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고오환 의원 에워싸던 경기도의회의 벽

물론, 고오환 도의원의 권리다. 본인 판단엔 피해자일 수 있다. 피해를 구제받는 방법에 소송이 있다. 고 의원은 그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상대가 경기일보였다. ‘나’와 ‘박 기자’가 구체적 피고로 지목됐다. 일단 소송이 제기되면 판사가 주관한다. 항소(抗訴)와 변소(辯訴) 모두 법정에서 다투어야 맞다. 피고에게도 할 말은 많다. 하지만 재판정외에는 입을 닫아야 한다. 그래서 보도를 중단했다. 그게 피고의 처신이고 법 앞에 도리라고 봤다. 그렇게 생긴 7개월의 공백이다. 이 공백을 도의원들은 어떻게 봤을까. 이게 궁금한 이유가 있다. 고 의원에 던진 의혹은 독직(瀆職)이었다. 의원이란 신분을 이용한 행위이고, 그 행위가 옳지 않다고 본 것이다. 정치 주변에 늘 있는 잡음이다. 고 의원만의 일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다. 그때, 많은 도의원들이 고 의원과 함께 했다. 의혹을 반박한 장소는 본회의장이었다. 의원들이 곳곳에서 ‘마이크 켜, 계속해’라며 힘을 보탰다. 엊그제, 길었던 1심 재판이 끝났다. 어떤 의원이 이런 인사를 한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위로(慰勞)다.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것이 위로다. ‘나’와 ‘박 기자’가 괴롭고 슬프게 보였던 모양이다. 재판 기간의 침묵이 그렇게 비쳤던 모양이다. 그 사이, 의혹은 뒤죽박죽 됐다. 도의회 주변에는 고 의원의 해명만 남았다. 본회의장 해명이 실체적 진실처럼 됐고, 경기일보 보도는 근거 없는 비방처럼 됐다. 그랬던 도의회가 문을 닫을 때가 됐다. 벌써부터 의석 곳곳이 텅 비고 있다. 머지않아 폐회될 것이다. 그러면 경기일보 보도도 묻힐 듯하다. 정치인들에 경종을 울려보려던 기사다. 의정 활동이 의원의 사익과 맞물려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하려던 기사다. 그런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도의회는 되레 끈끈한 동료애로 뭉쳤다. 고 의원의 윤리위원장직도 끝까지 지켜줬다. 1심 판결이 아름아름 알려지고 있지만 누구 하나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밝혀두려고 한다. 경기일보의 주장도 아니고, 고 의원의 주장도 아닌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단을 더 늦기 전에 밝혀두려고 한다. 도의원이라는 신분에 대해 이렇게 판결했다. ‘(고오환 의원의 신분인) 도의원은 공적 인물’이라고 했다. ‘(투기 논란 부동산은) 공적인 관심 사안에 해당한다’고 했다. ‘(따라서 경기일보의 관련 보도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비교적 완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의혹 제기 본질에 대해 이렇게 판결했다. ‘(사업부지는 고 의원의 문제 제기로 개최된 토론회에서도) 부지 선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고 했다. ‘(경기일보의 보도는) 원고의 문제 제기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포괄적인 판단에 대해 이렇게 판결했다. ‘(고오환 의원의) 지위 및 사안의 성격, (경기일보의) 취재 경위 및 방법, 취재 결과, 구체적인 기사 내용 및 표현의 정도 등에 비추어…오로지 공익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서 그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최종 주문(主文)은 이렇게 내렸다. ‘원고(고오환 의원)의 피고들(경기일보 등)에 대한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고오환 의원)가 부담한다.’ 2017년 4월10일, 경기도의회 속기록에는 ‘균형 잃은’ 기록이 새겨졌다. ‘박 기자’ 취재는 부당한 뒷조사라고 새겨졌고, 경기일보 기사는 ‘팩트를 바꾼’ 오보라고 새겨졌다. 어떤 토론도 허용되지 않은 일방의 기록 2천600자다. 벽(壁)이다. 자기들끼리 쌓아올린 이기(利己)의 벽이다. 선출된 도의원이 친 벽이고, 본회의장을 내준 의장단만이 친 벽이고, 함께 목청 높인 도의원들이 친 벽이다. 그 벽너머로부터 ‘박 기자’는 또 협박성 문자를 받는다. “박○○, 오늘 법원의 판결 너무 좋아하지 마시게∼∼∼” 主筆

[김종구 칼럼] ‘직업’ 선택 자유 있고, ‘직원’ 선택 자유 없다

검찰에 몸담은 사람이다. 그것도 장(長)이다. 앉자마자 심각하게 입을 연다. “의견을 듣고 싶다. 솔직하게 말해 달라.” 금융권의 채용 비리 수사다. 솔직한 여론을 듣고 싶다고 한다. 한 명이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한다. “채용 비리로 실망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 구속시켜야 한다.” 다른 한 명은 수사하는 게 맞느냐고 반문한다. “우리은행이 민간기업 아닌가. 누구를 뽑든 말든 자유다. 검찰권이 개입할 일은 아니다.” 요사이 많이 오가는 고민이다. 이 고민이 현실에서도 꼬였다. 우리은행 구속영장이 연거푸 기각됐다. 은행장과 임원이 풀려났다. 판사의 기각 사유는 이랬다. ‘개인적 이득을 취하지 않았고, 진술이 확보돼 구속할 사유를 인정하기 어렵다.’ 특히 주목할 구절이 있다. ‘다툼의 여지가 있다’. 혐의가 진실이라도 유죄를 단정할 수 없을 때 등장하는 표현이다. ‘장’의 고민도 거기에 있었다. 담당 검사도 고민했을까. 재청구는 없었다. 비리 행태가 가관이다. 1차 꼴등이 최종 합격하기도 했다. 청탁 받은 응시자 명부까지 만들어졌다. 30명이 그렇게 합격했다. 2015~2017년만 봤는데 이 정도다. 화가 치미는 일이다. 판사도 당연히 그 기록을 다 봤을 거다. 그런데 기각했다. 그 취지가 짐작된다. 우리은행은 민간기업이다. 직원 채용은 민간 경영의 영역이다. 국가 형벌권의 개입은 신중해야 한다. 아마도 판사가 ‘다툼의 여지’라 적어 돌려보낸 영장의 뜻일 게다. 공기업과 민간기업은 다르다. 공기업은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또는 특별법에 근거해 설립된다. 당연히 경영의 모든 행위가 법률의 지배를 받는다. 인력 채용도 마찬가지다. 법으로 규정된 절차, 방식, 자격이 있다. 적법과 위법의 경계가 조문(條文)으로 명백히 획정돼 있다. 이걸 어기는 순간 곧바로 위법이 된다. ‘공기업 채용 비리 4천788건’이란 통계도 거기서 나왔다. 공고 규정 어겨서 걸렸고, 면접 규정 어겨서 걸렸다. 하지만, 우리은행은 민간기업이다. 채용기준을 강제할 공적 근거가 없다. 그걸 처벌하겠다며 검찰이 뛰어들어간 것이다. ‘업무방해죄’라는 포괄적인 죄명을 앞세우며 들어간 것이다. 서류 압수하고, 직원 소환하고, 구속영장까지 청구했다. 그러자 판사가 막아섰다. ‘죄가 되는지 살펴야 한다’고 제동을 걸었다. 그랬으면 쉬면서 검토해 보는 게 통상의 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되레 민간은행 다섯 곳을 추가하며 판을 키웠다. 억울했는지 하나은행이 이런 해명을 내놨다. “점포가 있는 대학의 출신자에 대해 경영적 판단을 고려했다.” 민간기업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산다. 천수백억원의 등록금은 큰 시장이다. 입점에 사활이 걸려 있다. 마침, 대학은 학생 취업률에 목매고 있다. 이해가 맞았을법하다. 그렇게 가점(加點) 채용이 이뤄진 모양이다. 물론 불공정 채용이다. 고쳐야 할 적폐다. 그렇다고 경영진을 교도소에 넣을 일은 또 아니다. 그런 적도 없다. 작금의 흐름이 그렇듯이 이번에도 ‘빽’은 있다. 여론전(戰)이다. 젊은이들의 분노가 무기다. 탄착점(彈着點)에 민간 은행을 매달아 놨다. 검찰 수사를 신호탄으로 다수의 난사(亂射)가 시작됐다. ‘민간 기업이니 신중하라’는 판사 의견 따윈 무시된다. ‘경영적 판단을 이해해달라’는 회사 해명도 묵살된다. 오로지 하나만 묻는다. ‘특별 채용이 좋은지 나쁜지 답하라.’ 당연히 ‘나쁘다’가 답이다. 그러면 주문한다. ‘무조건 구속시켜라.’ 정작 권한을 쥔 기관은 금감원이다. 그런데 모든 걸 넘기고 빠졌다. 검찰이 그걸 덥석 받았다. 그러더니 밀기 시작했다. 공기업이든 민간기업이든 가리지 않는다. 수사권원이 있건 없건 가리지 않는다. 무섭다. 검사 1천명의 생각이 다 이렇지는 않을 텐데…. 민간기업임을 고민하는 검사도 있을 텐데…. 하나가 된 듯 밀어붙인다. 그 기세에 나라가 이상해졌다. ‘직업 선택의 자유’는 있고, ‘직원 선택의 자유’는 없는 나라처럼 됐다. 그날, ‘장’은 자기 말을 많이 했다. “선배에게 물었다. 우리 땐 인사 청탁이 ‘정’ 아니었냐고 했다. 적폐인 것은 맞다. 그런데 검찰이 수사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업무 방해를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지만. 법원이 (영장을) 발부할지도 모르겠고.” 이런저런 고민을 말했다. 30분쯤 하더니 밝아졌다. ‘자, 얘기 그만하고 쏘주나 마십시다.’ 얘기는 거기서 끝났다. 어차피 그도 맡겨지면 수사하는 검사다. 검사 누구라도 “우리가 수사하기 적절치 않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主筆

[김종구칼럼] ‘굴욕적 외교’ 싫으면 ‘경제 후속조치’ 내야

그만큼 놀랐던 걸까. 34년 전 방송인데도 생생하다.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이 방송은 실제 상황입니다.” 어린이날이 그렇게 망가졌다. 전쟁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피납된 중공 민항기가 온 거였다. 승객과 승무원 105명이 타고 있었다. 6ㆍ25 이후 첫 중공 손님이다. 요즘 말로 단체 요우커(遊客)였던 셈이다. 고급스런 고속버스가 동원됐다. 빠른 국도 대신 빙 도는 고속도로를 택했다. 한국 발전상을 보여주려는 작전이었다. 최고급 워커힐 호텔이 숙소였다. 화교 출신까지 배치됐다. 호텔 내 가야금 대식당에선 공연이 이어졌다. 매 끼니 메뉴는 최고급 요리였다. 100명이 269인분의 갈비를 먹어치운 날도 있었다. 낮시간 여행도 국가 원수급 코스였다. 용인자연농원, 삼성전자, 기아자동차를 돌았다. 가는 곳마다 선물 꾸러미가 안겨졌다. 거리 곳곳에 환영 인파가 배치됐다. 중공 측 교섭단에도 극진했다. 민간인 단장 센투(沈圖)가 차관급 예우를 누렸다. 너무 심한 접대였다. 굴욕적 자세였다. 그런데 시간이 그 평가를 바꿨다. 석 달 뒤, 항공기 영공 통과가 합의됐다. 열 달 뒤, 한국 테니스 선수가 중공 대회에 갔다. 열한 달 뒤, 친척 상호 교류가 허용됐다. 열두 달 뒤, 중공 농구대표단이 서울에 왔다. 한중 교류의 봇물이 터진 것이다. 결국, 이 봇물이 9년 뒤 수교까지 흘러갔다. 시작은 ‘굴욕적 외교’였으나 결과가 화려했다. ‘날아든 봉황을 잡아챈 최고의 외교’로 기록돼 있다. 대륙(大陸)은 늘 벅찼다. ‘굴욕적인 역사’가 수두룩 하다. 세종대왕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임금이 뜰에 내려가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세종 1년 1월 19일). 상상도 하기 싫은 성군(聖君)의 모습이다. 너무 ‘굴욕적’이다. 하지만, 목적이 있었고 결과가 있었다. 태평성대를 얻었고 문자 창제를 인정받았다. 최고의 외교로 기록됐다. 그 역사의 쳇바퀴에 대한민국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도 똑같다. ‘혼밥’ 하는 우리 대통령 모습, 보기 속상하다. 우리 대통령을 툭툭 치는 중국 외교부장, 그 팔을 부러뜨리고 싶다. 우리 수행 기자를 구둣발로 짓이기는 중국 경호원, 피가 거꾸로 솟는다. 지켜보는 국민이 다 화났다. 거드름 피우는 중국을 욕했다. 대비 못 한 우리 외교를 질책했다. 당연한 분노고 할법한 질책이다. ‘굴욕적 모습’이 잦았던 건 분명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다. ‘굴욕적 외교’로 뭘 얻었느냐는 결과다. 그 결과물이 경제에 있음은 다 안다. 금한령(禁韓令)으로 한국 경제가 얼어붙었다. 여행업계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지경이다. 지방의 관광 행정도 초토화됐다.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이걸 해결해보겠다고 대통령이 달려간 거다. 경제인 260명도 그래서 따라간 거다. 이게 잘 됐다면 다 이해될 거였다. ‘띵호와(定好)’라 할 참이었다. 어렵사리 나온 리커창 총리의 말도 있잖나. “봄날도 기대할만하다고 생각한다.” 해결의 틈새를 열어준 귀띔이다. 이 귀띔이라도 붙들어야 한다. 후속조치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여행 자유화 만들어내고, 중국 진출 기업 편하게 해주고, 평창 올림픽 성대하게 해줘야 한다. 그러면 여행업계 살고, 현지 기업 살고, 올림픽 산다. 좀 굴욕적이었으면 어떤가. 혼밥 좀 했으면 어떤가. 국민 잘살게 하면 그게 ‘최고 외교’ 아닌가. 청와대가 할 일도 이거다. 경제 후속 조치를 만드는 거다. 중국에서 얻은 먹거리를 추스르는 거다. 그래야만 경제를 챙긴 ‘성공한 외교’로 바꿀 수 있다. ‘전(前) 대통령도 만찬 한 번 했다’느니, ‘13억 중국인과의 식사였다’느니…. 왜 이런 말 놀음을 하고 있나.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 혹시 이런 말 기억하나.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가 했던 말이다. “나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미국 앞에서 꼬리가 찢어지라 흔들어대는 개가 되겠다.”

[김종구 칼럼] 청와대 대처는 성공, 영흥도 구조는 실패

청와대가 이렇게 밝혔다. ‘대통령이 7시 1분에 1차 보고를 받았다… 9시 25분에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를 직접 찾았다.’ 신속한 보고와 상황 접수를 강조한 발표다. 하지만, 현장은 전혀 신속하지 않았다. 평택 구조대가 12.8㎞ 떨어진 제부도에 있었다. 20분이면 도착할 거린데 1시간 12분 걸렸다. 양식장 건들까 봐 빙 돌아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해경 부두에 있던 2개 구조함은 출동도 못했다. 야간 항해가 가능한 신형이 고장 났다고 했다. 차 타고 50㎞ 도로를 달려 민간 어선 얻어 타고 도착했다. 제일 가까운 곳에 영흥도 해경 파출소가 있다. 여기 있는 고속단정은 다른 배가 출구를 막고 있어 20분간 갇혔다.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국민이 한치의 의구심이 들지 않게 필요한 사항을 적극적으로 언론에 공개하라.’ 구조 상황 등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공개하라는 지시다. 하지만, 해경은 정직하지 않았다. 첫 발표 때는 6시 12분에 사고를 접수했다고 했다. 이후 6시9분으로 바꿨고, 다시 6시 5분으로 수정했다.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묘한 부분이 있다. 구조에 필요한 골든타임을 통상 30분으로 잡는다. 고속단정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6시 42분이다. 사고 접수를 6시 12분으로 잡으면 정확히 30분이다. 6시 5분이라면 골든 타임을 넘어선다. 의도적으로 역산해서 만든 ‘6시12분’ 아닌가. 의혹이 많다. 대통령은 또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한 명까지 생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달라.’ 국민 생명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당연하면서도 절박한 지시다. ‘말씀’ 자체는 표나게 챙겼다. 공개된 내용인데도 브리핑에서 또 읽었다. ‘대통령께서는 해경 지휘관 중심으로 수색 구조에 전 세력을 동원하여 구조에 만전을 다하고 의식불명자 대상 구호 및 의료조치와 사고자 가족분들에게 즉시 알리고 심리안정 조치 등에 최선을 다하며 마지막 1명까지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곤 그게 끝이다. 추가 구조자는 없었다. 당시 생존자 7명이 전부였다. 그나마 4명은 명진15호 선원들이 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속했다. 사고 발생 49분만에 첫 보고를 받았다. 두 차례 전화 보고, 한 차례 서면 보고도 받았다. 9시 25분부터는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를 지켰다. 다음날 참모 회의에서의 언급도 적절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 같은 사고를 막지 못한 것과 또 구조하지 못한 것은 결국 국가의 책임이다.’ 많은 이들이 세월호의 ‘박 전 대통령의 7시간’과 비교한다. 어떤 누리꾼은 ‘이것이 나라다’라고 했다. ‘위기 대처가 빛났다’는 평도 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잘한 것인가. 어떤 근거로 매겨진 평가인가. 탑승자 22명 중 15명이 숨졌다. 사망률 68%다. 세월호 탑승자는 476명이었다. 304명이 숨졌다. 사망률 63%다. 세월호 사고를 단군 이래 최악의 참사라고 했다. 그 사망률보다 이번 사고가 더 나쁘다. 신속한 구조? 양식장 때문에 늦고, 고장 나서 늦고, 출구 막혀 늦었다. 정확한 정보 공개? 번복과 오판 발표가 한 두 건이 아니다. 이게 잘한 구조인가. 그럼 세월호도 잘한 건가. 가정(假定)은 위험하다. ‘구명정이 일찍 도착했더라면…’이란 가정이 ‘살 사람들을 죽였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선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지적해야 한다. 해경은 구조작전에 실패했다. 연습한 대로 하지 못했다. 출동 태세도 부족했다. 정직하지도 않았다. 대통령이 ‘국가의 무한책임’을 말했다. 그러니 해경이 책임져야 한다. “국민 눈높이에 부족했다.” 서장(署長)의 반성인데 너무 후한 듯하다. 국민 눈높이가 서장의 생각처럼 후하지 않다. 청와대 역시 국가다. 책임을 느껴야 한다. 대통령 대처는 성공이었다. 영흥도 구조는 실패였다. 대처도 성공하고 구조도 성공했으면 더 좋았다. 급박한 상황이 하나의 선택을 강요한 것이라면, 바뀌는 게 나을 뻔했다. 대처에 실패해도 구조에 성공하는 게 좋을 뻔했다. 참변(慘變)은 또 온다. 아무리 조심해도 온다. 그때가 오기 전에 청와대가 버리고 갈 게 생겼다. 대통령을 생중계해 국민 신뢰를 구하는 모습-세월호가 남긴 학습-, 버려야 한다.

[김종구 칼럼] 文정부 남북 협력 의지, ‘임진강 거북선’ 공동연구로

김종구 주필 1972년, 이순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임진조국전쟁 때 거북선을 만들고 왜적을 바다에서 물리치는 데 공훈을 세운 애국 명장이다.’ ‘양반 지배 계급 출신의 지휘관으로 그의 애국심은 국왕과 봉건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기초한 것이다.’ 북한 사회과학원이 펴낸 ‘력사사전’의 내용이다. 이순신을 나라를 지킨 명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민 대중을 위했던 영웅은 아니라고 비꼰다. 철저히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평가다. 1994년, 거북선은 이렇게 설명됐다. ‘1592년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바다싸움에서 그 위용을 떨친 세계 최초의 독특하고 위력 있는 철갑선이다.’ ‘우리 인민의 슬기와 재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과학기술적 재부의 하나다.’ 북한 국제방송이 방영한 ‘세계 최초의 철갑선-거북선’이라는 프로그램에서다. 거북선의 위대함을 극찬하고 있다. 이순신에서와 같은 꼬투리 잡기도 없다. 그저 민족 최고의 기술이라고 맺었다. 남북이 보는 이순신은 다르다. 서로의 이념이 씌워져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극만큼이나 멀다. 하지만, 거북선은 똑같다. 남북 모두 민족의 자긍심이라고 자랑한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자부한다. 남한이 지폐에 새겨 넣을 때, 북한도 주화ㆍ우표에 새겨 넣었다. 주목할만한 유사점이 하나 보인다. 1994년 방송에서 소개된 내용이다. ‘거북선은 1413년 임진강에서 시험해 본 성과에 기초해서 16세기에 새롭게 완성된 것이다.’ 비슷한 주장이 우리에도 있다. 태종실록, 1413년의 기록이다.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2년 뒤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병조를 맡고 있던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의 건의다. 이 기록이 왜 중요한지 잠깐 눈을 돌려보자. 수원화성이 1997년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 다들 안 될 거라 했다. 전쟁으로 곳곳이 사라졌다. 아파트 빨래 걸이로 쓰인 곳도 있다. 행궁터에는 일제가 세운 병원이 있다. 100년 전통의 초등학교에 파묻힌 곳도 있다. 어디를 봐도 성곽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네스코는 인증했다. 바로 원천기술력 증빙이었다. 벽돌 하나, 기와 하나까지 기록된 설계도-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있어서였다. 거북선에 이런 증빙이 있나. 솔직해 지자. 없다. 이래서 세계 해전사가 거북선을 외면한다. 그저 전설 속 신기(神器) 정도로만 여긴다. 우리 스스로 초래한 결과다. 자료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거북선의 역사를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의 것으로만 한정했다. 그러다 보니 거북선 제작 능력이 ‘나대용’으로 특정됐고, 거북선 등장이 명종 이후로 좁혀졌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조선(造船) 기술을 십 몇 년, 한두 명의 일로 축소해 버렸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그 단서는 진작부터 충분했다. ‘1413년 2월 5일’이라는 날짜가 있고, ‘임진도 훈련’이라는 지역이 있고, ‘거북선(龜船)’이라는 명칭이 있다. 그 연구의 결실이 파주에 있다. 정부 외면 속에서 만들어온 결과다. 다행히 강 너머 북한에도 있는듯하다. ‘임진강이 거북선 시험 장소다’라고 자신 있게 특정한다. 만나서 같이 토론해야 한다. 우리 자료를 보여주고 북한 자료도 보자고 해야 한다. 그런 게 학술연구다. 또 다른-공조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도 있다. ‘임진강 거북선’ 연구의 끝은 재현(再現)이다. 거북선을 임진강에 띄워야 끝난다. 그런데 그 한쪽이 금도(禁渡)의 강이다. 남한도, 북한도 오갈 수 없다. 2005년, 한 번 열렸었다. 우리가 요청하자 북한이 응했다. 그 유일한 화합의 중심에도 거북선이 있었다. 서울에서 통영으로 가던 거북선에 터준 남북 협력의 물길이었다. 많은 이들이 했던 말이 남아 있다. ‘거북선이 연 물길, 통일로 가자.’ 핵(核)으로 얼어붙은 남북을 풀어줄 교류라고 하지 않겠다. 학술교류를 통해 민족교류로 가자고 과장하지 않겠다. 그냥 ‘임진강 거북선’ 역사를 되살리는 협조라고만 하겠다. 한선(韓船) 기술력의 유구함을 정립하는 공조라고만 하겠다. 이것만으로도 문재인 정부의 ‘대북(對北) 협력 1호’가 될 가치는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김종구主筆

[김종구 칼럼] 도지사 선거 ‘행정가 투입설’

대체로 ‘달인(達人)’은 좋은 말이다. 사전도 그렇게 풀고 있다. ‘학문이나 기예에 통달하여 남달리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 또는 ‘널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다. 행정에도 붙는다. ‘행정의 달인’이라 불린다. 경기도정 역사(歷史)에 더러 있다. 남기명 행정 부지사가 그랬고, 정창섭 행정 부지사가 그랬다. 둘 다 일 처리가 빨랐다. 15조 예산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3천여명 인사도 며칠이면 끝냈다. 꼼수를 찾아내는 데 귀재였다. 사소한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직원들에겐 공포였다. 행정부지사실은 차라리 고문실이었다. 그때 맞은 불벼락을 추억하는 공무원들이 많다. 행정은 복합 업무다. 별의별 업무가 다 있다. 하물며 1천300만명을 보살피는 도정(道政)이다. 이 걸 결정하는 자리가 도지사다. 임기라야 4년이다. 복습으론 늦는다. 예산 10분의 1도 못 보고, 직원 10분의 1도 못 만난다. 사전 예습이 필요하다. 그렇게 보면 최고의 도지사감은 행정 부지사 출신들이다. 부(副ㆍvice)로 있으면서 정(正ㆍmain)의 업무를 봐서다. 지방자치 초에는 유권자들도 그렇게 여겼다. 정치권도 후하게 평했다. 유력 후보군이라 여겼다. 정 전부지사가 추억한다. “권유가 왜 없었겠어….” 어디 그 뿐이었겠나. 모르긴 해도 부지사 여럿이 그런 권유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명도 없다. 이인제ㆍ손학규ㆍ김문수ㆍ남경필 지사가 모두 정치인이다. 임창렬 지사도 정치색 입혀진 부총리였다. 낙선한 후보에조차 없다. ‘행정의 달인’의 한계가 지적됐다. 여전히 고위직의 고귀함을 지키려 했고, 찾아와서 모셔가 주기를 바랬고, 쌓아온 과거의 것을 하나도 놓지 않으려 했다. ‘정치의 달인’은 그러지 않았다. 한없이 추해지기도 했고, 넉살 좋게 굽실거리기도 했고, 전부 잃을 각오를 하기도 했다. 경기지사직에 오른 건 이런 ‘정치의 달인’들이었다. 그 사이 행정부지사들의 몸값도 떨어졌다. ‘허구한 날 재기만 하다가 날 새는 사람들’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랬던 행정부지사 얘기가 며칠 전 들렸다. 한국당 발(發)이다. 행정가 그룹을 지방선거에 검토하고 있다는 설(說)이다. 여당의 정치군단에 맞불을 놓겠다는 전술이란다. 몇몇 지역에서는 이름도 등장한다. 경남도지사에 윤한홍 의원, 대구시장에 정태옥 의원. 윤 의원은 경남 행정부지사, 정 의원은 대구 행정부시장 출신이다. 그 속에 경기도 얘기도 있다. 박수영 전 행정1부지사 이름이 스친듯하다. 말의 진원지를 추적해봤다. 당의 ‘특별한’ 위원장 입이 출발지다. 하필 이런 때 홍준표 대표도 묘한 말을 던졌다. “경기도 자존심을 살려줄 1~2명을…뚜껑이 열리면 크게 놀랄 것이다”. ‘설’이 사실인 것과 사실이 현실이 되는 건 다르다. 행정가 투입설이 있다고 곧 후보가 되는 건 아니다. 시간이 많고, 정치도 안갯속이다. 그럼에도, 귀를 쫑긋거리게 되는 건 판의 확장 때문이다. 이미 ‘시장 그룹’은 2018 선거판의 한 자리를 꿰찼다. 여기에 ‘행정가 그룹’까지 가세할 수 있다는 얘기다. ‘행정부지사 출신’이라고 특정까지 되고 있다. 정치인들이야 짜증 낼 게 뻔하다. ‘감히~’라고 할 거고, ‘까짓것~’이라고 할 거다. 하지만, 유권자는 다르다.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다. 하물며 경기도 출신 행정가를 쓰겠다는 것 아닌가. ‘설’만으로도 관심 둘 가치는 충분하다. 정창섭씨를 만났다. 검은색 가방을 들고 나왔다. 녹음기와 필기도구라고 했다. 몇 달째 98세 아버지를 모시고 인터뷰 중이란다. “젊은 시절을 얘기하실 때 행복해 하십니다. 말씀을 모아 책을 만들어 드리려고.” 이제 ‘행정의 달인’이 아니다. 그저 강의하는 선생이고, 아버지 모시는 아들이다. 능력이 아깝다는 인사말에도 ‘차관 한 것도 분에 넘쳤다’며 웃는다. 후배들의 정치 얘기에는 말을 아낀다. ‘능력 있는 후배’라는 덕담이 전부다. 딱 그답다. 하지만, 후배들은 다르다. 도지사-박수영-를 꿈 꾸고, 수원시장-이재율-을 고민하고, 의정부시장-김동근-에 도전한다. 당차게 변한 ‘행정’이다. 그 당참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번엔 될 것인가. 또 안 될 것인가. ‘행정가 그룹’이 2018 선거판에 보태 줄 또 하나의 재밋거리다.

[김종구 칼럼] ‘남경필 式 판짜기 정치’ - 관전記

모두에게 심재덕은 버거웠다. 정당도 없이 두 번이나 시장을 했다. 문화(文化)로 시민을 한데 묶어냈다. 억울한 누명까지 무죄(無罪)로 벗었다. 이런 그가 총선에 나서겠다고 했다. 현역 국회의원에게는 위협이 분명했다. 팔달구가 유력한 지역구로 거론됐다. 출신 초등학교가 거기 있었고, 화성 복원의 중심이었고, 구(舊) 표심의 상징이었다. 거기 재선(再選)의 남경필 의원이 있었다. 언론에는 더 없는 흥밋거리였다. 다가올 빅매치에 모두가 침을 삼켰다. 하지만, 남 의원은 태연했다. 심 전 시장과의 맞대결 구도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답답해진 정치부 기자가 물었다. ‘심 전 시장의 팔달구 출마설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이었을 게다. 그가 한 당시 답변이 2004년 지면(紙面)에 남아 있다. “심 전 시장이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후 선거판은 희한하게 그의 말처럼 됐다. 심 전 시장이 팔달구를 피했다. 남 의원이 쉽게 갈 수 있는 대진표가 짜여졌다. 그 해 당선된 수원지역 현역은 남 의원 하나다. 비슷한 예(例)가 많은 데, 2014년 선거판도 그랬다. 당(黨)이 그에게 출마를 권했다. 이른바 중진 차출론이었다. 그는 답하지 않았다. 되레 거꾸로 갔다. ‘(경기지사 출마설에) 문을 닫아 달라’ ‘다른 후보들을 열심히 돕겠다’며 뺐다. 촉박한 시기엔 외국으로 떠나 당을 몸 달게 했다. 그 사이 몸값이 치솟았다. 출마도 안 한 그의 여론조사가 50%를 넘어섰다. 막판에 그가 출마를 선언했고, 이미 경선은 의미 없었다. 그의 ‘판짜기 정치’는 또 그렇게 성공한다. ‘남경필식 판 짜기 정치’가 그렇다. 예선(豫選)에 유독 강하다. 결코, 서두르지도, 안달 내지도 않는다. 조용히 자신의 판을 만들어간다. 그렇게 기획된 본선(本選)은 매번 ‘다 된 밥’이다. 남 뛸 때 그가 하는 일은 ‘옆 동네 지원’이다. 그랬던 그가 두어 달 전엔 달랐다. 서둘렀다. 일찌감치 도지사 재도전을 공개했다. 측근들에게도 그리 알고 뛰라고 지시했다고 소문냈다. ‘심재덕 도전설’에 느긋하던 모습, ‘중진차출론’까지 외면하던 모습과 달랐다. 왜였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 줄 힌트가 요 며칠 흘러나온다. 보수 통합 정국에서 그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엊그제는 같은 당 동료 유승민 의원을 몰아세웠다.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건 독선이다.”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는 예고다. 다음 날은 한국당 홍준표 대표를 추켜 세웠다. “대표직을 걸고 국정농단 세력과 싸우고 있다…새로운 보수의 출발을 의미한다.” 함께 갈 수 있다는 신호다. 느닷없던 출마선언의 이유를 짐작케 한다. 보수대연합의 중심을 꿈꾸는 듯하다. 가정해 보자. 오늘 도지사 선거가 치러진다면? 민주당 후보가 40~50%로 압도적 당선이다. 남 지사는 10~15%로 2등이다. 3등은 7~9%를 얻는 정의당 후보다. 한국당 후보는 5등 자리에야 이름을 올린다.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통계는 없다. 보수엔 최악의 판이다. 판을 뒤집을-그나마 시도해 볼만한-패라야 하나뿐이다. 보수를 왕창 끌어 모으는 대통합이다. 어느새 그런 대통합 중심에 ‘2등’ 남 지사가 자리하고 있다. 팍팍 바뀌는 정치적 몸값이다. 만일 두어 달 전-그에게 이런저런 악재가 겹칠 때-침묵하고 있었다면? 정치는 그를 불출마자로 제쳐 놨을 것이고, 내년 선거를 무주공산 싸움이라 정의했을 것이고, 여론조사에서 한참 뒤 쪽에 남았을 것이다. 내다본 듯하다. 그래서 온갖 비난을 듣는 와중에 역으로 연임도전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 유력 후보로 남아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2등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20년 선거무패, 남경필의 판짜기 정치는 이번에도 성공하는 것인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 정치 예측이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써대는 게 언론이다. 그래서 그렇게 부질없는 예측을 또 한 번 꾸역꾸역 써 보면 이렇다. -남 지사는 정계개편 중심에 올라탈 것이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보여주며 몸값을 올려 갈 것이다. 결국엔 보수 대연합의 유력 후보가 될 것이다. 그쯤에 가면 본선을 계산할 것이다. 이길 거라고 보이면 끝까지 갈 것이고, 질 거라고 보이면 양보할 것이다.- 남 지사는 아직 진짜배기 연임도전을 결정하지 않았다. (다들 관심 없다고는 하는데, 현직 도지사니 그럴 수만도 없는 ‘남경필식 판짜기 정치’ 관전기다.) 主筆

[김종구 칼럼] 영화감독 블랙리스트와 좀팽이 보수

베르톨트 브래히트(Bertolt Brecht)를 몰랐다. 그의 음악극 ‘예외와 관습’도 처음 접했다. 음악 담당으로 참여한 건 그저 재미였다. 나중에야 모든 걸 알았다. 그 작가와 그 희곡은 전두환 정권이 정한 ‘금기’였다. 반전(反戰) 작가여서고, 마르크스주의 작가여서다. 다른 것도 알게 됐다. 나를 뺀 모든 연기자들이 운동권이었다. 객석에 정보과 ‘박 형사’가 보였던 이유다. 니글거리는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역하다. 80년대, 수원의 한 허름한 무대의 추억이다. 그랬다. 386 시대 학생 연극은 그랬다. 순응(順應)을 거부했고 저항(抵抗)을 얘기했다. 대사(臺詞)를 읽지 않고 구호(口號)를 제창했다. 연기(演技)라 보지 않고 궐기(蹶起)라 생각했다. 연극반은 그러고 싶은-저항하고, 구호 외치고, 궐기하고 싶은-학생들의 집단이었다. 굳이 어느 학교냐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어느 학교든 연극반은 다 그랬다. 데모와 사상 학습의 선두에 늘 연극반이 있었다. 그건 80년대 대학 연극이 갖고 있던 양보 못할 자부심이었다. 2000년대. 386이 정치의 중심에 섰다. 그 연극쟁이들도 덩달아 주류가 됐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영화들이 등장했다. ‘웰컴 투 동막골’도 그랬다. “우리가 쳐내려 갔소?”(인민군 소년병 택기). “미군과 국군이 한 패면, 2대 1이잖아. 치사하다야”(동막골 아낙). 북침 의혹을 암시하기도 하고, 한미 공조를 비난하기도 한다. 순진한 동막골 노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도 국군이다. 반공(反共)과 멸공(滅共)으로 학습된 기존 영화계가 받은 충격이 컸다. 보수의 눈에 어지간히 거슬렸을 게다. ‘좌빨’이 만드는 ‘빨갱이 영화’로 보였을 게다. 2007년 보수가 정권을 탈환하면서 판이 흔들렸다. ‘웰컴 투 동막골’류의 영화들이 사라졌다. 그즈음 M이 말했다. “친한 영화감독을 만났다. 좌파 감독들의 이름을 쭉 써 보라고 했다. 이름 좀 있다는 감독들을 전부 적더라. 영화계가 큰일이다. 완전히 좌파들 세상이 됐다.” 정보기관의 장(長)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의 말이 블랙리스트의 시작이었던 듯하다. 돌아보면 부질없는 짓이었다. 군부 독재에서 단련된 맷집들이다. 그런다고 없어질 그들이 아니었다. 부라리며 째려보고 밥줄 좀 끊는다고 겁낼 그들이 아니다. 10년 만에 진보 정권이 돌아왔다. 그와 함께 그들도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요란하게 돌아왔다. 전 국정원장을 고소하고, 전 대통령을 고소했다. 전 국정원장이 오랏줄에 묶였고, 전 대통령도 끌려 나올 태세다. 극장은 다시 그들의 차지가 됐다. 진보와 민주로 각색된 영화가 스크린을 장악했다. 대한민국 보수. 그들에게 영화는 우군(友軍)이었다. 권력의 뜻을 주입하는 수단이었다. ‘월하의 맹세’(1923년ㆍ윤백남 감독)가 그렇게 일제를 미화했고, ‘해방된 내 고향’(1947년ㆍ전창근 감독)이 그렇게 해방 후 건국을 미화했다. 거장 신상옥 감독이 만든 ‘쌀’(1963년)도 결국엔 군사 정권의 착실한 홍보 도구였다. 그 속에서 길들여진 보수의 영화관(觀)이다. 인민군을 착하다 하고, 국군을 야만스럽다 하는 영화가 곱게 보일 리 있나. 여기서부터 꼬인 거다. 학창 시절, ‘돌멩이’ 한 번 던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브래히트를 경험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연극일 뿐이었다. 그 후에도 ‘돌멩이’는 던지지 않았다. 영화도 그렇게 보면 된다. 그저 영화일 뿐이다. ‘웰컴 투 동막골’을 본 650만이 좌빨이 되지 않았다. ‘국제시장’ 본 1천400만이 꼴통 보수가 되지 않았다. 영화가 바꾸는 건 아무것도 없다. 괜스레 권력만 분노했고, 그 분노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었고, 그 블랙리스트가 ‘좀팽이 보수’를 만들었다. 보기 싫은 영화라면 안 보면 될 일이지, 그걸 왜 속좁게…. 김종구 주필

[김종구 칼럼] 축구 감독의 자진사퇴-전직 대통령의 탈당거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시 예산으로는 한계가 있다. 대기업의 자금력과 경쟁할 수 없다. 키워 놓는 선수마다 팀을 떠난다. 고액 연봉을 찾아 가는 선수를 잡아둘 재간도 없다. 자파가 그렇게 떠났고, 시시도 그렇게 떠났다. 1부 리그 승격이 차라리 기적이었다. 클럽 축구 수준의 팀을 오늘까지 키웠다. 팀이 가진 구조적 한계는 감독이 책임질 일이 아니다. 쫓겨날 만큼 잘 못 한 게 없다. 차라리 나를 쫓아내라.’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혼자 구단 사무국을 찾았다. 부천FC에 져 5연패에 빠진 다음 날이었다. 품고 온 사직서를 냈다. 구단이 발칵 뒤집혔다. 긴급 이사회가 열렸다. 마음을 바꾸라는 권유가 이어졌다. 하지만, 한 번 굳힌 의사를 번복하지 않았다. 되레 이사들을 설득했다. “지금 그만두어야 한다. 5연패에 빠진 지금이 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8월 말, 수원FC 조덕제 감독은 그렇게 떠났다. 2015년 가을, 수원FC가 기적을 만들었다. 축구 협회장이 소속된 대기업 팀과 승강전을 벌였다. 선수들은 지칠 줄 모르고 뛰었고 1차전을 이겼다. 감동은 부산 원정 경기로 이어졌다. 시민 600명이 버스로 따라갔다. 언론은 그의 축구를 ‘막공’(막아낼 수 없는 공격)이라고 썼다. 1부 리그 승격! 그 감동의 중심에 있었던 조 감독이다. 팀이 다시 2부리그로 강등됐다. 그러자 조 감독이 ‘내가 떠나야 팀이 산다’며 떠났다. 하필 비슷한 시기에, 전혀 비슷하지 않은 사퇴 논란이 등장했다. 한국당 혁신위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떠나달라고 했다. 친박 좌장들도 포함시켰다. 쫓아내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 측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한다. ‘떠나지 않겠다’는 말의 에두른 표현이다. 친박 쪽도 조용하다. 그 속에서 폭발 직전의 분노가 보인다. 점잖음을 생략하고 적어보면 이렇다. ‘우리라도 살도록 떠나라’-‘못 떠나겠으니 맘대로 해라’. 이유가 있을 게다. 서로 다른 대망론이다. 출당론 쪽에 ‘홍준표 대망론’이 있다. 지난 대선은 몸 풀기였다는 그다. 친박이 눈엣가시일 게다. 바른정당과의 합당도 중요 과제다. 박 전 대통령 출당이 합당의 기본 조건이다. 반대쪽에도 대망론은 있다. 이른바 재판 대망론이다. 박 전 대통령의 판결이 가져올 대역전을 기대한다. 전부 무죄면 세상은 뒤집어진다고 확신한다. 부분 무죄로도 상황은 달라질 거라 믿는다. 이런 와중에 흘려진 한 여론조사가 있다. 국민 60%가 박 전 대통령의 탈당을 찬성한다는 통계다. 그러니 탈당하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게 좀 그렇다. 질문을 잘 못 던진 듯하다. ‘한국당의 탈당 논란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 게 옳다. 틀림없이 이런 답변들이 나올 게다. ‘부질없는 싸움이다’ ‘볼썽사납다’ ‘이전투구다’…. 말장난이 아니다. 지금 인터넷 댓글이 그렇게 도배돼 있고, 술자리 대화가 그렇게 오가고 있다. 이쯤에서 생각나는-그러나 많은 국민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과거가 있다. 전 대통령, 노무현의 자살이다. 검찰 조사를 받으며 모든 걸 잃었다. 그러자 ‘나는 더 이상 진보의 가치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그런데 그가 부활했고 진보도 살아났다. ‘모든 걸 버려야 모든 걸 얻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입증한 역사다. 그때처럼 부활을 꿈꾸고 있을 한국당이다. 그런데 달라도 너무 다르다. 축구 감독과 전직 대통령을 비교했다. ‘깜’도 안 됨을 잘 안다. 그런데 자꾸 겹친다. 감독은 ‘책임지겠다’며 물러났다. 구단이 ‘다시 생각하라’며 만류했다. 그런 감독과 구단을 보며 팬들은 행복해졌다. 전 대통령은 ‘나가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다. 정당이 ‘책임을 통감하라’며 내쫓으려 한다. 그런 전직 대통령과 정당을 보며 국민은 부끄러워진다. 지금 박 전 대통령과 한국당은 조 감독보다 못하고 수원구단보다 못하다. 정답? 있다. 국민이 다 아는 정답이 있다. 한국당은 ‘나가라’는 압박을 접어야 하고, 전(前) 대통령은 ‘안 나간다’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 김종구 주필

[김종구 칼럼] 어째서 非核(비핵)이 진보의 가치인가

유성환 의원이 발언했다.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발언이다. 분단국의 최종 목표가 통일에 있음은 당연했다. 하지만, 1986년 10월13일에는 달랐다. 국회 본회의장이 발칵 뒤집혔다. 유 의원이 곧바로 구속됐다. 반공과 통일은 양립할 수 없는 단어였다. 반공은 보수-신군부 정권-의 단어였고, 통일은 진보-신민당-의 단어였다. 그 단어 하나에 이념의 모든 게 걸렸던 시절이다. 반공도 필요했고, 통일도 필요했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는 서로의 단어만을 말했다. 진보가 반공을 말하면 변절자가 됐다. 보수가 통일을 말하면 범죄자가 됐다. 이를 지켜본 반공의 종주국 미국조차 웃었다. 국무성 한국과장은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훗날 대통령이 되는-는 유 의원 석방 탄원서를 냈다. 이념이 단어까지 독점하던 시절, 그때를 역사는 ‘독재’라 적었다. 그런데 요사이 그런 단어를 본다. ‘핵무장’ 또는 ‘비핵’이다. 핵무장은 보수의 단어처럼 됐다. 비핵은 진보의 단어처럼 됐다. 그러면서 서로를 공격한다. 보수는 ‘국민이 핵 인질이 됐는데 감상에 빠져 있다’며 진보를 공격한다. 진보는 ‘민족을 공멸시키는 철없는 주장이다’며 보수를 공격한다. 정치는 ‘비핵 여당’과 ‘핵무장 야당’으로 나뉘었다. 정치가 그러니 시민사회세력도 갈라섰다. 30년 전 ‘반공’ ‘통일’만큼이나 우습다. 왜 핵에 이념이 끼어드나. 핵은 눈앞의 현실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공포다. 북한 핵실험 한 번에 남한 땅이 흔들렸다. 서울이 불바다 되는 그래픽이 뿌려졌다. 하남, 김포, 과천, 의정부까지 화마(火魔)로 도색됐다. 건물들이 모조리 쓰러질 거라고 했다. 수백만명이 타죽을 거라고 했다. 놀란 사람들이 안 쓰던 지하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주방을 뒤져보며 남아 있는 라면을 헤아렸다. 이런 핵에 웬 이념인가. 차라리 사치다. 두 단어를 엮어 맬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핵보유국의 면면이란 걸 보자. 모두 여덟-북한 포함- 나라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자본주의 국가다. 러시아, 중국,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비동맹국이다. 자본주의 국가 셋, 사회주의 국가 셋, 비동맹 국가 둘이다. 핵이 이념이었다면 통계가 이렇지 않았을 게다. 한쪽 진영이 없거나 적었을 게다. 하지만, 똑같다. 핵과 이념은 이렇듯 애초부터 무관한 단어였다. 전사(戰史)에 이런 불균형 대치는 없었다. 남한이 가진 최고 무기는 현무다. 축구장 세 개를 초토화 시킨다. 6천500평쯤 된다. 북한이 가진 최고 무기는 핵이다. 서울 전역을 초토화 시킨다. 1억8천만평쯤 된다. 이 불균형의 해소가 우리에겐 생존이었다. 두 길이 있었다. 양쪽 모두 핵을 버리는 길, 그리고 양쪽 모두 핵을 갖는 길이었다. 지금껏 우린 앞의 길을 기다렸다. 인내하면 대화로 가고, 대화하면 비핵화로 갈 거라 봤다. 하지만, 틀렸다. 돌아보니 애초부터 허망한 기대였다. 핵 역사만 봤어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한번 등장한 핵은 사라진 적이 없다. 유일한 핵 포기 국가로 남아공이 있는데, 모든 게 다르다. 주적(主敵) 앙골라에서 쿠바군이 철수했다. 만델라라는 평화주의자의 27년짜리 저항이 있었다. 북한은 계속 핵을 필요로 했다. 내부로부터의 어떤 저항도 없었다. 그 무모한 기대가 배신으로 돌아왔다. 어제의 원자탄은 오늘의 수소탄이 됐다. 작금의 핵무장론은 그래서 나왔다. 배신 당한 인내심이 토해내는 분노다. 이걸 윽박지르면 안 된다. 그냥 토론하게 둬야 한다. 핵개발이든, 전술핵이든 그냥 토론하게 둬야 한다. ‘비핵’이 어째서 당론인가. 진짜 지켜야 할 당론은 ‘국민 보호’다. 핵무장론이 왜 ‘철없는 소리’인가. 진짜 철없는 소리는 ‘진보=비핵=평화’라는 근거 없는 공식이다. 이제라도 핵에서 이념을 떼내야 한다. 그래야 모두의 눈에 ‘핵폭발’의 섬광이 보인다. 김종구 주필

[김종구 칼럼] 또 ‘현직 시장 공천 안 주겠다’

아침마다 ‘정보’라는 서류 뭉치를 받는다. 대개 ‘훅’ 보면 끝난다. 그런데 눈길을 잡는 대목이 있다. 어떤 지역의 시장과 당협 위원장 얘기다. -시장이 민ㆍ관ㆍ정이 함께 하는 워크숍을 주최했다. 시의원, 대책위원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당연히 와야 할 위원장이 참석하지 않았다. 위원장은 같은 현안을 들고 정부로 갔다. 중간에 놓인 시의원들이 맘고생을 했다-. 정보 말미에 주석이 달렸다. ‘두 사람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그런데 이곳만 이런 게 아니다. 비슷한 정보가 부쩍 늘고 있다. 사나흘 전 보고서는 그 옆 동네였다. 역시 시장과 국회의원에 얽힌 갈등 얘기다. -국회의원이 내년에 현 시장이 아닌 다른 사람을 후보로 점찍고 있다. 그러자 시장이 ‘무소속 불사’로 맞불을 놓고 있다. 유력 정당 소속의 시장이다. 후보가 쪼개지면 공멸(共滅) 할 가능성이 크다-. 이 보고서에도 기자의 주석은 달렸다. ‘4년 전 선거판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 보니 때가 됐다. 지방 선거까지 10달도 안 남았고, 공천까지는 그보다 짧게 남았고, 그 공천으로 가는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전에도 이 즈음엔 이랬다. 국회의원이 시장을 흔들기 시작했고, 시장은 그 흔들기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1년여 뒤 공천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현직 교체 가능성’을 흘리며 흔들어 댔다. 현직 시장의 명(命)을 그들이 틀어쥐고 있음이 그렇게 4년에 한 번씩 확인됐다. 그런데 이런 갈등이 유독 잦은 몇 지역이 있다. ‘워크숍 갈등’ 동네는 전임 때부터 그렇게 싸웠다. ‘무소속 갈등’ 동네는 공천갈등이 공식처럼 됐다. 그렇게 싸우는 곳이 잘 될 리 있나. ‘워크숍 갈등’ 동네는 이런저런 민원으로 시끄럽다. 방대한 지역 자산을 두고도 여전히 변방(邊方)이다. ‘무소속 갈등’ 동네는 역대 시장 전원이 법정에 끌려갔다. 시금고가 거덜나 부도 위기로까지 몰렸더랬다. 갈등 역사와 결과가 묘하게 들어맞는다. 지방자치 25년이다. 언제까지 이럴 건가. 신물 날 때도 되지 않았나. 여인국 전 과천시장-세 번 공천 받고, 세 번 시장 했던-에게 물었다. ‘세 번 연임했는데, 재임 중 지역 국회의원과의 갈등이 없었기로 유명합니다. 비결이 뭐였나요.’ “신뢰죠. 2002년 처음 출마했을 때 내 손을 잡고 뛰어 주셨습니다. 때마침 그 의원의 후원회에 성의껏 준비한 후원금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돈도 없을 텐데 보태 쓰라’며 모두 돌려주셨습니다. 그 후 ‘도전하지 않는 자세’로 갚았습니다. (당시 젊은 나이였던 내게) 이런저런 유혹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분에게 도전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한데도 그렇지 못한 곳이 많잖아요. 나는 운이 좋았습니다.” 보태는 구석이라곤 없었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투박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 전 시장조차도 마무리 말엔 뼈를 섞어 넣었다. “그런데 현재와 같은 공천 제도 속에서는 ‘짜고 치는 공천’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근본적으로 공천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완벽하고 투명한 공천 기준이 제시돼야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공천이) 꿈 같은 얘기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지만요….” 그의 말이 맞다. 사달은 제도에 있다. 국회의원 개인의 의중이 곧 공천 기준이 되는 제도가 문제다. 이러니 국회의원이 군기를 잡는다. 시장은 그런 국회의원에게 모든 걸 건다. 공천 헌금 때문에 업자에게 뇌물 받고, 돈다발 들고 국회의원 쫓아 고속도로를 내 달린다. 시장은 이때 받은 모욕을 당선 뒤 보복한다. 행사장 순서에서 국회의원 인사말 빼버리고, 의원 지역 사업을 뒤로 밀어낸다. 시민과 상관없는 그들만의 전쟁이다. ‘꿈 같은 얘기’는 접자. 이번에도 공천 개혁은 없을 듯하니. 대신, 유권자의 매서운 눈만은 경고해둘까 한다. ‘공권천은 내게 있다’며 거들먹거리는 국회의원들. 결국, 유권자가 심판해왔다. ‘표는 내가 쥐고 있다’며 호기 부리는 시장들. 역시 유권자가 심판해왔다. 유권자가 원하는 조건이 뭐가 복잡한가. 일 잘하고, 시민 편에 서고, 검찰에 불려가지 않으면 된다. 그런 시장엔 공천 주고, 그러지 못한 시장은 바꾸면 되는 것이다. 이 간단한 기준만 지켜도 부질없는 ‘시장 군기 잡기’의 반(半)은 사라질 것이다. 김종구 주필

[김종구 칼럼] 그때, 영국은 방공호 200만개를 만들었다

1937년이다. 세계 대전이 끝난 지 19년이다. 패전국 독일엔 어떤 기력도 없어 보였다. 모두가 그렇게 봤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달랐다. 조만간 독일의 폭탄이 날아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날아들 폭탄과 피해까지 추산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공습으로 1천413명이 죽었다. 다시 전쟁이 나면 독일은 60일간 공습할 것이다. 폭탄 1톤당 50명이 다치거나 죽는다. 최종 사상자는 200만명이 될 것이다.’ 영국 정부가 국민에게 설명한 통계다. 예상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공습을 피할 방공호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부 지시로 ‘리엄 페터슨’이 설계했다. 재료에서 재원까지 꼼꼼히 정해졌다. 14개의 아연 철판 패널을 이어 붙였다. 뒤집힌 ‘U’자형으로 높이 1.8m, 폭 1.37m다. 땅속에 1.2m를 묻고 지붕은 0.4m 두께 흙으로 덮도록 했다. 주무관서는 영국 정부 민방위대였다. 방공호 고유 형식에 민방위대 책임자의 이름이 상징으로 붙었다. ‘앤더슨 방공호’(Anderson air raid shelter)다. 가난한 국민은 별도로 배려했다. 연간 수입 250파운드 미만인 가정엔 무료로 설치했다. 여유가 있는 가정이라도 7파운드라는 값싼 가격으로 지원해줬다. 전쟁 준비에도 국민 개개인의 형편을 살핀 세심한 접근이었다. 2년 뒤, 독일의 공습이 현실화됐을 땐 이미 150만개의 앤더슨 방공호가 설치됐다. 전쟁 중에 50만개를 더 만들었다. 최대 6명이 사용할 수 있었으니 1천200만명이 대피할 공간이다. 당시 영국의 인구가 4천500만명이었다. 영국 정부의 방공호 정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앤더슨 방공호의 약점이 드러났다. 습기를 배출하지 못해 내부가 축축해졌다. 이번에는 치안 장관 ‘허버트 모리슨’이 나섰다. 아예 집 내부에 설치하는 설계를 했다. 철판 기둥과 철망 측면을 집 벽과 바닥에 볼트로 연결했다. 전쟁이 임박해 등장한 모델이었지만 그래도 50만개를 보급했다. 여기에도 장관의 이름이 붙었다. ‘모리슨 방공호’(Morrison bomb shelter)다. 2017년이다. 대한민국에도 방공호가 등장했다. ‘방공호 찌라시’라 쓰는 게 옳을 듯하다. ‘핵전쟁 생존 상식 10단계’라는 자료다. ‘환기’ ‘물’ ‘음식’ ‘위생’의 4가지를 생존 준비물로 들었다. 피신할 방공호는 그림까지 곁들여져 설명돼 있다. 그런데 그 옛날 영국과 다른 점이 있다. 정부가 아닌 개인이 만든 자료다. 육군 대령 출신의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장이 만들었다. 많은 네티즌이 관심을 보였다. 이런 댓글이 있다. ‘정부보다 낫네!’ 한반도 위기가 외신(外信)을 덮은 지 한참 됐다. 그러면서 따라붙는 해설이 ‘한국인은 이상하다’다. 그럴 만하다. 북한 김정은은 ‘괌 타격’을 공언했다. 미국 트럼프는 ‘분노와 화염’으로 응대했다. 괌 주민에겐 비상 대처 요령이 뿌려졌다. 그런데 한반도 이남은 다르다. 차라리 거꾸로 가는 듯하다. ‘사드 나가라’며 미사일 방어 기지를 에워싼다. ‘군사 훈련 중단하라’며 미국 대사관에 확성기를 틀어댄다. 그 흔하던 민방위 훈련도 안 보인다. 그때, 영국이 방공호 때문에 이겼다고는 볼 수 없다. 독일을 무너뜨릴 공격 수단은 아니었다. 혼자 이겼다고도 볼 수 없다. 연합군이 거둔 전체 승리의 일부였다. 그런데도 전사(戰史)는 두 방공호를 의미 있게 기록하고 있다. 유비무환의 태세로 전쟁을 준비했다고 적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국민을 보호해줬다고 적고 있다. 국민이 하나 되어 정부를 믿고 따라갔다고 적고 있다. 전쟁을 대비하는 한 국가의 올바른 판단과 자세라고 적고 있다. 정부가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다가올 재난을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재난이 전쟁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더구나 국민 125만명이 죽어나간 전쟁을 경험했던 대한민국이니 말이다. 김종구 主筆

[김종구 칼럼] 한국당의 남은 전술 - 진내포격(陣內砲擊)

1967년 2월 14일.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 진지로 월맹군이 진입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육박전이 계속됐다. 실탄이 떨어지자 삽과 곡괭이로 싸웠다. 다음날 새벽까지 싸움은 계속됐다. 마지막 순간, 최후의 작전이 전개됐다. 후방의 포병에게 부대 좌표를 알려줬다. 아군 진지에 아군이 쏜 포탄이 비 오듯 떨어졌다. 그제야 전투는 끝났다. 적군 243명을 사살한 우리 측 승리였다. 아군 15명도 사망했다. 중대원 191명이 전원 특진했다. 한국 전사(戰史)에 전설로 남은 전투다. 진내포격(陣內砲擊)의 전형이다. 이 전술을 쓸 땐 조건이 있다. 아군 진지에 적군이 진입했을 때다. 그리고 더 이상 버텨낼 수단이 없을 때다. 이 전술을 쓸 때 각오해야 할 결과도 있다. 피아 모두 포격의 희생이 될 수 있다. 아군의 피해가 훨씬 커질 수도 있다. 결국은 사즉생의 승부수다. ‘나도 죽겠다’는 각오로 결정하는 최후 수단이다. 청룡부대의 승리는 이런 생명 포기의 결기가 가져온 기적이었다. 한국 보수는 썩어도 준치라 했다. 대선에서 1%P 이상 밀려난 적이 없다. 중앙권력을 내줘도 지방권력으로 보상받곤 했다. 변치 않는 50%가 그렇게 보수를 지켰다. 그런데, 그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 24%라는 대선 득표율도 돌아보면 기적이었다.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7월 둘째 주 여론 조사에서 한국당 지지율은 14.4%다. 더불어민주당 53%와는 비교 거리가 안 된다. 또 다른 보수 바른정당(6.1%)도 또 다른 진보 정의당(6.5%)에 짓눌려 있다. 여론조사는 차라리 낫다. 더한 몰락은 현실 정치다. 야성(野性)을 보여야 할 청문회에서 한국당은 사라졌다. 언론이 보도한 의혹을 확인하는 데 급급했다. ‘사회주의자’라는 색깔론에 매달리다 본전도 못 찾았다. 확인 한 된 의혹제기로 역공을 당하기도 했다. 무능한데다 전투력까지 없었다. 야당에 주어진 권한도 못 살렸고, 국민이 준 의무도 못 지켰다. 여당 의원이 “힘들게 되신 분들이 일 잘 한다”며 비웃는다. 이쯤 되면 거의 끝에 온 듯하다. 원죄(原罪)다. 그들도 알고 국민도 아는 원죄 때문이다. 청문회가 중계되는 화면 밑에 이런 댓글들이 붙었다. ‘니들이 무슨 자격으로 청문을 하느냐’ ‘아직도 국회의원 하고 있느냐’…. 어디엔 ‘누나에게나 가라’는 비난도 달렸다.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한 글이다. 그 지근거리에 섰던 친박(親朴)을 향한 글이다. 이 원죄가 한국당을 짓누르고 있다. 청문회를 주도할 권한을 빼앗아 버리고 있다. 지금 한국당은 제 몸집에 휘청대는 유령 정당이다. 공교롭게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는 주목할 만한 조각(組閣)이 있었다. 견제와 균형의 끝을 보여주는 마크롱 대통령의 1기 내각이다. 18명의 장관 가운데 남성 9명, 여성 9명이다. 정확히 배분된 양성 평등이다. 정치적 균형도 가히 기계적이다. 사회당 소속을 내무장관ㆍ외무장관에 앉혔고, 공화당 소속을 재무장관ㆍ농업 장관에 앉혔다. 모두를 끌어안은 포용력이 부럽다. 균형을 이끌어 낸 정치 환경이 부럽다. 우리는 그러지 못해서 더 부럽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보수의 재건을 말한다. 한국 정치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조차 한국당은 거론되지 않는다. 원내 107석의 거대 야당이지만 보수의 미래에서 생략되고 있다. 대오각성(大悟覺醒)을 다짐해도 지지율은 15%고, 육참골단(肉斬骨斷)을 약속해도 지지율은 15%다. 박 전 대통령 비리로 무너지더니, 대선 패배로 몰락하고, 청문회 무능으로 잊혀가고 있다. 한국당은 이렇게 사라지는가. 환생의 길은 끊어진 것인가. 잔인하지만 유일한 전술을 말해 줄까 한다. 청룡부대가 진지를 잃었듯이 한국당은 정권을 잃었다. 월맹군이 밀려왔듯이 진보가 밀려왔다. 그때 청룡부대는 진내포격을 선택했다. 이제 한국당도 당내포격(黨內砲擊)을 택해야 한다. 아군의 포탄에 목숨을 맡겼듯이 당내 정풍에 당 운명을 맡겨야 한다. 그 냉혹한 포격의 내용은 두 가지다. 책임 있는 중진 퇴출, 그리고 박근혜 정부 수혜자 퇴출이다. 해 내도 망할 수 있다. 못해 내면 반드시 망한다. 김종구 주필

[김종구 칼럼] 이념 위에 또 다른 이념, ‘내 자식만큼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통령 후보가 만든 말이다. 한국 노동당의 역사는 그를 가운데 두고 나뉜다. 그 전 노동당은 ‘빨갱이’ 취급받으며 재야에 머물렀다. 그 후 노동당은 대통령에 출마하며 제도권을 거머쥐었다. 그가 남긴 가치는 대선 성적표 이상이다. 돈 없고 권력 없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그를 따라다닌 꼬리표가 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두 자녀다. ‘기층민중을 배신하는 위선’이라는 공격이 가해졌다. ‘전세금까지 탈탈 털어 떠난 유학’이라며 열심히 해명했다. 하지만, 대중-자녀를 유학 보내지 못한-의 시선은 냉랭했다. 꼭 10년 뒤, 그 권영길이 수원에 나타났다. 식당에 마주 앉은 이는 김상곤 교육감이었다. ‘대통령에 나서달라’고 청하러 왔다고 했다. 사진 속 둘의 모습이 흡사 진보의 승계식(承繼式) 같았다. 실제로 권영길 이후 진보는 김상곤이다. 무상 급식ㆍ학생 인권ㆍ통일 교육으로 진보의 가치를 완성했다. 그런 김 교육감에게도 꼬리표가 붙었다. 하필 10년 전 권영길의 그것과 같다. 딸 셋을 모두 8학군에서 교육시켰다. 이번에도 ‘서민에 대한 배신’이란 비난이 나온다. 특별히 저지른 위법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8학군을 금수저의 상징으로 보는 대중의 시선이 여간 따갑지 않다. 3년 전, 그 김상곤이 교육계를 떠났다. 조희연 서울 교육감이 이어받았다. 핵심 공약으로 외고ㆍ자사고 폐지를 공언했다. 김상곤 교육감도 건드리지 못했던 문제다. 고교 서열화, 사교육 조장의 싹을 자르겠다고 별렀다. 그런데 조 교육감에게도 꼬리표가 붙었다. 권영길의 그것, 김상곤의 그것과 또 같다. 아들 둘이 외고를 졸업했다. 두 학교 모두 조 교육감이 없애겠다는 서울 소재 외고다. 외고ㆍ자사고 학부모들이 들고일어났다. ‘내로남불’이냐며 분노한다. 자식들 선택을 존중해 줄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비판을 달게 받겠다”는 사죄를 피해가진 못한다. 오늘 청문회다. “사회주의를 상상합시다.” 김상곤 후보자가 했다는 말이다. 곳곳에서 으르렁댄다. ‘좌빨’ ‘혁명’ 등의 단어가 넘실댄다. 한번 기억해 보자. 경기도 교육감 김상곤은 사회주의자였나. 경기도 교육이 혁명으로 가고 있었나. 아니다. 그저 자본교육의 병폐를 사회적 책임으로 고쳐보려 했던 작은 시도였었다. 앞에 갔던 권영길의 흔적도 그랬고, 뒤에 오는 조희연의 흔적도 그렇다. 국민의 이념 잣대도 이제는 넉넉해졌다. ‘좌빨’이라고 볼 사람은 없다. 정말 물고 늘어질 이념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내 자식만큼은’으로 일관해 온 우리네 부모들의 ‘헌신 이념’이다. 아마 그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고교서열화를 비난하면서도 내 아이만큼은 가장 위에 올리려 했을 것이다. 사교육비가 나라를 망친다면서도 내 아이가 축내는 국부유출은 아까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걸 나무라는 세상을 향해서는 온몸으로 막아서며 보호했다. ‘타국에서 혼자 벌며 고생한 내 자식들’이라 했고, ‘부모로서 자식들의 선택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자식들을 ‘유학파’라는 특권층으로 만들고, ‘명문고 동문’이라는 금수저로 만들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는 바꾸겠다고 한다. 특권층ㆍ금수저의 싹을 자르겠다고 한다. 너무 양심 없지 않나. 외고ㆍ자사고 폐지 문제를 조사한 이런 통계가 있다. 53%가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27%만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만일 이런 질문을 해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나. ‘김상곤ㆍ조희연 교육감 자녀들의 외고ㆍ8학군 진학을 어떻게 보느냐.’ 아마도 기본적 거부감 53%에 진보에 대한 배신감 몇 %가 얹어질 것이다. 청문회 결과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그 청문회를 지켜볼 국민 마음이 궁금하다. ‘8학군’ 떠들고, ‘외고’ 떠드는 공방을 지켜볼 국민 마음이 걱정이다. ‘자식 챙기기’로 무너진 전(前) 정부 자리. 그 자리에 들어선 현(現) 정부 청문회. 정권은 바뀌었는데 화두는 여전하다. 출세한 자들이 이어가고 있는 ‘내 자식 챙기기’다. 김종구 主筆

[김종구 칼럼] “임금이라도 맘대로 할 수 없음을…”

특히 기억에 남는다. “아무리 중전마마의 오라버니라 하더라도 궁에는 절차와 법도가 있는 법입니다”(진짜 도승지). “법은 무슨 법. 임금 말 한마디면…”(가짜 광해). “이놈! 임금이라 하여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음을 어찌 모르느냐”(진짜 도승지). 영화 ‘광해’다. 조선조 왕권(王權)이 그랬다. 신권(臣權)으로부터 늘 견제를 받았다. 문무백관(文武百官)의 간언(諫言)이 절차고 법이었다. 이를 따르면 성군(聖君), 어기면 폭군(暴君)으로 남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한 달 됐다. 절차와 법도를 지키지 않는 모습이 엿보인다. 돌연 서울중앙지검장 직급을 낮췄다. 대통령이 택한 사람을 앉히려는 의중 때문이었다. 위법은 아니지만 관례는 깨졌다. 일선 검사들까지 나서 절차 위반을 얘기했다. 4대강 정책감사도 시작됐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감사원은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기관이다. 돌려서 지시하는 형식이 옳았다. ‘정치 보복’이라며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이 반발한다. 외교부 장관 인선은 더하다. 위장전입을 청와대가 먼저 깠다. 위장전입보다 능력을 높이 산다고 했다. 국회와 국민에 대한 결례(缺禮)다. 위장전입의 엄중함을 따지는 건 국회 청문회다. 그 결과를 보고 결론 내는 건 국민 몫이다. 그걸 청와대가 앞서갔다. 위장전입을 ‘용서해도 될 위장전입’이라 결론 냈고, 장관 자격을 ‘능력 충분한 적임자’라고 결론 냈다. 하필이면 거기서 탈세, 투기, 학교 유착 등의 의혹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임기 5년의 겨우 한 달이다. 좀 미뤘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검찰은 개혁 앞에 목을 내놓고 있다. 절차 논란까지 감수하며 서울지검장부터 앉힐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명박 4대강은 탈탈 털리게 돼 있었다. 가뭄만 지나면 언제든 터져 나갈 보(洑)였다. 굳이 감사원 독립성 논란까지 살 필요가 없었다. 며칠만 더 살폈어도 강 후보의 의혹은 더 볼 수 있었다. 그랬더라면 ‘2005년 7월 이후’라는 궁색한 조건을 달며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400년 전 광해군 시대는 극적(劇的)이었다. 유일하게 북인(北人)이 끌고 갔던 개혁 왕조였다. 대동법(大同法)으로 기득권 목을 겨눈 왕조였다. 명(明)ㆍ청(淸) 군사 압박에서 국익을 챙기려 한 중립외교 왕조였다. 문재인 정부도 닮았다. 진보세력이 끌어갈 개혁 정부다. 경제주체를 교체해 사회 틀을 바꾸려는 정부다. 미(美)ㆍ중(中)의 사드 압박에서 실리를 챙기려는 중립외교 정부다. 닮아도 소름 돋게 닮았다. 하지만, 결론까지 같아선 안 된다. 광해군의 개혁은 실패했다. 그가 꿈꿨던 위대한 제국의 꿈도 사라졌다. 그 이후 사직(社稷)은 호란(胡亂)에 무릎 꿇었고, 국토(國土)는 대국(大國)에 유린당했다. 실패의 멍에는 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어머니-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영창 대군-을 죽였다며 쫓겨났다. 그게 조선이었다. 성리학이 곧 법이고 도리였다. 그 성리학이 ‘임금도 따라야 할 절차와 법도’였다. 광해군은 그걸 어겼다. 적어도 수백 년간 ‘그걸 어긴 임금’이라 적혔다. 문재인의 개혁은 성공해야 한다. 국민 80%가 성공을 바란다. 그 성공을 위한 과제가 400년 전 광해군에게 있다. 문 대통령도 영화 ‘광해’를 봤다고 했다. 영화가 끝나도 일어서지 못하고 크게 울었다고 했다. 아마도 ‘광해-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울림이 커서였지 않을까 싶다. 그랬다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대사를 더 절절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라 하여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음을 어찌 모르느냐.’ ‘광해군 개혁’이 안 한 것-바쁘더라도 여유롭게 가고, 번거롭더라도 돌아서 가고, 확신이 있어도 대화하며 가고-을 하면 ‘문재인 개혁’은 성공한다. 지난 한 달은 그렇지 못했다. 김종구 主筆

[김종구 칼럼] 市長 양기대의 道知事 꿈

정확한 시작은 모른다. 언제부턴가 얘기가 돌았다. ‘양기대 광명시장이 내년 도지사 선거에 나올 것이다.’ 그렇게 보니 그랬다. 가깝지 않은 수원에서 목격되는 일이 잦아졌다. 만난 김에 물었다. “내년 지방 선거에서 큰 그림을 그립니까.” 대답이 분명했다. “도지사에 도전해보려고요. (몇몇) 주변인들에게도 말했습니다. 내가 수원에 자주 가면 도지사 선거를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좋다고요.” 괜스레 빙 돌려 어렵게 물어봤다. 믿는 구석이 있을 게다. 광명 동굴-가학산 동굴-의 기적을 만들었다. 모두가 버린 흉물에서 먹거리를 찾아냈다. 2015년 광명 관광객이 154만3천명이다. 그가 취임하던 2010년에 3천명이었다. 임기 중에 514배 늘었다. 증가 폭이 가히 기네스 감이다. 여기에 KTX 광명역 근처도 천지개벽했다. 신도시가 들어섰고 상권의 중심이 됐다. 도지사에 도전할만한 충분한 밑천이다. 도지사 자격이 있는 시장이라고 독려하는 목소리도 많다. 그래도 1,300만 웅도(雄道)의 도지사다. 그간 힘 있는 정치가 독점해왔다. 임창렬 부총리, 진념 부총리, 진대제 장관도 정당(政黨)이 점지했다. 이인제, 손학규, 남경필도 정당이 내려보냈다. 유권자는 택일(擇一)만 했다. 정치가 보낸 정치인 중에 고르기만 했다. 민선(民選) 25년 동안 이 공식은 깨지지 않았다. 1년 뒤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공식이다. 정치인 김진표(더불어민주당)ㆍ원유철(자유한국당)의원이 그래서 거론된다. 그 긴 시간, 시장ㆍ군수들은 쳐다보지 못했다. 쳐다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31개 시군에서 6번의 선거가 있었다. 연임 구분없이 합하면 186명이다. 야망 있고 능력 있는 이가 왜 없었겠나. 심재덕(수원ㆍ2선)도, 여인국(과천ㆍ3선)도 그런 시장이었다. 하지만, 예산 보복 앞에 뜻을 접거나, 명(命)을 유지하려 입을 다물고 지냈다. 지금 양기대 시장이 그 25년의 금도(禁度)를 넘어서고 있다. “도지사 해보겠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광명 동굴만으론 설명 안 되는 용기다. 의문을 풀어줄 귀띔이 그의 말속에 있다. “이제 시장들도 (큰 선거에) 나서지 않나요?” 19대 대선판을 말하는 거였다. 실제로 그랬다. 19대 대선은 행정가들이 주인공이었다. 홍준표 안희정 남경필이 현직 도지사였다. 이재명은 현직 시장이었다. 정치 9단, 당 총재, 권력자 식솔이 놀던 곳이었다. 정치가 그들만의 구역이라며 담장을 쳤었다. 그 속에 행정이 뛰어들었고, 당당히 한가운데 섰다. 이견(異見)은 있다. 홍준표, 안희정, 남경필을 행정가로 볼 수 있나. 노회한 정치인으로 봐야 하지 않나. 그런데 이 질문의 답조차 또 다른 역설로 결론난다. 홍준표가 여의도 정치권에 있었다면 후보가 됐겠는가. 안희정, 남경필이 정당 소속 국회의원이었으면 기회가 왔겠는가. 홍준표, 안희정, 남경필은 정치를 버렸기 때문에 기회를 얻었다. ‘대권을 원하면 행정으로 갈아타라.’ 홍지사, 안지사, 남지사의 예(例)로 더 증명되는 공식이다. 틈은 그렇게 대선에서 생겼다. 이제 경기도지사 선거로 옮겨올 차례다. 양 시장이 제일 먼저 그 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여차하면 머리도 넣고 몸까지 넣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켜보는 유권자도 달라졌다.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턱없는 소리라고 비웃지 않는다. 대선에서 본 경남지사(본선 2등), 충남지사(예선 2등), 경기지사(예선 2등), 성남시장(예선 3등)의 성적표를 알아서다. ‘시장들도 함께 검토해주겠다’며 표심을 활짝 열었다. 130만 거대 표심을 지닌 염태영 수원시장도 있다. “할 거냐”고 물으면 “안 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정치는 생물이잖냐’란 말엔 입을 닫는다. 대선에서 거물 된 이재명 성남시장도 있다. 몸값이 오른만큼 입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3선 성남시장 이재명’을 말하는 이는 없다. 결국, 이렇게 그루핑(grouping)되어 간다. 내년 경기지사 선거에 등장할 전에 없던 그루핑이다. ‘정치인 후보 그룹’과는 전혀 다른 ‘시장 출신 후보 그룹’이다. 관광이 먹거리임을 증명한 광명 동굴. 그 입구에 붙은 사진에서 양 시장은 항상 멈춘다. “광명 동굴의 은인입니다. 이분이 도비를 지원해주셔서 오늘이 있습니다. 정당은 달라도 항상 존경하는 분입니다.” 사진 속 인물은 김문수 전(前) 경기도지사다. 시정을 챙겨 준 도지사의 배려가 꽤나 고마웠던 모양이다. 몇 달 뒤, 양 시장-또는 염 시장, 또는 이 시장-이 외치게 될런지도 모를 구호다. ‘시군을 아는 제가 경기도를 살리겠습니다!’ 김종구 主筆

[김종구 칼럼] 희롱당하는 보수표-‘홍·찍·문’

축구 한ㆍ일전은 늘 박빙이다. 모두가 TV 앞으로 모인다. ‘푼돈 내기’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런 사람 꼭 있다. ‘일본이 이긴다’에 거는 사람이다. 배당률(?)을 노린 선택이다. 하지만 곧 후회한다. 역시 심장은 돈이 아니라 진심으로 움직인다. 한국이 득점하면 터질 듯 가빠지고, 실점하면 죽은 듯 멈춰 선다. 혹시 일본이 이겨 상금을 챙기더라도 좋을 리 없다. 도박(?)은 대개 이런 교훈으로 끝난다. ‘다시는 맘 없는 곳에 걸지 말자.’ 대선(大選)도 한ㆍ일전만큼이나 흥미롭다. 5월 9일이 다가오면서 그 쪼임이 더해간다. 앞선 자는 설렘으로, 쫓는 자는 초조함으로 뛴다. 그런데 그 복판에서 옆으로 비켜나 있는 표심이 있다. 흥미도 잃고, 쪼임도 없어 보이는 표심이다. 한때 우리 사회 최대 주주(株主)라 으스대던 보수표다. 제대로 된 의견도 못 낸다. 정치적 질식이다. 대표로 삼을 후보도 없다. 정치적 표류다. 가혹하다 하겠지만 지금의 보수를 달리 표현할 길은 없다. 이런 보수를 더 희롱하는 말이 있다. ‘홍ㆍ찍ㆍ문’-홍준표 찍으면 문재인 당선된다-이다. 문재인 후보의 지지율은 철옹성이다.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40% 주변에서 요지부동이다. 안철수 후보가 따라붙지만 힘에 부친다. 결국, 보수표를 끌어안는 수밖에 없다. 포스터에서 당명(黨名)을 지운 것도 그래서다. 북(北)을 성토하며 안보 전도사를 자임하는 것도 그래서다. ‘홍ㆍ찍ㆍ문’은 이렇게 ‘주인 없는 보수표’에 적용된 잔인한 셈법이다. 작금의 대선에서 평시(平時) 1등이던 보수였다. 덧셈 뺄셈 공식에서 늘 상수(常數)였다. 노무현ㆍ정몽준 단일화(17대)에는 이회창이 상수였고, 문재인ㆍ이정희 연합(19대)에는 박근혜가 상수였다. 그게 달라졌다. 상수의 자리에 진보로 뭉친 문재인이 자리해 있다. 보수표는 2등 안철수의 대(大)역전을 점쳐보는 종속변수(從屬變數)로 전락했다. 참 초라해졌다. 보수들도 이 현실을 받아들인다. 안 후보 쪽으로의 전향이 곳곳에서 보인다. 전향의 변(辯)은 뻔하다. -“어차피 홍준표는 안 된다” “문재인은 싫다” “그래서 맘에 안 들지만 안철수를 택하겠다”-. 보수의 소신을 바꿨다는 얘기는 끝까지 안 한다. 어쩔 수 없는 차선이라고 변명한다. 여기엔 언론도 군불을 지핀다. 차마 ‘소신 투표 하지 마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대신 ‘보수표 분산=문재인 당선’이라고 계속 써댄다. 이제 ‘소신 투표’는 누군가에겐 금기어다. ‘불공정하다’는 항의를 누군가에게 받게 될 화두다. ‘보수여! 소신을 버려라! 될 사람에게 몰아주라!’ 이래야 옳은가. 이렇게 쓰는 것이 옳은가. 한국인은 평균 81년을 산다고 한다. 19세라면 12번 할 수 있고, 40세라면 8번 할 수 있다. 60세라면 4번밖에 남지 않았고, 80세라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이들에게 몇 번 남지 않은 대선이다. ‘누가 싫으냐’가 아니라 ‘누가 좋으냐’로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축구 한ㆍ일전 때가 그랬다. 돈 따겠다고 일본팀에 걸면 안 되는 거였다. 뜨거운 심장이 향하는 한국에 걸어야 하는 거였다. 그렇게 해야 이겨도 행복하고 져도 떳떳한 거였다. 흔히들 전략 투표를 설명할 때 결선 투표를 말한다. 그리고 결선 투표의 좋은 예로 프랑스 대선을 든다. 1차 투표는 소신 투표, 2차 투표는 전략 투표라고 구분 짓는다. 그 프랑스 대선이 지금 치러지고 있는데, 과연 그런가. 2002년 프랑스 대선에는 16명이 출마했다. 1차 투표에서 시라크 1등(19.88%), 르펜 2등(16.86%)이었다. 주인 없는 63.26%가 2차 투표에 합류했다. 결과는 1차 결과처럼 시라크 승리였다. 2012년 대선의 1차 투표는 올랑드 1등(28.63%), 사르코지 2등(27.18%)이었다. 결선 투표 승자는 이번에도 1차와 같은 올랑드였다. 1차는 소신 투표, 2차는 전략 투표라는 구분은 프랑스 대선 어디에도 없다. ‘결선투표=전략투표’라는 논리는 거짓말이다. ‘뭔ㆍ찍ㆍ뭔’, ‘누구를 찍으면 누가 된다’, ‘누가 싫다면 누구를 찍어라’…. 한국에서만, 그리고 19대 대선에서만, 그리고 보수표에만 주입되는 옳지 않은 주문(呪文)이다. 김종구 主筆

[김종구 칼럼] 고오환 도의원의 解明, 그리고 常識

고오환 도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제 양심에 내 개인의 사익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문제가 되는 법곳동 285-○번지에 1996년도인가 그때…1,000평씩 매입을 했습니다…단 한 평도 아직 팔아 본 적이 없습니다…경기일보 기자가 이틀 동안 내 뒷조사를 했습니다…내가 명의신탁한 거 법적으로 재산 등록하면서 소명자료 다 냈습니다…의원이 사업이 개발되게 되면 땅이 있으면 그냥 전부 다 범법자가 됩니까.” 본회의장에서의 공개 발언이다. 경기일보 보도의 주어는 ‘모 도의원’이었다. 확정되지 않은 의혹 보도의 기본 수칙이다. 그 익명(匿名)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고 의원 스스로 1,300만 민의의 전당에서 공개했다. 구어체(口語體)의 발언을 문어체(文語體)로 옮기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다시 ‘왜곡했다’는 불평이 올까 걱정이다. 그래서 재차 읽으며 정리한 녹취록의 취지는 이렇다. ‘땅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투기할 생각이 없었으며, 개발지 변경 추진은 소신이었다.’ 부동산 투기 논란을 보자. 문제의 ‘법곳동 땅’은 일산TV 사업부지 안에 있다. 사업이 추진되면 이 땅은 수용된다. 반대로 사업지가 옮겨가면 그대로 남는다. 사업부지 결정에 따라 땅 가치는 분명히 달라진다. 고 의원은 사업부지를 옮겨가라고 밀어붙였다. 의도했든 안 했든, 이 논리의 결론은 본인 토지가 수용되지 않는 쪽으로 끝난다. 어떻게 표현하더라도-투기 또는 투자 또는 관리- 재산 가치의 변동을 부르는 행위다. ‘의혹있다’고 봄이 상식 아닌가. 명의신탁 주장도 그렇다. 애초 법률적 용어는 아니다. 세금 회피나 소유 은폐를 위한 편법으로 쓰였다. 그래서 부동산실명법이 범죄로 규정했다. 더구나 공직자다. 재산 상황을 투명하게 관리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고 의원은 21년 정치하면서 25년간 명의신탁을 해놨다. 그리고 하필 도시개발사업이 정해지기 한 달 전에 명의를 찾아갔다. 그 스스로도 “죄가 있으면 죄를 받을 거고…”라고 전제했다. 명의신탁에 당당할 수 없음을 밝힌 것 아닌가. 법관 회피 제도라는 게 있다. 법관이 스스로 재판을 피한다. ‘불공평한 재판을 할’ 우려 때문이 아니다. ‘불공평한 재판으로 보일’ 우려 때문이다. 이를테면 법관이 피고와 8촌 관계다. 그 사실을 숨기고 재판했다. 재판은 끝났고 피고가 이겼다. 이 사실을 후에 원고가 알았다. 틀림없이 불공평 의혹을 제기할 것이다. 법관의 양심과는 무관하게 오해는 사게 돼 있다. 그래서 법관이 스스로 그 재판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들이 사법부 신뢰를 유지하는 핵심이다. 고 의원은 일산시민의 대변자다. 그 업무가 공정해야 함은 사법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도 필요했던 것이 ‘업무 회피’ 정신이다. 사업부지에 본인 땅이 포함돼 있으면 업무에서 손을 뗐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사업부지에 내 땅이 들어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는 최소한의 공지라도 하고 시작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했다. 땅 소유는 감추면서 사업 부지를 바꾸라고 밀어붙였다. 뒤늦게 사실을 안 경기일보가 폭로했다. 잘못인가. 고 의원은 경기도의회 윤리특별위원장이다. 대단히 의미 있는 직책이다. 도의원의 자격, 윤리, 징계를 총괄하는 의회 내 판관(判官)의 자리다. 취임 초 언론에 이런 소감을 남겼다. “혹여 기준을 벗어난 발언이나 행동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등 부적절한 처신을 한 의원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위엄한 잣대로 심사하겠다.” 도의원 윤리에 대한 소신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본인에게도 그렇게 적용해야 맞다. 공정하고 위엄 있는 잣대로 봐야 맞다. 지금 필요한 ‘공정하고 위엄 있는 잣대’는 이것이다. 석연찮은 명의신탁, 맞춘듯한 등기이전, 공감 없는 변경 압박, 밝히지 않은 땅 소유…. 하나도 상식적이지 않은 이 모든 의혹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을 상식에 기초한 다수로부터 받아 보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판관은 옆자리에 앉은 동료의원들이 아니다. 혹은 일산시민이 될 것이고, 혹은 경기도민이 될 것이고, 혹은 검찰이 될 것이다. 김종구 주필

[김종구 칼럼] 25년째 실패한 경기도지사 대통령

청와대 영빈관이다. 대통령이 점심을 낸다. 지방언론 국장단 33명이 손님이다. 송 국장, 박 국장, 그리고 나도 그 속에 있다. 경기도 언론의 편집국장들이다. 자리가 영 맘에 안 든다. 대형 4각 테이블의 맨 구석이다. 뒤통수에서 연신 TV 카메라가 돌아간다. 더 맥 빠지는 일도 생긴다. 행사 초반 던진 노무현 대통령의 덕담이다. 부산에서 올라온 국장에게 건넨 말이다. “○부장은 잘 있습니까”(대통령). “지금은 상무님입니다”(국장). “벌써 상무가 됐나요”(대통령). “네”(국장). ‘부산 국장’에게 그날 오찬은 더없이 뿌듯했을 것이다. 고향 출신 대통령에게 받는 특별한 대우였다. 그날 오찬만 그랬던 건 아니다. 그 전 대통령 때도, 그 후 대통령 때도 계속 그랬다. 대통령 고향 출신들만이 받을 수 있는 부러운 배려였다. 주변인이 된 경기도 국장들은 항상 구경만 했다. 그렇다고 건배 제의의 기회가 온 것도 아니다. 그건 야도(野道)에 돌아갈 배려였다. 밥 한 끼니 먹는 데도 이랬다. 하물며 권력에 다가가야 하는 도민에겐 오죽하겠나. 사업을 키우려 해도 권력이 필요한 나라다. 입신양명의 꿈에도 권력이 필요한 나라다. 경기도민은 그 권력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정부 수립 이후 70년간 그랬다. 경기도민이 중립이라는 건 웃기는 소리다. 턱도 없는 지배(支配) 논리다. 경기도민도 권력이 그립다. 경기도 대통령을 기다린다. 한 때-90년대-, 그 꿈이 이뤄지는가 싶었다. 1천만표로 무장한 민선(民選) 지사가 출현하면서다. 잠룡(潛龍) 속에 들어간 경기지사를 보면서 뿌듯해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5년이 지났지만 된 게 없다. 이인제 지사는 대권 투기꾼이 됐다. 손학규 지사는 대선 풍운아가 됐다. 김문수 지사는 극우(極右)로 건 승부수에 스스로 무너졌다. 남경필 지사도 초라하게 물러섰다. 각자 받은 성적표가 한없이 부끄럽다. 경기일보가 했던 여론조사다. 문재인(부산) 36.2%, 안희정(충청) 18.4%, 안철수(부산) 12.1%. 경기지사들은 1% 전후(손학규 1.6%, 남경필 0.8%)에서 맴돌았다. 인구의 25%를 대표하는 주자들이다. 그런 대표선수들이 받아낸 지지율이다. 손 지사는 대선판만 11년을 뛰었다. 남 지사는 도정 공백을 무릅쓰고 뛰었다. 그런데 결과가 ‘1%’다. 경기도민도 권력이 필요하다. 경기도 대통령을 기다린다. 그 열망을 엮어내지 못한 것이다. 돌아보면 분명한 이유가 있다. 도를 넘는 외치(外治)가 치명적 패착이었다. 경기지사만 되면 지방으로 뛰었다. 상생이라며 경기도 먹거리를 퍼주었다. 드넓은 경기도를 버려두고 전라도ㆍ강원도로 칩거 다녔다. 그런 모습에 경기도민이 노(怒)했다. ‘경기지사도 아니다’라며 돌아섰다. 이런 분노와 배신감이 만들어 낸 빼도 박도 못할 결과표다. 흔히들 경기도민을 모래알이라고 한다. 그만큼 구성요소가 복잡하다. 서울시민은 이보다 더하다. 그런데도 서울시민은 대통령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 이명박 시장과 수도이전 반대 투쟁이 있다. 시장은 지방을 적(敵) 삼아 서울시민의 이익을 지켰다. 시민은 그런 서울시장에게 일방적 지지를 선물했다. 이게 대통령 된 서울시장에겐 있고, 대통령 못 된 경기지사에겐 없는 과거다. 행사장에서 만난 수원시장이 말했다. “다음 경기지사부터는 대통령 안 하겠다는 각서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만의 얘기가 아니다. 소주 한잔이라도 걸칠라치면 곳곳에서 들려온다. ‘도지사 3명 합한 지지율이 3%도 안 되는 게 창피하다’ ‘25년간 헛발질했으면 이제 그만해야 한다’ ‘대통령 병에 걸리지 않은 도지사가 나와야 한다’…. 다 옮겨 적으면 더 민망하지 않겠나. 졸견(卒見)으로 끝내자. 경기도는 정체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열망과 기대는 크다. 그래서 시스템이 필요하다. 억지로라도 정체성을 엮어 낼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 제도적 상징이 지방자치고, 현실적 상징이 경기도지사다. 25년은 실패했다. 그래도 경기도지사직(職)은 경기도의 희망이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도전해야 한다. 실패한 과거를 버리고 성공할 미래로 바꿔가야 한다. 도민을 위한 충실한 내치(內治)가 그 유일하면서도 확실한 답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화장장 선동하던 정치, 軍공항에선 빠져라

도태호 수원2부시장이 말했다. “(화성시와) 역지사지의 자세로 협의하겠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게 역지사지(易地思之)다. 화성시와 수원시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겠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게 좀 막연하다. 행정이란 게 본디 복잡하다. 온갖 행위가 뒤엉켜 있다. 이걸 다 지목한 건 아닐 것이다. 군공항 이전후보지 발표 날 한 말이다. 아마도 공항 이전 문제를 역지사지하겠다는 뜻인 듯하다. 그런데 왠지 늦은 감이 있다. ‘화장장 사태’부터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공항 이전과 운명처럼 뒤섞인 일이다. 공항은 수원에 있는데, 화장장은 화성에 있다. 공항 이전 피해자는 화성시민인데, 화장장 건립 피해자는 수원시민이다. 공항 이전을 반대하는 건 화성시민인데, 화장장 건립을 반대하는 건 수원시민이다. 수원시민의 화장장 공청회가 강제로 생략됐는데, 화성시민의 공항 이전 공청회도 강제로 생략됐다.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두 현안이다. 먼저 출발한 일이 화장장이었다. 거기에 역지사지가 없었다. 사업이 알려지자 서수원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주민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거리마다 붉은색 현수막이 내걸렸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주민들이 화성시 청사로 몰려갔다. 다이옥신 피해가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고,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도 나왔지만, 막무가내였다. 오로지 ‘2㎞ 밖에서 죽음의 다이옥신이 날아온다’는 구호만 반복됐다. 그 선두에 정치가 있었다. 불안을 분노로 확대했다. 현직 국회의원이 시위의 포문을 열었다. “장사시설에서 나오는 오염물질로 건강과 환경피해 등이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관계부처를 찾아다니며 ‘구세주 코스프레’를 했다. 다른 당 원외 당협 위원장도 가세했다. 둘이 시위대 앞에서 맞붙는 민망한 장면까지 연출됐다. 19대 총선 수원을(권선구) 토론회는 차라리 화장장 규탄 대회였다. 후보 3명 모두 화장장 무효를 외쳤다. 수원시의 최초 입장은 ‘화장장 건립 찬성’에 가까웠다. 그렇게 볼 여러 정황이 있었다. 수원시장이 한 정치인에게 이런 전화를 했다. ‘큰 정치를 해야 한다. 주민 선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공무원들 사이엔 이런 우려도 나왔다. ‘화성 화장장을 문제 삼으면 수원 연화장도 불거진다.’ 공보(公報) 책임자는 이런 제안서를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수원시가 화장장 찬성을 전격 발표하자’. 역지사지의 본(本)을 보여줄 흐름이었다. 그랬던 흐름이 갑자기 화장장 결사반대로 옮겨갔다. 정확히 말하면 떠밀려 갔다. 정치가 들쑤셔 놓은 분노의 쓰나미가 그렇게 만들었다. 수원시장이 투쟁의 선봉에 서야 했고, 부시장은 투쟁위의 행동대장이 돼야 했다. 상처받은 화성시민이 분노하기 시작했고, 근조(謹弔) 사진까지 내걸린 화성시장은 수원시에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원과 화성은 가장 먼 이웃이 돼갔다. 200년 전 하나였던 읍(邑)에 이런 적이 없다. 얄밉게도 정치는 쏙 빠졌다. 누구는 당선돼서 빠졌고, 누구는 떨어져서 빠졌고, 누구는 지역구를 옮겨가서 빠졌다. 스스로 총선(總選)용 불쏘시개였음을 확인시킨 셈이다. 대신 지역엔 그 정치가 흘려놓은 찌꺼기만 남았다. 근거 없는 불안-서수원권-과 상처받은 적개심-화성-이다. 그렇다고 화장장 문제가 달라지지도 않았다. 이런 걸 뭐라 해야 하나. 죽 쑤어서 개 줬더니, 그릇 비운 개는 사라졌고, 죽 쑨 이들만 남은 것인가. 그리고, 군공항 이전이다. 정치가 또 꿈틀댄다. ‘환영한다’ ‘반대한다’며 숟가락을 얹으려 한다. 또 표(票)가 된다고 보는 모양이다. 안 된다. ‘돕겠다’-수원 정치- 해도 안 되고, ‘싸우겠다’-화성 정치- 해도 안 된다. 어차피 자기들만의 ‘아전인수’ 셈법으로 대책 없이 들쑤셔 댈 정치 아닌가. 그 속에는 어떤 역지사지도 없다. 그냥 행정에 맡겨두는 게 옳다. 투쟁해도 화성시장이 해야 옳고, 흥정해도 수원시장이 해야 옳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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