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공황기

“내가 낸 세금으로 왜 잘 먹고 잘 산 ‘월가’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느냐?” “나는 피땀 흘려 돈 벌 때, 그들은 거들먹거리며 돈 투기를 일삼았다” “그들은 망해도 나보다 더 잘 산다” 미국 사회의 중산층 이하의 분노다. 부시가 의회에 낸 7천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된 배경에는 이같은 민중의 표심이 깔렸다. 민주당만이 아니라 공화당 의원 일부까지 가세했다. 온 세계가 야단 법석이다. 내일을 알 수 없는 하루 하루가 연일 긴장속에 넘어간다. 미국 경제가 거덜나면 우리 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유럽 등 경제까지 쓰나미가 이는 함수 관계는 이도 종속이론으로 설명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중동이 독과점적 석유장사로 먹고사는 것 과는 달리, 자연자원을 갖지 못해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는 정녕 대미 의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역시 어렵다. 시대의 구심점이 실종됐다. 자유방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왔으나 소련 등 동구권의 사회주의 붕괴로 신자유주의도 상대성의 탄력을 잃었다. 네오콘, 즉 신보수주의는 오만에 차고, 진보주의도 ‘제3의 길’로 배회하는 등 시대의 구심력이 될 처방은 아니다. 한국적 뉴라이트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데 미흡하고, 한국적 좌파는 종북주의적 주술에 함몰됐다. 심지어 민주주의도 위협받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세계화의 압력으로 강대국들 중심의 이해 관계 질서의 준수를 요구받고, 대내적으로는 인터넷 포퓰리즘과 시민이 없는 시민단체의 권력화로 민주성이 결핍돼 간다. 각급 선거의 투표율이 갈수록 낮아지는 현상이 이의 식상을 반증한다. 오늘의 미국을 가리켜 ‘제국주의의 종말’이라며 혹평하기도 한다. 미국은 망하는가, 거대한 공룡이 치명상을 입긴 했으나 결코 죽진 않는다. 미국을 떠받드는 지식인층은 미국을 다시 살려놓을 것이다. 이같은 지식인층은 기성세대든 예비세대든 두터운 것이 미국 사회의 특징이다. 이들은 지배세력이다. 미국 사회가 신분제 사회로 변질돼가고 있는 것은 미국의 건국 이념과는 상반되는 병리현상이지만, 이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출생 신분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미국의 사회계층 분열은 심각하다. 부유한 집안의 자녀가 하버드 등 명문대학에 가 성인이 되면 또 부를 형성하는데 비해, 중산층 이하의 자녀는 이에 경쟁하기가 힘들어 사회적 신분 이동의 기회가 제약을 받는다. 잘 살거나 출세하는 집안은 대를 이어 잘 살거나 출세하고, 못사는 집안은 대를 이어 못살거나 출세를 못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런데 미국을 구할 사람들이 바로 잘 배운 그들 일류 지식인층인 것이다. 국내 양상도 별로 다르지 않다. 특히 특목고나 수월성 교육을 두고 돈 있는 집 자녀만 공부하게 만든다고 야단이다. 학력고사가 학교의 서열화를 부추긴다고 떠든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사회생활이든 국제생활이든 모두가 어차피 서열화다. 평준화를 구실로 인재 양성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이야말로 역차별일 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망친다. 평준화는 기회의 평준화에 있는 것이지 능력의 평준화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는 두 명 이상이 모여살면 지도자를 둔다. 다만 그 형태에 따라 제도를 구분한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지도자와 지도계급은 피지배계급이 잘 살든 못살든 잘 먹고 잘 산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나 왕권주의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 모순이다. 지배계급의 그같은 선민화, 앞서 말한 세습화 등은 그것이 설령 필요악이라 할지라도, 절대 다수의 민중들 입장에서는 인내하기가 어려운 불평등이며 모욕이다. 그러나 당장은 이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 뭣인가가 나온다. 새로운 사상의 조류가 봇물처럼 터지는 시대가 금세기에 분명히 온다. 지금까지의 이론으로 해결은 커녕 설명되기도 어려운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변증법적 발전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세계적 관심사가 된 미국의 금융 위기는 그같은 발전의 조짐이며 전주곡이다. 구곽이 깨지는 비명이다. 새로운 조류의 진통이다. 그러나 분명한 전망은 금세기라는 것뿐, 언제쯤 나타날 것인지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이래서 지금은 ‘프린서플’의 공황기다. 제자백가식의 기존의 주의, 주장은 상극되고 새로운 것은 보이지 않는 공백이기도 하다. 문제는 당장 어떻게 하느냐에 있다. 실용주의는 사상의 공황기에 처해 취할 수 있는 무난한 처방이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 노선은 이 점에서 길은 제대로 잡았다. 한데, 실용주의의 목표 가치를 어디 두느냐에 따라 또 차이가 있다. 대외적 자원외교에서 대내의 금리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민생 위주가 돼야 한다. 재벌은 인정돼야 하나 투명해야 하고, 대기업과 수평 관계로 육성되는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로 바뀌어야 된다. 가장 화급한 것은 미국발 금융 위기로 달러에 목마른 금융시장이다. 설상가상의 가계자금 연체로 압박을 가중 받게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채무자가 원리금 상환 능력을 갖도록 하는 최저선의 민생안정대책이 강구돼야 한다. “그들은 망해도 우리보다 더 잘 산다”는 말이 우리들 입에서 까지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왜 종부세 인가?

종부세로 약칭되는 종합부동산세가 한나라당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이명박 정부가 제출하는 과세기준 완화의 종합부동산세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킬 수도, 안통과 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논의가 분분하다. 정부안을 찬성하는 말도 있고, 반대하는 말도 있다. 중간도 있다.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하고, 경제 활성화에 초점을 맞춰 검토해야 한다는 점잖은 말도 있다. 여기서는 반대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종부세법 개정으로 큰 득을 보는 사람들이 추진하는 법 개정은 윤리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과세 대상을 6억원에서 9억원으로 한다는 것 등이 골자다. 이렇게 되면 이명박 대통령은 내년에 3천350만원이던 종부세가 810만원으로 줄어 2천540만원을 득본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단독주택의 공시가격이 30억원인 것을 기준해서 이렇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종부세법 개정에 총대를 맨 주역이다. 그는 1천600만원이던 종부세가 260만원으로 줄어 1천340만원의 득을 본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의 공시가격이 20억원인 것을 기준해 산정된 금액이다. 내친김에 더 보면 차관급 이상 공직자와 국회의원 중 과세대상자 190명 가운데 58명(31%)이 면제되고 132명(69%)은 감액된다. 더 이상 따질 게 없다. 종부세법 개정에 그 어떤 말을 찍어다 붙여도 이런 법 개정은 사회정서에 합치된다 할 수가 없다. “종부세는 결국은 폐지돼야 한다”는 것이 강만수 장관의 말이다. 당장 폐지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진 못하고 일단은 완화한다는 게 그의 속내다. 종부세가 징벌성이란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남달리 ‘고대광실’ 같은 집에 사니까 세금을 특별히 더 내라는 것이다. 개정의 이유로 이 징벌성을 문제 삼는다. 조세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럴싸 하지만, 조세정의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여기서는 조세정의에 무게를 더 둔다. 가진자들의 얘기니까 안가진 사람은 이렇든 저렇든 상관할 바가 아니란 것은 당치않다. 종부세를 작살내고 나면 재산세가 올라간다. ‘고대광실’의 종부세를 덜어주는 세수 결함으로 인해 ‘똥집’ 같은 집일 지라도 재산세를 올려서 충당해야 하는 것이다. 재산세 인상률을 약 25%로 내다보는 눈들이 많다. 종부세 과세대상이 10만명에 1%라고도 하고 2%라고도 한다. 이들은 징벌성 과세에 내는 돈이 아깝겠지만, 아까워도 괜찮으니 제발 나도 종부세를 내는 처지가 돼봤으면 좋겠다는 것이 서민층 감정이다. 종부세 내는 부자들이 감세되어 돈을 풀면 서민경제에 그 영향이 미쳐 좋아진다면서 이를 ‘혜택’이라고 정부는 표현한다. 같은 말을 해도 참 듣기 거북하게 하는 게 그게 무슨 얼어죽을 ‘혜택’이냐는 것이다. 또 경기가 되살아 난다고도 한다. 믿을 게 못되지만, 묻고 싶은 건 부자들 돈을 풀게하고, 경기를 살리는 방법이 꼭 종부세를 뜯어 고쳐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이미 상속세를 비롯한 많은 감세정책이 이뤄졌다. 그것도 모자라 한술 더 뜨는 것은 ‘부익부 빈익빈’의 조장이다. 조선 왕실에 ‘궁차징세법’이란 것이 있었다. 궁가에서 파견하는 관원으로 궁차란 직함이 있었는데, 이들이 장토의 소작 관계에 소작료를 징수해 올리는 과정에 부정이 심했다. 이래서 ‘궁차징세법’을 폐지한 것이 22대 왕 정조다. 백성을 위해 궁차의 횡포를 없앴을 뿐만이 아니라 왕실의 기득권마저 없앤 것이다. 왕권시대의 임금도 국가 지도자로서의 이런 윤리성을 보였다. 하물며 대통령이 되어 자신의 종부세를 깎는 입법 추진을 서슴치 않는 것은 ‘강부자 내각’의 평판을 들어 마땅하다. 설령 개인의 이해 관계를 떠난 어떤 신념이라 할지라도, 국민사회의 오해를 살 일은 피해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제대로 된 지도자의 품격이라 할 것이다. 역시 종부세법 개정으로 큰 득을 보는 강만수 주무부처 장관은 국회에 가서도 큰 소리 치는 것이 오히려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주눅이 들 정도다. 당초엔 기획재정부 세제실에서도 종부세 완화에 이의가 없지 않았던 것을 강 장관의 일갈로 잠재워 실무 작업이 이뤄졌던 것이다. 외환시장에 개입, 150억 달러의 정부보유액을 축내고도 시장 안정을 성공시키지 못한 그다. 그러한 그가 드러내는 두둑한 배짱은 모종으로 연관된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이 배경인 것은 두 말할 것이 없다. 한나라당이 대통령을 업은 장관의 저돌적 공격에 밀려 거수기 노릇을 할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에게 직접 고해 설득할 것인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당정협의란, 이미 형화화돼 무력해졌다.

지방자치의 개혁을 - 광역단위화를 반대하며

지방자치라 할 수 없다. 각급 자치단체장 선거와 지방의회 구성은 외형상 요건일 뿐이다. 알맹이는 돈 줄이나 일 줄이나 모두 중앙정부가 거머쥐고 있다. 지방자치의 외형상 요건은 되레 지방자치비 등 주민 부담만 더 무겁게 한다. 각급 지방선거, 지방의회 운영 및 의정비 등의 자치비 부담이 지역 주민에게 자치 실익으로 되돌아 오게 하기 위해서는 지방분권을 전제로 하는 지방자치 개혁이 있어야 된다. 지방분권은 지방정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과감한 대폭적 권한 이양이다. 외교·국방·경제 등은 전적인 중앙정부 소관으로 하고, 국토이용·사회복지·교육과학·기타 등 분야는 중앙정부가 큰 틀의 기조만 장악하고 나머지는 전적으로 지방에 넘겨야 한다. 아울러 국세 위주의 세제를 선진국처럼 지방 위주로의 개편이 절실하다. 예컨대 지방교부세 같은 것으로 중앙이 지방을 희롱하기 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지방에서 거둬 쓰도록해야 하는 것이다. 현행 중앙집권형 지방자치는 획일화다. 지방자치 본연의 면모가 아니다. 지방분권형의 지방자치 본질은 경쟁이다. 획일화가 아닌 차별화가 지방자치 본연의 면모인 것이다. 차별화는 자치단체의 능력 유무, 지역주민의 자치의식 여하에 따라 성취도가 달라진다. 지방자치라지만 도지사나 시장 군수 이름조차 모르는 지역주민이 많다.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중앙집권형의 천편일률적인 자치행정에 관심이 있을리 없다. 지방분권형의 천차만별적인 자치행정이 될 때 비로소 지역주민의 관심도가 높아진다. 지금같은 천편일률적인 지방자치는 주민 각자와의 이해 관계가 뻔해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러나 지방분권형 지방자치는 주민 각자와의 이해 관계가 밀접하다. 자기가 사는 자치단체의 자치사무를 모르면 손해가 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각종 민원사무 처리 등 주민생활의 자치단체 관련 예규를 특유의 지역실정에 맞게 만들어 자치단체별로 서비스 경쟁을 유발토록해야 된다. 주민생활에 중앙정부의 법령보다 자치단체가 만든 조례의 숙지 필요성을 더 느껴야 할만큼 각종 조례가 활성화돼야 하는 것이다. 자치단체가 기구를 어떻게 두든, 인원을 몇명 쓰든 중앙정부가 간여할 일이 아니다. 자치단체 개개의 살림이기 때문이다. 각급 자치단체는 법인이다. 살림을 잘못살면 파산이 되기도 해야 단체장이나 주민들이 자치 살림에 더욱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전향적인 지방자치 개혁은 요원하다. 왜냐면 이유가 있다. 우선 국회가 개혁차원의 지방자치법 개정을 반대할 것이다. 지방자치가 중앙집권형에서 지방분권형으로 준연방화하면 지방에 대한 국회의 권한이 거의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유는 또 있다. 중앙정부의 각 부처 관료들이 반대한다. 관료만이 아니고 국무위원들 역시 거부한다. 중앙 권력의 기득권을 놔주기가 싫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반대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광역단위화 행정구조 개편을 적극 찬동하고 나선 건 지방자치 개혁의 의지가 없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전국을 60~70개로 하는 광역단위화 개편은 지방자치의 후퇴다. 대통령은 말했다. “현행 도제(道制)는 갑오경장때 만든 것으로 디지털시대에 맞지 않다”고 했다. 대통령이 알긴 했어도 잘못 알았다. 갑오경장 때 만든 것은 13도로 더 구분한 것이지, 그때 처음 도제가 실시된 것은 아니다. 조선 팔도(八道)는 조선조의 오랜 행정구역이다. 지역정서는 지방자치의 뿌리다. 지방감정의 대립적 개념과 향토사랑의 지역정서는 전혀 별개다. 도제를 없애야만 지역감정이 해소되고 행정능률이 제고된다고 보는 단안은 무리다. 물론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일장일단이 있겠으나 얻는 것 보단 잃는 것이 더 많다. 지역정서는 도마다 말과 풍습이 다른 전래의 민속을 형성했다. 아무리 디지털시대라고 하여도 고유의 전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광역단위화에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그런 개념을 끌어대는 것은 무위하다. 60~70개의 광역단위화는 새로운 형태의 이기주의를 필연코 유발한다. 지금의 16개 시·도보다 더 심각한 네거티브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것이다. 중앙집권형의 지방자치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혼돈은 결코 지역주민, 나아가 국민을 위한다 할 수 없다. 통일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통일이 논의되거나 통일이 될 때, 시·도제를 견지하고 있는 북측 행정구역과의 형평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도제 폐지는 통일을 대비하는 면에서도 단견이다. 경쟁의 시대다. 지구촌 나라끼리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 간다. 지방의 경쟁력을 배양하는 것은 나라의 경쟁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중앙집권형의 하향식 지방균형발전 따위보다는, 지방분권형의 지방자치 경쟁시대를 여는 것이 자생력있는 지방 발전을 가져온다. 이에 따른 문제점은 보완하는 길이 따로 있다. 정치권이나 대통령이 진실로 지방을 위한다면 공연히 광역단위화에 갖는 관심과 열정을 지방자치 개혁으로 돌려 쏟아야 하는 것이다.

이명박은 ‘아직도 뭘 몰라’

이명박(대통령)은 역시 감동을 주지 못했다. 엊그제 밤 10시부터 ‘대통령과의 대화… 질문이 있습니다’가 장장 100분에 걸쳐 생방송 됐다. KBS1TV, MBC TV, YTN케이블TV 등이 일제이 내보냈다. 대체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듣긴 들었는데 남는 게 없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반응이다. 새로운 말을 들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희망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믿어달라” “(대한민국 경제의) 기적을 만들겠다” “물가인상을 최대한 억제하겠다”는 등의 말(다짐)은 원칙적인 얘기다. 국민이 알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다. 뭘 어떻게 할테니까 믿어달라는 것이고, 기적은 어떻게 만들 것이며, 그리고 어떻게 물가를 잡겠다는 것인가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듣고 싶었던 말은 듣지 못했다. 녹색성장도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 강조한 당위성은 동의한다. 문제는 기술도 돈도 미흡한 형편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에 있다. 한데, 이에 대한 해답은 없었다. 정답이 없는 녹색성장의 그같은 필요성은 대통령이 아니어도 누구나 말할 수가 있다. “경제파탄은 절대로 없다”고 했지만 서민경제는 이미 파탄지경이다. 대통령의 인식에 결함이 있다. 대통령은 경제파탄을 IMF 사태에 비유했다. 하지만 “IMF 때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사회위기 수준의 지배적 중론이다. 말인즉슨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안다”지만 뭘 모른다. 통치철학의 빈곤이다. 추석 대목이다. 서민들이 찾는 시장은 냉랭하다. “이런 추석 대목은 난생 처음이다”라며 울분을 토한다. 수십년을 장사했다는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말이다. 반면에 고급백화점이나 일반백화점의 고급상품 코너는 흥청거린다. 비싼 명품일수록 더 잘 팔린다. 음식점 등 문 닫는 자영업소가 속출하고 있다. 장사가 안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급 식당이나 값비싼 술집은 장사가 잘된다. 양극화 현상의 심화가 뚜렷할 뿐만이 아니라, 격차 또한 점점 더 크게 벌어져 간다. 돈많은 상위계층만이 살판난 세상이다. 그러나 예컨대 중소기업인은 돈 많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돈이 없어 사업규모 축소로 생존의 돌파구를 모색하는 실정이다. 이토록 돈이 없는 것은 내수 부진으로 흑자도산의 위기에 몰린 탓이다. 지금 돈이 많아 살판난 것은 수십억원, 수백억원을 땅 보상비로 받은 부동산 투기족이다. 지난 5년동안에 100조원이 풀렸다. 이러고도 수도권 신도시 보상비로 조만간 또 13조원이 풀린다. 이런 졸부들 말고 또 돈많은 사람은 권력층이다. 부자가 반드시 부도덕하고, 빈자가 꼭 청렴한 것은 아니다. 남다른 노력의 결실로 부를 쌓고, 본인의 허랑방탕으로 가난에 찌든 사람도 많다. 문제는 투기나 권력으로 축재하고, 서민들은 열심히 살려고 힘쓰는데도 노력의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사회적 병리현상의 고질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대통령이 임명코자 하는 높은 벼슬아치 후보마다 거의가 부동산 투기가 드러나곤 하는 점이다. 대통령 주변에는 왜 그런 사람들만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고사가 있다. 제나라 환공이 중신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병신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의아해 하는 신료들에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돈이 없으니 아내에겐 지아비노릇, 자식에게는 애비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부모의 기일이 닥쳐도 돈이 없어 제사를 변변찮게 올리니 불효하고, 친구를 만나도 돈이 없어 술 한잔 살 자릴 마련 못하니, 세상에 사람노릇 못하는 이보다 더 큰 병신이 또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환공이 중신들에게 당부한 말은 이랬다. “그러니, 경들은 병신이 되는 백성이 없도록 세간 살이를 잘 살펴 가난함이 없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명박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지금 세간에는 사람노릇 못해 ‘병신’이 된 민초가 태반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사람 구실을 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잘 안되는 것은 경제가 파탄났던 IMF 때보다 서민경제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잘 살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는 경제건설을 원한다. 당장 용빼는 재주를 보여 달라는 게 아니다. 희망을 가시화해달라는 것이다. 대통령은 쥐들이 “무서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좋다”는 식의 원론적 얘기만 비겁하게 앉아서 되풀이 할 것이 아니라, 고양이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가 방울을 목에 직접 거는 (용기와 결단력 있는) 경륜을 보여줘야 한다. 입으로 백번, 천번 “믿어달라”고 하기 보다는 단 한번이라도 믿을 수 있는 신뢰성을 보여줘야 된다. 의왕의 어느 보육시설에 가서 자원봉사하는 TV방송을 보고도 국민사회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의 신뢰성 상실에 기인한다. ‘대통령과의 대화’는 결국 민초들이 가려운 것은 발등인데, 양말도 아닌 신발 위를 긁는 꼴이 됐다. ‘이명박은 역시 아직도 뭘 모른다’는 세평이다. 임양은 주필

김정일 선생에게 -2016년 평양 올림픽을 유치하십시오

김정일 선생에게¶-2016년 평양 올림픽을 유치하십시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 선생에게 충심으로 권고합니다. 오는 2016년 제31회 평양 올림픽대회를 유치하십시오. 남북 동포가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어 간곡히 말씀 드립니다. 21세기의 생존 방식은 20세기와 또 다릅니다. 이념의 시대가 아니고 실용의 시대니까요. 이는 대한민국이나 공화국이나 다 같고, 남북 뿐만이 아니라 지구촌이 다 같은 추세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빗장문을 걸어두고 우리는 아니라고 해도 지구촌의 공기는 국경이 없습니다. 핵 불능화 중단 조치는 생존 방식이 아닙니다. 미국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긴하나, 누가 되어도 그들의 기존입장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방법의 온도 차이는 매케인이나 오바마에 따라 있겠지만 온도차가 기존 입장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중국과 혹시 어떤 이면약정이 있는진 모르겠으나, 있어도 국제사회에서 자국 이익을 버리면서까지 그에 충실할 것이란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궁금합니다. 도대체 핵 무기는 어디에 쓸려고 하는 것입니까, 일본이나 미국엔 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남조선 혁명을 위해 동포에게 한방 먹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닐 것으로 믿습니다. 아니면, 제3세계에 파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지만 핵 장사보다는 올림픽 장사가 훨씬 이문이 크다고 믿어 평양 올림픽 유치를 진언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유치가 과연 가능할까요. 위원장 선생께서는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으나, 턱도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아마 공화국이 2016년 올림픽 유치를 선언하고 나서면 세계가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하지만 유치 여부는 위원장 선생의 결심에 달렸다고 저는 믿습니다. 공화국 헌법 55조는 ‘국가는 체육을 대중화, 생활화할 데 대한 방침을 관철하여 전체 인민을 로동과 국방에 튼튼히 준비시키며, 우리나라 실정과 현대체육기술 발전 추세에 맞게 체육기술을 발전시킨다’라고 규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양 올림픽은 인민 결속에 새로운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경기장 시설도 주경기장만 새로 건설하면 올림픽 경기가 능히 가능할 것으로 압니다. 개회식 행사 같은 것도 베이징 올림픽 못지않게 해낼 것으로 믿습니다. 예컨대 1960년대 그때까지만 해도 전대 미문이었던 카드섹션을 처음 해보였던 저력이 있잖습니까. 2016년 올림픽 개최지는 내년 IOC총회에서 결정됩니다. 물론 개최지 결정은 경합이 붙겠지만 유치 신청을 추진하십시오. 올림픽 유치를 신청하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아울러 공화국의 이미지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으로 보았던 의아심이 점차 해소되어 긍정적으로 기울 것으로 봅니다. 우선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가 평양 올림픽 유치를 세계 무대에서 적극 지원하고 나설 것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방 국가들의 인식이 달라질 것입니다. 제3세계 또한 공화국 유치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다행히 평양 올림픽 유치가 극적으로 성공하면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지원이 밀물처럼 일게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면 올림픽은 평화의 제전으로, 이의 의지를 담보해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니까요. 적어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전쟁을 일으킬 걸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 관계가 매우 소원해졌습니다. 이의 연유에 시비를 따지자면 서로가 얼굴을 붉혀야 합니다. 하지만 평양 올림픽 유치로 남북의 두 올림픽위원회가 갖게되는 회동은 자연스럽게 교류를 재개하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이만이 아닙니다. 평양 올림픽 경기장 시설에 소요되는 각종 자재 등 지원이 가능하고, 식량 및 비료 제공에도 명분을 갖게 됩니다. 남북관계에 평화의 신기원을 이루는 전환점으로, 가히 역사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중국은 이번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을 뿐만이 아니라 문화대국으로 세계에 우뚝 섰습니다. 인민들은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위원장 선생께서도 용기를 갖고 한번 통 크게 추진해 보십시오. 식량난은 상대적 장애 요인은 되어도 절대적 불능의 요인은 아닙니다. 거듭 말씀 드립니다. 인심잃는 핵 장사 보다는 인심얻는 올림픽 장사가 훨씬 더 좋은 장사가 됩니다. 오는 2012년 제30회 런던 올림픽 폐회식에서 평양특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런던 시장으로부터 2016년 제31회 대회의 올림픽 깃발을 이어받게 되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끝으로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따며 선전한 것을 축하합니다. /임양은 주필

김문수, 뿔 날만 하다

‘동네 북’이 아닌 ‘나라안 북’ 신세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처지가 이렇다. 보고 있자니 안좋다. 우리네끼리야 으례 ‘김문수 북’을 친다. 우리의 도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들이 치는 것은 싫다. 우리의 도지사이기 때문이다. 그야 맞을 일이면 또 모르겠다. 맞을 일 같으면 싫어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아니다. 말 뜻을 새길 생각은 없이 말씨만 갖고 시비를 건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란 사람부터가 그렇다. 박희태의 이른바 경고 메시지는 또 정당의 지방자치 침해의 우려를 현실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 황당한 것은 차기 대권 행보로 보는 시각이다. 김 지사가 대권에 뜻을 둔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다. 물론 속내는 있어도 비칠 입장은 아직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접어두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대통령감이 되는지 안되는 지엔 관심이 없다. 분명한 것은 정작 본인은 그런 눈치도 보이지 않는 터에 대권 행보로 각색하는 건 황당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수도권 규제 철폐의 지속적인 노력은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이다. 대권설 각색은 그런 위국충정의 순수성을 되레 흠집낸다. 앞서 말씨만 갖고 시비를 건다고 했는데 말씨도 그렇다. 나도 거친 언어 구사는 공연히 비수도권의 더 큰 반발을 불러 일으킨다고 나무란 바가 있다. 거친 표현을 잘 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이 기왕지사 이렇게 됐으면 한번 따질 필요는 있다.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당선은 어느 지역보다 앞선 수도권의 압도적인 지지표가 크게 기여했다. 이 후보는 그땐 수도권 규제 완화를 공언했다. 한데, 돌연 전 정권의 노무현을 사부로 하는 지방균형발전을 계승하면서 수도권 규제 완화의 공언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김문수는 이를 “배은망덕”이라고 했다. 말인즉슨 틀린 말이 아니다. 이명박은 그같은 말을 들을 만하다. 자신의 공언을 뒤집어 놓고, 그같은 포퓰리즘 영합의 정치적 훼절에 해명 한마디가 아직껏 없다. 하긴, 말을 해도 경제논리로는 설명이 안될터이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중국이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으로 경제대국을 내다보는, 오늘의 성장을 이룬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쥐만 잘 잡으면 고양이가 검든 희든 상관이 없는 것처럼, 성장에 도움이 되면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지금도 여전한 중국의 경제기조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의 독재체제인 것이 또 중국이다. 주목되는 것은 공산당의 균배론을 폐기한 점이다. 균배론은 결국 하향평준화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 아님을 뼈저리게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원조로 하고 이명박을 중시조로 하는 지방균형발전론은 균배론과 맥락이 같다. 수도권의 성장동력을 잠재워 지방균형발전을 고루 이룬다는 명제는 가설도 못되는 포퓰리즘의 허구다. 수도권에서 시작된 경제성장은 수도권만 누리는 것은 아니다. 나라안 전지역에 두루 미친다. 이런데도 수도권의 숨통을 눌러놔야 비수도권이 잘 된다니 기가 치밀다 못해 막히는 것은 당연하다. 명색이 자유경제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공산당 나라인 중국에서도 안하는 지역주의 규제를 일삼는 것은 시대의 역행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이를 “공산당”을 빗대어 비판한 것은 맞는 말이다. 한국은행은 이미 가계금융의 위기 수준을 경고했다. 금융권의 가계부채가 640조원이다. 은행빚 안지고 사는 가구가 별로 없다. 그런데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못내는 가구가 올들어 지난해 보다 배가 더 된다는 것이 금융권의 얘기다. 한결같이 “큰 일이다”라며 걱정이 태산이다. 독촉하면 전에는 미안해 하던 채무자들이 이젠 “멋대로 하라”며 배째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경제가 죽어가는 탓이다. 담보물을 공매에 부쳐도 넘쳐나는 매물로 원금 회수가 안된다. 가계금융의 불안이 IMF 환란보다 치명적인 금융권 파탄의 위기 수준으로 치닫는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태평하다. ‘주인이 배 부르면 머슴 배 곯는 줄 모른다’는 말과 같다. 청와대가 얼마전에 갖기로 했던 재벌 총수들의 초청 회동을 추석후로 연기한 것은 투자 보따리를 싸들고 오라는 압박 신호다. 재벌 총수들에 대한 특사를 욕 먹으면서 해줬는데, 무슨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재계에 준비된 투자 자금이 없는 것은 아니다. 50조원 가량이나 있긴 있다. 그러나 기업 투자는 경제행위다. 자선사업이 아니다. 이문은 커녕 손해가 날 투자를 할 기업은 없다.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기업 투자의 물꼬를 터주면 재벌 총수들은 굳이 청와대로 부르지 않아도 절로 투자한다. 수도권 기업 규제의 철폐가 곧 투자의 물꼬를 터주는 것이다. 지방균형발전은 지역특화산업의 육성으로 모색돼야 한다. 수도권에 있는 공장을 비수도권 여기 저기에 옮기는 물리력이 균형발전인 것은 아니다. 비수도권에 억지로 옮기고, 어거지로 투자하라고 한다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노무현 정권 5년동안 외국자본도 수도권에 투자하려다가 못하면 비수도권에 간 것이 아니고 제3국으로 가곤 했다. 서민층 가계는 금융권을 파탄낼 정도로 급격히 악화되는 판에 50조원 상당의 기업 투자를 이 정부는 한가하게 수도권, 비수도권의 이분법적 정치논리로 가로막고 있으니, 김문수 도지사가 뿔이 날대로 날 수밖에 없다. 뿔이 안난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김문수의 말씨에 대한 비난은 사안의 실체적 접근이 아니다. 말 뜻에 대한 접근이 본질이며 이는 그의 확실한 소신일 것이다. 김문수, 뿔날 만하다

MB, ‘경제선수’ 맞나?

이명박은 왜 대통령에 뽑혔을까, 근 1년동안이나 후보군 중 발군의 1위 지지도를 유지했다. 당선은 무려 48.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유권자들은 그를 ‘경제선수’로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실물경제에 밝아 잘 살수 있게 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당선되면 경제를 살리겠다”며 무던히 큰 소리 치곤 했다. 그런데 경제가 나아지는 기미는 없다. 되레 나빠진다. 이제 6개월이다. ‘우물가에서 숭늉찾기’처럼 성급한 주문이라 할 수는 있다. 취임 이전, 그러니까 전 정권의 악조건이 미치는 관성적 영향도 있다. 경제는 자고나면 달라지는 날씨처럼, 일시에 확 달라지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의문시된다. 과연 ‘경제선수’일까, “경제를 살리겠다”는 다짐이 허풍은 아니었는 지, 이런 의심이 세간에 자꾸 짙어져 간다. 예를 든다. 정부 출범 직후의 경제기조는 성장이었다. 그러다가 안정으로 급선회했다. 물가를 잡는다고 외환시장에 개입했다. 하지만 달러화는 다시 강세로 돌아섰다. 외환보유액만 축냈다. 물가는 계속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국제유가가 130달러대로 들어서자 “경제가 불가항력이다”라고 했다. 원자재 가격의 폭등이 불가항력임을 모를 국민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선 안된다. 유가가 110달러대로 떨어졌다. 이젠 “내년 말쯤 가면 경제가 회복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국민은 1년 이상 힘들겠지만 견뎌 나가자”고 말한다. 문제는 그같은 말은 ‘경제선수’가 아닌 범부도 능히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가계빚이 가구당 평균 3천841만원(전체는 640조원)이다. 지금 서민층 가계경제는 이자부담도 벅차다. 가계경제가 이자도 제때 못내는 붕괴로 이어지면 금융시장이 파탄난다. 아슬 아슬하게 가고 있다. 빈부의 격차 심화가 이의 적신호다. 소득상위 20% 가구의 월평균소득(731만2천원)은 하위 20%(86만9천원)의 8.41배로, 2003년 이래 가장 큰 소득 격차를 드러낸 게 지난 ‘1.4분기 가계수지동향’이다. 나라 살림은 지난해 1인당 세부담이 422만8천원(전체는 204조8천591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1인당 51만5천원이 늘었으나 적자재정이다. 1년 안에 갚아야 할 단기외채가 2천155억 달러로 급증, 받을 돈보다 갚을 돈이 더 많은 순채무국 전락을 앞두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에 따른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이 금리를 높여 외화가 모자란 은행들이 돈을 차입하는 형편마저 심히 안좋다. 국가경쟁력은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조사 대상인 55개국 중 31위로 작년의 29위에 비해 2단계가 떨어졌다. 대만(13위) 중국(17위) 말레이시아(19위) 보다도 못하다. 처지가 이런 터에 ‘1년만 참고 견뎌라’하니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하나, 도시 믿기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희망(希望)은 ‘희망’(喜望)이 보여야 기대가 가능하다. 포르투갈의 항해사 가마가 선원을 이끌고 아프리카 서남단의 희망봉(喜望峰) 회항에 성공했을 때 그러했다. 그런데 ‘한국호’ 경제의 배는 지금 선장이 어디로 끌고 가는지 조차 모른 채, 선원이 된 서민층은 무작정 높은 파도에 휩쓸려 허덕인다. 뛰지도 못하는 판에 날겠다는 것이 8·15 경축사에서 밝힌 녹색성장론이다. 물론 앞으로는 신재생 에너지 등 개발로 환경과 성장이 함께 가야 하고, 새 일자리 창출의 녹색산업 투자가 있어야 된다. 그러나 당장은 기술격차나 투자대비 효과에 비추어 거리가 멀다. 두레박으로 바람잡기도 유분수지, 현실성 없는 얘길 하는 것은 화두가 아무리 좋아도 거부감을 일으킨다. 하긴, 현실성 있는 대책을 강구하는 것도 있긴 있는 것 같다. 금명간에 ‘추석물가 및 민생안정대책’을 최종적으로 확정해 발표할 모양이다. 대책을 세우는 것은 마땅하다. 다만 미덥잖은 건 지난번 물가대책 같아서는 헛방에 그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때 마련한 51개생필품 집중관리대책이 아직껏 살아 있다고는 말 못할 것이다. 전시효과로 머물다가 사라질 대책보다는 근원적 처방의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투자는 경제의 수혈이다. 경제회생은 수혈로부터 시작된다. 재계에 정체된 투자자본이 약 50조원이다. 이 돈이 새롭게 산업자원화하면 서민층의 돈도 좀 돌고, 일자리도 늘고, 내수도 더 신장될 것이다. 그런데 꽉 거머쥐고만 있다. 투자 효과가 의문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지만 언제나 말 뿐이다. 규제개혁도 말만 요란하다. 뭣보다 대기업의 경영상 필수적 선호조건인 수도권 투자 입지를 꽉 틀어막고 있다. 대통령이 이의 잘못을 모를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도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판단에 주술적 동티가 끼었기 때문이다. 초심을 촉구한다. 안그러면 ‘경제선수’로 보았던 국민이 그를 잘못 본 것이다.

베이징 승전보의 ‘되새김’

베이징 승전보 ‘되새김’¶¶정치를 말하자면 욕설이 먼저 나온다. 경제를 생각하면 물가고가 어깨를 짖누른다. 날씨는 막판 더위가 대단하다. 그런데 이런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게 있다. 찜통 더위속에 열기가 더하는 제29회 베이징올림픽 소식이 국민의 마음을 달래준다. 전에는 올림픽 금맥이 초반엔 좀처럼 터지지 않았던 것이, 이번에는 개회식 이튿날부터 날마다 금을 비롯한 메달행진이 이어진다. 그러나 우릴 기쁘게 해준 그들의 선수생활 이면엔 사연이 많다. 한 때의 좌절을 이겨낸 의지의 눈물이 고여있기도 한다. 남자 유도60㎏급 첫 금을 안겨준 최민호는 한판승을 무려 내리 다섯번이나 연거푸 거듭했다. 경기를 텔레비전 중계로 지켜본 우린 후련했으나, 그것은 자신에 대한 한맺힌 시험이었다. 그의 시험은 한동안 소주로 소일했던 실의의 세월을 털어낸 강행군 끝에 마침내 스물아홉 늦깎이로 화려하게 부활해 보였다. 손톱에 가시만 끼어도 손놀림이 거북하다. 갈비뼈에 금만 가도 숨을 크게 쉬면 탁탁 막힌다. 남자 유도81㎏급에서 은메달을 쥔 왕기춘의 경기후 진단결과는 전치 6개월이 요하는 중상의 몸이었다. 8강전에서 상대 선수가 몸싸움으로 뿌리친 팔꿈치에 맞아 열번째 갈비뼈가 다치면서 연골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세상에 그 몸으로 8강전, 4강전, 준결승전을 이기고 결승에 올랐던 것이다. 초인적 사나이 왕기춘에겐 미래가 있다. 이제 스무살이다. 용인대 학생인 것이 자랑스럽다. 양궁 여자단체전(윤옥희·박성현·주현정) 6연패는 세계 양궁사상 불멸의 신화다. 남자단체전 3연패 또한 위업이지만, 6연패의 아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경기에 앞서 부담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남들은 우승을 따놓은 당상으로 알지만 정작 본인들은 긴장의 연속이다. 게임은 언제나 이변이 있다. 더욱이 양궁은 단 1점을 다툰다. 이리하여 10점 과녁을 꼭 꿰뚫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담력이다. 침착성을 잃지 않은 양궁 여자단체전의 고득점 순항은 담력훈련의 소산이다. 뱀을 호주머니에 담기도 하고, 밤중에 혼자 공동묘지를 다녀오도록 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담력을 키웠다. 아름다운 투혼은 메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메달에도 아름다운 투혼이 있다. 아테네올림픽의 은메달리스트 이배영은 남자 역도69㎏에서 이번엔 금메달을 향한 출발이 좋았다. 그러나 경기도중 쥐가 났다. 이게 경기의 가변성이다. 오른쪽 장단지에 갑자기 생긴 근육통이 멈추지 않고 더 심해지자 바늘로 마구 찔러대가며 2,3차 시기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관중에서 그의 투혼에 박수가 쏟아졌다. ‘우생순’의 화신,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아줌마 선수가 세명이나 낀 노장부대다. 하지만 기량은 한층 더 노련하고 투혼은 더욱 빛을 뿜는다. 아줌마 선수는 외국 선수들 중에도 있다. 여자 펜싱 플뢰레 결승에서 우리의 남현희에게 고전끝에 신승한 이탈리아의 발렌티나 베찰리는 서른한 살의 주부로 세 살짜리 아들이 있다. 수영 여자 400m계영에서 은메달을 딴 미국의 다라 토레스는 마흔한 살이다. “수영장 물은 선수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는 말을 했다. 사격의 남자 50m권총에서 우승한 진종오는 준우승한 북측 김정수와 국제대회에서 자주 만나는 사이다. “고저 악을 쓰고서라도 금메달을 따려고한, 자체 말고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네다” 김정수의 경기후 소감이다. 진종오는 “정수 형은 실력도 좋고 존경하는 선수여서 형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둘은 서른한 살, 스물아홉으로 김정수가 진종오보다 두 살 위다. 베이징올림픽의 최대 파란은 수영 남자 자유형400m에서 일어난 박태환의 반란이다. 이의 금메달에 이어 200m에서는 은메달을 추가, 서양인 독무대를 깬 동양의 다크호스 출현으로 세계 수영의 역사가 달라졌다. “해켓(호주) 선수는 관록이 있고 세계적인 선수여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은 박태환이 400m 출전에 앞서 했던 말이다. 해켓 또한 “박태환은 지구력이 좋은 선수”라고 화답한 건 역시 스타다운 스포츠맨십이다. 자유형200m에서 은메달을 딴 박태환은 “은메달도 과분하다. 펠프스(미국)와 레이스를 펼친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며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마이클 펠프스는 세계 수영의 ‘황제’인 것이다. 펠프스도 “박태환은 후반에 강해 50m를 남겨놓고 신경이 쓰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이징올림피아드에서 들려오는 좌절극복, 중상투혼, 담력훈련, 노익장의 선전, 남북선수의 우정, 경쟁자를 칭찬할 줄 아는 스포츠정신 등이 무척 아름답다. 시름과 더위에 찌든 짜증을 잊게 해준다. 올림픽은 이제 중반들어 중반과 종반을 남겨놓고 있다. 앞으로의 소식이 또 기대된다.

부시의 방한 ‘餘錄’ 여록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모두 8명이다. 1954년 제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를 비롯해 어제 1박2일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떠난 부시 등이다. 이 중간에는 존슨(1966년) 포드(1974년) 카터(1979년) 레이건(1983년) 조지 HW 부시(1992년) 클린턴(1993년)이 다녀갔다. 이어 레이건 방한 때까지는 거국적인 환영행사가 펼쳐졌다. 서울은 물론이고 도심지 곳곳에 대형 환영 아치가 세워졌다. 미국 대통령의 카퍼레이드 차가 지나는 곳엔 오색 꽃가루가 뿌려지고 연도에는 수십만 군중이 나와 환호했다. 첫 방한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서울시청 앞에서 차가 더 나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시민이 운집해 차에서 내려 군중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의 방한은 대선 공약이었다. 레이건 방한 때까지는 거국적인 환영 분위기가 이어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랬다. 카퍼레이드가 없어지고 연도의 환영 군중이 준 것은 아버지 부시부터다. 그러나 방한을 반대하는 반미 시위는 없었다. 방한 반대, 반미 시위가 생긴 건 아버지 부시에 이어 방문한 이번의 조지 W 부시가 처음이다. 서울광장에서는 보수진영의 ‘환영’, 청계광장에서는 촛불부대의 ‘반대’ 집회가 서로 맞불을 놨다. 예전의 환영 군중이 대부분 동원된 군중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관이 동원한 관제 군중이기 때문에 환호한 것은 아니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도록 도와준 혈맹의 우의, 수년동안 보릿고개 춘궁기에 미480 잉여농산물을 무상지원한 데 대한 고마움의 정표였던 것이다. 그 무렵 나라 사정은 미국의 농산물을 그저 준다해도 가져올 능력마저 없었던 처지에 실어다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그같은 미국의 우의와 호의는 자기 나라를 위한 원려이긴 했다. 자국의 젊은 장병 수만 명을 희생해가며 북의 침략을 저지한 것은 동북아 정세의 거점 확보를 위해서다. 잉여농산물은 농산물 수급상 태평양에 버려야 할 것을 준 것이다. 하지만 어떻든 미국은 고마운 나라였고, 그래서 그 나라 대통령이 오는 것은 반가운 손님으로 알았던 것이, 이제 달라진 현실은 금석지감을 갖게 한다. 물론 달라진 것은 진보세력의 일부이긴 하고, 달라지지 않은 보수세력도 예전에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한·미 관계는 비대등적 관계에서 대등적 관계로 전환해야 하는 것은 보수나 진보나 다 같은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화된 다원화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 역시 필연적이다. 문제는 이번의 부시 방한을 반대한 반미시위가 진보주의도 아닌 종북주의에 의한 반미 책동이라면 얘기가 다르단 사실이다. 보수의 입장에서 보아도 미국의 대국주의, 부시의 패권주의는 눈에 거슬릴 때가 있긴 있다. 그러나 패권주의는 부시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동북아 좁은 지역에서 일본과 중국의 두 나라 패권주의 틈새에 놓여 있다. 이를 견제하는 힘의 균형을 위해서는 미국을 원용하는 것이 국익이다. 이 또한 보수나 진보나 다 같은 입장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친북도 아닌 종북주의자들 같으면, 미국을 ‘제국주의’로 보고, 부시를 ‘수괴’로 보는 그들의 방한 반대·반미시위는 국익과 상반된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은 이념적 사상의 공동기(空洞期)다. 보수나 진보나 모두 논리와 현실의 괴리를 면치 못하고 있다. 예컨대 보수가 금과옥조로 삼는 성장은 빈부격차의 심화를 가져오고, 진보는 제3의 길을 모색하면서도 모순을 낳고 있다. 이래서 보수는 진보를 빌려 허점을 보완하고, 진보는 보수를 참고로 모순을 보완한다. 보수와 진보가 상호 접근하는 이 시대는 그래서 이념보단 실용주의가 앞선다. 이러한 이념의 제로(0)화 단계를 넘게된 언젠가는 또 새로운 이념이 출현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의 보수주의, 진보주의는 당초의 출발이 대체로 보수냐 진보냐에 따른 구분일 뿐, ‘실사구시’의 실용주의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다. 하물며 이념도 실패의 낙인이 찍혀 폐기된 지가 오래된 사회주의, 그도 ‘우리식사회주의’를 고집하는 평양정권의 종북주의 맹종이 상존하는 것은 유감이다. “만경대정신 이어받자”는 사람을 두둔하고 나서는 위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현대 국제사회는 어차피 나라 대문을 빗장 걸고 살 순 없다. 평양정권처럼 폐쇄사회로 살다간 제 나라 인민 하나 못 먹이고 배 곯여 여기 저기 손벌리다 안 되면 국제 망나니 노릇하기 십상이다. 북녘을 돕는 것도 종북주의자들의 시각은 다르다. 굶는 인민을 돕는 동포애이기보다는 평양정권을 돕는 이념적 우군의 성격이 짙다. 부시는 한·미동맹 강화를 거듭 확인 하고, 별 다른 일은 없이 갔다. 그의 방한은 성남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예포 21발의 발사가 환영행사의 전부였다. 호들갑을 떨지않고 검소하게 한 것은 잘 한 일이다.

올 여름 餘滴(여적)

덥다지만 더울 때다. 엊그제 중복에 이어 말복이 오는 8월8일이다. 추울 땐 추워야 하는 것처럼, 더울 땐 더워야 한다. 논 물은 김 매는 남정네 손이 따끔거리도록 끓고, 밭고랑이에서 호미질 하는 아낙네 얼굴에 땅김이 후끈 후끈 솟는다. 대지가 달아 오른다. 삼복 더위속에 복날마다 벼줄기 마디가 한마디씩 생긴다. 세 마디가 되고나서 이삭을 팬다. 밭곡식은 작열하는 햇살로 열매가 영근다. 오곡백과를 살찌우는 것이 여름철 염제(炎帝)다. 현대인들은 더위를 더 타게 돼있다. 초저녁 대나무 평상가에 모기불을 피워놓고, 온 가족이 담소를 나누며 시원한 우물속에 담가둔 참외며 수박을 먹곤 했던 그런 공간이 사라진 지 오래다. 수수깡 엮음에 흙손질한 황토벽 집도 볼 수 없다. 현대인은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더미에서 산다. 도시는 말할 것 없고 농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집이란 게 시멘트로 된 콘크리트 투성이다. 아파트나 빌라는 물론이고 단독 주택도 마찬가지다. 집을 나서면 또 아스팔트 세상이다. 어디를 가든 맨땅은 밟을 수가 없다. 어느 연구조사에 의하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복사열은 상상을 넘어선다. 콘크리트 지붕이나 벽은 섭씨 60도까지 올라가고, 아스팔트는 섭씨 70도까지 오른다는 것이다. 이의 복사열은 대기를 달군다. 해가 져도 이내 식지않아 열대야를 이룬다. 밤에 집밖의 기온이 섭씨 25도 이상인 더운 밤이 열대야다. 대기 자체가 지닌 더운 기온도 기온이지만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복사열이 그같은 대기를 더 덥게 가열하여 열대야를 심화 하는 것이다. 기상대가 발표하는 기온은 기상대내 초원에 설치된 온도계에서 관측된 기온이다. 이에따라 발표되는 기상예보 온도는 도시내 실제 체감 온도와는 차이가 난다. 아마 5도에서 7도 차이는 있을 것이다. 여름철 더위로 유명한 데가 분지로 둘러싸인 대구다. 대구로 전근간 직장인들은 처음 맞는 여름 한철엔 으례 더위를 먹어 고생하기가 예사다. 조선일보와 서울신문에서 23년간 대구주재기자였던 필자가 취재에 애먹었던 것 중 하나가 폭염 사진이다. 본사 지시는 특유의 현상을 그림으로 잡으라지만 아무리 더워도 다 비슷비슷한 것이 더위 사진인 것이다. 그런데 섭씨 35도가 넘으면 아스팔트는 곤죽이 된다. 대구역사를 배경으로 중앙로 아스팔트가 차바퀴 자욱들로 얼룩진 사진을 찍어보냈지만, 이도 한 두번이지 해마다 같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명의 발달은 에어컨을 만들었으나 냉방병을 유발한다. 가장 좋은 납량법은 자연 친화다. 요즘 만병통치 비법처럼 내놓은 황토○○니 심지어는 황토○이니 하지만, 전에는 아예 살기를 황토벽 집에서 살았다. 언젠가는 황토를 깐 기와지붕, 수수깡 엮음의 황토벽에 맨마당 정원을 둔 집이 아파트보다 선호되는 복귀현상이 올 것이다. 여름철 납량으로 탁족(濯足)은 간편하면서 효험이 높다. 옛 선비들이 야외로 시회(詩會) 나가 점잖은 체면에 웃통벗고 멱은 못감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것이 탁족이다. 지금 역시 아무데서나 멱을 감지 못하는 것은 체면도 있지만 공중도덕 때문이다. 간소한 나들이로 탁족을 즐길만한 곳으로는 양평 가평이 으뜸이다. 수려한 산세에서 흐르는 계곡물은 가히 살아 숨쉬는 청정지수(淸淨之水)다. 수원 근교에는 천혜의 광교산이 있다. 생각해보면 덥다는 것은 육체적 반응이면서 심리적 반응인 것 같다. 사람이 열불이 나면 더 더운 게 심리적 반응인 것이다. 반대로 심리적으로 안정되면 더위를 덜 탈 것이다. 이 여름철 폭염을 잘 넘기는 비결아닌 비결을 들자면 마음을 스스로 가다듬는 생활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흔히 이를 수양이라고 하지만 거창하게 수양을 말 할 것까지는 없다. 그러나 더위와의 씨름은 때로는 맞부딪치는 것이 왕도다. 더위를 피하는 것이 아니고 감내하는 것은 또 다른 납량법이다. 사우나는 호수가 많은 핀란드 특유의 증기욕·열기욕이 전래된 것으로, 이완된 피부를 호수에서 수영으로 수축시키곤 했던 것이다. 한데, 사우나를 안해도 한번 쏟아지는 여름땀은 비지땀으로 변한다. 굳이 닦지 않고 땀이 나오고 싶은대로 놔두는 것은 이도 사우나다. 자연식 사우나다. 작업을 하거나 운동으로 비지땀을 쏟아내는 것은 더욱 좋다. 어차피 집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엔 샤워를 한다. 땀을 많이 흘린 날 갖는 샤워의 상쾌감과 땀을 별로 흘리지 않은 날 샤워 뒤에 갖는 상쾌감은 차이가 있다. 여름엔 땀을 적당히 흘리는 게 제격인 것은 심신 양면으로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불이 나는 소식이 자주 들린다. 이명박 정부가 하는 일 매사가 그 모양이다. 보수층의 이미지를 혼자 다 망가뜨리고 있다. 올 여름은 그래서 열불이 더 난다. 열불도 보통 열불이 아닌 ‘명박열불’이어서 스스로 가다듬기엔 주체스러워 힘이 든다.

MB는 맹탕인가?

이명박 후보가 이토록 못난 대통령일 줄은 차마 몰랐다. 고집만 있고 소신은 없다. 예컨대 측근 챙기기는 국민사회의 눈총도 외면, 염치 불구하고 열심히 챙긴다. 고집스런 단면이다. 고집은 사익(私益)이다. 그런데 소신은 없다. 소신은 경륜이다. 공익(公益)인 것이다. 대통령의 말이 갈팡질팡한다. 소신이 있다 할 수 없다. 경륜 결핍증이다. 믿을 수가 없다. 불과 집권 5개월만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국민의 불행인 것이다. 경제를 살리겠다면서 불씨를 끈다. 엔진의 출력을 살리지 못하는 자동차는 가파른 고개를 넘지 못한다. 수도권의 성장동력을 죽여선 경제회생의 고개를 오를 수 없다는 것은 경제논리다. 그도 이렇게 말했다. 한데, 이제 말을 바꾸었다. 수도권 기업규제 전면 재검토가 수도권 대기업 규제 유지로 변했다. 공기업 민영화 및 구조조정이 축소 및 추후 결정으로 후퇴했다. 혁신도시·공기업 이전 방안 수정은 현행 유지로 돌아섰다. 1가구 1주택 장기보유자 종합부동산세 완화는 종합부동산의 틀을 그대로 유지키로 했다. 행정복합도시·혁신도시·기업도시 등은 이명박 정부 들어 가진 감사원 감사에서 고비용 저효율로 부정적 판단이 내려졌던 사안이다. 이런데도 굳이 감행하는 것은 선심성 정치논리다. 선거공약 같은 건 휴지통에 내던졌다. 쇠고기 사태 이후 지지도를 의식한 좌고우면의 눈치 놀음에 급급한 탓이다. 그러나 말을 바꾼다고 해서, 노무현 정부 정책을 이어 받는다고 해서, 비수도권 지방영합주의로 간다고 해서 이명박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포필리즘은 거품이다. 성공할 수가 없다. 도시 믿음이 안 간다. 공공요금을 안올린다더니, 겨우 한 달 만에 도시가스며 전기 등 공공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야단이다. 이도 도시가스 인상폭은 무려 25~30%다.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가 나올지 모른다.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의 유형으로 두 가지가 있다. 소신형과 품성형이다. 소신형은 신뢰성이며 품성형은 도덕성이다. 근대 독일의 비조 비스마르크는 소신형이다. 박정희도 소신형이다. 비스마르크는 ‘철의 재상’으로 그리고 박정희가 ‘근대화의 기수’로 평가된 것은 훗날이다. 재임 중엔 욕을 꽤나 얻어 먹었다. 박정희의 경우 제4공화국의 유신독재 이전, 중화학 및 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운동 등을 추진했을 당시의 야권 비난은 정말 대단했다. 이를 극복해낸 것은 소신이다. 베트남인민공화국의 국부 호치민은 품성형 지도자다. 월맹군이 초강대국 미국과 맞서 죽는 것을 영예로 알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다. 인민과 똑같이 먹고 자며 생활하는 호치민 같은 참 위민정신의 지도자라면,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충성심이 미국을 물리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충성심은 호치민의 몸과 맘에 깊숙이 벤 인민과의 차별을 모르는 높은 도덕성이 미친 영향이다. 흔히들 말한다.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지만,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 모든 국민의 뜻을 다 받들 수는 없는 일이다. 어차피 지도자는 집중과 선택을 요구받는다. 이의 판단이 곧 소신이다. 소신은 반대를 설득하고, 설령 설득이 되지 않아도 책임을 지고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이 경륜이다. 이것이 소신형 지도자다. 품성형 지도자는 다소 간의 이견이 국민 가운데 있어도 지도자의 도덕성을 믿기 때문에 반대를 않고 따르게 만든다. 지도자의 소신형이 사후 승복 형태라면, 품성형은 사전 승복 형태로 볼 수가 있다. 그럼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 스타일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소신형도, 품성형도 모두 아니다. 신뢰성도, 도덕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갈팡질팡 맹탕이다. 지난번 사람을 닮아 편가르기에 바쁘다. 주변의 낙천·낙선 인사 등을 공기업에 내려보내기에 바쁜 낙하산 부대장이다. 이래가지고 무슨 공기업 개혁을 한단 말인가, 표리 부동에 언행 불일치다. 쥐를 잘 잡는 고양이일 것 같으면 흰 고양이 검정 고양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백묘흑묘론’은 등소평의 유명한 경제개혁 논리다. 중국은 이렇게 해서 결국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 경제는 후발국인 중국 경제에 사실상 추월당했다. 이런 판에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한가하게 흰 고양이 검정 고양이를 찾는다. 이른바 ‘선지방발전 후수도권규제 완화’는 백년하청과 같다. 그렇다하여 수도권 규제완화를 위해 지방발전을 도외시 하라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가 수도권은 나라안이 아닌가. 수도권의 국민총생산 제고가 끼치는 국민경제 및 국가경쟁력 기여를 간과, 이분법을 일삼는 황당한 편협증 동조에서 대통령은 빨리 눈을 떠야 할 것이다.

일본의 ‘독도 억지’는 ‘국토 침탈’ 기도의 국난이다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임진왜란, 한·일합병에 이어 세 번째 기도하는 국토 침탈 행위다. 그런데 후쿠다 정부의 침탈 기도는 과거의 독도 분쟁에 비해 특이하다. 역사적으로 보아 앞에선 미소 지으며, 뒤통수를 친 것이 임진왜란이며 한·일합병의 침탈 수법이었다. 후쿠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지난 9일 G8회의 때 가진 한·일 두 정상회담은 세 번째 만남이다. 후쿠다 일본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후쿠다 총리는 이 대통령에게 한·일간의 신시대를 말하면서 경제교류는 물론이고 대북 공조 등을 제안했고, 대통령 역시 두 나라간의 실용주의 외교를 말하며 친근감 표시로 화답했다. 그러나 후쿠다 총리는 중학교 교과서 해설서의 독도 영유권 명기로 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이만이 아니다. 덤으로 구설수까지 안겼다. G8회의 초청으로 이뤄진 세 번째 만남은 일종의 함정이 됐다. 대통령은 분명히 “독도 영유권 명기는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가 되었다. 그런데 “연기해달라”고 했다는 것이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보도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 후쿠다 총리가 독도 영유권 명기를 이 대통령에게 이미 통보했다는 것으로 전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에 통보한 것이 아니고 총리의 입장을 설명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아울러 “연기해달라”는 보도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야말로 어르고 벼르고, 병주고 약주는 식의 언론 플레이다. 연기설은 사실이 아닐 것으로 믿는다. 어제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이 부분에 분명한 말이 없었던 것은 미흡하나, 그렇게 믿고자 한다. 또 이를 빌미삼아 정치공세를 펴는 것도 옳지 않다. 저들의 의도적인 언론 흘리기, 즉 리크정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일본 총리에게 밝힌 “영유권 명기는 안 된다”는 말 한 마디로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면 대통령의 불찰이다. 여기서 노정객의 노회한 후쿠다 일본 총리에 비해 뭘 모른 이 대통령의 외교 미숙을 절감하는 것은 유감이다. 대통령에게 보인 일본 총리의 미소(微笑)는 내심 ‘독소’(毒笑)였던 것이다. 일본은 지난 3월 벌써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을 확정하면서 독도 영유권을 해설서에 넣기로 작정이 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도 이를 몰랐던 것은 아니나 4월 한·일정상회담을 의식해 문제삼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간과한 것이 결국 불씨를 키웠다.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는 정부의 공식적인 교육 가이드라인으로 독도 영토교육을 앞으로 더 강화한다는 것이 일본 문부과학성의 방침이다. 일본은 독도의 국제분쟁화를 위해 치밀한 준비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동해를 일본해로 고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그들 말대로 일본해에 있는 다께시마, 즉 독도를 일본 섬으로 하는 검색어 변경을 미국의회도서관에 신청했다. 다행이 일단은 변경이 유보되긴 했으나 방심할 일이 아니다. 미국의회도서관은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으로 이의 검색어는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후쿠다 정부의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의 독도 영유권 명기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는 요란하다. 요미우리신문은 사설에서 ‘늦었다’며 질책했는가 하면, ‘고유영토’라고 더 강한 표현을 하지 않았다는 등 불만이 만만치 않다. 일본은 경제대국에 이어 거듭된 군사대국의 패권주의 극우로 치닫고 있다. 이에 돌아봐야 하는 것은 우리의 그간 대응 자세다. 일본에서 독도를 문제 삼을 때마다 우린 일과성 망언으로 규탄만 하고, 멀쩡한 우리 땅이란 생각만으로 손놓고 있었던 것이 잘 한 것은 아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일본 사람들이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폭격도 1941년 12월8일 미명에 기습 공격, 미국 태평양함대를 궤멸시켜놓고 그날 정오에 비로소 선전포고를 했던 사람들이다. 지금 일본을 규탄하는 나라안 목소리가 높다. 문제는 규탄만으로는 저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할 사람들이란 것이다. 독도가 우리 땅인 고문서 등 역사자료 수집, 국제법상의 논증 확보, 의연한 대일외교 등과 함께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 강화가 있어야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력 배양이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게 또 일본의 속성이다. 우리가 저들과 버금갈 만큼 국력이 강해지면 감히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지 못할 것이다. 일본의 독도 침탈 기도는 국난이다. 국난 대비는 국론의 일원화로 시작돼야 한다. 후쿠다 총리에게 밀린 이명박 대통령이지만, 독도에 관한 한 더는 밀리지 않도록 국민이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하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南北과 兩岸이 다른 점

타이완해협에 축복이 일렁거린다. 천수이볜(陳水扁) 민진당 총통의 양안(兩岸) 긴장시대가 가고, 마잉주(馬英九) 국민당 총통 들어 타이완-본토 양안에 평화가 깃들었다. 진보세력의 민진당 정권보다 보수세력의 국민당 정권이 중국 공산당 정권과 더 가까워졌다. 중국 공산당이 개혁 개방을 이룩해온 변화의 성공인 것이다. 타이완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 제2차 국공합작(1937~1946)을 편 지 62년만이다. 또 2차대전후 국·공간 내란으로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게 쫓겨 1949년 12월 타이완으로 건너간 지 59년만이다. 지난 4일 타이페이 쑹산(松山)공항 등 2개 공항에서 대륙 관광객들을 환영하는 용춤이 흐드러지게 펼쳐졌다. 같은 날 타이완 관광객들은 베이징 등 5개지역 공항을 향해 대륙으로 날아가 역시 환영을 받았다. 양안 사이의 주말 전세기 운항이 정기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2주만이다. 마잉주 타이완 총통이 베이징을 방문,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진 지 2주만에 나타난 변화다. 타이완 정부는 23만6천명의 병력을 20만명으로 줄이고,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꾸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두 정상회담은 선언문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분단 59년만에 직항로와 함께 민간인의 자유왕래의 길이 트였다. 한반도 사정과는 판이하다. 한반도는 두 명의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선언문을 채택했다. 금강산 관광이 가능해진 것은 북측의 외화벌이 때문이다. 남쪽 사람들의 북녘 방문이 잦지만 제한적이다. 이도 돈을 줘야 된다. 북녘 민간인이 남쪽을 찾는 것은 운동선수들 뿐이다. 타이완과 중국 같은 자유왕래는 요원하다. 남북 간의 긴장 완화는 남쪽이 북측에 고분고분할 때 뿐이다. 북측의 비위를 조금만 상하게 해도 그만 돌아서곤 한다. 그러나 중국은 다르다. 타이완에 손을 내미는 일 따윈 없다. 자신에 차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오는 8월 베이징올림픽을 끝내고 나면 세계적인 신문화국가로 두각을 드러낸다는 긍지에 차있다. 중국도, 북녘도 같은 공산당 정권이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우선 중국과 타이완은 전쟁이 없었다. 금문도 등을 둔 국지전은 있었지만 전면전은 없었다. 이에 비해 남북간은 3년 여에 걸친 시산혈하의 동족상잔이 있었다. 참혹한 6·25 전쟁을 일으켜 동포끼리 불신의 골을 깊게 만든 장본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이며 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이다. 중국은 실용주의 노선으로 꾸준히 개혁했다. 인민을 배불리게 하면서 자유를 주었다. 개혁은 개방으로 이어졌다. 북녘은 우리식 사회주의로 나갔다. 인민은 배곯이면서 자유가 제약됐다. 주체사상은 폐쇄사회로 이어졌다. 중국이나 북측의 공산주의는 일찍이 레닌이 경고한 수정주의다. 중국은 실용주의로 수정하고, 북측은 우리식사회주의로 수정했다. 그러나 북측 공산주의는 역시 레닌의 경구인 종파주의 딱지가 하나 더 붙어있다.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것은 공산주의 원전에 없는 종파주의인 것이다. 북의 ‘혈통승계’ 체계는 세습 왕조 체제나 다름이 없다. 중국처럼 개혁 개방을 하면 잘 살 것을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못해서 안 하는 것이 북의 처지다. 개혁 개방은 주체사상과 함께 폐쇄사회가 붕괴되어 세습 체제가 위협받기 때문인 것이다. 일부 진보세력에게 충심으로 일러둔다. 진보주의는 좋다. 그러나 진보주의를 빙자하여 북의 행실을 역성드는 도착된 가치관은 버려야 된다. 남쪽 정부가 하는 일은 사사건건 민주주의를 빗대어 헐뜯고 물고 늘어지면서, 제 나라 인민을 배곯이며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북쪽 체제를 극력 옹위하는 관용의 근거가 뭣인지를 묻는다. 영변의 냉각탑 폭파에 이은 6자 회담이 곧 베이징에서 오랜만에 열린다. 문제는 핵 폐기의 성실성이 과연 핵 무기 폐기까지 가느냐에 있다. 늘렸다가, 죄었다가 하는 예의 줄다리기 상투적 수법이 또 안 나온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중국 공산당 정권은 세습 체제가 아니다. 양안의 진실된 화해 무드를 보면서, 동족인 평양정권은 공산당을 해도 하필이면 별난 공산당을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혁명과 개혁의 차이

‘생산에 타격을 주는 투쟁’을 다짐했다. “정부의 탄압이 계속된다면 전기를 끊고 철도를 멈추는 방식으로 수위를 더욱 높여갈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쇠고기 총파업 출정사다. 쇠고기 파업은 노동조건과 무관한 정치파업이다. 정치파업의 정당성을 ‘근로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것’으로 끌어다 대는 강변이 있다. 논리의 비약이다. 파업이 가능한 근로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 도모는 어디까지나 노동조건과 연계되는 구체적 문제에 국한한다. 근로자의 지위향상 도모를 포괄적으로 확대, 제반 문제에 무소불위의 행동권을 방임, 무법천하를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전 전국의 물류를 마비시킨 화물연대 파업은 노동조건과 유관한 생계형 파업이었으므로 일주일만에 정상화가 가능했다. 대화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형 파업은 불법이어서 대화가 될 수 없다. 단속의 대상이다. 앞으로의 단속 과정에서 물리력 충돌이 걱정된다. 이른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공안정국으로 몰아대는 세력이 있다. 경찰의 과잉진압을 트집잡지만, 과격시위가 원인 행위다. 부끄럽게도 지난 29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은 촛불집회의 일부 군중을 ‘폭도’라고 보도했는가 하면, 중국 인민일보계의 환추시보, 프랑스 AFP 등 외신 보도는 ‘폭력’으로 규정했다. 경찰차를 불지르고 쇠파이프를 휘둘러대는 폭력을 방관할 공권은 있을 수 없고, 또한 공권력이 개입하는 수사는 마땅하다. 마치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던 독재정권의 공안정국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으로 폭력시위 수사를 ‘공안정국’이라고 우기지만 당치않다. 이승만을 하야시킨 4·19를 연상케하는 민중 저항으로 쇠고기 문제를 이명박 퇴진으로 몰고 가지만 역시 당치않다. 지금은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제1공화국의 자유당 독재도 아니고, 제4공화국의 유신독재도 아니고, 또 제5공화국의 전두환에 대해 6월항쟁을 일으켜 민주화를 쟁취했던 당시의 상황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재자는 아닌 것이다. 민주주의의 다원화사회에서 모든 계층의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 지도자는 있을 수 없다. 선거는 이에 최대공약수를 찾는 민주주의의 정치 방법이다. 이에 불만이 있으면 또 다음 선거에서 투표로 제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응징 수단이다. 이명박이 능력은 의심스러워도 독재자는 아닐뿐만 아니라, 미국 쇠고기 협상에 잘못은 있어도 그같은 오류에 재협상을 안 하고 추가협상을 한다고 해서 물러나라고 할 일은 아니다. 그래도 불만이 있으면 내후년 지방선거도 그렇고, 다음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안 찍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책임을 묻는 민주주의 방식이다. 한데, 쇠고기를 빙자해 정권 퇴진으로 몰고 간다. 수입된 미국 쇠고기에 미친 소를 잡은 쇠고기는 없다. 그런데도 있는 것 처럼 미친 쇠고길 들여온다고 자꾸 우긴다. 볼셰비키 혁명 수단인 민중 선전선동을 방불케 한다. 물론 미국 쇠고기를 둔 반정부 세력이 그런 사람들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오만을 일깨울 진보세력으로 사회개혁을 위해 더불어가야 된다. 유감인 것은 더불어가야 할 진보세력이 투쟁 일변도로도 모자라 폭력화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18대 국회 총선에서 진보진영이 퇴조된 연유가 뭣인가를 돌아봐야 한다. 촛불집회에 모인 괄목할 군중이 반드시 진보세력의 지지자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는 현명한 성찰이 있어야 할 때다. ‘전기를 끊고 철도를 멈추는 방식의 강경 투쟁’은 차마 할 일이 못되고 또 그런 일까진 없을 것으로 안다. 그러나 투쟁의 강도를 다짐하는 말일지라도,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다. 궁금한 것은 뭣을 위한 투쟁이냐는 것이다. 노동단체가 장외정치에 휘말리는 것은 노동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이명박 정권을 질책하는 게 법 테두리 밖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법 테두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이 혁명과 개혁의 차이다. /임양은 주필

대통령의 ‘결함’

전 정권의 뒤치다꺼릴 하다가 잘 못해 쪽박 신세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렇다.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젠 노무현 정권이 남긴 과제다. 그런데 전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이만이 아니다. 편가르기, 코드인사 등도 이어 받았다. 인적쇄신을 한다며 청와대 비서실 사람들을 물갈이한 것이 오십보백보다. 맹자(孟子)가 양나라 혜왕이 정사에 관해 질문한 대답끝에 “전쟁에 패해 오십보를 물러난 것이나 백보를 물러난 것이나 도망친 것에는 차이가 없다”는 비유로 정사의 시시비비를 설파했다.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비서실 직제를 개편한다는 데 웃기는 소리다. 직제를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잘된 직제도 잘못 운용하면 소용이 없고, 못된 직제도 잘만 운용하면 소용이 있다. 국민과의 의사 소통 문제는 직제에 있지 않다. 대통령의 의지에 달렸다. 대통령이 측근을 안 쓸 수는 없으나, 측근만으로 권좌를 채워서는 들어야 할 듣기싫은 소릴 듣지 못한다. 측근은 늘 듣기좋은 소리만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나라 안팎의 모든 인재를 등용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 있다.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안 한다’지만 마다하는 사람도, 필요한 사람 같으면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써야 한다. 그러나 인재를 보는 이명박의 안목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언제나 자기 주변에서 사람을 물색하는 데 그친다. 여당내에서 아직도 ‘친이’ ‘친박’소리가 나오는 것은 도덕성의 치명적 흠결이다. 보수진영도 그렇고, 더 나아가 진보진영의 사람도 쓸만한 인재는 쓸 줄 아는 큰 국량을 보여야 한다. 대통령 개인에게 충성을 다 하는 측근보다는 국사에 충성을 다 하는 인재가 대통령을 빛나게 해줄 사람이다. 대통령이 국정 구석구석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시시콜콜 관여하는 것도 옳지 않다. 사람을 썼으면 맡겨야 한다. 설령 대통령의 의중에 거슬리는 점이 있어도 일을 잘 하면 놔둬야 한다. 단안을 내려야 하는 것은 의중도 받들지 못하고, 일도 잘 못하는 것을 더 용인할 수 없을 때다. 전두환을 예로 든다.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에 문제가 많은 정권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물가 등 민생이 가장 안정됐던 것이 그 시대다. 물론 저유가 등 ‘3저’의 시운이 따라준 이유도 있다. 하지만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자신이 기용한 사람들에게 “내가 뭘 아나?” “믿고 맡길테니 한 번 잘 해봐!”하는 식으로 힘을 실어준 용인술이 주효했다. 그 중에는 신군부의 반민주화에 저항했던 인사도 있다. 이명박이 노무현을 닮은 또 한 가지는 개혁을 한다면서 저지른 반개혁적 인사다. 정부 산하 공기업 임원을 자기네 패거리 일색으로 채운 것이 노무현 정권이다. 공기업의 체질을 개혁한다면서, 공기업 임원 자리를 논공행상의 전리품으로 삼았다. 이명박 정권 역시 다름이 없다. 아직도 배겨있는 노무현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못해 안달인 것은 개혁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명박 자신의 패거리에 자리를 나눠주기 위해서다. 공기업 임원은 내부의 전문가들로 채우는 자율적 독립성이 진정한 개혁의 시발점이다. 이 와중에 요지경속인 것은 KBS 등 공영방송이다. 이미 전 정권 세력이 깊이 부식된 공영방송에 대한 이 정권의 물갈이 시도를 두고 진보세력은 “보수세력이 방송 장악을 음모한다”고 힐난한다. 뭣 묻은 뭣이 겨묻은 뭣을 나무라는 격인, 이 같은 비난을 이명박이 듣는 것은 평소 자기사람 심기에 바쁜 부도덕한 인사에 기인한다. 대통령 중임제도 아닌 단임제다. 대통령이 됐으면 되기까지의 주변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측근들에게 ‘배신자’소릴 들어야 된다. 그 많은 측근을 챙기다가는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측근으로부터 벗어나면 국민과 가까워진다. 국민과의 소통은 대통령 자신이 민심의 바다 속에 몸을 던지는 것이 진정한 소통이다. 예컨대 촛불시위에 컨테이너로 ‘명박산성’의 바리케이드를 겹겹이 쌓기보단 촛불시위 현장을 직접 찾았어야 했다. 신념있는 이런 도덕적 용기를 보일 때 촛불민심 또한 감동을 받는다. 대통령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겠다”고 한다. 의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민사회는 다원화사회다. 국민의 목소리에는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 이런 저런 목소릴 다 섬길수는 없다. 도대체 어느 국민의 목소리를 하늘같이 섬기겠다는 것인가, 그냥 ‘섬기겠다’고 해서는 흔히 하는 소리로 들려 신뢰를 얻지 못한다.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정중하게 고개 깊숙이 숙여 인사하는 것도 한도가 있다. 안다, 어려운 시기다. 경제성장률 7% 공약이 6%로 낮아졌다가 5%도 안 되는 4.7%로 떨어졌다.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대운하’니 ‘공기업 민영화’니 하는 시의에 안 맞는 허황한 얘기보다는 국정의 범사부터 잘 꾸려가는 것이 실추된 신뢰를 회복한다 할 수 있다. 물론 국정의 미래지향적 거시지표는 있어야겠지만, 완급의 충돌이 있어선 안 된다. 완급의 충돌은 미래학이 제시하는 우려이나, 지금도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대통령은 자신의 결함인 국정운용 스타일을 크게 반성해야 할 때다./임양은 주필

민주노총의 ‘억지’

인터넷에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유비(유언비어) 통신이 나돈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다. 뿔난 미국놈 이야기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다.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무장해제 한다며 미·소 양군이 들어왔다. 38선을 중심으로 이북에는 그해 8월20일 소련군이 그리고 이남엔 같은달 25일 미군이 들어왔다. “미국놈 머리에 왜 뿔이 없지?” 핼로모자를 쓴 미군을 난생 처음보는 초등학생들의 이런 의문엔 이유가 있었다. ‘미영귀축박멸’(米英鬼蓄撲滅)이라며, 미군은 뿔달린 도깨비나 짐승처럼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교육이 그랬다. 지금 우리의 초등학생들이 왜곡된 인터넷 정보에 의한 이념교육으로 망가지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려요”라는 등 이념적 반미 댓글이 초등학생 전용카페를 도배질 하고 있다. “미국사람들은 미국산 쇠고기 안먹는데요”라고도 한다.(본지 18일자 6면보도) 미군은 뿔난 도깨비 모양으로 가르쳤던 일제교육과 다름이 없는 황당한 이념교육이다. 도대체 이토록 오도하는 어른들은 그렇게 해서 뭘 하자는 것인가, 해도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화물연대며 건설노조 파업으로 국민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지만 이는 생계형 파업이다. 그런데 ‘촛불 승리를 위해 총파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노총이다. 미국 쇠고기 재협상 요구 시위가 돌연 총파업으로 변질됐다. 쇠고기 문제가 파업 요건이 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정치적 파업이다. 정치적 파업은 노동운동이 아니다. 이들의 파업 연유를 몇가지 사례로 들어본다. “노동자가 광우병에 걸리게 되면 건강을 잃고 노동력을 상실한다”고 한다.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려요”하고 같은 소리다. 광우병에 걸리면 노동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이면 누구든 단 한명이라도 그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미국에 지금 광우병이 발생한 것도 아니다.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방어책을 단단히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마치 광우병이 퍼져 있어 이에 걸린 미친 미국 쇠고기를 들여오는 것처럼 야단들이다. 폭등하는 기름값과 물가 안정의 민생도모를 위해 파업을 한다고 한다. ‘고양이가 쥐 위한다’는 꼴이다. 길을 막고 물어보면 알 것이다. 총파업이 민생안정을 가져온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되레 민생저해가 막심하다. 민생문제를 들먹인다고 하여 총파업이 합법화 되는 것은 아니다. 공공부문 민영화는 의료·에너지·물 등을 대기업의 돈벌이 수단으로 내주는 것으로 이를 막기위해 총파업을 한다고 한다.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는 동의한다. 지금은 그럴 단계가 못된다. 하나, 당장 공공부문 민영화가 이뤄지고 있는 건 아니다. 총파업의 이유가 될 수 없다. 가관인 것은 상급단체로서의 전횡이다. 현대자동차노조는 투표를 통해 재적조합원 과반수 미달로 파업을 거부했다. 이런데도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에 가입했기 때문에 상급단체의 총파업 결의에 따라야 한다고 한다. 불법파업을 부추긴다. 민주노총은 과격 양상을 노동운동의 선명성으로 둘러댄다. 반면에 노동운동의 온건성은 정경유착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떼법’에 중독된 그들은 ‘귀족노조’로 비치는 것이 객관화된 사회적 인식이다. 이같이 각인된 인식은 평소의 이념성향과 상치된다. 예컨대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자 농민위에 군림하는 신 프롤레타리아 귀족이 됐다. 신 프롤레타리아 귀족은 수단만 다른 신 부르조와인 것이다. 민주노총에 노동운동 기여를 위해 당부코자 하는 것은 노동단체는 이념성 정치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동운동의 과격성에 국민사회가 식상한지 이미 오래다. 이런 사회적 정서에 세를 만회키 위해 벼르는 것이 이른바 ‘촛불시위 승리’의 다짐인 모양이지만 아니다. 그런다고 서울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시위에 쏟아져 나와 합세하거나 박수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목적을 위한 수단 방법이 가히 혁명적인 것을 불사하지 않는다면, 초법적 수단 방법을 능사로 아는 잘못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누적돼온 조직의 경직된 관념으로부터 또한 해방되어야 한다.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젠 촛불시위가 말을 할만큼 했다. 이젠 이명박 정권이 선택하는 책임에 속한다. 협상중인 대비책은 두고 지켜볼 일이다. 장차 수입되면 소비 여하는 소비자들이 알아서 할 몫이다. 민주노총이 미국 쇠고기를 빌미로 총파업을 서두르는 것은 억지 중에도 상억지다. /임양은 주필

반미감정의 ‘덫’

엊그제 밤이다. 서울 세종로 일대를 뒤덮은 비폭력 촛불인파, 촛불의 물결은 가히 외경스러웠다. 사람들, 사람들, 그들의 물결은 조용하면서도 강한 힘을 보였다. 이들의 길을 막은 컨테이너 바리케이트는 흉물이다. 꼭 쇠고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다는 아니다. 살기가 어렵고, 세상사가 온통 화난 일만 생겨 촛불을 든 사람도 있고, 이명박(대통령)이 하는 짓이 미덥지 못해 촛불을 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촛불정서의 저변을 한 마디로 집약하면 반미감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용미의 입장이다. 이렇긴 해도 반미주의자는 용미도 친미주의로 몰아댄다. 굳이 그러는 덴 또 악다구니를 써가며 아니라고 할 마음은 없다. 반미감정은 세계적 추세다. 영국이나 프랑스에도 반미주의가 있다. 유럽의 반미주의는 세계질서 관리의 주도권 다툼이다. 중동의 반미주의는 이스라엘에 치우친 미국의 편향정책에 기인한다. 동북아시아는 대미 안보관계와 관련된 불만이다. 제3세계는 세계질서 및 세계경제의 미국 의존에 관한 우려다. 이래서 나온 게 반세계화다. 미국내에서도 힘의 논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다. 예컨대 테러 확대의 재생산이 힘의 논리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반미에는 좀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예를 들면 부시의 독선주의가 한국의 국민감정을 자극할 때가 적지않다. 이런 것은 순수한 정서적 반미감정이다. 특이한 것은 이런 정서적 반미감정이 아닌, 의도된 이념적 반미감정이다.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지정학적 현실은 ‘반미’에 따로 붙은 숙어가 있다. ‘친북반미’다. 친북 자체는 부정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동포애가 아닌 이념적 동조의 친북이다. 사례를 든다. “만경대정신 이어받자”는 대학 교수가 있다. 이의 ‘친북반미’를 두둔하는 반미주의는 의도된 이념적 반미주의다. 이들은 이쪽 정부가 하는 일은 사사건건 헐뜯으면서 평양정권이 인민들 배곯이는 것은 관대하게 치부한다. 미국 쇠고기 수입개방은 미국에 자동차 등을 더 팔아먹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추세다. 이렇긴 하나, 이명박이 부시 만나러 가서 30개월이상 월령소 수입금지, 검역주권 등의 확실한 확립없이 덜렁 문을 열어준 것은 경솔했다. 미국 소가 당장 광우병에 걸린 게 아니고 광우병은 유럽이 원조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못한 것은 잘못이다.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시민들이 들고 나선 정서적 반미감정은 이해가 된다. 이명박은 더욱이 처음부터 일을 화끈하게 매듭짓지 못하고 갈팡질팡한 가운데 땜질에 급급하다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재협상은 물론 국가신인도에 영향을 주지만 민중의 요구다. 그런데 하라는 데도 안 하고 잘못했던 문제 해결만 추진 하고 있다. 인적쇄신 요구에도 비서실 수석진과 내각 각료의 사표를 선별 수리할 모양이다. 재협상 요구와 수석진, 내각 총사퇴 요구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젠 지켜보는 것이 순리다. 앞으로 헌법재판소에서 판결할 미국 쇠고기수입 장관고시 위헌청구의 헌법소원도 계류돼 있다. 비폭력 촛불시위가 혁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헌정질서가 존중돼야 한다. 이는 정서적 반미감정의 충정이다. 반면에 무조건 반대로 일관, 폭력적 촛불시위 유발을 거친 혁명단계를 바라는 요량 같으면 헌정질서를 무시할 것이다. 이는 이념적 반미감정이다.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 친미든 반미든 한·미 교역은 상호 이해관계라는 사실이다. 국제사회의 이해관계는 친·불친과는 무관한 별개의 사안이다. 민주주의 발상지인 영국에는 아직도 귀족제도가 있다. 귀족제도가 있다고 해서 영국을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미국은 독립선언문에서 자유와 인권을 표방했다. 자유와 인권을 말하면서 노예를 해방시킨 것은 건국 87년만의 일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본주의 발달로 치닫는다. 마오쩌둥(毛澤東)의 혁명사상과 상충된다. 그래도 마오를 국부로 받든다. 자고로 어느 국가사회든 언제나 모순은 존재한다. 모순에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것이 역사 발전의 연속적 과정이다. 쇠고기 파동 역시 이 범주의 갈등이다. 당장 살기위해 고민해야 할 일은 쇠고기 보다 더 급한 게 많다. 고유가는 그중 하나다. 정부가 해야 할 현안이 산적해 있다. 국민사회는 정부를 부려야 한다. 일을 하도록 해줘야 한다. 주장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주장이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정부와 결사투쟁하겠다는 것은 혁명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 헌정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순수한 정서적 반미감정의 촛불시위가 의도된 이념적 반미감정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민중의 현명함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재협상과 내각 총사퇴를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쇠고기 수입개방을 재협상하고 내각과 청와대 비서실 수석들을 총사퇴 시켜라, 최선의 시국 수습방안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대통령은 잘못된 ‘主事대통령형’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바꾸고, 측근위주가 아닌 인재위주의 조각과 비서진으로 다시 짜야한다. 새 정부를 지금부터 시작한다는 각오로 새 출발해야 된다. 나는 미국 소가 광우병 소라고 믿지 않는다. 개방도 해야 된다고 본다. 촛불집회에 나오는 말 가운덴 억지도 적잖다. 인터넷은 선정성 선동이 춤춘다. 시위의 배후에는 드러나지 않은 불순세력이 없지 않다고도 여긴다. 그러나 장대 빗속에 밤을 새우며 촛불을 밝힌 수만 시위군중이 불순세력인 것은 아니다. 선량한 국민이다. 전교조가 꼬드겨서 학생들이 촛불을 들었다고 해도 안된다. 인터넷 바람에 덩달아 나왔다고 말해도 안된다. 거리에 나선 동기야 뭣이든 그들은 자기 생각들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상대를 서로 인정하는 다원화사회다. 상대를 부인하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여 촛불을 든 사람들 말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도 그들 역시 더불어 가야할 상대다. 듣기 좋은 말은 상대가 되고, 듣기 싫은 말은 상대가 아니라고 여기는 생각은 농단이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농단이 발견되는 것은 불행이다. 대통령이 상위 가치의 큰 그림을 구상하면, 이의 중·하위 구성 단계에서 가치를 더하는 창출은 해당 분야 책임자들 몫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주사급 공무원이 할 일까지 간섭한다. 그런다고 의견을 듣는 것도 아니다. 결국은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는 졸속으로 끝난다.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라면서 국민 위에 군림하기도 한다. 미국의 농장에서 부시에게 헌납한 쇠고기 협상도 졸속인 건 사실이다. 월령 소의 쇠고기 수입은 주무 부처에서도 결정되는 줄 몰랐다. 국정의 농단이다. 그래놓고는 “이제 와선 30개월 넘은 쇠고기 수입중단은 당연하다”고 한다. 장관 고시를 게재할 관보 제작이 유보 형식으로 중단되면서 상황은 대통령의 패배로 이미 돌아갔다. 월령 문제 등을 보완협상이니, 추가협상이니 심지어는 ‘사실상 재협상’이니 하는 말로 둘러대는 것은 궁색하다. 재협상을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 미국에 대한 체면치레보단 국민에 대한 체면이 더 중요하다. 국민에게 어정쩡하게 손들기 보다는 완전히 손드는 것이 진솔하다. 재협상으로 굴복하고 나면 앞으로 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는 우려가 틀리진 않다. 사사건건 촛불들고 나오지 않겠느냐는 의문도 무리가 아니나, 대통령이 하기에 달린 문제다. 아무래도 줄잡아 1년 동안은 맥을 쓰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자업자득이다. 촛불시위는 쇠고기 문제를 넘어 정권퇴진운동 양상을 보인다. 더 악화되는 본격적인 단계를 막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 방안이 미국 쇠고기 재협상과 아울러 내각과 비서실 수석진의 전면 교체다. 새 정부가 시작된지 이제 불과 3개월이다. 이 3개월이 마치 3년처럼 진부하게 느껴져 국민사회에 피로감을 준다. 인적 쇄신이 요구되는 이유다. 중폭이든 대폭이든 개각으로는 쇄신의 신선감을 주지 못한다. 청와대 비서실 역시 마찬가지다. 총리 이하의 전 각료와 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진을 조각과 새 진용 수준으로 다시 짤 필요가 있다. 인재는 대통령 눈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눈밖에 더 많다.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대통령이 자만심을 죽이면 정권이 살고, 자만심을 살리면 정권이 더 어려워진다. 모처럼 들어선 보수정권이다. 10년만이다. 나도 보수층이다. 이명박 정권에 차마 말못 할 말을 한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보수층의 기대를 저버린 이명박 대통령은 큰 죄를 졌다. 보수정권이 원래 이런 것은 아니다. 이명박의 실정으로 살판 난 것은 진보진영이다. 보수진영의 이미지를 망친 대통령은 이점에서 대오 각성해야 된다. 예컨대 “나에겐 경쟁자가 없다”는 망언따윈 더 해서는 안된다. 대통령 권한은 면도날과 같다. 면도날을 제대로 사용하면 용모가 깨끗해 지지만, 잘못 옆으로 밀면 얼굴에 상처가 나고 피가 난다. 국민사회는 피를 보고싶지 아니한다. 민심수습책이란 것이 또 좁은 소견머리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임양은 주필

정부의 석유위기 ‘불감증’

석유위기다. 정부는 뭐하는가, 경제의 기본질서가 뒤틀린다. 국제유가가 130달러 대를 넘어선 가운데 국내 휘발유 가격은 ℓ당 2천원 대에 들어섰다. 경유가 휘발유값을 추월했다. 운송업계가 야단이다. 굴리면 굴릴수록 손해라는 것이다. 오징어가 대풍이어도 기름값이 무서워 출어를 포기하는 지경이다. 석유위기는 조만간 시민생활에 직·간접으로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위기는 유럽·북미·일본 등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현상이다. 100달러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상승 곡선을 긋던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넘자 거의 수직 상승을 했다. ‘국제유가가 심상찮아 배럴당 50달러에 육박, 곧 6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는 신문기사가 불과 4년전인 2004년 10월1일자다. 배럴당 200달러 전망이 머지않아 현실화 할 추세다. 산유국은 석유자원을 무기화하고 있다. OPEC(석유수출국기구)은 석유 생산량 정체로 가격담합을 꾀한다. 강대국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근래 OPEC에 공급량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특히 미국과 가까운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무기 수출을 제한하겠다’고 위협했다. 영국 정부도 ‘담합구조를 고치기 위한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다’며 미국에 가세했다. OPEC은 그래도 여전히 꼼짝도 않는다.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크게 한몫 챙겨두자는 것이 OPEC 회원국들의 심산이다. 중동의 석유개발이 본격화한 것은 1908년이다. 그해 5월26일 영국의 지질학자 조지 레이놀즈가 페르시아 산악에서 시커먼 원유기둥이 솟구치는 시추에 성공한 것이 단초다. 올해가 100년 째다. 그동안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앞으로 40년에서 50년이면 자원이 고갈될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물론 자원이 줄어드는 것 만큼 채굴량도 점점 줄다가 고갈된다. IEA(국제에너지기구)는 지난 21일 발표한 ‘석유공급 장기전망에서’ 불과 22년 뒤인 2030년엔 석유 자원이 15% 감소될 것으로 전망했다. 대체에너지 개발이 더 다급해졌다. 석유·석탄·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말한다. 태양열, 태양광, 풍력, 수력, 조력, 지열, 수소, 폐기물 등을 이용해 전기 또는 열을 생산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원자력도 포함된다. 70년대 1차 오일쇼크 이후 많은 나라가 대체에너지 개발에 나섰다. 예컨대 프랑스는 50%, 스웨덴 62%, 일본은 40%까지 에너지 자립도를 높였다. 우리나라는 원자력·수력을 합쳐 에너지 자립도가 18%다. 이도 70년대에 이룬 것이다. 지난 30여년을 허송세월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이 모양이다. 미국은 그동안 탈석유의 산업구조개편을 추진해왔다. 예를 들면 석유 의존도가 높은 중화학공업은 외국으로 이전을 서둘렀다. 공해와 고유가 문제를 동시에 해결키 위한 노력인 것이다. 우린 대체에너지 개발도 손놨을 뿐만이 아니라, 산업구조 역시 개편한 적이 없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국제유가의 고공 행진은 언젠간 석유전쟁이나 석유분쟁으로 번질 공산이 없지 않다. 세계의 경제가 기존의 질서에서 중동의 자원민족주의 지배로 전환되는 것을 서방 강대국들이 묵과하는 덴 한계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많은 미국 젊은이들을 죽이고 막대한 전비로 미 국민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쩌면 오히려 선견지명으로 평가받게 될 날이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우리다. 대체에너지 개발에 힘쓰고 산업구조 개편을 서둔 나라에서도 유가 폭등에 신경을 쓰는게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한 우리의 정부는 넋 놓고 앉아있다. 무대책인 것이 ‘낸들 어쩌랴?’는 식이다. 정부의 경제운용 목표는 지난 3월의 국제유가 80달러를 기준해서 짠 것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 성장은 6%를 이루겠다는 것이, 물가 상승은 5%로 오르고 성장률은 4.4%로 낮아지게됐다. 경제를 살리기는 커녕 현상 유지도 못하는 판이다. 석유위기의 주름살은 민생 곳곳에 파고들어 아우성이다. 물론 치명적 요인이 외부의 석유탓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렇다 하여 대책이 무대책이어서는 정부랄 수 없다. “하반기엔 세계적인 경기 후퇴로 수요가 줄어 유가가 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는 당국자의 안일한 소린 국민의 혈세로 월급받을 자격이 없다. 예상되는 갖가지 시나리오에 의한 여러가지 방안의 정책을 탄력성있게 강구하여야 한다. 비싸면 덜 쓰는 것이 상책이다. 에너지 절약이 절실한 데 전혀 이행이 안 되고 있다. 청와대는 점심시간에 소등을 한다는 데도, 국민사회에 아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청와대 사람들이 부덕 무능하여 믿음이 안 가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부는 책임있는 정책 제시로 국민의 신뢰를 먼저 얻어야 된다.

이명박의 ‘過猶不及’

이 사회가 광우병으로 곧 망가지는 것 처럼 야단들이다. 방송 대담은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앙칼진 목소리로 듣는 이의 감성을 자극한다. 논리 전개의 비약 따윈 묻어버린다. 촛불시위가 대단하다. 진보언론은 연일 미국 쇠고기 수입 개방의 허점을 질타한다. 이명박(대통령)을 욕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석달도 안된 새 정권의 국민 신뢰도가 형편없다. ‘강부자’니 ‘고소영’이니 하는 말은 민심 이반의 신호였다. ‘부자 내각’ ‘부자 청와대’에 막연한 이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민중은 성급하다. 경제는 한두 달 새에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데도 민중이 대통령에 대한 기대에 의문을 갖게 됐다. 경제회생을 둔 후보 때 다짐에 과장이 심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광우병의 실체가 뭔가, 우려가 실체는 아니다. 세상에 우려가 되지 않은 일은 없다. 그런데도 광우병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선전 선동이 먹히고 있다. 주로 책동하는 것은 진보세력이다. 이의 시민단체란 것이 대부분 진보성향이다.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덴 반미감정이 깔린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다 할까, 이런 민중 정서가 광우병 선전선동으로 흔들리고 있다. 미국 쇠고기 수입을 안 해도 진짜 한우 고기 먹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젖소고기 투성이다. 이도 한우로 둔갑해 값이 여간 비싼 게 아니다. 소비자가 반에 반값으로 미국 쇠고기를 먹게 되는데도 마치 국민건강을 팔아먹은 것처럼 매도된다. 국민건강을 해치는 지도자는 없다. 국민건강을 팔아먹는 대통령도 없다. 그러나 대통령을 더 변호하는 데 한계를 느낀다. 나도 저들이 말하는 보수층인 데도 그렇다. 정부가 미국의 동물성 사료금지 조치 내용을 제대로 파악 못한 덴 정말 할 말이 없다. 동물성 사료금지 조치 ‘완화’를 ‘강화’로 안 것을 ‘실무적 실수’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다. 대통령의 무거운 책임이다. “광우병이 발생하면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수용한다”고 미국은 밝혔다. 대통령은 “식품안전에 국민과의 소통이 부족한 점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다 괜찮은 얘기다. 그렇지만 효과는 의문이다. 그간의 수순이 틀렸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수순이 있다. 수순을 어기면 좋은 일도 망치기 십상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으면 이토록 꼬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다’란 식으로 버티다가 이제와서 하는 소리엔 약발이 서기 어렵다. 기왕지사 보다 앞으로가 문제다. 대통령부터 책임을 져보여야 한다. 쇠고기 수입 개방은 원칙 문제다. 그렇다면 상응한 모종의 인책 결단을 보일 필요가 있다. 국민사회는 또 개방의 실리가 뭣인지를 아직도 구체적으로 모른다. 정부의 시책 결함이다. 무능한 소치다. 이번 기회에 이명박 스타일의 결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치명적 흠결이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 보다 못하다. 미국 쇠고기 수입 개방의 경위 역시 이 때문에 말이 많다. 인사도 마찬가지다. 내각이나 청와대 비서실이나 국정 수행의 탄력성 및 활성도가 빈약하다. 프로다운 면모는 조금도 없다. 노무현 정권 못지 않은 아마추어 티가 나 일 하는 것이 어설프다. 사람을 쓰는데 지나치게 자기 사람만 집착한 탓이다. 검증된 인물은 반대 세력에도, 정적 가운데도, 과거의 사람 가운데도 있다. 포용은 대통령의 최고 능력의 덕목이다. 박근혜(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내홍 관계도 그렇다. 경선의 앙금에 집착하는 지나침은 협량하다. 박근혜는 ‘이명박 필패론’을 말했다. BBK의혹 사건을 두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큰 상처를 입히고 또 입었다. 그러나 이명박은 승자다. 모든 것을 털어내는 것이 승자다운 도량이다. 깐마늘 값까지 신경쓰는 것은 자상하긴 하다. 하지만 물가관리를 이런 식으로만 한다고 해서 물가가 잡히는 건 아니다. 거시경제의 전망은 안 보이는 가운데 깐마늘만 신경쓰는 것은 좀스러워 보인다. 대통령은 정치인이다. 야당엔 물론이고 여당에 대해서도 좀 더 성숙된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성숙된 정치력은 감동을 주는 예술이다. ‘과유불급’의 치유는 중용(中庸)이다. 중용은 이도저도 아닌 중간이 아니다. 지나침과 모자람, 강약과 완급, 그리고 적과 동지 등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중용이다. 광우병 소동을 진정하는 길도 이에 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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