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운동의 위선

국민을 위하지 않는단 정치세력은 없다. 독일 나치스 정권도 위대한 독일 국민을 위한다고 했다. 평양정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 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헌법 1조)라고 한다. 18세기의 민약설은 주권재민을 말하며, 목민심서는 위민을 치도의 근본으로 삼았다.민중은 피지배층인 국민 대중과 같지만 계급의식이 담긴 점에선 구별된다. 민중은 또 민서라고도 하여 서민과 같지만 정치색이 담긴 점에서 서민과 다르다. 민중은 소시민을 포함한다. 의식면은 중류 이상의 자본가층에 가까우나, 경제면은 중류 이하인 노동자층의 무산계급이 소시민이다. 국민 중에도 특히 민중을 위한다는 정치세력이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다.이런 진보주의자들은 정치운동권에도 있고, 노동운동권에도 있고, 시민운동권에도 있다. 이미 또아리를 튼지가 오래다. 지난 10년동안 정권도 잡았었다. 진보주의 정권에선 권력을 무소불위로 설쳐 국가사회를 혼란케하더니, 정권을 잃고나선 폭력으로 국가사회를 뒤흔든다. 이들 정치운동권 세력은 국회의사당을 때려 부수고도 모자라 길거리 선전선동을 일삼고, 노동운동권 세력은 불법파업을 일삼고, 시민운동권 세력은 어거지 주장을 일삼는다.이들이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위 행동하는 양심과 표현의 자유다. 표현의 자유 등은 사회계약설이 지닌 저항권이다. 국가 구성원은 자유권 행사를 국가에 유보하는 반면에 국가가 생명과 재산권 등 보호를 소홀히 하면 혁명권을 갖는다는 것이 사회계약설이다.지금 진보주의자들이 사사건건 일으키는 국가사회의 소요 책동은 사실상 혁명의 획책이다. 그들은 사회계약설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오히려 자유를 누리다 못해 남용하는 것이 저들이다. 국가에 법률로 유보한 자유를 되찾아야 하는 혁명의 시기도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공공의 질서와 선량한 풍속의 보호에 우선 할 수 없는데도, 이를 우기는 것은 공공사회의 파괴다. 이같은 기조에서 움직이는 행동하는 양심이란 사회적 가면으로 위장된 집단이익이다. 정치운동권이 그렇고, 노동운동권이 그렇고, 시민운동권이 그렇다.노동운동권의 예를 든다. 언론인 남시욱씨가 쓴 한국진보세력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현재의 노조 대부분은 1천500만 노동자 중 극소수에 불과한 상대적으로 부유한 근로자들이다. (1천500만 노동자의) 그 10%도 대개가 정부기관, 공기업, 대기업, 은행, 교사, 언론, 병원 등 고액봉급을 받는 기득권 집단이다라고 했다. (이들 귀족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사회를 어지럽게 한다) 또 진보세력이(사실상) 소외계층 문제를 비롯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소홀한 원인은 과거의 타성에 젖어 통일문제 등 이념과 민족문제에만 계속 매달리기 때문이다라고 했다.주목해야 하는 것은 민중운동을 한다는 정치운동권, 노동운동권, 시민운동권 사람들 거의가 유산계급이란 사실이다. 무산계급의 민중을 팔아 고대왕실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오래 전에 든 사례를 한 번 더 들겠다. 베트남의 호치민이 국부로 추앙받는 것은 그가 평생을 민중의 의식주생활과 같은 면모로 산데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 베트콩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해서 미군의 첨단 무기에 살지 죽을지 모르고 대든 게 아니다. 자신과 똑같은 민중의 삶을 산 지도자 같으면 목숨을 바쳐도 된다는 충성심이 용트림쳤기 때문이다. 호치민박물관에는 그가 생전에 썼던 나무침대 등 검소했던 일상의 가재도구가 그대로 있다.민중을 위한다는 그 많은 진보세력의 정치운동권, 노동운동권, 시민운동권에서 호치민 비슷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아무리 보아도 없다.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극작가 입센의 희곡으로 민중의 적이란 게 있다. 민중을 위한 것처럼 꼬드긴 사람들이 곧 민중의 적이었다는 내용이다. 중우정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론과 정치학에서 민주주의가 타락한 취약점에 붙인 말로, 근세에도 민주제의 허점을 비꼬는 투로 쓰였다. 진보주의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국내 진보세력은 이념적 선전선동의 중우정치로 민중위에 군림하는 집단이익의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안성 골프장 게이트

안성 스테이트월셔 골프장 정관계 로비의혹 사건 수사가 오랜만에 한걸음 진척됐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1일 이미 구속된 공경식 골프장 대표와 연관된 모 바이오 벤처기업과 한 골프장 전동카 납품업체를 수색, 관련 자료를 압수했다. 이는 K 모 국회의원에게 불법 정치자금으로 건네진 돈이 공 대표의 돈을 직접 받은 것인지, 아니면 따로 자금을 만들어 건네졌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공 대표와 바이오 벤처기업 대표, 전동카 제조업체 대표 그리고 K의원 등이 평소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돈 거래가 있던 점을 주목한 것이 이번 압수수색의 배경이다.이는 그동안의 검찰수사가 골프장 인허가 편의 대가로 김모 전 안성시의회 의장을 1억8천만원, 지금은 행자부 국장인 한 모 전 경기도기획관리실장이 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하는 등 관계에 쏠렸던 메스를 정치권으로 돌린 점에서 관심이 쏠린다. 물론 관계에 대한 수사의 여진은 아직도 남아 있다. 수 명의 새로운 사법처리 대상의 관료가 또 나올 것이다.그러나 마침내 정치권을 정조준한 검찰은 조만간 압수물을 분석한 뒤 K 의원을 소환하고, 이어 별도로 역시 공 대표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정황이 짙어 내사를 해온 H 국회의원 등도 소환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치권의 연루의혹은 이외에도 적잖게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회가 지금은 정기회 회기 중이어서 구속 문젠 속도조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안성 스테이트월셔 골프장 로비의혹은 공 대표가 골프장을 조성하면서 회사돈 84억8천만원을 가로채어 비자금을 만든 것이 발단으로, 이 가운데 33억원을 로비자금으로 뿌렸다고 보는 것이 검찰수사의 요지다. 흥미로운 것은 공 대표의 돈을 받은 것은 정관계 만도 아니란 사실이다. 공 대표의 비자금 조성은 골프장 땅을 사들이면서 시세보다 값을 비싸게 치른뒤 차액을 돌려받는 수법을 썼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알고 공 대표를 위협, 무려 10억원을 갈취한 공갈범은 30대의 노점상이다. 물론 이도 구속됐다.문제의 골프장 로비의혹 수사를 주목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부패 척결의 현안 때문이다. 공직부패는 기둥을 갉아먹어 결국 집을 쓰러뜨리는 쥐떼의 병폐와 비유된다. 한데도, 끊임이 없는 고질적 병리현상으로 토착화된 것이 공직부패의 불행스런 현실이다. 아울러 주목되는 것은 검찰수사의 의지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란 점이다. 사건의 장본인이 되는 공 대표 변론을 맡고 있는 변호사가 다름 아닌 대검 중수부장을 지낸 거물이다. 안성 스테이트월셔 골프장 의혹은 당초 대검 중수부에서 내사하다가 서울중앙지검으로 배정된 사건이다. 중수부장 출신의 이모 변호사를 영입한 법무법인 B에서 가진 이 변호사 개업식엔 검찰 요로 간부들이 참석하기도 했다.검찰 간부 출신의 변호사 개업을 검찰 간부가 축하해주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젠 그가 첨예한 검찰수사 사건의 변호인이라는 사실이다. 그 같은 사적(私的) 인연이 공적(公的)업무에 영향을 준다면 이도 전관예우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렇게 보일 염려가 있을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좋은 내부 전통이 될만한 예가 있다. 현직 검사가 피고인으로 검사의 심문을 받는 법조사상 초유의 재판이 지난 9월3일 서울중앙지법 425호 형사법정에서 있었다. 박연차 게이트의 알선수재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피고인 검사는 김모 부산고검 검사이고, 기소한 검사는 9년차 차이가 나는 중수부 소속 후배 검사였다. 공소사실을 둔 두 검사의 공방은 뜨거웠다. 보다 못한 재판장이 나서 두 검사에게 질문을 해가며 격해진 분위기를 조정할 정도였다. 이윽고 재판이 끝나고 나서 선배 검사는 못난 선배 때문에 고생시키고, 법정에서 못난 모습을 보여 미안하다며 악수를 건네고 후배 검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검사의 일은 때론 고뇌의 직무다. 그 같은 고뇌는 검사직이 국민의 검찰로서 갖는 자긍심이기도 하다. 안성 스테이트월셔 골프장 정관계 로비의혹 사건의 실체적 진실 전모가 규명 될 것으로 기대하고자 한다. /임양은 주필

공무원노조, 꾼들인가

정권의 공무원이 아닌 국민의 공무원이 되겠다고 한다. 이러므로 정부시책에 반대하는 목소릴 낼 수가 있고, 이는 헌법적 권리인 표현의 자유라고 말한다. 통합공무원노조의 주장이다. 감각적으로는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이성적으로 보아선 아니다. 사실적 논리의 단계가 생략된 혹세무민의 궤변이다.공무원이 정부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에 의해 선택된 정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집권을 넓은 의미로, 당정을 놓고 본다면 정권 차원의 집권당 지배는 받을 의무가 없다. 그러나 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은 공무원의 의무다. 아울러 이는 사안적 의무가 아닌 포괄적 의무다. 국민의 일원이 아닌, 공무원 신분으로는 정부 시책을 비판할 권리가 있지 않다. 국민이 선택한 정부에 승복하는 것이 곧 국민의 공무원인 것이다.표현의 자유를 함부로 들먹이는 것이야 말로,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모독한다. 표현의 자유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책임을 수반한다. 이것이 질서가 살아 숨쉬는 사회다. 무책임한 표현의 방종이 자유는 아니다. 표현의 방종은 방만한 무질서 사회다.통합공무원노조는 정부시책에 표현의 자유를 빗대어 반대 성명서를 내고 또 근무시간에도 정치적 주장이 담긴 복장을 갖추겠다지만, 공무원노조의 이런 단체행동권을 인정한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공무원노조는 사기업노조와 다르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고, 상여금 받고, 자녀학자금까지 받는 공무원이 노조 이름을 들어 국민을 불안하게 할 권리는 없다.정치와 행정의 이원론(二元論)은 행정을 올바르게 정의한 전향적 통설이다. 현대행정이 정치적 중립성을 기조로 꼽는 이유가 이에 있다. 현대행정의 기조는 이외에 합법성능률성효과성민주성사회적 형평성 등도 포함된다.이럼에도 불구하고 통합공무원노조의 정치적 주장은 정치와 행정을 일원론(一元論)으로 후퇴시켜 공무원조직 원리와 행정관리를 위협한다. 공무원조직의 제반 원리인 계층제통솔범위명령통일의 원리 등은 행정조직의 근간이다. 또한 행정 목표의 효과적 달성을 위한 행정관리 체제가 이완되면 무사안일주의에 빠진다.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정당 활동에 이용되지 않고, 정치로부터의 중립적 세력권으로 공익성을 추구하는데 있다. 이런데도 국가공무원법과 공무원복무규정이 정치활동 금지 조항으로 정한 집단 서명운동, 문서 또는 도서의 공공시설 등 게시행위로 정부의 시책 반대를 우정 기도하고자 하는 것은 명백한 정치행위다. 공무원의 품위유지 한계 일탈에 대한 징계를 노조 탄압으로 우기는 것은 적반하장이다.양(量)적인 정치는 넘쳐나면서도 질(質)적인 정치는 척박한 것이 한국적 현상이다. 정치를 논하는 입은 많아도, 정치 수준은 예전 그대로다. 이젠 공무원들까지 정치를 들고 나선다. 이들은 정치적 비판을 하는 것이지, 정치 실물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업어치나 뒤집어치나 그 말이 그 말이다. 공무원노조가 국민이 선택한 정부시책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선 앞으로 어느 정부든 일을 하지 못한다. 정치권이 경계해야하고, 국민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이유다. 정녕, 그토록 정치를 하고 싶으면 깨끗이 옷벗고 정치꾼으로 나서라, 국민의 혈세로 월급 받아 가면서 엉뚱한 짓 하는 공무원 정치꾼은 국민에 대한 배임이다.통합공무원노조가 해야할 일은 굳이 정치 개입이 아니고도 참 많다. 인사 부조리, 상벌체제 혁신을 들 수 있고 승진제도 개혁도 들 수가 있다. 부패척결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공무원사회의 정화는 비단 뇌물수수 같은 지하부패 척결에 국한하는 게 아니다. 초과근무수당 조작이나 앉은뱅이 출장비처럼 관행화된 공식부패 및 준공식부패도 추방해야 된다. 이런 공직기강의 성공적 확립에 앞정서면 행정 관리직의 상사층이 긍정적으로 보게되고, 국민사회로부턴 신뢰의 박수갈채를 받을 것이다. 통합공무원노조가 불행하게도 끝내 정치성 지향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을 것인지, 공직기강 확립 선도로 신뢰를 받을 것인지는 그들 선택에 달렸다.그런데 아무래도 불행한 선택을 할 것이 분명하여 걱정이다. 이들이 말한 국민의 공무원이란, 특정 정당의 공무원으로 전락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국민사회의 의구심이다. /임양은 주필

그 막후의 정체?

이명박 독재! 무슨 말끝에 초등학생 입에서 나온 소리다. 깜짝놀란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 선생님에게 의식화된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며, 씁쓰레하는 입맛을 다셨다. 독재 같지 않은 일을 두고, 독재다 아니다 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런건 어른들 문제다. 아이 입에서 아이 같지 않은 소리가 나왔다는 자체가 충격이었다는 것이다.프랑스의 루소(1712~1778)가 1762년에 쓴 에밀은 페스탈로치를 비롯해 후세 교육에 큰 영향을 준 교육소설이다. 고아인 에밀의 출생에서 청년기에 이른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위적 교육을 배격, 인간 본성의 존중을 강조했다. 아동의 천성을 자연 그대로 발달시켜야 한다고 본 그의 교육사상은 동양의 고전으로 비유하면 성선설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그러나 여기서 교육의 바탕이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는 것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참교육을 내세우는 일부의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의식화하는 행위는 교육이 성선설, 성악설 어느것에서 출발하든 간에 결코 합당치 않다는 사실이다.경기도 교육청이 경기도 교육국 신설에 반대하면서 이른바 교육자치수호대책회의 등을 통해 초등학생에게까지 집단 서명을 받은 사실은 알았지만 조직적이었던 것은 몰랐다. 그런데 군포 K중학교는 134명, 연천 C중학교는 1학년생을 포함한 77명의 학생들에게 서명을 받고 여주 A중학교는 학부모 학생 50명, 김포 P중학교는 과제물 삼아 학부모 등에게 서명을 받은 경위가 경기도교육청과 지역교육청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기도의회의 행정사무감사에서 밝혀졌지만, 어찌 이만이겠는가 더 있을 것이다.도교육청 일부의 사람들이야 그런다고 해도, 도대체 학생들이 뭘 안다고 교육자치란 말을 이해도 하지못할 초등학교 1학년생까지 동원해 서명을 받아 낸 것인지, 하는 짓이 정말 무섭다. 이런 것이 참교육일 것 같으면 루소가 통탄해 기절할 일이다.참교육주의자들이 언필칭 문제삼는 사교육 문제 또한 궁극적 책임은 참교육을 말하는 선생님들 자신에게 돌아간다. 공교육의 질이 사교육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사교육이 설친다. 원인은 사교육 강사진은 유리밥통의 경쟁사회인데 비해 공교육 선생님들은 무경쟁 사회의 철밥통이기 때문이다. 특히 참교육주의자들은 교원 평가도 거부하고 학생들의 학업성적 평가도 거부한다.그렇다고 공교육이 사교육과 본질적으로 다른 전인교육, 즉 인성교육에 힘쓰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의 의식화를 주입시키고, 학생들에게 집단서명을 받아내는 것 등이 전인교육은 아니다. 반인성교육이다.모든 평가를 거부하는 이들은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나 못 하는 학생이나 똑같아야 하는 것이 참교육이라지만 아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신경을 써 잘하게 하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의 수월성을 부정하는 하향평준화 획책이 참교육의 실체다. 수월성, 즉 개인차의 부정은 역차별의 인권유린이다. 나라의 미래 경쟁력을 위태롭게 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참교육? 그것 놀고 먹자주의 아닙니까?!라고 했다.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모르겠다.설치류인 쥐가 생긴 것은 무려 3천600만년 전이다. 100만년도 안 되는 인류의 기원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오래됐다. 전염병을 퍼뜨리기도 하지만, 전기코드를 갉아 누전으로 화재발생의 원인이 되고, 가스관을 갉아 가스중독을 일으키기도 한다. 끌 모양의 날카로운 쥐 앞니는 한 쌍으로 바깥쪽만 사기질로 싸였는데 치근이 없으므로 끊임없이 자라는 것이 특성이다. 쥐가 전기코드나 가스관이며 나무 등을 갉아대는 것은 웃자라는 앞니를 닳도록 하기 위해 단단한 것을 쏠아 대는 것을 일삼는다. 쏠아대는 것을 게을리 하다가는 뭘 먹지못할 정도로 앞니가 웃자라 낭패를 보는 것이다.끊임 없이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의 불란은 모종의 조직에 대해 웃자라는 이를 닳아 보이는 충성의 다짐일지 모르겠으나, 초등학생에게까지 집단서명을 받고도, 수치를 모르는 막후의 정체가 궁금하다./임양은 주필

이명박과 4大江

4대강 문젠 날 괴롭혔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게 배우려고 했다. 전문가들 역시 말이 중구난방이다. 환경 분야의 시민단체에 물어봤다. 믿기가 어려웠다. 일부의 환경운동가는 운동이 곧 생업이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의 시민운동이 생업의 수단이 되어서는 판단에 이해관계가 얽혀 순수성을 의심받는다.이명박의 대운하사업은 나도 반대했다. 지금은 신작로도 없었던 조선시대와 달라 고속도로가 사통팔달로 깔렸다. 물류 위주의 대운하는 경제성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운하는 그만두고 4대강 정비를 들고 나왔다. 정비라면 문제가 또 다르다.금세기 중반이면 물부족 국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사실은 물이 부족하다기보다는 물을 이용할 줄을 모른다. 연간 내리는 강우량의 약 90%가 바다로 그만 고속 직행한다. 강의 수량을 풍부히 하고 수질을 좋게 하는 것이 4대강 정비사업이라면 반대만 일삼을 일이 아니다.물을 가두는 16개의 보를 가리켜 갑문만 트면 운하가 된다고 한다. 생각해 본다. 물류가 아닌 관광용일 것 같다면 운하인들 꼭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다. 물을 가두면 썩어 수질을 악화시킨다고 한다. 소양강댐 물이 썩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콘크리트 제방으로 습지를 없앤다고 한다. 예컨대 대구 달성습지가 영향을 받도록 설계되진 않았다. 철새 도래지가 없어진다고 한다. 가설이다. 준설을 하면 물이 더러워진다는 걱정은 일시적 현상이다. 강바닥 퇴적물 제거는 뭣보다 긴요하다.반대하는 말을 듣다 보면 서울 마포의 한강물이 홍수가 지면 공덕동 네거리까지 쳐들어왔을 때처럼, 가만놔둬야 한다는 말 같다. 그러나 서울시의 한강 치수는 백미에 꼽히는 것으로 전두환 때에 서울시장 염보현이 이것 하나는 잘해 놨다.생각나는 게 있다. 박정희가 1960년대 말에 처음 경부고속도로 428㎞ 구간을 건설할 적에 야당인 신민당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원짜리 돈을 서울서 부산까지 길에 깔아 없앤다고 혹평했다. 그 무렵엔 나라에 돈도 없었다. 박정희가 서독에 가서 돈을 빌리는데 잡힐 게 없어 사실상 광부와 간호원으로 가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빌렸다. 그때 서독정부가 박정희에게 권고한 것이 길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고속도로 만드는 데 이골이 나 전국이 고속도로 천국이 됐지만, 처음 시발점의 배경엔 이런 기막힌 사연이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7일이다.이명박이 대운하에 이어 왜 고통스런 4대강 문젤 들고 나왔는진 모른다. 4대강을 서울시장 때 재미 본 청계천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반대론자들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4대강과 청계천의 치수사업은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팽개쳐 놔서도 안되는 것이 4대강 치수 문제다. 공사를 하면 강물이 썩는다지만, 4대강 물은 이미 썩고 있다. 우수기엔 홍수로 범람하고, 갈수기엔 건천화하는 강이 된 지 오래다.4대강에 드는 22조5천억원의 예산을 민생 분야로 돌리라는 정치적 주장은 대중영합주의가 다분한 선전선동이다. 당장의 민생도 중요하지만, 후세에 물려주는 치수사업은 더 중요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 같은 공격이 분명한 논거를 발견키 어려운 관념적 공론이란 사실이다. 나보다 더 알 것 같지 않은 이들이 4대강 문제가 무슨 악의 화신인 것처럼 덮어놓고 떠든다.물론 하다 보면 부분적 시행착오가 많이 나올 것이다. 안 나온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나무를 보기보단 숲을 봐야 한다. 착오를 공개하고 또 시정하는 노력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4대강 정비사업은 이미 시작됐다. 지난 10일 낙동강영산강에 이어 오늘은 여주 등지서 한강 물막이 공사가 시작됐다. 금강에서도 곧 첫 삽을 뜬다. 경남 합천 현장에는 쌀값 폭락 농업 위기 외면하고 4대강 삽질이 웬 말이냐는 현수막을 내건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기대를 걸고 삼삼오오 지켜보는 주민들 또한 많았다. 영산강 수질이 좋아지고 물이 풍부해질 것이라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지켜보겠다고 하는가 하면, 홍수나 갈수 걱정이 없는 낙동강이 되면 좋겠다는 농민도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들의 기대를 절대로 져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김상곤의 ‘쿠데타’

교육감 자리는 교육행정가다. 정치인이 아니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은 이런 자릴 정치인 자리로 변질시켰다. 그 자신이 맷감을 만들어간다. 이를테면 맞는 것을 자청, 탄압에 저항하는 투사로 반사시켜 보이려고 한다.기술적인 것은 법을 원용한다는 점이다. 실체적 사실로 위법을 일삼으면서, 이론적으로는 법익의 보호 우산을 뒤집어 쓰고 있다. 공리공론을 방패삼아 실정법 위에 군림하는 그의 왜곡된 교육감직 남용은 학원의 안정을 저해한다.교육과학기술부는 김 교육감이 시국선언 관련의 전교조 교사징계 거부에 지방자치법상의 직무이행 명령을 발동했지만, 이에 고분고분할 그가 아니다. 자신을 점점 더 유명하게 만들어준다고 여길 것이다. 그는 어느 시점에 가면 대법원에 교육자치 침해 이유를 들어 직무이행 명령의 무력화를 시도할 것이다. 즉, 집행정지결정취소청구 등 소송을 낼 게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소송을 끌어 내년 6월까지 교육감 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교육감 임기를 넘길 뿐만이 아니라, 다음 62 지방선거운동에서 재선을 노리는 무기로 삼을 것이다. 문제는 김 교육감이 이렇게 직무이행 명령마저 거역해도 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교육부가 대안으로 검토한다는 재정 및 행정 제재나 감사권 발동은 온당치 않다. 우선 교부금 삭감 같은 재정적 제재는 그 피해가 학교에 돌아간다. 학생들이 피해를 입는 것이다. 이는 김 교육감을 더 기고만장하게 만드는 빌미를 준다. 쥐를 잡으려고 독을 깰 순 없다는 속담을 상고해야 된다.행정제재나 감사권 동원은 표적감사라는 비난을 산다. 노골적인 보복조치라며, 이 또한 마치 교권의 전위적 투사처럼 설칠 것이다. 민선직이 빚는 이런 역기능은 불행하긴 하나, 그렇다 하여 교육감직 직선을 철폐해야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마지막 방법은 형사문제화다. 교육부가 김 교육감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할 수가 있고, 검찰이 인지사건으로 입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신통한 방법이 아니다. 증거가 인멸될 사안도 아니고, 현직 교육감을 도주의 우려가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즉 구속사유가 못된다. 여기에 앞서 말한 대로 대법원에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이 제기되면 형사사건 또한 아무래도 빨리 처리되기가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육부의 직무이행 명령은 일을 더 어렵게 만든 자충수다. 차라리 바로 형사 고발한 것보다 못하다.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유별나게 맘 놓고 방만하게 구는 덴 이처럼 이유가 있다. 그 자신이 아직 있어 보이지 않는 별개의 비위가 없는 한, 교육부의 징계 거부나 직무이행 명령 불복에 대처할만한 즉효약이 없다.그러나 그의 징계거부는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다. 적어도 교육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준수 의무가 그 자신이 금과옥조로 삼는 표현의 자유에 비추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판결이 없는 한 헌법상의 기본권을 들먹이는 망발은 억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법이란 참 이상한 허점이 있다. 법을 밥 먹듯이 위배하면서도 법의 보호를 받는다면, 바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무슨 법률 전문가의 자문을 얻는다는데, 참 묘하다.분명한 것은 그가 취임한 지난 6개월 동안 경기교육에 영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무상급식 확대 소동을 비롯해서 혁신학교, 자립형 사립고 문제 등등 부질없는 숱한 소동만 일으켜 왔다. 지금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는 공교육 강화다. 사교육 문제, 고교 평준화 문제 해결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또 하나는 학교 폭력 추방이다. 그런데 이런 문젠 외면한 채, 이념적 평등주의 허상에만 사로잡혀 있다.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쿠데타 기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왜냐면 교육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은 정부 시책에 맞서도 되는 안전지대에 있을지라도, 법률의 허점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경기교육의 손실이 실로 아깝고 또 안타깝다. /임양은 주필

한나라당, 지게 됐었다

먼저 밝혀 둔다. 나도 수원 장안구 유권자다.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1번 한나라당 박찬숙 후보에게 투표했다. 민주당 측에 걸리는 얼굴이 있어도, 생판 모른 사람에게 표를 준 덴 이유가 있다. 이유는 딱 하나다. 정세균 대표 체제의 민주당은 걸핏하면 등원을 거부하거나 국회 운영을 마비시키곤 했다. 길거리에 나서길 일삼곤 했던 장외 전문 정당은 국회 의석을 달라고 할 자격이 원칙적으로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그런데 결과는 한나라당이 고배를 들었다. 이변이다. 2번 이찬열 민주당 후보가 1028 재선거 당선의 영광을 안은 이유는 뭘까, 당선자에게도 물론 미래는 있을 것이다. 아직은 젊으니까, 그러나 지금 당장의 인물로 보아서는 박찬숙과 게임이 안 되는 사람이다. 선거 초반까지도 판세가 그렇게 돌아갔다.박찬숙이 당한 역전패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한나라당이 민주당과 이찬열에게 승리를 진상한 졸전에 기인한다. 즉 박찬숙의 패배이기보단 한나라당의 패배다.우선 중앙당의 지원을 돌아본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가 들락거리며 발 벗고 나섰다지만, 하루 24시간 머물며 연일 뛰어다닌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전력투구를 당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유권자의 인지도며 파워에서도 단연 손학규가 앞섰다.손학규는 한나라당을 탈당한 변절자이긴 하다. 그런데 이번에 이런 게 확인됐다. 경기도지사로 있을 때 직간접으로 연계됐거나 도움을 받았던 지역사회의 상층구조에선 만나는 것도 꺼린 염량세태를 보인 반면에, 개인적 이해 관계가 아무것도 없었던 하층구조에서는 정치적 지지 여부를 떠나 그래도 전직 도지사의 예우로 환대했다는 사실이다.재선거캠프에서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확연히 달랐다. 한나라당 캠프는 응집력이 약했던 데 비해 민주당 캠프는 응집력이 강했다. 한나라당은 머리만 많으면서 손발은 계보별로 제각기 놀아 애만 썼을 뿐, 효과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그러나 민주당 캠프는 머리부터 손발까지 일사불란하여 사생결단으로 뛰었다.심지어 한나라당은 선거캠프와 후보자 사이가 불신의 관계인 것으로 짐작되는 흔적이 역연했다. 캠프와 후보자와의 엇박자 사례가 빈발했다. 캠프의 틈새 마찰음이 바깥까지 소리났다. 민주당은 달랐다. 캠프와 후보자가 선거운동 전반을 톱니바퀴처럼 짜임새 있게 맞물리며 돌아갔다.한나라당의 전략 공천이 진성 당원의 이탈이나 방관을 유발한 것도 패인의 하나다. 낙하산 공천에 그럼, 그동안 지역을 지킨 우린 뭐냐?는 것이 지역 당원들의 적잖은 불만이었다. 상당수가 민주당 캠프로 이동한 이유다.낙하산 공천을 받은 당자는 박찬숙 후보다. 그는 이 점에서 고전했으면서도 떳떳하게 싸웠다. 나는 선거공약 이외엔 개인적 약속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며 조건부 선거운동 제의를 사절했다. 그런 마음으로 돕겠다면 아예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캠프의 어느 낙천자는 누군가와 무슨 뒷자리 약조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그 낙천자는 영향력도 의심스럽고 진정성은 더욱 미궁이었다. 이도 캠프와 후보가 소원했던 이유의 하나일 것 같다.이찬열 민주당 후보가 텔레비전 토론에서 박찬숙 한나라당 후보에게 4대강을 들고 나온 것은 실책이었다. 지역구와 무관한 정치공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이라곤 수원천과 만석공원 저수지밖에 없는 장안구에 4대강 이야기는 생뚱맞은 소리인 것이다. 정치공세 논쟁으로 말하면 이찬열이 평생 말로 먹고 살아온 박찬숙을 당해낼 리 없다.그런데도 박찬숙이 지고 이찬열이 이겼다. 원인을 이렇게 집약할 수 있다. 한나라당은 정치망으로 표를 잡고, 민주당은 저인망으로 표를 긁었다. 정치망은 물고기가 비껴가 놓치기도 한다. 그러나 저인망은 밑바닥까지 훑는다. 정치망은 물고기가 걸리길 기다리지만, 저인망은 물고기에게 다가간다. 민주당의 저인망식 표밭 갈이가 바닥 정서를 얻는 데 주효한 것이 이긴 원인이다.정권을 빼앗긴 민주당은 먹을 게 없어 배가 고파선지 단결이 잘 되는 데 비해, 정권을 빼앗은 한나라당은 배가 부르도록 먹을 것만 찾아서인지 단결이 잘 안 되는 것이다. 내년 62 지방선거가 8개월 남았다. /임양은 주필

기아차노조, 민노총 탈퇴하는가

노동계에 새바람이 분다. 상급단체를 위한 정치투쟁을 버리고, 조합원을 위한 경제투쟁을 하겠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도 강성노조로 소문난 기아자동차 노조 안에서 나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같은 주장이 차기 위원장 선거공약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출마한 가태희 후보(46)는 민주노총 탈퇴를 조합원들에게 으뜸가는 입후보 공약으로 내걸었다. 지금까지 노동계에서 없었던 신선한 이변이다.그동안 민주노총을 잇달아 탈퇴한 대형 노조들이 적잖았으나, 위원장 선거에서 공약으로 나온 적은 없다. 실용노선의 집행부가 들어서 조합원을 설득, 찬반투표를 거쳐 탈퇴했다. KT, 인천지하철노조 등의 경우다.그런데 기아차노조에선 이번에 갖는 차기위원장 선거 입후보 공약으로 민주노총 탈퇴를 직접 들고 나왔다. 물론 결과는 오는 27일 치러지는 투표를 지켜봐야 안다. 하지만 민노총 탈퇴 공약 자체를 충격적 변화로 보는 것이 노동계의 시각이다. 노동계만도 아니다. 사회적 관심이 쏠리는 것 또한 당연하다.민노총 탈퇴를 미리 조합원에게 당당히 물어 정면 돌파를 하고자 하는, 그 위원장 후보 노동자는 민주노총 조직국장을 지냈다. 2005년엔 기아차노조 부위원장도 했다. 굳이 만나볼 이유는 없었다. 선거본부 양기주 대변인의 말을 간접으로 들은 배경 설명은 이렇다. 민주노총의 비민주성과 정파주의는 참된 민주노동운동이라 할 수 없으며, 더 중요한 것은 기아차 조합원이 민주노총식 정치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노동운동이 아닌 민노총의 상습적 정치투쟁운동은 새삼 말 할 것 없이 세인이 다 아는 공지의 사실이다. 문젠 그 같은 정치투쟁이 누굴 위한 것이었느냐는 것이다. 조합원 노동자나 조합을 위했다고 하기에는 결과가 공허하다. 상급단체가 불법을 부추긴 일선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영화를 누린 것은 상급단체인 바로 민노총이다. 민노총이 민노당 국회의원들의 산실이 된 사실도 그런 사례에 든다. 노동운동은 존중돼야 한다. 이런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천박한 정치운동으로 각인된 책임이 민주노총에 있다.기아차노조는 조합원이 무려 3만300여명에 이른다. 1995년 민주노총 창설의 주역이었다. 이 같은 민노총 아성의 변화는 한국 노동운동의 획기적인 전환을 시사한다.사회봉사를 노동운동의 새로운 과제로 삼겠다는 것은 특히 주목된다. 정치투쟁 대신에 조합원들을 위한 경제적 투쟁에 주력하는 한편, 사회봉사에 힘쓰겠다는 것이다. 금속노조에 내는 연간 조합비가 자그만치 31억원이다. 어마어마한 금액의 이 돈이 그동안 어떻게 쓰여졌는진 의문이다. 이 돈을 조합원 복지에 쓰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독거노인 등을 위한 사회봉사 활동에 쓸 것이라고 한다. 노조의 이색적 사회봉사는 소비층에 기업의 이미지와 회사 가치를 높이는 노사 일체의 시범으로 보인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용자와 노동자는 불가분의 관계다. 불가분의 관계가 협력보단, 대립으로 치중된 덴, 사용자 측의 책임도 없진 않다. 그러나 노동자 측의 책임이 큰 것은 그간 정치투쟁이 낳은 역기능이다. 정치투쟁에서 자유로운 노조의 사회봉사 활동은 노사의 새로운 윤리관 확립이다.흔히 노사의 협력적 관계를 어용으로 매도하는 것은 정치투쟁을 부추기는 흑색선전이다. 협력 관계에서 내세우는 권익 요구가 더 설득력 있게 압박한다. 이것이 뜻을 이루지 못해 불행히 파업이 일어난다 해도, 이 같은 파업은 순수한 노동운동으로 국민사회의 지지를 받는다. 이런 노동운동을 보고 싶어 한다.며칠 남지 않은 기아자동차 노조의 차기 위원장 선거에 사회의 관심이 쏠린 연유가 이에 있다. 올해까지 19년 연속 파업을 일으킨 강성 노조에서 노동운동 주권 회복를 위해 나온 민노총 탈퇴 선언 공약은 중차대한 진로의 분수령이다. 선택은 조합원들 몫이다. /임양은 주필

세종대왕이 노하셨다 (속편)

의자 좌석 배열의 표시다. 가나다 순으로 할 수도 있고 123 순으로도 할 수 있다. 하필이면 ABC 등 알파벳 순이었다. 그도 한글날이다. 더욱이 세종대왕 앞이다. 지난 9일 서울 광화문서 가진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 자리에서다.정부에서 하는 일부터가 이 모양이다. 영어 기갈증에 들린 것 같다. 지난 주엔 언론의 영어사대주의를 나무랐다. 이번 주는 정부의 영어사대주의를 꾸짖겠다. 따지면 정부 발표문부터가 영어투성이다 보니, 이를 보도하는 언론도 영어투성인 것이다. 물론 언론은 보도 과정에서 마땅히 걸러낼 것은 걸러내야 하지만, 원인제공은 정부 쪽이다. 세종대왕 어전서 ABC라니 전부터 이랬다. 노무현 정부 또한 반미 경향을 띄었으면서도 영어사대주의는 버리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역시 영어사대주의에 빠져 있다. 영어사대주의 중독 현상이 심화돼 간다.도대체가 에코스테이션은 클린하우스를 벤치마킹하는 것으로 이따위 소릴 알아들을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시책을 펴면서 대한민국 말을 써야지, 배알도 없이 무슨 영어를 남발하는가 말이다. 친서민정책은 시장골목만 찾아 다닌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부가 서민층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정부가 하는 말을 서민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도시,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릴 해서는 되레 반감만 산다.그렇잖아도 길거리에 영어가 범람한다. 외래어도 한몫한다. 외래어 얘기 좀 해야겠다. 담배의 니코틴(nicotine)은 1560년 주포루투칼 프랑스대사 장 니코(Jean nicot)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래된 담배 씨앗을 가지고 귀국해 그의 이름을 학명으로 딴 데서 유래한다. 버스(bus)는 합승마차라는 라틴어 옴니버스(omnibus)가 자동차산업 발달로 영어화되면서 끝머리만 발음해 버스가 됐다. 머리를 깎는 바리캉(bariqund) 기계는 프랑스 제작사의 명칭이다. 비스켓(biscuit)은 라틴어에서 두번이라는 bis와 굽는다는 cuit의 합성어로 두번 굽는단 뜻이다. 스타디움(stadium)은 그리스의 고대경기장 스타디온(stadion)에서 나온 말이다. 아카데미(academy)는 소크라테스 등이 토론을 벌였던 아테네 시내 아카데모스(academos) 공원에서 유래됐다. 올림픽(olmypic)은 그리스 신화의 영산 올림포스(olympos)의 어미변화다. 위스키(whisky)는 위스키의 원산지인 스코틀랜드 말로 생명수란 뜻이다. 팬(fan)은 신전 참배의 파나티쿠스(fanaticus)란 말이 광신자의 퍼내틱(fanatic)으로 영어화되면서 팬으로 준 말이다.영어사대주의를 질타하면서 외래어를 장황하게 설명한 덴 연유가 있다. 이 같은 외래어가 넘쳐나는 것은 국어생활의 차용어로, 쉽게 말해서 우리 말 안방을 내준 셈이다. 수치스럽지만 불가피한 외래어로도 모자라 토착화 안 된 생영어를 신외래어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다. 민초 외면하는 정부의 영어중독 정부가 이 모양이다 보니 지방자치단체도 덩달아 영어를 마구 써대 주민들이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그 예를 구차하게 열거할 것 없이 한 가지만 들겠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에게 기대하고자 한다. 광교테크노밸리를 꼭 그렇게 불러야만이 국제사회에 명함을 내미느냐는 것이다. 광교기술단지나 광교기술마을로 부르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갖는다.아무튼 세종대왕께서는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뜻을 못 펴는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드셨는데, 지금의 민초들은 세계적으로 훌륭한 한글을 두고도 벼슬하는 나으리들이 써대는 영어 바람에 나랏말씀이 영어와 달라서 고통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서울에 와 있는 외국인 한국어교육자가 중국캐나다러시아 등 19개국 사람들이다. 장차 지구촌의 한글 전도사들이다. 왜 훌륭한 한글말 놔두고 이상한 영어말을 많이 쓰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이들의 말이다.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 좌석을 알파벳으로 써댄 영어사대주의 중독자들은 반성해야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 쓰기는 영어중독을 추방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임양은 주필

세종대왕이 노하셨다

우리글로 신문 만들고, 우리말로 방송한다. 이런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론 보도가 많다고 한다. 상당한 식자층에서도 이런 말이 나온다. 언론이 영어를 남발하기 때문이다. 외래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적 영어가 범람하고, 심지어는 무리한 조어가 판친다.예를 든다. 에듀타운 멀티테크노밸리 에코스테이션 팜스테이 워킹푸어 바이오밸리 투모로우 시티 브레인 시티 버킷 리스트 디자인 페스티벌 에어파크 등 들자면 한량없다. 이런 신문 제목이 또 있다. 네이키드 뉴스 코리아 국내 론칭 섹시 앵커 첫 공개, 누드란제리룩 수위조절 어덜트 틴버전 홈피방송 알아볼 독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스마트 그리드를 지능형 전력망, 네크로필리아를 시신유골애착도착증, 기프트 카드를 상품권이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는지, 굳이 생소한 영어 표기에 집착한다. 국제화시대이긴 하다. 하지만 원어민 영어 숙지에 열 올릴 만큼 영어교육에 갖는 열기는 대외 경쟁력 강화를 위한 것이지, 우리끼리 우리말을 팽개쳐 가면서 써먹기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 언론의 이런 영어 과잉은 그래야 더 유식한 것으로 잘못 여기는 영어사대주의 발상이다.하긴, 언론도 할 말은 있다. 정부나 자치단체에서 그렇게 쓰니 그대로 보도할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예컨대 청와대 발표에서도 그랜드 바겐이라고 했다. 이는 외교 용어이므로 청와대는 그랜드 바겐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은 일괄 타결이라고 보도하는 것이 국적 있는 신문방송인 것이다.취재원에서 영어 표기가 있었다 할지라도 신문이나 방송은 보도에 우리말로 풀어 독자와 시청자들이 알기 쉽게 하는 것이 언론 본연의 소임이다. 특히 신문 제작에 쓰이는 한글을 들어 말하겠다.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은 문자가 없어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 자기네 말을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 일본 요미우리신문 등이 경이적인 문자 수출이라며 한글을 배우고 있는 학교를 찾아 현지 보도했다. 일본방송 NHK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문도 세계의 이목을 끈다며 이례적으로 남조선을 극찬했다. 정작 국내 언론은 잠잠하다. 내일은 한글날이다. 563년 전인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친히 훈민정음을 반포하신 것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나라 밖까지 정평이 나 있다. 창제된 28자의 자모는 발음의 초성중성종성을 음상화(音像化)하고, 또한 우주의 오행(五行)과 연관됐다. 발성과 표기가 과학화됐을 뿐만이 아니라, 심오한 우주철학이 깃들어 있다.이토록 위대한 우리의 한글로 신문을 만들면서 잘 알아듣지 못할 영어말을 써대는 것은 한글에 대한 모독이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중략)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문을 몰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이에 28자를 만드노니(필자 주석)라고 하였다. 그런데 대왕의 후대인 이 시대의 우매한 언론은 보도에 영어를 남발해 한글 창제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 이번 한글날엔 서울 광화문에 우뚝 선 초대형의 세종대왕 동상이 제막된다. 지난 5일 심야에 이미 모셔 놔서 당일엔 제막식과 함께 국민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나랏글을 만드신 대왕의 위업을 기리는 동상은 항상 우릴 굽어보고 계시게 된다.신문에 민초들이 잘 모를 영어를 한글로 써대는 것을 보는 세종대왕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중국글(한문)을 모르는 백성이 많아 우리의 한글을 만들었더니, 이젠 우리의 글로 써대는 민초들이 모르는 영어투성이를 몹시 괘씸하게 여기실 것 같다.한글날에 즈음한 세종대왕의 동상 제막식을 앞두고 우린 우리의 나랏글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날이 갈수록 신문의 한글 표기 영어가 늘다 못해, 아예 알파벳 영자표기 영어까지 버젓이 나오는 판이다. 영자신문도 아닌 우리의 한글신문이 영어에 잠식당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더 이상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 /임양은 주필

국회서 가진 ‘태안3지구’ 포럼

국회의사당이 온통 문화재청 성토장이 됐다. 본회의장이 아니다. 국회의원회관 1층 대회의실에서 그랬다. ‘정조대왕 효행지 융·건릉의 보존 활용방안’ 포럼을 가진 자리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의 바람직한 보존방안’의 일환으로 열렸다. 지난달 28일 오후 1시30분에 시작해 오후 5시에 마칠 예정이던 포럼은 예정시간을 1시간 남짓 넘길만큼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강성찬 국회의원이 공동대표로 있는 ‘정조효문화보존국민연합’이 주최했다. 박천복 경기도의원도 공동대표다. 공동대표의 인사말과 김형오 국회의장의 환영사에 이어 고흥길 국회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최성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총장, 정호 용주사 주지 스님 등이 격려사를 했다. 현장의 영상물 상영도 있었다. 이같은 1부 행사는 정미경 국회의원이 사회를 맡았다. 포럼의 하이라이트인 2부 행사의 주제발표 사회는 박천우 장안대 교수가 봤다. 발표는 ①유봉학 한신대 교수의 ‘조선왕릉의 역사문화적 가치’ ②최병선 문화재청 궁릉관리과장의 ‘조선왕릉 보존계획’ ③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의 ‘조선왕릉보존의 현실’ ④민학기 변호사의 ‘문화재보호법의 문제점과 융·건릉 능역의 실태’ ⑤정해득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연구실장의 ‘융·건릉의 현안 문제와 보존방안’ ⑥이달순 전 수원대 총장의 ‘융·건릉의 세계화 및 문화관광의 경제적 효과’ 등으로 이어졌다. 3부는 종합토론이다. 이남규 서울경기고고학회 회장 사회로 황성태 경기도문화관광국 국장 등이 참여했다. 포럼 장소인 의원회관 1층 대회의실은 1천300여명의 방청객으로 꽉 찼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큰스님도 보였다. 미처 자리를 갖지못한 방청객은 서서 방청했다. 포럼은 주택공사가 진행하는 ‘화성 태안3지구 택지개발사업’의 부당성에 초점이 모아졌다. 이는 최근 감사원 감사에서도 문제점이 지적된 바가 있다. 택지에서 발굴된 정조대왕 초장 왕릉 터의 사적 지정 권고를 문화재청이 취소하는 과정에 개입된 중대한 흠결이 적발됐다. 문화재청은 주공측의 이의 처리에 정상적 절차를 무시했을 뿐만이 아니라, 현지조사위원 6명 중 2명이 주공이 시행하는 용역관련의 자문위원인 것으로 드러나 백지화의 가능성이 없지않게 됐다. 초장 왕릉터의 사적 지정은 택지개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현행 법상 사적지가 되면 반경 500m 안의 개발행위가 금지되기 때문이다. 유봉학 한신대 교수는 “조선왕릉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그 보존보호에 더욱 정성을 기울여야 할 시점에서, 그것도 책임관청인 문화재청의 결정에 의해 정조 효심의 상징인 유서깊은 왕릉터와 능역에 고층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허가됐다는 사실이 놀랍고 수치스럽다”고 말했다. 아울러 “융·건릉은 전체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며, 가장 많은 문화콘텐츠를 갖고있어 장차 무한한 활용 가능성이 있는 능역”이라면서 “이를 무참히 파괴한다면 역사의 죄인이 되는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호 용주사 주지 스님은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빼앗아간 문화재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자랑하는데, 우리나라는 어쩌다가 정조같은 성군의 얼이 서린 능역 주변에 15층 아파트를 못지어 안달인 못난 나라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크게 개탄했다. 이 말을 하면서 한동안은 끝내 목이 메어 울먹이기도한 토로에 우레 같은 방청객들의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달순 전 수원대 총장은 “이미 보상비와 기반공사로 2천200억원을 들인 주공이 그냥 공사를 중단하기 어려우면 한옥마을 조성으로 사업변경을 하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주공측은 지금 개발을 중단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부의 결정이 나면 그에 따르겠다는 입장이다. ‘태안3지구택지개발사업’의 개발 백지화는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약속한 사안이다.

‘녹색새마을운동’의 활성화를

새마을운동은 헌마을운동이 아니다. 근면·자조·자립·협동의 새마을정신은 의식개조의 정신운동이다. 시일이 멈추지 않은 것처럼, 정신개조운동 또한 멈출 수가 없다. 새마을운동을 구시대 운동으로 여기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도착된 관념이다. 시대에 부응하는 정신운동이 꼭 새마을운동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에겐 이미 산업화를 일궈낸 새마을운동의 경험이 있다. 즉 새마을운동은 시대를 초월한 정신운동이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농촌새마을·도시새마을·공장새마을운동은 농경사회를 넘어 산업사회를 이룸으로써 오늘날 정보화사회의 기반을 마련했다. 해마다 겪어온 보릿고개의 춘궁기, 이맘때면 또 벼를 논바닥에 세워둔 채 미리 팔던 입도선매의 절대적 빈곤을 추방했다. 국가개조의 근대화에 성공한 새마을운동이 20세기 종반들어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21세기형의 제2새마을운동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녹색새마을운동이 곧 금세기 유형의 새마을운동이다. 저탄소 녹색산업의 시대다. 굴뚝없는 공장, 차없는 거리, 자전거타기 권장 등이 다 저탄소 녹색산업의 일환이다. 지구는 온실가스로 뒤덮인 중병으로 기상 이변이 곳곳에서 끊임이 없다. 이대로 가다간 한반도가 금세기에 아열대가 된다는 것은 극심한 생태계 파괴다. 사람이 살기에 어려운 땅이 된다. 21세기 말엔 기온이 무려 6.4℃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것이 기상학자들의 예고다. 우리나라는 온실가스 배출양이 세계 9위다. 기후변화 및 환경문제에 따른 대응이 시급하다.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시동을 건 녹색새마을운동의 국민적 활성화가 절실하다. 저탄소 녹색산업 분야는 광대하다. 실천방안 역시 다양하다. 이를 분야별로 추진하는 각기 약진의 실천은 비효율적이다. 이의 상승적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광대한 분야와 다양한 실천 방안을 한 고리로 구심점 삼는 녹색새마을운동이다. 녹색새마을운동의 범국민화는 잘못된 일상생활을 고치는 의식개혁에서 시작된다. 가령 ‘우리집 에너지 절약 길들이기’ ‘친환경 제품 사용하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석유수입이 세계에서 4위인 것 부터가 일상생활에서 고쳐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녀를 위하지 않는 부모가 없다. 녹색새마을운동은 곧 후세를 위하는 운동이다. 자녀들의 자녀 세대에 닥칠 종말적 재앙을 지금의 부모들이 막지않고 방치하는 것은 죄업이다. 저탄소 녹색생활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의 인식을 게을리하여 자녀들 미래에 재앙을 안겨주는 것은 후대를 위한다고 할 수 없다. 녹색새마을운동의 국내 점화는 세계적인 녹색새마을운동으로 파급되는 국제협력사업이 가능하다. 지금 유엔에서 열린 기후변화정상회의서 각국 정상들이 협상 타결을 한 목소리로 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은 유엔에 온실가스 감축등록을 제안했다. 저탄소 녹색산업은 지구 살리기의 세계적 관심사인 것이다. 이의 세계적 관심사가 세계적 새마을운동으로 번질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동안 92개국에서 4만7천여명이 우리나라에 와서 새마을운동을 배워갔다. 이들은 그냥 다녀간 것이 아니다. 새마을운동중앙회 합숙소에서 우리말로 ‘새마을 노래’를 불러가며 이론과 현장 학습을 습득했다. 우린 우리의 사회 일각에서 새마을운동을 헌마을운동으로 치부할 때, 다른 나라에서는 새마을운동을 수입해가기에 바빴다. 요컨대 문제는 우리 사회가 녹색새마을운동에 갖는 인식이다. 이에 불붙기 위해서는 새마을운동의 조직 활동도 중요하지만, 범국민적인 의식개혁이 앞서야 한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인식의 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과거의 새마을운동이 절대적 빈곤 추방의 경제부흥에 기여했다면, 금세기 녹색새마을운동은 절대적 재앙 추방의 환경정화에 기여하는 것이 된다. 녹색새마을운동은 곧 인류의 생존을 위한 운동이다.

석유가 없는 미래를

세계 경제가 좀 나아질 기미가 보이니까 원유값이 또 뛴다. 베럴당 140달러까지 치솟았던 게 떨어지기 시작해 한땐 50달러 선으로 밑바닥을 기었다. 그랬던 것이 60달러 대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더니, 70달러대로 껑충 올랐다. 언제 또 천정부지로 폭등할지 모른다. 원유는 깊은 땅속에서 뽑아내는 탄화수소의 혼합물이다. 인류 이전의 태고적 동물들이 지구의 지각 변동으로 죽어 묻힌뒤 장구한 세월동안 퇴적물이 쌓여 높은 압력과 열로 부패돼 만들어졌다는 것이 지질학계의 통설이다. 지구는 지금의 지구 표면 생성 이전에 수차에 걸친 폭발적 대변화가 있었다. 한반도에는 유전이 없지만 유전은 적도에서 남북극에 이르는 지구촌 도처에 깔려 있다. 문제는 경제성이다. 북해 등 수백m의 해저층 유전을 뽑아 올리기엔 수지 타산을 맞추기가 어렵다. 이런 가운데도 해저유전 탐사가 끊이지 않는 것은 해저유전의 매장량이 육지유전의 매장량보다 더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유 매장량엔 한계가 있다. 앞으로 30~50년 뒤엔 고갈될 것으로 보는 전망은, 원유 채굴의 경제성이 높아 세계적인 소비에 절대량을 차지하는 중동지역 유전을 말한다. 미국이나 중국 등도 자국의 유전이 있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채굴을 않고 묻어 둔다. 중동의 유전이 떨어질 것에 대비하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한 지질학자가 발견한 중동의 유전층은 인류생활의 획기적 에너지로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주로 등화용으로 쓰였던 석유가 자동차며 선박산업에 이어 비행기의 동력으로 확대되면서 무기화하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거치면서 국가의 국방력과 관련된 주요 자원이 됐다. 이만이 아니다. 오늘날 석유화학 제품은 생활필수품이 됐다. 예컨대 플라스틱 용품이나 비닐용지며 아스팔트 포장이 다 원유에서 나온다. 즉 합성수지·합성섬유·합성고무·합성세제·도료원료·의약품·농업 및 공업약품 등 그리고 이밖의 여러 분야에서 원유를 이용한 신제품이 잇따라 개발되고 있다. 석유 없이는 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석유를 추방해야 된다. 석유는 인류에게 전례없는 문명의 편익을 제공한 반면에 또한 인류에게 전례없는 재앙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 100년동안 흥청망청 불태운 석유의 가스층이, 지구를 두텁게 뒤덮은 온실로 만들어져 기상 이변과 생태계 파괴가 끊임이 없다. 북극의 만년빙이 녹아 그 속에 숨겨졌던 천고의 속살인 절벽이 드러나고, 남극의 만년설이 녹아 수줍게 드러난 맨땅이 초원화해 간다. 재앙 수준의 가뭄이나 홍수가 빈번한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일들이다. 금세기 안에 한반도가 아열대에 든다는 것은 우리 기상청의 예고다. 문젠 이래가지고는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없는 데 있다. 우리 세댄 그럭저럭 살겠지만, 차차세대에는 우리가 뿌린 재앙의 씨앗이 싹터 아무 죄없는 후대들이 어렵게 된다. 대체에너지 연구가 한창이다. 하지만 제3의 불은 아직 없다. 지금으로선 자동차 동력을 석유 대신에 전기로 움직이고, 가정난방에 태양열을 이용하는 것 등이 전부다. 현안은 이의 효율성을 높이는 대중화다. 그런데 대중용 전기버스가 나온다. 서울시가 자체에서 개발하고 있는 전기버스 15대를 내년 4월 남산 순환버스 3개 노선에 투입, 오는 2020년까지 모든 서울 시내버스를 무공해 전기버스로 바꾼다는 것이다. 한번 충전하면 110㎞를 달릴 수 있고, 최고 시속은 100㎞라는 것이다. 대체에너지 개발은 전력 이용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선박도 비행기 등도 동력의 전력화가 시급하다. 원유값이 똥값이 되어 중동의 매장량이 돈 되는 건 옛 말이고, 미국이나 중국이 아껴둔 유전 또한 별 쓸모가 없고, 해저유전 탐사가 필요없게 될 때 인류의 삶은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전력개발 역시 석유를 쓰는 화력발전은 추방, 수력이나 조력이나 풍력 등 자연을 이용하는 발전이 추구돼야 한다. 아울러 불가피한 것이 원자력 발전의 확대다. 이것이 저탄소 녹색성장으로 가는 길이다. 저탄소 녹색성장은 국가 발전의 요체이면서, 한정된 국토 개념을 초월한다. 인류의 삶과 직결된다.

제발, 아이 좀 낳으셔요

너무 많이 낳아 걱정이던 아이를 이젠 너무 안 낳아 걱정이다. 아이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다. 둘이 만들므로 적어도 둘은 낳아야 한다. 둘을 낳아도 인구정책상으로는 현상 유지가 어렵다. 이런데도 덜렁 한 아이만 낳는다. 숫제 결혼을 안 하기도 한다. 이대로 가면 50년 뒤엔 인구 재앙이 닥친다. 지금의 20대가 노인이 되는 그땐 인구 5명당 노인이 2명이나 되는 초고령사회로 치닫는다. 지금은 고령화사회다. 고령화사회가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화사회에 이어 초고령사회로 간다. 아이를 안 낳는 이유로 교육문젤 든다. 고등학생 사교육비며 대학 등록금이며, 교육비가 여간 만만치 않아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당장 맞벌이를 못해 살기가 어렵다고도 한다. 잘못 키우고, 잘 가르치지 못할 바에야 아예 안 낳는 것이 상수라고들 말한다. 그럼, 그렇다 하고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본다. 그래서 얼마나 잘 키우고 잘 가르치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또한 주변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 인간이다. 아이를 안 낳거나, 하나만 낳기로 하는 고정된 틀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런 삶밖에 안 된다. 아이는 역시 형제자매들 속에서 자라야 심신이 단단하게 여문다. 중국은 일찍이 한 아이 낳기를 권장했었다. 그러나 그 한 아이 시책이, 오늘날 참을성 없는 기성인으로 만든 중국사회의 문제점으로 떠올라 인구정책을 바꿨다. 부모가 결혼을 늦추거나 결혼을 하고도 아이 갖길 미루는 자녀들을 걱정하면, 으레 아들 딸들 한다는 소리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말이지만, 모르는 것이 있다. 며느리나 사위를 보는 것, 손주를 보는 것은 자신들만이 아닌 부모의 인생이기도 하다. 자신의 인생을 내세워 부모의 인생을 부인하는 건, 부모가 지닌 자연법적 지분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며 아이 갖길 늦추는 것, 심지어는 독신주의도 사람이 사는 방법이긴 하다. 해서, 결혼을 늦추고 아이 갖길 늦출 때 늦추더라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땐 되도록 많이 낳는 것이 이문이 남는 인생이다. ‘결혼은 안 할지라도, 아이만은 낳아달라’는 건 남녀 독신주의자들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당부다. 낳기만 하면 정부가 기르겠다는 식이다. 선진국들은 출산 장려에 미래의 국운을 걸고 있다. 예컨대 일본은 저소득층 출산의 아이 1명에 550만원까지 장려금을 주는 것을 비롯, 출산 장려책을 고소득층까지 확대한다는 것이 하토야마 차기 정권의 구상이다. 우리나라도 일본과는 비할 수 없지만, 내년부턴 보육료 지원 대상이 대폭 확대된다. 소득이 하위 70%까지인 가정의 둘째 아이부터 소정의 보육료를 전액 지원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치단체에서 저마다 시행하는 출산 장려책 또한 보다 적극적인 조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사랑의 인식이 뭣보다 필요하다. 아이를 낳는 것, 출산에 의한 새 가족의 만남은 뭣과도 바꿀 수 없는 신비스런 인연이다. 이의 섭리를 거역하는 새 가족 만남의 거부는, 섹스를 즐기는 것으로만 여기고자 하는 이기심이다. 이는 가족사랑의 빈곤이다. 미국의 CNN 방송이 열아홉번 째 아이를 임신한 40대 부부의 말을 전한 “우린 행복하다”는 것은 두터운 가족사랑인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아홉자녀 출산 부부 역시 “더 할 수 없이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돌아보면 과거의 인구정책은 실패했다. 아이를 안 낳는 세태가 된 것 역시 실패한 인구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에서 시험관 아기를 집단으로 배양한다는 무서운 말이, 먼 장래에 언젠가는 나오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기왕 과거지사는 실패했어도 새로운 가임 남성, 새로운 가임 여성들은 제발 아이를 많이 낳으면 좋겠다. 자신있게 말한다. 그것이 가정을 더욱 복되게 하는 길이란 것을, 또한 나라를 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배가 남산만하여 잉태의 수고를 감내하는 여성을 길에서 가끔 보면 반갑기 그지없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더불어 임신부는 이도 국가유공자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개헌안, 이렇게 본다

개헌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회 헌법자문위원회가 국회의장에게 낸 개헌안 보고서는 개헌 논의 개시의 공식화다. 보고서는 이원집정제와 4년 중임 정·부통령제 등 복수안이다. 이원집정제는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권한을 나눠 갖는다는 게 골자다. 대통령은 5년 단임 직선이나 사실상 상징적인 국가 원수다. 보고서의 개헌안은 대통령이 국회해산권·전쟁선포권·강화권·해외파병권·조약비준권·계엄선포권·법률안 서명 및 공포권 등을 갖는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런 권한은 실질적 권한이 아니라 형식적 권한이다. 왜냐면 국회에서 선출하는 국무총리가 행정부 수반으로 실질적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다만 절차상의 요식에 그친다. 내각 구성권을 비롯, 경제·치안·외교·국방·통일을 포함한 국정 전반의 최고 책임자가 국무총리다. 대통령의 권한은 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해 요식행위로 행사될 뿐이다. 예를 들면 국회는 총리 및 내각 불신임권을 결의할 수 있는 데 비해 국무총리는 국회 해산 제청권을 갖는다. 따라서 국무총리가 국회 해산을 제청하면 대통령은 자동으로 재가하게 된다. 이원집정제는 분권형 대통령제라지만 아니다. 사실상의 내각책임제다. 문제는 아무 권한이 없는 5년 단임제 직선 대통령에 누가 출마하고, 또 무슨 직선의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개헌안 보고서가 밝힌 또 하나의 국가 권력구조는 4년 중임 정·부통령제다. 제1공화국의 자유당 이승만 정권 때 실시된 제도다. 대통령중심제에서 부통령은 아무 할 일이 없다. 이시영 초대 부통령은 “‘호위소찬’으로 국록만 축낼 수 없다”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부통령은 대통령 궐위 시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이 때문에 일어난 테러가 있다.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당선된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원집정부제나 4년 중임 정·부통령제나 모두 국회를 상시국회와 양원제로 한다는 점이다. 상시국회로 하는 것은 납득이 간다. 그러나 양원제는 이미 실패를 맛본 제도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에 양원제를 실시했다. 참의원(상원)과 민의원(하원)을 두었고, 의정 주도는 민의원이 가졌었다. 그러잖아도 지금 국회의원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국민적 원성이다. 국회의원 수가 너무 적어도 문제지만, 많은 건 사실이다. 양원제 부활은 생뚱 같다. 현행 헌법은 1987년의 제8차 개헌 헌법이다. 헌정사상 가장 수명이 길다. 5년 단임제와 대통령의 권력 집중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 개헌론자들이 드는 개헌의 이유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떤 제도든 완벽할 순 없다. 분권형이라고 하는 이원집정제도는 국무총리, 4년 중임의 정·부통령제 역시 대통령에게 여전히 권한이 집중됐다. 5년 단임은 연임이 안 돼 레임덕 현상이 빨리 나타난다고 한다. 임기 말 국정 장악력 위축의 폐해가 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4년 중임제도 중임의 임기 말 레임덕을 피할 수 없다. 요컨대 인식의 문제다. 권한의 집중은 책임의 집중이다. 반대로 권한의 분산은 책임의 분산이다. 이의 집중과 분산의 선택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절대적 공동선은 있을 수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운용의 묘다. 운용의 묘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도 효율을 살리지 못한다. 반면에 운영의 묘를 살리면 설령 제도가 미흡해도 효율성을 높인다. 현행 헌법이 비록 미흡하긴 해도 큰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됐으니까 그냥 바꿔보자는 생각을 갖는다면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개헌 논의의 공론화를 굳이 막는 것도 민주주의가 아니다. 걱정되는 것은 정치권의 개헌 논의를 국민사회가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다. “언제는 헌법이 잘못돼 정치를 그 모양으로 했느냐?”는 의문이 성립된다. 현행 헌법은 헌정사상 제6공화국이다. 국가 권력구조를 개편하는 제9차 개헌이 이뤄지면 제7공화국으로 들어선다. 개헌 논의가 분분할 것 같다.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대선 주자군들은 4년 중임의 정·부통령제를 고집하고, 당 중심의 의회주의자들은 이원집정부제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발독재+민주화운동=선진화로

우리의 지난 현대사는 독재와 민주화의 갈등이었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는 정치독재였고, 박정희의 3·4공 독재는 개발독재였다. 민주화 투쟁 또한 자유당 정권에 대한 독재 저항이 민주화투쟁의 전반부라면, 3·4·5공에 대한 독재 항거는 민주화투쟁의 후반부라 할 수 있다. 다만 후반부 민주화투쟁 중 박정희의 3·4공, 신군부 중심의 전두환 독재를 통틀어 1·2·3기로 나누면, 개발독재는 3·4공(1·2기)만 해당된다. 신군부를 비롯한 전두환 5공 독재는 개발독재이기 보다는 정치독재의 성격이 짙다. 자유당 정권에 대한 저항, 즉 전반부 농경사회의 민주화 투쟁 산물이 제2공화국의 (구)민주당 장면 정권이다. 전반부 민주화 투쟁을 일일이 여기에 열거하긴 어렵다. 4·19 의거가 마지막 결정판이었던 것만 밝혀둔다. 그러나 2공의 민주화는 실패했다. 데모 덕으로 들어선 정권은 데모 등살에 망했다. 민주당 신·구파의 영일이 없는 정쟁속에 거리는 날마다 갖가지 데모로 넘쳐, 심지어는 국회의사당에 난입하기도 했다. 보릿고개며 사태가 난 실업자 등 민생 문젠 철저히 외면됐다. 이에 들고 일어난 5·16 군사정변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총칼이 무서워서만이 아니다. 민생고 해결을 제일 먼저 내건 혁명공약의 국민적 용인 정서가 사회저변에 깔렸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국권 찬탈의 반란은 헌정을 중단하는 대역죄다. 그러나 당시의 정변은 논리적 문제이기 보단, 현실적 문제의 시각이 우선했다. 민주화운동의 활기가 대중적으로 파급된 것은 절대적 빈곤이 추방된 1970년대 초반부터다. 중화학공업, 제철 및 조선산업 등 기간산업의 산업사회 발달이 뿌리내렸을 무렵이다. 이제 이 글의 주제인 개발독재와 민주화운동에 접근하고자 한다.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자유당 독재나 신군부 등 5공 독재는 개발독재가 아닌 정치독재이므로 여기선 논외라는 점이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외형상 민정으로 이양된 3공과 유신체제의 4공으로 장장 18년이다. 민주화운동사로 보면 앞서 밝힌 것처럼, 민주화 투쟁 후반부의 1·2기에 해당한다. 우리 나라가 세계적인 경제대국은 아니어도, 경제강국 대열에 올라 이만큼이라도 먹고 사는 것은 개발독재가 닦은 경제기반에 기인한다. 부정될 수 없는 역설적 사실이다. 아울러 민주화 투쟁 또한 간곤한 가운데서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김대중(DJ)·김영삼(YS), YS·DJ는 민주화 투쟁의 두 쌍끌이었다. 민주화 투쟁은 개발독재가 더욱 오만해질 수 있었던 것을 막은, 경고적 약효가 컸다. 유신체제의 종언 역시 부마(釜馬)사태 등 민주화 투쟁의 영향이다. 독재와 민주화의 갈등으로 점철된 지난 현대사에서 개발독재와 이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양 축은 모두 성공했다고 보는 평가가 가능하다. 성공한 개발독재, 성공한 민주화 투쟁이다. 사실(史實)은 사실(事實)에 입각돼야 하고, 평가는 국리민복이 잣대가 돼야 한다고 보는 관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필요한 것이 그간의 갈등에서 앙금을 털어내는 용서와 화해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가지 피해를 입으시고 고생하신 것을 딸로서 사과한다”고 한 것은 일찍이 박근혜가 DJ를 찾아가 한 말이다. 이에 DJ는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이젠 새로운 시대다. 정치독재나 군부가 들고 나오는 헌정상 패륜은 말할 것 없고, 개발독재도 더는 용인되지 않는다. 아울러 더 이상의 민주화 투쟁 또한 명분이 없다. 민주화운동의 시기 역시 갔다. 민주화운동은 필연적으로 실정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른바 운동권에서 설치는 위법행위 양상이 이를 모방하는 것이지만 거리가 멀다. 집단이익에 민주화를 빗대는 것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모독이다. 지금은 선진화로 가는 시대다. 우리 나라를 선진국 대열로 올려놔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소임이다. 특히 정치권은 더 명심해야 할 소명이다. 여야가 다를 바 없다. 화해와 용서는 과거지사에 대한 매듭이다. 다툼은 앞으로 또 시작된다. 정권을 다투는 정치권에 싸움을 하지 말라는 것은 무리다. 다만 싸우더라도 선진화 다운 성숙된 싸움을 해야 민심을 얻는다.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화시대다. 한국정치사가 새 이정표에 들었으면, 새 정치 모델을 보여야 신선하다. 과거형에 머물러선 미래가 없다. 정치인들은 이를 위해 고민해야 된다.

김대중, 그의 시대

한국 정치사는 광복으로는 64년, 건국으로는 61년이 된다. 이 가운데 50년 안팎의 현대 정치사에 줄곧 직간접으로 얽힌 세 명의 정치인이 있다. 김대중(DJ), 김영삼(YS), 김종필(JP) 등 이른바 ‘3김’이다. DJ는 1961년 제5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신했다. YS는 1954년 약관 25세에 제3대 국회의원이 됐다. JP는 1961년 박정희가 이끈 5·16 군사정변의 2인자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의 권한은 서슬이 시퍼랬다. 모든 정치 기획이 그의 손에서 주물럭거려졌다. 국회가 해산당한 YS와 DJ는 구 정치인으로 매도됐다. 제3공화국의 박정희 정권, 제4공화국의 유신정권은 DJ와 YS의 민주화운동 1·2기 투쟁기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선포는 이들 두 민주화운동이 두려워 탄압하고, 영향력을 희석시키기 위한 비상 조치였다. 1980년 전두환·노태우 주축의 신군부 출현에 이은 제5공화국은 DJ와 YS, YS와 DJ의 민주화운동 3기 투쟁기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적과 동지가 무상해진다. 민추협의 공동의장이던 DJ와 YS가 YS는 신민당, DJ는 평민당 대통령 후보로 각기 독자 출마,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당선을 안기면서 숙적이 된다. 이어 YS는 옛 정적인 JP·노태우와의 3당 합당으로 제14대 대통령이 됐다. DJ 또한 JP와 손잡는 DJP 연대로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군사정변 때 DJ를 억압했던 JP가 괄시받았던 DJ 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냈다. 3김의 은원 관계는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부인될 수 없는 한국 정치의 현대사다. 이 가운데 DJ가 타계했다. 일세의 풍운아다. 국내외 애도의 물결이 줄을 잇고 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신군부 시절에 핍박받았던 YS는 대통령일 때,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신군부 시절 사형 선고를 받게한 DJ를 병문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일 때, 전직(대통령)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YS는 오랜 동지이면서, 오랜 정적이었던 DJ 병실을 찾아 “이젠 화해할 때가 됐다”고 애증어린 소회를 밝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기관지 수술로 말을 제대로 못하는 몸으로 강원도 용평서 요양 중이다. JP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3김정치’는 일찍이 YS·JP 양김의 정치 폐업으로 사실상 끝났었다. 다만 DJ만이 좌장격의 훈수가 있어왔다. 한데, 이마저 사라졌다. ‘3김정치’가 완전히 종식된 것이다. ‘3김정치’는 보스 정치다. 또한 지역 패권주의다. 지역감정의 골을 키웠다. 영호남의 동서 분열로도 모자라, 충청 등 지역정서를 갈래갈래 갈라놨다. 남북이 분단됐다. 우린 분단국가다. 그런데 이에 분열국가까지 겹쳤다. 분단 못지않게 무서운 것이 분열이다. DJ의 영욕은 극명하다. 대통령 재임 때만 해도 아들들과 관련된 갖가지 권력형 비리가 무성했다. 정보기관의 무차별 불법 도청 사실이 드러나 민주주의와 인권 중시의 이미지에 흠집을 냈다. 언론사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강행, 언론 탄압 시도의 의혹을 사기도 했다. 청와대 비서관 등이 연관된 옷로비 사건 등은 도덕성을 먹칠했다. 측근 연루의 각종 부패와 더불어 대북 비밀송금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DJ는 역시 위대하다. 정치 입문 43년, 대권 도전 27년만에 대통령에 오른 3전4기, 좌절을 거부한 오뚝이 의지만이 아니다. IMF 외환 위기를 집권 1년 반 만에 극복해낸 리더십만도 아니다. 남북 관계의 새 지평을 열어서만도 아니다. 자신의 신변에 안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있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가택연금 55회, 감옥살이 6년, 망명 2회, 사형선고 등을 받은 정치인은 DJ 말고는 없다. 그러나 이젠 그런 민주화 투쟁의 시대는 갔다. DJ 스타일의 정치 모델은 DJ 시대로 끝났다. 지금은 화해 협력의 시대다. 생각이 달라 서로 얼굴을 붉히며 다퉈도, 협력의 틀에서 다퉈야 된다. DJ 정신의 계승은 전근대적 투쟁이 아니다. 김정일과도 화해하자는 판에 우리끼리 못할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의 영광을!

내일 모레가 8·15 광복절이다. 대한민국 건국일이기도 하다. 광복 64주년, 건국 61주년이 된다. 건국일은 있어도 건국절은 없다. 독립기념일이 없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 우린 광복절은 있어도 독립을 기념하는 건국절이 없다. 8월15일을 어떻게 기리느냐는 문제로 한동안 말이 많았으나, 어려울 게 없다. 자명하다. ‘광복절 겸 건국절’로 하는, 건국절 제정이 긴요하다. 1945년 8월15일 조국의 광복이 있었으므로 하여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가 있었다. ‘조국광복 위해 이 한몸 초개같이…’는 독립군 군가의 한 대목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는 6·25 전쟁의 전우가다. 그렇다. 우리 나라는 이런 독립운동 선열과 호국 영령들이 목숨바쳐 세우고 지킨 나라다. 중국의 광야에서, 조국의 산야에서 무수히 죽어간 분들이다. 이만이 아니다. 광복후 건국하기까진 제주 4·3 사태 등 실로 영일이 없었던 공산당의 유혈 건국 방해책동을 극복하였다. 월남 참전의 희생은 단군 이래의 빈곤을 추방한 경제부흥의 밑거름을 이루었다. 이토록 피흘려 세우고 지킨데 이어, 피흘려 또 살도록 만든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다. 한데, 이러한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 등의 영화를 누리며, 잘먹고 잘사는 일부의 좌파 무리들이 나라의 정체성을 부인한다. 국기를 뒤흔든다. 개혁이 인류 발전의 부단한 과제인 것은 시대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 가변성이 있는 반면에 절대적 불변성이 있다. 예컨대 집안의 가풍을 달리했다 하여 조상을 부정할 순 없다. 개혁의 탈을 쓴 좌경화는 절대적 불변성의 변질이다. 대한민국이 좌경화로 갈 수 없는 것은 태생적 숙명이다. 평양정권은 상해 임시정부를 부정한다. 오직 김일성 수령의 항일 유격대만을 독립운동으로 내세운다.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것은, 김일성 독립군의 숙영지 본산으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보천보사건은 만주 마적떼의 습격이다. 이를 독립운동으로 각색한 것이 이른바 저들이 말하는 보천보전투다. 북에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은 몰라도, 김일성 장군의 보천보전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으로 보아 좌파로 갈 수 없는 이유다. 또 하나의 이유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방해한 세력이 남로당인 데 있다. 광복후 건국하기까지 3년동안 자행된 남로당의 반란은 양민학살 등 극악 무도했다. 심지어는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1948년 5·10 총선거마저 일부의 투표소 등을 급습, 죽창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투표함 등을 불태웠다. 실로 참기 어려운 이유가 또 있다.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일으킨 평양정권의 남침은, 1953년 7월27일 자정까지 한반도 산야를 동족상잔의 시산혈하로 물들였다. 이렇게 지킨 나라를 좌경화로 갈 수는 없다. 이럼에도 6·25를 가리켜 북침설이니, 남침유도설이니 하는 궤변적 논란을 일삼은 위인들이 있었다. 종북적 좌파의 일부 교수들이다. 종북주의는 한국적 좌파의 특성이다. 진보주의적 좌파는 세계 도처에 있다. 세계화된 이런 외국의 좌파와는 또 다른 것이 한국적 좌파다. 한국적 좌파는 평양화 된 종북주의가 판단의 잣대다. 북쪽엔 민족화해, 나라 안으로는 빈부타파가 무기화된 이들의 논리다. 그러나 실상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 누구보다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종북주의 좌파 족속이다. 결코 가난하지 않은 그들은 가난한 계층을 팔고, 또 군림하고 있다. 더욱 가증스런 것은 폭력화다. 소수 의견을 허장성세, 혹세무민으로 관철하려다 못하면 집단폭력으로 국가사회를 교란하기가 일쑤다. 표현의 자유를 말하지만 아니다. 책임이 수반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공적이다. 평양정권과 등지고 살아야만이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공존공영, 평화통일은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나라의 정체성이다. 동포애의 친북은 추구하는 게 마땅하다. 자본주의의 오만을 일깨우는 진보주의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안 되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이념상의 종북주의, 폭력적 좌파주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광복 64주년, 건국 61주년이 다가온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정체성이다. 대한민국의 영광이여! 영원하리!!

정치권, 경제위해 뭘 했나

우리가 어렵긴 해도 이만큼 먹고 사는 게 누구 덕일까, 물론 우리 각자가 노력하는 우리의 덕이다. 하지만 우리가 먹고 살고자 하는 노력을 받쳐주는 저력이 있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고 떠드는 정치권이 아니다. 정치권은 되레 방해꾼이다. 정답은 기업이다. 중소기업도 그렇지만, 대기업의 힘이 크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린 수출로 먹고 산다. 외국에 물건을 팔거나 외국 기업과의 합작으로 달러를 끌어들여 온다. 근래엔 삼성SDI가 독일 BMW와 전기자동차 용품인 리틀라이온 전지의 단독 납품계약을 맺었다. 총 매출가가 6조원 규모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세계시장 점유율의 37.2%, 하이닉스는 23.8%를 차지한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미국시장 판매 분야에서 일본의 닛산차를 추월했다. LG의 약진 또한 눈부시다. 재계 인사가 한마디 했다. “우리 정치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는, 문제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의 말이다. 얼마전 제주에서 가진 ‘2009 하계포럼’ 개회사에서 그랬다. 정치사회가 어지러운 판에 10년, 20년 후를 내다보는 투자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면서, 그같은 쓴 소릴 뱉었다. 이에 정치권에선 발끈하는 소릴 냈지만 정치권이 잘한 건 개뿔도 없다. 국회의원들은 만날 쌈박질을 일삼거나, 아니면 놀고 먹어도 고급차 타고 다니면서 꼬박꼬박 세비를 탄다. 세비만이 아니다. 보좌관이며, 비서진이며, 승용차 기사며 하여 국회의원 한 사람 앞에 달린 대여섯 명의 월급도 국고에서 축난다. 기업인들은 돈을 버는 것이 직업이어서 흥청망청 돈을 쓰는 것 같지만 아니다. 땀 흘려 번돈이 아까워 차마 잘 쓰지 못한다. 구두쇠 노릇이 몸에 젖었다. 예를 든다. 김영태 SK에너지 부사장 승용차는 아반떼다. 아반떼 차를 손수 운전하며 동분서주하는 것을 본 김태두 태화특수차 대표는 목격담을 전하며 이렇게 일갈했다. “그래!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리는 국회의원놈들은 쌈질 아니면 뭘 하나? 달러를 들여왔어! 기름을 들여왔어!”라고 했다. 경제난이 아직 풀리지 않은 이 시기의 애국자는 일자릴 만든 고용주다. 하다못해 식당 주인일지라도, 그리고 기껏 한두 명을 고용한다 해도 그가 참 애국자다. 소득 분배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견인역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더 말할 것 없다. 기업은 존립하는 것만으로, 이미 사회 기여도가 충분하다. 하물며 고용확대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대기업은 국가사회 경영의 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사회의 수출전선은 총성없는 전쟁이다. 예컨대 1일 24시간 1년 365일동안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지구촌을 누비느라고 비행기를 탄 채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삼성맨이다. 대기업마다의 연구실 불이 좀처럼 꺼지지 않는 것은, 날로 첨단화하는 해외 경쟁상품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정치권에 묻는다. 뭘 했고, 뭘 잘했다고 대기업을 나무라고 재계를 탓하는 가를 묻는 것이다. “세계 1등 제품을 많이 만들어 내는 우리나라가, 왜 1등 국가는 못되는 지 안타깝다”는 조석래 전경련 회장의 토로는 백번이고 지당하다. 정치권은 어려운 경제를 헤쳐나가는 데에 과연 얼마만큼 도움을 주었는 지를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일찍이 설파한 명언이 있다. “한국의 기업은 1류, 행정은 2류, 정치는 3류다”라고 했다. 1995년의 일이니까, 벌써 14년 전이다. 개탄스런 것은 14년이 지났는 데도 정치권은 여전히 3류정치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권은 권력을 지녔다. 대기업 등 재계는 권력이 없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다. 정치권이 ‘못된 아제비 항렬만 높다’는 말처럼 재계에 위세 하려고 들어선 미래가 어둡다. 지금 나라를 버텨가는 것은 정치권의 힘이 아니다. 경제의 힘이다. 재계는 정치권의 시녀가 아니다. 수평 관계다.

민주당 ‘헌재’ 압박하나 ?

민주당의 헌법재판소에 대한 물량 공세가 상상을 초월한다. 민주당은 언론관련법의 권한쟁의 심판 청구와 방송법 효력정지가처분 신청 등을 헌법재판소에 내놨다. 이의 변호사 선임에만 300명이 넘는 ‘매머드급’ 공동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법조사상 전례가 없다. 전례가 없는 괴이한 현상은 또 있다. 이른바 ‘언론악법 원천무효 민생회복투쟁위원회’를 엊그제 만들어 발대식까지 가졌다. 변호사야 300명을 선임하든 500명을 선임하든 나무랄 것까진 없다. 문제는 길거리 행보다. 방송법 등의 무효를 주장하는 시국 집회와 함께 1천만명 서명운동 등을 벌인다는 게 민주당의 100일 장정 계획이다. 첫날은 정세균 민주당 대표 등이 영등포역이며 신촌 일원을 돌았다. 방송법의 그간 논란을 여기에 새삼 옮길 필요는 없다. 민주당이 낸 가처분 신청의 핵심은 내용이 아니고 국회 통과 과정서 발생된 재표결에 하자를 주장하는 것이 골자다. 당초 의결정족수 미달인 줄 모르고 붙인 표결을 취소하고, 재표결로 의결한 것이 일사부재리 원칙에 저촉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엔 의결정족수가 미달된 의결은 원래 표결이 성립 안 된 것이므로 재표결을 해도 상관없다는 견해와 상관이 있다는 견해가 맞서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게 됐다. 참으로 묘한 것은 말썽을 낳게 된 경위다. 사회를 맡았던 이윤성 국회 부의장의 착각이 있었다. “투표를 종용하십시오”라는 국회사무처의사과 직원의 말을 “투표를 종료하십시오”로 잘못 듣고 정족수가 미달된 표결을 해 결국 발목 잡히는 동티를 낳은 것이다. 어떻든 문제는 이제 헌법재판소의 판단만이 남았다. 그러면 모두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순리다. 여야는 더 말할 게 없다. 한데,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나오기 전에 원천 무효를 주장하는 길거리 선전선동은 뭔가, 헌법재판소를 윽박지르는 것이다. 앞으로 16개 시·도당과 210여 지역위원회를 거점으로 언론법 원천무효운동을 강화한다니, 헌법재판소에 대한 물량공세가 더 치열할 전망이다.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재판이 걸린 사안은 말을 삼가는 것이 원칙이다. 재판에 영향을 주고자 하여 간여해서는 안되는 게 철칙이기 때문이다. 정 할 말이 있으면 법정에 나가 진술하는 것이 통념이다. 하물며 여느 사건도 아닌 입법부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생각해 보라, 방송법 등의 표결이 무효하다는 판결을 헌법재판소에 구해놓은 당자가 “원천무효”의 주장을 판결에 앞서 벌이는 길거리 선전선동은, 재판을 다분히 압박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오도된 여론으로 재판을 왜곡시키고자 했던 전철 또한 없지 않다. 가관인 것은 선전선동에 덤 삼아 “한나라당이 언론 장악으로 장기집권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악선전이다. 한나라당에 대한 악선전이기보단, 언론을 모독하는 악선전이다. 민주당 정권 자신이 과거에 몇몇 신문방송과 유착됐던 사실이 있어 그런진 몰라도, 권력에 장악당할 언론은 없다. 전근대적 발상에 머문 그 같은 수준의 생각이 역시 헌법재판소를 괴롭히는 길거리 행태의 원인일 것이다. ‘언론악법 원천무효’라면서 이와는 동떨어진 ‘민생회복투쟁위원회’를 찍어다 붙인 것은 상술이다. 국회에 산적해 있는 것이 민생의안이다. 국회의원의 직무에 속한 민생의안은 팽개쳐 놓고, 길거리에서 떠드는 민생회복 투쟁은 삼척동자도 간파할 정치적 기만이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만약 민주당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라면, 이른바 길거리 투쟁이 주효했다고 보아 쾌재를 부를 것이다. 또한 헌법재판소가 장외투쟁에 영향을 받았다는 세간의 오해를 살 수 있어 이 역시 예삿일이 아니다. 반대로 민주당의 청구를 기각하면, 그땐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른다. 민주당이 정녕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의 기능을 존중한다면 ‘막가파식’ 길거리 투쟁을 그만두고 당장 철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자리다. 연이나 보기 거북한 길거리 모습이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역겹다. 정세균 대표는 거리의 시민들이 자신을 과연 어떻게 대했는가를 냉정히 돌아보는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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