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는 단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은 반투명한 놀음이다. 흙과 씨앗으로 가득한 심장의 격정이 허공에 쌓인 건축물이다. 척박하다 한들 뿌리내려서 수액 빨아올리고 영양을 섭취한다. 어쩜 과감하면서도 단순하게 세상과 어우러지는지는 풍경이다. 손가락사이로 도망치는 사랑을 흙에 잡아두기 위한 주문이다. 청보리는 초록 언덕에 사랑이 몰린 봄밤의 콘서트장 카페이다. 김어진 시인 2017년 계간 ‘피토피아’로 등단. 시집 ‘달보드레 나르샤’, ‘옳지, 봄’, ‘항아리 속의 불씨’, ‘북은 수염의 침대에 자다’, ‘그러니까 너야’.
연초록 녹음이 짙어질 때 싱그러운 들녘엔 저마다 꽃향기 피워내며 눈부신 꽃 무리 함박웃음 터트린다 저 꽃들의 속삭임 침묵하기엔 연둣빛 함성의 갈채다 눈 시도록 파란 하늘 수많은 빛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희망 사랑 평안 용서의 빛 오붓한 한생生의 소망 그리며 5월에 그리워지는 어머니, 내 심령에 아름다운 빛을 담기 위해 엄마 품속 같은 5월의 숲으로 간다 허정예 시인 ‘문파문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시학’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시인마을’ 동인. 시집 ‘詩의 온도’
언어 이전의 혹은 언어를 넘어선 신비로운 현상들이 푸른 산야를 뒹굴며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5월 소리로만 보이는 뻐꾸기 노랫소리 밭고랑에 질펀하고 확장된 땀구멍의 반경은 점점 더 넓어진다 가쁜 호흡의 소실점에 걸리는 잎맥들 사이 마구마구 쏟아지는 빛들의 짙푸른 몽환 그 푸른 잎사귀들의 비릿한 속살 어루만지는 초하의 달큰한 바람은 낮은 언덕 넘나들며 초여름 노동의 캔버스를 덧칠하고 있다 임애월 시인 1998년 ‘한국시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그리운 것들은 강 건너에 있다’ 등 5권.
꽁꽁 얼어서 갈라지는 고난에서 얻은 생명의 이파리가 연두 물결 봄 윤슬로 반짝거리네 산과 들 잔설殘雪 치우는 바람결에 복수초가 데리고 오는 냉이랑 달래랑 종달새 노래 신바람 나도 좋소 하늘빛 찬란한 봄날 가난한 믿음에 화관花冠을 씌워주시거든 다 벗은 알몸으로 싱그러운 봄 들판에서 나투시는 주님을 보리라 정순영 시인 시집 ‘시는 꽃인가’, ‘조선 징소리’ 등 7권. 한국자유문인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등 역임.
봄햇살 좋은 오후 한나절 봄쑥 캐러 들로 나간다 보리밭 두렁에 앉아 마른 풀섶 뒤적인다 보들보들 어린 쑥들이 쑤욱 쑥 잘도 올라왔다 멀고 먼 옛날 어머니와 쑥을 캐던 시절이 생각난다 쑥된장국 끓여 호호 불며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시던 어머니의 호미손도 생각이 난다 그리움의 쑥 한 줌 캐어 들고 집으로 온다 된장 풀은 뚝배기에 그리움을 넣고 끓인다 구수하고 향긋한 어머니의 사랑이 온몸에 번진다 김수기 시인 ‘문예비전’ 등단. 수원문인협회,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시인마을’ 동인. 시집 ‘어머니의 세월’
반만 년 역사와 우리의 얼이 깃들어 숨 쉬는 곳, 붉은 해가 힘차게 아침을 밀어 올리면 갈매기의 노랫소리 하늘 높이 퍼지고 푸른 물결 출렁이며 춤을 춘다 東島 우산봉 西島 대한봉에 서려 있는 무궁화의 향기, 태극기의 기상은 혼과 혈이 담긴 우리의 애국가와 함께 온 세상에 우렁차게 퍼져 나간다 수수만년 자자손손 뜨겁게 손잡고 가야 할 우리의 땅 독도! 김도희 시인 시집 ‘나의 현주소’ 한국문인협회·경기여류문학회 회원 한국경기시인협회·수원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시인마을’ 동인.
첫봄 품은 목련나무 가지 끝마다 햇살 향한 새끼손가락 새하얀 면사포 씌워준다는 첫사랑 약속, 찬바람 이겨낸 햇살은 두꺼운 옷을 벗긴다 봄바람에 잠 깬 호숫가 잔물결처럼 일렁이는 가슴 안고 살포시 내딛는 발자국마다 이슬 머금은 초록이 물든다 땅속 초록뱀들도 몸을 풀고 온몸으로 싹 틔우는 향기로운 봄의 목소리 가슴을 활짝 열고 맞이한다 김경점 시인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수원문인협회 회원.
화단 옆 의자에 앉는다 볕 좋은 오후다 어디선가 바람 한 줄기 건너와 졸음을 쫓는다 외롭냐고? 천만에!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없다 주방에서는 늙은 아내가 저녁준비에 한창이다 달그락 달그락 사기그릇 부딪는 소리 아내의 콧노래 소리도 들린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나래는 언제고 봄날이다 봄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다 나는 이런 늙은 봄날과 사는 게 참 행복하다. 윤수천 시인·아동문학가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수상. 1976년 동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한식날 성묫길에 고향땅 여기저기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다 궁금한 그 꽃 이름을 큰누님께 물어봤죠. 천지에 흔해빠진 꽃다지 꽃이라고 어언간 두메떠나 산 세월 육십년에 다 잊고 나이만 먹은 노인 하나 서있네. 내세울 얘깃거리 남에게 자랑할 말 수줍게 입다물고 살다간 어머니는 묵정밭 꽃다지 세상 기억하고 계실까. 정행교 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전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집 ‘미리내 패랭이꽃’ 외 3권
산길에서 마주친 꽃 한 송이 먼 허공을 끌고 온 나와 깊은 지층을 끌고 온 꽃이 이렇게 마주치는 건 신조차 몰랐을 일 어쩌면 우리의 뿌리가 같았을 것 발바닥의 실금이 그 증거 갈라지다 만 뿌리가 나를 움직이게 하고 끝내 주저앉게 만든다는 꽃의 귀는 벌의 붕붕 소리에 팔랑이고 내 발은 땅을 오래 믿는다 꽃은 매일매일 다른 얼굴을 내밀고 꽃도 뒤돌아보았을까 뿌리를 거슬러 반추했을까 신열을 앓고 있는 자줏빛 꽃봉오리, 마그마 같은 것 박설희 시인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 ‘가슴을 재다’. 한국민예총 수원지부장
아파트 거실 서쪽 모서리에 윤기가 반들반들한 푸른 잎을 지닌 군자란 한 포기가 겸손함으로 자라고 있었다. 수줍음으로 조용히 피어난 꽃의 모습이 순수하게 아름다웠다. 잎들 사이에서 자라나온 꽃자루가 나팔모양으로 피어난 모습이 너무 고와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주황색 꽃잎 안에 가냘프게 솟아난 노란 꽃술이 애처로울 정도로 예뻐서 내 마음속에 군자란의 모습을 정성스럽게 심었다. 배수자 시인·문학박사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마음의 향기’, ‘얼음새 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등
독백하듯 그랬다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눈물 나도록 살아 이유 없이 그냥 눈물 나도록 꽃을 보듯 살면 된다고 했다 봄비가 내린다 들판의 새싹처럼 비를 맞는다 그 누군가가 우산을 편다 나는 우산에 끼지도 못했다 가끔 내 이야기에 고개 끄덕이는 살가운 누군가를 만나면 마치 꽃물처럼 마음이 열리고 향기롭다 독백하듯 누군가가 그랬다 살아볼 만한 세상, 비상하라 그냥 걷다 보면 하늘의 맑음이 너의 길이고 나의 길이라고 이 하늘이 감싸준 꽃의 눈물처럼 향기롭게 살면 그냥 살아지는 것이라고 그랬다 윤금아 시인·아동문학가 2002년 ‘아동문예문학상’ 수상 후 활동 시작. 시집 ‘아버지의 거울’, ‘비단잉어의 반달입술’ 한국문인협회 회원, 재능시낭송협회 회장.
아카시아 꽃잎 하염없이 떨어진다 메마른 하늘 맥없이 바라보며 주름만 깊어가던 할머니 찔레꽃 필 때가 제일 가물 때란다 그믐달조차 메말라 부서지던 봄밤, 하얀 찔레꽃 단비 되어 이 땅을 흠뻑 적시고 김종경 시인 용인 출생. 2008년 계간 ‘불교문예’ 신인상 받으며 등단. 시집 ‘기우뚱, 날다’, 포토에세이 ‘독수리의 꿈’. ‘용인문학’, ‘용인신문’ 발행인.
산에서는 사랑이 힘들다고 말하지 마라 오르는 것이 지치고 힘드니만치 내려놓고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느니. 산에서는 슬프다고 울지 마라 산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대신 울어주고 나뭇잎들이 속삭이며 위로해 주나니 햇살이 반짝이는 사이로 바람이 들며 날며 웃는다. 슬프면 아다지오 기쁠 땐 칸타빌레 사랑은 간단하게 심플리체. 정태호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경기지역위원회 회장.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작가상, 주간 한국문학신문 대상, 경기PEN문학 대상 외 수상.
접고 접어도 계속 접어야 할 마음이 남아 있느니 절반은 남은 것인가, 접을 수 있는 마음은 구김이 잘 가는 천 같을까 물기를 빨아들이는 종이 같을까 마음은 어떻게 생겼기에 접고 접어야 하는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마지막 장을 결코 저버릴 수 없어서 열일곱 살 아들의 뇌종양 증세를 이야기하며 엄마는 마음을 접고 또 접고 계속해서 접어도 끝없다고 숨죽여 말한다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일 년째 접는 중 박설희 시인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 ‘가슴을 재다’. 한국민예총 수원지부장
냇가 얼음 치던 아이들 버들피리 불고 강가 기러기 줄지어 고향 갈 때 그대는 봄 따라온다고 했지 냇가 아낙네들 겨울을 빨면 둘이서만 몸 푼 강변 봄 캐러 가자 했지 이른 봄 소소리바람 물러가고 노란 꽃다지 논두렁 소풍 나오면 참꽃 피는 언덕에서 만나자 했지 구자육 시인 한국문인협회 수원지부 회원. 2022 수원문학 시 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벽에못을치다보면 고분고분 잘 들어가는 녀석이 있는가하면 들어가다 말고 슬며시 몸을 비트는녀석도있어 젊었을적엔그런녀석을보면 저바보좀보게,하고놀렸지만 나이를먹은뒤론그러지않아 남의살을헤집고들어가는게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저랬을까싶거든. 윤수천 시인·아동문학가 1974년 동화 ‘산마을 아이’로 소년중앙문학상 입상. 1976년 동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수상
솔잎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아무도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왔다 바다가 되고 바다로 가고 파도가 되어 갯바위에 부딪혀 바람이 되고 바람으로 살아 하늘을 우러러 하늘이 되고 구름으로 태어나 다시 구름으로 허공에 흐르는 걸음으로 왔으니 첩첩이 쌓인 허물 훌훌 벗어 알몸 인체 아무것에도 보이지 않는, 보일 수 없는 나도 나인 줄 모르는 길 이복순 2015년 ‘수원문학’ 신인상 당선. 길 위의 인문학상, 수원문학인상 수상. 시집 ‘서쪽으로 뜨는 해도 아름답다’. 수원문인협회·경기여류문학회 회원.
저물녘 어디선가 가만히 날 부릅니다 헐벗은 나무들은 저희끼리 몸 비비고 먼 하늘 개밥바라기 온몸으로 빛납니다 한 그루 나목으로 눈 감고 귀 기울이면 정녕 송두리째 나를 버리라 합니다 텅 비워 빈손 펼칠 때 함박눈 쏟아집니다 천지에 둥근 이름 눈꽃이 피어나고 따스하게 불 지피는 가난한 마음들 고요히 낮은 곳에서 화두 하나 깊어집니다 진순분 수원 출생. 시집 ‘익명의 첫 숨’ ‘돌아보면 다 꽃입니다’ ‘바람의 뼈를 읽다’ ‘블루 마운틴’ 등. 가람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 본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상.
일없이 허전한 맘 깊어가는 명절 뒤끝 먼데 하늘 우러르다 젖어오는 눈시울에 어머니 가랑잎 같으시던 옛 모습이 스친다 천엽에 똥 쌔듯이 일도 참 많다시며 일곱 남매 기르느라 아픈 허리 눌러 잡고 흰머리 쓸어 넘기시던 깊디깊은 한숨 소리 어머니 떠나시던 그 나이에 서 보니 멍에인가 내리사랑 비로소 온 깨달음에 이 자리 고단한 무게 추스르며 하늘 본다 김애자 춘천 출생. ‘한국시학상’ 본상 수상. 시집 ‘환승할 역이 없다’ 등 4권.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한국가톨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