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빼앗긴 그늘을 그리며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푸라타나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김현승, 「푸라타나스」) 이 시를 뇌던 시절, 길가나 교정에는 플라타너스가 많았다. 넓적한 잎으로 그늘을 크게 지으며 땡볕을 가려준 나무였다. 시가 깊이 닿아서인지, 버즘나무보다 플라타너스가 더 정겹게 입에 붙었다. 유독 크고 너른 잎사귀들로 제 풍치를 우람하게 만드는 플라타너스. 공해에 강하고 빨리 자라며 그늘까지 넓어서 한때는 가로수 나무로 불릴 만큼 인기도 높았다. 그런 플라타너스 풍경으로 소문난 길은 영화 출연도 했건만, 어느새 많이 사라졌다. 알레르기 유발이나 꽃나무를 선호하는 정서에서도 밀렸지 싶다. 밀려난 플라타너스들은 어디서 푸른 머리를 적시고 있을까. 그런 그리움에 돌아보니 와중에도 남아 있는 플라타너스 우듬지가 민머리처럼 휑하다. 새 가지들이 삐죽삐죽 겨우 잎을 내미는 모양새다. 큰 잎사귀와 무성했던 가지들을 거의 다 쳐냈으니 나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꼴이 된 것이다. 그동안 지나친 가지치기에 대한 지적이 있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마구 잘라낸 결과다. 가로수가 상가 간판을 가리거나 알레르기를 유발한다는 민원에 따른 조치라면, 공원의 나무들은 왜 그리 심하게 쳐냈는지. 일부러 찾던 그늘이 좋은 길. 나무들 비명이 들리는 듯해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지나가기도 편치 않다. 지친 걸음을 쉬고 책을 읽곤 하던 나무 그늘 아래 벤치마저 빼앗긴 셈이다. 도대체 가지치기의 기준은 어떻게 마련하고 행하는 것인지 의아하다. 가지치기로 흉해진 가로수 모습을 공원에서도 마주치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공원의 나무는 과실수나 관상용 정원수와는 역할이 다르지 않은가. 앙상해진 나무들이 그럼에도 새 잎을 열심히 펼쳐내고 있다. 잘린 팔을 힘껏 내어 뻗는 모습이 딱하다. 걷는 사람들은 땡볕 가려줄 푸른 그늘 빼앗긴 나무 밑을 얼른 지나간다. 그늘에 기대어 쉬던 걸음을 재우치며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갈수록 차가 늘면서 인도가 차도에 먹히는 것도 억울한데 가로수 그늘까지 앗기다니, 이건 시민의 행복권 침해라고 분개하는 마음도 커진다. 걷고 싶은 도시, 아름다운 도시의 길에는 가로수도 큰 역할을 하건만 너무 쉽게 쳐내기를 감행하니 말이다. 그늘의 힘이 나날이 크게 닿는 철이다. 그늘막 설치도 좋은 배려지만 가로수 그늘 키우기가 더 절실하다. 알다시피 나무는 이산화탄소 흡수에 따른 공기 청소는 물론 대기 온도 낮추는 큰일을 말없이 수행한다. 내년에도 흉해진 가로수를 보지 않으려면 가지치기의 기준과 비율을 정해야 할 것이다. 올해 애써 자란 나뭇가지들이 내년 여름에는 푸른 그늘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니체의 ‘아모르파티’와 노자의 ‘거피취차’

춘추시대 사상가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문을 연 노자(老子)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道]을 제시했다. 노자 사상을 정리한 책이 ‘도덕경’이며 그 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억지로 고치고 다듬어 무엇을 만들지 말고 흐르는 물처럼 자연에 동화해 살아가라는 것이다. 쉬운 듯하나 해석하기도 행동으로 옮기기도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내놓는 노자 사상의 해석 또한 분분하다. 무위(無爲)는 유위(有爲)의 반대 개념이다. 대부분 세상 사람들은 유위에서 살아간다. 유위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의지하는 것, 즉 인연에 따라 쌓은 물질에 의해 능력을 만드는 걸 일컫는다. 지식이든 재물이든 이를 쌓아가는 일이 유위에서 일어난다. 노자는 이 유위를 버리고 반대쪽에 있는 무위를 선택하라고 했다.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를 버리고 비어 있는 공간인 무위에 서라는 거다. 그래서 노자는 알기도 따르기도 어렵다. ‘도덕경’ 5천자 중에서 딱 잡히는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이것만 제대로 발견하면 노자의 길에 들어선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와 ‘거피취차(去彼取此)’가 그것이다. ‘무위이무불위’는 무위에서 뭘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거피취차’는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잡으라는 뜻이다. 이 두 말은 서로 일맥상통한다. 무위는 유위와 달리 앎이 없는 공간이다.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오직 지금 내가 원하고 생각하는 대로 길을 만들며 행동하는 공간이다. ‘거피취차’를 다산 정약용은 ‘이상을 버리고 일상에 몰두하라’라고 해석했다. 머릿속에 그림 그리지 말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붙들라는 의미다. 이 두 명제를 달리 풀어보면 학습된 사고에서 벗어나 나의 눈으로 나를 발견하라는 의미다. 낯설지만 그게 노자가 말한 ‘길’이며 내가 가야 하는 길이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을 바꾸지 않으면 나는 그 길로만 가게 된다. 누구나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하지만 돌아서면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다. 익숙한 길을 놓지 못해서다. 방향을 바꾸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로 가야 인생이 바뀐다. 이게 ‘거피취차’다. ‘무위이무불위’와 ‘거피취차’는 모두 같은 길 위에서 만난다. 니체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한 ‘아모르 파티(amor fati)’도 호라티우스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도 결국 같은 길 위에 있다. 쥘 들뢰즈가 말한 ‘차이와 반복’ 역시 그렇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제대로 겸손하기

요즘 청년들이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어서인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자기 PR이 취업의 비결이라 입을 모은다. 물건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듯, 경쟁시대에 자신을 포장하여 상대방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한결 같이 지혜로운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하는 덕목으로 겸손을 강조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어쩜 자기 자신을 낮추거나 자신의 좋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연상하게 하는 겸손은 현대사회에서 점차 설자리를 잃어 간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겸손은 무엇일까? 제대로 겸손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주역』에서는 겸손을 ‘地中有山(지중유산)’ 이라하여, 땅 속에 거대한 산이 박혀 있는 모습을 상징한다. 땅 위에는 웅장한 산도 있고, 밋밋한 평지도 있고, 움푹 들어간 구덩이도 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병풍처럼 우뚝 솟은 설악산 울산바위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활짝 펴게 하고 감동을 안겨준다. 다만 대부분의 우리는 되어가는 사람이기에, 처음부터 높은 수준을 기대하기 어렵다. 만일 평지처럼 평범한 자기 모습이 작아 보여,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조급한 마음을 가진다면, 관심은 저절로 밖으로 항하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장마에 내리는 장대비는 순식간에 세상을 물로 채우지만, 마르는 것은 서서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빠르다. 남의 시선을 위해 화려하게 포장한 모습은 금세 바닥을 드러낼 수 있다. 겸손한 자는 세상에 알려진 명성이 실제 모습보다 지나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관심의 방향을 안으로 틀어 자신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는 그대로 모습이 드러나기를 유념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부족 역시 직시하여 미흡한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평지는 그 위에 높은 산도 없고 밋밋하여 우습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속에 거대한 산이 박혀 있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자신의 부족을 고쳐나가 내면을 꽉 채운 겸손한 사람은 수준의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모두 감동을 줄 수 있다. 겸손의 결과를 『주역』에서는 ‘君子有終(군자유종)’이라 하여 결국 자기 모습을 이루어 유종의 미를 거두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귀한 존재로 성장하므로, 형통하다고 풀이한다. 실제보다 지나쳐 보여 지는 것을 경계하고,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 지게 하여, 자신의 부족을 채워 나가는 것이 제대로 겸손 하는 방법이다. 근본에 힘쓰면서 자기답게 살아, 작게는 자신에게 크게는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비결, 매 순간 겸손을 새기면서 제대로 겸손을 실천하는 데서 출발한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몽니와 추앙

몽니와 추앙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다만 묻혀 있던 단어를 누군가 되살려 쓴 뒤 활용되는 점이 닮았다. 몽니는 어느 정치인이 쓰며 존재감을 만천하에 새로 드러낸 고유어다. 추앙은 최근 TV드라마 작가가 새롭게 살려 쓴 덕에 대중의 관심을 받는 한자어다. 평소 잘 쓰지 않던 말들의 먼지를 털어낸 언어 촉에 따라 일상으로 확실하게 등판한 것이다. 몽니보다야 추앙이 당연히 좋다. 견줄 표현도 아니지만,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이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의 급을 따르겠는가. 아무튼 요즘 떠오른 추앙만 봐도 책 속에만 잠자다 불려나와 재활용되는 말로 레트로 같은 유행을 타고 있다. 청춘의 고단한 현실에 겹치는 의미까지 덧대며 젊은이들이 즐겨 쓰니 외연의 확장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판을 돌아보니 언어를 오늘의 사용법에 어떻게 더 어울리게 쓸지, 날마다 쓰는 언어의 면면이 새삼 크게 닿는다. 몽니는 현실에서 안 만나고 싶은 말이다. 추앙은 현실과 좀 동떨어진 말이다. 그런 몽니와 추앙이 실은 현실에도 자주 출몰한다. 정치의 계절이면 몽니며 추앙의 어금니가 더 드러났으니 귀 씻고 눈 씻고 외면할 수 있다. 그런 정치판의 말판을 떠나 우리 일상을 봐도 닥치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비일비재한 몽니를 치우고 추앙을 다시 보면 새삼 깨우는 게 많다. 말이란 많이 쓸수록 본뜻보다 풍부해지게 마련이지만, 요즘 만나는 추앙은 일종의 즐거운 발견이다. 혹 “날 추앙해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 당혹감이 크겠지만 그냥 뜬금없다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까. 아무튼 위인이나 부모(드물지만 부모를 존경한다는 사람도 있다) 추앙에는 끄덕이지만, 주변의 장삼이사(張三李四) 추앙은 거의 없으니 갸우뚱하겠다. 그런데 재고할 것은 그 말을 건넨 상대의 상태다. 이런저런 피해로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을 찾고자 던진 말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터진 청이라면 추앙의 마음을 보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마음을 받아 다시 살아갈 힘이 솟는다면. 그렇게 보면 추앙은 어떤 대상에 바치는 순정한 마음이다. 예컨대 시나 그림이나 음악 같은 예술에 바치는 추앙도 있다. 그보다 이해와 배려를 담은 존중의 자세라면 일상 속의 다양한 추앙도 가능하겠다. 아부와는 다른 진정한 마음의 높임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일상에는 높임말이 지나치게 넘치는데 높임의 마음은 인색하고 적은 느낌이다. 그런 판에서 몽니를 줄이고 추앙을 늘린다면 기울어진 마음의 평형도 잡고 세상 골목까지 환해질 듯하다. 커튼을 열며 오늘의 추앙을 찾아본다. 오늘의 커피를 음미하는 소소한 즐거움처럼. 추앙이 사랑의 다른 형태로 곁에 선다. 오늘의 길에서도 새삼 추앙하고 싶은 풀꽃들을 만나려니.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메멘토 모리

아침 뉴스를 보다가 문득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Cus, 1904~1989)의 작품「 기억의 지속 (The Persisten ce of Memory)」이 생각났다. 중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달리의 대표 작품이다. 카탈루냐의 햇볕이 뜨겁게 이글거리던 날 바르셀로나에서 열차를 타고 피게레스에 있는 달리미술관을 찾아가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지나간 기억을 끌고 와서 흐르는 시간을 변형하려는 사람들, 이 남의 기억을 따라 하면서 거기에 자기 푯대를 세우려는 사람들, ‘망량문영(罔兩問景)’ 고사처럼 그림자의 그림자를 좇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무의식의 가상공간에서 자기 세상을 만들려는,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 「기억의 지속」을 보는 듯하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기억의 지속」은 달리가 28살이던 1931년에 그린 크기가 33×24cm인 소품이다. 여명인지 일몰인지 모를 애매한 시각이 수평선에 걸린 사막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는 모두 4개의 시계가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호박(琥珀)처럼 생긴 시계다. 시계 자판에 개미들이 득시글거리기는 하나 그나마도 이 시계만 제대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나머지 3개는 곧 흘러내릴 듯이 흐물거리며 축 늘어졌다. 그중 하나는 죽은 나뭇가지에, 하나는 테이블 모서리에, 나머지 하나는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살점 덩이처럼 이상하게 변형된 사람의 얼굴 위에 걸쳐져 있다. 이 그림들은 무의식의 공간에 흩어져 있는 각각의 기억들이다. 시계(인간의 삶, 또는 기억)가 녹아 늘어지든 멀쩡하든 시간은 계속 흐르며, 흐르는 이 시간 위에 영원한 건 없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죽음이다. 개미 떼가 오글거리는 호박처럼 생긴 시계에서 그 극명함을 본다. 호박은 보석이다. 보석 같은 삶에도 개미가 득시글거린다. 어릴 때 본 벌레와 박쥐의 사체에 달려들던 개미 떼의 기억을 달리가 여기에 옮겨놓은 것이다. 테이블에 걸쳐져 흘러내리는 시계 위에도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샤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는 듯 외로이 서 있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빨래처럼 걸린 시계, 이상하게 변형된 얼굴에서 녹아내리는 시계, 이 모두 흐르는 시간 위에 옮겨놓은 기억들이다. 이 변형된 얼굴에는 입이 아닌 코에 혀가 달렸다. 맛난 냄새를 맡던 코와 맛난 음식을 먹던 혀는 한통속이라는 뜻일까. 강렬한 속눈썹이 붙은 지그시 감은 눈은 무의식의 세계, 꿈꾸는 현상을 표현한다. 달리의 작품 「기억의 지속」은 자기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잘난 사람 큰소리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 앞에 겸손하라’ 외친다. 흐르는 시간 위에 영원한 건 없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화 다스리는 근본적인 방법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분노의 감정이 이는 상태를 ‘화난다’고 한다. 불처럼 뜨거운 분함이 일어나 열이 나기 때문에 ‘불 화(火)’자를 쓴 것이다. 분노가 사회에 만연해서인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킹 받네’라는 신조어가 유행한다고 한다. ‘열 받다’에 킹(KING)을 붙여 극도로 화난 감정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화는 없을 수 없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부정한 모습을 보고 화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다만 마음에 쌓아 두거나 극단적인 표출은 개인적 화병과 사회적 범죄로 이어진다. 다스리지 않는 화(火)는 화(禍)를 불러온다. 고전 <논어>에서는 ‘분사난(忿思難)’이라 하여, 화가 나더라도 마주하게 될 곤란한 상황을 생각하며 절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못 표현하거나 지나치게 드러난 화는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 사소하게 시작된 다툼에서 화를 절제하지 못해 씻을 수 없는 결과를 맛본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다만 내키는 대로 화를 내어 닥칠 곤란 때문에 화를 다스리는 것은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다. 공자는 배움을 좋아한 안연이 ‘화를 옮기지 않았다(不遷怒)’고 극찬한다. 며칠 전에 났던 화를 시간을 달리하며 지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갑에게 났던 화를 대상을 달리하며 을에게 옮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의 원인은 마주한 대상에 있지, 자기 마음에 있지 않다. 자기 마음에 남아 있는 화에서 화가 옮겨지고 있다면, 대상과 무관하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남아 있는 화를 다스려야 적절하고 상식적으로 화를 낼 수 있다. 화가 나서 열이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우선 화를 표출한 뒤 겪게 될 어려움을 생각하며 화를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화난 감정이 지속돼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고 있다면 화난 감정에서 잠시 떨어져 화의 원인이 현재 마주한 대상에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화에 있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화가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화를 다스리며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수양의 노력이 필요하다. 맹자는 잃어버린 닭과 개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자신의 잃어버린 본심 찾을 줄 모른다고 비판한다. 거울을 닦아야 거울 기능을 할 수 있듯, 깨끗한 마음을 회복해야 화병에 걸리지 않고 극단적인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 처음에는 온 힘을 들여 닦아 내야만 때 한 겹을 겨우 벗겨 낼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닦기를 반복하면 힘을 점차 적게 들여도 거울을 맑게 해 지금 바로 여기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화내야 할 때 적절하게 화내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옮기지 않는 비결, 마음 수양에 달려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초록초록 새소리가

나날이 싱그러운 오월이다. 꽃 피고 잎 피고 매일매일 새 춤을 추는 나무들에 취한다. 자연의 순리라는 본성에 따라 본연의 소임을 다하는 나무며 풀들이 미쁘다. 어디선가 미사일이 터져도 우리 주변의 자연은 묵묵히 제 일을 펼쳐 가니 그 위안이 실로 크다. 어두운 뉴스 속에서 초록 아침을 맞으며 감사를 생각한다. 커튼을 여는 순간 한층 명명해진 초록에 눈 씻는 복이 새삼 귀하게 다가온다. 아직은 연두에 가까운 어린 새잎부터 먼저 나와 짙어진 초록 잎사귀까지 다함께 불러주는 오월의 노래다. 무슨 새소리를 초록초록 내는 것만 같아 귀마저 맑아진다. 며칠 전 공원에 옮겨 심은 나무들에게 부디 잘 견디라고 눈인사를 마구 보낸다. 집 안에 섬기고 있는 벵갈고무나무 새잎에도 살랑 입술을 건넨다. 그렇게 초록으로 눈과 귀와 마음을 헹구며 어깨 펴는 아침이 더없이 오붓하다. 그러고 보니 초록에는 육친 같은 느낌이 있다. 산 아래 마을에서 나고 자라며 늘 두르고 살아온 산빛 때문일까. 시멘트 숲에 둘러싸였던 한때는 숨이 턱턱 막혔다. 방 하나라도 온전히 누리고자 독립했는데, 창을 열면 이웃의 시멘트벽이 눈앞을 가로막곤 했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집 앞의 초록 인사는 얼마나 큰 호강인지. 그때는 그랬다고, 30년 전만 해도 다세대 주택가는 녹지가 아주 적었다. 지금은 쌈지공원이나 도로 꽃밭을 곳곳에 만들며 도시 미관도 많이 갖췄지만.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으면 조경이니 도시 디자인에 신경 쓴다더니 세련된 외모 뽐내는 건물 사이에도 초록이 많이 늘었다. 그럼에도 더 많은 나무, 더 푸른 숲을 기대한다. 땡볕 아래 걷지 않도록 그늘 넓은 가로수가 고루 갖춰지길 고대한다. 나무그늘 좋은 길은 걷기 편하고 맑은 공기도 그만이지만 도시 경관을 수려하게 만든다. 매연과 간판과 요란한 불빛에 지친 눈의 피로 씻어주는 데도 변함없이 일등공신이다. 초록을 희망의 상징으로 삼아온 것도 그렇듯 오래된 자연의 힘에서 연유할 것이다. 되짚어보니, 신록 예찬이 창창했던 예전의 좋은 산문들 또한 덕성 많은 초록에 대한 겸허한 감사였다. 초록의 품을 받들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좋은 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마지막 한 줌을 넣고 갈 수는 없을까. 수목장도 점점 어려워지는 판에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전혀 불가능한 바람일는지 톺아보는 것이다. 더 널리 초록초록 뿜어 펼치라고 비는 마음만 나무 밑에 담아두고 싶건만. 나의 나무 하나 지상에 심은 양 기대서는 오월 아침, 초록을 흠향하듯 깊이 마셔본다. 초록의 싱싱한 향이 걷는 사람들 발소리를 들어 올린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

시간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심히 오락처럼 시계를 바라본 적 있는가. 없다면 조용할 때 그렇게 시계를 한번 들여다보면 필자처럼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지 모른다. 디지털이 아닌 초침·분침·시침이 움직이는 아날로그 시계여야 한다. 종종걸음 하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숨이 막힐 듯한 압박을 느낀다. 겅중겅중 뛰는 분침을 보고 있으면 뭔가에 쫓기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움직임이 거의 없는 시침을 바라보면 속이 터질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이것이 열심히 일하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현재 ‘나’의 모습이다. 우리는 늘 그렇게 무엇에 쫓기듯 오늘을 살고 있다. 많은 철학자와 선지식인들이 과거와 미래를 잊고 오늘 지금 열심히 살라고 했다. 과거와 미래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미래가 없으면 희망이 없고 과거가 없으면 성찰이 없다. 과거와 미래를 버리라는 게 아니라 부질없는 미련(과거)과 욕망(미래)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경고다. 오늘 현재를 충실히 살면 반드시 오고야 마는 내일이 되면 어제의 오늘은 과거가 된다. 또한 반드시 오게 되는 내일은 오늘의 미래다. 결국 과거와 미래는 ‘오늘’이 만든 결과다. 지난 일에 미련을 두고 다가올 미래를 고민하며 오늘을 소홀하게 하면 과거도 미래도 함께 희생당한다. 오늘이 없는 사람에게는 과거와 미래도 없다. 그저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일 뿐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1989년 톰 슐만(Tom Schulman)의 소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원작으로 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개봉되자 한동안 이 말이 유행했다. ‘오늘 지금을 즐겨라’는 뜻이다. 명문 웰튼 아카데미에 새로 부임한 국어 교사 존 키팅과 제자 6명이 벌이는 이야기로 틀을 깨고 자유로운 이상을 가지라는 교육소설이다. 출세를 위해 틀에 박힌 교육을 받는 제자들에게 키팅이 “카르페 디엠!”하고 외친다. ‘카르페 디엠’이란 말은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시에 처음 등장한다. 『송가(頌歌, Odes)』 제1권 열한 번째 작품 「묻지마라, 아는 것이」의 마지막 구절이 ‘내일은 믿지 마라.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다(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민음사, 2021, p.33). 이 말은 단순히 먹고 즐기자는 게 아니라 오늘(지금)에 충실해야 아름다운 과거도 희망찬 미래도 생긴다는 의미다. 호라티우스는 제1권 세 번째 작품 「그렇게 너를 퀴프로스의」의 마지막 구절에서 ‘인간에게는 못 할 일이 없었다 / 우리는 어리석게도 하늘을 도모하며 / 우리의 범죄로 유피테르가 / 성난 번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민음사, 2021, p.20)라고 했다. 유피테르(Jupiter)는 로마신화의 최고신이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다. 인간의 욕심이 도를 넘으면 신이 벌을 내린다. ‘미래의 창고’를 채우려는 마음이 욕심이다. 카르페 디엠은 미래의 창고를 채우려고 ‘오늘(지금)’을 소홀히 하면 미래의 창고는 텅 빈다는 지혜를 담은 시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금슬 좋은 부부를 위한 관계윤리

결혼식에 가면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 까지’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부부의 연을 맺어 한 평생 함께 하며 가정화목의 근간인 부부 화합을 이루라는 축원의 말일 것이다. 부부 관계는 당사자 둘은 물론, 자식들과 양가 부모형제, 친인척, 지인 등 주변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조화롭게 할 필요가 있다. 고전 『맹자』는 부부 간에 지켜야 할 관계 윤리로 ‘별(別)’을 강조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남자 혹은 장자 중심의 사유가 주류 세계인식으로 등장한 이후, 고전이 사유문화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이론근거로 활용돼 역할의 구별이나 지위의 차별을 뜻하는 의미로 곡해되기도 했다. 본래 한자 ‘별’은 높고 낮음, 귀함과 천함의 가치가 들어 있지 않은 구분과 차이를 의미한다. 부부 사이에서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름이다. 다름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관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의 자세다. 물론 다름을 존중한다고 각자의 다름을 무한정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부부는 매일 마주보며 생활하는 관계이므로, 나의 다름은 반드시 상대의 다름과 만나게 돼 있고, 때론 충돌한다. 태극기 가운데는 음과 양이 짝하고 있다. 음이 극대화 되거나, 양이 극대화 되더라도, 음과 양은 서로 없을 수 없다. 이것이 ‘대대(待對)’의 관계다. 대대는 나와 너의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돼 서로의 권리를 n분의 1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어느 하나 없을 수 없고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아래, 상황에 맞게 서로 살리는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이상이다. 서로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인륜이 시작인 부부관계는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실천 노력이 필요하다. 배우자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 크고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으면 실망도 커져 관계 회복이 어려워질 수 있다. 상대방이 수준 높은 인격을 갖춘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되어가는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상대방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하면 절망하고 감정마저 차가워질 수 있다. 그렇다 보니 그대로 갚아준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선을 긋고 법적인 부부로만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거나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헤치고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어떻든 스스로는 바르게 행동해 자신의 자존을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 물론 배우자의 변화 여부는 상대방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다. 객관적 한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 조화로운 부부 관계를 위해 일상에서 진정성 있게 노력하는 것은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작이 될 수 있다. 거문고와 비파의 서로 다른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감동적인 음악이 되듯, 서로 다른 존재가 인연을 맺어 다름을 존중하고 다름과 조화하며 금슬 좋은 부부 사이를 이루는 비결, ‘별’의 관계 윤리를 실천하는 데서 시작한다. 고재석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개-라는 발견에

개가 무슨 죄인가. ‘개’를 붙인 명칭들 앞에서 했던 생각이다. 왜 개를 함부로 붙여왔을까. 개에게 묻지도 않고 허락도 안 받고. 개에게 미안해, 그런 심정도 있었다. 대상에게 묻지도 않고 마구 붙여온 시의 비유들처럼. 언젠가 〈개 같은 내 인생(1985)〉에 놀라 비디오를 찾아본 적이 있다. 스웨덴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영화였는데 재개봉(2021) 영어 제목도 ‘My Life as a Dog’다. 이런 제목에서 우리의 정서나 언어 습관이 짚이는 것은 개에 담아온 폄하 때문이다. 표준어사전에서 개-접두사를 찾아보면 예전부터 써온 낮춤의 표현이 다양하게 나온다. ①‘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금 ②‘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꿈. ③‘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망나니. 그런데 개를 왜 낮춤의 접두사로 많이 써왔을까. 더 찾아봐야겠지만 무엇보다 말맛이나 폄하 효과가 큰 데서 비롯됐을 듯하다. 욕에 붙인 개는 말할 것도 없고, 개만도 못하다는 표현까지 한결같이 낮춤의 효과로 활용해온 것이다. 아무리 봐도 좋은 뜻의 개-접두사 활용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개-접두사의 남용을 다시 보면 반려견 동반자들이 집단적으로 불만을 제기할 법도 하다. ‘개는 훌륭하다’는 TV프로그램도 있은 판이니. 그럼에도 오랫동안 자리 잡은 말들은 쉬 바뀌지 않는다. 개오동, 개살구, 개복숭아 등에서 보듯 ①의 예는 여전히 많고, ②나 ③의 예도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개를 사전의 풀이를 뒤집는 뜻의 유행어가 획기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개좋아’ ‘개웃겨’처럼 개-접두사를 최고의 표현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 또한 젊은 층 특유의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신조어 놀이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개를 낮춤으로 써온 기성세대는 선뜻 따라 쓰기도 어려운 개-접두사의 대반전이다. 말은 언중(言衆)이 쓰는 대로 시대를 타며 변한다. 최근까지도 수많은 말이 새로 나와서 무슨 뜻이고 활용인지 기울여보면 사라지기 일쑤였다. 새로운 말 사용법을 채 익히기도 전에 새 말이 나오는 등 유행 주기도 짧아졌다. 그런 특성을 유념해도 개-접두사만큼 놀라운 전도가 또 있었을까(좀 다르지만 욕을 부사로 즐긴 예도 있었다). 한편으론 개의 반전에서 통쾌함을 맛본다. 그 착하고 예쁜 개를 왜 비하에 써왔느냐는 항의도 살짝 느껴진다. 늘 쓰는 말에도 사람 중심의 편견이 얼마나 많이 깊이 들어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개좋아! 비슷한 부사(아주, 매우, 무척) 이상의 말맛이 분명 있다. 하지만 개를 안 붙여도 참 좋은 화양연화 같은 나날이다. 새록새록 피는 꽃과 잎만 봐도 눈부실 때, 덩달아 환히 피길 빌며 길을 나선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미네르바의 올빼미

제우스와 사랑을 나눈 메티스가 임신하자 예언자가 “메티스에게서 태어날 아이는 제우스보다 더 지혜롭다”라고 예언한다. 이 예언을 두려워한 제우스는 메티스가 낳은 아이를 얼른 삼켜버렸다. 곧바로 머리가 터질 듯 아파 제우스는 황급히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에게 자신의 머리를 가르라고 명령한다. 머리를 가르자 한 손에 창을, 다른 한 손에 방패를 든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가 뛰쳐나왔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지키는 이여신이 로마 신화에서는 미네르바(Minerva)로 불린다. 지혜를 얻으려면 자신의 머리를 깨는 만큼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이 신화가 보여주고 있다. 지혜와 철학의 여신 미네르바(아테나)는 올빼미로 상징된다. 관념론 철학자 헤겔은 자신의 저서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녘이 지나면 날개를 편다”라고 했다. 지혜를 무기로 자신을 성찰하라는 의미다. 일상으로 분주한 낮에는 잊고 지내다가 그 일상을 내려놓는 어둠이 찾아오면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을 되돌아본다. 장자는 지혜(道)를 나비로 상징했다. 장자가 말한 ‘오상아(吾喪我)’가 도추(道樞)며, 이 도추에서 樞(지도리)가 나비 모양으로 생겼다. 吾(오)는 지혜로 뭉친 참 ‘나’며 我(아)는 분주한 일상으로 위장한 허상의 ‘나’다. 허상의 나‘我’를 죽여야 참 나‘吾’를 본다. 밝은 낮에는 볼 수 없으나 그 일상이 사라지는 어둠이 찾아오면 비로소 참 나를 볼 수 있다. 지도리(나비)처럼 양 날개가 균형을 이룰 때 올바른 지혜의 눈(道)을 뜬다. 제우스의 머리를 깨고 나온 미네르바의 올빼미와 닮았다. 인간의 실존 세계를 그린 작품으로 평가받은 손창섭의 단편소설 〈인간동물원초人間動物園抄〉 (‘문학예술’, 1955년 8월호)를 보자. 매일 반복되는 원초적 본능만 존재하는 감방에 갇힌 죄수들의 일상을 그린 소설이다. 이들이 기다리는 유일한 희망은 창살로 막은 감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일이다. 변하지 않은 일상이 반복되는 감방과 달리 푸른 하늘과 매일 변하는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이들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이 창문은 인간에게 좁은 울(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의식 변화로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이며 장자의 나비며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다. 라파엘로가 그린 명작 ‘아테네 학당’ 광장에는 머리를 깨고 나온 미네르바의 올빼미들이 날고 있다. 지혜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지키고 가꾸라는 교훈이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통합의 정치 실현, 생각부터 다르고 바르게

대선 이후, 통합의 정치가 화두가 되고 있다. 성별세대지역의 지지율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득표율도 0.73%의 근소한 차이를 드러내어, 역대 대선에서 찾아보기 힘든 혼돈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여든 야든 아쉽게 석패 했기에 위안을 삼거나, 어쨌든 이겼기에 승리에 도취해서는 안 된다. 분열된 국론의 통합 없이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다행히 정치권에서 대결과 정쟁의 태도를 자제하고 상생과 화합의 정치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노력으로 정책과 제도를 보완하여 통합하는 것은 시급하고 필수적인 조치이다. 하지만 거시적인 대안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국민 개개인의 자율적인 인식 전환은 효과가 더디더라도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 쪽과 상대 쪽을 갈라치기 하고, 상대를 배척하는 편협한 자세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이 바로 서야 행동이 일관되게 상식적일 수 있다. 사람들은 악취를 맡으면 코를 막고, 꽃을 보면 좋아한다. 물론 반대 경우도 있다. 예쁜 꽃을 싫다 하고, 나쁜 냄새를 향기롭다 여기는 경우이다. 대상과 만나 생각이 드러나는 순간, 욕심이 개입되어 착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살피고, 옳은 생각을 간직하는 실천이 요구된다. 다만 선현 율곡은 성학집요에서 나쁜 생각이 들더라도 좋은 생각을 하려 하면 선한 생각을 그나마 간직할 수 있지만, 노력해도 잘 안 되는 것이 부념(浮念)의 제거라고 하였다. 부념은 현실과 무관하게 마음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홀연히 사라지는 쓸데없는 생각이다.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이를 알아차리고 가볍게 물리친 후 마음을 수습하여 이끌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논어에서는 때가 낀 거울처럼 지금 이 순간을 바로 비추지 못하는 쓸데없는 생각의 결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일에 대해 섣부른 예단을 하는 경우이다. 사사로운 의도도 없고(毋意),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도 없어야 한다(毋必)고 하였다. 일이 발생하기 전에 그럴 것이라는 예단을 하게 되면 점차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마음으로 확장된다. 이런 상태에서 일을 마주하면 자기만의 편견으로 판단하여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일어났던 과거 일에 대해 고착화된 편견을 지니는 경우이다. 고집하는 것도 없고(毋固) 자기에만 갇히는 것도 없어야 한다(毋我)고 하였다. 일이 발생한 후에 마음에 편견이 남아 있으면 점차 자기에만 갇히게 된다. 상대가 변화 했음에도 과거에 머물러 관계맺음을 할 수 없다. 맑은 거울은 마주한 대상을 온전히 비추다 대상이 바뀌면 이전 사물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새로운 대상을 비춘다. 마음도 거울처럼 지금 바로 여기에만 감응하는 것이 본질이다. 겹겹이 쌓인 먼지와 때를 닦아야 거울 기능을 할 수 있듯, 마음에 남아 있는 쓸데없는 편견을 제거하여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주변 존재를 바로 보아 화합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다름과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어 통합의 정치를 이루는 근본적인 시작은 생각부터 다르고 바르게 하는데 달려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손 손 손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랬더니 상대가 꼭 잡더라고. 그 말이 여러 생각을 불렀다. 손잡기가 예사 인사지만 한동안 뜸했던 사이라 돌아뵈는 것이다. 말없이 서로의 밀린 마음을 나눴다는 것일까. 손은 잡는다는 것. 악수가 우리 전통 예법은 아니라도 일상의 인사법이 됐다. 다 알다시피, 손을 내어 마주잡는 악수는 믿음과 우애의 표현이었다. 내 손에는 무기가 없소라고 빈손을 내보이며 맞잡은 게 서양식 악수의 유래라고 하듯. 퀘이커교도의 평등주의, 평화주의 운동에서 악수가 더 퍼졌다는 말도 있다. 칼이 없다는 표시든, 잘 지내자는 표현이든, 손잡기에는 서로의 마음을 함께한 세월이 들어 있다. 그런 악수를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당신의 책을 사들고 온 독자의 사인 요청에는 기꺼이 응하면서도 악수는 웃는 것으로 사양했다. 오만 운운하는 수군거림에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네 전통 인사법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것, 서양식 악수를 사절하는 철학이었다. 남이 어떻게 보든 상관 않고 소신껏 행동하는 모습은 당시 신선해 보였다. 지금도 전통 인사법만 고수하는지는 확인 못해서 장담할 수 없지만. 악수에 불편한 기억도 따라 나온다. 문인들과 악수할 때 내 손이 거칠게 느껴져 악수를 꺼렸던 기억이다. 글 쓰는 남자들은 손이 왜 그리 부드러운지, 나도 모르게 물러서곤 했다. 강도 높은 쓰기노동이 느껴지는 펜혹의 손도 있었지만, 노동이라곤 모를 여린 손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다 자판을 두드리니 펜혹도 추억의 단어로 사라졌고 손의 느낌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물일 많은 여성들은 거칠어진 손에 나이가 더 드러나니 섬섬옥수도 한때의 관형어로 추억될 뿐이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라는 노랫말도 일깨우듯. 손잡기를 톺아보니 여러 의미가 닿는다. 적조했던 사이의 손잡기도 새롭게 보인다. 짧은 시간의 스침 속에 마음 주고받기? 꼭 맞잡아온 손은 이해해 같은 위로의 표현으로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반대편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인사라도 속이 좀 시끄러울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튼 누군가 손을 잡는 순간의 속마음 되짚기가 손의 중요성을 새삼 깨운다. 세간에는 더 크고 더 복잡한 손잡기가 오가는 중이니 복잡한 손잡기 너머 손절의 안팎도 다시 뵌다. 투표 전과 달라진 속내들이 그들 손에는 더 다양하게 묻어 다닐 것이다. 인간사 속의 손만 바쁘랴. 막 피는 꽃이며 풀이며 나무의 손은 더욱 분주한 철이다. 거기에 꽃다운 손잡기로 세상 골목이 환히 피어나는 모습을 얹어 본다. 그대 소매에 홍매화 향기가 시들기 전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봄빛 피는 공원에도 손을 내어 봄향을 귀하게 받아본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잘 익은 벼는 고개 숙인다

역경(易經)에 亢龍有悔(항룡유회) 盈不可久(영불가구)라는 말이 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더 올라갈 수 없으니 내려올 수밖에 없고, 무엇이든 꽉 채우면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계영배(戒盈盃)는 술을 70% 정도만 담을 수 있도록 만든 잔이다. 채우고 넘치도록 술을 따르면 그 잔을 든 사람이 쓰러진다. 비석(碑石)에 기록하는 비문(碑文)은 음각(陰刻)으로 새긴다. 비석 자체를 글자로 만들기 위해서다. 돌이 글자를 품었으며, 표현하고자 하는 글자는 모두 그 돌 안으로 들어갔다. 말하자면 비석의 몸인 돌 전체가 글자가 된 셈이다. 그래야 비석에 새긴 글자가 오래 살아남는다. 비석을 만들 때 돌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진 비바람을 맞는 건 글자가 아니라 글자를 품고 있는 돌이다. 비석 몸이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비문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만약 비석의 글자를 도드라지게 양각(陽刻)으로 하면 글자가 비바람을 먼저 맞게 돼 돌보다 글자가 더 일찍 사라진다. 지도자의 탄생 과정도 이와 같다. 도드라진 재주가 키운 힘으로 대중(大衆)을 끌어들인 지도자, 즉 재주가 많음을 앞세워 스스로 자신을 지도자로 만들면 쉬 부서진다. 올바른 지도자는 대중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대중의 힘으로 만들어진다. 도드라져서 떠오르는 게 아니라 대중이 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면 대중이 크고 튼튼할수록 더 오래도록 남는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 대중은 앞서 언급한 비석의 돌과 같다. 양각이 아니라 음각을 하면 그 지도자는 대중이 존재하는 한 살아남을 수 있다. 대중의 품에 들어가는 건 도드라진 재주가 아니라 대중의 마음 여백에 넘치지 않게 담기는 겸손이다. 잔을 든 사람을 쓰러뜨리지 않는 계영배와 같은 술잔이 되는 일이다. 이게 어찌 지도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재주만 믿고 제 잘났다고 도드라지면 사람들로부터 쉬 잊힌다. 나의 잘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품게 만들어야 나의 존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내가 사람들을 이끄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나에게로 오게 하는 것, 여백(餘白)을 만드는 이 겸손이 올바른 존재가치를 만든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논어 선진편(先進篇)에 나오는 이 말은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라고 깨우쳐준 가르침이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사명’에 대하여

국가행정의 수장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언론에 사명이나 명운 같은 단어가 눈에 띄게 노출되고 있다. 후보자 모두 시대적 사명이나 정치적 숙명으로 출마했고, 국가의 명운이 선거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호소한다. 사명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뜻한다. 그 임무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자리에 올라 주어진 책임(責任)도 있고, 지위는 주어지지 않더라도 스스로 지고 있는 자임(自任)도 있다. 해와 달이 어김없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며 자기 역할을 해내듯, 우리는 크고 작은 책임이든 자임이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힘써야 한다. 자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천지의 자연적 본질이자 인간의 당위적 목표다. 아쉬운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 사명을 잘못 알고 있고, 알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사명이 무엇인지 자각하는 지명(知命)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자기 역량을 넘어서고, 자기 자리가 아님에도 자신의 사명이라 굳게 믿고, 자신만이 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면, 사명을 모르는 것이다. 금세 무너질 담벼락 옆에 서 있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말하는 경우와 같다. 욕심은 마음의 눈을 가려, 자신도 주변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를 망치는 길로 이끈다. 자신을 성찰하고 욕심을 제거해 자기 천성대로 살아가기 위한 수신의 노력이 요구된다. 사명을 알았거나 임무가 부여됐다면, 엄중하게 수용하고 굳세게 실천하는 외명(畏命)의 자세가 수반돼야 한다. 욕심에 혹은 중압감에 주저하거나 외면하면 자기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엄숙하게 자신의 사명을 수용하고 사명 완수를 위해 매진해야 한다. 사명의 실현 과정은 순조롭지 않을 수 있다. 진심이 곡해되고 비난이 점철돼 외로울 수 있다.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한다. 주어진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하다 보면, 객관적 한계인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이상이 실현되는 것도 명이고, 중도에 좌절되는 것도 명이다. 운명은 시도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대충하고, 요행만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자기 사명을 자각하고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임무를 다할 기회를 얻으면, 성급하게 성과를 내려 하기 보다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고, 차근차근 해나가야 한다. 사명은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알 수 있고, 굳센 실천을 지속하는 사람만이 바르게 할 수 있다. 맑은 마음을 회복해 자기 천성을 자각하고, 결과에 상관없이 사명의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가 선출되고 다듬어져 국가의 명운이 한층 더 밝아지기를 희망한다. 고재석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3월의 자세

새뜻한 3월. 새 맛은 역시 3월이다. 한 해 시작인 1월보다 출발의 느낌을 더 새롭게 깨워낸다. 그래서 자세도 새로 가다듬고 걸음도 더 바르게 걸어야 할 것만 같다. 새 책, 새 공책, 새 학년이니 입학 같은 새로운 출발의 큼직한 단위나 기억들이 오래 작동하는 까닭이겠다. 사실 2월은 쉬어가는 달처럼 조금 느슨히 보내기 쉽다. 2월 봄방학을 두던 우리네 학기 운용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2월은 이삼일이 짧아서 미처 못 다한 일도 봐주고 싶어진다. 여느 달보다 짧은 만큼 아량은 더 있는 셈이랄까. 그렇게 2월 보내고 3월의 입구에 서면 긴장감이 확 몰려온다. 자, 이제 본격적인 출발인데 무엇부터 어떻게 실행해야 하지? 묵은 먼지를 털며 괜히 서성이다 주변 공기마저 팽팽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듯 마음 다잡게 하는 무슨 채근이 3월에는 더 있는 게다. 예전에는 3월이 싫었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흙길 때문에 더 그랬다. 신발이며 바짓단에 진창이 들러붙기 일쑤라 풀이 자라던 가장자리만 딛는 발자국들로 새 길이 날 정도였다. 질척거리긴 마당도 마찬가지여서 봉당이며 댓돌까지 묻어 다니는 흙들에 비질이 바빴다. 그러던 3월 진창길 대신 지금은 미세먼지로 괴롭다. 온화한 봄날의 복병인 미세먼지군단. 제국의 점령처럼 뒤덮던 황사보다 더 치명적인 미세먼지 예보에 걱정이 앞선다. 오미크론 대확산까지 겹친 먼지세상이라니 암울하다. 벌써부터 눈과 목이 따끔대는 노약자나 기저질환자는 봄을 또 어찌 살아낼 것인가. 그런 중에도 꽃소식은 여전하니 3월을 새롭게 만드는 즐거움이다. 얼음 속에 먼저 피는 이른 봄꽃들 뒤를 따라 우리 산하를 피워낼 꽃들이 골목골목 즐비하다. 간간이 치는 꽃샘추위쯤 다 물리치면서 봄꽃들은 그렇게 희망을 피워 새록새록 건넬 것이다. 어김없이 새 꽃을 피워내는 자연에 우리는 또 사람이 못 주는 꽃 위안을 받으리라. 특히 올 3월은 사람 꽃이 환히 피길 바랄 테지만, 그와 다르면 어느 꽃도 꽃이 아닐 것이다. 내 마음의 꽃이 펴야 정작 참다운 꽃봄이라고 환대하듯. 그나저나 3월은 춘삼월이다. 웅크렸던 어깨 펴고 나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조금 풀어진 채 보낸 2월을 털고 달력을 펼쳐본다. 무엇이든 시작하라고 곧 많은 프로그램이 손짓을 더할 것이다. 덩달아 우리의 설렘이나 들렘도 뭐가 새로이 할 만한 일인지 눈을 밝힐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든 도전의 재도전이든, 코로나 시국에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챙겨 나서리라. 지쳤다고 주저앉아 바이러스 탓만 하며 우리 앞의 시간을 그냥 보낼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추켜보니 바닥났던 기운이 좀 솟는다. 세상사 마음먹기 달렸다고, 너 자신을 피우라는 어린 꽃망울들의 채근도 들리는 듯싶다. 멀리 꽃피는 소리에 다듬어보는 봄맞이 자세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상대의 언어로 대상 바라보기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觀點)에 따라 사물(事物)의 모습과 내용이 달라진다. 관점이 다른 여러 사람이 본다면 이 사물은 여러 개 모습으로 각기 다르게 보일 것이다. 같은 사물을 보는 데도 관점이 다르면 이처럼 대상이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하나의 사물을 두고 사람마다 달리 말하는 건 관점이 달라서다. 낱낱으로 나뉘면 모두 진리라고 주장하나 총화(總和)로 보면 이처럼 오류로 뭉쳐있다.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 혼돈과 혼란을 일으켰다. 올바른 관점은 내가 아닌 상대의 언어로 대상을 바라볼 때 생긴다. 장자(莊子)가 이걸 보았다. 남쪽 바다 임금 숙(儵)과 북쪽 바다 임금 홀(忽), 그리고 중앙 땅을 다스리는 임금 혼돈(渾沌)을 등장시켜 장자는 장자의 혼돈 이야기로 이 문제의 답을 만들었다. 숙홀(儵忽)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숙홀은 숙홀하다의 어근(語根)으로 홀홀(忽忽)하다라는 형용사의 뿌리 말이다. 뜬금 없다거나 조심성 없이 가볍다, 혹은 빠르게 달린다고 할 때 이 말을 사용한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숙과 홀이 가끔 중앙의 혼돈 땅에 모여 즐겁게 한담하고 간다. 혼돈은 귀눈입코가 없다. 마치 풍선처럼 생겼다. 귀눈입코가 있는 숙과 홀은 겉으로 보고 듣고 맛보며 세상을 알지만, 혼돈은 귀눈입코가 없으니 속으로 상대의 언어를 듣고 사물을 보며 마음으로 음식 맛을 봄으로써 세상을 이해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숙과 홀이 혼돈에게 하루에 한 개씩 구멍 일곱 개(귀눈입코)를 뚫어준다. 마지막 일곱 번째 구멍을 뚫자 혼돈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혼돈이 사라진 이때부터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숙홀혼돈이 사는 곳은 바다와 땅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혼돈을 중심에 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겪어야 할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혼돈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각기 생각과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장자는 이를 피할 수 없는 가치로 보았다. 부정이 아닌 긍정의 시선으로 혼돈을 정의(定義)한 것이다. 여기에서 장자는 자신의 언어가 아닌 상대의 언어로 대상을 바라보았을 때 그렇다는 지혜를 이 이야기에 담았다. 숙과 홀이 자기들 관점에서 구멍 일곱 개를 뚫어주자 혼돈이 죽어버린 건 그렇게 하면 세상이 혼란에 빠진다는 경고다. 나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의 언어로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우리는 나무를 보고 나무라고 하지만 정작 나무는 자신의 이름이 나무인 줄 모른다. 인간의 언어로 나무를 정의 내리고 그렇게 믿으라며 강요한다. 나무를 바라볼 때는 나무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 나무도 우리처럼 자유로운 생명으로 자라고 있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며 그렇게 해야 관점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하며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가 있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일에서 큰 성과를 이뤄내는 지름길

어떤 일을 할 때 뜻한 바를 이뤄내면 스스로의 성취감에 뿌듯하고 남들의 인정에 기분도 좋아진다. 그런데 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쉼 없이 다그치며 조급해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한다. 아마도 성과도 없고 방향도 잃어서일 것이다. <논어>는 말한다. 빨리 이루려 하지 말고 조그만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빨리 이루려 하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조그만 이익을 탐하면 큰 일이 완성되지 않는다. 자하가 노나라 지방 도읍 행정을 책임지는 지위에 오른 후 정치의 요법을 물어오자, 공자는 명분을 바로잡고 솔선수범하며 경제와 교육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 등 중요한 것이 많음에도, 원대한 포부를 지니지 못한 제자의 단점을 직시했다. 또 빨리 이루려 하거나 작은 이익에 연연해 하면 성과도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책의 방향도 상실하게 됨을 경계했다. 성과에 주목해 성급히 무리하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흉기로 돌변하듯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일을 도모할 때 남들에게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일을 조급하게 추진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가시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긴 안목을 가지고 본질에 힘쓸 필요가 있다. 물론 원대한 목표를 유념하고 있더라도,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할 수 있다. 이상만을 바라보며 빨리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욕심 부리다 보니, 현실을 소홀히해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현실 상황과 한계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할 수 있는 범위와 해야 할 목표를 엄밀하게 구분해 현실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목표에 근접할 수 있다. <맹자>를 보면, 알묘조장 고사가 나온다. 송나라 어떤 사람이 모내기를 한 후 벼 이삭이 늦게 자라자, 조급한 나머지 논 속의 흙을 돋운 뒤 모를 뽑아 그 위에 다시 심었다.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벼 이삭이 빨리 자라도록 돕느라 힘든 하루 보냈다고 큰소리쳤다. 아들이 급히 논으로 달려가 보니 벼 이삭이 이미 말라 죽어 있었다. 맹자는 벼가 자라는데 도움 될 것이 없다고 버려두는 자는 돌보지도 않는 자이고, 억지로 조장하는 자는 벼 이삭을 뽑아 다시 심는 자이므로, 모두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판한다. 그리고는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성과를 미리 기약하지 말고, 마음에서도 잊지 말며,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경계한다. 빨리 이루려 욕심내면 오히려 성과를 내지 못하고 목표를 이루지 못할 수 있다. 일의 방향성을 늘 유념하되, 인내심을 갖고 본질에 힘쓰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야 한다.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중요한 직책을 맡으면, 성과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앞서 조급해질 수 있다. 그럴수록 조급해 하지 않는 것이 더디지만 위대한 성과를 이뤄내는 지름길임을 <논어>는 말하고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샛길

그냥 새버릴까 샛길을 보면 문득 만발하는 생각들이 있다. 그것도 매양 반복되는 출퇴근길에서라면 더더욱. 하지만 대개의 샛길은 바라보다 돌아서는 한숨의 사잇길이다. 위험할 수도 있는 샛길이 그토록 마음을 헤집는 것은 평소와 다른 길의 유혹 때문일 것이다. 샛길은 새고 싶은 마음만 아니라 빨리 가려는 욕망도 부추긴다. 샛길이 공원에도 많이 생기는 것을 보면 그런 심리가 더 보인다. 공원 안의 길은 기존의 보행 노선을 고려해 잘 배치했지만 어느새 질러가는 샛길이 난다. 그것도 길옆의 잔디밭으로 지름길이 홀연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길은 본래부터 있었나 싶을 만큼 묵은 길맛이 제법 난다. 대부분 새로 난 길의 풋내를 풍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걸음의 흔적들이 매끈하게 다져진다. 본래의 길을 버젓이 놔두고 그 옆으로 오종종 생긴 자국들이 샛길로 위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군가 걷기 시작하고 따라 걸은 흔적들. 처음엔 따라 걷기도 망설여진다. 공원 안의 샛길이 대부분 잔디밭에 나 있는 까닭이다. 샛길의 유혹 앞에서 선뜻 못 들어서는 것은 지엄한 명령의 기억도 작용한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어린 시절 곳곳에서 눈을 부라리던 경고의 팻말은 얼마나 오래 가는 것인지. 그에 대한 저항으로 일부러 밟은 발길도 더러 있었다. 겨울 보리밭처럼 밟아줘야 잔디에도 좋다나. 하지만 잔디가 남아 있는 길은 미안스러워 머뭇대게 마련이고, 초록이 다 진 겨울에야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특히 시멘트나 벽돌 길에 발바닥이 아플 즈음이면 푹신한 잔디밭의 유혹이 아주 크다. 추운 마룻방에서 따스한 안방을 그리듯 흘끔거리며 바라보다 에잇 잔디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공원에 점점 늘어나는 반려견 산책자들 또한 다른 마음을 불러낸다. 그들이 거의 다 잔디밭을 마음껏 걷고 뛰기 때문이다. 개들이 끄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마지못해 잔디밭을 걷는지는 모르지만, 개 없는 산책자들 입장에서는 묘한 느낌이 든다. 견권이 인권보다 앞이던가? 누구든 잔디밭을 왜 걷느냐고 따지면 개가 사람보다 먼저냐고 나름의 응대를 장착하고 잔디밭을 걸어본다. 개들은 저리 마구 다니는데 사람은 왜 견제하느냐 준비했는데, 잔디밭 산책은 아무에게도 시비 당하지 않는다. 그것도 겨울 산책일 뿐, 봄여름가을이면 잔디밭은커녕 잔디밭 속 샛길조차 잔디에게 미안해서라도 못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샛길에 때때로 끌렸다. 낯설고 색다른 호젓한 샛길. 인적 드문 산속이나 들판에서 희미한 샛길을 만나면 따라 가고 싶어 설렜다. 무슨 생의 샛길을 꿈꾸다 다 지나오니 마음만 먼저 들떠 걷는 게다. 비유를 떠나 길 자체만 봐도 번다한 큰길보다는 호젓한 샛길의 매력이 크다. 더 들어가 보고 싶은 묘한 끌림과 울림. 그런 속삭임에 샛길이 자꾸 생기나 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우공(愚公)과 지수(智叟)

우공과 지수는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 고사(古事)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우공(愚公)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지수(智叟)는 지식을 쌓은 똑똑한 사람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바깥으로 나다니기 힘들게 마을 앞을 가로막은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을 우공이허물려고 한다. 산을 허문 흙은 수레에 싣고 700여리 떨어진 발해만으로가져가서 버려야 하는데 거기까지 한번 다녀오자면 거의 일 년이 걸린다. 나이 90에 이른 우공이 이 엄청난 일을 시작하자 지수가 참 어리석다며 비웃는다. 그러자 우공은 내 생애에 다못하면 내 자식이 할 것이고 내 자식이 다 못하면 내 손자가 할 것이니, 자자손손 대가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 두 산이 없어질 것이다라고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가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우리는 우공이산을 열심히 하면 반드시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으나 여기에 깊은 의미 하나가 더 숨겨져 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하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할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어리석지만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굳이 하려는 사람도 어리석다. 그러하므로 할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 할 수 없는 일에 손대지 않는 이가 참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모이면 버리는 일 없이 모두 제 할 일을 잘해서 세상의 결이 반듯하게 잘서게 된다.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한데 세상에는 내남없이 오만과 편견에 빠진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 제 일은 팽개쳐 두고 마치 제 것이기나 한 양 남의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입에 거품물고 훈수 드는 걸 정의로운 행동이라여기는 사람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그러다 급기야 내 편 네 편으로 패거리 지어 서로 다투기까지 한다. 이런혼탁한 세상이 올 줄 오래전에 예단한 열자(列子)가 우공(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지수(똑똑한 사람)를 어리석게 이름이 주는 의미를 뒤집어서이야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우공이산에 숨겨 놓은 이 깊은 뜻을 새기지 못하고 나만 할 수 있다며 여전히 오만과 욕망을 좇는다.어느 모임에 참석했을 때다. 독설가로 소문난 한 문학평론가가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했다. 지식인들이라 자처하는 분들이 들으면 언짢아할지 모르나 듣고 나서 가만히 새겨 보니 영 틀린 말은 아닌 듯해 나는 씁쓸하게 속웃음을 웃었다. 참지식인은 켜켜이 쌓은 지식(知識)을 말로 드러내지 않고 그 지식을 녹인 지혜(智慧)로 행동한다. 우공이산에 나오는 우공이 그러한 사람이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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