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선언의 ‘망령’이 유행한다. 엊그제만도 경희대·동국대·숭실대·이화여대·부산대·전남대 등 23개 대학 725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513명의 문인들도 시국선언을 했다. 일부의 종교·시민사회·네티즌 청년 시국선언도 있었다. 이들만을 보면 세상이 온통 뒤집어지는 것 같다. 과연 뒤집어지는가, 까닥도 않는다. 꾼들끼리의 말 잔치다. 민중은 미동도 않는다. “민주주의가 퇴행을 넘어 붕괴 직전이다”라고 우긴다. “언론 표현의 자유가 말살된다”고 말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닌, 사람 죽이는 세상이다”라고도 한다. “국민과의 소통”을 주장한다. “공안통치가 부활됐다”는 힐난도 있다. 정말 그런가, 그 사람들의 민주주의란 도대체 뭔가 퇴행과 붕괴의 실체 제시가 없는 협박은 헌정 질서를 위협한다. 노무현 타살설까지 조작한 인터넷 왕국의 ‘유비통신’ 유포를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면, 그같은 사회 교란의 저의가 뭔지 수상하다. 사람 죽이는 세상이면 누굴 죽였다는 것인가, 자살을 미덕으로 몰고가는 그들이 자살을 부추기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자기네 말을 안 듣는대서 국민 소통의 부재로 매도하고, 종북 좌파의 국기 위협 단속을 공안통치라고 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나라는 대저 어떤 나란지 알아야겠다. 그들은 말한다. 서울광장을 시민에게 되돌려 주라고 한다. 어떤 시민에게 되돌려 주란 말인가, 서울광장은 시민의 쉼터 시민의 산책 광장이다. 데모를 일삼는 시위꾼들 광장이 아니다. 시위의 광장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하여 시민의 광장으로 되돌려 달라는 주장은 억지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시위도 그렇다. 공공의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폴리스라인을 지키는 평화적 시위 같으면 백날을 한다고 해도 말릴 사람이 없다. 한데, 우정 폴리스라인을 침범해 경찰과의 충돌 유발을 상습화 한다. 이래 놓고는 경찰이 시위대를 때리고 짓밟았다고 떼를 쓴다. 그런데 이른바 시국선언 족속이나 불법 시위꾼들이 모두 좌파 진영의 한통속인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좌파를 해도 좋고, 좌파라기 보다는 진보주의자라고 해도 좋다. 문제는 그런 운동을 꼭 선전 선동과 폭력으로 해야만 하느냐에 있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가 보수정권인 것은 틀림이 없다. 국민은 지난 대선에서 10년의 진보정권에 이어 보수의 집권을 선택했다. 그럼, 잘하든 못하든 적어도 5년의 집권 기간은 지켜봐야 한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정권투쟁을 해도, 다음 대선을 기약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런데도 정권 퇴진 운동의 폭력 양상으로 치닫는 것은 국민의 선택을 부정하는 혁명의 획책이다. 북녘에선 정권이 세습되고, 핵 실험을 하고, 마사일을 쏘아대고, 기아에 허덕이고, 인권이 유린되고 있다. 이러한 북측엔 일언반구가 없는 묵시적 관용으로 일관, 심지어는 전쟁 도발의 협박마저 관대하게 여기는 좌파 진영이 정부가 하는 일엔 사사건건 발목잡는 속셈은 우파정권 부정과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성적 민심과 감성적 인기는 같은 HO의 화학기호이면서 불변성의 물과 가변성의 얼음처럼 구별된다. 민심은 온도차는 있어도 언제나 물 그대로지만, 얼음은 결국 녹고만다. 예컨대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됐다가 파리에 입성할 때 시민들로부터 받았던 열렬한 환영이 싸늘한 냉소로 되돌아가 세인트헬레나섬에 다시 귀양간 것이 그의 백일천하 종말이었다. 이성적 사리 판단보다 감성적 맹종 심리를 틈타 이에 편승하는 것이 작금의 좌파 행태다. 이명박 정부가 비록 일을 잘 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람을 죽이고, 공안통치의 철권을 휘두른다고 할 순 없다. 터무니 없는 소리다. 소위 시국선언의 시발이 된 게 지난 3일에 있었던 서울대 친노계 교수였으나 이들이 서울대 교수를 대표한 것은 아니다. 그들만의 시국선언에 참여한 124명의 교수는 전체 서울대 교수 1천786명에 비해 7%에 불과하다. 다만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는 데 문제가 있다.
오피니언
임양은 주필
2009-06-1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