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3. 인천지역 민권·계몽운동 주도한 ‘박문협회’

침묵하던 민중… ‘항일 정신’을 깨우다 ■ 조선이 국제무대에 등장하다 강요된 강화도조약이나 조선은 이제 ‘은둔국’에서 벗어나 국제사회 일원이 됐다. 이어 미국·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과 통상은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서울과 개항장에 형성된 조계지는 이들 열강의 침략을 위한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통상거주와 치외법권 등을 인정받은 저들은 자국 이익 추구에 혈안이었다. 선교사들은 절대자 앞의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 마치 근대문물의 시혜자처럼 군림했다. 그런 만큼 외래 문물에 대한 불신감이나 의혹은 ‘활화산’처럼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개화파는 개화정책에 소극적인 보수정권 타도에 나섰다. 갑신정변 주역은 메이지유신을 롤모델로 인식할 정도로 국제정세에 둔감했다. 이들은 청나라 속방에서 벗어나고자 일본을 우군으로 내세웠다. 외세에 기대어 또 다른 외세를 몰아내려는 무모한 계획은 허무하게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리하여 국민국가를 수립할 가능성도 치명상을 입었다. 곧 개화정책은 재야 세력과 민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소통과 국론통일이 긴급한 시대과제였으나 이를 추진하기에 너무나 허약한 상황이었다. ■ 독립협회가 국민국가 건설을 모색하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전력을 쏟았다. 민중생존권이 크게 위협을 받는 가운데 지배층에 대한 불신은 폭발 직전의 활화산과 같은 분위기였다. 독립협회는 약육강식의 제국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계몽단체였다. 슬로건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하다는 민권사상과 근대적인 법치주의·주권주의 등을 내걸었다.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 건립과 기관지 ‘독립신문’ 발간 등을 통해 자주적인 독립국가로서 면모를 알리는데 노력했다. 이에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고종은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활동 중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백정 박성춘(朴成春)의 만민공동회 연사로서 등장이었다. 강고한 인습이 남아 있는 현실에서 백정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로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박성춘 등장은 민중의 정치참여 의식을 획기적으로 승화시킨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방으로 확산을 거듭하면서 독립협회의 지회이자 자매단체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 변화에 부응한 박문협회가 조직되다 인천 기독교인과 명망가 등은 일찍이 독립협회 활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기독교인 복정채는 독립협회를 후원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세관을 ‘독립신문’에 투고했다. 주요 내용은 부국강병을 위한 충군애국과 자주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담았다. 내리교회 김기범이나 전경택 등도 시국관을 표현한 <경축가>와 <애국가>를 널리 알렸다. 만민공동회로 민권의식이 확산되는 가운데 1898년 6월9일 개항장 인천에 박문협회(博文協會)가 마침내 탄생했다. 이는 경기도에 조직된 최초 계몽단체였다. 명칭은 <논어> ‘안연(〈984F〉淵)’편의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라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궁극적인 목적은 독립협회 자매단체이자 지회로서 역할에 충실함으로 지역사회구심체임을 자임하고 나섰다. ■ 민지 계발과 민권 신장을 내세우다 창립 직후 회원은 130여명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호응을 받는 분위기였다. 임원진은 회장 이학인, 부회장 나동한, 전 임시의장 강준, 회원 유한식, 김기범, 박현보, 이용인, 이동환 등이었다. 우선적인 과제는 회원들의 시세 변화에 부응한 능력 배양과 친목도모였다. 더불어 신교육 보급을 통한 주민들 민지 계발에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은 회관 내에 관보나 신문 열람, 시무에 유익한 서적 구입과 정보 제공 등이었다. 회관은 단순한 집회장소라는 차원을 넘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근대적인 도서관으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열성적인 지원과 참여는 사회적인 책무를 일깨우는 생활현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연설회장에는 태극기를 앞뒤에 각각 배치하고 국가와 황제에 대한 일련의 의례를 거행했다.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은 이러한 가운데 확산을 거듭하였다. 통상회에 대한 보도 기사는 당시 계몽단체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민의를 수렴하는 여론 공론장의 성격은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회원들은 다양한 활동으로 계몽운동 확산을 전개했다. 인천항경무서 총순 한우근은 민중계몽과 근대교육 보급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연설회에서 ‘회(會)’자의 의미를 설명한 후 단체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위생문제 중 단발은 토론회를 거쳐 실시된 대표적인 결실 중 하나였다. 당시 단발은 단순한 위생적인 차원을 넘어 ‘근대인’을 상징하는 의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의 단발에 대한 보도와 호의적인 보도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회원들은 토론회에서 각자 의견을 스스럼없이 밝힘으로 자신감을 더욱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계몽단체에 의한 토론문화는 학교의 정규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경기지역 계몽·교육활동에 자극제가 되다 박문협회는 인천인들에게 변화를 알리는 ‘상징이자 희망봉’이었다. 회원들의 열성적인 활동과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개항장 인천의 변화를 이끄는 밑거름이었다. 그런데 외세 침략 강화에 따른 정국 불안은 합법적인 계몽활동마저 허용하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제정러시아 전제정치를 지향한 대한제국 지배층은 독립협회를 불법적인 단체로 내몰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박문협회 활동도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 외형과 달리 회원들은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에 가담해 계몽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일제의 경제적인 침탈에 맞서 근대적인 상업단체나 회사 운영과 근대교육 보급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사립학교와 야학 설립을 주도하거나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단연동맹회·노인계 등을 결성하여 국채보상운동에도 자발적인 참여에 나섰다. ‘나랏빚 청산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의지가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박문협회도 야학인 사립영어학교를 설립·운영했다. 교장은 박문협회장이 겸임한 반면 교사는 인천해관에 근무하는 강준과 이학인 등이 맡았다. 1900년 9월 사립영어학교를 계승한 박문학교는 개교했다. 설립주체는 천주교 제물포본당·샬트르 성바오로 인천분원 수녀들, 박문협회 회원 등이었다. 이 학교는 에우제니오 드뇌(한국명 全學俊) 신부의 활약으로 영화학교와 더불어 민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강제병합 직전까지 인천지역에 설립된 사립학교와 야학 등은 30여 개교 이상에 달했다. 박문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회원들은 명예교사로 자원하거나 운영비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등 열성을 다했다. 이러한 열정에 의해 영화학교와 박문학교는 대한제국기는 물론 일제강점기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민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수원 삼일여학당·삼일남학당, 강화도 합일학교·보창학교·계명의숙, 개성 한영서원·정화여학당 등은 박문협회 활동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 외세의 각축장이 된 개항장 인천에서 박문협회의 시작은 역사적인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이러한 흐름은 경기도 각지로 파급돼 교육·계몽운동을 국권회복운동 일환으로 추동시키는 든든한 에너지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등 지회나 다른 계몽단체는 박문협회의 선구적인 활동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인천광역시로 우뚝 선 배경은 인천을 사랑하고 주민들을 위해 활동한 계몽론자들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자기희생에서 말미암았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2. 13도 창의대진소와 서울진공작전

각국 영사관에 日 불의 성토… 서울진공작전 펼치다 을사늑약 이후 우리나라는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어느 때보다 팽배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마지막 보류인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수도방위를 책임진 시위대는 이를 거부하고 치열한 ‘서울시가전’을 전개하는 등 ‘구국간성’으로서 임무에 충실했다. 이에 지방의 진위대 병사들도 무기를 탈취한 후 의병진에 합류, 국권 수호에 대한 자신감은 높아지기도 했다. 그런 만큼 투쟁역량 강화와 더불어 고립·분산적인 항일투쟁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였다. 평안도 의병은 황해도 의병장 박기섭, 황해도 의병은 장단 의병장 김수민과 연락하고, 김수민은 철원 의병장 김규식, 김규식은 적성•마전 의병장 허위, 허위는 지평•가평 등지 의병장 이인영, 이인영은 제천 등지 이강년과 원주 등지 민긍호 등과 상통하며 같이 모의하는 상황이었다. 통일적인 체제를 갖춘 의병진인 13도창의대진소(이하 창의대진소) 결성은 곧바로 시대적인 소명임을 의미한다. 물론 과정은 원만하지 않았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엄중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 전국적인 의병부대, 13도 창의대진소의 결성 강원도 원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은찬과 이구채는 이를 추진한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경북 문경에 은거 중인 이인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찾아갔다. 부친 간병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던 이인영은 마침내 원주로 이동해 의병원수부를 설치한 후 의병 모집에 착수했다. 1907년 11월 하순에는 관동창의군으로 조직 확대와 더불어 굳센 항일전을 전개할 수 있도록 조직을 정비했다. 창의대장 이인영은 원주진위대에 경고장을 보내는 한편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통해 의병전쟁의 정당성을 밝혔다. 관동창의군은 연합의진 결성을 위해 근거지를 원주에서 경기도 지평으로 옮겼다.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서울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력 보강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근거지를 서울 근교인 양주로 이동하자 이때 의병장 허위를 비롯해 각지의 의병진이 이곳으로 집결했다. 이듬해 1월에는 지도부를 다음과 같이 재정비했다. 총대장은 이인영, 군사장은 허위이고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등이다. 이 같은 창의대진소의 중요 기반은 강원도의 이인영 계열, 경기도와 황해도의 허위 계열, 충청도 이강년 계열 등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진 연합부대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주목할 부분은 전국적인 연합의진을 표명한 사실로, 그 의미는 자못 크다. ■ 서울진공작전으로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성을 알리다 창의대진소는 양주를 근거지로 1908년 2월 초순까지 서울 근교를 무대로 두드러진 활약상을 벌였다. 삼산전투와 마전전투는 일본군의 싸운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울 공격을 위해 창의대진소는 군수품과 군자금을 조달하는 가운데 원주와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 공격으로 이틀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서 의병 사상자가 200~300명이나 나올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다만 전투를 통해 전술을 발전시키고 화력을 보완하는 등 의병진 사기가 높아져, 과감하게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의진끼리는 서로 연락하며 성원을 받았다. 각 도에 격문을 전하니 북을 치고 일어나는 원근의 응모자가 주야 끊이지 않고 모여들어 모두 1만여 명이나 됐다. 그리하여 서울로 진군, 통감부를 격파해서 협약(을사늑약과 정미칠조약)을 취소시키고 국권을 회복코자 했다. 이인영은 각 도 의병으로 하여금 일제히 진군하도록 촉구하고 몸소 300명을 이끌어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각 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본군이 먼저 쳐들어 와 서로 분전했으나 적과 대적할 수 없어 퇴군하고 말았다. 이는 전국에서 결집한 의병부대로 서로 연락이나 연합작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00여 명은 증원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퇴각하고 말았다. 군사장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해 철통같이 준비,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었다. 이에 모든 의진에 전령해 일제히 진군을 재촉해서 동대문 외곽으로 나아가니 대부대는 장사(長蛇)의 기세로 천천히 진격하게 했다. 하지만 전군이 온다는 시기를 어기고 일본군이 졸지에 공격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군이 이르지 않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상을 당함으로 서울진공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았다. 이로 인해 각지에 결집한 의병부대는 원래의 근거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의병부대는 조직을 재정비한 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4월에 허위는 임진강과 강화도 등지 서해안 일대에 활약 중인 의병부대에 항일투쟁 촉구하는 통문을 보냈다. 제2의 진공작전은 증강된 일제의 압도적인 화력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 왜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했나 창의대진소가 서울진공작전에 매진한 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은 서울로 들어가 통감부를 타격하고 성하(城下)의 맹세를 이루며 종래의 이른바 신협약 등을 파기해 대대적 활동을 기도함이라. 우선 신임하는 인물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을 순방하고 통문 한 통씩을 전달하니 그 개략적인 의도는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불행한 상황을 상세히 진술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의병의 순수한 애국적인 혈단(血團)이니 열강도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줄 것과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는 국가의 응원을 호소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들은 서울로 진격해 통감부를 점령한 후 외교적 담판을 벌이되 한국에 주재 중인 구미열강의 외교적 지원을 기대했다. 또 이들은 ‘오적칠간(五賊七奸)을 처단하고 의병 중에서 인물을 골라 정부를 조직할 의도였다. 즉 서울진격작전은 일제 통감부의 타격, 일제와 맺은 조약의 파기, 친일정부의 축출과 의병 주도의 신정부 조직 등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열강의 지원을 받아 국제법상 유리한 입장에서 국권회복 문제를 일제 통감부와 담판하려는 의도로 나섰던 셈이다. ■ 창의대진소를 통해 본 역사적 의의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으나 의병전쟁사에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히 크다. 우선 최초로 편성된 전국적인 연합의병부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시 각지의 의병부대는 독자적인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분산적인 활동은 국권을 수호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연합전선 구축과 연계는 이후 의병전쟁으로 승화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또 통감부와 외교적 담판을 위한 군사활동이라는 점이다. 무력항쟁에 중점을 둔 양반 유생들과 달리 서울진공작전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상을 호소했다. 아울러 자유·정의·평화를 지키기 위한 한국인의 활약상을 세계에 알렸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 이천수창소·남한산성 연합의병진

■ 단발령 시행, 불 붙은 의병운동 이른바 전기 의병은 을미사변 이후 시작됐다. 그런데 경기도 최초 의병운동인 이천의병은 단발령 공포한 다음날인 1895년 12월31일(음력 11월16일)에 일어났다. 서울에 거주하던 김하락·구연영·신용희·김태원·조성학 등 젊은 유생들은 이천으로 내려갔다. 일행은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을 영입하고 포군 100여 명을 포섭해 의병진을 조직했다. 방춘식은 초기 경기도 의병운동사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다. 이들은 이천 이현에 진영을 설치하고 의병진을 결성했다. 구연영은 2개대의 포수를 거느리고 양근과 지평 방면, 조성학 역시 2개대를 이끌고 광주 방면으로 떠났다. 김태원과 신용희는 안성과 음죽 방면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노력의 결과로 구연영·조성학·신용희는 각각 300여 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의병진 조직 소식을 접한 용인·안성·수원·안산·시흥 등지에서도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김태원은 이미 조직된 민승천의 안성의병과 연합하기로 약속했다. 이리하여 경기도 연합의병진인 이천수창소가 조직됐다. 조직 편제를 보면 전형적인 전투조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유격장이나 돌격장 등은 다른 의병진에선 보이지 않던 직책이었다. 구체적인 편제 조직도 특징 중 하나로 주목된다. 이천수창소는 고종의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비밀조직이 전달되면서 더욱 확대됐다. 이춘영은 충주와 청주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집했다. 전귀석은 여주의병장 심상희를 만나 장차 연합 활동을 협의하는 등 활동영역을 넓혔다. ■ 백현전투 승리... 의병진 ‘사기 충전’ 이천의병은 이듬해 1월18일 일본군 100여 명과 백현전투에서 첫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의병진은 ‘복병전술’로 맞서 야산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이때 상황을 김하락은 <진중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른 아침에 조성학은 적을 맞아 두어 시간 동안 격전을 하다가 갑자기 쇠북을 울리며 퇴군하여 백현으로 달아나니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추격하여 백현 아래에 당도했다. 그때 갑자기 대포소리가 울리며 구연영은 전면을 가로막고 김귀성·신용희는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오고 조성학은 적의 돌아갈 길을 차단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니 적의 포위망에 빠져 진퇴의 길이 없었다. 나는 군사를 지휘하여 급습하여 무찔러 적은 죽은 자가 수십 명에 달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한참 무찌르다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초생달은 서쪽하늘에 떠 있는데 서릿바람은 뼛속을 뚫는 듯하였다.” 첫 전투 승리로 의병진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였다. 이는 이후 의병운동을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백현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다시 공격해 왔다. 2월12일 새벽에 2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은 총공세에 나섰다. 다음날 새벽까지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눈보라가 일어 전세는 순식간에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의병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전투를 포기한채 흩어졌다. 결국 일본군에 패배한 의병진은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현전투 패배로 인한 손실은 이천수창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의병 토벌을 구실로 이현 마을 전체를 무자비하게 초토화했다. 의병장들에게 시급한 현안은 잔여 의병 수습이었다. 김하락은 여주에 있는 심상희를 찾아가 군사 지원을 요청해 500여 명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뒀다. 구연영·신용희 등도 잔여 의병들을 수습·모집해 2천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이들은 박주영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근거지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 남한산성에 연합의병진을 다시 편성하다 남한산성에는 이미 심원진이 이끄는 광주의진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근의병도 여기에 합세하며 연합의병진을 다시 조직했다. 연합의병진 남한산성 점령은 일본군과 개화정권에 당혹감과 더불어 위압감을 줬다. 이곳은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군수물자가 비교적 풍부하게 저장돼 있었다. “사방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고 성첩이 견고하여 참으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1만 병이라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성중을 두루 살펴보니 쌓인 곡식이 산더미 같고 식염이 수백 석에 달하고 무기도 구비되어 여러 장수들은 군용이 유여한데다 진칠 곳마저 견고하여 몹시 기뻐하였다.” 즉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천연의 요새지를 근거지로 삼아 풍부한 군수물자를 갖춘 대단한 무장단체로 거듭났다. 일본 신문도 연하의병진 동향을 연일 보도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정부군은 친위대 1개 중대와 대포를 끌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관군은 3월5일부터 공격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연합의병진은 송파까지 추격해 관군의 대포마저 빼앗았다. 정부는 강화도진위대 병력까지 증파, 항복을 권유했다. 일본군도 증원군을 보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할 뿐이었다. ■ 원대한 서울진공작전, 그리고 실패 이때 의병진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군부대신에게 밀사를 파견해 친러정권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들을 체포하면서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정부는 장기렴에게 1개 혼성대대 병력으로 남한산성 공격을 명령했다. 이른바 장기렴부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공격했으나 격퇴당하고 말았다. 의병진 확대와 거듭된 승리에 의병진은 서울진공작전을 모색했다. 이는 의병운동사 중 ‘최초’라는 사실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더욱이 경기도 뿐만 아니라 강원도 춘천과 삼남지역 의병진과 연합작전까지 구상한 점에서 주목된다. 나아가 의병운동 일체화와 더불어 국제사회에 일본의 불법성을 모색한 사실이다. 갑작스러운 남한산성 함락으로 중단된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은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 장기간 고립에 의한 군량이나 무기 부족 등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또한 지휘부 내부의 갈등이나 대립도 지적되어야 한다.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일부 의병장의 안일한 대응에서 찾아진다. 승리에 도취한 후군장 박준영과 좌군장 김귀성은 관군의 꾀임에 빠져 성문을 열어줬다. 의병진은 전투다운 전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 운동공동체임을 일깨우다 잔여 세력을 수습한 의병진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의병진은 정부군과 일본군의 끝임없는 추격을 받았으나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이동하는 동안 이미 현지에 결성된 의병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함으로 한민족이 ‘공동운명체’임을 일깨우는 밑거름이었다. 전기 의병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경기도 의병운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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