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면 보이지 않아도 주변을 맴돌며 자신의 존재를 강약으로 전하기 위해 초목을 통하여 그 흔들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전한다. 긴 그리움을 무한의 허공으로 담아 ‘보고 싶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방(四方)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나도 보고 싶지만 내 존재는 보이지 않는 실체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속삭임만을 들으며 마음을 태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삶이 무겁고 힘들 때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고 내 삶이 희망과 환희로 넘칠 때면 춤을 함께 추다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가는 너를 오늘도 느끼고 싶다. 배수자 시인, 문학박사.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마음의 향기’ ‘얼음새 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등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가만히 만져 봅니다 손등으로 내려 앉는 가을 햇살을 낮달이 숨어보던 골 깊은 가르맛길 별 등을 하나 둘 매달던 그곳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채색되어 가는 들국의 눈빛으로 들꽃 한 아름 꺾어주던 애틋한 체온 짓궂게 놀려대던 그 머슴아이 바람결에 다가와 귀엣말 주고 갑니다 가슴속 뛰놀던 고향 길 냇가 희끗 히끗 정수리에 서리꽃 피어나고 까르르 웃음소리 들리는 듯 저만치 가다 뒤 돌아보면 잠시 앉아 쉬어가라고 송이 송이 들국되어 꽃등을 밝혀 줍니다. 조병하 ‘국보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소한 아침에 눈 시리게 맑더니 국화 한 송이 세상 속에 그림같이 피었다 천년 회상의 향기인 양 기다린 인내의 세월 속에서도 그 자태 찬연하다 그리움 하나 향기 속 노래 위에 날개를 달며 순백의 사랑은 샛바람을 타고 무리 지어 날고 돌인 듯 침묵한 꽃송이 한가운데 눈감고 짚어보는 지난 세월이 갈래 없다 가랑잎 구르는 인생의 갈급한 시간에 곱게 모은 결곡한 자태는 불현듯 가슴 치는 은혜의 빛 한줄기에 국화 향기 속에서 소망의 하루를 연다 민병일 수원 출생. ‘한국시학’으로 등단. 저서 ‘예술에 혼을 담다’, ‘민병일컬렉션’ 부산광역시문화상·봉생문화상·해운대문학상 수상. 부산시인협회,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좀벌레 퇴색한 가을빛을 띤 오래된 책갈피 사이로 숨 멎은 고요가 흐른다 묵은 햇살과 습기가 켜켜이 고여 들어 빛나던 시절은 누렇게 변해버리고 누군가의 손길도 사라진 지 오래다 짧은 시선조차 붙들 수 없는 닫힌 공간 속에서 아직도 푸른 나뭇잎 젖은 향기 붙들고 첫 인연의 만남을 수줍게 간직한 정지된 시간들 잊혀지던 슬픔은 낯선 손길을 기다리며 오래 묵은 인내의 참았던 숨길 열어 새로운 날갯짓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고은숙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사무차장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눈치 빤한 첫째 친정에 맡기고 아이는 둘인 척 문간방 이사하던 날 찬바람 잦아 들었다 석 달 뒤 첫째 등 뒤로 숨겨 슬그머니 들이며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으나 집 주인 알면서 모른 척 눈 감아준 걸 그 해가 다 가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고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오른 집은 아예 현관 손잡이 안으로 바꾸어 달고 고공 놀이에 취해 비틀거린다 코인 시장에 뛰어들어 미친 듯 광맥을 파 뒤집어 봐도 사계절 내내 눈이 내리고 출구는 빙판이다 공연한 심사로 걷어찬 개미집 식솔들 쏟아져 나와 떼로 덤빈다 개미는 집도 잘 짓고 새끼도 많이 낳아 잘도 기르는데 개미보다 더 휘어져가는 허리 대출 통장만 새끼를 키운다 등뒤로 아이 하나 감추고 싶다 최스텔라 <문파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폐사지 너머 동백 숲 그대 버리고 온 꽃 지던 숲에서 나는 아직 살고 있는 것 같아 봄꽃이 피었다는데 오래전 어느 하룻밤 불타 사라져 주춧돌의 자취도 희미해진 이름을 잊은 절터에서 때 늦은 눈보라를 혼자 다 맞던 사월 동백 숲에서 날아오르는 새소리가 하늘을 출렁일 때 눈 내리는 숲에서 울었지 동백꽃의 절명이 아파서 우는 거라고 꽃 지는 걸 못 견디겠노라고 오래 울었지 붉은 울음의 힘이 불탄 기둥 불러와 세우고 바람벽 둘러 만든 바람 사원의 기도 풀잎이나 물방울처럼 작아져 어디에 뿌리내려도 어디로 흘러가도 좋아 화엄의 구슬이 서로를 비추는 세상 어디쯤의 무엇이어도 좋아 산맥이 돌아눕는 겨울 폭설 속에 동백꽃이 피어나는 것은 바람 사원 한 채 우뚝 서기 때문이지 백향옥 강원 양구 출생 2021 불교신문 신춘문예 등단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푹푹 찌는 팔월에 비가 삼 일 밤낮으로 퍼붓다가 먹구름이 갈라져 햇빛 내리면 매미 울기 시작하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에 이끌려온 새들이 보이고 눅눅한 빨래를 햇볕에 널어두는 손들이 거룩하고 텃밭에서 상추와 쑥갓과 풋고추 따 밥상 풍성하고 당신은 바뀌는 괜찮은 징조의 풍경들을 묘사하고 묘사된 시를 읽으며 이 보물 같은 서정을 저장하고 시의 내용 이해했어도 간직하지 않으면 가치 없고 그것은 이 영원의 빛을 잘못 이해된 흔적일 뿐이고 그때 햇빛 속에서 새들과 매미가 내게 노래해주자 마치 물속으로 무거운 불행이 가라앉듯이 사라진다. 김영진 2017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달보드레 나르샤’, ‘옳지’, ‘봄’, ‘붉은 수염의 침대에서 자다’. 아라작품상,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막비시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보고싶다 사랑한다 말 한마디 못 하고 끄응 끙 앓으며 살아온 지난날 지나는 가을바람이 상사화라 했다던가 뎅그랑 뎅그랑 그윽한 풍경소리 행여나 그 님일까 뜬눈으로 지새우고 새빨간 그리움으로 타오르는 연정이여 김수기 ‘문예비전’ 등단 시집 ‘어머니의 세월’. 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인협회 교육이사 역임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아침을 깨워 드럼 치는 자 누구인가 귓전을 울리는 신기한 산 메아리 저 앞산 나무숲에서 열심히 연주한다 조용한 산속에서 신나게 뚜 뜨르르 공짜로 듣고 있는 나만의 음악 감상 자연을 노래하는 소리 연주자 딱따구리 조그만 숲속에는 새들의 야외무대 벅차게 숨차 오른 연둣빛 삶이 있어 청정한 자연의 풍경 공존함이 경이롭다 김순덕 『순수문학』, 『월간문학』 등단. 시집 『너는 해바라기 나는 바람』 외 2권. 홍재문학상 외 다수 수상.
오어사를 휘감고 있는 오어지 대장경이 켜켜이 꽂혀 있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아오를 듯 꿈틀거리는 검푸른 서기 지난날이 떠오르며 온몸이 오그라든다 두 손을 마주한다 경전들이 펼쳐지고 법문이 들린다 무애가를 부르는 원효가 보이고 삼태기를 쓰고 춤추는 혜공이 보인다 깊은 골짜기에 운무를 두르고 신화를 쓰는 운제산도 어른거린다 어느 날 사라졌다는 원효의 긴 칼이 물속에서 날카로운 칼날로 물을 베고 있는지 법문 소리 낭랑하게 들린다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오어지를 휘돈다 범종 소리가 가슴을 탁 친다 조영실 <한국시학>으로 등단. 국제PEN한국본부· 한국경기시인협회 수원문인협회 회원 중봉조헌문학상 수상
떨어지는 맛을 봐야 세상을 안다 바닥까지 치고 올라오는 공포에 맞서야 쫄깃한 세상을 본다 감당할만한 고통의 끝이 어딘지 온전히 나를 내어 맡기는 체념의 자리에 가봐야 세상을 안다 어긋나 아팠던 날들이 제자리를 헛돌아도 무게는 이미 허공의 것 중심 잡을 때를 기다려 볼 일 맞장 뜨는 마음가짐으로 내 몸 아닌 듯 멈춰질 때까지 던져보면 알 수 있을 삶의 무게 다시 사는 내가 다시 태어나는 내가 허공을 뒹굴다 멈춰진 중심 이승용 강원도 영월 출생.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춤추는 색연필’, ‘꽃이 피다’ 등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몇 시인가. 낙엽 쌓인 거리는 햇살 걷히고 시계 바늘은 마냥 헛돈다. 걷고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그 누가 어지럽게 돌려대는지 한 가닥 줄도 잡지 못했다. 팽팽하게 태엽을 감고 구두끈 질끈 묶고 종소리 기다려도 언제나 한걸음 늦어버린 시작 등 뒤에 박수 소리만 듣는다. 사방으로 뻗은 갈래 길에 앞서가는 걸음들 따라 숨 가쁘게 뛰다가 쉴 곳을 찿는다. 이제 몇 바퀴나 남았는지 머리끈 동여매도 눈앞은 뿌옇기만하다. 그대 시간은 몇 시인가. 헛 도는 내 시계 바늘은 오늘도 시간은 맞질 않는다. 한희숙 1985년 전국주부백일장 대상, <문파문학>, <경기수필> 등단. 경기여류문학회·한국경기시인협회·수원문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과 사물을 잠들게 하며 조용히 흐르는 물 어렵고 힘든 것이 인생사라는 것을 느낌조차 모른다 산전수전 겪는 것이 시간 속의 운명인 것을 그대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겸손함 내 목마름에 바가지가 된다 장경옥 <국보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제2회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시집 <파꽃>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천박한 땅에서도 견디고 논둑길과 산길에서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도 끗끗하게 생명력을 유지하며 당신은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가니 그 정신을 배우겠다. 어둠이 숲 뒤로 밀려나면 어린아이, 어른들, 연인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당신은 새벽부터 짓밟힘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하늘을 향하여 다시 일어선다. 당신의 끈질긴 삶의 자세를 바라보면 나약한 내 마음도 어느새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어둠을 환한 빛으로 변화시키는 표상(表象)으로 각인(刻印)이 된다. 배수자 문학박사, 제4회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마음의 향기’, ‘얼음새 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등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잊을 수 없는 잊어서도 안될 서리서리 피 맺힌 유월의 상처 온 육신이 찢기워 신음이 저승 문턱을 넘나들고 피가 내를 이루던 내 혈육들의 상처가 묻혀져간 유월 우리는 그 위에 배 터지는 풍요로 평화라는 명분으로 잔을 들어 축배를 주고 받았다 상흔조차 남지 않은 그 날의 상처 되새기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파오는 유월의 상처 땅속에 묻기 전 우리 가슴에 먼저 묻어야 했을 상처다. 김도희 황해도 사리원 출생. 한국문인협회·경기여류문학회·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봄 맞을 준비에 쓸데없이 시간을 다 보내어 버리고 돌아보니 봄은 벌써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는 봄을 퍼담아서 온통 노랑물에 취한 *봄마중꽃들이 미련퉁이 밤퉁이 비웃기라도 하듯 깔깔대며 만취한 봄을 송별하고 있었다 서둘지 않아도 될 텐데 난 또 주저앉아 얼마나 더 헛되이 생의 노란 봄을 기다리게 될는지 모른다 * 봄마중꽃: 이른 봄 산기슭에 피는 작고 노란 야생화 안서경 1986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유독 그곳만 환한 볕마루> 외. 국제PEN한국본부·양평문인협회·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개탄과 물로 달리는 증기 기관차 치익 칙 푸푸 기운 빠진 소리 60년대 경부선 중심지 추풍력 역에서 쉬고 있을 때 물 지게 진 할아버지 물 탱크에 물 가득 채워주면 다시 기운을 얻어 기운차게 달리던 기차 생계를 위한 직업이지만 힘든 기차를 움직이게 만든 위대한 할아버지 추풍령 역의 역사로 남아 지금은 물 저장고 중심으로 공원이 된 곳 물 지게 진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달리는 기차에 손을 흔든다 진숙자 충북 영동 추풍령 출생. <수원문학>으로 등단. 가톨릭 파티마 세계 사도직 상임위원 역임.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유년시절 십리 길 초등학교 다녀오는 친구 난 빠르게 우리 집 가게 왕사탕 한 알 배고픈 친구 주먹에 쥐어주네 친구가 집으로 가는 길 다람쥐 볼되어 수인선 철로 맛있게 건너가 새어머니와 산다는 집 앞 덜 녹은 사탕 아까워 아드득 깨물지 못해 철로길 서성대다 다 녹으면 들어간대 사회에서 다시 만난 친구 사는 날 달달하길 바랐는데 팔 다리 움직임 달라지는 몹쓸 병에 일찌감치 별빛 열차 타고 돌아가네 한 떨기 사탕 꽃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게 녹여내는 일 윤연옥 안산 출생. 인천문학상‚ 인천문화상‚ 에세이포레 문학상 수상.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협‚ 인천문협‚ 인사동시인‚ 시인마을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살며시 얼음 풀린 길 가운데 작은 웅덩이에 머물러 열여섯 소녀처럼 꽃앙울 여드름 다닥다닥 단 채 들떠 있는 벗꽃가지 비춰 주는 거울이었다가 목 마른 까치에게 물 한 모금 나눠 주겠습니다 조그만 연못가 가느다란 버드나뭇가지 끝에서 물속 키작은 올챙이와 숨바꼭질 하다가 호젓한 호숫물에 물무늬 만들며 기웃거리는 봄 바람 손 잡고 새끼오리들 고무 줄 끌기 놀이 함께하겠습니다 송사리 놀고 있는 맑은 냇물 길 따라 마음 깊은 강물 어깨에 기대어 지난 이야기 두런 두런 나누며 조용조용 큰 바다로 흘러갈 것입니다 황영이 충남 당진 출생. <국보문학>으로 등단, 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파란 대문 열고 들어서면 무너져 내린 흙벽 나무 청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들락날락하는 시골집 떨어져 나갈 듯 닳고 낡아 간신히 몸을 기대고 서 있는 부엌문 부뚜막에 나란히 걸린 가마솥 솥뚜껑에 앉은 뿌연 먼지 녹슨 채 세월의 무게 견디고 있다 눈물 콧물 흘리며 불 지피던 아궁이 메케한 연기 들이마시며 밥 짓던 유년의 기억 속에 노랗게 익어간 고구마, 은행, 알밤 내 허기를 채워주던 특별한 간식이 었지 수십 년 방치된 화로 형체 잃어가고 무성하게 자란 칡넝쿨 장독대 휘감 고 있다 이희강 충남 부여 출생 2018년 3월 문예비전 등단. 한국문인협회·경기시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