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마음이 뭐예요?” 지금도 내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단어 중 하나만 고르라면 ‘마음’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면면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수학이나 물리처럼 정형화됐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책 속의 선사처럼 냅다 상대방 뺨을 때리거나, 벼락같은 고함을 내지른다거나, 똥친 막대기다, 따위로 상대를 멍 때리게 할 배짱도 없다. 나는 그 학생에게 되물었다. “마음?” “네, 선생님. 마음이 뭔지 알고 싶어서요.” 내가 말했다. “방금 네가 마음을 보여주더구나.” 학생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저는 아무것도 보여 드린 게 없는데요?” “마음이 뭔지 알고 싶다고 했잖아?” “네, 그건 제 질문인데요.” “그 질문 속에 네 욕구가 있어, 없어?” “네, 뭔지 알고 싶은 욕구가 있죠.” “그 욕구를 마음이라는 표현으로 한번 바꿔볼래?” 학생이 혼잣말을 했다. “알고 싶은 마음, 듣고 싶은 마음...” 내가 물었다. “어때? 말이 돼?” 학생이 배시시 웃었다. “네, 말이 되네요.” “이제 마음이 보여?” “그러고 보니 제 욕구가 마음이군요.” “지금은 그렇지.” ‘마음’을 어찌 ‘욕구’라는 어휘 하나로 냉큼 대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네 마음을 보라’는 식의 가르침은 어린애한테 운전 면허증 안겨주는 격이다. ‘마음’이라는 표현만큼 대상의 구체성이 없고, 형상화가 안 되고, 눈·귀·코·혀·피부·생각이라는 감각기관에도 걸려들지 않는 언어는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기반에는 ‘욕구’가 있다. 욕구의 다른 말이 희망, 소망, 열망, 의지, 의도, 욕심, 욕망, 탐욕들이다. 소위 ‘싶다’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욕구로 인해 탄생했고, 살아왔고, 살고 있다. 말하자면, 당신이 ‘그건 내 마음이야!’라고 표현하는 그 속사정에는 대체로 ‘욕구’가 있다. ‘그건 내 욕구야’가 더 정직하다. 사실 마음이 그냥 ‘마음’으로 있을 때에는 바위가 그냥 바위로 있는 것과 유사하다. ‘바위’라는 단어 하나로는 어디에 있는 무슨 바위인지 알 수 없다. 어떤 개 이름 ‘루이’가 ‘루이’로만 있을 때는 뭔가를 지칭하는 이름일 뿐인 것과 같다. 그 녀석이 꼬리를 흔들며 움직일 때 멍멍 짖는 ‘개’가 된다.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마음’이 가만히 있는 건 추상적인 그 무엇이다. 움직여야 마음이다. ‘마음을 보라’고 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마음 공부’는 안개를 손에 쥐라는 말처럼 막연해진다. 일단 내면의 ‘싶다’를 보라고 하는 게 좋다. 그러면 마음을 바로 보고 알 것이다. 저 학생처럼. 김성수 한국글쓰기명상협회장
오피니언
경기일보
2022-09-29 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