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할 말 한 젊은 검사, 할 말 못한 젊은 검사

1997년 1월 26일 밤이었다. 밤늦게 삐삐가 울렸다. ‘031-210-○○○○’. 특수부장검사실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 기자, 들고 다니던 문건 어데서 났나.” “갑자기 왜요.” “지금 난리 났다. 임춘택이가 그걸 조선일보에 올렸다. 근데 이놈아가 지금 연락이 안 된다.” ‘문건’이 터진 것이다. 문건의 파괴력은 기자도 짐작했다. ‘부장’이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러면서 당부했다. “그거 나 보여줬다고 위에다 얘기하지 마라.” 다음날 조선일보 칼럼은 이랬다. “퇴임 검찰총장의 공직 취임 금지 규정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과 임명권자의 인사권 남용 방지를 위한 것이다… 김기춘 전 총장은 (총장 퇴임 후) 곧 법무장관으로 가서 집권당 선거 활동을 했고… 김두희 전 총장은 총장 취임 며칠 만에 법무장관에 임명해서 임기제를 훼손했으며, 김도언 총장도 퇴임하자마자 집권당 지역구 위원장을 맡음으로써 세 사람 모두 검찰에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수원지검 특수부 검사 임춘택’-” 난리 날 만했다. ‘검찰총장 퇴임 후 공직 제한’은 당시 검찰의 뇌관이었다. 검찰총장의 정치개입을 막는다며 야당이 만든 제도였다. 김기수 총장이 반기를 들었다. 변호사들과 함께 위헌 심판을 청구했다. 따지고 보면 총장 개인의 퇴임 후 먹거리다. 그런데도 모든 검사들이 똑같은 목소리를 냈다. 하필 그런 때 검찰총장의 뜻과 정반대 얘기를 현직 검사가 신문에 기고한 것이다. 전임 총장들의 정치 입문 과정까지도 조목조목 비난했다. 벌집을 들쑤신 것이다. 겉으론 평온했다. ‘주의조치’가 전부였다. 하지만, 내부에선 가혹하게 돌아갔다. 임 검사는 그날로 짐을 쌌다. 원치 않는 형사부로 쫓겨났다. 담당 부장도 며칠 못 갔다. 차장실엔 ‘임 검사 출입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한번 시작된 보복은 정기 인사 때마다 이어졌다. ‘경향(京鄕-서울ㆍ지방) 교차근무’라는 원칙은 그와 무관했다. 철저히 지방과 한직으로만 내둘렸다. ‘조직과 다른 얘기를 한 죄.’ 그 죄에 묶인 젊은 검사의 고난은 그때부터 5년여간 계속됐다. 그가 수원지검을 떠날 때 봤다. 밥상을 마주하고 서로에게 물었다. 그는 내게 “내 원고를 어떻게 김 기자가 가지고 있었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에게 “신문에 칼럼을 쓰게 된 진짜 배경이 뭐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쓰레기통 뒤지다가 봤다. A4 용지 두 장에 플러스 펜으로 쓴 글이었다. 내용이 심상치 않았지만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특수부장에게 보여줬던 것이다.’ 그의 대답도 복잡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가 친구다. 형평성 잃은 논조에 반박하기 위해 밤새도록 써서 줬다. 며칠간 보도되지 않아 이상했다. 그래서 찾으러 갔는데 그날 마침 가판(假版)에 보도돼 있었다. 옷을 벗을 각오로 쓴 것이냐고 하던데. 내가 왜 옷을 벗냐.’ 이후에도 현직 검사들의 ‘기고 파문’은 있었다. 이영규 부부장(사시 30회ㆍ‘송두율씨 구속하라’), 김원치 차장(사시 13회ㆍ‘한총련 출범부터 잘못’), 이용주 검사(사시 34회ㆍ‘법무부 장관 사퇴해야’)…. 그런데 임 검사의 글이 지금껏 얘기된다. 글이 주는 당연함과 사소함, 가혹함 때문이다. 검찰총장의 정치 중립은 당연한 얘기였다, 검사들도 말하던 사소한 얘기였다. 그런 글에 내려진 징계가 가혹했다. 검찰조직의 경직성을 보여주는 더 없이 극(極)한 예다. 그 ‘임 검사 글’로부터 20년이다. 다들 달라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젊은 검사가 자살했다. 부장검사 때문이라고 유언했다. 감찰에서 이런저런 빌미 거리가 나왔다. 어깨도 쳤고 욕도 했던 모양이다. 한 번쯤 대들면 될 일이었다. ‘술 안 먹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말 하기가 그렇게나 어려웠던 모양이다. 부장검사에게 대드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려웠던 모양이다. 김수남 검찰총장이 결론을 내렸다. “잘못된 조직문화가 불러온 일이다”. 20년 전 젊은 검사는 ‘할 소리’를 하다가 징계를 당했다. 20년 후 젊은 검사는 ‘할 소리’를 참다가 세상을 등졌다. 이 2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화두가 검찰조직에서 어른거린다. ‘이유 불문’ ‘상명하복’ ‘검사 동일체’…. 없어졌다던 이 화두들이 여전히 검찰을 틀어쥔 모양이다. 정답을 내릴 수 있는 건 검사 2천명 뿐이다. 각자 스스로에 묻고 열린 결론으로 풀어봐야 한다. ‘나는 부장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총장과 다른 뜻을 신문에 쓸 수 있는가’. 글 시작에 앞서 임 검사와 통화했다. 변호사인 그와 자살 검사 얘기를 했다. 지금의 생각을 칼럼으로 써 달라고 했다. 답변이 20년 전보다 더 간단해졌다. “글은 무슨… 이제 조용히 살고 있는데… 만나서 밥이나 먹지.”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이제 ‘지방재정개악’ 떼고 ‘지방분권개헌’ 붙여야

시작은 4월 22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2016 재정전략회의’에서 개편안이 거론되면서다. 그렇게 시작한 싸움이 석 달째다. 그 사이 국가 전체적 분위기가 바뀌었다. 애초 지방재정개편은 ‘부자 시군’과 ‘가난한 시군’의 문제였다. 지자체 간 갈등을 유발하는 나쁜 정책이라는 비난도 그래서 나왔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부자 시군, 가난한 시군 없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방분권으로 개헌하자’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6·10 민주항쟁의 결실이 ‘직선제 개헌’이었다면 지금의 헌법 개정은 주권재민을 위한 것이고 그 핵심은 자치분권”이라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개헌이 된다면 헌법 전문에다가 분권과 자치의 시대를 선언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세균 국회의장도 “현행 헌법은 지방자치규정이 빈약하다… 지방분권 쪽으로 가는 게 옳다”고 했다. 자치를 말하는 모든 이들이 지방분권개헌을 말하기 시작했다. 불교부단체인 수원시 염태영 시장도 그렇게 주장했다. 지난 11일 대시민 호소문에서 “지방자치와 분권은 시민의 권익을 지켜주는 안전장치”라며 “지방재정의 실질적 확충, 참된 지방자치와 분권의 실현을 위해 지방분권형 개헌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그는 “전국 단체장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몇 푼 나눠주는 게 아니라 진정한 분권 실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쯤에서 돌아봐야 할-불교부단체들엔 불편할 수도 있는- 진실이 있다. 사실 지방재정 투쟁은 6개 시만의 얘기였다. 나머지 220개 시ㆍ군ㆍ구는 관심 없었다. 심지어 ‘먹고 살만한 동네의 놀부 심보’라는 눈총까지 있었다. 언론에도 딜레마였다. ‘수원의 억울함은 보도하지만, 양평의 가난함은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있었다. ‘시장 단식’, ‘시장 시위’라는 선정적 제목 밑에 잠시 그 고민을 묻어뒀을 뿐이다. 이런 때 지방분권개헌이 등장했다. 전국이 이처럼 하나의 목소리를 낸 적이 있었나 싶다. 경기도와 충돌하는 충청도-안희정 충남지사-가 찬성한다. 가장 부자라는 서울-박원순 서울시장-도 찬성한다. 여의도 정치의 지도자-정세균 국회의장-도 찬성한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찬성하고,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가 찬성하고, 여의도 정치권이 찬성한다. 규제개혁처럼 싸우지도 않고, 재정개혁처럼 질투하지도 않는다. 길이 우연히도 이렇게 뚫렸다. 6명 시장에겐 암흑 속에 나타난 출구(出口)일 수 있다. 과감히 지방재정개악을 내려놓고 지방분권개헌을 집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지방분권이 없어서다. ‘다 죽는다’는 지방재정개악도 지방분권이 없어서다. ‘권한 좀 달라’는 도시계획갈등도 지방분권이 없어서다. ‘길 좀 넓혀달라’는 예산편성민원도 지방분권이 없어서다. ‘공무원 좀 더 달라’는 인사행정불만도 지방분권이 없어서다. 지방분권이면 다 해결된다. 부분(部分)에서 벗어나 전체(全體)를 보면 훤히 보이는 답이다. 그 답을 헌법에 지방분권으로 대못 치자는 것이다. 안 쫓아갈 이유가 있나. 시민의 투쟁이 벌써 3개월째다. 100만명이 서명해 정부를 찾아갔다. 1천500명이 올라가 데모도 했다. 절절한 현수막으로 길거리도 덮었다. 이들이 있어서 시장들이 싸울 수 있었다. 그랬는데 그 시민들이 지쳐간다. 더는 서명할 시민도, 더는 상경할 시민도 없어 보인다. 출근길 현수막도 장맛비로 늘어졌다. 이제 그 앞에 선 시민도 안 보인다. 지친 것이고 물린 것이다. 이쯤 되면 그만둘 때다. 새롭게 바꿀 때가 됐다. 그 바꿀 자리에 새로 붙일 구호가 바로 “완전한 지방자치, 지방분권 개헌하라”다. 염태영 시장이어도 좋고, 이재명 시장이어도 좋고, 정찬민 시장이어도 좋고, 최성 시장이어도 좋고, 채인석 시장이어도 좋고, 신계용 시장이어도 좋다. 누군가는 나서 지방재정개악 현수막을 떼어 내고 지방분권개헌 현수막을 달아야 한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수도 이전’ 南 지사, ‘할 말 잃은’ 경기도민

민선(民選) 경기지사가 네 명 있었다. 이인제, 임창렬, 손학규, 김문수 지사다. 이 중 누구도 ‘수도를 이전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민선 3기 이후의 지사들은 더 그랬다. 수도이전을 공약한 참여정부 때문이다. 손학규ㆍ김문수 지사는 수도이전에 맞선 투사였다. 둘 다 대통령이 목표인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수도 이전만큼은 싸웠다. 중원-충청 票-을 버리면서까지 싸웠다. 그것이 경기지사에게 주어진 수도(首都)의 의미였다. 그 금기(禁忌)의 선을 남 지사가 넘었다. 청와대와 국회까지 세종시로 옮기자고 했다. 당장 충청권이 쌍수를 들었다. “(남 지사가) 좋은 발언을 해주셔서 정말 환영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이춘희 세종시장). “수도권 단체장이 그 같은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한다”(안희정 충남지사). 충청권 언론도 남 지사 띄우기가 한창이다. ‘수도권 광역단체장인 남 지사의 소신 발언은 신선한 충격이다’(중도일보 사설). 역대로, 충청권에서 이런 대우를 받은 경기지사는 없다. 기껏해야 특강 몇 번 오가는 게 다였다. 내용 없는 종이에 상생하자고 서명하는 게 다였다. 그래 놓곤 이내 ‘지키는 자’와 ‘빼앗는 자’의 관계로 돌아갔다. 그런데 남 지사는 지금 충청권의 희망이다. 남 지사의 정치 감각을 또 한 번 보게 된다. ‘대통령 형 불출마 요구’ ‘국회 선진화법’ 등 위기 때마다 빛났던 그의 감각이다. 이번에도 정치권은 그가 던진 이슈로 빠져들고 있다. 근데, 이를 지켜보는 경기도민이 혼란스럽다. 많은 이들이 할 말을 잃고 있다. 수도 이전이 정국을 휩쓸었던 건 2004년 전후다. 그때 서울ㆍ경기ㆍ인천시민은 수도 이전에 반대했다. 경기ㆍ인천 시민 가운데 60~70%가 반대였다. 그 후 이런 여론 추이가 바뀌었다는 통계는 없다. 그렇다고 수도이전을 뒷받침할 새로운 어용(御用) 논리가 등장한 것도 아니다. 난데없이 ‘수도 이전’ 주장이 나왔다. 그것도 현직 경기지사가 주장하고 나섰다. 그때의 통계대로라면 도민 60~70%는 혼란에 빠져 있을 것이다. ‘Give-take’라는 기본 셈법도 없다. 수도 이전을 처음 주장할 때 남 지사는 “수도권 규제라는 낡은 틀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무슨 규제를 어디까지 풀자는 건지 설명하지 않는다. 충청도 지도자 누구에게도 수도권 규제 합리화에 협조해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수도를 충청도에 주자’는 주장만 반복한다. 아마도 일방적으로 베풀겠다고 작정한 모양이다. 스스로의 모순도 있다. 대선에 대해 남 지사는 “경기도지사로서 일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군불을 지피는 건 수도 이전 이슈다.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일이다. 아무개 대통령을 탄생시켰던 세상 다 아는 대선 공약이다. 누가 봐도 정치 영역이다. 행정에 충실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말을 한꺼번에 하는 게 지금의 남 지사다. 경기도 행정에 충실한다면서 충청도 정치에 충실하고 있다. 잘 안다. 이게 다 대통령 실험이다. 도정 연정도 야당 연정을 위한 실험이다. 지방장관도 야당 장관을 위한 실험이다. 물론 가치 있다. 하지만, 여기에 절대 써먹으면 안 될 소재가 있다. 바로 수도(首都)다. 이 수도를 절대 건드리면 안 될 사람도 있다. 바로 경기도지사다. ‘경국대전 이후 관습헌법’이라고 헌재가 정의했다. 그 터전에서 600년을 산 도민이다. 그 도민이 뽑은 경기지사다. 왜 하필 그런 경기지사가 수도를 건드리나. 경기도민이 그래서 혼란스럽다. 환호에 빠져드는 충청권을 보면서 할 말이 없어진다. 그 충청도에서 전화가 왔다. 언론인이라고 했다. 남충희 전(前) 경기부지사에게 소개받았다고 했다. “남 지사의 지방장관 아이디어 평가가 어떠냐”고 물었다. “해볼 만한 새로운 시도”라고 답했다. “경기도민이 연정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싸우지 않으니 다들 좋아한다”고 답했다. “정말 경기도는 의회에서 싸우지 않느냐”고 물었다. “지난 2년간 결과와 통계로 증명되고 있다”고 답했다. 7분 내내 질문은 ‘남 지사’였다. 그런데 딱 하나, 그 ‘충청도 언론인’이 묻지 않은-틀림없이 물어볼 거라고 예상했었던- 질문이 있다. 수도 이전 주장에 대한 의견이다. 만일 물었다면 ‘경기도 언론인’은 이렇게 답하려 했다. ‘경기도민의 생각은 남 지사의 주장과 다르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빚 갚은 어느 市 이야기

흔히들 이 시(市)를 이렇게 얘기한다. -아방궁 같은 호화 청사가 있다. 수천억 들인 전철이 굴러간다. ‘억’ 소리 나는 축제가 매일 열린다. 멀쩡한 도로를 파헤쳐 돈을 처바른다. 사람도 없는 곳에 호화 공원을 만든다. 이런저런 단체에 뭉텅이로 돈을 뿌린다. 공무원의 주머니는 수당으로 넘쳐난다. 그래도 걱정 없다. 개발 이익금이 샘물처럼 계속 솟아난다-. 시각이 이러니 내리는 평가도 그렇다. ‘그런 시의 돈은 좀 뺏어도 된다.’ 잘못 봤다. 이 시를 짓누르고 있는 건 빚더미다. 호화청사는 애물단지로 변한 지 오래다. 전철 사업비 5천153억원은 빚으로 남았다. ‘환매 조건부 개발 방식’이 시 예산을 갉아먹고 있다. ‘앞선 시장들’이 벌려놓은 짓이다. ‘지금 시장’에겐 매일 빚 독촉장이 날아든다. 그렇다고 누굴 원망할 입장도 아니다. 정부에 단단히 찍혔다. 방만한 지자체의 표본이 됐다. 사방천지에 도와줄 곳은 없다.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 맬 수밖에 없다. 선심성 행사를 없앴다. 축제도 줄였다. 사업도 태반을 줄이거나 취소했다. 도로 확·포장, 고속도로 IC 접속도로 신설, 지방 도로 개설, 교차로 개선 등이 사라지거나 축소됐다. 신규사업은 생각도 안 한다. 총액 한도제를 도입해 스스로를 꽁꽁 묶었다. 이러다 보니 늘어나는 게 주민 반발이다. 곳곳에 볼썽사나운 현수막이 내걸렸다. ‘○○○시장 물러가라.’ 그래도 이렇게 지독하게 굴며 수천억원을 아꼈다. 그 돈으로 빚을 갚고 있다. 공직자들도 다 내려놨다. 시ㆍ의회의 업무추진비 30%를 삭감했다. 5급 이상 간부들은 기본급 인상분을 반납했다. 직원들의 복지포인트도 50% 삭감했다. 해외 문화 체험 인원도 80명에서 50명으로 줄였다. 연가보상 일수 최대 지급일 수도 50% 삭감했다. 하루 3만원 받던 일ㆍ숙직비까지 60%로 줄였다. 꼭 필요한 인력 아니면 채용도 안 한다. 이렇게 해서 후생복지비(47억원), 인건비성 경비(30억원), 기타 경비(50억원)를 줄였다. 빚이 줄기 시작했다. 2012년 빚은 6천275억원이었다. 2016년 6월 현재 557억원이다. 5천153억원이던 전철 빚은 이미 지난해 말 ‘0’을 찍었다. 2017년이면 총 부채도 ‘0’이 된다. 내심, 그 시기가 빨라질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막판 졸라매기가 한창이다. 체납세 징수를 위해 담당 부서가 바쁘다. 몇 개 남지 않은 공유재산을 팔려고 ‘땅장사’로 뛰어든 공무원들도 있다. 이제는 시민들도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칭찬할 일이다. 예산 낭비로 망가진 지자체는 많다. 그래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지자체도 많다. 하지만, 이를 극복했다고 인정된 지자체는 많지 않다. 특히 그 과정이 생생히 증명된 지자체는 없다. 시민들도 이제 불만 대신 자부심을 말한다. 이장 A(54)의 얘기다. “정부도 인정해줄 거다. 정상으로 돌아올 날도 멀지 않았다.” 이렇던 시에 청천벽력이 생겼다. 생각지도 않았던 철퇴가 떨어졌다. ‘빚 청산’ 이전으로 되돌리는 철퇴다. 지방재정개혁이다. 매년 1천700억원씩 정부가 떼어간다고 한다. 시가 굶주리며 갚아온 빚이 매년 1천 몇 백억원이다. 그만큼씩의 돈을 정부가 꼬박꼬박 가져가겠다고 한다. 더 졸라맬 허리띠도 없다. 수당도 더 줄이기 어렵고, 직원도 더 줄이기 어렵다. 더 팔 재산도 없고, 더 미룰 사업도 없다. 결국 ‘지난 2년’처럼 계속 살라는 얘긴데…. ‘빚 청산’이라는 희망도 버리란 얘긴데…. 2년을 참고 살아온 시민들에겐 정부가 야속하다. 두어 달 전, 시장(市長)은 말했다. “조만간 부채 제로(0) 선언할 거야. 그러면 시민들이 원하는 거 다 해줄 수 있어.” 소주 한 잔이 힘을 줬던 모양이다. ‘제로 선언’의 시기도 공언했다. 그 후 지방재정개혁안이 등장했다. 그 직격탄이 시에 떨어졌다. 엊그제-광화문 1인 시위가 끝난 다음 날-, 시장이 말했다. “(공정 80%) 운동장 건설도 중단해야 하는 건가…. 힘들다.” 2년만 참자고 했던 시장에게도 정부가 한없이 야속한 모양이다. 용인시 얘기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자치(自治)-‘자기 일을 스스로 다스림’

‘고기리 계곡’으로 더 유명하다. 산 좋고 물 좋고 풍수까지 좋다. 이런 곳에 10년도 더 된 숙원이 있다. 주말이면 꽉 막히는 도로다. 지적도에는 뻘건 도로선이 그려져 있다. 그걸 10년째 못하고 있다. 시 예산 파국 때문이다. 그러던 고기동에 희망이 생겼다. ‘곧 시가 빚을 다 갚는다더라’는 소문이 퍼졌다. 실제로 경전철 빚 5천억원이 정리됐다. 찔끔찔끔 보상도 해주고, 군데군데 도로도 넓어져 가는 중이다. 이런 용인시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느닷없이 날아든 ‘재정 가압류 딱지’다. 조만간 1천억원을 빼앗아 간다는 통고서다. 발송처는 대한민국 정부다. 그러니 호소할 데도 없다. 경전철 빚 5천억 갚는 데 5년 걸렸다. 1년에 1천억씩 갚았다. 그런데 꼭 그만큼씩을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고기동이 다시 걱정에 휩싸였다. 곳곳에서 제2, 제3의 고기동 걱정이 고개를 들고 있다. 허리띠 졸라맸던 5년이 허사가 됐다. 그 용인 옆으로 성남시가 있다. 24살 청년들에게 50만원의 청년 배당을 준다. 1만명쯤 받는데 요긴하게 잘 쓰는 모양이다. 다른 지역 24살 청년들의 부러움을 산다. 돌아보면 격세지감이다. 불과 6년 전 성남은 파산 상태였다. 호화 청사, 예산 낭비로 금고가 거덜났다. 당겨 쓴 판교 특별회계 5천200억원이 빚으로 남았다. 결국, 시장이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그러던 시가 이제 빚도 갚고, 돈도 준다. 여기에도 ‘가압류 딱지’가 날아들었다. 매년 1천200억원씩 가져갈 테니 그리 알라는 일방적 통보다. 24살 청년 배당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확정된 무상교복 사업은 시작도 못 해보게 됐다. 산후 조리 복지에 걸었던 여성들의 기대도 날아갔다. 어렵사리 탈출한 모라토리엄이다. 그렇게 모아 만든 여분으로 시작해보려던 성남시만의 복지다. 이 모든 것들이 ‘1천200억짜리 압류 딱지’로 날아가게 생겼다. 꼭 10년 전, 우리는 유바리(夕張)시를 봤다. 펑펑 쓰다가 파산된 일본 지자체였다. 일본 정부가 강하게 틀어쥐었다. 공직사회부터 철퇴를 맞았다. 수가 줄었고, 월급도 줄었고, 재정권도 빼앗겼다. 우리 정부가 널리 알렸다. 방만한 지자체를 군기 잡는 본보기로 썼다. 호화청사를 트집 잡는 재료로 썼다. ‘우리도 파산 지자체가 나올 수 있다’며 겁도 줬다. 투융자 심사 강화로 지방을 옥죈 게 그 즈음부터다. 그리고 10년이다. 유바리시를 다시 보자. 초ㆍ중등학교가 11개에서 2개로 줄었다. 복지 회관이 문 닫았고, 인구도 반 토막 났다. ‘이제 풀어주자’는 요구도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단호하다. “느슨하게 풀어줄 수 없다”며 원칙을 강조한다. 이것이 일본의 정책이다. 지자체 빚만 200조엔에 달하는 일본이다. 하지만, 도쿄 예산 빼앗아 유바리시에 주는 발상 따윈 안 한다. 철저하게 책임질 곳에 책임 묻는다. 같은 10년, 우리 정부는 달랐다. 방만한 지자체에 대한 경고는 사라졌다. 대신 잘 사는-정확히는 그저 겨우 먹고사는-지자체의 곳간에 손을 대기로 했다. 경전철 빚 5천억원 갚느라 고생한 용인시 곳간에 손을 대기로 했다. 탈탈 털어 모라토리엄을 졸업한 성남시 곳간에 손을 대기로 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본 정부는 책임 있는 지자체에 메스를 대는데, 한국 정부는 책임 없는 지자체에 메스를 댄다. 사전에 적힌 자치(自治)의 의미는 ‘자기 일을 스스로 다스림’이다. 한번이라도 국어사전을 봤더라면 나올 수 없었을 ‘지방재정제도 개편안’이다. 그래서 나쁘다. 지방 정부 곳간에 중앙 정부가 손을 대는 나쁜 정책이다. 뺏기는 지역과 빼앗는 지역이 어색하게 갈라서야 하는 아주 나쁜 정책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과학자 이창진의 달 걱정, 그리고 정치

수학으로 로켓을 풀었다고 했다. 그걸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도 했다. 지상(地上)에서 지면(紙面)에 매달리는 언론인이다. 우주 발사체는 너무 ‘높은 곳’ 얘기다. 그 발사체를 수학으로 푼다는 건 더 모를 얘기다. 그나마 아는 건 그의 과학적 위치다. 다들 대한민국 우주공학의 권위자라고 한다. 로켓 발사를 선도하는 과학자라고 한다. 그런 과학자와의 밥 자리는 4월 26일이었다. 하필 한ㆍ미 우주협력협정 서명이 있기 하루 전이었다. 그가 협정의 의미를 미리 설명했다. “미국 과학의 목표는 온통 화성 탐사에 가 있다. 달에 가는 과학자들이 일거리를 잃었다. 미국 정부도 이게 문제다.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넘겨받을 수 있는 기회다.” 실제로 그랬다. 다음날 협정 발표문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포함했다. 우주 과학과 관련된 물품, 기술 자료, 정보 공개, 인적 교류, 시설 접근 등이 들어 있었다. 2010년부터 두들겼지만 꿈쩍도 않던 나사(NASA)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는 사흘 전 발사된 북한의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도 얘기했다. “모든 첨단 기술에는 기술 이력(履歷)이라는 게 있다. 북한 SLBM의 원천은 소련 기술이다.” 소련은 1991년 붕괴했다. 미국의 관심은 소련의 기술유출이었다. 그 중에도 우주 공학과 핵 기술에 초긴장했다. 막대한 돈을 주며 유출을 막았다. 그래도 누수는 있었다. 그때 일부 러시아 학자들을 북한이 돈으로 사들였다. “그 결과가 지금의 SLBM”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우주 산업도 확신했다. “앞으로는 우주에 먹거리가 있다.” 인공위성의 핵심은 통신이다. 거기에 1등은 대한민국이다. “국내 통신 기술과 연결하자는 요구가 여러 국가에서 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주 쓰레기 처리, 노후 위성 재활용도 그에겐 산업이다. 후학(後學)에 대한 그의 욕심이 그래서 유별나다. 미래 산업의 중심이 우주에 있다고 확신해서다. 그-이창진 교수ㆍ건국대 항공우주공학과-에겐 달탐사가 이 모든 미래의 시작이다. 그 13일 전 총선이 끝났다. 새누리당 공약엔 ‘달 탐사’가 있었고, 더민주당 공약엔 없었다. ‘달탐사’를 정치 공약에 넣은 새누리당도 이상하다. 국회의원 임기 4년에 달탐사 시한을 엮어 넣는 게 우습다. 언급조차 안 한 더민주당은 더 이상하다. 우리에게 우주 공학은 남다르다. ‘우주 공학’이라 써놓고 ‘미사일 기술’이라고 읽어야 한다. 북한의 미사일 공포를 면전에 두고 치렀던 총선이다. 그런데도 더민주에게선 ‘우주’가 얘기되지 않았다. 돌아보면 쭉 이랬다. 정부의 달탐사도 하세월이다. 2014년엔 달에 갈 예산이라며 420억원을 세웠다. 달은커녕 부산 갈 기차 한 대 살 돈도 못 된다. 이나마 기재부에서 사라졌다. 힘 센 국회의원들 쪽지 예산에 밀렸다. 급해진 과학계가 국회 예산심사에 다시 넣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야당이 물고 늘어졌다. ‘대통령 공약인 달탐사 예산을 쪽지로 끼워넣었다’고 했다. 420억으로 달 가겠다는 정부나, 그걸 쪽지 예산이라며 빼는 야당이나…. 그런데 지금은 더 암담하다. 늘 그렇듯 선거 결과가 모든 걸 바꿨다. 패배한 쪽 약속은 모두 폐기처분됐다. 본의 아니게 ‘새누리당’ 꼬리표를 달았던 달탐사도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 이러니 걱정이다. 달탐사는 정치가 아니다. 1당의 것도, 2당ㆍ3당의 것도 아니다. 어렵사리 열어젖힌 미국 NASA의 문 아닌가. 미국의 ‘달 실업자 문제’까지 우리를 돕고 있지 않은가. 절박하게 따라붙어야 한다. 한ㆍ미 우주협정에 초당적으로 매달려야 한다. 과학자 이창진은 말한다. “미국의 기술을 받을 절호의 기회다.” “미래 먹거리 산업이 우주에 있다.” 절박함도 얘기한다. “북한 SLBM은 북한 과학의 현실이다.” “러시아에게 배운 기술이 이제 북한의 것이 됐다.” 하지만 그에게 들은 얘기는 여기까지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다음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말 안하는 다음 영역에 정치가 있음은 분명하다. 달을 특정 정당의 유세장쯤으로 여기는 철없는 정치다. 그 철없는 정치가 지금 한국의 우주공학을 발목 잡고 있다. 한반도 남쪽에서 1m도 떠오르지 못하게 억누르고 있다. 이쯤 되면 죄악 아닌가. 우주를 잃어버릴 미래 세대에 대한 죄악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우리 아빠, 순직이시잖아요”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다. 세상 모든 죽음이 슬프다. 그날의 영결식도 그랬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애도했다. 도지사도 꽃을 받쳤다. 신문사 사장도, 현장 기자들도 고개를 숙였다. 바삐 살다간 그에 대한 마지막 인사였다. 언론은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순직한 안수현 원장, 영결식 거행’ ‘중국서 순직한 안 원장 경기도청장 엄수’. 딸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훗날 청원서에 이렇게 썼다. “아빠를 잃은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었습니다.” 15일이면 꼭 3년이다. 이제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갔다. 공보실, 교통과장실, 자치국장실, 연구원장실…. 어디에도 그가 앉았던 흔적은 없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부쩍 줄었다. 그저 ‘성실히 살다가 순직한 어느 공무원’이 됐다. 그런데 그런 안 원장을 보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영결식장에서 오열하던 딸이다. 그 딸이 3년째 아버지 이름을 붙들고 있다. 보훈지청으로, 법원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우리 아빠는 순직이에요. 인정해주세요.” 돌아보면 언론의 오보(誤報)였다. 도지사의 조사(弔辭)도 틀렸다. 그의 죽음은 순직이 되지 못했다. 대한민국 보훈처가 그렇게 결정했다. 2014년 3월 18일자 보훈처의 심의 의결서엔 이렇게 적혀 있다. ‘고인을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제1항 제14호의 요건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하고, 보훈보상대상자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제3호의 요건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한다.’ 순직(殉職)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유는 이렇다. 국민의 생명ㆍ재산 보호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고 했다. 만찬 후 숙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만찬에서 먹은 술도 이유가 됐다. 백주 2병이었고 40도짜리였다고 했다. 8명이 나눠 먹었으니 안 원장의 음주량은 125㎖라고도 했다. 그의 10년치 치료 내역도 모두 깠다. 추간판 장애, 고혈압, 급성편도염, 손발톱 백선…. 사망 원인을 지병(持病)과 연관 짓는 전력 들추기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지병 있는 사람이 술 먹다 죽었다’다. 정말 그런가. 정말 안 원장의 사망은 업무와 무관한가. 정말 술 먹고 즐기다가 사망한 것인가. 숨진 곳은 중국 산둥성 행정학원 숙소다. 출장 목적은 경기도와 산둥성의 교류협력이었다. 직인(職印) 찍힌 공무(公務)였다. 만찬 자리도 그렇다. 8명이 참석했다. 한국인은 안 원장 등 3명이었다. 중국인은 5명이나 됐다. 가오위칭 서기, 아이쓰퉁 부원장, 천샤오, 두장센, 좡칭타오…. 안 원장이 빠질 수 없는 밥 자리였다. 병력(病歷)은 어떤가. 대한민국 59세 남자 직장인이다. 디스크, 고혈압, 편도선…. 급사(急死)의 원인이라고 여길 병이 아니다. 한 달 뒤면 명예퇴직이었다. 그래도 그는 쉬지 않았다. 4월 3일엔 지구 반대편으로 갔다. 페루와 미국을 오가며 10일간 업무를 수행했다. 곧바로 제주도 연수도 다녀왔다. 그리고 며칠 뒤 또다시 중국으로 갔다. 하나같이 목적이 분명한 공무였다. 돌아보면 가족을 맘 아프게 하는 모습이 있다. 떠나던 날 새벽, 안 원장이 남긴-결국 유언이 되어 버린- 말이다. “힘들다. 안 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는 갔고 협약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숨졌다. 이런 죽음에 대한민국은 ‘순직’ 한 마디를 붙여주지 않는다. ‘죽을 병’이 있었다며 10년치 병력까지 들춘다. ‘술 때문에 죽었다’며 술 몇 잔의 알코올 도수까지 계산한다. ‘근무 시간 아니다’며 5시 환담과 6시 만찬을 분초로 가른다. 그러면서 ‘유족의 거증(擧證) 책임’을 말한다. ‘억울하면 유족이 입증하라’는 얘기다. 이런 대한민국 앞에 ‘35년 공직자’의 딸은 무기력해지고 있다. 보훈처에서는 이미 졌고, 민사재판도 이제 대법원 최종심만 남았다. 하필 가정의 달이다. 3년 전 5월이나 올 5월이나 딸에겐 힘든 가정의 달이다. 그때는 아빠 죽음에 힘들었고, 이제는 아빠 명예에 힘들다. 그래서인지, 청원서 마지막에 공무원 안수현이 아닌 아빠 안수현의 모습을 적었다. “가정에서는 그리 좋은 아빠는 아니었습니다…활동도 둔해지시고 잠이 많아진 아빠를 보면서 가족 모두에겐 하루하루가 고비였습니다…그래도 맛있는 음식, 좋은 장소는 가족과 함께 하길 바랬던 참 마음 약한 아빠였습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맨 앞에는 지금도 이렇게 적혀 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보훈 가족 여러분들을 섬기겠습니다. 보훈은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정신적, 사회적 인프라입니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道 규제 강화, 여전히 더민주의 입장인가

(동의할 수 없다. 그런데 하필 11일이다. 이틀 있으면 선거다. 일단 적어놓기로 하자.) “수도권 규제 완화는 전부 아니면 전무, All or nothing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새누리당은 자꾸만 수도권과 지방을 상극의 싸움으로 몰아넣고 있다.” 김진표 후보가 말했다. 틀렸다. 규제 논란은 더민주당이 시작했다. 충청도에서 불을 지폈다. “수도권을 옥죄어야 한다”고 했고 “완화된 것도 되돌리겠다”고 했다. 충청을 위해 수도권을 희생 삼겠다는 거였다. 이야말로 ‘All or nothing’이다. 지역을 극단으로 쪼개는 상극적 발상이다. (동의할 수 있다. 같은 11일이다. 역시 선거 이틀 전이다. 이것도 적어만 놓기로 하자.) “상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방이전이 가능한 산업은 규제를 유지하고 해외로 빠져나갈 산업은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 역시 김 후보의 얘기다. 옳은 말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보낼 것은 보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시설이 내려갔다. 농업도 갔다. 기관도 갔고 정부까지 갔다. 보내면 안 될 걸 보낸 게 문제다. 그런 게 엉뚱한 곳으로 갔다. 중국으로 갔고, 동남아로 갔다. 그의 말대로 합리적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선거는 끝났다. 수도권 규제 논란도 사라졌다. 갑자기 철 지난 얘기가 됐다. 선거판을 그토록 달궜었는데…. 새누리당은 규제 논란에 목청을 높였다. 경기도 이익을 홀로 지키는 듯 외쳤다. 그러다가 선거에서 졌다. 그러자 입을 닫았다. 더민주당은 그때도 말하지 않았다. 당 대표의 영(令) 앞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러다가 크게 이겼다. 이제는 말할 필요가 없어졌다. 승자의 위력 앞에 누구도 따져 묻지 못한다. 새누리당은 져서 입 닫았고, 더민주당은 이겨서 입 닫았다. 도민의 생존 문제인데 그렇게 묻혔다. 그러던 엊그제, 그 문제가 다시 나왔다. 새누리당이 아니다. 김진표 당선자가 꺼냈다. ‘(경기도의) 2기 연정을 통해 해결해야 할 의제는 수도권 규제 합리화다.’ 발언한 자리가 다소 어색하다. 도지사 공관(굿모닝 하우스)에서다. 남경필 지사와 총선 당선자와의 상견례 자리였다. 상견례라는 게 늘 그렇듯 그저 덕담하고 끝나면 된다. 다른 참석자들은 ‘협치로 가자’며 좋은 말만 했다. 그런데 김 당선자는 덕담 대신 ‘수도권 규제 합리화’를 말했다. 경기도정의 향후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까지 했다. 아주 특별했던 소감이다. 이쯤 되면 그의 소신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많은 도민이 김 당선자를 주목한다. 사실 그리 반길 논리도 아닌데 그런다. 그가 내놓은 합리적 수단은 첨단산업유치법이다. 대기업 유치를 위한 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결국엔 또 하나의 특별법이다. 수도권을 규제하는 ‘특별법’ 위에 ‘또 다른 특별법’을 얹겠다는 것이다. 바꿔 들으면 1차 특별법은 손대지 않겠다는 의미다. ‘확’ 풀어달라는 도민 뜻과 다르다. ‘풀지 않겠다’는 당(黨) 논리에 가깝다. 그도 ‘규제 완화’ 대신 ‘규제 합리화’라는 말을 줄 곳 사용하고 있다. 이런데도 도민들은 그에게 기대를 보낸다. 그라도 나서 방향을 바꿔주길 바라서다. 때론 공약(空約)이 간절할 때도 있다. 작은 희망이 큰 바람에 휩쓸려 갔을 때다. 이번이 그랬다. 수도권 이익이 정권 심판에 묻혀 갔다. 규제 강화를 말한 더민주당이 1등 됐다. 이러다 보니 도민들이 공약(空約)을 기다린다. 규제 강화 약속이 없던 것으로 되기를 바란다. 그저 투표와 함께 사라진 공허한 캐치프레이즈이길 바란다. 이 옹색한-차라리 비굴하기까지 한- 경기도민의 기대 속에 김진표식(式) 수도권 규제 합리화가 있다. 선거 5일 전 칼럼은 ‘道 규제 강화, 정말로 더민주의 공약인가’였다. 선거는 끝났고 세상은 바뀌었다. 하지만, 칼럼의 제목은 바뀌지 않는다. ‘道 규제 강화, 여전히 더민주의 입장인가’.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道 규제 강화’, 정말로 더민주의 공약인가

‘민심이 발칵 뒤집혔다’고 썼다. ‘내부에서 부글거린다’고도 썼다. 부산지역 신문들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민심이란 부산민심이다. 내부라 하면 새누리당 내부를 말한다. 대구 조원진 후보(새누리)의 발언에서 시작됐다. ‘대통령의 선물 보따리’라 했고 ‘대구 신공항’이라고 했다. ‘밀양 신공항’을 얘기한 것으로 해석됐다. ‘가덕도 신공항’을 학수고대하던 부산이 들고 일어났다. 부산민심이 뒤집혔고 새누리당이 부글댔다. 여기엔 다른 목소리가 없다.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이 총공세에 나섰다. 새누리당 부산 후보들을 싸잡아 성토했다. 새누리당도 지지 않았다. 5일 부산상공회의소로 부산의 모든 후보들이 모였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 서약식’을 거창하게 가졌다. 대구(밀양)에 맞서 싸우는 부산(가덕도)의 신공항 전투다. 부산의 미래가 걸린 이 전투에 정당은 없다. 모든 정당들이 똑같이 ‘가덕도 신공항’을 약속하고 나섰다. 선거란 게 이렇다. 경기도에도 현안이 있다. 수도권 규제 완화다. 부산의 가덕도와 닮았다. 가덕도 신공항 유치는 부산을 살리는 일이다. 수도권 규제 완화는 경기도를 살리는 일이다. 그런데 정치는 다르다. 부산 정치는 가덕도 신공항에 한목소리를 낸다. 경기도 정치는 수도권 규제에 다른 목소리를 낸다. 풀자는 목소리도 있고, 풀면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더민주당은 풀면 안 된다는 목소리다. 지금도 충청도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충남도당이 내놓은 공약이 ‘완화된 수도권 규제를 원상 복구하겠다’다. 지금 규제는 성에 안 차니 ‘더 강화하겠다’고도 한다. 충청도당만의 구호였으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다. 당 대표도 ‘수도권 규제 완화로 지방이 피폐해진다’고 말했다. 경기도 심장에 와서도 그런 말을 했다. 경기도 기자들 앞에서 ‘규제 완화는 안 된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그렇다고 뭘 가져가겠다는 얘기도 없다. 하기야 가져갈 것도 없다. 참여정부 이후 수도권에서 나간 기관, 기구가 수두룩하다. 부산으로 13개, 대구로 11개, 광주ㆍ전남으로 15개, 울산으로 10개, 강원으로 12개, 전북으로 13개, 경남으로 11개, 제주로 10개가 갔다. 충청권으로는 무려 57개가 갔다. 빠져나간 민간 기업의 수는 여기에 넣지도 않았다. 갈 수 없는 게 아니라 가져갈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 뭘 더 옥죄겠다는 건가. 국토균형발전론을 토론하려는 게 아니다. 경기도 표심에 대한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경기도에 승패를 건다면서 경기도의 규제 강화를 약속하나. 옛날엔 이러지 않았다. 수도권에 줄 선물도 챙겼었고 예의도 차렸었다. 2012년 10월 22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가 경기ㆍ인천 기자들과 만났다. 거기서 문 후보는 경제수도론을 던졌다. 경기북부는 평화경제로, 경기남부는 지식경제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경기ㆍ인천 언론이 크게 보도했다. 모든 공약이 그렇듯 믿음이 가는 약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기ㆍ인천 유권자들은 그것도 선물이라며 받고 좋아했다. 지금 그런 게 없다. 냉혹하게 자르고 간다. 당이 이러니 후보들도 그렇다. 경기일보가 후보들에게 ‘수도권 규제’를 물었다. 더민주당 후보의 37%가 ‘규제를 풀면 안 된다’고 답했다. 이런저런 단서를 달았지만 결국 ‘안된다’였다. 부산 후보에게 ‘가덕도 신공항’을 물었더라면 어땠을까. ‘유치하겠다’는 답 하나였을 거다. 경기도는 아니었다. “규제 완화를 고민해야 한다”는 안민석 후보의 긴급 논평이 되레 당내 반항처럼 들렸다. 여기엔 자신감이 있는 듯 보인다. 경기도 표심은 특이하다. 규제 완화라는 화두에 흔들린 적 없다. 수도(首都)를 빼겠다는 후보에게도 가장 많은 표를 던졌었다. 충청도 할아버지, 전라도 아버지가 만드는 8도 표밭이어서다. 이번에도 ‘규제’ 화두는 미풍도 못 낸다. 오히려 더민주당의 지지도가 올라가고 있다. 그렇게 보면 더민주당의 선택이 옳은 듯도 보인다. ‘경기도 쬐끔 잃고 충청도 왕창 얻자’는 지혜로운 셈법으로도 보인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서 도민의 상처가 크다. 도민 숙원이 정치 셈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이 더 서운하다. 아마도 이렇게 20대 총선이 끝날 것 같아 보여서 더 속상하다. 정치인 1명에게 4월 13일은 ‘행복한 하루’다. 하지만, 1,300만 도민에게 4월 13일은 여전히 ‘고단한 하루’다. 그 고단한 하루 속에 내 땅이 묶여 있고, 내 애들이 실직해 있다. 그 땅 때문에 개발 규제를 풀어달라는 것이고, 그 애들 때문에 공장 규제를 풀어달라는 것이다. 이런 도민의 뜻이 또 정치에 외면당하고 있다. 그것도 앞서 간다는 제1 야당에 외면당하고 있다. 2년 뒤 여당이 될 거라는 더민주당에 외면당하고 있다. 그렇다고 새누리당이 당 차원의 공약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결국, 또 하나의 헛소리-‘어느 정당이든 규제 좀 풀어 달라’-를 기록하는 듯 하다.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포천시장은 견뎌도, 포천시민이 못 견딘다

대법원의 법리(法理) 검토란 이런 거다. 범죄의 행위는 들춰보지 않는다. ‘했느니’ ‘안 했느니’는 논외다. 그 행위의 결론은 이미 1, 2심에서 걸러진다. 그 행위와 형(刑)의 적용이 법 이론에 맞는지만 따진다. 서장원 포천시장의 성추행 사건도 그렇다. 성추행 행위에 대한 판단은 2심으로 끝났다. 사건 무마 시도도 사실로 판명났다. ‘피고인의 성추행 행위가 없었다’는 대법 판결은 나올 시스템이 아니다. 애초 법리는 시민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성추행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였다. 2014년 12월 24일만 해도 시민은 서 시장을 믿었다. 경찰에 나온 그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그렇지’라는 안도가 많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 후로 입을 닫았다. 성추행은 사실로 굳어갔다. 법치(法治)의 보루인 재판부도 성추행을 사실이라고 결론 냈다. 현직 시장의 여성 성추행, 시장실에서의 범행, 입막음용 수천만원 전달…. 이런 참담한 죄명을 쓰고 현직 시장이 구속됐다. 10개월간 수의(囚衣)를 입고 지냈다. 성폭력 치료를 받으라는 명령도 받았다. 성범죄 우범자 명단에도 올랐다. 성범죄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까 보는 명단이다. 이런 판결이 나오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재판부의 판결을 존중한다.” 법원 판결이 맞고, 성추행을 인정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반성의 길을 얘기할 거라고 봤다. 그런데 뒤에 붙은 말이 묘했다. “판결에 대해서는 억울한 부분도 없지 않아, 보다 더 심도 있는 공정한 법의 판단을 받을 수 있도록 대법원에 호소하겠다.” 뭐가 억울하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판단 받겠다는 게 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면서 그가 간 곳이 시장실이다. 17만 시민을 대표하는-판결문에 성추행 범죄 장소로 명시돼 있는- 그 시장실로 갔다. 그리고 계속 근무한다. 억대 연봉도 계속 받는다. 판공비도 계속 쓴다. 인사권도 계속 휘두른다. 포천시 행정도 계속 지휘한다. 그 행정 속엔 성범죄자로부터 포천의 부녀자들을 지켜야 할 안전 행정도 포함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더 이상한 일이 생겼다. 이번엔 형제들의 땅 투기 논란이다. 2014년 포천시가 관내 땅을 용도 변경했다. 이 땅이 아파트 부지로 바뀌었다. 맹지에서 금싸라기로 변한 셈이다. 부동산 업자들은 이 땅의 시세차익을 서너 배로 본다. 이 땅 일부에서 서 시장 형제들의 이름이 나왔다. 근처 땅을 2012년 말에 사 둔 모양이다. 한 마디로 대박이다. 동물적 감각이라도 있는 형제들인가. 아니면 앞날을 보는 예지력이라도 있는 건가. 경찰은 ‘정보 유출에 의한 투기’에 방점을 찍었다. 이쯤 되면 나와야 할 시장의 입장이 있다. “형제들은 땅을 사지 않았다. 정보를 유출한 사실도 없다. 경찰의 표적 수사다.” 그런데 이번에도 말이 없다. 성추행 때처럼 입을 닫았다. 형제가 땅을 산 게 맞는 것 같다. 이제 포천시민은 또 한 번의 못 볼 꼴을 봐야 할 처지다. 주변 사람들이 불려 가고, 애먼 공무원들이 끌려가고, 시청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엊그제였나. 서 시장이 학생들 앞에 섰다. 장학금 수여식이었다. 초ㆍ중ㆍ고생 131명에게 장학금을 줬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다. 초ㆍ중ㆍ고 8개교 교사들에게도 장려금을 줬다. 열심히 가르친 교사들이다. 그들 앞에서 이렇게 훈시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비롯해 장학금을 후원해주신 지역 여러분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혼신을 다해 학업에 정진해 주길 바랍니다.” 포천의 미래를 짊어질 어린 애들인데. 그 애들에게 ‘성추행 피고인 서장원’의 훈시가 과연 필요했을까. 세상에 뇌물 먹고 감옥 가는 시장은 많다. 하지만, 성추행하고 감옥 간 시장은 없다. 세상에 가족범죄로 조사받는 시장은 많다. 하지만, 성범죄까지 겹친 시장은 없다. 그는 세상을 향해 “나만 그랬느냐”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향해 “당신이 처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서 시장에겐 하루라도 버티고 싶은 시장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민에겐 단 하루도 보고 싶지 않은 시장실이다. 2년 전 그는 55.82%의 지지를 받았다. 2년 뒤 그 55.82%가 참담하게 배신당했다. 이 배신의 대가는 대법원이 아니라 서장원 시장이 갚아야 할 몫이다. 사퇴(辭退)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낙후된 권선구? 권선구민 자업자득이다 -수원을 선거구-

후보 등록장에서 둘이 만났다. 김진표 후보가 덕담을 건넨다. “김상민 후보가 젊고 미남이어서 선관위 직원이 말을 잃은 것 같다.” 김진표 후보는 수원무에 출마했다. 김상민 후보는 수원을이다. 싸움터가 다르다. 그래서인가, 여유가 보인다. 하지만, 칭찬만으로 끝낼 김진표 후보가 아니다. “김상민 후보 위장전입 아닌가 서류 잘 봐주세요.” 농담치곤 묵직한 뼈가 들어 있다. 언론도 이 농담을 비중 있게 다뤘다. 김상민 후보가 가장 아픈 곳이다. 꽤 오랜 기간 김 후보가 뛴 곳은 장안구였다. 큼직한 현수막이 걸린 곳도 장안구 대로(大路)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옮겼다. 당 원내대표가 그렇게 제의했다고 한다. 김 후보도 ‘수원을로 가겠다’고 받았다. 그때가 3월 7일이다. 후보 등록일로부터 17일 전, 선거일로부터 36일 전이다. 이런 걸 낙하산이라 한다. 상대 당이 놔둘 리 없다. 김진표 후보의 ‘위장전입’ 농담도 그거였다. 그런데 말이다. 낙하산에 관한 한 상대 후보는 할 말이 없다. 재ㆍ보궐 선거를 앞뒀던 2014년 6월 26일. 백혜련 후보가 기자회견을 했다. “(정치 시작을) 제2의 고향, 검사로서의 첫 임지였던 수원 영통에서 하고자 한다.” 영통주민을 만났고 명함도 돌렸다. 법원 사거리에 현판도 걸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수원을로 옮겼다. 당 지도부가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가 7월 9일이다. 후보 등록일로부터 하루 전, 선거일로부터 20일 전이었다. 시기(時期)로는 기록적이다. 오십보백보요 초록이 동색인 것을, 누가 누구를 비난하나. 이런 취급받을 권선구가 아니다. 칠보산 자락마다 시민의 추억이 서려 있다. 학창 시절 소풍의 기억이 대부분 칠보산이다. 서울대 농대 금잔디 마당은 시민들의 나들이 공간이었다. 최고 대학을 가진 주민의 자부심이 컸다. 농촌진흥청은 대한민국 농업의 중심이었다. 툭하면 대통령 헬기가 착륙하던 권력의 중심이었다. 추억, 자긍심, 권력의 역사가 함께하던 곳이었다. 그런 권선구가 십수 년째 쇠락하고 있다. 공교롭게 그 쇠락의 시기에 정치가 맞물려 있다. 길을 잃은 정치가 있다. 신현태(16대ㆍ2000)-이기우(17대ㆍ2004)-정미경(18대ㆍ2008)-신장용(19대ㆍ2012)-정미경(재선거ㆍ2014)으로 바뀌어왔다. 현역이 빠졌으니 또 바뀔 것이다. 16년간 국회의원이 다섯 번 교체 된 곳, 그 다섯 번 중 한 명도 연임하지 못한 곳. 여기에 선거구 획정 때마다 이리저리 휘둘려 온 곳. 정치가 이랬으니 동네가 잘 될 리 있나. 이런 권선구에 또 선거가 왔다. 후보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다. 김상민 후보는 수원 토박이임을 내세운다. 현역(비례대표) 경험을 앞세워 권선구 발전을 장담한다. 백혜련 후보는 지역의 선점자임을 내세운다. 화장장, 비행장문제에 쏟아온 열정을 자랑한다. 이대의 후보, 박승하 후보의 목소리도 크다. 참 식상하다. 언제적 비행장 얘기고, 권선구 발전인가. 누가 그런 말은 못하나. 지나간 국회의원들도 다 그렇게 말했었다. 그 결과가 여전한 낙후도시고, 여전한 소음도시다. 정치만 탓할 것도 아니다. -맞아 죽을 각오로 말하면-권선구민의 자업자득이다. 주인 의식 없이 치러왔던 권선구 선거의 결과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시민이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정치인이다. 정치인의 권력이 시민을 지배한다. 이런 권력자를 뽑는 작업이 투표다. 그래서 다수의 학자가 말한다. ‘시민이 민주주의의 주인 되는 날은 선거일 단 하루뿐이다.’ 수원을도 이 법칙 속에 있다. 권선의 주인은 권선 국회의원이다. 권선 국회의원이 권선을 지배한다. 그런 권선의 권력자를 뽑는 것이 투표다. 16년을 망쳐 온 권선구민이라면 이번이라도 눈치 채야 한다. ‘권선구민이 권선 주인 되는 날은 4월 13일 딱 하루뿐이다.’ 달라야 한다. 정치 따지고, 고향 따지면서 엉뚱하게 뽑아선 안 된다. 조금이라도 능력 있고, 조금이라도 오래갈 후보를 뽑아야 한다. 다른 데선 말한다. ‘수원갑 총선에 장안구의 미래가 달렸다. 수원병 총선에 팔달구의 미래가 달렸다. 수원정 총선에 영통구의 미래가 달렸다. 수원무 총선에 남수원의 미래가 달렸다.’ 그런데, ‘못 사는 동네’ 수원을은 다르다. 4ㆍ13 총선에 현재가 달렸고, 집값이 달렸고, 생계가 달렸다. 본디 권선구는 위대했다. 그때로 돌아가는 선택을 해야 한다. 최선(最善)에의 미련을 버리고 차선(次善)을 찾으려 들여다 보면 된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한선교 vs 이우현, 극과 극의 두 남자 -용인병 선거구-

80년대 이전 수지는 가난했다. 덜컹대는 시외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어쩌다 오는 이 버스가 도시로 향하는 통로였다. 광교산 자락 동네마다 각기 다른 공동체가 자리했다. ‘수지국민학교’ ‘고기국민학교’ ‘대지국민학교’, 그리고 ‘문정중학교’가 교육의 전부였다. 소작 농업, 배급 가정, 결식 아동…. 지금은 특별하게 여겨지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이 당시 수지에는 일상이었다. 50대 이상 원주민에게 남아 있는 기억이다. 이우현 후보(더불어민주당)가 그 중심에 있다. 주변인들이 기억하는 이 후보의 어릴 적 별칭은 ‘가난한 집 아이’다. 가난한 수지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 아이였다. 배급받은 밀가루로 아침을 때웠다. 그의 도시락을 본 친구가 없다. 4교시가 끝나면 교실을 뛰쳐나왔다. 수돗가 물로 배를 채우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잃었고 붙여 먹던 소작농도 끊겼다. 비 새는 초가지붕 이엉을 동네 청년들이 고쳐줬다. 이 후보가 정치를 한 것도 그 가난 때문이다. 모두 떠난 고향을 홀로 지켰다. 새마을지도자로 동네 심부름을 도맡았다. ‘먹고 살만해지자’ 결식 아동 돕기에도 나섰다. 이런 그를 보고 주민들이 정치를 권했다. 어릴 적 먹여 살려준 지역이 베푼 또 한 번의 은혜였다. ‘가난했던 추억’에 대한 뿌리 깊은 지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싹쓸이하던 선거 때도 그는 매번 당선됐다. 지금도 그의 첫 번째 자랑은 ‘수지 출신 시 의장’이다. 90년대 이후 수지가 달라졌다. 수지지구가 개발되면서다. ‘제2의 분당’이라 불리며 사람들이 몰려왔다. 신봉리에는 신봉지구가 섰고, 성복리에는 성복지구가 섰다.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세무 조사…. 강남ㆍ분당의 고유명사였던 단어들이 수지지구에 등장했다. 중학교가 늘었고 고등학교도 생겼다. ‘수지고등학교’는 언제부턴가 경기 남부 최고 명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수지구 주민들에겐 대한민국 최고 도시라는 자부심이 있다. 한선교 후보(새누리당)가 그 중심에 있다. 애초부터 ‘스타’였다. ‘아침 만들기’(MBC), ‘좋은 아침’(서울방송)을 진행했다. TV 앞 주부들에게 그는 최고의 아이콘이었다. 그가 2004년 3월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정치 기자들 사이에 박지만씨와의 특별한 관계가 알려지지 시작했다. 서울 출신, 인기 방송인, 세련된 외모까지. 도시적 이미지를 온몸으로 풍기며 등장한 그가 17대 총선에서 수지를 택했다. 수지구민들이 환영하며 만든 당선이었다. 18대 총선은 그에게 특별했다. 친박(親朴) 성향이 발목을 잡았다. 친이(親李)의 표적이 되면서 공천에 탈락했다. ‘살아 돌아가겠다’며 무소속을 택했다. 탈락한 친박 여럿도 같은 길을 택했다. 하지만, 실제 살아 돌아간 건 그였다. 정당ㆍ기호 정치 속 기적이었다. ‘한선교=수지구’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게 그때부터다. 당내 경쟁자든, 상대 경쟁자든 그의 이름 앞에서 무력화됐다. 지금도 새누리당은 용인병을 ‘능히 이겨 줄 곳’으로 꼽는다. 한선교와 이우현. 20대 총선 용인병에서 맞붙은 두 남자다. 어디서도 찾기 힘든 극단의 대비다. 한쪽은 풍요로운 ‘수지구’의 상징이다. 다른 쪽은 가난했던 ‘수지면’의 상징이다. 한쪽은 세련된 ‘도시 남자’ 이미지다. 다른 쪽은 투박한 ‘농촌 남자’ 이미지다. 한쪽은 중앙 정치의 ‘권력 실세’라 불린다. 다른 쪽은 지역 정치의 ‘산 증인’이라 불린다. 지난 주말, 풍덕천 오거리에서 들어본 여론도 둘 만큼이나 극명하게 갈렸다. “역시 수지에는 한선교 후보가 필요하다”(한선교 지지). “이제 수지를 아는 이우현 후보가 필요하다”(이우현 지지). “시 의장만으로는 국정능력이 안 된다”(이우현 비판). “국회의원 3번 하더니 건방져졌다”(한선교 비판). 용인병 예비후보: 한선교(새누리당)ㆍ이우현(더불어민주당)ㆍ김해곤(국민의당)ㆍ하태옥(정의당)ㆍ정익철(무소속)-2015년 3월 21일 현재 선관위 등록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정미경·김진표, 누가 더 능력자인가 -수원무 선거구-

영통 아줌마가 말한다. “우리가 왜 비행장 이전 얘기를 들어야 하냐구요.” 권선 아저씨가 말한다. “오지도 않는 전철 급행 얘기를 왜 들어야 하냐구요.” 그만큼 수원무가 엉터리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떼어다 붙였다. 권선구에서 6개 동, 영통구에서 2개 동을 추려(?) 갔다. 생활권도 다르고, 이슈도 다르다. 그런 동네에서 한 명만 대표자로 뽑으라 한다. 이러니 나오는 당선 공식이 동네마다 제각각이다. 어디선 구(舊) 선거구별 인구를 기준 삼는다. 2년 전 권선구민들은 정미경 후보를 택했다. 2008년 18대 총선 때도 그랬다. 그 권선구민들이 수원무에 16만2천816명 들어왔다. 4년 전 영통구민들은 김진표 후보를 택했다. 2004년 17대부터 쭉 그랬다. 그 영통구민들도 수원무에 9만9천561명 포함됐다. 62%가 옛날 정 후보 동네 사람이고, 38%가 옛날 김 후보 동네 사람이다. 정 후보가 이기는 공식이다. 어디선 지역 연고(緣故)를 기준 삼는다. 정 후보는 수원 출신이 아니다. 2008년 래수(來水) 해서 국회의원이 됐다. 타지(他地) 출신의 수원 입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김 후보는 4살 때부터 수원서 살았다. 출신 중학교도 그 언저리다. 2004년 귀향(歸鄕)해서 국회의원이 됐다. 그의 이름 앞엔 언제나 ‘수원출신 최초의-’라는 형용사가 붙는다. 권선구엔 유독 수원출신이 많다. 김 후보가 이기는 공식이다. 두 공식대로면 선거는 끝난다. 그런데 그럴 것 같진 않다. 두 공식 무너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새누리당 권선구 당원 일부가 정 후보를 반대하고 나섰다. 정 후보로선 믿었던 동네에서 얻어맞은 한방이다. 김 후보의 연고 셈법에도 ‘반란’의 조짐이 꿈틀댄다. 8도(道) 집합소 영통구의 독특한 분위기다. 지금도 영통주차장은 명절 때마다 텅 빈다. 언제든 타지역 출신 정 후보에게 손 내밀 표들이다. 그래서 두 공식은 답이 아니다. 결국, 바람직하면서도 유일한 공식이 남는다. ‘능력 대결’이다. 정 후보는 능력자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이다. 인기 없는 소위지만 자청했다. 국방대학원에 다니며 전문지식도 공부했다. 군 전력(戰力) 문제, 장병 복지 문제 등을 앞장서 해결했다. 그러나 국방위에 자리 튼 그의 진짜 목적은 비행장 이전이다. 군(軍)에 파고들어가 비행장을 옮기겠다는 전략적 선택이다. 그만이 갖고 있는 권선구 현안에 최적화된 능력이다. 여기에 집권 여당 소속이라는 덤까지 있다. 김 후보도 능력자다. 부총리를 두 번 했다. 한국 경제를 관리했고, 한국 교육을 총괄했다. 관료 출신의 최대 무기는 인맥이다. 경제부처와 교육부처에 연결 지어진 그의 인맥이 대단하다. 특히 경제부처 내 ‘김진표 마피아’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권력이다. 그와 연 맺은 차관, 실ㆍ국장들이 중앙부처마다 수두룩하다. 비행장 이전도, 분당선 급행화도 돈이 관건이다. 그 돈의 맥을 잘 아는 이가 김 후보다. 이만하면 남 부러워할 능력자들 아닌가. 전국 유일의 무(戊). 돌아봐도 수원무 획정은 엉터리다. 유권자를 무시했고 행정을 무시했다. 그런데 그런 수원무에서 선거문화 혁신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인정(人情) 선거, 인연(因緣) 선거를 끝내고 정책(政策) 선거, 능력(能力) 선거로 갈 수 있을 거란 역(逆)을 본다. 그렇게 기대해도 좋을 소재는 던져졌다. 가장 성실하고 가장 능력 있다는 후보들이 모였다. 누가 당선되든 수원무의 선택은 당당할 듯하다.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다. 4월 13일 그날 저녁. 기자들은 수원무로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정미경 당선’ 또는 ‘김진표 당선’을 메인 뉴스로 타전(打電)할 것이다. 그러면서 수원무는 ‘버림받은 지역구’에서 ‘부러움 받는 지역구’로 바뀔 것이다. 능력 있는 후보 중에 더 능력 있는 후보를 제대로 골라낸 모범적인 선거구가 될 것이다. 인구 26만2천377명의 선택. 수원무의 4ㆍ13 게임은 ‘누가 더 능력자인가’다. 수원무 후보자: 정미경(새누리당)ㆍ김진표(더불어민주당)ㆍ김용석(국민의당)ㆍ김식(민중연합당)ㆍ김현우(무소속)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新도심 vs 舊도심 vs 本도심 -수원정 선거구-

매탄과 영통은 원래 안 맞았다. 수원의 적자(嫡子)라는 자부심과 신수원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충돌했다. 영통이 들어선 90년대 후반부터 계속된 현상이다. 신도시가 생길 때면 으레 형성되는 신ㆍ구도심 간 갈등이기도 했다. 공교롭게 표의 분포도 절묘했다. 매탄동 인구와 영통동(영통 1동ㆍ영통 2동) 인구가 엇비슷했다. 그 속에서 매번 정치는 긴장했다. 매탄과 영통을 위한 공약을 따로 준비했다. 영통과 광교도 불편하다. 수원고법 유치 때 불거졌다. 영통으로 거론되던 고법부지가 광교로 변경됐다. ‘빼앗긴 영통, 빼앗은 광교’라는 앙금이 생겼다. 분당선과 신분당선의 전철 갈등도 컸다. 분당선 개통의 영통 특수가 신분당선이 개통되면서 광교로 옮겨갔다. 선거구 획정을 두고도 양쪽 감정은 재연됐다. ‘싸워서 영통을 지키자’는 댓글(영통)과 ‘이참에 광교구로 바꾸자’는 댓글(광교)이 충돌했다. 세 지역의 정서가 이렇게 다르다. 여기가 수원정 선거구다. 한 지붕 세 가족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지역에 따라 표도 천차만별이다. 수원정의 전체 인구는 24만명이다. 매탄 네 개 동이 10만4천566명, 원천동이 2만5천313명, 광교 두 개 동이 6만5천756명이다. 영통 2동이 수원무로 빠져나간 영통 1동은 4만4천414명이다. 인구 비율은 매탄ㆍ원천-본도심- 54%, 광교-신도심- 27%, 영통-구도심- 18%다. 4년 전만 해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 광교 신도시를 생각 없이 묶으면서 복잡해졌다. 이제 후보에겐 세 지역을 공략할 최대 공약수가 필요해졌다. 신도심도 맞추고, 구도심도 챙기고, 본도심도 껴안을 공약이 필요해졌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 보인다. 최대 공약수는커녕 잘못했다간 한 방에 날아가게 생겼다. 특정 지역 득표가 다른 지역 감표로 돌변할 수 있게 생겼다. ‘경기도청사 이전’ 문제가 딱 그 짝이다. 4년여를 끌었던 이슈다. 광교 입주민들의 애를 어지간히 태웠다. 그러던 게 작년에 잠잠해졌다. 경기도가 정리했다. 청사 부지를 조정해 건축비를 만드는 안(案)을 냈다. 이를 밀어붙인 책임자가 박수영 행정부지사다. 그때부터 박 부지사에겐 ‘청사 이전 해결사’란 별칭이 붙었다. 그가 공복(公服)을 벗고 출마했다. 새누리당 옷을 입자마자 유력 반열에 올랐다. 지금 광교 인터넷에서는 그가 갑(甲)이다. 그런데 이게 패착일 수 있다. 청사 이전은 광교만의 이슈다. 영통과는 상관없다. 되레 시야 밖으로 벗어날 수 있다. 최근 2년여 간 광교는 급성장했다. 같은 기간 영통은 뒤로 갔다. 늘 있어오던 신ㆍ구도심 간 역학관계다. 물론 그 속에서 갈등도 자랐다. 광교에 대박 공약이 영통엔 쪽박 공약일 수 있다. 이를 모를 박광온-또는 김명수 또는 박원석- 후보가 아니다. 영통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그게 보인다. 이러다 보니 결론은 매탄ㆍ원천동이다. 매탄ㆍ원천동을 잡는 게 관건이 됐다. 54%라는 막강한 표 외에 다른 의미도 있다. 광교에 섭섭하고, 영통에 섭섭했던 매탄ㆍ원천동의 정서다. 불꽃을 그어 댈 폭탄과도 같다. 이를 눈치 챈 후보들이 매탄ㆍ원천동을 뛰고 있다. 박수영 조직, 박광온 조직이 충돌하고 있다. 때마침 27.2% 대 26.7%로 갈라선 여론이 후보들을 애태우고 있다(케이엠 조사ㆍ경인일보 발표). 다들 20대 선거구를 최악이라고 한다. 숫자 놀음이 지역을 버렸고, 정치 타협이 행정을 버렸다고들 한다. 지금의 수원정이 그렇다. 숫자 놀음에 광교가 엮였고, 정치 타협에 영통이 쪼개졌다. 선거구가 이러니 선거도 최악이다. 버릴 곳과 챙길 곳을 고르게 만들었다. 버려질 유권자와 챙겨질 유권자를 가르게 만들었다. 신도심, 구도심, 본도심…. 어쩌면 이 중 한 곳은 버림받은 4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선거판은 냉정하다. 어차피 학자(-Why)가 아니라 기술자(-How)들이 뛰는 판이다. 그 기술자들이 수원정에 내린 정답은 ‘매탄ㆍ원천=승리’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김종인의 逆무기

선거판의 금기(禁忌)라 한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나 행위다. 햇볕 정책을 건드리는 것과 노인을 건드리는 것도 그런 유(類)의 금기다. 특히나 야당엔 그렇다. 그런데 이 금기를 맘대로 넘나드는 정치인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다. 햇볕정책부터 건드렸다. “북한이 핵을 갖지 않았던 시점의 햇볕정책은 유효한 대북정책이었지만, 북한이 핵을 보유한 지금 대북정책은 진일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진일보 해야 한다’는 표현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개성공단도 폐쇄되고 대화 자체가 중단돼 버렸는데 대화가 영원히 중단돼선 안 되니 앞으로 가자는 얘기다. 뭐가 잘못됐나.” 25일 호남의 중심 광주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김종인의 광주 선언’이라 명명됐다. 햇별 정책은 곧 DJ(김대중)다. DJ의 철학(哲學)이자 유지(遺志)다. 햇볕 정책을 건드리는 건 곧 DJ를 건드리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호남 민심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종인 대표는 그걸 건드렸다. 미사여구를 빼고 보면 ‘철 지난 햇볕정책’이란 소리다. 통상 이 정도면 야당 대표에겐 자살골이다. 국민의당이 발 빠르게 파고들었다. 연일 김 대표를 공격했다. 박주선 최고위원은 아예 “새누리당과 연대하려는 짓”으로 몰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호남 민심이 그리 나빠지지 않는다. 당내에서도 발언을 문제 삼는 소리가 없다. 왜 그럴까. 복잡하게 보지 말자. 인지상정으로 풀면 된다. 김 대표는 전라도 사람이다. DJ는 전라도 상징이다. 지연(地緣)에 관한 한 둘에겐 동향의 피가 흐른다. 경상도에게 전라도가 ‘문딩이’라면 얻어맞는다. 하지만, 같은 경상도끼리 하는 ‘문딩이’는 애칭이다. 김종인에 흐르는 호남 DNA, 이것이 그에겐 햇볕정책을 쳐도 될 무기다. 아슬아슬한 게 또 있다. 연장자(年長者) 퇴출 분위기다. 현역 물갈이 기준이 마련됐다. 1차 컷오프, 2차 정밀심사다. 그런데 2차 심사 기준이 이상하다. 3선 이상의 50%, 초ㆍ재선의 30%를 무조건 대상으로 삼았다. 3선 이상 대부분은 60세를 넘는다. 정치적 다선(多選) 이전에 인간적 연장자다. 여기에 1차 컷오프 결과가 나왔는데, 당의 어른인 문희상(72), 유인태(69) 의원이 포함됐다. 졸지에 나이 먹은 게 죄(罪) 되는 당이 됐다. 어느 선거에서나 노인층은 지뢰밭이다. 잘못 건드리면 한방에 간다. 12년 전 정동영씨도 그랬다. “노인들은 선거장 안 나와도 된다”고 했다가 호되게 당했다. 해명도 안 통했다. 당 의장에서 쫓겨났다. 지금도 ‘정동영’ 검색어에는 ‘노인 폄훼’가 뜬다. 국민의당이 김종인 표 ‘3선 교체’를 흉내 냈다.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곧 당내 반발로 이어졌다. 3선의 김동철 의원(62)이 ‘나만 3선이냐’며 들고 일어났다. 당(黨)만 우스워졌다. 이것도 이상하다. 김종인 대표는 어떤 욕도 듣지 않는다. 되레 전권(全權)을 더 넘겨받았다. 왜 이럴까. 여기도 간단하게 풀어 보자. 그의 나이 77세다. 현역 국회의원 최고령이라야 75세(박지원ㆍ무소속)다. 원로 대우받던 문희상, 유인태도 동생뻘이다. 50대 안철수 대표가 ‘3선 연장자들 물러나라’면 노인 폄훼다. 하지만, 77세 김종인 대표가 ‘많이 한 애들은 나가라’고 하면 그냥 어른의 조언이다. 이 역시 77세 김종인의 무기다. 그가 느닷없이 등장했던 한 달 전. 다들 얼마 못 갈 거라고 했다. ‘바지 사장’만 하다가 끝날 거라고들 했다. 그런 그가 한 달을 넘겼다. 공천권까지 거머쥔 실세가 됐다. 더민주당의 여론까지 덩달아 올라갔다. 한 달 전 호남은 국민의당이었다. 이제 호남은 더민주당의 땅이다. 그는 지금 당권도 잡았고, 개혁도 잡았고, 여론도 잡았다. 물론 최종 평가는 이르다. 선거 평가는 언제나 소급(遡及)적이었다. 이기면 잘한 게 됐고, 지면 못한 게 됐다. 김종인 대표도 그렇게 평가될 것이다. 4월 14일 아침에야 최종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이란 형용사를 붙여 평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김종인 대표가 더 잘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새누리당보다 화끈하게 개혁하는 것 같고, ‘지금까지는’ 국민의당보다 확실하게 호남을 얻는 것 같다. 그 속에서 김종인만의 무기가 보인다. 전라도 출신-많은 이들에게 정치성장의 한계라 여겨졌던-이 하나고, 황혼의 늙음-많은 이들에게 사회참여의 한계라 여겨졌던-이 다른 하나다. 역(逆)에서 권력(權力)을 만들어내는 김종인 대표. 그에게서 고수(高手)의 향이 풍긴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세월호 부모님들께

아침 신문에 기사가 났습니다. 단원고가 교실 공사를 하는 모양입니다. 학교의 8개 공간을 교실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교장실과 교무실 등 선생님들의 공간이 바뀐다고 합니다. 음악실 컴퓨터실 과학실 특수교실 6개 등 학생들의 공간도 바뀌나 봅니다. 그러면 교장 선생님은 컨테이너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학생들은 과학 기자재를 교실로 들고 다녀야 하고, 시청각실에 모여 음악 수업을 해야 합니다. 신입생이 들어와섭니다. ‘기억교실’ 11개를 대체할 공간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대로 두고는 수업을 할 수 없습니다. 신입생 학부모들이 요구했습니다. 기억교실을 정리해달라고 했습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저지하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어제(23일)는 유가족 대표와 재학생 부모들이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학부모들은 기억교실 정리를 요구한 모양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떨지 압니다.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으신 분들입니다. 바로 어제 일처럼 2년을 살아오셨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은 다 잊고 갑니다. 함께 울던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남은 것은 갈수록 커져 가는 아이들의 빈자리뿐입니다. 그 마지막 체취가 남은 곳이 기억 교실입니다. 그런데 그 교실을 들어내라고들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후배들의 부모들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운해 마시고 미워 마십시오. 저분들도 여러분의 마음을 알 겁니다. 2년 전 그때, 틀림없이 함께 울었을 동네 주민들입니다. 잠겨 가는 에어 포켓의 끝자락을 보면서 가슴 절절히 기도했었을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사시는 곳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동네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맘 아파하고 함께 기도했을 이웃 주민들입니다. 그런 분들의 아들 딸 300명입니다. 스스로 선택해 시험치고 들어온 단원고가 아닙니다. 교육청이 그렇게 정해놓고 가라고 하니 들어온 학생들입니다. 그 학교 바로 옆에, 혹은 그 주변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게 이유입니다. 남들처럼 정상적인 수업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학실도 쓰고, 음악실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텅 빈 11개 교실을 보는 무서움은 덜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향한 여러분의 서운함, 모두가 압니다. 돈에 눈먼 어른들이 뒤엎은 배였습니다. 선장은 저만 살겠다고 보트 타고 도망쳤습니다. 교육청은 ‘전원 구조’라는 발표로 아이들을 두 번 죽였습니다. 이걸 받아 쓴 언론사는 ‘대형 사고 날 뻔’이라는 제목으로 억장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같이 여러분 가슴에 비수를 꽂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아닙니다. 여러분께 상처주지 않았습니다. 정치가 피를 먹고 자라는 콩나물이라 했던가요. 여러분의 아이들을 희생 삼은 정치가 있습니다. 노란 리본 달고 선거판을 누볐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장 됐고, 도의원 됐고, 시의원 됐습니다. 그 정치가 또 기웃거립니다. 기억 교실 논란에 은근히 올라타려 합니다. 4.13 총선에 4.16 세월호를 연결해 보려고 합니다.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불쌍한 애들 좀 그만 내버려두라’고 해야 합니다. 2년 전 그때. 수원의 유신고 3학년 8반 교실에서 이런 싸움이 있었습니다. 종교반 반장에게 아이들이 따졌습니다. “하나님이 어른들의 잘못을 벌준 것이냐.” “그런데 왜 죄 없는 애들을 데려간 것이냐.” “네가 하나님을 믿으니 대답해 봐라.” 반장은 대답하지 못했고 애들도 울었다고 합니다. 세월호 부모님들. 기억 교실은 이제 사라질 겁니다. 아이들의 체취도 사라질 겁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2년 전에 멈췄지만, 세상의 시간은 그렇게 2년 후에 와 있습니다. 어차피 떠나 보내야 할 아이들이라면 여러분의 손으로 하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결정하고 여러분이 거두셨으면 합니다. 여러분 아들이 공부하고 여러분 딸이 재잘거리던 교실입니다. 그 불쌍한 것들을 어떻게 남의 손으로 거두겠습니까.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반공통일관·反반공통일관

1954년 7월이다. 휴전되고 꼭 1년이다. 나라는 여전히 폐허였다. 그런 나라의 대통령이 미국에 갔다. 이발 좀 하라고 했지만 마다했다. “돈 얻으러 가는데 깔끔하면 누가 돈 주겠나.” 7월 28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 섰다. “소련이 수소탄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전에 미국 공군으로 하여금 소련의 생산 중심지를 파괴해야 한다.” 주제도 모르는 연설일 수 있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나라의 대통령이다. 누구더러 누구를 공격하라는 것인가.하지만, 이승만에겐 필요한 발언이었다. 그날 연설의 논리는 이랬다. ‘소련이 급성장하고 있다. 미국이 대비해야 한다. 그 행동을 시작할 곳은 극동이다. 한국이 충분한 인적 자원을 제공하겠다. 미국은 현금 현물 지원만 해 주면 된다.’ 연설에서 대통령은 ‘우리(We)’라는 표현을 반복했다. 미국과 한국을 반공이라는 매개로 묶었다. 훗날 혹자들은 이날의 연설을 ‘반공의 성전(聖戰)에 한국을 바치겠다는 반공 세일즈였다’고 정리했다.그렇게 국부(國父)에서 시작된 반공은 오래갔다. 5ㆍ16의 혁명 공약도 반공이었다. 반공으론 성에 안 차는 세상으로 변했다. 북한을 없애자는 멸공(滅共)통일관이 국민에게 교육됐다. 전두환 정권은 더 극단으로 갔다. “우리나라 국시(國是)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 지금 같으면 ‘깜’도 안 되는 연설이다. 그런데 이 연설문을 준비한 유성환의원에 쇠고랑이 채워졌다. 국부에서 군부(軍部)까지, 우리의 통일관은 반공통일이었다. 그 피와 사상이 박근혜 정부로 승계됐다. 그리고 이 정부를 보수(保守)가 받치고 있다. 이들에게 북핵은 청천벽력일 수 밖에 없다. 먹어야 할 적(敵)에게 먹힐 판이다. 뭐라도 해야 한다. 3대 세습 정권을 향해 전단도 날려야 하고, 김정은에 들어갈 돈도 씨를 말려야 한다. 북한의 명줄을 이어주는 개성공단 가동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가동중단 결정은 진작 했어야 할 만시지탄이다. 이 집단이 ‘개성공단 중단 찬성 60%’로 뭉쳤다.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전혀 다른 통일관을 정식화했다. 6ㆍ15 남북 공동성명 2항에 의미를 정리했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Confederation)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Soft Federation)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구체적 행동은 햇볕정책이 맡았다. 반백년 가까이 국시로 모셔졌던 반공통일이 한순간 퇴물이 됐다.좌익(左翼) 전력자의 사위가 대통령이 됐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라는 말입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이 우리 사회의 주류를 바꿨다. 반공통일관에 맞섰다가 20년간 징역 산 신영복 교수가 대학 강단으로 돌아왔다. 그의 혼(魂)이 담긴 서체 ‘처음처럼’이 국민 소주가 됐다. 국민 누구도 ‘좌빨 소주 안 먹겠다’며 ‘참이슬’을 찾지는 않았다. 그렇게 반백년짜리 반공통일관은 10년 간 반(反)반공통일관으로 대치됐다. 그 DJㆍMH의 계승자들이 지금의 야권(野圈)이다. 진보(進步)가 그들을 받치고 있다. 이들에게 북핵은 ‘이해해야 할 자위수단’일 수도 있다. ‘선거에 조심하라’는 김종인 대표의 경고 때문에 그 말을 아끼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개성공단 사태가 터졌다.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감정적 조치라고 비난한다. 선거를 앞둔 신(新) 북풍이라고 공격한다.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따진다. 이 집단 역시 ‘개성공단 중단 반대 40%’로 뭉쳤다. 개성공단 중단 찬성 60%, 개성공단 중단 반대 40%. 결국엔 반공통일관 60%, 반반공통일관 40%다. 2016년 대한민국에 통일관을 대입시켜 산출해 낸 수치다. 이 ‘60대 40’이 남들은 이해 못 할 한국을 만들었다. 핵무기가 터지고 미사일이 날아가도 한국은 다르다. 미국 정치는 만장일치지만 한국 정치는 갑론을박이다. 1만㎞ 밖 미국은 공포에 떨지만 40㎞ 안 서울은 표(票)에 떤다. 미국은 돈줄을 막았지만 한국은 햇볕을 더 주자고 한다. 이쯤 되면 앞날이 보인다. 안보(安保) 앞에서 단결하자? 대통령도 얘기하고 언론도 주장한다. 하지만, 안 될 것 같다. 계속 삐걱거릴 것 같다. ‘종북 좌파 통일관’ ‘꼴통 보수 통일관’이라고 욕하며 벌어진 틈새가 너무 크다. 거기에 합류한 여론의 덩치가 너무 거대하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10년보다도 훨씬 긴 시간을 ‘한 지붕 두 통일관’으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기나긴 통일관 충돌의 시작이 지금의 개성공단 논란일지 모른다. 한반도(韓半島)! 이 작디 작은 땅에 통일관만 3개다. 반공(反共)통일관, 반반공(反反共)통일관, 그리고 적화(赤化)통일관. 앞의 두 개로 남(南)은 쪼개져 있고, 뒤의 하나로 북(北)은 뭉쳐져 있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도태호 2부시장의 ‘힘’과 ‘짐’

뚫리기 전에는 논이었다. 그것도 절대 농지였다. 하필 그 논 양쪽에 단지가 들어섰다. 한쪽은 영통, 다른 쪽은 신영통이라 불렸다. 출퇴근 때마다 지역 전체가 마비됐다. 누구 봐도 새 길이 필요했다. 하지만, 농림부가 반대했다. 정확히는 ‘농림부 6급’이 반대했다. ‘수원 최 계장’에게 ‘농림부 6급’은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5년을 끈 뒤에 ‘농림부 6급’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제야 20만 신도시가 살아났다. 지금은 그 길을 ‘박지성로(路)’라 부른다. 수원 2부시장에 도태호씨가 취임했다. 살아온 이력을 보자. 국토부에서 주택정책관, 건설정책관, 도로정책관을 했다. 공공기관지방이전추진단 부단장도 했다. 지금 처한 수원시 현안을 보자. 신ㆍ구 도심 간 균형 있는 주택정책이 시급하다. 비행장 이전에 대비한 밑그림이 필요하다. 한계에 달한 교통망 확충이 필요하다. 흉물로 버려져 있는 공공기관 이전 부지 활용도 시급하다. 부시장 이력과 수원시 현안이 볼트와 너트처럼 맞아 들어간다. 안 그래도 수원 2부시장은 특별하다. 기초자치단체 중 수원시에만 있다. 229개 시ㆍ군ㆍ구의 관심과 평가를 한몸에 받고 있다. 5년 전인 2010년, 첫 번째 선택이 있었다. 다들 정치 주변의 정무(政務)형을 예상했다. 하지만, 시는 실무(實務)형을 택했다. 도시 재생 전문가를 앉혔다. 그를 통해 수원의 재생(再生) 지도가 그려졌다. 시민과 함께하는 참여행정도 만들어졌다. 첫 번째 2부시장 시대가 끝났고 시민들은 5년 전 선택에 후한 점수를 줬다. 이제 두 번째다. 이번에도 용도(用途)는 분명하다. 그의 이력과 시의 현안 사이에 훤히 드러난다. 그런데 그 이면에서 ‘특별한 용도’가 보인다. 그 ‘특별한 용도’의 일단이 26일 배포된 그의 취임사에 있다. “제가 중앙정부에서 축적한 국토교통행정 경험을 살려 수원미래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지방정부가 넘기 힘든 중앙정부의 벽, ‘최 계장’이 그토록 버거워했던 중앙부처 6급의 벽, 그 벽을 넘는 게 그의 ‘특별한 용도’다. 기대를 갖게 하는 일화(逸話)가 흘러나온다. 취임 상견례가 서울에서 있었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 국토부의 ‘별’(국장급)들이 대거 참석했다. ‘중앙 6급’도 버거워하는 수원 간부들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신분당선 개통식의 일화도 있다. 국토부가 시간상 이유로 수원시장과 용인시장의 인사말을 뺐다. 그러자 도 부시장이 “시민을 위한 행사에 시장 축사가 빠지면 안 된다”며 국토부를 압박(?)했다. 결국, 두 시장에게 마이크가 주어졌다. 4~5년쯤 전이었나. ‘김 과장’ 에겐 늘 동문 수첩이 있었다. 웬만한 학교의 동문수첩이 다 있었다. 승진해서 처음 한 일도 수첩 뒤져보기였다. “중앙 부처 공무원 좀 알아보려고. 비빌 언덕이라도 찾아보게.” 문화관광부와의 숱한 협의를 앞뒀던 그였다. 말이 좋아 협의지 사실상 허락을 받는 일이다. 그래서 한 게 학연(學緣) 뒤지기였다. 어디 수원 ‘김 과장’뿐이겠나. 성남 ‘김 과장’, 용인 ‘김 과장’들도 운명처럼 안고 있을 중앙의 벽이다. 도 부시장의 미담(美談)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리비아 탈출’에 띄울 비행기 삯을 두고 다들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개인 보증으로 국민부터 구해낸 게 국토부 ‘도 국장’이었다. 구설(口舌)도 알고 있다. 고교동창, 지인 등과의 술자리가 도마 위에 올랐다. 해명이 됐다지만 ‘엘리트 도 실장’ 에겐 주홍 글씨로 남았다. 앞의 미담은 그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퍼 옮긴다. 뒤의 논란은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퍼 나른다. 생각하면 둘 다 부질없다. ‘리비아 탈출’ 영웅담으로 선택된 게 아니다. ‘친구 술자리’ 과거로 취소될 것도 아니다. 그에겐 수원 2부시장에 선택된 아주 명확하면서 유일한 이유가 있다. 국토부의 연(緣)을 수원에 연결해야 할 책임이고, 국토부의 벽(壁)을 수원 공무원들에 낮춰줘야 할 책임이다. 도태호 부시장 한 사람만이 갖고 있는 ‘힘’이자 도태호 부시장 한 사람만이 지고 있는 ‘짐’이다. 힘으로 삼으면 성공한 부시장이고, 짐으로 남으면 실패한 부시장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교육감 직선제, 총선에 存廢 걸릴 것

여론은 바뀐다. 그것을 수치화하는 작업은 더 하다. 때에 따라 변하고 질문에 따라 변한다. 교육감 직선제에 대한 여론도 그렇다. 2011년의 어떤 조사는 이랬다. 교육감 직선제 폐지 찬성 45.0%, 반대 28.0%, 무응답 27.0%. 4년 뒤 조사에선 이랬다. 직선제 찬성 42.6%, 임명제 19.3%, 런닝 메이트제 14.4%. 조사한 기관은 두 번 모두 ‘리얼미터’다. 그런데도 여론은 달랐다. ‘폐지해야 할 제도’에서 ‘존치해야 할 제도’로 변했다. 헌법재판소도 직선제의 손을 들어줬다. ‘교육감 직선제는 위헌이 아니다’라고 결론 냈다. 학부모와 교사 등 2,450명이 냈던 헌법소원이었다. 헌소를 제기했던 이유는 수학권과 수업권 침해다. ‘학생이 교육받을 권리와 교사가 가르칠 권리 등이 침해받고 있다’며 소(訴)를 냈었다. 이에 대해 헌재 재판관 전원이 ‘직선제는 합헌이다’고 했다. 작금의 교육감 직선제의 위치가 이렇다. 다수(多數)가 밀고, 합법(合法)이 받치고 있다. 그런데 피곤하다. 말할 수 없이 피곤하다. 직선 교육감 시대 이후 쭉 이랬다. 경기도민에게 직선 교육감이 선 뵌 게 2009년이다. 곧바로 도의회가 전쟁터로 변했다. 무상급식비를 달라는 교육감과 못 준다는 도지사가 붙었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도의원들이 본회의장을 번갈아 점거했다. 학교급식 문제가 문화, 건설, 일자리, 인사 등 모든 행정을 주어 삼켰다. 그 해 그때만의 일이 아니다. 매년 다음해 예산을 짤 때만 되면 전쟁은 재발했다. 초대 직선 교육감 5년 내내 경기도정이 그렇게 휘둘렸다. 사람이 바뀌면 조용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번엔 유치원ㆍ어린이집 전쟁이다. ‘주자’ ‘못 준다’는 입장만 바뀌었다. 이번에도 직선교육감이 중심에 있다. 누리 예산 편성 ‘0원’으로 불을 질렀다. 경기도를 준(準)예산 사태로 마비시켰다. 31명의 시장 군수를 정당별로 쪼갰다. 남경필 도지사의 연정(聯政)도 한 방에 무너뜨렸다. 학부모와 유치원장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두 번째 직선교육감 시대다. 그 사이 학교와 학생은 뒤로 밀려났다. 장기 결석하던 11살 아이가 학대 끝에 탈출했다. ‘급식 천국’ 경기도에서 자란 아이인데 몸무게가 16㎏이다. 3년간 결석하던 또 다른 아이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빠에게 맞아 죽었고 시신까지 훼손됐다. ‘7일 이상 결석하면 조치해야 한다’는 규정은 규정일 뿐이다. 행정 공무원은 입건됐지만 ‘직선 권력’은 사과도 안 했다. 교육감 협의회는 아동학대 의제를 누리 예산 뒤로 밀어버렸다. 교육을 버리고 표(票)만 쫓는 직선 교육감제의 현실이다. 새누리당이 교육감 직선제를 폐지하고 싶은 모양이다. 토론회마다 내리는 결론이 직선제 폐지다. 이를 눈치 챈 여론이 지금까지는 막아왔다. 42%의 찬성으로 폐지의 ‘폐’ 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 여론이 달라질 수도 있어 보인다. 새누리당 선동 때문이 아니다. 누리 예산 파국을 지켜보며 유권자가 스스로 입장을 바꾸고 있다. 방치되는 학교와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학부모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 존폐의 절벽이 4월 13일이다. 여당이 총선에 이기면 교육감 직선제는 사라질 것 같다. 국회 선진화법이 사라진 다수(多數)의 단두대에 제일 먼저 올릴 것 같다. 42%의 ‘존치’ 지지율? 말했듯이 여론은 변한다. “이념 싸움이나 하고 학생 방치하는 직선제 폐지하자”는 설문 돌리면 그걸로 끝이다. 지금의 이 난장판을 보고도 서명 안 할 유권자가 몇이나 되겠나. 많은 이들이 다시 직선제 폐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교육행정을 교육정치로 변모시킨 직선 교육감들. 학생과 학부모를 정치 투쟁의 볼모로 엮어 넣은 직선 교육감들. 어쩌면 저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려 할 땐 이미 교육감 직선제가 역사 속 구(舊)제도로 기록돼 있을지 모른다. 김종구 논설실장

[김종구 칼럼] 대만 눈치 보기, 적당히들 하시오 적당히!

이미 익숙한 모습이다. 대만은 우리를 늘 적(敵)으로 삼았다. 대만 경기가 없는 경기장에서도 그랬다. 관중석에 나부끼는 혐한(嫌韓) 플래카드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다. 2010년 10월 대만에서 있었던 대륙간컵 야구대회엔 이런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천안함을 폭파하듯 한국인들을 두들겨라’. 그해 3월 한국에서 천안함 피격 사건이 있었다. 우리 해군 46명이 전사했다. 그 소름 끼치는 한국민의 상처에 초산을 들이붓는 문구였다. 도를 한참 넘었다. 많은 이들이 그 출발을 1992년 국교 단절로 설명한다. 6·25 때 도와준 은혜를 배신한 한국에 대한 구원(舊怨)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대만인들의 구호도 그랬다. “우리는 당신들을 도왔는데 당신들은 우리를 배신했다”. 우리 사회도 그걸 당연히 받아들였다. 대만인의 반한 감정은 정당한 것이라 여겼다. 한국은 계속 얻어터져도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 후로 툭하면 태극기가 밟히고, 툭하면 한국 상품이 불탔다. 이제 한번 생각해보자. 대륙(大陸)은 우리에게 뭐였나. 늘 축복이고 은혜였나. 우리 역사 최초의 전쟁 상대는 연나라다. 기원전 332부터 321년까지 고조선을 침략했다. 기원전 107년경, 고구려의 첫 전쟁도 위나라와 연나라였다. 대륙의 마지막 침략은 1636년 병자호란이다. 기원전 332년부터 1636년까지 무려 1천968년이다. 이 긴 역사에 기록된 침략자는 모조리 대륙이다. 수(隋), 당(唐), 명(明), 청(淸) 등 모든 대륙의 지배자들이 한반도를 침략했다. 우리가 치를 떠는 일제(日帝) 36년보다 54배나 긴 세월이다. 대륙이 휩쓸고 간 한민족의 역사는 온통 피와 굴욕으로 범벅됐다. 대륙 침략이 있을 때마다 전리품은 여성이었다. 천민 여인, 양반 여인, 왕가 여인을 가리지 않았다. 어엿한 가정주부도 끌고 갔다. 대륙에서 돌아온 여인들은 ‘화냥년’-還鄕女-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임금도 침략자 대륙엔 놀잇감이었다. 항복한 왕에게 ‘삼궤구고두’(三九叩頭)를 시켰다. 소리가 안 들린다며 머리를 짓눌렀다. 임금의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칸이 술 석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한 잔에 세 번씩 다시 절했다. 칸이 휘장을 들추고 밖으로 나갔다.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다시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김훈 著 남한산성 중에서- 그랬던 대륙이 둘로 갈렸다. 모택동의 공산 중국과 장개석의 자유 중국으로다. 둘은 서로가 대륙의 적자라 자처한다. 적자(嫡子)란 ‘정실(正室)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수ㆍ당ㆍ명ㆍ청의 아들이란 얘기다. 우리에게 1천968년의 고통을 안긴 대륙의 아들이란 얘기다. 화냥년과 삼궤구고두의 치욕을 안긴 대륙 역사의 아들이란 얘기다. 그런 대만이 1천968년은 쏙 빼고 3년(1950~1053년)만 얘기하고 있다. 그것도 24년째. 이제 바꿀 때가 됐다. 그런데 그들은 안 할 거다. 우리가 바꿔야 한다. 1천968년짜리 치욕의 역사와 3년짜리 빚의 역사를 정확히 계산해 내야 한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종잇조각 든 선수에겐 메달도 못 주겠다는 게 스포츠 정신 아닌가. 야구장에서 태극기 짓밟는 퍼포먼스에 항의해야 한다. 이유 없는 야유와 욕설에 항의해야 한다. 근거 없는 갑 질에 빠져 있는 국내 대만인들에게도 ‘주제를 지키라’고 일러줘야 한다. ‘JYP’를 왜 ‘IS 인질범’으로 모나. 대만의 연예 지망생을 발탁했다. 몸값만 30~40억원에 이르는 스타로 만들었다. 그 스타의 대만 국기 사진이 논란을 빚었다. 팬들이 항의하니 사과하도록 했다. 뭐가 잘못됐나. 연습생 발탁과 스타로의 육성, 뜻하지 않은 실수와 이에 대한 공개사과…. 지겹도록 봐오던 한국 연예계 일상이다. 그런데 왜 JYP만, 그것도 우리가 앞장서 잡아 돌리나. 지겹다 못해 역겨운 ‘대만 비위 맞추기’다. 영화 ‘광해’. ‘은혜의 나라’ 명(明)에 비단, 말, 처녀를 바치겠다는 신하들에게 광해가 분노한다. “적당히들 하시오, 적당히.” 400년을 훌쩍 뛰어넘은 2016년. 그 대륙의 적자 대만이 또 한 번 ‘은혜의 나라’를 자칭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비위를 맞추려는 우리 언론과 정부가 알아서 설설 기고 있다. 벌써 24년째다. 400년 전 광해의 호통이 되살아나야 할 순간이 됐다. ‘적당히들 하시오. 적당히’.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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