두 번째 천사는 병든 사람이다. 병이 들어 아프고 괴롭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건강은 영원하지 않구나. 나도 언젠가 저렇게 아플 수 있겠구나’라고 왜 생각하지 않았는가?” 염라대왕이 다시 말했다. “세 번째 천사는 죽은 사람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죽음이 갑자기 찾아와 육체는 무너지고 정신은 꺼져 버린다. 송장을 만났을 때, ‘생명은 영원하지 않구나.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고야 말겠구나’라고 왜 생각하지 않았는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노인을 향해 염라대왕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그동안 그대 삶에 평생에 걸쳐 3명의 천사와 세 번의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대는 왜 평생을 허송세월했는가.” 우리는 죽는다. 언젠가는 죽는다. 법구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 온갖 싸움이 사라질 것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람의 목숨은 길어야 100년이다. 역사에 출현했던 수많은 국가와 영웅들도 세월 속에 먼지가 돼 흩어진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 결국은 죽는다는 것이다. 옛날 옛적에 큰스님이 계셨다. 신도가 찾아와 큰스님께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점을 봐 달라고 했다. 큰스님이 말했다. “나는 그대가 미래에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신도는 흥분해 말했다. “스님, 말씀해 주세요. 제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죽는다. 그대는 반드시 죽는다.” 당황해서 멍하니 정신 나간 신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미래에 반드시 죽는다. 10년 후가 될지, 100년 후가 될지, 천 년 안에는 반드시 죽는다. 그것이 그대의 미래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넉넉히 오래 살아도 천 년 안에는 죽는다. 이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이 진실 앞에서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또 겨울이 지나 봄이 올 것이다. 내 앞에 언젠가 죽음이 왔을 때 나는 내 삶을 과연 어떻게 후회 없이 받아들일까. 지금 이 순간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자기 발밑을 비추어 보라. 광우스님 화계사

[삶과 종교] 연결의 감각

한국 사회가 파편화되고 있다. 공동체가 개인화로 흩어지고, 개인은 더 미세한 존재로 분해돼 극소단위로 분화됐다는 의미의 ‘나노사회(Nano Society)’라고 칭한다. 나노사회의 특징은 조각조각 흩어지는 모래알, 끼리끼리 관계 맺는 해시태그, 내 편의 목소리만 믿게 되는 반향실이기에 모르는 타인과 연결하는 감각이 둔화되고 있다. 간디는 종교의 진수를 묻는 질문에 “친구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원수라고 여겨지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종교의 진수입니다. 종교에서 다른 것들은 장사에 불과합니다”라고 답했다. 즉, 종교의 핵심이 원수와 ‘친구 되기’라는 것이다. 나노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울타리를 설정하면서 다른 이들을 의심하고 경계한다. 이러한 모습을 철학자이자 작가인 한병철은 “자기와 이질적인 것은 거부하는 시대”라고 면역학적으로 정의하면서 연결이 아닌 분리와 단절, 파편화된 사회를 지적한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의 개념을 드러낸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초주검이 된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혐오하던 사마리아인은 응급처치를 한 후 여관에 돈을 내며 다친 사람을 맡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진정한 이웃이란 나와 비슷한 동질성이 있거나, 가까이 사는 이들이 아닌 “사랑과 자비를 베푼 사람”임을 명확히 선포한다. 대학에서 ‘문화콘텐츠와 성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소개하면서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눅 6:32)라는 화두를 던지며 통찰을 요청했다. 노소정 학생이 제출한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모습’은 현대사회에서 비일비재하다. 10·29 핼러윈 참사로 소중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들 울타리에 국한된 관점으로 다양한 희생양을 찾아 비난의 화살을 쏘아 댔다. 뿐만아니라 내 아이만 챙기는 부모들, 내 이익만 챙기도록 보채는 사회, 우리 공동체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현대 풍조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나타난다. 평론가 신형철의 책 ‘인생의 역사’에 “때로 너의 죽음은 기어코 나의 죽음이 된다”는 글이 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dividual)들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나에게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도록 했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참사의 순간, 연결의 감각이 살아있었던 이들은 경찰서에 신고했고, 숨이 멎어 가는 사람들에게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했으며, 어떻게든 도움의 손길을 펼치려 노력했다. 이 연결의 감각은 착한 사마리아인, 진정한 이웃으로서 살아가는 사랑과 자비의 언행이다. 우리는 더 넓은 연결의 감각이 필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연결만이 아니라 이 순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숭고한 연결의 감각이 필요하다. 양승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교목

[삶과 종교]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십계명 중 제8계명인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라는 계명은 단지 ‘거짓말하지 마라’라는 상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왜 진실해야 하는가? 진실이 왜곡된 세상에, 그리고 거짓으로 얼룩진 사회 속에 신뢰라는 희망이 자리할 수 없기에 진실해야 한다. 사이비종교를 예로 들어보자. 겉으로는 종교로 위장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비종교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을 말한다. 타 종교 교리를 이것저것 모방한 교리, 교주의 신격화,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모습, 시한부 종말론까지 뭔가 허술한 면이 있지만 희한하게 그 집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집단은 급기야 교주를 포함한 특정 소수의 인원만을 위해 움직이고 활동하는 성향을 보이고, 종교적 맹신을 이용해 사람을 세뇌시켜 가정을 파괴하거나 강력범죄를 유발하고 주도하기까지 한다. 기성 종교인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다. 신부들의 미성년자 성범죄 논란과 바티칸 은행의 부패 및 비리로 가톨릭교회는 큰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오랜 기간 만연돼 온 가톨릭계의 공공연한 범죄에 대해 처벌보다는 오히려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사건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종교적 권위와 도덕성을 문제 삼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를 대표해 범죄로 인한 피해자들과 전 세계를 향해 용서를 청했다. 또 더 이상 이러한 범죄와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하며 교회의 형벌제도를 개정했다. 신앙이 전제된 종교 역시 위선과 거짓으로 일관한다면 그 종교에 대한 신뢰는 존재할 수 없다. 신뢰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자는 논어에서 ‘경제와 국방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역설했다. 여기서 나온 유명한 말이 바로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백성들의 신뢰가 없다면 국가의 존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믿음이 전제돼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음식점에서 사람이 해주는 밥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는 이유도 안전한 나라라는 ‘믿음’이 전제돼 있다.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안위도, 우리의 미래도 불투명한 것이다. 한 나라의 원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돼야 국민이 이 나라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원동력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 영부인의 허위 경력과 논문 표절 논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논란 등은 대한민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다. 진실을 밝히는 검찰 출신 대통령이기에 논란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과 반박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논란을 회피하고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혹시 ‘거짓말인가?’라는 합리적인 의심만 들 뿐이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국민의 복지와 나라의 안위와 연결된 것이라면 대통령은 현재 자신의 태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일, 혼란을 바로잡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후보 시절 공약한 공정과 상식이 있는 나라를 우리는 조금이라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시작과 끝이 한결 같기를

미불유초선극유종(靡不有初鮮克有終). “시작이 있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능히 끝을 맺는 사람은 드물다”라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시근종태인지상정(始勤終怠人之常情), “처음에는 근면하다가도 종국에 가선 게을러지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라는 말도 나온다. 둘 다 처음의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어느새 11월이다. 아직 12월 한 달이 남았다며 스스로 위로할지도 모르겠지만, 매년 이 맘 때면 연초에 세웠던 계획을 돌아보며 한숨 쉬는 사람이 많다. 올해는 살을 빼야지, 금연해야지, 어학공부를 해야지,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야지 하는 새해 첫날의 굳은 결심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남은 것이라곤 ‘또’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시간만 덧없이 흘려보냈구나라는 자책뿐. 물론 처음을 유지하는 일이 쉬웠다면 시종일관이니 시종불투니 시종여일이니 하는,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라고 경계하는 수많은 사자성어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내 나태해지고, 흐지부지해 버리는 것, ‘내일부터 열심히 하지’라고 미뤄 버리는 것은 글머리에서 소개한 대로 사람의 보편적인 속성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평생 작심삼일만 하다 끝나고 말 것이다. 속성을 극복해야 비로소 업그레이드되는 법이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내 마음부터 단속해야 한다. 일찍이 공자는 “붙잡으면 간직할 수 있으나 놓치면 없어지고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방심(求放心)’, 놓쳐버린 마음을 붙잡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당부다. 뻔한 주문인듯 하지만 이 길밖에 없다. 나를 타성에 젖게 하는 것, 편안함만 좇고 나태해지게 만드는 것, 방종하게 하는 것, 모두 내 마음이 원인이다. 그러니 마음이 흐트러지는 순간을 늘 주시하고 있다가, 잘못된 싹이 움트는 순간 이를 신속하게 뽑아내야 한다. 특히 조심할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자신에게 변명을 하고, 자기합리화를 한다. 나중에 해도 돼, 이 정도면 괜찮아, 지금은 바쁘니까 하고 핑계를 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 나를 속인 것이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감추려고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고치지 않는다면, 나는 점점 나의 목표를 낮추게 된다. 미루고 회피하게 된다. 처음 시작할 때 꿈꿨던 내 모습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설령 마음의 중심을 잡고 유지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람은 끝으로 갈수록 긴장의 끈을 놓게 된다.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 백리를 가는 사람은 구십리를 절반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처럼, 마치는 그 순간까지 마음을 다잡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도 바로 지금, 올해 남은 50여일 동안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속이지 않기 위해 노력해 나간다면 매일매일 작은 차이를 더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삶과 종교] 피로한 당신께 명상을 권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루 세 번 양치질을 하고, 두 번 이상 세수를 하고, 한 번 이상 샤워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마음을 하루에 몇 번이나 닦고 있을까. 바쁜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건강을 괴롭히는 가장 큰 골칫덩어리 중 하나다.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진행되는 대표적인 질병은 무엇이 있을까. 탈모, 불임, 비만,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위궤양 등 그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 모든 질병이 꼭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스트레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의학계의 정설이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몸이 건강하면 마음이 안정되듯이 마음이 고요하면 몸도 편안해진다. 현대인은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 많은 투자를 한다. 우리는 몸뚱이에 더 많은 집착을 한다. 정작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은 마음인데 평생 동안 자기 마음자리에 관심 한 번 주지 않고 살아가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스트레스를 흔히 ‘소리 없는 살인자’라 표현한다. 스트레스(stress)는 라틴어 ‘스티릭투스(strictus), 스트링제레(stringere)’에서 유래된 단어다. 무언가를 ‘팽팽하게 잡아당긴다’는 의미다. 14세기에 이르러 ‘스트레스(stress)’라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당시에는 ‘고뇌, 억압, 곤란, 역경’ 등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스트레스란 단어가 오늘날 의학용어로 쓰인 것은 캐나다 몬트리올대 내분비 학자 한스 휴고 브루노 셀리에 박사에 의해서다. 그는 쥐를 대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적·생리적 반응을 연구했다. 그 결과 1946년 ‘스트레스는 질병을 일으키는 중요한 인자’라고 발표했다. 이후 스트레스라는 말은 우리의 심리적 압박감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의미로서 일상 용어가 됐다. 스트레스도 긍정적인 면이 있긴 하다. 인류 진화에 영향을 준 최고의 생존 능력이었다. 노출된 위험에서 자신의 몸을 지켜주는 강력한 생존 신호였던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스트레스는 인생의 양념이 될 수 있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는 심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마치 매운맛의 음식이 미각에 활력을 주지만 반복된 매운 음식은 위장을 망치듯이 말이다. 스트레스의 특징은 ‘긴장’ 상태다. 긴장은 인류 진화에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다. 한때는 생존에 도움이 됐던 긴장 상태가 이제는 인류 건강을 위협하는 악영향이 돼버렸다. 스트레스의 압박으로 생겨난 과도하고 지속적인 긴장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무너뜨리는 독이 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자체적으로 긴장을 녹여낼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긴장의 소멸이란 스트레스의 해소를 뜻한다. 이 기술은 딱히 어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쉬워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의심을 일으킬 정도다. 이 기술은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흔히 ‘명상’이라고 부른다. 간단한 명상법을 소개하겠다. 자세를 편안하게 앉되 허리를 반듯하게 편다. 의자 위에 앉아도 되고, 침대 위에 앉아도 된다. 방바닥 위에서 책상다리를 해도 된다. 어떤 자세로 앉든 가장 중요한 것은 허리를 곧게 펴는 것이다. 손은 편안하게 두고, 입술은 닫고, 눈은 살짝 감는다. 어깨는 완전히 힘을 뺀다. 목과 허리는 반듯하되 온 몸의 힘이 쭉 빠지고 이완돼야 한다. 자세를 잡았으면 이제부터 편안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편안하게 숨을 내쉰다. 그저 편안하게 숨을 들이쉬고, 그저 편안하게 숨을 내쉰다. 절대 억지로 힘을 주거나 잘하려고 애쓰지 말라. 최대한 힘을 빼고 그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는 것,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 그냥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편안하게 ‘쉬어 가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단 5분이라도 좋으니 지금 앉아서 한 번 도전해 보기 바란다. 광우스님 화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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