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낳아 걱정이던 아이를 이젠 너무 안 낳아 걱정이다. 아이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다. 둘이 만들므로 적어도 둘은 낳아야 한다. 둘을 낳아도 인구정책상으로는 현상 유지가 어렵다. 이런데도 덜렁 한 아이만 낳는다. 숫제 결혼을 안 하기도 한다. 이대로 가면 50년 뒤엔 인구 재앙이 닥친다. 지금의 20대가 노인이 되는 그땐 인구 5명당 노인이 2명이나 되는 초고령사회로 치닫는다. 지금은 고령화사회다. 고령화사회가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화사회에 이어 초고령사회로 간다. 아이를 안 낳는 이유로 교육문젤 든다. 고등학생 사교육비며 대학 등록금이며, 교육비가 여간 만만치 않아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당장 맞벌이를 못해 살기가 어렵다고도 한다. 잘못 키우고, 잘 가르치지 못할 바에야 아예 안 낳는 것이 상수라고들 말한다. 그럼, 그렇다 하고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본다. 그래서 얼마나 잘 키우고 잘 가르치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또한 주변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 인간이다. 아이를 안 낳거나, 하나만 낳기로 하는 고정된 틀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런 삶밖에 안 된다. 아이는 역시 형제자매들 속에서 자라야 심신이 단단하게 여문다. 중국은 일찍이 한 아이 낳기를 권장했었다. 그러나 그 한 아이 시책이, 오늘날 참을성 없는 기성인으로 만든 중국사회의 문제점으로 떠올라 인구정책을 바꿨다. 부모가 결혼을 늦추거나 결혼을 하고도 아이 갖길 미루는 자녀들을 걱정하면, 으레 아들 딸들 한다는 소리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말이지만, 모르는 것이 있다. 며느리나 사위를 보는 것, 손주를 보는 것은 자신들만이 아닌 부모의 인생이기도 하다. 자신의 인생을 내세워 부모의 인생을 부인하는 건, 부모가 지닌 자연법적 지분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며 아이 갖길 늦추는 것, 심지어는 독신주의도 사람이 사는 방법이긴 하다. 해서, 결혼을 늦추고 아이 갖길 늦출 때 늦추더라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땐 되도록 많이 낳는 것이 이문이 남는 인생이다. ‘결혼은 안 할지라도, 아이만은 낳아달라’는 건 남녀 독신주의자들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당부다. 낳기만 하면 정부가 기르겠다는 식이다. 선진국들은 출산 장려에 미래의 국운을 걸고 있다. 예컨대 일본은 저소득층 출산의 아이 1명에 550만원까지 장려금을 주는 것을 비롯, 출산 장려책을 고소득층까지 확대한다는 것이 하토야마 차기 정권의 구상이다. 우리나라도 일본과는 비할 수 없지만, 내년부턴 보육료 지원 대상이 대폭 확대된다. 소득이 하위 70%까지인 가정의 둘째 아이부터 소정의 보육료를 전액 지원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치단체에서 저마다 시행하는 출산 장려책 또한 보다 적극적인 조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사랑의 인식이 뭣보다 필요하다. 아이를 낳는 것, 출산에 의한 새 가족의 만남은 뭣과도 바꿀 수 없는 신비스런 인연이다. 이의 섭리를 거역하는 새 가족 만남의 거부는, 섹스를 즐기는 것으로만 여기고자 하는 이기심이다. 이는 가족사랑의 빈곤이다. 미국의 CNN 방송이 열아홉번 째 아이를 임신한 40대 부부의 말을 전한 “우린 행복하다”는 것은 두터운 가족사랑인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아홉자녀 출산 부부 역시 “더 할 수 없이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돌아보면 과거의 인구정책은 실패했다. 아이를 안 낳는 세태가 된 것 역시 실패한 인구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에서 시험관 아기를 집단으로 배양한다는 무서운 말이, 먼 장래에 언젠가는 나오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기왕 과거지사는 실패했어도 새로운 가임 남성, 새로운 가임 여성들은 제발 아이를 많이 낳으면 좋겠다. 자신있게 말한다. 그것이 가정을 더욱 복되게 하는 길이란 것을, 또한 나라를 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배가 남산만하여 잉태의 수고를 감내하는 여성을 길에서 가끔 보면 반갑기 그지없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더불어 임신부는 이도 국가유공자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오피니언
임양은 주필
2009-09-1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