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有感

“아버지 없이 낳은 자식이 있나!?” 대체로 아버지들의 이런 정서랄까, 1973년에 시작된 어버이날 제정의 배경이 그랬다. 1956년부터 5월8일을 어머니날로 해오던 게 어버이날이 됐다. 정부의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고쳐졌다. 어버이날은 그래도 어머니날 성향이 짙다. 역시 자식을 낳고 기른 정은 아버지보단 어머니쪽이 더 한다. “평생 처자식을 위해 뼛골 빠지게 일한다”는 아버지들의 항변이 있긴 있다. 그러나 공허하다. 아버지만이 아니고 어머니도 돈을 벌기도 하지만, 설사 어머니가 돈을 안 벌어도 아버지의 벌이에는 어머니의 내조의 기여가 인정되는 세상이다. 서구사회 역시 부모를 기리는 날이 있다. 유럽에서는 통상 5월의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한다. 그러나 어머니날이 더 활발한 것은 미국이다. 1914년 윌슨 대통령이 5월의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공인, 선포함으로써 활성화됐다. 유럽에선 민속으로 행해졌던 어머니날이 미국에서는 정부가 정한 공식 행사가 되었다. 이에 앞서 1913년엔 필라델피아교회가 어머니날을 주창하고, 또 이에 앞서서는 1908년 ‘저비즈’라는 처녀가 잃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머니날 제정을 위한 캠페인을 벌인 것이 단초다. 어머니가 생존해 있는 자녀는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없는 사람은 흰 카네이션을 자신의 가슴에 달고 어머니의 은혜를 기린다. 국내에서는 살아계신 부모에게 빨간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 드린다. 수원 영복여고 학생들은 카네이션 대신에 나라꽃인 무궁화 달아드리기 운동을 해마다 벌이고 있다. 어머니날 보다 역사는 좀 짧지만 아버지날도 있다. 6월 셋째 일요일이 그 날이다. 1910년 미국 워싱턴주 스포캔이라는 데서 시작됐다. ‘브루스’ 부인 등 오누이 자매들이 아버지가 어머니 없이 혼자 자기들을 키워준 은혜에 감사하는 행사를 가진 것이 효시다. 처음엔 각 주마다 아버지날의 날짜가 달랐던 것이 점차 6월 셋째 일요일로 조정됐다. 1936년 뉴욕에서 ‘전 미국 아버지날 위원회’가 조직되면서 본격화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기리는 우리의 어버이날은 미국사회의 어머니날, 아버지날 보다 연륜이 짧다. 어버이날의 모태인 어머니날로 쳐도 짧다. 그러나 경로효친 사상은 그들과 비할 바 없이 역사가 훨씬 길다. 경로효친은 자고로 곧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지금도 인륜의 기본 대사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경로효친은 형태가 다르다. 뿌리는 같지만 겉모양은 전 같지 않다. 이런 일이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6·25의 참상속에 겪은 먹거리 고생담을 한참동안 들려주었다. 다 듣고난 아들은 말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거죠? 지금은 그때와 다른 세상인데요!” 그 아버지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생일에 큰 맘먹고 전화를 했다. “기념으로 뭘 해주련? 솔직히 말해도 된다” “어머님, 정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날 우리 집에 안 오시면 좋겠어요. 스캐줄이 있거든요!” 시어머니는 맥없이 수화기를 놨다. 결혼한 아들 내외에게 부모가 아기를 기다리자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쓰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손주는 자녀를 낳는 저희들만의 인생인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인생이기도 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착한 젊은이들이 참 많다. 세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세대차이의 갈등은 인류 창조 이래 거듭되어온 숙명이다. 그같은 갈등속에서 인류는 발전했다. 그러나 현 세대간은 특이하다.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발달된 정보화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신종 세대차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생각해본다. 오늘도 아들 딸이 달아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단 부모들을 볼 수가 있다. 자식이 부모를 그리워하여 부모에게 꽃을 달아주는 것과, 부모가 그리워 자식이 자신의 가슴에 꽃을 다는 문화의 차이가 뭣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버이날을 같이하는 부부의 해로는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임양은 주필

일제가 뭔지나 아나?

‘다이닛뽕 데이고쿠 덴노헤이카 반사이!’(대일본제국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 일제 식민지 통치 시대다. 또 있다. 매월 8일이면 신사(神社)참배를 했다. ‘다이토아센소’(대동아전쟁·2차대전)에서 일본 황군의 승리를 기원했다.8일은 1941년 12월8일 새벽 일본 해군 항공대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 궤멸시킨 날이다. 일왕 만세, 황군 승리를 기원했으면 친일행위다. 내가 그러했다. 조선 젊은이가 학병으로 끌려가는 기차역까지 나가 일장기를 흔들며 환송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작곡가 안익태, 무용가 최승희 등이 포함된 친일파 1천686명의 추가 명단이 발표됐다. 먼저 자괴감을 갖는 게 있다. 8·15 광복이나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원죄가 지금같은 후대의 혼란을 빚게 만들었다. 물론 원인은 있다.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직후 친일 청산을 그들 나름대로는 깨끗이 했다. 일원화사회의 특성은 일사천리의 쾌도난마가 가능하다. 반면에 남쪽 다원화사회는 중구난방인 가운데 남로당의 건국 방해 유혈 책동으로 영일이 없었다. 일본 경찰의 앞잡이로 악명 높았던 고등계(정보계)형사 노덕술을 서울경찰청 사찰(정보)과장으로 기용한 것이 일제 관리 등용 파급의 단초가 됐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은 한사코 반대했으면서도, 발등의 불인 공산당을 제압하기 위해 사람잡는 기술자로 친일 경찰을 썼던 것이다. 결국 이로인해 나중에는 제헌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모임이 의사당에 난입한 괴한들에게 테러 당하는 사태로까지 악화됐다. 건국 60년이다. 이제와서 친일 인사를 가려내자니 힘이 든다. 그렇다고 그같은 작업을 부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방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민간단체의 자의적 선정 기준이 얼마나 객관화됐느냐는 의문이 성립된다. 일제 치하를 지금의 눈금으로 보아선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다. 일제 36년을 한반도서 안 살면 몰라도, 이 땅에서 살려면 저들의 공기를 마시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식민지 통치 방식이었다. 친일 인명사전 1차 수록 대상자 3천90명 가운덴 박정희, 김활란, 홍난파, 서정주, 이광수 등이 있다. 이광수의 학병 권고 연설은 일제가 병상의 몸을 떠밀다시피하여 연단에 세우곤 했다. 서정주의 일본군 ‘오장’(伍長·하사계급) 찬미의 시는 시문학 중단을 위협한 끝에 마지못해 썼던 것이다. 홍난파가 얼마간의 일제 협력을 끝내 거부했다면 주옥같은 그의 음악을 우린 지금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안익태는 애국가의 작곡가다. 김활란은 여성교육의 선구자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다. 비록 이들에게 친일의 허물이 다소 있다 할지라도 민족과 나라를 위한 공로가 비할 바 없이 크다. 굳이 이들을 친일로 매도해서 유익할 것이 뭣인가를 생각해 본다.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보다 주요한 것은 진실이다. 예를 든다. 자식이 어떤 일에 부모를 위해 거짓말을 했으면 거짓말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은 부모를 위한 자식의 마음이다. 일제 치하가 뭣이고, 교활하기가 얼마나 가혹했던가 하는 것을 체험은 고사하고,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선정하는 마구잡이 분류가 황당하다. 프랑스도 이러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독일 침략군의 나치 협력자를 가려내면서 금기시했던 것이 기계식 선별이다. 그들이 기준삼았던 것은 실체적 진실이다. 6·25 한국전쟁때 무수한 양민이 학살됐다. 재판이고 뭐고 할 틈도 없이 무법천지로 잡혀 죽었다. 인민군 세상이 되어서는 우익측이 살기위해 부역하고, 국군 세상이 되어서는 좌익측이 살기위해 협력했다. 그러다가 세상이 또 바뀌면 이번엔 반동분자로, 또 한편에서는 부역자로 몰아 죽였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부역하는 척 협력하는 척 했던 사람들이 이념의 희생이 된 것이다. 국군이나 인민군이 죽인 것이 아니다. 토착 세력의 광적 민간들이 그랬다. 이른바 친일 인명사전은 한 사람의 생애를 재단한다. 선별하는 사람은 신명날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은 억울해도 이미 고인이 되어 말을 못한다. 유족에게 소명 기회를 준다지만 실효성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친일 인사는 일본의 국권 침탈을 거든 매국노를 비롯한 현저한 반민족 행위자들로 국한하는 것이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다이닛뽕 데이고쿠 데노헤이카 반사이!”를 외치고, 일본 신사를 참배하고, 학도병 환송식에 나가 일장기를 흔든 나도 친일파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더 힘내라! ‘삼성’

이젠 그쯤 해두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퇴진을 포함한 그룹 경영의 혁신에 토를 다는 댓글이며 ‘댓말’이 있다. 그럴 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좀 심하단 생각이 든다. “사태 모면을 위한 호도책”이라는 세력이 있다. 그룹 총수 등이 인정하고 대거 물러간 마당에 ‘호도책’이란 적절치 않다. 그 말에 내포된 뜻은 짐작된다. 지배구조나 승계구도에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이는 데 대한 불편한 심기일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도 영향력이 전혀 없진 않을 것이다. 후계구도가 이 회장의 아들 이재용 전무인 것 역시 변함이 없는 건 사실이다. 이건희 회장의 퇴진은 내친 김에 단안을 내린 건강상의 이유 또한 없지않은 것 같다. 이는 그간에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승계로 이어질 수가 있다. 그는 마흔 다섯살에 취임했다. 지금 마흔살인 그 아들이 조만간 그룹 경영 일선의 전면에 나설 것은 능히 예측된다. 후계 구도의 승계는 방법이 문제지, 지배주주의 ‘부자 승계’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삼성이 ‘부자 승계’에 갖가지 편법을 도모한 것은 잘못이다.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번 삼성 사태로 이를 짚고 넘어가게 된 것은 잘됐다. 합당한 절차에 의해 세금낼 것 다 내는 경영권 승계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뤄질 것으로 본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당치않다. 경영은 소유의 이해 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불가분의 함수 관계다. 이에 분리를 강요하는 것은 투자를 저해한다. 재산권 침해다. 자본을 인정치 않는 저들 세력과 다름이 없다. ‘삼성공화국’ ‘황제경영’은 그동안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공격하는 직격탄의 대명사다. 그러나 ‘황제경영’은 그의 능력이다. ‘삼성공화국’은 기업의 사세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그룹 총수의 퇴진을 보도하면서 이 회장의 카리스마를 높이 평가했다. 일본 언론들은 긴급뉴스로 “일본 기업이 삼성을 따라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보도했다. 삼성의 주가총액이 140배로 증가했다. 1조원이던 그룹 시가총액을 140조원대의 글로벌 기업으로 일궜다. 브랜드 가치는 세계 21위다. 대한민국 수출액의 23%를 수출한다. 18만명의 일자리다. 대졸 취업 희망자들이 선호하는 랭킹 1위의 기업이다. 삼성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그룹 법무팀장으로 있었던 사람이다. 6년 동안에 106억원의 월급을 받았다. 이 사람의 무차별 폭로 시리즈를 두고 세간에 평판이 많았다. ‘배신자’라고도 하고 ‘정의 수호자’라고도 했다. 들러리를 선 게 이른바 정의구현사제단이란 사람들이다. 나팔수 노릇을 했다. 도대체 배신과 정의의 한계는 무엇일까, 일상적으로 정의의 순수성이 의심되는 폭로는 조직에 대한 배신이다. 김 변호사의 행위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가 하는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아무튼 삼성은 만신창이가 됐다. 삼성만이 아니다. 중소기업 협력업체 가운덴 지난 3~4개월간 겪은 파란으로 도산이 속출했다. 협력업체만도 아니다. 물류업 등 산업 전반에 직·간접으로 미친 손실이 막심하다. 흔히 경영의 투명화를 말한다. 불법과 부정을 배제하는 측면에선 인정한다. 하지만 전쟁을 하면서 속을 다 드러내 보이며 할 수는 없다. 기업은 곧 전쟁이다. 산업스파이가 득실댄다. 특히 세계적인 대기업은 더 한다. 경영의 투명화란 하기 쉬운 말 뿐이다. 하기 쉬운 말은 또 있다. 삼성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그냥된 것이 아니다. 남 모르는 피땀이 고여있다. 많은 인재를 키우고 또 대거 초빙했다. 우수 두뇌의 산업인력 집단화로 국가경쟁력을 드높였다. 민생경제의 버팀목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산도 썩은 나무는 있다. 산을 보기 보단 그중 썩은 나무를 두고 산이 썩었다고 우겨대는 것은 하기 쉬운 헛말이다. 이제 이쯤해서 그만두자, 외신이 긴급 타진으로 비상한 관심을 보인것은 삼성이 세계무대에서 지닌 위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이건희 회장 사임은 놀라운 일’이라는 등 AP며 로이터통신 등이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하물며 국내에서 우리가 삼성을 더 흔들어 대서 유익할 것이 뭣인가를 생각해 본다. 어려운 시기에 격려는 못해줄 망정, 엎친 데다 덮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매질을 해도 죽일 작심이 아니면 한도가 있다. 가령 저들 사람처럼 삼성을 아예 죽이지 못해 안달인 세력이 아니라면 이젠 조용히 재판을 지켜볼 차례다. 이건희 회장 퇴진 이후를 ‘제3기 창업’이라고들 하지만, 거듭나기 위한 과도기란 말이 더 정확하다. 선장을 비운 거선(巨船)의 항해가 순탄치 만은 않을 것이다. 그도 상처받은 배다. 그러나 삼성맨은 다 제몫 이상을 하는 유능한 사람들이다. 선장이 없으면 조타수를 비롯한 갑판장 이하 선원들이 더 힘을 내면 된다. 과도기가 얼마나 갈진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역사(役事)는 능력을 다하는 최선의 세월속에 어느덧 이루어진다. 비록 삭풍이 모질어도 대지를 녹이는 봄은 온다./임양은 주필

대운하, 뭔가?

경부대운하는 한반도의 재앙인가, 복덩인가 말하는 이마다 다르다. 4·9 총선 땐 이를 두고 말도 많더니 쑥 들어갔다. 정작은 이제부터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알아보기 위해 말을 꺼낸다. 그런데 또 문제는 찬·반간에 말하는 이들의 입장에 따라 저마다 말이 달라 헷갈리는 점이다. 이명박(대통령)을 좋아하니까 대운하도 좋다 하기도 하고, 이명박 사람이니까 해야 한다며 우기고, 대운하 줄기에 살거나 땅이 있어 해야 한다는 사람 등 찬성도 가지가지다. 반대 또한 이명박이 미우니까 해선 안 된다거나, 환경운동가이다 보니 자연파괴를 들이대는가 하면, 지역감정으로 비아냥거리는 등 이 역시 여러가지다. 심지어는 전문가란 사람들도 서로 말이 다르다. 낙동강과 남한강을 잇는 것이 대운하다. ‘배가 산으로 간다’는 옛말이 있는데 대운하야 말로 배가 산으로 간다. 예를 들면 조령산 산등성이 속을 지나간다. 뚫어야 할 산중 수로터널이 경북 문경~충북 충주 사이의 조령산을 비롯해 8군데나 된다. 길이가 짧은 건 1㎞, 긴 것은 3㎞에 이른다. 도내의 경우, 팔당호 취수장이 문제다. 취수장 보호를 위해 팔당호 북쪽에 우회수로를 낼 요량이다. 이렇게 되면 남양주시 능내면 다산유적지 일대는 물에 갇혀 섬이 된다. 총공사비가 얼마 들진 아직 모른다. 100% 민자로 건설한다고 한다. 민자가 운하 운영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토지 보상비는 정부 재정으로 지출된다. 예산을 1조6천억원으로 잡고 있다. 벌써부터 땅값이 들먹인다. 얼마가 더 들지 모른다. 대운하가 건설되는 주변은 생태계가 변하면서 새로운 경관이 조성된다. 물에 띄운 배에서 산야의 정취를 감상하는 낭만은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을 것이다. 관광자원은 될지 몰라도 물류관리, 즉 수송효과는 의문이다. 내륙의 운하수송은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을 적에 성행했다. 경부대운하는 독일을 모델로 하고 있다. 라인강은 스위스~오스트리아~독일~네덜란드 등 서유럽을 관통한다. 운하에 의해 지중해·발트해·흑해와 통하는 대수로망을 형성한다. 특히 폭이 넓은 중류는 수운에 힘입어 루르공업지 등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이 역시 근래된 시설이 아니다. 육상교통이 미발달이던 때 발달된 수운시설이다. 미시시피강은 미대륙 중앙부를 관류한다. 브라질의 아마존강은 세계 최대의 수량이다. 이런데도 운하 건설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본다. 대운하는 획기적인 대공사다. 과거에도 그랬다. 1970년 7월 개통된 428㎞의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적에 반대가 무척이나 심했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만원짜리 돈다발을 서울~부산 구간에 깔아 내버리는 예산 낭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통팔달 고속도로망을 가져오게 된 원조가 경부고속도로다. 중학생 때 읽은 빅토르 유고의 소설 ‘레미제라블’ 가운데 장발장이 비정한 자베르 경감에게 쫓겨 하수구를 통해 몸을 감춘 대목이 있는 걸로 기억한다. 유고의 그 소설이 나온것은 1862년이다. 그 무렵에 사람이 다닐만한 하수구란 상상을 초월하지만 연유가 있다. 파리시가 1830년대 현 파리의 모태가 되는 도시계획을 단행할 당시 시민들은 ‘미쳤다’고 했다. 너비가 100m 가까이 되는 초대로, 사람이 걸어다닐만한 하수구 등은 시민들이 보기엔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유명한 개선문이 세워지고, 시가지에 12개 방사선도로가 뻗는 중심이된 에트왈 광장이 조성됐던 것이 ‘미쳤다’는 소릴 들었을 때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대운하다. 과연 이도 파리의 도시계획과 마찬가지로 곱게 미친 것인 지 어떤지 알 수가 없다. 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처럼, 반대하고 그래서 그만 둔다면 이도 손실이다. 그러나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내년 4월 착공, 3년에 걸친 공사로 이 정권 임기안에 마칠 계획인 것 같다. 공기(工期)가 미덥지 않다. 대운하는 대역사(大役事)다. 이를 대통령 재임기간에 마칠 요량인 졸속은 부실공사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올 중반쯤에 대운하 관련 특별법을 제정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이 알아듣도록 먼저 설명해 보여야 한다. 내 소견으로는 남한강이나 낙동강은 라인강과 다르다. 홍수와 건천(乾川)의 변화가 심하다. 특히 낙동강은 더 한다. 청계천처럼 한강에서 끌어다 댈 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의 댐 조절이 과연 가능한지, 하면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아직 듣지 못했다. 또 있다. 일정 수심을 유지하려면 물의 유량을 가둬야 한다. 갇힌 물은 썩기 마련이다. 걱정은 이만이 아니다. 운하 수송의 경제성이다. 배가 산으로 가는 수로터널은 도크같은 뱃길이다. 이런 도크뱃길은 수로터널 말고도 많다. 그 많은 도크에 물을 채워가며 가려면 시일이 얼마나 걸릴 것인지 궁금하다. 게다가 육상에서 출발하는 운하 터미널까지 하물을 가져가고, 또 도착하는 운하 터미널에 가서 가져오고 하는 부대 소요 시간과 경비가 만만찮다. 육상물동은 차가 아무리 막혀도 밤을 낮삼아 달리면 1일 교류권이다. 지금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의 민도가 아니다. 가령 21세기형 신도시계획을 단행한다 해도,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은 말이 있을지라도 객관적 지지를 얻는다. 대운하를 할려면 알아듣게 이해시켜야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다시 한 번 잘 검토해서 문제가 있으면 철회하는 것도 영단이다. 대운하를 건설할 민자로 고속도로 건설을 더 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부측 설명을 기다린다./ 임양은 주필

이명박과 4·9 총선

광복후 건국을 방해하는 공산당의 방화, 약탈, 살인 등 테러가 전국 도처에서 영일이 없이 자행되는 가운데 대한민국이 세워졌다. 광복 이전엔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항일독립운동이 이어졌다. 6·25 한국전쟁 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국군 장병이 산화, 청춘을 조국에 바쳤다. 이렇게 하여 세우고 지킨 나라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다. “그 따위 선거는 해서 뭣 하느냐?”는 냉소가 있었지만 아니다. 4·9 총선 같은 주권행사를 갖게 하기 위해 피흘려 세우고 지킨 자유민주주의 나라다. 비록 선거판은 ‘그 따위’였을 지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항일운동선열 및 전몰 국군장병을 생각하면 투표를 하는 것이 선대에 대한 보답이며 후대로서 갖춰야 할 도리다. 선거는 끝났다. 이젠 정리할 차례다. 정치권은 또 한 차례 요동을 칠 것이다. 원내 교섭단체 구성이 어려운 군소 정당간 합종연횡 그리고 여·야 양대 정당의 내부 정비작업으로 소리가 요란할 것이다. 여·야 거물들 낙선은 역학관계의 변화를 예고한다. 이른바 ‘친박연대’는 헌정사상 전례없는 괴물이다. 한나라당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주목되지만, 정치는 이상이면서 또한 현실이다. 명분을 살려 내칠 수도 있고, 실리를 살려 챙길 수도 있다. 어떻든 ‘친박연대’는 기형아다. 박근혜(전 한나라당 대표)가 입장을 분명히 해야할 시기가 됐다. 통합민주당이 선거 이슈로 내건 견제론은 졸품이다. 노무현(전 대통령) 집권 직후에 실시된 17대 총선도 집권 여당이 안정의석을 차지했다. 그간 당 이름이 바뀌어도 수차 바뀌어 일일이 이름을 댈 순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런 사람들이 나라 살림이며 민생을 파탄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국민에 대한 사죄는 커녕 견제를 말한다 해서 씨알이 먹힐리 없다. 손학규(통합민주당 대표)가 아무리 그땐 집권당에 있지 않았다해도 몸을 담은 이상 당의 원죄를 뒤집어쓰는 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불과 40여일밖에 안 되는 이명박(대통령)더러 ‘일당독주’를 말 한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찾기다. 걸맞지 않는 소리다. 통합민주당이 완패를 자초한 데는 침소봉대식 비방의 상습벽에도 기인한다. 예를 든다. 세상에 뭇사람이 둘러보는 그 중엔 특히 자기 부인도 있는데 성 희롱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데 상식에 맞지않는 소릴 우기면서 후보 사퇴까지 요구했다. 이명박이 은평 뉴타운을 들린 것은 부적절한 게 맞다. 그럼, “오해받을 처신을 말라”는 정도로 점잖게 경고하면 설득력이 있는 것을, 위법행위라며 한 건 잡은양 정치공세를 마구 퍼부었다. ‘과유불급’이다. 이제부터 정작 중요한 것은 지난 일보다 앞으로의 일이다. 앞으로의 일은 대통령 이명박이 중심에 서 있다. 압승민의가 이를 시사한다. 새 정부가 들어서긴 했어도 하고자 하는 일은 시작 못했다. 더러 꺼낸 것은 말 뿐이다. 그러나 지금부턴 거치적거릴 게 없다. 우선 민생경제를 살리는데 올인해야 한다. 이에 판단되는 소신을 주저없이 밀고 나가야 된다. 정책추진의 소신은 독주가 아니지만, 설령 독주라고 비난해도 상관할 것 없다. 반면에 분명히 해둘 것은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 몫이다. 흔히 협상을 말한다. 타협의 정치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환영한다. 협상은 민주정치의 꽃이다. 협상을 잘하는 정치인이 능력있는 정치인이다. 대통령 또한 이런 정치인에 속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타협의 정치가 대통령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재임 5년의 평가는 어차피 이명박이 다 거머쥔다. 무슨 일이 잘 안 된 게 협상이 잘 안 된 탓이라고 해서 대통령의 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되레 무능으로 지탄된다. 물론 여러군데 사람에게 많이 듣고, 이런데 저런데를 많이 보고, 이렇게 저렇게 많은 생각을 해야 하지만, 일단 정한 소신은 결실을 맺는 추진력을 국민에게 보여야 한다. 정당마다 정치인마다 국민을 입에 담는다. 지난 총선도 그랬고, 눈앞에 닥친 정치권 재편에도 ‘국민’을 또 팔 것이다. 그러나 그에 감흥받는 국민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은 민생으로 국민의 감흥을 사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을 잘 써야 된다. 안타깝게도 지금 사람을 쓰고 있는 주변에는 대통령의 의중을 확대 재생산하여 파급시킬 수 있는 브레인이 빈곤해 보인다. 대통령이 피곤해진다. 이유는 주변에서만 인재를 찾기 때문이다. 인재다운 인재는 미지의 새 사람도 있지만, 검증된 묵은 사람중에도 잘 찾으면 있다. 필요하면 대통령을 욕하는 사람도 데려다가 유용하게 쓰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좌파정권 10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동안 여러 갈래로 망가진 나라의 정체성을 바로 세울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 정말 힘겹게 세우고 눈물겹게 지킨 나라다.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기로 했다. 월급도 내놨다. 더 미련 둘 게 뭐가 있겠는가, 총선도 끝났다. 지금부턴 소신을 십이분 살려 일을 강단있게 해주기 바란다.

이 지경까지, 왜?

“싫어욧” 초등학생 여아의 말은 쌀쌀맞았다. 노인이 민망해 했다. 하수구에 흘린 지갑을 주워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것이다. 어른 손은 안들어가고 아이들 손만 들어갈만 한 틈새였기 때문이다. 마침 지나다가 이를 본 딸아이 아빠가 한마디 했다. 영문은 모르지만 노인을 대하는 여식의 태도가 못마땅 했던 것이다. “너, 어른한테 말 버릇이 그게 뭐냐?”고 나무랐다. “엄마가 도와주지 말라고 했거든요!”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가버렸다. 그만한 사연이 있다. 그로부터 얼마 전이다. 친구들과 학교를 마치고 가는 길이다. “얘들아! 누가 날 도와주지 않을래?” 중년 남자의 길거리 당부다. 승용차 의자 새로 들어간 자동차 열쇠를 좀 꺼내달라는 것이다. 그도 공교롭게 아이 주먹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아이들은 “저요… 저요!” 하며 서로 돕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 남자는 “그럼, 너한테 부탁할까”하고 맨앞 아이를 지목했다. 둘이 승용차 안에 들어간 아이가 어렵잖게 꺼낸 열쇠를 주고 받으며 서로 눈을 찡긋해 보였다. 집에 간 그 아이는 엄마에게 길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삼아 얘기했다. 아이 엄마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매를 들었다. 아이는 “과자 사준다고는 안했단 말야!”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 누가 과자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라는 엄마의 타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자 사준다고는 안했어도, 자동차에 태운 채 그대로 가면 어쩔려고 차에 타긴 왜 타니!?” 엄마의 말은 절규였다. 아이를 붙들고 엄마도 눈물을 쏟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엄마는 차에 태운 채 딸 아이를 유괴했을 걸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사실 무리가 아니다. 학교에서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 미덕으로 배운 것을 실천하다가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된 딸 아이는 아예 어른을 불신하게 된 것이다. 역시 무리가 아니다. 이도 공교육 붕괴의 한 현상이다. 안양의 혜진·예슬이 두 어린이 참사 사건 충격이 아직도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이런 참에 일어난 40대 남자의 일산 초등학생 여아 납치 미수사건은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세상에 그 어린 것을 승강기 안에서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다 못해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마구 끌어 당겼다. 야차 같은 몹쓸 짓에 놀란 아이는 지금도 아마 충격이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 폭력으로 얼버무려 사건을 사나흘이나 잠재우던 경찰이 범인을 서울 사우나탕에서 잡은 것은 화난 대통령이 경찰서에 쫓아가 질책한지 6시간 만이다. 대통령이 나서지 않았으면 아직도 못잡았을 것이다. 경찰조직이 왜 이 지경이 됐는가, 염불보다 젯밥에 마음을 둔 탓이다. 파출소는 민생치안의 초소였다. 민생과 가장 가까운 파출소를 없애고 새로이 만든 무슨 ‘지구대’는 파출소도 아니고 경찰서도 아니다. 경위 승진을 시험이 아닌 근속연한제로 바꾸고 나서는 경사·경장·순경보다 간부가 넘쳐나 내부 기강이 문란해졌다. 외근 형사는 3D업종이 되어 너도 나도 내근을 희망, ‘형사가 경찰의 꽃’이라던 것은 옛말이 됐다. 경찰개혁이 절실하다. 먹고 살기도 바쁜 판에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다니는 주부들의 ‘치안불신’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안양의 정 아무개, 일산의 이 아무개 범인은 상습범이다. 상습범을 관대하게 처리하니깐, 모방범죄의 초범이 생기고 초범이 또 상습범이 되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미성년자 성폭행범에 전자팔찌를 끼워야 한다니까 인권 침해라고 한다.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혜진·예슬이법’을 법무부가 추진한다니깐 인도주의에 어긋난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극형으로 다스린다고 예방이 되는 게 아니라고도 한다. 그럼, 그 값싼 인권주의자와 알량한 인도주의자들에게 묻겠다. 어떻게 하면 예방이 가능하단 말인가, 없다. 극형으로 다스리는 응보형주의가 예방의 절대적 효과는 갖지 못할지라도, 상대적 효과는 갖기 때문에 사회방어의 차선책인 것은 마땅하다.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우선시하는 감상은 인권주의도 인도주의도 아니다. 어린이가 어른을 믿지 못하는 불신 풍조는, 어른이 어른들끼리 믿지못하는 불신풍조보다 더한 전율을 느낀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미성년 성범죄자를 엄단하지 않고는 전율적 병리현상의 척결이 더 어렵다. 평화의 나라 스위스도 어린이 성폭행은 사형까지 처하지 않는가, 어린이 보호를 위한 공동체사회 의식을 적극 구축해야 한다./임양은 주필

소리없는 ‘아우성’

정치권은 온통 총선 아우성으로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소리없는 아우성이 있다. 국회의원 선거따윈 거의 안중에 없다. 먹고 살 걱정이 태산같기 때문이다. 영세민·서민·소시민 등 민중의 소리없는 아우성이 하늘을 찌른다. 드높은 원성이 허공에 흩날린다. 벌기는 힘들고 쓰기는 헤프다. 만원짜리 석장을 손에 거머쥐려면 등골이 휜다. 한데, 만원짜리 석장을 들고 시장에 나가면 금방 눈 녹듯이 사라진다. ‘장바구니 물가’를 잡는다지만, 굳이 바구니를 들고 갈 것도 없다. 바구니를 채울 돈이 없다. 그냥 꽁치 같은 것 등을 사담은 비닐봉지 서너 개쯤 양손에 달랑 들면 고작이다. 학원비다, 교통비다, 뭐다 해서 날마다 ‘쩐(錢)과의 전쟁’인 것이 민중의 일상이다. 돈은 흔하다는 데, 그 놈의 돈이 다 어디로 갔는 지 민중들에겐 이토록 귀하다. 유동성의 왜곡이다. ‘경제 쓰나미’가 바다 저 너머에서 파고의 혀를 날름거리며 밀려온다. 제발 잘못 본 생각이길 바라지만, 아무래도 잘못 본 건 아닌 것 같다. 원유·곡물·철강석 등 각종 원자재 값이 1년만에 50%나 폭등했다. 변변한 부존자원 하나 없다. 수출로 먹고 사는 형편에 생산을 멈춘 대기업 공장이 속출한다. 중소기업·대기업 간의 납품가 갈등이 심화한다. 양돈 농가는 사료값은 뛰고 돼지값은 떨어져 마리당 5만4천원의 손해를 본다며 정부가 수매해달라고 매달린다. 이는 예를 든 사례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를 살린다고 했다. 장담했다. 그러나 믿기지 않는다. 무슨 수로 살린단 말인가, 기업규제를 풀어 경제를 살리는 것은 잘 돌아갈 때 얘기다. 잘 안 돌아가도 풀긴 풀어야지만, 채산성 악화는 투자를 위축시킨다. 대통령 선거 땐 7% 성장률을 말해놓고, 당선되고 나서는 6%로 낮춰 잡은 것은 능히 이해한다. 하지만 6%도 어렵다. 잘해야 4.6%에서 4.8%로 보는 것이 민간 연구단체의 통설이다. 나라빚은 300조원에 육박, 연간 이자만도 13조원 가량이다. 국방예산의 절반에 해당된다. 재정이 위협받는 지경이다. 가계빚은 600조원에 육박한다. 주택 담보대출이 많다. 서브프라임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가계빚발 금융대란의 위기에 처했다. 금융대란은 국가신인도에 치명상을 가져온다. 대통령은 전 정권이 고유가 대책을 세우지 않은 건 ‘죄악’이라고 했다. ‘죄악’인 것은 맞다. 유가는 이미 100달러 선을 넘어 110달러 대에 진입했다. 30달러 대였던 게 불과 5~6년 전인데, 이토록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문젠 이에 그치지 않는 데 있다. 전문가들은 조만간 200달러 선을 전망한다. 스웨덴은 바이오 에너지 등으로 대체, 15년내 석유사용을 중단하는 탈석유화를 선언해 놓고 있다. 전 정권의 유가 무대책을 질타했으면, 그럼 현 정권의 유가 대책은 뭣인가를 묻는다. 물론 아직은 대책이 나올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할 말은 있다. 앞으로 아무리 뾰족한 수를 내놓는다 해도 절약보다 더한 왕도는 있을 수 없다. 비싸고 귀하면 아끼고 덜 쓰는 것이 상지상책이다. 경제가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다. 수입이 적으면 지출도 줄여야 한다. 경제가 어려운 데 쓸 것 다 써가며 경제를 살리는 묘수는 없다. 1930년대 대공황을 맞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제일 먼저 자신을 포함한 공무원 봉급을 23% 대폭 삭감했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의 연금도 15% 줄였다. 이를 법으로 만들어 시행했다. 아울러 정부 지출을 극소화 하므로써 국민과 고통을 함께하는 의지를 보였다. 물론 지금은 자유주의 경제를 수정,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한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서로 팔고 사는 소비자 사회가 연대한 근검절약은 요구된다. 예컨대 정부가 서민생활 안정대책으로 정한 52개 생필품 가격 관리는 단기처방일 뿐 원인처방은 못된다. 물가의 상승관계를 행정력으로 억제하는 덴 한계가 있다. 서비스 요금은 관허요금 시대가 아니다. 관리대상 품목의 장기적 관세 면제는 역기능을 낳는다. 지방자치단체의 상수도 사용료, 쓰레기 봉투값 등 인상 억제는 값 상승 요인을 재정으로 충당, 결국은 주민 세부담으로 보전된다. ‘조삼모사’인 것이다. 집집마다 전등 한 개를 덜 켜면 연간 수백억원, 승용차 10부제를 이행하면 연간 1조8천억원이 절감된다고 한다. 이런데도 전혀 이행이 안 되고 있다. 나 혼자 한들 무슨 효과가 있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근검절약을 국민적 공동체사회 의식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어 항상 구호에 그친다. 구심점은 국민사회를 감동시킬 만한 정부의 솔선 수범이다. 대통령은 이 점에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 부인이 여느 때처럼 청바지 차림에 버스를 타고 직장에 출근하는 외신 보도가 눈길을 끈다. 꼭 이래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징성은 필요하다. 경제를 살리는 것은 범국민적 에너지 절감에서 시작되는 데, 이를 점화할 상층 구조의 모랄이 빈곤하다. 소리없는 민중의 아우성을 들을 줄 알아야한다.

힘내라! ‘삼성’

“이건희 회장, 차라리 심성그룹을 해체해 버리시죠.” 이는 ‘빈대꼴 보기 싫어 초가삼간 태운다’는 심정이다. 계열사가 65개 회사다. 전자·건설·무역·기계·조선·화학·제지·섬유·유통·호텔·등 이밖의 여러 분야에도 영업 기반이 두텁다. 대차대조표가 어떤진 모른다. 모르긴 하나 그룹을 해체, 골치아픈 기업경영을 손털고 나서도 이 회장 일가는 자자손손 잘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으로는 그런 말을 할 순 없다. 국민자본이기 때문이다. ‘삼성공화국’이라고 한다. 비도덕적 집단으로 매도한다. 온갖 불법의 온상지로 몰아댄다. 비록 일부의 지탄이긴 하나 상처는 너무 크다. 삼성특검이 한 달 동안 가동되고 있다. 최근엔 서울 삼성생명 본사를 수색해 주주배당금 지급현황 등 자료를 압수했다. 이 회장 일가가 삼성 임원 명의로 주식을 차명보유하고 있다는 혐의를 밝히기 위해서다. 제기된 의혹은 또 있다. 거대 탈법 상속, 거액 비자금 조성, 각계 로비 혐의 등이다. 그동안 압수된 관련 자료가 트럭 열대 분량쯤 된다. 필요하면 더 압수해야 된다. 내친김에 철저히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전제해 둘 게 있다. 용인 에버랜드가 자연농원이라던 때 딱 한 차례 갔다가 문전에서 돌아선 뒤로는 발길을 끊었다. 입장권 하나로 다 돌아보는 게 아니고, 가는 곳마다 입장권을 새로 사야하는 것이 아니꼬왔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부호의 으리으리한 집 구조가 나오면 세트에 불과하지만 보기싫어 꺼버린다. 부자를 싫어하는 정서를 이토록 갖고는 있어도, 삼성을 매도하는 그들과 단연코 생각을 같이 할 순 없다. 한심스러운 건 앞으로 특검이 끝나도 삼성 매도는 여전할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그들은 벌써 이재용 전무 등 27명에 대한 무혐의 처분에 “면죄부를 주었다”며 들고 나섰다. 특검수사에서 삼성이 완전히 자유로울 것으로는 물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삼성을 죽이는 것이 정의라고 떠드는 배부른 사람들에게 묻는다.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의 전체 수출 가운데 21%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삼성이다. 이렇다 하여 불법이 용인될 수 없다는 반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동의한다. 그래서 전례없이 강도높은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한데 이젠 수사마저 불신한다. 국민경제의 성장 동력을 꼭 깔아 뭉개야 정의이며 그래야만이 속시원하다면, 이로 인해 붕괴되는 민생파탄은 정의가 아닌 죄악인 것이다. 이성적 판단이 아닌 감성적 주장은 정의일 수 없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삼성은 거듭나야 한다지만 이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불량 생산을 범죄로 규정, 양(量) 위주의 경영에서 질(質) 위주의 경영으로 전환한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세계 톱5 브랜드 기업으로 도약된 저력이다. 지금은 10년후 뭘 먹고 살 것인가를 걱정한다. 기업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사회에 기여한다. 나라사랑은 국회의원이 하는 것이 아니다. 구멍가게 식당이 단 1명을 고용하더라도 일자리 창출로 더불어 살아가는 업주가 나라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기업인은 누구보다 존경받아야 하는 애국인인 것이다. 흔히 말하는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은 엄밀히 따지면 어폐가 있는 말이다. 기업이윤은 기업확대에 재투자하는 것이 본질적 사회기여다. 기업에 의연금 같은 것을 요구하는 준조세 부담보단 성실납세가 우대받는 풍토가 돼야 한다. 사회환원은 다음 순이다. 자본과 경영이 분리돼야 한다는 건 개떡 같은 소리다. 투자(投資)가 경영 부실로 손실되는 것을 방관할 투자가(投資家)는 있을 수 없다. 경영의 분리를 주장하는 사람 역시 투자가가 되면 입장이 달라질 것이다. 입장에 따라 말하는 것은 원칙이 아니다. 모든 입장을 포괄하는 것이 원칙이다. 지난 10년간 분배론, 이도 왜곡된 분배론에 밀려 기업이 홀대 받았다. 마치 잉여가치설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 했다.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착취당하는 것으로, 기업은 부패집단으로 치부됐다. 중첩된 규제로 기업 투자가 제약받았다. 기업을 이렇게 죄악시하는 것은 사회적 무고행위다. 삼성에 대한 턱없는 저주 또한 과거의 잘못된 관성이다. ‘삼성공화국’이 어떻단 말인가, 세계 무대의 시장정보에 관한한 삼성은 국가기관보다 더한 국제사회의 공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안다. ‘삼성’은 더욱 세계적인 기업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1938년 대구 북성로에서 고인이 된 이병철씨가 ‘삼성상회’ 간판을 단 것이 삼성의 효시다. 종합상사의 모태가 된 것은 1952년 ‘삼성물산㈜’으로 법인화하면서 시작됐다. 재벌 1세대와 지금의 경영은 완전히 다르다. 초창기 재벌은 정경유착이 있었으나 정착기를 지나 성숙기에 들어선 현재는 정경유착은 죽음의 함정이다. 오직 경영논리만이 있을 뿐이다. 기업규제 또한 경영논리에 맞게 풀어야 한다. 경영논리는 경쟁력이다. 그런데 이병철씨 방법의 경영에 새삼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가 새 사람을 쓸 때 꼭 관상을 본 것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람된 품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산업스파이 같은 배신을 원려했던 것이다. 삼성이 지금 메가톤급 폭풍우에 휩싸인 것은 산업스파이도 아닌 이상한 사람의 이른바 비리 폭로로, 그는삼성의 요직에 있었던 이다. 나라가 한쪽은 BBK 동업을 주장한 ‘검은머리 외국인’, 또 한쪽은 ‘이상한 사람’의 주장으로 이명박 특검·삼성특검이 요동치는 혼란에 빠졌다./임양은 주필

권력불신 ‘병리현상’ 권력의 책임이다

불신의 늪이 깊다. 우리 사회는 이 함정(늪)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지난 세월 겪은 사회적 경험법칙이 고착된 병리현상이다. 이른바 BBK 의혹은 지난 대선에서 최대 이슈였다. 검찰의 무혐의 결정에 (통합민주당 전신) 대통합민주신당은 발끈했다. ‘유력 후보자(이명박)에 대한 영합’이라며 이명박 특검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특검에서 또 무혐의 결정이 나자 이번엔 ‘권력(당선자)에 대한 굴복’이라며 ‘부실수사’라고 우겼다. BBK 의혹은 결과적으로 많은 국력 소모를 가져왔다. 정치적 공방의 논쟁속에 사회분열을 부추겼다. 특검은 수 십명의 인력 낭비와 함께 9억6천만원의 국고를 축냈다. 이쯤되면 BBK를 무기삼았던 사람들은 국민앞에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되레 큰 소릴 친다. 정동영(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은 BBK 공방 과정에서 서로 고발하고 고발된 검찰 소환장 발부에 “야당 탄합”이라고 맞선다. 이해찬(전 국무총리)의 말은 차라리 솔직하다. “BBK 발언은 정치적으로 과장된 표현이었다”고 했다. 정동영은 이명박(후보)의 사퇴를 투표 전날까지 요구한 사람이다. 이해찬은 “(이명박을) 한 방에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의 발언 중 문제가 된 것은 ‘이명박 BBK 동업자 유세 및 광고’(정동영), ‘이명박이 도곡동땅 실소유자며 그 돈으로 주가조작했다(이해찬)’는 등 대목이다. 그런데 또 다른 저격수가 나타났다. 김용철(변호사·전 삼성그룹 상무)은 자신이 근무하며 106억원을 빌어먹은 삼성의 비자금 의혹 폭로로 일약 유명해진 사람이다. 이 분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삼성관련 의혹 폭로에 콘덕터 역할을 한다. 사제단 폭로 가운데 떡값 수수설은 전에도 있었지만, 김성호(국정원장 후보) 이종찬(대통령민정수석) 등을 거명 추가 폭로한 것은 새 정부에 대한 흠집내기다. 물론 이는 안그래도 진행중인 삼성특검이 조사하면 당장 밝혀질 일이다. 한데, 진실 규명이 지지부진하다. “특검에 증거 자료를 내면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어 제출하지 않겠다”는 게 김용철의 말이다. 특검 소환엔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며 불응했다. 문제는 이런 와중에 본인들의 강력한 부인에도, 떡값 수수설을 사실일지도 모를 것으로 믿는 일부 항간의 정서다. 사제단의 폭로가 사실이 아니면, 김용철의 황당한 무고다. 당사자들은 누명에 분통이 터질 일이다. 이런데도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항간의 일부 정서속에는 ‘언젠 누가 처음부터 시인한 적이 있느냐’는 냉소가 잠재한다. 예컨대 이명박 또한 후보 적에 위장전입, 위장취업 문제가 나왔을 때 처음에는 부인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BBK사건 마무리도 상대가 대통령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적정선에서 끝낸 수사미진으로 보는 의문의 시각이 아주 없진 않다는 사실이다. 검찰에 이어 특검 수사서 내린 거듭된 무혐의 결론을 믿지못하고, 떡값설을 수사도 하기전에 지레 짐작하는 공권력 불신의 병리현상은 정말 심각하다. 이토록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된 것은 일찍이 자행된 건강하지 못한 권력의 군림에 기인한다. 비근한 예를 든다. 박철언(전 정무장관)은 노태우(대통령) 때 ‘황태자’란 소릴 들었던 사람이다. 그가 최근 660억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온 것으로 드러난 건, 정말 사람 환장할 일이다. 검은 돈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돈이다. 더욱 미치게 만드는 것은 어느 여교수에게 거액을 떼어 먹히고도 냉가슴만 앓다가 공소 시효가 끝나니까 비로소 소송을 제기하므로써 윤곽이 밝혀진 점이다. 몰염치한 권력자 범죄를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심지어는 ‘(책상을) 탁하고 치니까 억하며(6월 항쟁의 박종철씨가) 쓰러지더라’는 식의 인권 부재 수사도 숱하게 보아왔다. 오늘날 공권력 불신, 권력자 불신의 정서가 상존하는 덴 연유가 없지않는 불행한 과거가 있다. 골수에 미친 이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것은 새 정부의 책임이다. 그런데 또 요직에 앉히려는 사람마다 거의가 왜 부동산 투기 의혹 아니면,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먹고 살기에 바쁜 서민 대중이 갖는 위화감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정부 요인은 맡은 일도 잘 해야 하지만, 권력은 곧 돈이라는 등식의 개념을 민중에게 깨보여야 한다. 정치 공세에 면책특권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터무니 없는 공세로 사회 혼란을 일으켰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BBK를 들어 일방적 파상 공세를 일삼았던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또 사회적 폭로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떡값 수수설 추가 폭로 역시 책임 소재가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를 철저히 가려야 하는 것은 더는 이같은 악순환이 없도록 타성적 고리를 이참에 끊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또 이런 권력 불신의 늪에서 탈출키 위해선 자신들 권력부터 먼저 도덕적 재무장을 단단히 갖춰야 한다.

문제는 김홍업, 박지원이다

“검찰은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 비리로 연루된 아들을 구속시켜야 한다”고 했다. 김대중(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높인 목소리다. 김영삼(대통령)의 둘째아들 현철(씨)은 결국 구속됐다. 김영삼·김대중, 김대중·김영삼은 평생의 정적이긴 하다. 이를 뒤집으면 또 평생의 친구이기도 하다. 전두환(국보위)의 신군부 및 5공 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을 함께 했다. 김대중은 이를테면 친구의 아들을 구속시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 마땅히 구속감이긴 하지만, 직접 대고는 차마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당시 김영삼의 둘째 아들을 두고 말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대통령이긴 해도 말을 트고 지내는 친구가 있었다. 원로 변호사다. 한 번은 친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말했다. “현철이, 미국에 보내비리라!” “…” 입맛만 다시고 있는 대통령에게 친구는 다그쳤다. “자넨 와 현철일 기리 끼고 도노?” 김영삼의 대답은 이랬던 걸로 들었다. 이 사람은 이렇게들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들 말해, 도시 사람을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도 혈육은 거짓말은 안하겠나 싶어 가까이 둔다는 것이었다. 아들을 측근으로 가까이 두어 화근을 부르기는 대통령이 된 김대중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아니고 세 아들이 모두 그랬다. 미국에 가있던 셋째 아들까지 비리에 연루되었다. 김영삼의 아들을 구속시켜야 한다고 소리 높였던 김대중의 목청은 자신에게 재앙이 돌아온 부메랑이 된 것이다. 김홍업(국회의원)은 구속됐던 그 가운데서 둘째 아들이다. 통합민주당이 발칵 뒤집어졌다. ‘비리 및 부정 등 구시대적인 정치 행태로 국민적 지탄을 받은 인사는 공천 심사에서 제외한다’ 이는 통합민주당 당규 제14조 5항의 규정이다. 박재승(통합민주당공천심사위원장)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하나같이 이 당규를 적용,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사람은 공천에서 제외한다는 불퇴전의 원칙이 하도 서릿발 같아 당 지도부가 얼어붙었다. 이에 저촉되는 당내 인사는 10여 명이다. “억울한 사람은 기여도를 생각해 선별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 지도부의 설득이다. 그러나 ‘예외는 원칙을 깬다’는 것이 불변의 공심위 입장이다. 문젠 선별구제란 데 있다. 통합민주당 지도부의 속셈은 딴 데 있다. 이들에겐 김대중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절대적 금기다. 상왕으로 떠받드는 그의 둘째아들 홍업, 그리고 김대중의 분신인 박지원(전 비서실장)만은 어떻게든 공천을 해내야 김대중에게 체면이 선다고 보는 것이 지도부의 생각이다. 해결책은 공심위가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당 지도부가 공심위를 해체할 수 있지만 모양새가 사납다. 이보단 김홍업, 박지원을 무소속으로 내보낸 대신 무공천 선거구로 하여 나중에 복당시키는 방법이 궁여지책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역색이다. 한나라당 공천은 수도권과 영남에서 서로 박이 터질 지경의 다툼을 벌인다. 이에 비해 호남에서는 통합민주당이 서로 헐뜯는 공천 다툼이 불을 뿜는다. 어떻든 흥미로운 대조가 확연한 게 있다. 김대중의 둘째아들 홍업은 한사코 국회의원에 나서려고만 한다. 그런데 김영삼의 둘째아들 현철은 비리 연루가 거론되자, 나섰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어떤 것이 바른 처신인지는 세상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김대중의 노욕은 끝을 모른다. 얼마전 둘째아들 김홍업 그리고 분신인 박지원의 선거구가 되는 목포·신안 인근을 다녀왔다. 운신이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굳이 거길 왜 갔을까, 선거구 ‘행보지원’으로 보는 세간의 눈을 아니라고 우기기엔 속이 너무 들여다 보이는 것이다. 통합민주당 지도부는 뭘 모르고 있다. 호남을 봉건영지로, 김대중을 영주로하는 전략구도의 구태는 역시 구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인물로 보면 수도권, 아니 수원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대중을 업은 호남거점전략은 크게 보아 자해행위다. 호남에선 총선을 싹쓸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수도권엔 될 사람도 안되게 만드는 불이익을 자초하는 것이다. 통합민주당이 진정 살고 싶으면 김대중의 묵은 그늘에서 벗어나는 용단을 가져야 한다. 이 시대는 새로운 정치, 참신한 비전을 갈망한다. 청정화된 신선한 정치인을 요구한다. 김홍업, 박지원 등을 궁여지책의 꼼수 탈락이 아닌 진짜 탈락으로 읍참마속할 때, 당은 청정화되고 폭넓은 감동을 줄 것이다. 한나라당 공천도 물론 문제가 많다. 이는 따로 말하겠지만, 통합민주당 공천을 먼저 말하는 것은 문제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본질이 다른 건 김홍업, 박지원 선별 구제에 당 지도부가 사력을 다하는 김대중 맹주에 대한 주술적 충성으로 집약된다.

‘뉴욕 필’ 평양공연

‘미제국주의 문화’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도 평양 복판의 대동강변 동평양대극장에서 초유의 환대를 받았다. 지난 26일 오후 6시다. 뉴욕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이다. 창단 166년의 전통을 가진 뉴욕 필의 1만4천589번 째 평양공연은 이렇게 특별했다. 무대 왼쪽에는 성조기, 오른쪽에는 인공기가 게양됐다. 북녘이 말하는 공화국 헌법은 국기와 국가며 수도를 규정해놓고 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국기는 기발(깃발)의 가운데에 넓은 붉은 폭이 있고 그 아래우(위)에 가는 흰 폭이 있으며, 그 다음에 푸른 폭이 있고 붉은 폭의 기대(깃대) 달린쪽 흰 동그라미안에 붉은 오각별이 있다. 기발의 세로와 가로의 비는 1 대 2이다’(제169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국가는 애국가이다’(제170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도는 평양이다’(제171조). 이토록 존귀하게 규정한 평양에서 제국주의 문화가 공연되면서 원쑤(원수)의 성조기가 공화국 인공기와 나란히 게양되고, ‘성조기여 영원하라…’의 미국 국가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의 공화국 국가와 함께 연주된 것은 역사의 획기적인 변화다. 뉴욕 필 공연단 평양 방문에 앞서 거리에 나붙은 ‘미 제국주의 침략정책을 규탄한다’는 등, 철거한 반미 구호를 또 갖다 붙인다 할지라도 전례없는 변화인 것은 틀림이 없다. 러시아 국영 NTV는 ‘바이올린 외교의 성과’라고 평가했다. ‘북·미 해빙 무드의 전주곡’이라고 한 것은 중국 신화통신이다. 로이터통신은 ‘북한의 외교 쿠데타’라고 전했다. ‘싱송(sing song) 외교의 새 장을 열 역사적인 공연’이라고 한 것은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다. 전세계 신문·방송·통신사에서 130여 명이나 현장 취재를 위해 평양에 갔다. 보도 내용을 간추려 본 공연의 우호 분위기는 상상을 넘어선다. “좋은 시간 되세요. 즐겁게 감상하세요” 노(老) 거장 로린 마젤 지휘자의 우리말 인사다. 연주곡 소개끝에 가진 우리말 인사에 천오백석을 꽉 메운 관객은 미소와 박수로 화답했다. 미국 작곡가 거슈원의 ‘파리의 미국인’을 공연하면서는 “앞으로는 평양의 미국인이 작곡될지도 모른다”는 익살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 교향곡 등에 이어 첫 앙코르 곡으로는 비제바 작곡 ‘아를의 여인’ 모음곡 중 가무곡인 ‘파랑돌’을 연주, 고조된 분위기 정서로 무대와 객석이 함께 어우러졌다. 피날레곡으로 민족 전통 민요 ‘아리랑’이 연주됐다. 공연이 끝나고도 단원들과 관객들은 서로 손을 흔들며 한동안 자릴 뜨지 못했다. 평양정권 고위층 인사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다.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부위원장, 강능수 문화상, 박경철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 등 문화·외무·무역성 관계자들과 민화협 인사 등이 대거 참석했다. 조선중앙텔레비전 방송이 103분의 공연을 그대로 실황중계한 것 또한 지극히 이례적이다. 방송 예고까지 한 생중계는 미국의 국기며 국가를 앵글 조작이나 음향 조작없이 있는대로 보여주고 들린대로 들려 주었다. 안내 자막도 방영했다. 뉴욕 필 평양공연은 말 그대로 완전히 개방됐다. 물론 이같은 북측 반응이 개방·개혁의 징후인 것은 아직 아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중국 방문 중 “뉴욕 필 평양공연은 좋은 일이지만, 북한 정권은 여전히 북한 정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의 성사가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측 외무성 부상이 이면의 주역인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이 탁수선수단 경기를 교환한 것이 두 나라 국교 정상화를 가져온 ‘핑퐁외교’처럼, 뉴욕 필 공연을 ‘싱송외교’로 보는 관측은 일리가 있다. 실제로 1950년대 뉴욕 필의 모스크바 공연이 소련 개방을 가져오는 데 단초가 된 전례가 있다. 그러나 데이트 한 번으로 연애하는 사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사이가 서먹할 것 같으면 극장엘 가기도 한다. 핵 무기를 둔 북측의 신고의무 미이행, 꼬인 6자회담 등 뭔가 막힌 물꼬를 트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뉴욕 필 평양공연이다. 문화교류는 잦아야 한다. 문화교류만이 아니고 스포츠교류도 좋다. ‘제국주의 문화’를 불러들이는 것을 ‘트로이의 목마’로 보는 북녘 내부 반발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재앙의 목마가 아닌, 축복의 목마가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인식의 문제다. 평양정권이 뉴욕 필 공연을 받아들인 것은 정치적인 다목적 포석이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대외 메시지, 그리고 대남 메시지 역시 담겨져 있다. 모종의 정략적 속셈이 있는 담담타타(談談打打) 전법일 지라도, 완만한 변화가 불가피한 현실을 수용하고 있는 것은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이다. 뉴욕 필 평양공연이 있던 같은 날, 개성서 열린 2010 월드컵축구 아시아 3차 예선 남북한 경기 실무협의에서 북측은 예의 평양 경기에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를 거부했다. ‘원쑤’(원수)의 미제국주의 국기와 국가는 게양하고 연주해도 되고, 동족의 국기와 애국가는 안된다는 것은 저들이 말하는 ‘민족·자주’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이것이 봉남통미(封南通美)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북측은 대남교류 및 지원을 외면할 수가 없다. 월드컵 3차 예선은 제3국으로 가서 치르면 된다. 태극기, 애국가 또한 인공기와 저들 국가가 남쪽 전주에서 일찌기 게양되고 연주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녘 땅에서 게양되고 연주될 날이 있을 것이다. 왜냐면 변화를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양은 주필

웰빙시대의 食補, 짠 것은 ‘독’이다

웰빙시대의 최대 가치는 건강이다. 건강을 위해 저마다 운동도 하고 갖가지 약을 먹곤한다. 몸에 좋다면 안먹는 게 없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다.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보다 못하다. 운동도 지나치면 되레 병을 유발한다. 약도 지나치면 부작용을 가져온다. 선약과 독약의 차이는 종잇장 차이다. 약효 부분엔 약이 되지만, 지나치면 다른 부분엔 독이 된다. 약이란 그 자체가 일종의 독인 것이다. 뭣이든 잘 먹는 것은 참 좋다. 홍명화 서울대 명예교수는 약학박사다. “건강은 약보다 식보가 으뜸이다”라고 한 것은 그 약학박사의 말이다. 일상의 밥상머리 음식물은 다 천연의 약재다. 인삼 녹용이 보약이라지만 인삼 녹용만 먹고는 못 산다. 인삼 녹용은 안먹어도 밥만 먹고는 산다. 그 좋다는 인삼 녹용도 밥, 즉 식보 다음인 것이다. 안먹는 게 없는 것은 좋지만 문제가 있다. 짠 음식은 ‘오장육부’에 두루 부담을 준다. 음식이 짠 것은 나트륨, 곧 소금의 과다 섭취다. 한국인은 짜게 먹는 게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인 1일 나트륨 섭취량이 평균 5.28g이다. 소금 13.2g 분량으로 밥숟갈 가득히 고봉으로 담은 양이다. 2005년 국민건강영양조사의 결과가 이렇다. 세계보건기구가 권고하는 소금 5g 분량을 3배 가까이나 먹는 것이 우리네 식성이다. 이러다 보니 ‘오장육부’가 만성적 과다 자극을 받아 가장 약한 곳부터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한다. 젊을 땐 큰 소리쳐도 나이들면 골병든 게 드러난다. 고혈압·심장병·중풍·간경화·위궤양·당뇨병 등은 성인병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성인병 비율이 가장 높은 게 우리나라다. 짜게 먹기 때문이다. 가령 국이 좀 싱거우면 “중 마빡 씻은 물같다”며 맛없다고들 한다. 짠 자극성이 느낄 정도의 입맛이 돼야 비로소 맛이 있다고들 한다. 김 같은 것도 소금발라 구워 양념 간장을 찍어 먹는다. 짠 맛에 길들여져 웬만큼 짜서는 짠 줄을 또 모른다. 짠 맛에 찌든 혀가 퇴화되어 민감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원래 짜게 먹은 것은 아니다. 조상들은 싱겁게 먹었다. 소금이 귀했기 때문이다. 소금이 일상에 널리 보급된 것은 천일염 제조 기술이 보편화 되는 것과 함께 신작로가 놔져 자동차 물류가 활발해지면서 시작됐다. 조상들 대엔 천일염 제조 기술이 낮아 생산이 극히 제한됐다. 거기에 간만의 차가 많은 서해 연안서만 생산이 가능해 남해, 동해지방은 소금을 만들지 못했다. 동해 연안 촌락에선 더러 집에서 쓸 소금을 바닷물을 불로 달구어 증발시키는 방법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미미했다. 이래서 소금이 무척 귀했다. 소금대신 향신료로 후춧가루가 있었으나 청나라를 통한 수입품이어서 왕실이나 사대부 집에서만 썼다. ‘소금’의 어원은 소에 싣고 다니는 금이라는 뜻이다. 무겁고 금처럼 귀한 소금을 서해 생산지에서 내륙 깊숙이 운송하는 덴 소 등짝에 바리로 싣는 게 최상의 운송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도 소가 다닐 수 없는 산중 길은 장정이 소금을 등짐으로 지고 다녔다. 옛 설화 가운데 소금장수 이야기가 많은 것은 소금장수가 인기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등짐 소금장수는 힘좋은 덩치만이 할 수 있었다. 귀한 소금을 파는 장사꾼이 힘깨나 쓰는 장정이었던 것은, 가는 곳마다 벽촌의 과부들과 얽히는 염문의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소금이 흔해지면서 짜게 먹은 건 지지리 못살던 때 생긴 생활의 관습이다. 조선조 말에 그러했고, 일제시대가 그랬고, 6·25전쟁 때도 그러했다. 먹거리가 귀해 반찬을 무척이나 아껴 먹어야 했던 것이다. 고속성장에 힘입어 먹거리가 그리 귀하지 않은지가 오래되고, 특히 21세기에 든 지금도 음식을 짜게 먹는 것은 앞서 말한 미각의 둔감도 있지만, 사람들 성정이 스트레스 해소로 자극성을 좋아하게 된 탓이다. 세태가 툭 튀는 사물을 선호하게 된 현대인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음식도 툭 튀도록 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짠 것은 독이다. 국민건강을 위협하는 성인병 방어는 싱겁게 먹는 식생활 변화가 시급하다. 이런 건 있다. 논산 제2훈련소서 여름철에 경험한 기억이다. 수통물도 떨어진 야외교장에서 점심은 으레 소금절인 부식이 나온 게 불만이었으나, 탈수증으로 일어나기 쉬운 일사병 방지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상의 생활은 그게 아니다. 주부들이 달라져야 한다. 가족의 식단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주부들이 가족의 입맛을 싱겁게 먹도록 신경 쓸 필요가 있다. 물론 일시엔 안되겠지만, 가족의 건강을 위한 부단한 식생활 변화의 노력이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식품학에선 ‘음식은 싱거워야 음식 특유의 제맛을 음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김은 맨김으로 먹어야 본래의 김맛을 안다는 것이다. 서울 강북성심병원 당뇨병전문센터는 소금 섭취량을 측정할 수 있는 염도계를 환자들에게 필수품화 한다. 당뇨병만이 아니다. 모든 성인병의 근본은 나트륨 과다 섭취에 기인한다. 우리네 먹거리에서 전래 발효식품인 김치며 된장 고추장을, 이도 짜지않게 먹는 것만으로도 몸에 필요한 소금 섭취량은 충분하다. 더이상 짜게 먹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해친다. 웰빙시대의 식보, 건강식은 싱겁게 먹는 것이 요체다.

이명박의 재산 ‘환원’

좀 이르지만 말 못할 것은 없다. 호사자들은 특검을 들겠지만, 이에 영향받을 이명박 특검이 아니다. 전에도 그랬다. “천박한 사고로 대통령직을 사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측), “국민을 상대로 하는 최후의 뒷거래다” 라고 했다. (이회창 무소속 대통령 후보측),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다”라고 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측) 이명박(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이 지난 12월7일 KBS 선거방송에서 전 재산 사회 환원 의사를 밝혔을 당시에 있었던 그들의 반응이다. 검찰의 BBK 의혹 수사가 이명박에 대해 무혐의 결론이 있었던 직후다. 생각해 본다. 당선자 이명박은 48.7%(1천149만2천389표)를 얻었다. 차점자 정동영은 당선자 표의 절반을 웃도는 26.1%에 머물렀다. 이회창은 15.1%, 권영길은 3.0%에 그쳤다. 국민이 이들의 말대로 대통령직을 사고 팔고, 뒷거래를 하고, 우롱당했다고 볼 수 있는 분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명박의 당선과 그의 재산 환원은 전혀 별개다. 재산은 51억원 상당의 논현동 주택을 비롯, 논현동 땅·서초동 영포빌딩·양재동 영일빌딩·서초동 상가·골프장 헬스클럽 회원권 등 350억원 가량이다. 대통령을 그만두면 살 집을 빼놓고는 다 내놓겠다니 돈으로 치면 300억원 상당이다. 짠돌이로 유명하다. 점심을 사준다는 게 고작 자장면으로 때우기로 소문났다. 이재에 이골도 났지만 강남 개발이 한창일 때 정주영(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보너스로 받은 땅 조각들이 종자 밑천이 됐다. 대통령을 하고나면 평생 국가가 먹여 살린다. 생활비도 넉넉하게 주고 비서들도 딸려 준다. 외국 여행을 하겠다면 나랏돈으로 다 대준다. 굳이 재산을 탐할 이유가 없다. 이런데도 재산을 탐한 역대 대통령들이 없지 않다. 과거는 과거지사라 쳐도, 현직 대통령은 한 술 더 뜬다. 노무현(대통령)은 김해 봉하마을에 160억원의 건축비가 든 대저택을 신축했다. 여기에 460억원을 들여 집 주변을 노무현 타운으로 조성했다. 오는 25일 노무현 타운은 귀향잔치가 흥청망청 벌어진다. 전야제에 이어 국악·연예인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속에 1만개의 오색 풍선 등이 하늘을 날게 된다. 잔치비용으로 1억3천만원이 쓰인다. 현지 주민들이야 순박한 고향 사랑 마음에서 그런다지만, 지각있는 노무현이라면 한다고 해도 말렸어야 할 일이다. 성공한 대통령도 아닌, 실패한 대통령이 “염치를 모른다”는 말들이 나온다. 이렇다 보니 심지어는 남대문이 불탄 것도 그의 부덕으로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재수없는 사람이어서 임기 막판에까지 재앙을 남겼다”는 것이다. 듣기가 심히 난감하지만, 부덕한 것은 사실이다. 이명박의 재산 환원이 신선해 보이는 것은 노무현의 그같은 처신과 비유되는 데도 있다. 그런데 재산 환원 문제가 잠잠한 것은 이명박 특검이 걸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듣건대 김경준(씨)이란 사람은 특검에 열 한차례 불려가면서 신경질만 는 모양이다. BBK 주가 조작의 핵심 인물인 그의 누님 에리카 김(씨)이 미국 연방법원에서 사문서 위조 등으로 가택연금 6월에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기도 하고, 특검 수사가 자신의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은 탓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명박의 재산 환원 문젠, 조만간 그에 의해 공익재단 설립이 공론화 될 것이다. 장학사업을 할 것으로 알고 있다. 본인이 고학으로 어렵게 공부했던 처지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보단 다른 것을 권하고 싶다. 예컨대 소아암 같은 희귀병으로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돈없는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사업이다. 장학사업은 미흡하나마 이런 저런 기존의 장학사업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불우 계층의 어린이 희귀병 치료 공익사업은 이 사회에 한 군데도 없다. 기왕이면 소외된 이런 어린이 공익사업을 펼치는 것이 더 보람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돈이 없어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구하는 공익사업이야 말로, 돈이 없어 공부못하는 것을 돕는 장학사업도 좋지만 결코 못하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시작이 반이다. 이명박(대통령)의 재산 환원으로 이의 어린이 공익재단이 설립되면, 가진 계층이 참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의식이 확산될 것이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에 무서울 게 없고, 재산을 내놓고 하는 일에 거칠 게 없다. 이제 열 하루가 남았다. 차기 대통령에게 기대를 갖는 것은 그같은 순수한 열정에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경선에선 내심 지지하지 않았던 그에게 발견된 신뢰다. 이러쿵 저러쿵 하는 정치인들에게 말한다. 정치하면서 축재하는 정치인들은 그 입을 다물르라, 재산 환원은 실로 어려운 결심이다. 자신이 그같은 결심을 못하면 그러한 남을 헐뜯진 말아야 하는 것이 본연의 인성이다.

한나라당 ‘공천몸살’

한나라당이 공천 몸살을 앓고 있다. ‘투명하게 한다’ ‘공정하게 한다’ ‘개혁공천을 한다’는 것 등은 원론적 얘기다. 문제는 뭣이 투명하고, 뭣이 공정하고, 뭣이 개혁이냐에 있다. 공천심사위원회는 이틀동안 두 차례에 걸친 4시간40여분의 격론끝에 당규를 기준하기로 정했다. 뇌물 및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부정부패 비리와 관련, ‘유죄가 확정된 경우 공직후보자 추천 신청의 자격을 불허한다’는 당규를 원용키로 한 것이다. 사면 복권됐어도 공천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부정부패 비리와 아울러 또 한가지 파렴치범 전력자 등 식별은 공천심사위가 심사과정에서 사안별로 판단하기로 했다. 이외의 심사기준은 당선 가능성·전문성·의정역량·당 기여도 등이다. 반발이 안 나올 수 없다. 이미 공천받아 현역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데, 옛날 일로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안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위헌론도 있다. 헌법상 불소급의 원칙과 공무담임권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억울한 이들이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위헌론은 논리의 비약이다. 공천의 도덕적 청렴성 의지를 법률적 재단으로 삼을 대상은 아닌 것이다. 공천은 원래 잡음이 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기준을 두어 객관적 심사를 한다고 해도 불만의 소리가 나온다. 붕어빵 굽듯이 틀에 맞추는 기계식 공천을 해도 그렇고, 손으로 만두 빚듯이 하는 사안별 심사의 수제식 공천을 해도 그렇다. 상향식 민주주의라 하여 지구당에서 정해 올리는 공천이 있었다. 참으로 그럴듯 하지만, 이야말로 참으로 토착비리의 전형적 온상이었다. 가히 제왕적 기득권의 횡포가 상향식 공천이었던 것이다. 선거구는 봉건 영주가 있어선 안 된다. 개방돼야 하는 것이다. 공천 심사에 비근한 예를 든다. 프로야구에서 스트라이크 존은 주심의 취향에 따라 높낮음 등에 야구공 반쪽 정도의 차이가 있다. 불공평한 것 같지만 이에 불평하는 타자는 없다. 주심은 자기 취향의 스트라이크 존을 타자를 보아가며 들쭉날쭉하게 적용하는 게 아니고, 모든 타자에게 하나의 잣대로 다 똑같이 적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잣대눈금이 좀 틀렸을지라도 다 똑같이 재면 공평한 것이다. 이런 예도 들 수 있다. 두 사람의 조퇴 허락을 요청받은 상사가 맘에 든 사람에겐 ‘암! 몸이 건강해야지’라며 허락하고, 맘에 안든 사람에게는 ‘무슨 소리야! 일이 우선인거야’하며 퇴짜놓는 식의 공천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정권 탈환에 힘입은 한나라당엔 이런 저런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든다. 국회의원 하겠다는 사람들 역시 어느 때보다 많다. 그런데 참 묘하다. 지역별 차이가 심하다. 수도권과 영남권에서는 상종가를 이룬 반면에 호남권에서는 하종가다. 충청·강원권은 보합세다. 공천 경합이 극심한 데가 상종가 지역이다. 수도권과 영남권에서는 한나라당 공천만 받으면 말뚝을 세워놔도 당선될 줄 알지만, 그렇다고 유권자가 외면해야 할 말뚝을 몰라보는 것은 아니다. 하종가 지역인 호남권은 공천 경합은 커녕 공천 신청자만 있어도 반길 지경이다. 보합세 지역인 충청권에서도 대전과 충남은 한나라당 처지가 호남권과 별 다름이 없다. 충북·강원 지역에서만 어느 정도 해볼만 하다. 이렇듯 지역별 편차가 심하다 보니, 집권당으로서 원내 안정 의석을 얻기 위해서는 더욱 잘 해야 하는 것이 공천이다. 정권의 성패가 공천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또 기묘한 것은 후보를 보는 관점이다. 중후한 관록을 평가하는 반면에 참신한 신예를 평가하기도 한다. 이를 또 뒤집어 과거의 관록을 묵은 구시대 인물로, 새로운 신예는 검증안된 미지의 인물로 폄훼하기도 한다. 결국은 이도 사안별 심사 대상인 것이다. 짐작컨대 한나라당은 위기다. 공천 발표가 있고나면 한바탕 요동칠 것이다. 별의별 희한한 소리가 나올 게 분명하다. 공천을 잘해도, 못해도 그렇다. 탈당하는 사람들도 속출할 것이다. 정치권 한 켠에서는 이런 탈당 부스러기들을 주워 담을 투망을 곳곳에 쳐놓고 기다린다. 위기는 총선 후에도 도사린다. 4·9 총선이 정계재편을 가져올 것은 필연적 사실이다. 그 방향이나 폭은 총선 결과에 따라 풍향과 증폭이 다를 뿐, 정치권은 반드시 재편된다. 한나라당이 이에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는 역시 총선 성적표가 관건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같은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당내 계보를 말한다. 계보가 없는 정당은 없다. 문제는 계보가 아니라 계보의 조화다. 조화는 원칙이 기준이다. 그리고 위기는 면모를 일신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한나라당의 4·9 총선 공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명박 차기 정부와 더불어 갈 여당이기 때문이다. 국정의 안정된 운영을 위해서다. 공천 몸살은 피할 수 없는 홍역을 앓고 있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노무현 ‘맘보’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공족 맹상군의 집엔 빈객 3천여명이 모여들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조정에서 파직되자 빈객이 구름떼 같았던 게 눈을 씻고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많은 사람들이 내 처지가 이렇게 되니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구나!”하면서 탄식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처지가 맹상군과 비슷한 것 같다. 권력을 쥐었을 때와 권력을 내놓을 때가 다른 염량세태에 뼈저린 고독감을 갖는 기색이 역력하다. 관료들도 전같지 않고, 정치인들도 전같지 않으며 민심은 더더욱 전같지 않다. 그래서 ‘노사모’ 사람들을 적막강산이 된 청와대로 불러들이곤 하여 챙기는듯 싶다. 듣건대 시골 봉하마을에도 초청한 모양이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근대화의 비조다. 외치로는 유럽외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내치로는 1871년 독일 통일을 완성, 자본주의 육성으로 경제부흥을 일으켰다. ‘독일 청년에게 고함’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 젊은이들의 역할에 자긍심을 심어준 유명한 연설이다. 그의 개혁정책은 철두철미하기가 비수와 같았다. ‘철혈재상’이란 말을 들었다. 피도 눈물도 없던 철의 재상이 마침내 눈물을 보인 건 사임하고 나서다. 새로 즉위한 빌 헬름 2세와의 이견 충돌로 1880년 낙향할 때다. 연도마다의 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를 알아봐 손을 흔들며 환송하는 군중을 보고 흘린 눈물이다.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원망을 사기도 했던 비스마르크 자신으로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망외의 민심에 눈시울이 뜨거웠던 것이다. 노 대통령 또한 많은 개혁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저돌적으로 밀어 붙였다. 비난, 비판의 소리에 개의치 않고 그 역시 힘으로 몰아댔다. 이제 남은 임기 32일을 채우고 서울 효자동 1번지 청와대를 떠나 봉하마을 사저로 돌아가는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보고 그의 눈시울을 뜨겁게 할 시민들 환송이 있을까, 의리를 내세우는 진골 ‘노사모’면 몰라도 아마 있을 것 같지 않다. 자연인 노무현이 만약 눈물을 머금는다면 손 떠난 권력에 대한 금석지감의 아쉬움일 게다. 민심만이 아니다. 정치권의 친노세력 역시 지리멸렬하다. 노 대통령이 만든 열린우리당을 바꾸고 또 바꿔 신장 개업한 ‘세탁정당’ 대통합민주신당에서도 배척 당하는 판이다. 이해찬, 유시민 의원 같은 사람은 견디다 못해 탈당했지만 어디 갈 곳이 없는 정치미아 신세가 됐다. 노 대통령의 개혁은 대체로 그 기조가 없는자와 가진자 간의 의도적 계층 대립구도로 집약된다. 가진자를 눌러 없는자를 살린다는 것이다. 그 통로가 분배 지상주의다. 그러나 이런 이념 철학은 양극화 해소는 커녕 중산층을 붕괴, 영세민층으로 전락시키면서 양극화 격차를 더 벌려만 놨다. 성장을 둔화시킨 분배 위주 등으로 나라 빚을 300조원 대의 빚더미 위에 올려놨다. 실업자가 양산되고 생업이 부진한 가운데, 수지 균형이 안맞는 서민층 가계는 가구당 평균 3천500만원 꼴 되는 빚을 져 금융불안의 요인이 됐다. 전국을 부동산 투기장으로 만들었다. 노 대통령의 생각이 성공했다면 가진 것 없는 계층의 서민들은 그의 귀향길을 아쉬워해 뜨겁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지난 5년에 몸서리 치는 것은 가진 사람들 보단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더 한다. 정책 실패도 그렇지만 도덕성이 타락된 것이 노무현 정권이다. 이른바 자칭 민주화세력들 끼리끼리 해먹은 정권인 것이다. 내편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네편에겐 무자비한 권력의 부도덕성이 민초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봉하마을 사저에 160억원을 들이는 것도 마뜩찮다. 그가 진정 가진 것 없는 계층을 위한 지도자라면 사저만도 대지 3천992㎡에 연건평이 900㎡나 되는 저택을 차마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도 모자라 생태연못 숲조성, 생가복원, 기타 등 아방궁을 연상케하는 성역화를 이루고 있다. 베트남의 호찌민이 인민의 숭앙을 받는 것은 평생을 민초와 똑같은 의식주 생활을 한 청렴성 때문이며, 프랑스의 드골이 국민의 존경을 받는 건 고택 생가에서 동네 어린이들과 여생을 보내다 마을공동묘역에 묻힌 품격높은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노무현식 공식을 그의 공·사생활에 대입해 생각해 보면 그 자신이 청산될 개혁 대상이다. 언필칭 기득권을 항상 말한대로 그 자신이 이미 기득권자이고 가진 계층이기 때문이다. 이러면서 정부조직법개정안이 맘에 안드니까 거부권을 행사, 이명박 차기 정부 출범의 순항에 재를 뿌리겠다는 것은 황당하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찍어다 붙여도 ‘못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사와 다를 바가 없다. 임기말 대통령의 권한을 이런 맘보로 써먹겠다는 건 무지막지해도 너무한다. 삐닥하게 나가야 자신의 존재가 안죽고 살아있는 걸로 믿는 게 아닌지 모르겠으나, 삐딱한 심보는 고독을 불러들인다. 곧 떠날 대통령에게 굳이 더 말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부득이 한 번 더하게 됐다. /임양은 주필

민주노동당, 변하는가?

북측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 ‘자주’란 말은 원랜 금기사항이다. 1945년 8·15광복 직후, 좌·우익 진영의 이념 갈등이 한창일 때 민족보다 국제화를 우선한 게 좌익진영의 공산당이다. 이에반해 우익은 민족진영으로 구분됐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국가나 민족의 개념보단 크렘린궁을 정점으로 하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신앙 시 했다. 국가는 다만 ‘1국1당’의 지역 개념에 머물렀다.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 3상(미·영·소) 회의가 결의한 신탁통치를 좌익진영은 적극 찬동하고, 우익진영은 결사반대한 게 그같은 사상적 배경에 연유한다. 신탁통치는 한국(조선)은 독립할 자질이 미숙하기 때문에 5년간 강대국들이 맡아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한반도는 일제로부터 해방은 됐으나 38선 이남은 하지 중장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기까지 미군 군정을, 이북은 치스차코프 대장이 같은해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 소련군이 군정을 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 북녘 사람들이 입장을 바꿔 ‘민족’ ‘자주’란 말을 신앙화하는 것은 1인 숭배의 김일성주의(김정일주의) 옹위에 불가피한 폐쇄사회를 위한 것이고, 주체사상은 그같은 폐쇄 체제를 무장화한 주술적 이론이다. 따라서 “남북 문제는 같은 민족인 우리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북 문젤 외세(국제사회)에 의존하는 것은 반민족적 행위다”라고 북측이 주장하는 ‘민족’과 ‘자주’의 말엔 우리가 뜻하는 동포애 차원과는 다른 정치적 함정이 깔려있다. ‘민족’과 ‘자주’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개방된 민족, 개방된 자주가 아닌 폐쇄된 민족, 폐쇄된 자주를 거부하는 건 폐쇄사회는 사람이 사는 사회가 아니고 번영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는 상호 보완의 동반자 관계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세력은 불행히도 기형적 한계가 있다. 평양정권과 가까운 맹종성을 진보세력의 가치기준으로 아는 능사가 이같은 한계점이다. 이들은 평양정권을 비판하면 ‘꼴통보수’ ‘전쟁광’으로 몰아댄다. 한반도에서 그 참혹한 전쟁이 또 일어나길 누가 바란단 말인가, 6·25 경험세대는 더 말할 것이 없다. 보수라 하여 북녘과 반목, 갈등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친북을 진보세력만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보수층도 친북이 아닌 건 아니다. 문젠 종속적 친북에 있다. 평양 사람들이 하는 것은 다 옳고, 이쪽에서 하는 일은 다 그르다는 식으로 보아서는 동반자의 관계가 되기 어렵다. 민주노동당은 대표적인 진보정당이다. 대표적인 진보정당이 태생적 한계를 보였던 것은 정말 유감이다. 이번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의 득표율은 고작 3%(71만2천121표)다. 지난 16대 대선 득표율 3.9%(95만7천148표)보다 떨어졌다. 민중의 외면이 싸늘하다. ‘(종속적) 친북당, 운동권 정당, 민주노총당 이미지와 단절하겠다’는 것은 신선하다. 심상정 민주노동당비상대책위원장의 이같은 당 쇄신 선언은 새로운 기대를 갖게한다. 개혁은 혁명이 아니다. 진보정당의 정책 목표 또한 혁명이 아닌 어디까지나 개혁이다. 이명박 차기정부의 친기업이 노동자를 박대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친기업으로 인한 노동시장 홀대의 우려를 방어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이에 그치지 않는다. 친기업속에서도 노동자의 권익신장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리는 불법파업으로 철도와 항공기를 멈추게하고 전기공급을 끊겠다는 민주노총의 위협은 노동운동이 아닌 혁명적 폭력이다. 민중이 이같은 폭거를 과연 원하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불법파업의 다반사에 정치적으로 편승했던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노총 또한 민주노동운동의 새 가치 정렬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진보세력이 민중세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평양정권에 잣대를 맞추기에 바쁜 닫힌 생각을 버리고, 드넓은 세계속의 열린 생각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계의 진보세력도 ‘제3의길’ 노선 등 여러가지인 것은 그만큼 시대상에 맞는 진보의 정체성 확립이 어려운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보수층이 갖기쉬운 오만을 경계키 위해서는 진보층의 건전한 견제가 필수 요건이다. 민주노동당의 변화가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가 서로 공존하며 배우는 보혁동거시대를 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비대위의 (종속적) 친북당 탈피는 마르크스 경제학 유물인 유물사관적 잉여가치설을 아직도 신봉하는 혁명적 노동운동을 배척하고, 북녘이 기도하는 폐쇄사회 유혹의 ‘민족’과 ‘자주’의 함정에 이용당하지 않는 진보정당의 새 모럴을 제시할 것으로 믿는다. 세상은 시대따라 변한다. 보수도, 진보도 정체되어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임양은 주필

국회개혁이 정치개혁이다

국가통치기구의 국민 신뢰도 회복이 급하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이에 깊은 고민을 해야할 때다. 고려대 박종민 행정학 교수가 최근 한국행정학회에 낸 논문 ‘정부 신뢰와 정치혜택 및 정부 공정성에 대한 태도’ 주제에서 이같은 위기 수준이 제시됐다. 이에 의하면 행정·사법·입법부 등 3부에 대한 종합 신뢰도를 2007년 기점으로 한국행정연구원 조사 등을 비교한 결과, 12%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3부별로는 사법부 48%, 행정부 33%, 입법부 18% 순으로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가장 높다. 불신의 이유는 국민이 혜택을 별로 또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 세금을 낭비한다, 특권층을 위해 일한다, 대부분 부패했다, 거의 법을 안 지킨다는 것 등으로 집약됐다. 이는 국민적 사회정서와 대체로 맞아 떨어지는 점에서 주목된다. 앞으로는 지방자치가 지역사회와 지역주민이 부담하는 막대한 자치비에 비해 자치이익을 얼마나 창출하는 가에 대한 연구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3부 가운데 꼴찌면서도 사법·행정부에 비해 신뢰도 격차가 그나마 현격하게 떨어지는 국회다. 지금 정치권은 오는 4·9 총선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다.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긴 건 이긴거고, 대통합민주신당 등은 이미 진 건 진 것이고 해서 대선 승패간에 정치인들 저마다 총선서 자기 살 궁리에 바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치개혁의 시대적 요구가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국회는 정치의 본산이다. 정치개혁은 국회개혁과 바로 연결된다. 예컨대 미국의 의회, 특히 하원의 지방출신 의원들은 대다수가 의원회관에서 숙식을 해가며 의회도서관 등에서 의정연구에 몰두한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도 변해야 한다. 건달 국회의원들은 추방해야 된다. 국회의원 수부터 크게 줄일 필요가 있다. 도대체가 너무 많다. 국회의원 4년 임기동안 1인당 지출되는 돈이 세비, 보좌관 비서진 인건비, 기타 등을 통틀면 약 88억원에 이른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299명 앞으로 2조6천312억원 가량이 쓰인다. 국민은 멱살잡이 패싸움 국회나 보자고 세금을 내는 게 아니다. 국민은 네거티브 정치나 하라고 뽑아보낸 게 아니다. 국민은 놀고 먹으라고 국회를 두는 것이 아니다. 국회개혁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선거방식부터 고쳐야 한다.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완전 공영의 시·도별 중선거구제로 하고, 각계 전문가 출신의 비례대표를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 ‘지구당’ 제도가 폐단이 있다해서 고친 게 ‘당원협의회’ ‘당원지역협의회’로 됐으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게 그것이다. 이런 소선거구 중심으로는 지연·혈연·학연에 얽힌 특정인 왕국, 돈타락 선거의 폐해를 면하기가 쉽지 않다. 소선거구제에 따른 토착비리의 발호 또한 불식키 어렵다. 이에 비해 선관위주도의 완전 공영선거에 의한 중선거구제로 하면 사실상의 지구당인 ‘협의회’ ‘지역위원회’ 등 유지가 필요없게 되고, 공명선거가 가능하고, 유능한 국회의원이 많이 배출되는 길이 트인다. 국회의원 수도 재조정해 자연스럽게 줄일 수 있다. 적어도 국정에 전념할 수 있는 생산적 국회의원 배출효율이 지금보단 훨씬 높다. 문제는 이런 국회개혁 입법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국민신뢰도가 겨우 18%에 머무르는 국회인 데 있다. 집단이익의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야말로 당을 불문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진짜 꼴통보수 집단인 것이다. 하지만 포기해선 안된다. 어떻게든 정치개혁 차원의 국회개혁은 앞으로 강구돼야 한다. 프랑스 7월 왕정시대(1830~1848년)에 의회정치를 풍자한 이런 말이 있었다. ‘의회란 어떤 지위에 얻어 걸리기 위하여 양심과 물물교환하는 큰 시장이다’라고 했다. 국회의원이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공직을 제공받고, 금융이나 재판상의 특권을 누린데 대한 민중의 저항으로 그같은 말이 나왔던 것이다. 또 19세기 초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맨체스터 같은 신흥도시가 곳곳에 생긴 반면에 구도시에는 많은 이주민이 생겨 거의 공동이 되고, 심하게는 지형이 바뀌어 바다속에 잠긴 지역이 있는데도 의회가 선거구 조정을 한동안 하지 않았다. 텅 빈 구도시에 더 많이 배정된 의원 자리를 향유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지역이 바다에 잠긴 곳은 서류상 유권자인 사람들을 배로 태워가 잠긴 곳 바다위에서 투표케한 일이 다 있었다. 이리하여 ‘배를 타고 바다위서 투표하러 간다’는 말이 나오기까지한 웃지못할 일은 1832년 선거법을 개정하고 나서 비로소 없어졌다. 대한민국 국회의 폐해가 과거 프랑스나 영국 의회와 물론 같지 않더라도, 집단이익에 치우쳐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소선거구제는 건국 이후 60년동안 시행해온 제도다. 제2공화국이 양원제를 하면서 참의원은 중선거구제를 한 번 했으나 민의원은 역시 소선거구제로 했다. 단원제 국회에서 소선거구제를 더 고집하는 게 세상이 달라진 시대상에 합치되는지 심도있는 논의가 있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패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18대 국회 진출로 정치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데 혈안일뿐, 국회개혁은 안중에 없다. 한나라당은 국정 원활을 위한 과반의석 확보에, 신당은 이의 저지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나 정치개혁 의지는 안 보인다. 국회개혁을 공약으로 표방하는 입후보자나 정당이 나와야 할 터인데 역시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도 개혁을 촉구해야 하는 것은 국민신뢰도 18%는 국민의 저주이기 때문이다. 국회가 ‘마의 소굴’같은 인식에서 탈피하는 길은 국회개혁에서부터 시작된다. /임양은 주필

그대 젊은가?

그대 젊은가, 젊은이여 기(氣)를 펴라! 패기를 가져라!! 청춘의 패기는 새해 아침에 솟는 태양처럼 신비롭다. 현란하다. 중천에 떠오르는 햇살은 두려움이 없다. 청춘의 기(氣) 또한 거침이 없다. 젊은이여 건방지게 좀 굴어라. 제값 못하는 시건방이 아니라, 제값을 더하는 패기를 건방지도록 뿜어라. 젊은이여! 삶을 즐기라. 청춘은 열병을 앓는 계절이다. 감성의 열병을 앓기도 하고 이성의 열병을 앓기도 한다. 그러면서 오성(悟性)을 터득해가는 것이 청춘이다. 사랑도 하라! 사랑을 까먹는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샘물처럼 부단히 솟는 일구는 사랑을 하라!! 청춘은 끊임없는 도전의 시공(時空)이 허용되는 특권이다. 실패를 미리 두려워 해선 청춘이 아닌 애늙은이다. 백발청춘의 진짜 늙은이들도 더러 갖는 도전 정신을 갖지 못하는 애늙은이는 청춘의 낭비다. ‘청춘은 슬픔속에서도 언제나 그 자체의 광택이 있다’고 했다.(V· 위고) 소성(小成)에 자만을 경계하고, 실패에 좌절을 거부하는 것은 청춘만이 구사할 수 있는 삶의 매듭이며 광택인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은 ‘새벽은 하루에 한 번 뿐이고, 청춘은 일생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청춘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구가하느냐는, 곧 자신의 청춘을 얼마나 더 풍요롭게 하느냐는 것이다. 풍요로운 청춘일수록 젊음을 오래 간직한다. 열권의 책을 두고 어느 것부터 먼저 읽을 것인가를 골몰할 시간에 열권의 책을 다 읽어버리는 것이 청춘의 열정이다. 취직이 안되는 것은 정말 걱정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긴 인생 여정에서 낙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라톤 레이스에서 좀 늦게 출발하는 것 뿐이다. 취직이 안되면 되는동안 뭣을 할 것인가를 알아 스스로 길을 여는 것이 청춘다운 청춘이다. 뭣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뭣이든 하느냐 안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뭣을 하느냐는 것은 청춘의 지엽적 현상이며 뭣을 하느냐, 안하느냐는 것은 청춘의 본질적 열정의 문제인 것이다. 젊은이여 독립을 하라! 짐승도 자라면 떠나는 어미 품을 하물며 사람이 되어 엄마 치마곁을 떠나지 못하는 청춘은 허무하다. 도대체 사람은 언제까지 부모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일까? ‘대학 졸업 때까지’가 46.3%로 가장 많고, 혼인할 때까지 27%, 취업할 때까지 11.9%, 고교 졸업 때까지 8.6%, 평생이 5.5%, 집계불능 0.7%(한국보건사회연구원·2006 전국 1만117가구 대상 조사) 순으로 나타났으나 가장 이상적인 게 성년이 되는 고교 졸업 때까지다. 미국 샌디에이고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있던 김영래 아주대 교수는 본보에 연재한 ‘미국 대학통신’에서 미국의 대학생들 대부분은 부모의 능력 유무간에 자신이 벌고 모자란 것은 학자금 융자로 공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때문에 결혼할 땐 서로가 갚지못한 학자금이 얼마며, 앞으로 어떻게 갚을 것인가를 계획한다는 것이다. 미국 대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자신들이 벌어대는 등록금이 아까워 더 열심히하고, 이런 미국 대학생들의 저력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여! 고등학교는 고사하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부모품을 떠나지 못하는 나약한 청춘들이여, 그대들은 힘이 나약한 것이 아니고 마음이 나약하여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청춘시절의 고민은 청춘을 구가할 수 있는 청춘이 지닌 대가다. 그리고 젊음은 대가를 충분히 치를 수 있는 자산이다. 청춘의 광택은 바로 그같은 무형 자산인 것이다. 요컨대 문젠 작심하기에 달렸다. 안되는 쪽으로 생각하면 되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는 것 투성이다. 그렇다고 남이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인생이다. 부모도 대신할 수 없다. ‘칼이 짧으면 한발 더 다가가라!’ 스파르타의 격언이다. 청춘을 적극적으로 혹사하라!! 생각은 깊이하고 행동은 재빨리 옮겨라. 순발력있는 실천력은 성공을 담보한다. 방구석에 콕 처박힌 ‘방콕’ 신세로 세상 불평만 일삼는 나태에서 용감하게 탈출하라! 세파에 부딪히고 또 부딪혀라! 한신(韓信)이 젊었을 적에 저자거리의 불량배 가랑이 밑을 긴 것은 쓸모없는 다툼을 피하기 위한 것이며, 청년 링컨이 권력의 횡포에 맞선 변호사였던 건 필요한 다툼을 피하지 않은 것이다. 용기와 객기를 구분할 줄 아는 슬기가 또 청춘의 미래를 건다. ‘청년들을 위해 미래를 건설할 순 없으나, 미래를 위해 청년들을 건립할 수는 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한 연설이다. 조건을 탓하지 말라. 청년 직업인들이여 꿈을 펼쳐라! 그대 젊은가, 젊은이여 기(氣)를 펴라! 패기를 가져라!! 임양은 주필

신당과 親盧(친노)

대통합민주신당의 요즘 반란이 ‘프롱드의 난’을 연상케 한다. 프랑스 루이1세에 반기를 든 귀족의 난이 새총 모양의 투석기에서 튕기는 돌처럼 속출했던 게 ‘프롱드의 난’이다. 노무현(대통령)을 비롯한 친노파가 대선 참패 규탄의 타깃이 되고 있다. 인적쇄신, 체제정비, 노선수정 등 ‘제자백가의 난무’처럼 쏟아지는 주장의 불평 연유를 이 정권의 실정 책임으로 돌린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바로 얼마전까지도 정권의 실정을 말하면 얼굴 붉히며 대들던 사람들이 앞다퉈 노무현을 지탄한다.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다. 낙방한 당 후보 정동영이 아까워서도 아니다. 민심에서 영 멀어진 신당의 간판으로는 내년 4월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야단들인 것이다. 신당은 노무현 세력이 민주당을 뛰쳐나와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세탁정당이다. 그런데 당을 세탁하는 과정에서 그만 6개 계보가 어울리는 잡탕이 됐다. 하긴, 처음이라고 순수했던 것도 아니다. 열린우리당 창당에 도저히 갈 사람이 아닌데도 간 사람들이 많았다. 집권당의 양지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는 이념적 좌파시책에 동조하는 부속품이 됐다. 신당으로 세탁하면서는 권력지향, 정치미아들의 기착지가 되어 온갖 잡새들이 날아들었다. 만약 이번 대선에서 신당이 이겼다면 노무현을 그토록 욕하진 않을 것이다. 지고 나니까 욕하는 것은 책임 회피다. ‘나는 책임이 없고 너 때문에 망했다’는 식의 논리는 비겁하다. 민심에서 멀어진 사람을 욕한다고 해서 민심이 욕하는 사람은 따로 잘 봐주는 것은 아니다. 더 치사하게 본다. 권력의 먹잇감이 팔팔 뛸 때 희희낙락하는 건 응집력이 아니다. 권력의 먹잇감을 날려버린 민심의 폭탄이 터졌을 때 더 뭉치는 것이 응집력이다. 이는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고해성사하는데서 시작돼야 한다. 이제와서 친노세력은 당에서 나가라고 하면 그럼 신당의 정체성은 뭔가, 이제와서 당의 진로를 실용중도로 가겠다면 한나라당과 뭐가 다른가, 예컨대 이명박(당선자)의 대운하 반대가 우리의 본의가 아니라고 하소연한다는 건교부 관료들의 염량세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못난 정치인들인 것이다. 독수리에게 혼쭐이 나, 날개꺾인 독수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성했을 때 당한 독수리의 횡포를 잊지 못해서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세력이 비록 한 풀 꺾여 ‘대낮속의 암흑’을 걷지만 동정의 여지는 추호도 있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 들고 일어나는 당내 반발에도 그 말많던 이해찬, 유시민 (의원) 등 마저 찍소리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주목된다. 청와대서 민중항쟁가라는 ‘님의 노래’를 목청높여 합창했다. 축배의 폭탄주를 높이들고 또 들곤 했다. 권력에 취해 들떴던 자칭 민주개혁세력은 권력을 내놓은다는 게 허망할 것이다. 집권의 축배를 드는 것이 생신지 꿈인지 하고 여겼던 것 처럼, 권력에서 물러가는 것 또한 꿈속 같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고독한 종말은 예약된 것이다. 민초도 미리 알 수 있었던 종말을 자신들이 모른 그들의 그간 행진은 그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인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어 당신의 방으로 찾아왔어요 / 그런데 당신은 벌써 저에게는 되돌아오지 않는군요 / (중략)바깥에서는 찬바람이 윙윙 불어오는데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샹송가수 다미아가 부른 유명한 ‘어두운 일요일’의 노랫말 구절이다. 친노의 민주개혁세력이 정계를 떠나지 않고 머물 요량이면 ‘어두운 일요일’을 업보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울리지 못할 ‘빙탄불상용’의 잡탕 세력과는 결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년 총선에서 한 번쯤 떨어져도 좋다는 각오 또한 다져야 한다. 진보를 내세운 좌파 이념의 실패를 시인하고 새로운 출발을 해 보여야 한다. 진보정당다운 탈이념의 진보정당은 보수정당을 견제키 위해서도 필요치 않는 게 아니다. 헤겔은 저서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저녁 때가 되어야 비로소 날아간다’고 했다. 로마 신화에서 지혜의 여신이라는 미네르바도 사자(올빼미)를 띄우는 것은 성숙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정치는 관념의 정서가 아닌 인식의 판단이 앞선다. 이른바 친노 규탄 일색의 신당은 관념의 정서에 치우쳐 있다. 한나라당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정권의 말기적 증상이, 신당의 ‘프롱드의 난’ 등이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만능정당처럼 들뜬 문전성시가 반드시 영광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친노세력을 배척하는 신당이 난파되어 배를 새로 만들 것인지, 수리해서 갈 것인지 그리고 어느 항로를 선택할 것인지는 두고 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친노를 부정한다고 해서 대선 참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당선자 보시오

“이명박을 찍어서(대통령 당선이) 되긴 됐는데 앞으로가 걱정이오” 하는 국민이 많소. 당신은 왜 그런다고 생각하오? 내가 보기에는 세 가지요. BBK 특검이 그 하나고, (한나라당)당내 문제가 잘 풀릴 것인지 걱정되는 게 또 하나고, 당신이 대통령에 취임하면 다짐한대로 과연 경제가 살아날 건지 의문인 것이 또 하나일 것이오. BBK부터 얘기합시다. 김경준 입국에서 광운대 동영상까지 국민을 참 피곤하게 만든 것이 당신이오. 그런데 왜 당신이 (당선)됐을까요? 좌파정권 10년의 실정을 이제 종식시켜야 한다는 국민의 대승적 판단이라고 믿소. 사람으로 치면 예컨대 (기록적 탈당의 멍에 때문에 하위권으로 추락했지만) 이인제 같은 사람이 얼마나 똑똑하오. 그런데 김대중과 붙은 15대 대선에서 얻은 500만표가 무색하리만큼 추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후보자는 많아도 정작 국민이 행사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좁았소. 아마 당신도 최선이기보단 차선으로 선택한 유권자가 많을 것이오. 사상 최저의 투표율이 인물난에 겹친 이전투구의 양상에 유권자들이 식상한 탓이오. 헌정사상 특검 혐의자를 대통령으로 뽑기는 처음이오. 입맛이 참 씁쓸한 일이오. (대통합민주신당)정동영은 말할 것 없고 보수라는 (무소속의)이회창까지 합세한 참으로 집요한 BBK 공세에도 당신이 당선된 것은 무혐의로 본 검찰수사를 믿고있기 때문이오. 기왕 시작되는 특검이고 보면 앞으로 당당하게 임해야 할 것이오. 당선자 신분을 성역화하지 않는 그래서 특검에 소환신문을 자청하는 그런 면모를 보고 싶소. 문제는 BBK오. 만약 불행히도 관련된 것으로 드러나면 더 이상 어쩔 수 없소. 빠른 재선거가 가능하도록 즉각 사퇴해야 할 것이오. 그러나 특검 역시 무혐의가 나면 당신은 BBK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당신을 무고한 사람들은 내년 4월 총선에서 천벌을 대신한 민심의 응징을 받을 것이오. 다음은 당내 문제이오.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것이 당을 결집하는 최상의 방책임을 명심하시오. 공사 구분은 원칙이기 때문이오. 객담을 들겠소. 이회창이 박근혜(한나라당 전 대표) 집을 ‘삼고초려’한 게 화제가 됐잖소. 지난 대선 땐 투표일 막바지에 김종필 집을 방문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막무가내로 뿌리친 그가 세 번이나 박근혜를 찾아 허탕치고도, 무슨 공동정부를 구성한다고 혼자 말도 안 되는 소릴 했잖소. 그런데 노무현(대통령)은 지난 대선 투표전날 밤 단일화 지지를 전격 철회한 정몽준 집을 찾았으나 문전축객 당한 게 되레 전화위복이 되어 당선됐는데 이회창은 ‘삼고초려’하고도 떨어졌소. 왜 그럴까요? 이회창의 경우,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약발을 못본 것이오. 오래된 얘길 하겠소. 당신이 서울시장을 하면서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에서 한국을 준결승까지 끌어올린 히딩크(감독)에게 명예시민증을 주는 공식행사가 있었소. 그 자리에서 히딩크와 기념촬영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난데없이 기념식장 단상에 있는 당신이 단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누구더러 올라오라고 하잖겠소. 알고 보니 딸들과 손주들인데 아무리 기념촬영을 같이 하고싶어도 그렇지, 공식행사에서 공인으로 공사를 구분못하는 처신이었소. 이번 선거기간동안 말썽이된 위장전입·위장취업 같은 것도 같은 맥락이오. 앞으로 당도 그렇소. 원칙을 깨거나 공사를 구분 못하는 위장전입·위장취업 방식으로 당을 흔들고, 대통령직 인수위를 측근으로만 채우고, 나아가 국정도 그런식으로 농단하면 더 볼것 없이 당신 역시 부패정부 무능정권 소릴 듣게 될 테니까요. 노무현(정권)이 내편 네편으로 갈라 실패한 전철을 ‘전거복철’(前車覆轍·앞서간 수레가 뒤집힌 것을 보았으면 뒷 수레는 앞차가 지나간 자국을 지나지 말라는 고사)의 교훈으로 누구보다 명심해야 할 사람이 당신이오. 당장 시급한 당내 문제가 알다시피 내년 4월 총선이잖소. 벌써부터 들리는 불협화음이 다 공천을 둔 잡음이잖소. 왜 이럴까요? 당신에게도 원인이 있소. 정녕 당을 위한다면, 분당의 불씨를 없애려면 당신의 사조직인 청계포럼을 먼저 완전히 해체해 보여야 할 것이오. 이제 경제살리는 얘길 합시다. 사실은 이게 국민사회의 최대 관심사이면서도, 만성질환에 빠져 어려운 일이지요.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국민이 먹여 살려달라는 게 아니고 벌어먹고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므로,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돈이 잘 돌아 장사가 잘 되게 하는 것이 요체가 아니겠소. 이러기 위해선 당신이 더 잘 알다시피 기업이 잘 돌아가야겠지오. 제발 그놈의 기업규제, 중첩투성이인 규제를 좀 과감하게 풀어 숨통을 터주시오. 대기업·중소기업·영세기업이 저마다 제구실을 다 할 수 있도록 기업을 활성화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첩경이니까요. 아울러 굴뚝산업의 유물인 수도권규제도 첨단산업시대에 맞게 확 풀어야 하지 않겠소. 경제회생의 국민적 염원이 당신을 압도적으로 선택한 사실을 한 시도 잊지말고 실망시키지 않기 바라오. “이명박을 찍어서 되긴 됐는데 앞으로가 걱정이오” 하는 사람들의 걱정을 꼭 덜어주시오. 안 찍었던 사람들도 당신을 좋아하게 되도록 말이오.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