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상시국, MB는 큰 행보를

나라 안이 온통 ‘떼법’ 투성이다.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을 내세운 한나라당이 대승했다. 민주당은 참패했다. 열린우리당에서 통합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가, 이로도 국민의 지지를 받기 어려워 다시 바꾼 간판이 지금의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이러고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과반 의석을 내주면서 대패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 1년5개월인 데도 맥을 못쓴다. 대선과 총선에서 이긴 한나라당이, 대선과 총선에서 진 민주당에게 휘둘림을 당해 끌려만 간다. 선거에서 이겨 집권한 정부 여당이 패배한 소수 야당에게 사사건건 발목잡히는 나라는 우리 말고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가 없다. 괴이한 현상이다. 민주주의가 왜곡됐다. 아니 후퇴했다. 이런데도 소수 독재의 ‘떼법’은 되레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우긴다. 하도 우겨대다 보니 정부 여당이 주눅이 다 들었다. 먹을 욕, 안 먹을 욕 할 것 없이 공격의 화살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빗발처럼 쏠린다. 예를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한다. 뭘 사과하라는 말인 지, 서초동으로 불러올린 것을 과잉 수사라지만 막중한 대통령의 직위를 축재 수단화한 혐의 사실에 비추면 소환이 형평성에 어긋난다 할 수 없다. 용산 참사를 사과하라지만, 경찰 진입의 공권력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행이 대통령 직무 책임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법 개정을 가리켜 이명박의 방송 장악 음모라지만, 이를 반대하는 것이야 말로 지상파 독과점 구도의 기득권 보호를 위한 유착 음모다. 쌍용자동차를 대통령이 살려내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내부에서 거덜 내고도 자구 노력을 보이지 않는 기업이라면 대통령인들 어쩔 수 없다. 평양정권에 대한 상호주의 전환을 반통일 세력으로 몰지만, 무작정 더 퍼주는 것은 국민정서에도 맞지않을 뿐만이 아니라 퍼준다고 또 통일이 되는 건 아니다. 이명박의 집권에 대한 이같은 저항은 한마디로 김대중·노무현 등 좌파 집권 10년 동안에 형성된 신기득권 연대 세력의 조직적 배척운동이다. 주목할 대목은 이러한 저항은 대통령의 중도 사퇴를 유발하는 헌정 질서의 문란 또한 사양하지 않는단 사실이다. 비상시국이다. 좌파적 시국선언의 유행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영차원에서 심각한 비상시국을 맞고 있다. 이 정부는 조각에서부터 성공하지 못한데 이어 출범 초기에 불어닥친 광우병 소동의 촛불시위 광풍으로 혼줄이 빠졌다. ‘정권의 명줄을 끊으려고 했다’는 촛불시위 연출 기획의 의도가 가히 성공한 셈이다. 이런 비상시국이면 이젠 정신을 차려야 된다. 정권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은 최고의 책임을 지고 비상시국다운 큰 행보를 보여야 한다. 청와대 안에서 하는 말보다, 청와대 밖의 행보로 정면 돌파의 의지를 보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골목시장이나 떡볶이집을 찾는 서민행보도 물론 좋으나, 지금은 이만으로 사태가 수습될 시기가 아니다. 봉하마을도 찾아보고, 용사참사 현장도 가보고, 국회의사당에 가서 정세균도 만나보고, 쌍용자동차 현장도 둘러보고, 개성공단도 방문하는 큰 행보의 결단이 필요하다. 사과하라는 게 아니다. 경위가 어떻든 현실적 사안이므로 더 방치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실타래처럼 꼬인 문제가 당장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또 대통령의 방문이 잘못 습관화 될 우려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나중 문제는 그 뒤의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대통령의 과감한 발걸음이 국민사회의 신뢰를 얻어 난국 타개의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가봐야 할 곳은 또 있다. 서울광장도 나가보고, 박근혜 집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용서 하십시오” “사랑 하십시오”는 누구나 하는 말이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그 말이 많은 사람들 가슴에 와닿는 것은 몸소 그렇게 살았던 분의 말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안의 말보다, 청와대 밖의 행보가 갖는 의미도 그와 같다. 대통령은 331억4천200만원의 재산을 사회공익을 위해 내놨다. 이런데도 34억원을 마저 안내고 꼼쳐뒀다는 등 여러가지로 토를 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명박 공격을 일삼는 세력이다. 그러나 그에 구애받을 건 없다. 전 재산까지 내놓은 대통령이 뭣이 두려워 소신을 펴지 못한다는 말인가, 정말 걱정이다. ‘CEO 대통령’이면 나쁜 조건을 좋은 조건으로 만들 줄 아는 것이 또한 경영일 것이다.

사도세자 247주기 제향

사도세자 247주기 제향, 100년만에 복원한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효행문화의 백미다. 효찰대본산 용주사와 경기문화연대가 지난 13일(음력 5월21일) 오전 11시, 용주사 대웅전 앞에서 이 제향을 장대히 봉행하였다. 일반 시민과 지방관아 인사 등 300여명이 봉행을 함께 했다. 조선 왕조 마지막 이석(李錫) 세손은 제향이 거행된 한 시간 남짓 동안을 내내 두손 모아 합장하고 있었다. 하늘도 아시는 것일까, 그토록 쏟아붓던 장맛비가 뚝 그쳤다. 구름을 드리워 시원한 천연 그늘막을 쳐주었다. 올핸 사도세자의 능침인 융릉을 포함한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한층 더 뜻깊었다. 제향은 국보 120호 용주사 범종의 은은한 명종(鳴鍾)으로 시작됐다. ‘혼정신성 다하지 못한 어버이 사모하여 / 오늘 또 화성을 찾아와 보니 / 원침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고 / 재전에서 배회하는 그리운 마음 깊구나’ 1796년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지은 한문시 풀이다. 아드님 임금은 또 이렇게 아버질 기렸다. ‘사흘 밤 견디기는 어려웠으나 / 그래도 초상화 한 폭은 이루었다네 / 지지대 돌아가는 길에 머리 들어 / 벽오동 같은 구름 바라보니 속마음 일어나누나’ 여섯 분의 스님이다. 스님들의 청아한 청혼독경이 대웅전 인근의 구릉이며 송림을 넘어 능침이 계신 곳으로 울려 퍼졌다. 호걸풍이셨던 사도세자다. 마침내 세자 저하가 사냥길에서 활을 어깨에 맨 채 제향을 흠향키 위해 들어서시는 듯 했다. 아마 융릉에 합장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건릉에 합장된 정조대왕과 효의왕후 일가분들께서 모두 기뻐하셨으리라. 추모곡은 어이 그토록 또 애를 끓는 듯 하는 지, 대금 장고 등의 합주는 붕당(朋黨)에 희생된 사도세자의 비운, 그리고 아드님 임금의 불세출의 효심을 사실적(寫實的) 음율로 자아내는 것이었다. 행렬이 줄을 이었다. 시민들의 참배가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제단에 나아가 부복, 잔을 바치며 큰절을 올리는 모습들이 한결같이 경건했다.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드님이셨다. 아드님 임금의 활달한 기품은 아버질 닮았다. 조선 왕조 전기의 세종 임금에 버금가는 후기의 정조 임금이다. 민본주의적 계몽군주 면모나, 실학적 개혁사상은 아마 아버지가 못다편 유지라고도 여겼을 것이다. 현대적 의미가 갖는 사도세자의 상고(尙考)는 붕당정치의 폐해다. 조선 왕조의 당파가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부정적으로 일관한 사관(史觀)은 일제의 식민지사관이다. 원래는 왕조의 정당정치였던 게 동인(東人) 서인(西人) 등 당파다. 그런데 이것이 붕당으로 전락돼 참극을 가져온 것이 사도세자의 희생이다. 오늘의 민주주의 정당이라는 정당이 왕조의 당파 정당보다 더 나은지, 아니면 왕조의 붕당과 마찬가진 지 생각해볼만 하다. 또 하나의 의미는 효 문화다. 한 나라의 군주가 아버지에게 정조 임금처럼 효를 다한 군주는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다. 물론 이엔 특수 배경인 사도세자의 비운이 있긴하지만, 아버지의 능침을 배알하고 용주사를 세우고 ‘부모은중경’ 등을 친히 짓는 등 아드님의 효행은 다 댈수 없을만큼 끝이 없고 깊었다. 효가 인류생활에 영원한 불변의 가치라면, 사도세자와 아드님 임금 간에 얽힌 효 문화는 가히 세계적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다. 융·건릉 주변이 마구 훼손돼 간다. 도대체 ‘태안3지구개발’이 뭔지, 세계적인 효행 유적지 보존이 위협받고 있다. 이곳 아니면 대단위 아파트단지 부지가 없단 말인가, 물질문명에 치우친 정신문화의 피폐는 야만인이나 할 짓이다. 여기 저기에 마구 파헤쳐진 흉한 상처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도세자와 정조 임금을 말하기가 무척 송구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제향을 통해 정조대왕의 효심이 중생의 마음에 푸르게 살아나 부모님의 소중한 은혜를 아는 삶을 발원한다”는 것은 용주사 주지 정호 스님의 봉행사다. 문석창 경기문화연대 공동대표는 “아드님의 지극한 효심의 성역을 지켜드리겠다”고 말했다. 제향을 마치고는 중요무형문화재 50호 범패(梵唄) 영산재가 봉원사 현성 스님 등 여섯 분에 의해 이어졌다. 세자 저하시여! 어여삐 여겨 삼가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거리의 市長’ 괴담

잘못된 인사법이 있다. “안색이 안 좋다”든지, “어디가 불편하느냐”고 묻는 인사말이다. 딴엔 걱정해 준다지만 듣는 당사자는 기분이 좋을리 없다. 하물며 아픈데도, 불편한 데도 없는 사람에게 그같이 묻는 인사말은 정말 고약하다. 듣건데, 김용서 수원시장이 이런 처지에 있는 것 같다. 아니, 아프긴 했다. 지난 5월27일 아주대 병원에서 그가 일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목디스크 인줄 알았다가 림프종 제거 수술을 받았다. 림프는 흔히 말하는 임파선이다. 세균의 침입을 막고 체표를 보호한다. 림프종은 염증에 의한 것과 종양에 의한 것이 있다. 종양은 또 낫기 쉬운 근종 등 양성(良性)이 있고, 낫지 않는 육종 등 악성(惡性)이 있다. 의학사전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김 시장의 수술이 별게 아닌 종양을 떼어냈다는 것은 가벼운 양성 종양의 제거 수술을 받았다는 걸로 들린다. 아무튼 그는 퇴원 이튿날 업무에 복귀했다. 그런데 지역사회에 고약한 말이 돌기 시작한 것은 그 뒤다. ‘시장이 암에 걸렸다’ ‘3개월도 못 넘긴다’ ‘내년 선거에 못 나온다’는 등 온갖 루머가 퍼졌다. 이에 시달리다 못해 심지어 핸드폰 문자 메시지로까지 나도는 것에 대해선 허위사실 유포 혐의의 경찰수사를 의뢰했다니, 심적 고통이 여간 아닌 짐작이 간다. 참으로 듣기 거북한 것은 ‘수원시장은 다 암으로 죽는다’며 고인이 된 심재덕 전 시장까지 끌어다 대는 악성 루머다. 물론 고인은 암으로 아깝게 타계했지만 그같은 폭언은 망발이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고인의 유족은 살던 집 ‘해우재’를 시에 기부하여 수원시는 화장실문화 개선에 앞장섰던 유지를 기려 화장실문화전시관 겸 시민공원 조성을 추진키로 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시장의 건강문젤 둘러싸고 입방아 찍는 호사가들 거의가 내년 6·2 지방선거 관련 족속이라는 사실이다. 그중엔 시장과 멀지않는 사람들도 적잖다. “우리가 그런게 아니예요. 저쪽에서 지네들끼리 더 야단인걸요. 굉장해요!” 어느 민주당 시의원의 말이다. 김 시장이 또 나올지 여부는 관심도 없어 알 바가 아니다. 생각되는 것은 지역사회 인심이 이래서 되겠느냐는 것이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07년, 그러니까 이태 전 1월 초순께다. 선거법위반 혐의로 서울에서 가진 항소심 선거 공판을 앞두었을 때다. 혐의가 한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니까 모두 합치면 자격 상실의 무거운 판결이 나올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김 시장을 보는 인심이 일시에 달라졌다. 그러나 그 세가지 혐의가 돈을 뿌리거나 남을 거짓말로 비방하거나 하는 것 등은 아니어서, 결국 시장직 유지의 판결이 나왔다. 한데, 판결 전후에 또 다시 달라진 염량세태가 실로 가관이었다. 지방선거는 지방자치를 열매맺는 꽃이다. 축제다. 그런데 축제가 돼야 할 지방선거가 지역사회 분열의 악재가 되고 있다. 이런저런 배신과 회유속에 ‘사분오열’의 작당으로 갈갈이 찢긴다. 눈치놀음이 성행한다. 물론 일반 시민은 말이 없다. 행세깨나 한다는 선거족의 행태가 이렇다. 김 시장을 어려운 환자로 만드는 루머 만발의 발원지가 바로 이런 족속인 데에 문제가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의 고사가 있다. 한두 사람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지 않아도, 세 사람이 말하면 믿는다는 것이다. 루머의 성격이 이렇긴해도 나타나지 않은 호랑이를 열 사람이 말한다 해도 역시 없는 것은 없다. 잘은 몰라도, 문제의 와병설 또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수요회(水曜會)란 단체가 있다. 수원 지역사회 각계의 모임이다. 얼마전 이 모임에서 본인은 “어떻든 내가 아파서 여러 말이 나오게 됐다”며 “아파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장의 말속엔 루머에 한(恨)이 맺혀 보였다”는 것은 한 참석자의 전언이다. 수원시는 수원천을 화성이며 행궁과 조화를 이루는 역사문화의 생태공원 조성을 청계천 방식으로 추진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빗물을 이용하는 빗물도시 조성도 한다. 차량소통을 위한 도로 개설을 지속한다. ‘거리의 시장’인 당자는 오늘도 거리 현장을 평소처럼 바삐 뛰고 있다.

길거리 ‘깽판정치’ 비정규직 눈물을 아는가

광적이다. 그 사람들의 정신나간 억지 소리가 요란하다. 하도 설치다 보니, 비정상인 헛소리가 정상인 듯한 세태가 됐다. ‘떼법’이다. 깽판이다. 덮어놓고 우기고 떠들고 시끄럽게 해야 언론에 크게 보도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과시를 일삼는 족속들이다. 이명박이 비록 대통령 일을 서툴게 하긴 해도 물러가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헌정 질서를 위협한다. 정통성 있는 합법정부의 퇴진을 요구한다. 시민의 쉼터인 서울광장을 빼앗아 깽판을 치던 위인들이 얼마전엔 부산까지 가서 깃발들어 깽판치며 이렇게 떠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6주가 됐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와 국정쇄신 요구에 아직 한 마디 말도 없다. 민주주의 후퇴를 시민사회와 함께 막아 내겠다”(민주당 대표 정세균) “이명박 정권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미 퇴진을 결정한 바 있다”(민노당 대표 강기갑) “이명박 정권을 단 일초라도 살려 둬서는 안 된다”(민노총 위원장 임석규) 마구 설쳐대는 고래 등살에 등 터지는 건 서민들이다. ‘비정규직 보호법’이 ‘비정규직 해고법’이 된 것만 해도 그렇다. 법이 시행되는 7월1일 자정을 앞둔 수 시간 전까지 이의 유예를 위한 노력을 그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한국·민주 양대노총은 아예 일찌감치 협상 테이블에서 퇴장했다. 비정규직 조합원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사람들은 국회의원 등을 해가며 잘 먹고 잘 살아 선지, 서민의 막장 고통을 모른다. 어제부터 법대로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경제가 어려운 이 시기에 특히 중소기업의 인건비 추가 부담은 치명상이다. 고용된지 2년이 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못하면 법에 따라 해고시켜야 된다. 이렇게 해서 연내 해고될 비정규직이 약 70만명이다. 구내식당 아주머니, 의무실 간호조무사 아가씨, 청소원 아저씨 같은 이들은 법이 뭣인지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사는 서민들이다.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할 살림이어서 비정규직이든 뭐든 일자릴 지켜야할 처지다. 그런데 법 때문에 쫓겨난다. 힘깨나 쓰는 족속들의 미친 놀음으로 일 자릴 잃어간다. 일 자릴 잃고 되돌아서며 쏟아지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쳐내는 이들의 아픔을 알기나 하는가, 배부른 깽판 족속은 잘 모른다. 이도 “이명박 탓”이라고 윽박지른다. 정치는 왜 하고 노동운동은 누굴 위해 하나, 비정규직은 국민이 아니고 비정규직은 노동자가 아닌가, 현실과 동떨어진 고집으로 결국 서민들을 울린 민주당과 상급 노동단체는 죄인이다. 중소기업 현장에서는 사용자도 고용자도 나오는 게 한 마디로 원성이다. 특히 민주당의 죄업은 간악하다. 길거리 정치를 일삼는 포퓰리즘 편승은 제도권 정당인 가를 의심케 한다. 국회의원이 국회에 나가는 데 무슨 까탈이 그리도 많나, 종다수 의결은 민주주의 기본이다. 다수당은 다음 정권에 국민의 심판에 책임을 지고 다수의 힘을 구사한다. 소수당의 투쟁은 신랄한 원내 비판으로 족하다. 판단은 국민이 한다. 시민단체를 끌어다 대지 말라, 원내 교섭단체가 외부의 꼭두각시 놀이나 할 것 같으면 굳이 국회의원을 뽑을 이유가 없다. 한나라당 역시 개뿔도 잘 한게 없다. 이런데도 민주당의 지지도가 낮은 것은 장외 전문당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성급하다. 자살한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국민장에 운집한 공전의 인파에 고무되어 갑자기 ‘친노’로 돌아서, 대통령 임기 만료 전의 중간 정권 탈환을 서두는 것 같다. 하지만 추모는 추모일 뿐이다. 가변성 정서다. 이명박이 퇴진해서도 안 되고 그럴 이유도 없지만, 민주당에 일러둘 말이 있다. 데모로 들어선 정권은 데모로 망한다는 사실이다. 제2공화국의 구 민주당 정권이 그랬다. 법치보다 ‘떼법’을 앞세우는 광적 깽판정치를 일삼아서는 미래가 있을 수 없음을 알아야 된다. 대다수의 국민은 정치 질서의 복원을 원한다.

6·25 호국 영령들 님을 위한 ‘통곡’

6·25 호국 영령의 님이시여! 전우가 ‘전우여 잘 있거라!’ 가요의 1절을 삼가 올립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그랬습니다. 님들은 그렇게 사라지셨습니다. ‘꽃잎처럼 사라지고,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님들이, ‘꽃 같이 별 같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어찌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뿐이겠습니까, 한반도는 온통 도처가 전쟁터였습니다. 이름 모를 산하에서 전사한 님들의 시신을 송구스럽게 아직도 다 수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가셔야 했습니까, 장가도 들어 노부모를 봉양해야 할 분들이었습니다. 갓 시집온 신부를 둔 신랑들이었습니다. 새댁의 몸에 유복자를 남긴 젊은 아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빗발치는 총탄·작렬하는 포연·총칼이 부딪힌 백병전 속에 산화하고, 괴물처럼 밀려든 T34 소련제 탱크에 포탄을 안고 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학도병들도 무수히 산화, 못다핀 꽃으로 사라졌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님들이 목숨을 나라에 바쳤으므로 해서, 지금의 이 나라가 있어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부끄럽습니다. 님들의 희생을 이단시하는 무리들이 설칩니다. 님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지킨 대한민국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면서도, 님들이 지킨 나라의 정체성은 부정하는 무리들이 큰 소릴 치고 있습니다. 님들의 노부모는 자식을 잃은 슬픔속에 이미 세상을 뜬지가 오랩니다. 님들의 새댁은 평생을 고통속에 살며 늙고 말았습니다. 님들의 유복자는 아버지 없는 불우한 역경속에 성장해야 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대한민국에서 벼슬도 지내고, 행세께나 하며 잘 먹고 잘 사는 족속들이 님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벌써 6·25가 난지가 59년입니다. 세월은 망각을 가져온다지만 안타깝습니다. 전후세대가 6·25의 비극을 실감치 못하는 것은 그런다 쳐도, 체험세대가 그러는 것은 정말 참고 보기가 힘듭니다. 김일성이 누군지요. 북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인 내각수반이며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6·25전쟁을 일으킨 동족상잔의 1급 전범이 아닙니까, 이런 전범을 ‘주석’으로 불러주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동포끼리 전쟁을 다시 하지않기 위해 ‘김일성 주석’으로 불러준다 해도, 제 정신은 가져야 할 터인데 정신까지 팔아 먹는 위인들이 적잖습니다. 도대체 김일성 생가라는 만경대의 ‘만경대 정신’이 뭡니까? 평양 만경대에 가서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위대한 통일과업 이룩하자’고 방명록에 쓴 대학 교수란 자를 두둔하기도 하고, 저 사람들의 행패는 보비위해가며 이쪽에서 하는 일은 일일이 트집잡아 나라를 어지럽히는 일부의 세태가, 꼭 오랜 세월탓만인 가를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작금의 실정이 6·25가 난 직전과 무척 비슷합니다. 6·25를 통한 공산주의 체험은 저들의 이념이 얼마나 모순되는 가를 터득케 했습니다. 만약 지금 또 전쟁이 난다면 저들의 이념에 심취한 남쪽 일부의 족속들이 자기네 생각이 얼마나 허상이었던 가를 깨달아 정신이 들겠지만, 전쟁은 안 됩니다. 평양에서는 여전히 전쟁을 들먹이고 있으나, 동족상잔의 잔혹상은 3년여동안 ‘시산혈하’를 이룬 님들의 희생으로 그쳐야 합니다. 님들의 희생이 이래서 더 존귀합니다. 생각컨대 6월의 하늘은 참 무심합니다. 6·25가 터졌을 당시의 하늘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무심정(無心定)이 곧 유심정(有心定)입니다. 6월의 평화를 깨어 연옥으로 만든 전쟁은 못된 인간의 소행이지 하늘의 이치는 아닙니다. 무심한 6월의 하늘이 일깨우는 이치는 이 땅에 다신 전쟁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무서운 전쟁터에서 산화한 그대로 산야에 묻혀 진토가 다 된 6·25 호국 영령의 님이시여! 비록 진토가 됐을지라도 이 나라 땅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님들을 위해 우러러 통곡하오니 이 땅을 지켜주옵소서. 님들에 대한 불충을 자책하며 그 옛날의 전우가 4절을 옮겨봅니다. ‘터지는 포탄을 무릅 쓰고 앞으로 앞으로 /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 같이 별 같이’

좌파의 ‘폭력독재’

선거 구호가 ‘무산계급에서 나온 사람, 무산 대중이 밀어주자’ 같으면 이건 좌파다. 내가 그러했다. 서울시의원 서대문 제5선거구였다. 자하문고개, 안산고개 넘어 홍제동·홍은동·홍지동 등 일원이다. 그때가 장면정권 망정이어서 탈이 없었지, 안 그랬으면 당국에 끌려가 치도곤을 맞았을 것이다. 제대 직후다. 채석장에서 잡부노릇을 하는데 거들먹거리던 채석장 주인이 출마하여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만 스물다섯, 젊은 시절의 객기였다. 물론 그는 당선되고 나는 떨어졌다. 난 원래가 좌파란 걸 말하기 위해 새삼스런 얘길 꺼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우파로 분류된다. 시인한다. 하지만 지금의 좌파가 과격한 좌편향 과다 일변도인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우파가 된 것이지, 좌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배와 성장에서 어느 쪽에 무게를 더 두느냐가 좌우의 개념이다. 분배는 사회복지 개선, 성장은 자본시장 육성으로 나타난다. 십여년 전이다. 복지국가의 천국인 스웨덴에서 좌파정권이 총선에서 몰락해 퇴진했다. 장애인이 이사갈 집을 신고하면 자치단체가 장애에 맞춰 집 구조를 고쳐주었을 정도다. 국가에서 주는 실업급여가 상당해 웬만해선 취직할 생각을 안 했다. 사회복지 제도를 이토록 발달시킨 좌파정권이 정작 국민의 선택에서 외면됐다. 사회복지 발달에 따른 국민의 세부담이 너무 과중했기 때문인 것이다. 성장과 분배, 분배와 성장은 이토록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국민사회의 삶의 질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킨다. 국민이 분배 위주의 좌파정권을 선택했으면, 나중엔 성장 중심의 우파정권을 지지하는 등 번갈아가는 반복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건국한지가 예순한 해다. 이 가운데 좌파가 집권한 지난 십년은 이도 국운이다. 우파의 오만을 일깨우기도 했다. 이런 좌파가 정권을 잃었으면 다음 기회에 집권을 노리는 것이 순리다. 정부 시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다. 국회 의사당을 때려 부수고, 길거리 불법 시위를 일삼고, 민중 선동을 부채질해가며, 이명박 정부더러 ‘독재정권이니까 물러가라’고 목소릴 높인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사사건건 트집잡아 발목을 비튼다. 정부 시책을 비판하는 것과 트집 잡는 것은 다르다. 국회는 여야 대화가 안 되면 표결로 처리하는 것이 종다수 의결의 원칙이다. 이런 원칙을 깨고 있는 것이 작금의 좌파 진영이다. 원칙 파괴를 일삼는 변칙 지상주의는 민주사회의 폭력이다. 국민과의 소통 부재를 말한다. 어느 나라, 어느 정부든 모든 국민 계층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정책은 집중과 선택이기 때문이다. 지난 십년의 좌파정권 역시 우파와의 소통은 완전히 단절됐었다. 지금의 우파정권 더러 소통이 안 된다고 우기는 좌파 진영은 지난 집권기간동안 국민과의 소통 부재가 더 했다. 국민과의 소통 문젠 다음 대선에서 국민이 판단할 일이지, 좌파 세력이 폭력 수단으로 구실 삼을 일은 못된다. 대북 관계는 한국적 좌파의 특성이다. 좌파는 진보주의다. 그러나 좌파 중 일부를 뺀 국내 좌파엔 순수한 좌파, 즉 진보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에 심취하는 성향이 짙다. 북녘 동포와 등지고 살려는 사람은 없다. 평양정권과 전쟁을 원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종북주의 좌파들은 우파의 상호주의를 민족 분열 세력으로 몬다. 전쟁광으로 매도한다. 우파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헐뜯으면서도, 북측의 권력 세습이나, 인민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여태껏 입도 뻥긋하지 않는 것이 종북주의 좌파의 비굴한 생태다. 그러나 그래도 좋다. 그도 민주주의의 본질인 다원화 사회의 하나로 보고자 한다. 하지만 폭력은 안 된다. 국회 개회나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폭력, 경찰과의 전쟁을 일삼는 불법 시위의 폭력, 사회를 불안케 하는 ‘떼법’의 폭력 등은 더 이상은 안 된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좌파의 ‘폭력독재’로 시일을 마냥 헛되게 보내어 민생을 더 어렵게 할 수는 없다.

시국선언의 ‘망령’

시국선언의 ‘망령’이 유행한다. 엊그제만도 경희대·동국대·숭실대·이화여대·부산대·전남대 등 23개 대학 725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513명의 문인들도 시국선언을 했다. 일부의 종교·시민사회·네티즌 청년 시국선언도 있었다. 이들만을 보면 세상이 온통 뒤집어지는 것 같다. 과연 뒤집어지는가, 까닥도 않는다. 꾼들끼리의 말 잔치다. 민중은 미동도 않는다. “민주주의가 퇴행을 넘어 붕괴 직전이다”라고 우긴다. “언론 표현의 자유가 말살된다”고 말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닌, 사람 죽이는 세상이다”라고도 한다. “국민과의 소통”을 주장한다. “공안통치가 부활됐다”는 힐난도 있다. 정말 그런가, 그 사람들의 민주주의란 도대체 뭔가 퇴행과 붕괴의 실체 제시가 없는 협박은 헌정 질서를 위협한다. 노무현 타살설까지 조작한 인터넷 왕국의 ‘유비통신’ 유포를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면, 그같은 사회 교란의 저의가 뭔지 수상하다. 사람 죽이는 세상이면 누굴 죽였다는 것인가, 자살을 미덕으로 몰고가는 그들이 자살을 부추기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자기네 말을 안 듣는대서 국민 소통의 부재로 매도하고, 종북 좌파의 국기 위협 단속을 공안통치라고 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나라는 대저 어떤 나란지 알아야겠다. 그들은 말한다. 서울광장을 시민에게 되돌려 주라고 한다. 어떤 시민에게 되돌려 주란 말인가, 서울광장은 시민의 쉼터 시민의 산책 광장이다. 데모를 일삼는 시위꾼들 광장이 아니다. 시위의 광장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하여 시민의 광장으로 되돌려 달라는 주장은 억지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시위도 그렇다. 공공의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폴리스라인을 지키는 평화적 시위 같으면 백날을 한다고 해도 말릴 사람이 없다. 한데, 우정 폴리스라인을 침범해 경찰과의 충돌 유발을 상습화 한다. 이래 놓고는 경찰이 시위대를 때리고 짓밟았다고 떼를 쓴다. 그런데 이른바 시국선언 족속이나 불법 시위꾼들이 모두 좌파 진영의 한통속인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좌파를 해도 좋고, 좌파라기 보다는 진보주의자라고 해도 좋다. 문제는 그런 운동을 꼭 선전 선동과 폭력으로 해야만 하느냐에 있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가 보수정권인 것은 틀림이 없다. 국민은 지난 대선에서 10년의 진보정권에 이어 보수의 집권을 선택했다. 그럼, 잘하든 못하든 적어도 5년의 집권 기간은 지켜봐야 한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정권투쟁을 해도, 다음 대선을 기약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런데도 정권 퇴진 운동의 폭력 양상으로 치닫는 것은 국민의 선택을 부정하는 혁명의 획책이다. 북녘에선 정권이 세습되고, 핵 실험을 하고, 마사일을 쏘아대고, 기아에 허덕이고, 인권이 유린되고 있다. 이러한 북측엔 일언반구가 없는 묵시적 관용으로 일관, 심지어는 전쟁 도발의 협박마저 관대하게 여기는 좌파 진영이 정부가 하는 일엔 사사건건 발목잡는 속셈은 우파정권 부정과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성적 민심과 감성적 인기는 같은 HO의 화학기호이면서 불변성의 물과 가변성의 얼음처럼 구별된다. 민심은 온도차는 있어도 언제나 물 그대로지만, 얼음은 결국 녹고만다. 예컨대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됐다가 파리에 입성할 때 시민들로부터 받았던 열렬한 환영이 싸늘한 냉소로 되돌아가 세인트헬레나섬에 다시 귀양간 것이 그의 백일천하 종말이었다. 이성적 사리 판단보다 감성적 맹종 심리를 틈타 이에 편승하는 것이 작금의 좌파 행태다. 이명박 정부가 비록 일을 잘 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람을 죽이고, 공안통치의 철권을 휘두른다고 할 순 없다. 터무니 없는 소리다. 소위 시국선언의 시발이 된 게 지난 3일에 있었던 서울대 친노계 교수였으나 이들이 서울대 교수를 대표한 것은 아니다. 그들만의 시국선언에 참여한 124명의 교수는 전체 서울대 교수 1천786명에 비해 7%에 불과하다. 다만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는 데 문제가 있다.

‘노통’ 이후, 슬픈 것들

전직 대통령이 재임중 비리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는다면 빅뉴스 중에도 빅뉴스다. 조사 내용의 하나 하나가 다 국민적 관심사다. 이런 경우, 검찰의 수사 상황 브리핑은 국민의 알권리에 부응하는 것으로 이도 직무 관련이다. 검찰의 수사 브리핑을 피의사실 공표죄로 걸어 문제삼는 고발이 있었으나, 전직 대통령은 사생활 보호가 우선시되는 보통 시민이 아니다. 보통 시민도 예컨대 사회공익을 현저히 해친 피의자는 피의사실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하물며 전직 대통령의 혐의는 마땅히 개인의 명예보다 국민의 알권리가 우선이다. 피의사실 공표죄만이 아니라, 확정판결 이전의 무죄추정주의가 또 있다. 그러나 이는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이 없으면 무죄로 보는 취지로 형사소송법상의 거증책임을 검찰에 귀속시키는 것이지, 피의자의 혐의사실이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무조건 언론에 브리핑 해선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한 검찰의 수사 브리핑이 정당한 것은 법률상의 위법성조각사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지 않을 사람들이 꼬투리 잡는 것이 슬프다. 또 이런 말들을 하는 이들이 있다. “자살로 찬란하게 부활한 그는 역시 승부사답다”는 것이다.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분에게 과연 자살할 권리가 있느냐는 의문은 갖는다. 법정에서 끝까지 시비를 가려 유·무죄의 결과를 보이는 것이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도리라고 믿는 것이다. 만약 유죄가 확정되면 형의 선고와 함께 600만달러와 3억원의 추징금이 병과될 것이다. 반대로 무죄가 나면 중수부장 등이 탄핵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미완의 사안으로 끝났다. 공전의 추모 인파는 그들의 선택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그만한 것 가지고 너무 심했다”고들 말한다. 추모는 추모객들의 맘이지만, 그런 말을 듣는 건 정말 슬프다. 대통령의 지위는 공무원보다 더 엄정한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말단 9급 공무원도 뇌물을 받으면 형을 산다. 더 엄정해야 할 대통령의 600만달러 뇌물 혐의를 ‘그만한 것’으로 치부하는 추종적 관용은 객관성 없는 가치관의 혼돈이다. 호치민이 베트남 인민들의 추앙을 받는 것은 생전의 생애가 진짜 완전한 서민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호치민 박물관에는 그가 항일전쟁을 벌인뒤, 북베트남 공산정권 수령을 지내면서도 서민층과 똑같이 먹고 자며 생활했던 나무침상 등 가재도구가 전시돼 있다. 드골의 낙향은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것이었으나, 생가에서 조용히 지내며 동네 꼬마들의 할아버지 노릇을 하다가 유언으로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국민들은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이룬 대통령’으로 그를 숭모한다. 일부의 신문방송 등 언론보도 또한 서글프다. 예를들어 생전에는 “고해성사하라”며 비판적이던 언론이 사후엔 조문 인파의 위세에 밀려 ‘정치적 타살’이라는 등 영합주의로 돌변한 카멜레온식 반응은 언론의 자질을 의심케 했다. 가치관의 혼돈을 분별치 못하는 이런 언론이 과연 사회의 공기인가를 생각케 한다. 타계에 대한 조위 표시가 논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구분되는 것으로 별개인 게 언론의 소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점은 두드러진 개성이다. 투박한 언어 구사, 충격 요법 등 격식을 깬 그의 언행은 신선하게 들릴 수가 있다.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내용은 또한 국민들을 피로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 이승을 떠났으므로 해서 그에게 느꼈던 피로감은 잊혀지고 신선감만 남아 기억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하여 대통령 재임 중의 공과를 새삼 여기서 말할 이유는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가 봉하궁을 안짓고 생가를 중수한 옛집에서 박연차 게이트 없이 향리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다면 정말 사랑받는 서민 대통령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슬프다. 그 분의 불행스런 자살을 여권은 ‘국민화합’, 야권은 ‘국면전환’으로 삼지만 다 부질없다. 화합도 전환도 될 수가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략화 삼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멀리보아서는 없을 뿐만이 아니라, 정략화 삼는 것 부터가 생각해보면 산자의 이기심이다. 국민장으로 떠나 보냈으면 산자의 이기심으로 그 분을 더 제단에 올려 시끄럽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편히 쉴 수가 없다. 고발 등으로 시비의 와중으로 자꾸 몰아 넣는 것이 고인을 위한다 할 수는 없다. ‘노통’에 대한 이런 칼럼도 더는 없을 것이다.

북의 2차 핵실험 이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즉 평양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빈민국이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중국은 말할 것 없고 베트남이나 쿠바보다도 훨씬 더 못 산다. 못 사는 것은 고사하고 인민들을 배곯인다. 하필이면 동포인 저네들이 이런 덴 이유가 있다. 폐쇄사회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북녘을 다녀왔지만 평양에 가서 행동이 자유로웠던 사람은 없다. 안내인이라는 이름의 감시자가 붙어 이들의 통제속에 인민들과는 철저히 차단된다. 개혁 개방을 하면 잘 살 것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개혁 개방을 할 수가 없어 못하는 것이다. 개혁은 주체사상의 변화다. 개방은 자유의 바람이 불어닥쳐 체제를 위협한다. 김일성주의의 유일사상과 함께 세습제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래서 내세우는 것이 중국 등의 모델을 부정하는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다. 그러나 변화를 부추기고 체제를 위협하는 틈새 바람이 아주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탈북 사태가 이렇고, 중국을 왕래하는 보따리 장사가 이렇고, 스포츠 등의 해외 교류가 이러하다.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 중엔 중국 기지를 통한 핸드폰으로 북측 가족과 통화를 나누는 사례가 있다는 말도 듣고 있다. 북녘 인민사회의 결속력이 전 같지 않은 모양이다. 단초는 식량난에 기인한 것이, 이젠 평양정권의 통제에 균열이 생긴 지경에 이른 것 같다. 예컨대 암시장이나 개인의 사유지 개간 등 자본주의 요소를, 중앙에서 철저히 단속을 지시해도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관료의 일꾼들이 규모가 큰 것은 뇌물을 받고 묵인하고, 규모가 작은 것은 방관하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북녘 체제가 사상적 응집력에 의해 유지되기 보다는, 습관화된 관성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핵 실험의 성공은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기 위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물결을 세차게 지펴 올리며, 150일 전투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선 우리 군대와 인민을 크게 고무케 하고 있다” 이상은 2차 핵실험 발표후 저들이 밝힌 보도문 중 한 대목이다. 핵실험을 위해 투입한 돈이 무려 3억달러에 이른다. 세계적 빈민국이 이런 핵 도박을 서슴치 않는 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체제 단속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부실로 급해진 후계자 지명에 걸림돌이 되는 체제 이완을 다시 긴장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3기에 즈음해 통치의 실세가 군부로 이동한 두드러진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로켓을 쏘아 올리고, 핵 실험을 강행하고, 미사일을 마구 쏘아댄 일련의 대량살상 무기 과시 목적의 또 다른 이유는 장삿속이다. 미국과 국교를 트면서 핵 무기를 폐기하는 데 천문학적 수치의 보상을 받자는 속셈인 것이다. 6자회담을 형해화한 것은 과거의 지원 및 보상은 푼돈으로 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 안보리 제재를 거쳐 앞으로 언젠가는 제3의 핵실험 협박속에 핵 무기 관련의 다자회담이 또 재개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민국이 빠질 수 없는 것은 남북 당사자고, 미국은 북측이 희망하는 대화 상대자고, 중국은 평양정권의 후견자이기 때문에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는 유동적이다. 물론 회담은 다사다난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의 핵무기는 저들이 일거에 팔자를 고치는 돈을 요구해도 국제사회가 사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다신 핵을 갖지 못하는 안전 및 감시 장치의 완전 보장이 선행돼야 하는 것은, 핵 관련 약속을 상습적으로 번번히 어긴 전철을 더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다. 평양정권의 핵 무장을 돈으로라도 해제하지 않으면, 막다른 길목에 다달게 되는 저들은 필시 제2의 6·25 남침 전쟁으로 이판사판의 돌파구를 모색할 것이다. 중국은 북조선을 잃는 걸 결코 원치 않지만, 평양정권 사람들이 재침에 실패해 중국으로 망명하면 안 받아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전쟁이 또 나면 남쪽도 형용키 어려운 막심한 피해를 입는다. 전쟁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지금같은 남북간 대치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 진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공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국가안보 태세의 강화다. 약자에겐 평화가 있을 수 없다. 평화도 힘이 있어야 유지된다. 아울러 유념해야 할 것은 허를 찌르는 테러다. 테러 역시 현대전의 일부다. 설마하다가 당하고 난 뒤의 대비는 ‘사후약방문’이다. 테러방지는 평상시에 해야 한다. 요컨대‘유비무환’이다.

자전거와 자동차

자전거를 살리려면 자동차를 버려야 한다. 지금까진 자동차를 살리느라고 자전거가 버려져 왔다. 근데 이명박 대통령이나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자전거를 살리자”며 야단들이다. 이를 위한 ‘저탄소, 녹색사업’의 구호가 틀린 말은 아니다. 맞다. 그러나 분명한 게 있다. 자동차도 살리고 자전거도 살리는 소속 불명의 녹색사업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자전거타기는 전에도 한 번씩 나오곤 했던 얘기다. 많은 돈을 들여 자전거길도 만들어 봤다. 번번이 실패했다. 대통령과 도지사가 또 나선다 하여 안 됐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국 일주 자전거길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자동차를 버리지 않는 자전거길은 만들어 봤자 ‘도로아미타불’이다. 자동차를 버릴 때가 됐다. 버리잔다고 하여 자동차산업을 죽이자는 게 아니다. 자동차산업의 과보호 의존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 보급이 전국의 가구수를 훨씬 웃돌만큼 확산됐다. 좁은 국토에 여기도 저기도 넘쳐나는 것이 자동차다. 인구 비율로 따져도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독일 등 서구보다 자동차 보급률이 더 높다. 제 돈 가지고 제 자동차 사는 것을 말릴 순 없다. 그러나 알아둘 것이 있다. 자동차를 길바닥에 잠재우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골목길마다 빽빽하게 늘려있는 것이 자동차 행렬이다. 밤이면 주차 전쟁으로 이웃과 원한 사기가 일쑤다. 새벽 청소차가 노상 주차에 막혀 이면도로를 들어가지 못한다. 야간 구급차 또한 응급 환자가 생겨도 못들어가고, 불이 나도 소방차 역시 들어가지 못한다. 밤에만 이러는 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정은 낮에도 마찬가지다. 이런데도 불가피한 현상으로 체념하고 있다. 그런 풍물이 이젠 눈에 익어 만성이 됐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일본이나 미국 사람들은 으레 “그래가지고 답답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다. 차고지증명이 없으면 새차를 사지 못하는 새로운 제도를 정부가 검토하다가 만 적이 있다. 선진국에서는 벌써 실시되고 있는 제도다. 그런데 검토하다가 만 덴 연유가 있다. 자동차의 내수 신장을 위해서다. 자동차 수출의 기복이 심한 터에 내수가 위축되면 자동차산업이 타격을 입기 때문인 것이다. 차고지증명을 뗄 수 있는 자동차 수요가는 아마 절반도 넘기가 힘들 것이다. 차를 길바닥에 재우는 형편이어도 살 수 있는 것이 개인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사회공익으로 보아선 좋다 할 수가 없다. 차고지증명제 미시행은 자동차산업을 위한 배려다. 외국에서는 감히 생각지 못하는 정부의 과보호인 것이다. 우리의 자동차산업도 이제 제힘으로 발길을 떼기 시작했으면,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 경쟁력 강화다. 언제까지나 과보호의 손길을 잡아주는 것은 경쟁력 저해다. 설령, 경쟁력은 고사하고 자생력도 없어 도산하는 업체가 생긴다면 이런 자동차업체는 망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자동차생산업계가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은 막대하다. 하지만 경제의 체질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산업구조의 틀을 건강하게 바꾸는 고뇌의 결단이 필요하다. 정부는 나라안 도로와 우리의 생활구조에 비추어 지금의 자동차 보급 대수가 과연 적정한 가를 진단해보는 기초적 조사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 사실 자동차가 너무 많다. 특히 승용차는 많아도 너무 많다. 승용차를 줄이는 대신 대중교통 수단을 늘려야 된다. 지금 같아서는 자전거를 타고 싶어도 맘놓고 탈 길이 없다. 인도도 자전거길이 아니고, 차도도 자전거길이 아니다. 차도에 자전거길을 만든다 해도 자동차 홍수에 밀려 또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나 자동차가 줄어들면, 자전거 홍수로 자전거길을 만들지 않아도 절로 트인다. 자전거타기를 권장 안 해도 타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집집마다 자전거 두세 대가 있는 것을 흔히 보는것은 권장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이젠 이런 선진국형 모델로 가야 된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정녕코 자전거타기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펼칠 의향이 있다면, 자동차를 버리는 것이 자전거를 살리는 길이다. 자동차도 살리고 자전거도 살리는 어정쩡한 필패의 시책은 ‘저탄소, 녹색사업’이 될 수 없다. 정책은 어차피 선택과 집중이다.

‘스승의 날’을 맞는 苦言

초·중·고등학교가 5천개소면 교원 수는 얼마나 될까, 교장이야 5천명이겠지만 교원은 학교당 줄잡아 30명이어도 모두 15만명이다. 이만한 교원을 학생 성적 부진을 들어 집단 해고하면 한국에선 야단 법석이 아니라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선 끄떡없다. 오바마 행정부의 이런 결정을 당연한 걸로 받아 들인다. 성적 부진학교의 교장, 교원의 무더기 추방은 곧 폐교다. 일단 폐교한 뒤 학생들을 위한 학교 문을 다시 연다는 것이 오바마의 결연한 계획이다. 미국이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은 지식산업 각계의 고른 발달과 함께 분포된 인재들이 국가사회의 저력으로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성적이 나쁜 학교를 폐교하는 결단은 이런 아메리카 합중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미국만도 아니다. 영국도, 프랑스도, 이웃 일본도 성적 부진 학교에 대한 조치가 강경하다. 재정 지원을 중단하기도 하고, 교장, 교원을 해임하거나 부분적인 폐교도 더러는 불사한다. 선진국들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학업 성적 향상을 위한 긴장이 대단하다. 이에 비해 한국은 유별나게 한가롭다. 학업 성적을 말하면 학생을 기계로 만든다고 하고, 학업 평가를 말하면 서열화를 부추긴다고들 한다. 전인교육을 말한다. 맞다. 교육의 지표다. 하지만 공부를 게을리해도 되는 전인교육은 없다. 정서 배양도, 인격 도야도 공부를 해야 가능하다. ‘스승의 날’이 내일이다. 스승은 제2의 어버이다. 스승의 교권은 부모의 친권과 같다. 마땅히 존중돼야 한다. 그리고 은혜를 기리는 것이 ‘스승의 날’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선생님들에게 허울 좋은 단소리를 들려 드리긴 싫다. 그보단 오히려 쓴소리를 하고 싶다. 학생들을 위해 무슨 노력을 과연 얼마나 했는지 묻고자 한다. 물론 이에 상응한 선생님들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대체로 이런 의문을 지우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스승과 선생님, 제자와 학생은 같은 말이다. 같은 말이지만 분명한 것은 정서의 차이점이다. 차이점은 일체감 유무의 구분이다. ‘선생님은 있어도 스승은 없고, 학생은 있어도 제자는 없다’는 건 진부한 말로, 진부하도록 전부터 있어온 개탄의 소리다. 이의 원인이 뭔가, ‘스승이 없인 제자도 없다’는 말로 표현된다. 제자를 둘 수 있는 것은 스승되는 이의 자질에 달렸다. 먼저 스승이 돼야 제자가 나온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과연 스승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교육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덴 선생님들의 책임이 많다. 공교육의 질이 사교육에 비해 낮은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학원 강사는 치열한 경쟁속에서 강의실에 선다. 같은 강사라도 실력이 모자라면 언제 도태될지 모르므로 학습 연구를 부단히 지속한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무경쟁속에서 지낸다. 안일하다. 학습 연구는 고사하고 교과 단원을 짜는 것도 해마다 같은 날짜의 것을 베끼는 복사판이기가 일쑤다. 일부의 교원들이 학생들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은 자신이 공부를 게을리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교원들이 성적 평가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지도 평가를 거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고교 평준화는 교원들의 무책임 평준화로 전락되고, 이는 학업 성적의 하향평준화를 유발했다. 만약 오바마식 공식의 교육정책을 우리에게 대입한다면 폐교될 학교가 얼마가 되고, 해고당할 교장, 교원이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상상해 본다. 예삿 일이 아니다. 지금의 공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가르쳐서 앞으로의 사회가 잘 되고 나라의 장래에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 시대적 유물의 편견을 버려야 된다. 오바마 또한 진보주의자다. 가진 사람보단 없이 사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를 더 많이 하는 미국의 좌파지만 생각이 다르다. 교육의 이념화는 사회와 나라의 미래를 해친다. 교직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하는 나태함을 이념화로 합리화하려고 드는 일부의 교원들은 ‘스승의 날’이 과연 자신의 날인지를 돌아보는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자식에 갖는 부모의 마음이, 부모에 갖는 자식의 마음보다 진하다. 진해도 비유가 안 될만큼 진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다. 자식을 위한다면 뭘 희생해도 아까울 게 없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다. 목숨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어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 큰 자식에게 주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돈이다. 부모 돈 받아서 사업을 시작하는 자식 치고 성공한 사람은 없다. 부모가 창업한 가업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과 자식이 부모에게 돈을 받아 사업하는 것과는 다르다. 가업은 자식에게도 이미 인식이 주입된 예비 직업이다. 그러나 자식이 사업을 한답시고 부모에게 얻은 돈은 인식이 결여된 공돈이다.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사업자금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집을 팔아댄 사업자금이고, 또 하나는 부모에게 얻은 사업자금이다. 전자는 재수가 없어서 안 되고, 후자는 자신의 돈이 아닌 공돈이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교장을 지낸 초등학교 동창을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적이 있다. 연금이 꽤 많아 노후가 안정된 것으로 보았는 데, 알고보니 속사정은 오히려 반대였다. 아들의 사업자금을 위해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아서 준 돈을 아들이 다 까먹어 대국(아버지) 망하고 소국(아들) 망한 꼴이 된 것이다. 한 월남 참전 전상 퇴역장교는 뭔가가 잘못되어 국가유공자 대우를 못받다가 얼마 전에야 가까스로 유공자 인정을 받을수가 있었다. 그간 밀린 보상금을 소급해서 받은 돈이 몫돈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매월 100여만원을 지급받게 됐다. 그러나 몫돈을 날린데 그치지 않고 매월 받는 100여만원도 손에 쥐지 못하는 형편이 됐다. 몫돈은 아들의 사업자금으로 날렸고 월 100여만원은 역시 아들 보증을 선 대가로 충당되고 있는 것이다. 수원시내 동진아파트에 살던 노부부가 어느날 길에 나앉게 됐는데, 그 역시 아들의 사업자금 보증을 섰다가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가 지금은 시골 단칸 사글세방에서 지낸다. 어찌하여 잘못된 것만 말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부모가 준 돈으로 자식이 벌린 사업치고 성공을 못하는 것은 인간사의 공식이다. 거의 100% 실패한다. 노인정마다 동전을 셈하며 노후를 없이 보내는 노인들이 많으나, 이들이 원래 돈을 안 벌어놨던 건 아니다. 자식들에게 사업자금 등으로 돈을 뺏긴(준) 탓이다.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약한 마음이 결국 말년을 망친 것이다. 노인정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어느 노인정 회장은 아들들이 돈을 바라는 눈치가 보여 호통을 쳤다고 말한다. “나도 평생 뼈골 빠지게 벌었으니까, 너희들도 뼈골 빠지게 벌어라! 어차피 내가 죽으면 너희들 것인데 뭐가 그리 바쁘냐?”며 매몰차게 뿌리쳤다는 것이다. 이 노인정 회장의 아들 형제는 자수성가했다. 수원 송죽동에 땅 부자가 있다. 일찍이 아버지 되는 이가 농사를 지을 때 곳곳에 사둔 땅이다. 송죽동 일원이 개발되면서 땅 가졌던 사람들이 땅들을 팔았지만, 이 분은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데로 손대지 않고 놔두었다. 따로 자립해서 먹고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지금은 그의 땅이 됐지만 아직도 팔지 않은 땅이 많다. 짐승 새끼도 크면 독립한다. 하물며 인간이야, 그런데 짐승과 다른 부모 자식간의 정리를 하필이면 자식이 부모의 돈 의지로 사려 하는 것은, 부모 자식간 정리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키우고, 가르치고, 짝을 맺어주면 그로써 자식에 대해 할 일은 끝난다. 부모가 여유 있으면 자식이 사는 것을 도울 수도 있다지만, 어차피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대신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식들은 그들대로 다 살수 있는 것은 젊기 때문이다. 나이든 부모들은 더 늙기전에 삶을 구가해야 할 것이며, 그럴 권리가 있다. 잘 안 오던 자식들이 집에 오거나 전화가 걸려오면 덜컥 겁이 난다는 부모들이 많다. 또 무슨 부담을 안겨줄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인 것이다. 효 사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람 살이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의 형태는 시류에 따라 변한다. 현대생활의 효는 자식이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효도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부부간에 화목하고 집안 살림 잘 건사해가며 제 새끼들 건강하게 키우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최고로 친다. 내일이 어버이날이다. 부모에게 꽃을 선물하는 것도 좋지만,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어버이날이 돼야 하는 것이다.

노무현 ‘上京記’

오늘은 전 대통령 노무현씨가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의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 날이다. 그런데 신문 제작상 하루 먼저 이 글을 쓰면서 엉뚱한 생각이 든다. 가령 꾀병의 건강상 이유를 들어 출두 연기를 요청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내사(나야) 갈려고 했는데 몸이 안 좋아 도저히 못가겠다”고 하면 강제 구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분이라, 가뜩이나 긴장한 가운데 신문 준비를 마친 검찰의 김빼기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어떻든 상경해도, 경남 김해시 진영땅 봉하궁에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까지 조사받으러 올라오는 천리길이 편하진 않을 것이다. 그만이 아니다. 지켜보는 민초들도 국민노릇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엎어진데 대고 뒤통수 누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아들 미국 유학비에 보태 쓴 것으로 보이는 100만달러의 용처에 대해선 진술을 거부하는 등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혐의를 부인할 공산이 높지만, 그의 죄상은 이제 검찰 수사와 법정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노무현씨 자신은 그렇다 쳐도, 그는 과연 불쌍한 사람인가,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감옥갈 처지가 되어 나오는 구속·불구속 논의를 측은지심으로 보는 값싼 감상은 정말 볼썽사납다. 그는 그래도 대저택에서 잘먹고 잘사는 봉하궁궐의 주인이다. 정작 불쌍한 처지는 그 사람 때문에 국민노릇 하기가 힘든 민초들이다. 그에게 기만당한 민중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노무현교’의 광신도들이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주술에 걸린 맹신자들 같다.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은 꽤 점잖은 이다. 이런 이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는 정치 보복이다”라고 트집 잡았다. 검찰이 혐의를 인지했어도 수사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소린지, 뭔지 알 수 없어 헷갈린다. 노 전 대통령 측근인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노씨 회갑 때 1억원짜리 시계를 선물했다는 언론 보도에 “망신 주는 것이냐”며 검찰이 이를 언론에 흘렸다고 검찰을 비난했다. 그러나 비난할 사람은 세상에 억대 시계가 있는 줄조차 몰랐던 민중이고, 비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30단계의 수공 작업을 거친 스위스제 자판에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계를 뇌물로 받은 짝퉁 민중의 지도자다.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정말 낯이 두껍다. “노 전 대통령이 얼마나 재산이 없고 청렴했으면 옆에서 참모가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런 일을 했을까 싶어 나도 안타까운 마음이다”라는 말은 지성을 의심할 정도다. 그러면서 ‘노무현 게이트’를 가리켜 “생계형 범죄”라고 한 것은 코미디다. 자그마치 600만달러에 3억원을 더 한다. 퇴임하면 나라에서 돈주어 먹여살리고, 비서관 붙여주고, 해외여행도 시켜주는 대통령에게 건넨 600만달러+3억원의 뇌물이 생계형이란 소린 민중의 기가 찰 노릇이다. 역대 정권마다 주군의 추종자가 적잖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종자들 중엔 특히 발군의 충성자가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교’ 교도들처럼 허무맹랑하고 파렴치한 소린 말하지 않았다. 북녘처럼 절대적 권력의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폐쇄사회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개방사회에서 자행되는 저들의 교만은 6년전 정권을 장악할 당시 최면을 건 포퓰리즘의 마술에 민중이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걸로 착각하는 것 같다. 하긴, 그렇다. 희대의 살인마 강호순을 동정하는 사람도 있다. 또 아돌프 히틀러, 베니치오 무솔리니, 도오조 히데키 등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독일 나치스의 수령,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 당수, 일본 군벌내각의 수장으로 악명높은 독재자들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이다. 정치나 사회적으로 아무리 악한 사람도, 더러는 좋게 보는 대중심리의 맹점이 없지 않은 것은 언제나 비슷한 현상이긴 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이를 가치관이 전도된 도착심리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나를 버려달라”는 노무현씨의 절박한 역설적 반전 카드가 대중적 후광효과의 심리를 노린 것일지라도, 그를 불쌍하게 볼 사람은 광신도 패거리일 뿐, 민중의 맘속에선 지워진지가 오래다. 이런 건 있다. ‘노무현 게이트’ 척결에 버금가는 여권 실세의 의혹 역시 강도높은 척결의 메스가 가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권 실세의 의혹 또한 언제 터져도 터진다. 길게 묻혀봐야 기껏 4년이다. 묻어놓는 것보다 터뜨리는 것이 현명하다. 오늘 대검 중수부에 소환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경은, 한편으로는 이명박 정권의 반면교사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교육의 중용(中庸)

1762년에 발표된 루소의 교육소설 ‘에밀’은 인위적 교육을 배격,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강조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계몽주의 자유사상은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근거가 됐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페스탈로치는 인간성의 도야와 능력 발달에 직관적 방법을 주창했다. 직관적 방법은 논증적 방법의 반대 개념이다. 루소나 페스탈로치는 위대하다. 이들이 가진 자연주의의 교육적 해석은 오늘날 전인교육으로 집약되고 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 루소의 계몽사상은 구시대의 묵은 사상을 타파하는 혁신사상이다. 교회의 권위, 귀족의 특권 등에 반기를 든 인간적 사유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페스탈로치의 직관적 교육법은 시기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다. 19세기 후반의 제2차 산업혁명이 있기 전이다. 교육계 일각에서 시험을 줄세우기라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수 고등학교를 서열화라며 이단시한다. 이들의 생각은 이렇다. 지난 날에 있었던 교회의 권위, 귀족의 특권 등 대신에, 이젠 권력층이나 자본가 등의 신지배층이 등장했으며 이들을 위한 귀족학교가 곧 특목고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타파하는 것이 혁신적 신계몽사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시험을 거부하는 것 역시 교육의 논증적 방법에 대한 반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착각이다. 시대적 배경의 재해석에 범한 본질적 오류가 크다. 현대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다. 인성이 억압 당했던 부르봉 왕조사회가 아니다. 또한 제3차 산업혁명시대다. 경쟁의 시대다. 자녀를 왜 학교에 보내는가, 공부하라고 보내는 것이다. 공부를 얼마나 잘 하고, 잘 가르쳤는 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평가 방법이 시험이다. 평가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 기회의 균등과 능력의 차이를 혼동해선 안 된다. 계급사관은 버려진 유물이다. 능력도 균등해야 한다는 억지는 인성을 어기는 역불평등이다. 능력의 차이를 기회의 박탈로 우기는 사이비 균등론이 교육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고교 평준화만 해도 그렇다. 고교 평준화가 과연 됐다고 보는가, 아니다. 벌써 수십년이 지났는 데도 전혀 안 됐다. 안 될 수밖에 없다. 인간사회의 본질을 외면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은 경쟁이다. 국제사회의 경쟁은 더욱 심하다. 지식산업시대다. 실력이 없으면 낙오된다. 학교 교육을 무경쟁으로 한다고 하여 학생들 장래에 무경쟁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망친다. ‘자주적 생활 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케 한다’고 규정한 교육법의 교육 목적을 저해한다. 사교육이 성행하는 것은 한국적 기현상이다. 이유가 대학입시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의 원인은 다음에 따로 생각해볼 일이다. 어떻든 학교는 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 가령 공부하다가 코피를 흘려도 굳이 안쓰러워 해야만 학생을 위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은 있다. 성적순이 개성의 차이로 행복순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입시지옥은 미국, 프랑스 등 서구에서도 보편화된 일이다. 특히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코네티컷주의 고2 학생들이 아침 7시30분부터 시작되는 수업에 등교하여 밤 10시가 넘어 귀가한다고 최근호에 보도했다. 시카고에서는 학습 동기를 부여키 위해 성적에 따라 학업 성취도 상금을 주기도 한다. 워싱턴 DC의 한국계 미셸 리 교육감은 지난해 성적이 부진한 23개 공립학교를 폐쇄했다. 그 때마다 시위대가 교육청에 몰려들어 물건을 던지는 등 항의가 거세었으나 서른아홉살의 이 독신녀 교육감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말이 있다. 사론서(史論書)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있다. 칼을 물속에 떨어뜨려 떨어진 자국을 뱃전에 새겨 배가 가는 줄을 모르고 새긴 뱃전 근처에서만 칼을 찾는다는 것이다. 옛 것에 치우쳐 시세의 추이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빗댄 경구다. 이런가 하면 논어(論語)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도 있다. 옛 것을 통해 새로운 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각주구검’과 ‘온고지신’은 얼핏 생각하면 상반되는 말 같아도 다 새겨들어야 할 잠언이다. 교육의 중용이 요구된다. 극단적인 실력주의나 편향적인 균등주의나 학생들을 위해 이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은 중간이란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한다는 것이 원래의 의미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당선자의 행보가 균등주의에 치우쳐 교육의 미래가 불안하다.

새 교통동맥, 대심도 철도

대심도 철도가 가시화 됐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라고도 한다. 경제성 및 기술성 검토 용역 또한 결과가 ‘OK’로 나왔다. 국토해양부 역시 이의 타당성을 인정, 장기 철도망 건설계획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사업은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심혈을 기울여 온 노작(勞作)이다. 경기도가 발표한대로 오는 2016년 말 개통하려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게 13조9천억원으로 추정되는 재원 조달이다. 동탄 신도시~고양 킨텍스(74.8㎞), 군포 금정~의정부(49.3㎞), 인천 송도~청량리간(49.9㎞) 등 3개 노선 총연장 145.5㎞ 구간을 일제히 동시 착공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재원에 두 가지 방안이 검토되는 모양이다. 중앙·지방의 재정 분담과 민자 투입이다. 재정자금 동원은 국비 60%, 도비·시군비 각 20%다. 민자를 투입한다 해도 재정자금이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국비 21.3%, 도시군비 7.1%, 개발분담금 20%가 보태진다. 그러니까 순민자는 51.6%다. 민간자본으로 추진하는 것이 옳다. 이미 대기업이 중심이 된 민간기업 컨소시엄이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되면 국내에서도 사철(私鐵)이 나온다. 비록 반은 국철(國鐵)이지만 사철 지분의 철도는 처음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투자 비율이다. 민자의 51.6%가 어떤 조건의 산출 근거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민자 부담을 더 높이는 방안이 없진 않을 것이다. 하루 이용객을 76만명으로 잡고 있다. 수도권 인구 2천500만명 중 이동 인구를 절반으로 잡아도, 이동인구의 6.1%에 그친다. 이용객이 아무래도 76만명 보다는 더 많을 것으로 보는 추론이 가능하다. 운임 책정에 가변성이 없지 않겠으나 민자 조건을 완화, 부담을 높여도 장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중간정거장 선정은 좀 머리가 아픈 과제다. 최고 속도는 시속 160㎞에서 200㎞다. 정류장 정차를 감안하면 평균 100㎞ 시속이다. 이래서 중간정거장이 많으면 급행철도가 아닌 완행철도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중간정거장이 적으면 자기네들만의 광역철도가 된다. 수도권 교통의 해결책이 철도인 것은 맞다. 막힘이 없는 속도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철도도 대심도 철도가 상지상책인 것은 공사비가 적은 데 있다. 일반 지하철은 10~20m 깊이에 ㎞당 1천200억원이 드는데 비해 40~50m 깊이의 대심도 철도는 ㎞당 소요액이 700억원이다. 일반 지하철은 지상에서부터 파서 나중엔 지상도로를 복구해야 한다. 지상 지장물의 보상 문제도 있다. 그러나 대심도 철도는 굴착만하면 철길이 뚫린다. 하지만 대심도 철도의 경제효과로 1일 수도권 운행의 차량 감소 대수가 88만대라고 하는 것 등은 좀 과장된 것 같다. 이도 예컨대 서울 운행 대수를 줄이려면 대심도 철도역 주변의 환승 주차장이 확보돼야 한다. 이같은 환승 주차장이 없으면 대심도 철도는 역 주변 주민만의 철도로 전락한다. 환승 주차장은 이용객 증대의 절대적 요건이다. 대심도 철도가 필요한 이유는 광역교통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서지만, 안보면에서도 있어야 된다. 광역교통의 원활을 위한 대심도 철도가 가장 잘 발달된 곳이 파리다. 지하 수십m 밑에 이중 삼중으로 철도망이 깔렸다. 한편, 안보상의 이유로 대심도 철도가 잘 된 곳은 평양이다. 평양의 지하철은 거의가 대심도다. 이동인구가 별로 없는 도시에서 지하철을 대심도화 한 것은 철길을 방공호로 겸했기 때문이다. 방공호도 보통이 아닌 핵 방공호인 것이다. 수도권에 그같은 대피시설이 없는 것은 취약점이다. 수도권에 만약 전철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 전철이 없는 수도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약 40년 전이다. 전철 1호선을 개설했을 때다. 서울 종로 지상의 전차길을 걷어낸 자릴 파뒤집고, 땅 밑에 까는 전철 공사에 말이 적잖았다. 돈이 많이 들기도 했고, 종로길 통행에 당장 불편이 막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오늘 같은 전철시대를 가져온 효시가 당시엔 말이 많았던 1호선인 것이다. 수도권 대심도 철도는 계획된 3개 노선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더 필요하다. 지금 추진하는 3개 노선 역시 장차 대심도 철도망의 효시가 될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대심도 철도를 개통해야 하는 연유가 이에 있다. 신 교통동맥인 것이다.

노무현 ‘엘레지’

두 가지로 생각된다. 하나는 검찰청이 과연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또 하나는 그래도 세상은 나아졌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검찰에 긴급 체포되기가 바쁘게 예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받은 금전 수수관계를 털어놓은 건 검찰 수사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정상문은 고향이 같은 김해인 40년 지기다. 이러한 친구인지라 검찰에서 윗선을 묻어두고 혼자 다 짊어지고 갈 수가 있긴 있다. 그러나 돈의 용처에 대한 추궁 과정에서 자신의 노출이 불가피해질 수도 있어 선수를 친 것이 노 전 대통령이 홈페이지에 서둘러 밝힌 이른바 ‘사과문’이다. ‘사과문’은 그답게 철저히 계산됐다. ‘집(사람)이 빚을 갚으려고 박연차 회장에게 돈을 부탁해 수억원을 받았다’며 국민에게 송구하다는 것이 전부다. 그 수억원은 3억원이란 말도 있고 10억원이란 말도 있다. 확실한 금액은 검찰에서 밝혀질 것이다. 물론 자세한 내용은 검찰 수사에서 진술돼야 하므로 말을 아낄 순 있다. 그러나 ‘사과문’은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함정이 있다. 우선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게 ‘사소취대’(捨小就大)의 계략이다. 수억원을 받은 것은 시인 함으로써 500만달러를 받은 것은 부인을 부각시키는 의도가 역연하다. 홈페이지에 ‘사과문’ 형식으로 자수까지 했는데 또 다른 돈을 받았으면 받았다고 하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식의 이미지 만들기로 자신에게 쏠린 500만달러 의혹을 잘라내고자 하는 것이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돈을 요구해 받은 것이 정말로 권양숙씨 단독인가 하는 점도 심히 의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받아놓고 부인을 희생번트 삼는 정황이 없지 않다. 아니면 공동정범일 수 있다. 돈의 성격에 대해서도 막상 검찰 수사에 들어가면 엉뚱한 말을 할 공산이 높다. 그의 측근인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빌린 돈”이라고 연막을 친 것은 바로 그같은 엉뚱한 말을 할 조짐이다. 그러나 경험법칙상 빌렸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돈이 건네진 게 2005년부터 2006년 사이라면 한 차례가 아닌 걸로 보아진다. 대통령쯤 되는 사람이 돈을 빌리고 나서 빌린 돈도 안 갚고, 또 빌렸다는 것은 먼저 요청했다 해도 이미 빌린 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금전 수수가 한 차례든 몇 차례든, 금전 수수시 특정 대가가 제시됐든 안 됐든 간에 포괄적 뇌물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도덕성을 유별나게 내세운 대통령이 도덕성을 남 모르게 팔아먹은 건 참으로 불행하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래도 세상은 나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기업인들에게 돈 받는 것을 예사로 여겼던 과거에 비하면, 전직 대통령이 재임시 돈 받은 사실이 들통 날까봐 지레 겁먹고 까발리는 세상은 전보다 나아졌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돈 먹은 정치인이 많아 줄줄인 것은 나아진 세상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자금으로 둘러대면 면책됐던 전에 비해서 처벌 대상이 된 측면에선 나아진 게 사실이다. 처벌 대상에 오른 사람이 전·현직 국회의원, 전직 장관에 이어 전 국회의장들까지 오르다 못해 이젠 전 대통령 내외까지 올랐다. 전 대통령 내외만도 아니다. 대통령 친형, 조카사위까지 연루됐다. 노무현 정권의 비리 몸통이 곧 전 대통령 일가이며, 그 중심에 노무현이 서 있다. 몸은 궁궐같은 봉하마을을 신축한 사저에서 호사를 해도, 맘은 권력 무상에 가시방석처럼 아플 것이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것이죠?” 이는 노 전 대통령이 한 말이다. 취임 초 평검사들과 가진 대화의 자리에서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 지역구 사람의 일로 부산지검 모지청에 전화를 걸어 청탁성 압력을 가한 사실을 어느 젊은 검사가 제기했을 때다. 노 전 대통령은 불편한 심기를 그렇게 드러내면서, 그러나 화도 내지못해 얼굴만 붉혔다. 노 전 대통령 내외의 검찰 수사는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이르렀다. 기왕 불가피한 악연의 만남이라면, 노 전 대통령은 다 털고, 검찰은 다 털어내야 서로가 산다. 화가 나서 붉혔던 얼굴이 이젠 수치로 붉혀야 할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보는 국민사회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다.

MB는 ‘빅뱅’을

사라져간 권력은 미쳤고 살아있는 권력도 미쳐간다. 사라진 노무현 정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측근들이 줄줄이 박연차 리스트 돈 그물에 걸렸다. 살아있는 이명박 정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천신일 세종나모 회장이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 검찰의 수사 대상인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천 회장은 이 대통령과 고려대 61학번의 동창으로 50년 지기다. 대선 땐 고대 교우회장으로 선거운동을 했고, 대통령의 고향인 포항에서 해운사업을 했다.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과도 가깝다. 청와대에 수시로 드나들며 밥 때면 대통령과 겸상을 한다. 천 회장이 태광실업 세무조사에 대해 이종찬 청와대 전 민정수석과 대책을 의논한 게 지난해다. 천 회장은 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도 막역한 사이다. 천 회장이 1997년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지낼 때 박 회장은 부회장을 맡았다. 2006년 박 회장이 휴캠스를 인수하자 이번엔 천 회장이 사외이사직을 맡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카 사위에게 건네진 박연차 회장의 500만 달러(약 65억원) 돈에 대한 성격이 무엇이냐는 얘기는 부질없다. 대통령이 아니면 조카 사위에게 뭣 때문에 그같은 돈을 주었겠느냐고 보는 것이 사회통념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에게 준 것’이라는 박 회장의 진술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문제는 노 전 대통령의 임기말에 건네진 500만 달러의 돈을 노 전 대통령이 언제 알았느냐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측은 ‘최근에 알았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같은 말은 재임 때 알았다고 하면 포괄적 뇌물죄가 성립되기 때문에 이를 모면키 위해 둘러대는 말일 수 있다. 검찰 수사의 핵심인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언필칭 민중적 도덕성을 내걸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진 ‘양두구육’의 정권이다. 물론 그들의 부패상은 철저히 밝혀내야겠지만 이미 사라진 정권이다. 이명박 정권의 부패상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살아있는 정권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최측근인 천신일 세종나모 회장에 대한 수사의 추이는 이 점에서 국민의 눈이 쏠려있다. 그런데 웬지 불안하다. 청와대 김 모 전 행정관의 성상납 로비 의혹이 해결은 커녕 축소 의혹이 증폭되는 걸로 미루어 시원찮을 조짐이다. 이 경우, 단순히 술 자리에서 성상납을 받은 것이 아니다. 케이블 텔레비전업체 합병 등 문제가 거론된 술 자리다. 이엔 관련 업계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일종의 방송시책이다. 청와대 시책이 고급 룸살롱에서 논의됐다면 이 또한 ‘양두구육’의 정권과 다를 바가 없다. 어느 여배우의 유서에 적힌 유력 인사들의 술자리, 잠자리 강요 등은 정권과 유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역시 경찰 수사가 지지부진하다. 좋지않은 일을 두고 억울하게 죽은 여배우의 이름만 자꾸 거명되고 있다. 혹시 드러나선 안될 인사가 있어 그러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이래서 나온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투명한 뒷처리의 책임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 살아있는 정권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먼저 자신에게 가혹해 보여야 된다. 최측근인 천신일 세종나모 회장부터 주저없이 사정의 칼날에 올리는 것이 순서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그래야만 탄력을 받는다. 청와대 김 모 전 행정관이나 여배우 관련의 경찰 수사 역시 마찬가지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은 경제 위기에 국한하지 않는 세상사 이치다. 살아있는 정권에 쏠린 이런저런 의혹은 잘만 처리하면 되레 기회가 된다. 쾌도난마의 서릿발 같은 비리 척결은 사회적 박탈감에 빠진 국민사회의 공분을 달래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지 않고 살아있는 정권의 의혹을 묻어둔다면, 사라져간 정권의 의혹도 함께 묻힐 수밖에 없다. 이는 전 정권이 먹을 욕까지 함께 덤터기로 뒤집어써 더욱 수렁깊은 지지도 추락을 자초할 것이다. 사람으로 인해 흥하고 사람으로 인해 망하는 것이 측근이다. 측근은 또 자고로 충신이 있고 간신이 있다. 현군 밑에 충신나고 암군 밑에 간신난다. 그런데 현군 밑에 나는 간신은 신뢰를 저버린 배신이다. 예컨대 등창을 놔둔다고 살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 덧난다. 이참에 묵은 등창, 새 등창 할 것 없이 배신으로 곪은 비리는 다 터뜨리는 ‘빅뱅’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길이며, 이는 이명박 대통령만이 가능하다.

박연차 리스트

리스트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두 가지다. 이미 구속 기소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리스트와 어느 여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유서 형식의 문건에 적힌 리스트다. 여배우의 글엔 술접대, 잠자리 등을 강요 당했다는 내용이 적혔다. 다만 강요당했다는 것이므로 더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을 조사해봐야 할 일이다. 조사 대상이 12명이라고도 하고 13명이라고도 한다. 그 중엔 재계, 언론계 인사도 끼었다니 경찰수사의 추이가 주목된다. 만약 여배우의 인격권을 침해한 위법 사실이 드러나면 마땅히 법정에 세워야 할 것이다. 아울러 연예계의 고질적 부조리를 발본색원하는 계기가 돼야한다. 그런데 검찰의 박연차 리스트는 아주 고약하다. 여배우의 리스트 내용도 고약하지만, 박연차 리스트의 등장 인물은 권력을 쥐었거나 권력을 등에 업고 거액을 받은 점에서 죄질이 더 나쁘다. 박연차 리스트는 그의 비서실에서 나온 박 회장의 일정이 적힌 다이어리와 수 억대의 뭉칫돈이 지출된 출금전표 등을 근거로 작성된 리스트다. 박연차 리스트의 용의선상에 오른 30여명 중 검찰수사 과정에서 거명된 사람은 14명이다. 이들은 이미 구속됐거나 피의자 신분의 출두를 앞두고 있다. 노건평(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정대근(전 농협중앙회장) 송은복(전 김해시장) 이정욱(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 장인태(전 행자부2차관) 박정규(전 청와대 민정수석) 이광재(민주당 국회의원) 이종찬(전 청와대 민정수석) 서갑원(민주당 국회의원) 최철국(민주당 국회의원) 김혁규씨(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등은 노무현 정권 사람들이다. 이명박 정권 사람들도 있다. 추부길씨(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는 이 대통령의 측근이고 권경석·허태열씨 등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다. 이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하거나 “빌린 돈을 갚았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거물이 잇따라 또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박연차 회장은 뭣 때문에 이토록 억 단위 또는 수억 단위의 돈을 뿌렸는가 하는 점이다. 모두 142억원을 뿌렸다. 물론 이득을 챙기거나 권력에 대한 보험료로 준 대가성이긴 하다. 그러나 통큰 영향력 과시욕이 많았던 그의 성격 또한 크게 작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검찰 주변의 관측이다. 박 회장은 1988년 총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선거에서 노건평씨를 통해 당시 노무현 국회의원 후보를 알게 돼 인연을 맺었다. 그후 노무현씨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그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측근이면서 돈뭉치까지 뿌리는 양날개를 단 호걸형의 유력 인사로 행세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아우님 대통령’이 “순박한 시골노인”이라고 했던 노건평씨는 결코 순박한 시골노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박 회장 더러 누구 누구에게 돈을 주라고 했는가 하면, 받은 돈을 더러 배달도 했다는 것이 역시 검찰 주변의 말이다. 심지어는 PK(부산 경남)지역의 선거개입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은 검찰의 리스트 수사에 꽤 협조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질신문도 사양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심경 변화는 태광실업의 경영권 보호를 위한 기업인의 본능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뭣보다 권력무상을 실감한데서 온 변화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 권력은 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은 유한하다. 권력과 바꾼 돈은 권력이 떨어지고 나면 재앙을 부르는 판도라의 상자가 된다. 누구보다 민중적 도덕성을 내세웠던 것이 노무현 정권이다. 그러나 아니다. 언제까지나 거머쥘 것 같았던 권력이 떨어지면서 흥청댄 권력의 비리가 곪아 터져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권도 예외가 아니다. 이 정권도 벌써 전철을 밟는 조짐이 나타난다. 민중은 하루 3~4만원 벌이에 등뼈가 휜다. 이런 민중의 위임을 받은 권력자들이 권력을 팔아 억대 돈을 게눈 감추듯이 챙기는 못된 버릇은 벼락맞을 일이다. 검찰 리스트 수사는 이제부터 고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말에서 2008년 초 사이에 전달받은 것으로 보이는 500만달러 의혹,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모씨가 관련된 의혹, 검찰 내부의 일부 고위직 관련 의혹 등은 국민사회가 어떻게 풀 것인지를 지켜보는 마지막 고비인 것이다.

헌재 판결의 ‘허상’ - 4·8교육감 선거에 즈음해

4·8 경기도 교육감 선거의 특성은 도민 직선이다. 다른 시·도에선 이미 실시된 바가 있지만, 경기도는 교육감직의 도민 직선은 처음이다. 아울러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 재외국민의 투표권 행사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으면서 해외 영주권을 가진 재외국민도 투표가 가능하다. 이들은 호적은 국내에 있지만, 살지 않아 주민등록부가 없다. 그렇다고 주민등록을 굳이 만들 이유도 없다. 예컨대 영주권을 가진 이가 해외 지역으로 또 나가는 일시 귀국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도내에 거주신고를 한 재외국민은 이번 교육감 선거에 투표권을 갖는다. 재외국민 유권자가 얼마나 되는진 아직 선거인명부 작성이 덜 돼 확인이 안 된다. 교육감 선거에서와 같은 재외국민의 거주신고에 의한 투표권 행사는 내년에 있을 6·2 지방4대 선거에서도 갖는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해외 영주권을 가진 대한민국 국적의 재외국민은 역시 투표권이 있다. 대선과 총선은 지방선거처럼 국내 거주신고자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유권자가 해외 영주지역에서 직접 투표에 참여한다. 선거인명부 작성 등 선거사무관리를 해외 영사관에서 대행한다. 다만 국회의원 선거도 총선이 아닌 재·보선은 재외국민의 투표가 예외로 배제된다. 재외국민이 각급 선거 참여를 갖지 못한것은 국민의 참정권 제한이라고 본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에 의한 것이다. 헌재 판결은 지난 2007년 6월28일에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판결이 과연 타당한가는 심히 의문이다. “국민 대접을 해 준 것은 고맙지만 좀 그렇다…”는 것은 헌재 판결 이후에 보인 재외국민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헌법재판소는 재외국민들이 반갑게 여길 것으로 보고 그런 판결을 내렸는 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재외국민들은 달갑지 않게 여긴다. 들리는 말마다 시큰둥하다. 해외 수만리 타국 땅에서 사는 재외국민들이다. 한국인끼리 뭉쳐야 산다. 뭣보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재외국민의 정치적 분열이다. 특히 대통령 선거 같은 건 더 걱정된다는 것이다. 대선 때마다 모국에서 부리는 온갖 추태로도 모자라, 지구촌 곳곳에 있는 재외국민 영주지역까지 찾아가 필연코 드러낼 망신이 현지인들에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우려되는 교포사회의 분열이 두렵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사실상 무익하다. 아니,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유해하다. 각급 투표는 본질적으로 이해 관계 당사자들의 의견 표출이다. 이의 이해관계는 크겐 국가 안보를 비롯해서 작게는 골목길 포장 등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하다. 재외국민이 이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에서 권리는 의무를 수반한다. 해외 영주권을 지닌 재외국민들이 대한민국에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다. 국방의 의무를 지는 것도 아니다. 의무를 안 지는게 잘못인 것도 아니다. 해외 영주권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투표권이 없는 것 역시 당연하다. 재외국민의 무투표권은 참정권의 제한으로 보기보단 참정권의 포기로 보아야 한다. 헌재의 의제적 판결 논리는 실상이 아닌 허상의 법리 해석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헌법기관이다. 잘못된 판결도 기속력을 갖는다. 하지만 불만을 없앨 수는 없다. 미국 교포사회에선 지금도 헌재 판결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다. “X판 정치싸움은 나라 안에서나 하지, 무슨 투표를 여기서까지 하라고?” 어느 한인회 회장 말이라면서, 근래 미국 다녀온 사람이 들려준 전언이다. 국회 의사당을 해머로 때려 부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나온 얘기라는 것이다. 4·8 교육감 선거에서 초미의 관심은 투표율이다. 교육감 선거가 도지사 선거보다 못한 이유는 하나도 없다. 투표는 해야 된다. 재외국민 거주신고를 한 유권자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더욱 궁금한 것은 그 분들이 투표를 하면 뭘 보고 후보자를 선택할 것이냐다.

민노총, 달라져야 산다

인천지하철공사노조의 민주노총 탈퇴는 불발됐다. 찬성 473명(63.4%), 반대 270명(36.2%)으로 3분의 2 이상의 찬성 통과선에서 25표가 부족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이에 희희낙락할 입장은 못된다. 비록 부결은 했지만, ‘민노총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냐?’는 상급단체에 대한 배신감에 차있다. 이런 가운데도 부결된 것은 더 두고 보자는 일부의 관망론이 작용된 탓이다. 이미 현대중공업노조에 이어 코오롱노조 등도 탈퇴했다. 영진약품노조는 회사측과 임금동결 고용유지 등을 골자로 하는 노사화합 선언을 가졌다. 이는 투쟁 일변도의 민주노총 노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상급단체의 지침을 휴지화했다. 인천지하철노조 또한 비록 상급단체 변경은 실패했지만, 민주노총의 허수아비 노릇은 거부할 것으로 보아진다. 개별사업장 노조의 민주노총 이탈 및 이탈 움직임은 앞으로도 가속화할 전망이다. 2006년에 75만2천여명이던 조합원이 이듬해 66만4천여명, 지난해 말에는 65만여명으로 줄었다. 민노총은 ‘이탈이 아니고 사업장 감소 때문’이라지만, 사업장 감소보단 이탈 때문에 줄어든 게 진실이다. 민주노총의 정치성은 고질적 병폐다. 산하 개별사업장 노조에 뭣때문에 ‘정치위원회’란 걸 두는가, 노동운동은 근로자의 권익옹호가 주안이다. 노동운동 또한 정치운동이 아니다. 노동운동의 정치운동화는 순수성을 잃은 잡탕이다. ‘귀족노조’란 비판이 이 때문에 제기된다. 개별사업장 노조에는 간곤한 투쟁을 촉구하면서, 상급단체는 잘먹고 잘사는 노조가 되어선 윤리가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한동안 말썽이 있었던 비리는 그랬다고 치자, 중견 간부의 여성조합원 강제추행도 그랬었다고 치더라도, 이에 반성할 줄 모르는 게 더 큰 문제다. 여성조합원 강제추행의 경우, 산별노조에까지 은폐를 시도한 몰염치는 민주노총이 평소 말해온 투명성이 허구임을 드러냈다. 노사평화를 사사건건 반대하며 뒤트는 ‘청개구리’가 되어서는 더 이상의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 분명히 말한다. 사사건건 흔듦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한다고 보는 전근대적 투쟁의 사고방식은 민중의 외면을 받아 냉소의 대상이 될 것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운동의 이단이며 노동단체의 기형아다. 진보주의 성향의 노선을 걷는 것은 선택의 자유다. 그러나 그런 노동운동이 반정부운동이 되어서는 궤도 이탈이다.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제도권, 즉 법치 일탈이 그렇다는 것이다. 계급투쟁 사관에 치우친 듯한 이념화는 낡은 유물이다. 무턱댄 반미나 무조건적 종북주의는 진보주의 본연의 면모가 아니다. 혹여 진보주의를 빗댄 혁명적 투쟁이라면 몰라도, 아니라면 노동투쟁을 할 때 하더라도 달라져야 한다. 사회를 혼란케하여 불안을 야기시킬 권리가 주어진 건 아니다. 제3섹터 노동운동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정치참여를 배격하는 가운데 정부나 사측과의 대화협력을 주요 정신으로 하는 신노동운동이다. 어디까지나 근로자의 노동권익을 추구하는 실사구시의 노동운동인 것이다. 이엔 민주노총만이 아니고 한국노총도 반성할 점이 많다. 정치참여는 민주노총이 마이너스형 정치참여로 민주노동당 진출을 발판으로 삼는다면, 한국노총은 플러스형 정치참여로 여권 진출의 거점으로 삼는다고 봐야 된다. 실제로 이리하여 국회의원이 된 노동운동가 출신이 많다. 민주노총이든 한국노총이든 노동단체를 이용하여 정치권에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노동운동의 순혈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은 폐습의 시정을 민주노총쪽에 더 강력히 주문하는 것은 그 폐악이 심히 더 한데 이유가 있다. 민주노총은 타협은 굴복이고 노사평화는 입지를 좁힌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삐뚤어진 의식에서 해방돼야 한다. 노동단체의 양대산맥은 필요하다. 그러나 선명성 경쟁은 투쟁 일변도가 능사는 아니다. 산하 조합원들의 실질적 권익 경쟁에 초점을 모으는 데 존재 이유가 있다. 민주노총은 제3섹터 노동운동으로 방향을 돌리는 용기있는 변화가 있어야 산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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