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8-④

제6실은 멕시코의 국명이 유래한 멕시카(Mexica, AD 1200∼1521) 시대로 아스텍의 또 다른 이름으로 테노치카(Tenochica)라고도 부른다. 15세기 메소아메리카 중앙고원에서 패권을 잡은 멕시카는 전쟁을 통하여 주변에 있는 여러 부족국가를 복속하여 제국의 반열에 올랐고, 농업과 무역 그리고 조공을 받아 멕시코 문화를 찬란하게 부흥한 시기로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다. 아스텍 문명관인 멕시카 전시실은 박물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앙에는 아스텍 문명의 우주관을 볼 수 있는 상징적인 유물이자 달력으로 종교의식과 경작 시기를 결정하는 데 사용한 거대한 원형 석판인 ‘태양의 돌’이 있다. 이곳에는 멕시코 계곡의 얕은 호수 바닥에서 작물을 재배하기 위하여 만든 비옥한 경작지로 작은 직사각형 틀 안에 흙을 메워 곡물을 심는 농업 기술인 치나미(chināmitl)를 재현한 거대한 조감도가 있다. 이 밖에도 아스텍 신앙의 중심인 섭리와 어둠의 신인 ‘테즈카틀리포카(Tezcatlipoca)’의 형상과 더불어 다양한 볼거리가 가장 많다. 제7실은 멕시코 남부 오악사카(Oaxaca) 지역에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믹스텍(Mixtec)과 사포텍(Zapotec)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4세기경 믹스텍족은 이 지역으로 들어와 사포텍족을 압도하였고, 점령 후에는 사포텍족의 수도이자 제사(祭祀) 중심지인 몬테 알반(Monte Alban)을 차지하였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8-③

제3실은 전 고전기(Preclassic)인 BC 2,500∼AD 100년 메소아메리카 중부 고원 지대 원주민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이들은 인구 증가와 함께 초기 계층화 사회가 출현하여 올멕과 마야 같은 고대 원시 부족 국가가 탄생하였고, 종교가 부족 국가를 지탱하며 발전하는 데 이바지한 과정을 보여준다. 제4실은 기원전 2세기경에 세운 고대 국가 테오티우아칸 유물관으로 전성기를 거쳐 쇠퇴한 후에도 메소아메리카 안팎의 먼 지역까지 영향을 끼친 나라로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꽃피웠던 찬란한 문화 유물을 보여준다. 테오티우아칸은 4∼7세기에 번성하였던 메소아메리카 최대 문명국가로 7세기 말 멸망하였다. 문명의 흔적은 멕시코시티에서 52km 떨어진 곳에 있는 테오티우아칸에 해와 달 피라미드를 포함한 거대한 석조 유적이 있고, 전시실에는 비의 신 ‘틀라록’과 ‘케찰코아틀’을 포함한 다양한 석조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제5실은 후 고전기(Epiclassic)인 7∼12세기 멕시코 중앙 고원지대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 톨텍(Toltec) 문명관으로 테오티우아칸을 비롯한 여러 고대 문화를 이어받았다. 이들은 수준 높은 역법(曆法)과 우주관을 바탕으로 종교 체계를 이루었고, 기예를 살려 멕시코 고대 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친 다양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톨텍은 10세기 말∼11세기 초 유카탄반도에 있던 마야를 점령한 후 치첸이트사(Chichen-Itza)에 톨텍 마야 왕국의 수도를 건설하여 꽃피웠던 문명의 흔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후 고전기의 도시국가로 모렐로스(Morelos)주에 있는 요새 소치칼코(Xochicalco), 푸에블라(Puebla)와 베라크루즈(Veracruz)주 경계에 있는 칸토나(Cantona), 틀락스칼라(Tlaxcala)주의 카카스틀라(Cacaxtla) 유적지에서 발굴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8-②

아침 일찍 지하철 7호선을 타고 파세오 데 라 레포르마(Paseo de la Reforma) 거리에 있는 오디토리오(Auditorio) 역에 내려 걸어서 박물관에 도착한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입장해야 할까 망설였지만, 입장권을 구입하고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박물관 중앙 탁 트인 광장에는 마야의 우주관을 작품화한 우산 모양의 분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페드로 라미네스 바스케스(Pedro Ramirez Vazquez) 설계로 지은 국립 인류사박물관에서 가장 특징적인 구조물인 이 작품은 고대 멕시코의 신화적인 나무를 표현하여 하나의 기둥으로 세웠고, 기둥에는 콜로니얼 시대 이전 원주민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던 독수리와 재규어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입구에서부터 규모에 놀라고, 들어가서는 전시된 유물의 다양성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박물관은 지상 2층 규모의 ‘□’자형 건물로 전체면적 약 8만㎡(8헥타르)에 22개 전시실·2만 5천 권의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연구실·극장·강당·서점·식당·카페 등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한 해 수백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다고 한다. 박물관 1층에는 멕시코 고대 문명을 시대별·지역별로 분류해 11개 전시실로 나누어 유물을 전시하고 건물 밖 야외에는 문명별로 크고 작은 상징적인 유물을 복원해 놓아 잠시 쉬어가며 관람하기 좋다. 시간에 쫓기지만 욕심내어 탐방로를 따라 관람하며 유물을 카메라에 담는다. 제1실은 아프리카에서 발현한 원시 인류가 수백만 년 자연에 적응하며 변화해 가는 과정을 정리하고, 현생 인류가 어떻게 신체적·사회적·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발전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제2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인류가 기원전 3만∼2천5백년대까지 기후 변화를 겪으며 초기 원시인의 생존 수단인 수렵 생활에서 한 지역에 정착하여 농경사회를 형성하고 변화·발전해 가는 인류사적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8-①

박물관(Museum)은 여행 간 나라의 문명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강대국일수록 규모가 크고 화려하며 국력을 모아 그 힘을 과시한다. 영국 대영박물관과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은 아름답고 중후한 멋을 가진 중세 건물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예술성이 높은 현대식 건물을 지어 수많은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고대 로마인들에게 ‘진리를 탐구하는 토론 장소’로 사용됐고, 중세 때는 수도원과 교회가 박물관 역할을 했다. 유물을 전시하는 근대적 의미의 박물관은 중세 말에 생기기 시작, 현대에 들어서는 수집품에 따라 민속·미술·과학·역사박물관 등 다양한 형태로 변신하고 있다. 근대 박물관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공박물관 개념이 자리 잡으면서 왕실과 귀족들이 신분 과시용으로 수집한 문화재와 미술품 중심의 박물관을 세워 일반인에게 공개하면서 시작됐다. 19세기 이후로는 전문 박물관이 등장하고 경제와 기술발전을 이룬 신흥 국가나 도시는 그 성과를 과시하려는 데 목적을 둔 다양한 형태의 박물관을 개관했다. 현대 박물관은 보여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교육·연구·전시·홍보 등 다양한 기능이 강조되고, 문명과 역사 권역별로 다양화해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는 추세다. 오늘은 멕시코가 자랑하는 차풀테펙(Chapultepec) 공원에 있는 국립 인류사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ia e Historia)을 찾는다. 멕시코를 찾는 관광객이면 누구나 방문하는 이 박물관은 유럽인들이 발들이기 이전 멕시코 고대 문명과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고, 원주민 문화도 접할 수 있다. 특히 메소아메리카의 어머니 문명이라고 불리는 올멕인의 거두석(巨頭石)과 아스텍 문명의 ‘태양의 돌’(Piedra del Sol)을 비롯한 다양한 고대 유물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7-⑦

앞서 말하던 이 작품(디에고 리베라의 내부 프레스코 벽화)은 원래 미국 흑인과 라틴아메리카 농부가 러시아 군인과 손을 맞잡고 있는 익명의 노동자 얼굴을 그려야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리베라가 레닌 얼굴로 대체해 넬슨 록펠러는 그 부분을 참지 못하고 작품을 포기했다는 후문이 있다. 또 하나 특별한 것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든 무대 커튼이다.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과 멕시코의 계곡을 그렸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초창기에 이 전당의 오페라에 여러 차례 출연했고,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는 한때 이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국립 예술의 전당은 멕시코 작곡가의 작품을 매우 중요시 했고, 멕시코의 대표적인 현대 작곡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와 마리아 펠릭스(Maria Felix)는 모두 이곳을 통해 데뷔했다. 멕시코는 고대 올멕과 마야·아스테크와 톨테크 문명 등 인디오 조상들의 찬란한 토착 문명의 혼을 지니고 있으며, 에스파냐 식민통치 시대를 통해 서구 문명이 유입돼 혼합 문명이 형성됐다. 이로 인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는 예술·유행·관습 등 모든 것을 모방하는 추세였기에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오페라하우스와 같은 예술 문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포르피리오 디아즈 대통령은 직접 멕시코시티 상업 중심가 한복판에 국립 예술의 전당을 건설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이런 사회적 흐름은 마리아치의 고향 과달라하라와 지하 도시 과나후아토 등 크고 작은 도시에 예술극장을 세운 것을 볼 때, 멕시코는 예술의 혼을 가진 문명의 나라다. 인생은 세월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채워가며 자신을 찾아 떠나는 도전의 여행이다. 심리학자들은 행복해지고 싶다면 무엇인가를 구입하기보다 여행하라고 권유한다. 그 이유는 소비를 통한 행복이 한순간이라면, 여행에서 쌓은 추억과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몸속에 엔도르핀이 솟아나고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7-⑥

예술의 전당 내부는 2층 정면과 돔 천장이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아래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20세기 멕시코 벽화 운동을 주도한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있다. 인간이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수 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고대 동굴이나 무덤 벽면에 그렸으며, 고대 마야 시대부터 그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콘클라베(Conclave)를 열어 교황을 선출하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성경에 나오는 300여 명의 인물로 가득한 벽화를 그리며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국립 예술의 전당에도 현대 벽화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멕시코 화가의 벽화가 가득하다. 3층에는 1920년대 이념성이 강한 멕시코 3대 벽화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그리고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의 작품이 걸려있다. 이들은 권력자의 이념에 반하여 처절한 삶을 사는 서민의 아픔을 그리려 하였고, 작품 속에는 그런 이념을 강하게 담고 있어 당시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특히 디에고 리베라의 <교차로의 사람(Man at the Crossroads)> 또는 <우주의 통치자 인간>이라는 내부 프레스코 벽화가 유명하다. 원래 뉴욕 록펠러센터의 벽화로 시작했으나 거의 완성 단계에서 록펠러 측이 그림에 레닌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작업을 중지시켰다. 리베라는 이 작품을 뉴욕의 뉴 워커서 스쿨(New Workers School) 벽면에 그렸으며, 그 후 멕시코시티 예술의 전당에 다시 그렸다. 작품 가운데는 기계를 조작하는 노동자가 두 개의 타원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타원은 대우주와 소우주를 연상케 하고, 기계의 양쪽에는 자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남녀의 모습이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소비에트 노동절 퍼레이드가 왼쪽 위에는 찰스 다윈이 그려져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7-⑤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다 보면 궁전 못지않게 발길 닿는 곳이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예술극장이나 오페라하우스 같은 문화예술 건축물이다. 파리 센 강 근처에는 소설과 영화로 잘 알려진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의 실제 배경이 된 ‘파리 오페라 하우스’가 있고, 뉴욕에는 종합예술극장인 링컨센터가 있으며, 호주에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있다. 멕시코시티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극장인 ‘국립 예술의 전당’이 있다. 아르누보 건축 양식의 이 궁전의 외관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최고급 흰 대리석으로 장식했고, 전면 파사드 하모니는 이탈리아 조각가 레오나르도 비스톨피(Leonardo Bistolfi)의 작품이다. 내․외관의 유명한 조각가의 작품은 미적 아름다움을 넘어 고풍스러운 예술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세계적인 오페라하우스는 건축 초기부터 난관을 겪고 오랜 기간에 완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예술의 전당은 1904년 멕시코시티 상업 중심가 한복판에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기존에 있었던 국립극장을 허물고 착공하였으나 지반이 조금씩 내려앉아 보강공사를 하다 보니 30년이나 걸려 완공했다. 1910년에는 멕시코혁명이 일어나 정부가 바뀌었고, 이 과정에 애초 설계를 맡았던 이탈리아 건축가 아다모 보아리(Adamo Moari)가 고향으로 돌아 가버려 공사는 1932년까지 중단됐다. 그 후 멕시코 건축가 페데리코 마리스칼(Federico Mariscal)이 이어받아 2년 후인 1934년 겨우 완공하였지만, 보아리가 설계한 정원이 있는 광장과 페가서스 조각상은 1994년에야 완성됐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7-④

탐험가 제임스 엘턴(James Elton)은 차풀테펙 성을 둘러보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능가할 수 없다”고 썼을 정도로 비할 데 없는 전망과 테라스를 가지고 있다. 성은 북미에 있는 유일한 왕궁일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무대로 즐겨 찾는 촬영 명소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적 배경으로 재해석한 베즈 루어먼(Baz Luhrmann) 감독의 영화에서 반항적인 로미오 역할로 매력을 한껏 드러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열연한 곳이고, 로버트 알드리치(Robert Aldrich) 감독의 <베라 크루즈>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성에 오르면 멕시코시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고풍스러운 성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멕시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다. 국립 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한 차풀테펙 성을 둘러보고 언덕 아래로 내려오는데, 공원길 한쪽에서 트레몰로(tremolo) 주법의 귀에 익은 기타연주가 들려온다. 남루한 차림의 길거리 연주가는 화음에 심취해 에스파냐의 영혼을 되살린 기타 작곡가 타래가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한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현란한 손가락 놀림에서 인간의 직관적인 느낌을 넘어 시간과 공간의 허공을 향해 잔잔하게 흐르는 리듬에 마음을 뺏겼다. 바구니에 동전 한 닢 놓아주고 역사지구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국립예술극장(Palacio de Bellas Artes)으로 발길을 옮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7-③

황제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유럽의 ‘노이슈반스타인(Neuschwanstein)’성과 여러 성의 신·개축에 참여한 강골프 카이저(Gangolf Kayse)와 줄리어스 호프만(Julius Hofmann)을 영입해 자국의 건축가와 함께 차풀테펙 성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증·개축하면서 거주하기 편리하게 고쳤고, 궁전의 예술적 아름다움도 극대화했다. 증·개축 과정에는 인상적인 정원을 새로 꾸미고 지붕을 개수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수많은 가구를 들여와 성 내부에 진귀한 예술 작품을 진열했다. 특히 차풀테펙 성의 정원은 무어인이 이베리아반도에 지은 마지막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정원과 비추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일품이다. 박물관 2층에는 그 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관람 통로를 따라 돌아보며 화려했던 그 시절의 시간 여행을 즐긴다. 1867년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제가 돼 성은 또다시 버려지다시피 했다. 1878년 기상관측소로 사용하다가 5년이 지난 후 다시 군사학교가 됐으나 1882년 대대적인 궁전 내부 공사를 하고,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iaz) 대통령을 시작으로 성을 공식 관저로 사용했다. 1939년 라싸로 카르데나스(Lazaro Cardenas) 대통령은 차풀테펙 성을 국립역사박물관(Museo Nacional de Historia)으로 지정하는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킨 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유물을 이곳으로 옮겼고, 1944년부터 차풀테펙 성은 국립 역사박물관이 됐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7-②

차풀테펙 성은 1차 완공 후에는 관리되지 않아 버려지다시피 했다. 1803년 때마침 이곳을 찾은 알렉산더 훔볼트(Alexander Humboldt)는 왕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 재무부가 궁전 창문을 판매하는 것을 알고 크게 비난했다. 그리고 그는 성에 대한 무방비한 관리를 책망하는 기록을 남겼고, 1806년에는 멕시코시티 정부가 성을 매입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성은 멕시코 독립 전쟁(1810∼1821) 중에 또다시 버려졌고, 누구도 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1833년 군사 학교가 되면서 건물의 부분 보수가 이뤄졌고, ‘키가 큰 기사(Caballero Alto)’라는 애칭의 망루를 세웠으며, 성의 새로운 뷰포인트가 됐다. 차풀테펙 성은 독립 후, 격변기 근대 멕시코 역사에서 고비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멕시코와 미국 간의 전쟁에서 1847년 9월 13일 군사학교 소년 영웅들(Ninos Heroes)이 성을 방어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아픈 역사가 있다. 그들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는 역사적인 벽화가 성 내부 천정에 화려하게 그려져 있지만, 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국은 ‘해병대 찬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에 ‘몬테수마의 홀(Halls of Montezuma)’이라는 가사가 등장하는데, 이 표현은 차풀테펙 성을 의미한다. 미겔 미라몬(Miguel Miramon) 대통령 시절 성을 증축했고,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바뀐 후 1864년 멕시코 제국 초대 황제였던 막시밀리아노 1세(Maximiliano I)와 그의 아내 카를로타(Carlotta)가 성을 제국의 공식 궁전으로 격상하면서 지금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7-①

일곱번째 에피소드는 ‘차풀테펙 성’과 ‘국립 예술의 전당’을 대주제로 풀어낸다. 중세 유럽의 성은 당시 경제 중심지로 통치자가 머무는 저택이자 소유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건축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적이 침입할 땐 전투 현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총포의 발달로 화력이 막강한 대포를 성이 막아내지 못하자 기사 시대 몰락과 함께 성의 역할도 쇠퇴해 지금은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옛 성’은 여행지에서 둘러보고자 하는 버킷리스트에 포함되는 필수 코스다. 특히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저마다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의미가 담겨있는 크고 작은 성을 많이 만날 수 있고, 어떤 곳은 격조 높은 건축적 아름다움과 예술성까지 갖춘 곳도 있다. 하지만 북미는 유럽과 달리 성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탐험한 후, 유럽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원주민시대 성은 대부분 파괴됐다. 그리고 그들이 독립을 쟁취한 후에는 왕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민주주의 국가가 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그러나 멕시코시티에 북미를 대표하는 차풀테펙 성(Castillo de Chapultepec)이 있다. 이 성은 잠시나마 근대 멕시코제국 시절 황제의 궁전이었다. 성의 건축은 누에바 에스파냐 시절 총독 베르나르도 갈베스(Bernardo Galvez)의 명령으로 1785년 짓기 시작하여 우여곡절 끝에 몇 차례 증·개축을 거쳐 1863년 완공했다. 나우틀어로 ‘메뚜기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차풀테펙 성은 해발 2천325m 멕시코시티 언덕에 자리하고, 이곳은 아스텍 시대에는 신성한 제단이 있었던 곳이다. 성은 에스파냐 식민지배 시절에 착공했으나 공사 도중 왕실에 대항하려 한다는 첩보 때문에 공사가 한때 중지되기도 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⑦

아스테카 문명은 오랜 역사를 가진 고대 도시 테오티우아칸이 붕괴한 뒤 멕시코 북부 지대에 살던 인디오들은 12세기경 그들의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나라를 세웠다. 그 후 13세기에는 멕시코 중앙고원으로 자리를 옮겨 ‘신이 머무는 도시’이자 호수에 떠 있는 환상적인 도시 테노치티틀란과 상업 도시 틀라텔롤코를 건설했으며, 그들은 두 도시에 태양을 받드는 신전을 지었다. 아스테카 제국의 신앙관은 ‘낮의 태양신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지만,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힘을 잃고 서쪽 지평선에 떨어져 재규어로 변신하여 밤에는 어둠의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믿었다. 그리고 ‘태양신이 생명을 다하면 그들의 세계도 사라진다’고 믿었기에 ‘원기를 잃어버린 태양신이 아침이 되어 다시 독수리가 되어 비상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장으로 활력을 주어야 하고, 태양이 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신공희가 필요하다’는 신앙관을 갖게 됐다. 이런 신앙관을 바탕으로 아스테카 제국은 크고 작은 신전과 부속 건물을 세웠고, 인신공희의 흔적은 피라미드 내부에 있는 솜판들리에서 볼 수 있으며, 희생된 제물의 유해는 주변 무덤에서 발굴됐다. 아스테카 제국은 도시 계획과 건축술이 뛰어난 문명국가였지만, 황금 보화를 약탈하러 온 코르테스 일행과의 전투에 패하여 제국의 문명과 건축물들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졌다. 정복자는 파괴한 유적의 돌로 그 자리에 자신들의 교회와 행정관청을 지어 지금은 온전한 아스테카 유적을 볼 수 없지만,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지은 콜로니얼 건축물에서 혼성 문화를 볼 수 있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현장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사유를 통해 인격을 의식화하고, 그 행위의 가치는 그들의 문명화 과정에 이바지하게 된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메소아메리카에서 그들만의 독창적이면서도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에스파냐 침략자로부터 자신들을 지키지 못해 제국의 패망과 함께 문명도 사라지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혼혈과 새로운 혼성을 통하여 새로운 멕시코의 혼을 이어가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⑤

틀라텔롤코가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힘에 굴복한 이야기에 이어 전한다. 당시 침략자들은 유럽적인 것은 우월해서 지향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원주민적인 것은 열등해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자신들의 피가 섞인 메스티소는 누에바 에스파냐를 건설하는데 한낱 도구에 불과하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 멕시코에서 그들은 당당한 주인이자 다양한 혼성 문화의 중심이 됐다. 틀라텔롤코에서는 피부 색깔, 몸매, 눈, 머리 색깔, 옷차림 무엇 하나 보편화한 것이 없는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키가 작고 목은 약간 짧고 굵으며 피부는 갈색인 사람, 반대로 키가 크고 피부는 갈색이나 머리카락과 눈썹이 새까만 사람, 피부는 누렇고 희나 머리카락이 노랗거나 밤색인 경우로 푸른색녹색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외모와 체형을 가진 '메스티소'로 오늘날 혼성 문화를 중추적으로 이끌어 가는 현대 멕시코 사람들이다. 어느 쪽 피가 더 많이 섞여 있느냐에 따라 모습이 달라 보일 뿐 대부분 혼혈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고, 한 가족 중에서도 서로 다른 인종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멕시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④

틀라텔롤코는 아스테카 제국, 콜로니얼 시대, 현대 멕시코 문화가 공존하고 있어 지금은 세 문화의 광장(Plaza de tres culturas)으로 불린다. 이곳은 고대 아스테카와 중세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그리고 현대 멕시코가 혼성을 통해 문화적 동질화(Aculturacion)가 이루어진 삶의 현장으로 멕시코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장소다. 이 광장은 건축가 마리오 파니(Mario Pani)가 설계해 1966년에 완공했다. 주변에는 화염의 흔적이 있는 아스테카 시대 신전과 궁전의 흔적이 남아 있고, 콜로니얼 시대 상징인 산티아고 교회와 산타크루즈 대학 터가 남아있다. 현대 신도시 건축물로는 건축가 페드로 라미네스 바스케스가 1965년에 설계해 지은 흰 대리석의 외교부 청사가 있어 세 시대 건축물이 혼성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틀라텔롤코에는 혼성 문화의 상징 역할뿐만 아니라 멕시코시티에 남아 있는 아스테카 제국의 흔적과 콜로니얼 시대 건축물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고,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해야 하는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다. 세 문화의 광장에는 멕시코가 메스티소 국가라는 것을 의미하는 기념비가 있다. 비문에는 1521년 8월13일 콰우테목이 영웅적으로 방어하려던 틀라텔롤코는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힘에 굴복했다. 그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다. 오늘날 멕시코를 이루는 메스티소 민중의 고통스러운 탄생이었을 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③

1521년 틀라텔롤코 전투에서 승리한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제국의 흔적을 없애려고 신전과 부속 건물을 파괴했다. 그 후 멘도사 안토니오 총독과 후안 주마라가 주교는 신전을 부순 돌로 1535년 산티아고 성당(Santiago de Tlatelolco)과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신전 부지 위에 세웠고, 지금도 이 성당은 파란만장한 멕시코 역사를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1536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식 교육기관인 산타크루즈 대학(Colegio de Santa Cruz de Tlatelolco)도 이 돌로 지었다. 대학 설립 초기에는 나우아어와 베라크루스타바스코 지방의 마야어 통역과 번역 중심으로 교육했다. 하지만 누에바 에스파냐 건설의 신앙적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한 교세 확장과 교회가 늘어 본국에서 사제 충원이 어렵게 되자, 크리오요(Criollo)와 원주민 귀족 아들을 선발해 사제와 수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도 했다. 특히 원주민 선교를 위한 사제 양성은 아스텍 지배 계급 중 가장 권위 있는 가문의 남자아이들을 선발해 나우아어 마야어스페인어 라틴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음악 수사학 논리학 철학 토착 의학 등을 라틴어로 교육했다. 틀라텔롤코는 테노치티틀란보다 13년 늦은 1338년에 세웠다. 이곳에도 테노치티틀란의 마요르 신전과 유사한 형태의 피라미드와 궁전이 있었으나 파괴됐고,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의 흔적에서 화려했던 그때를 상상케 한다. 멕시코 고고학자들은 틀라텔롤코 지역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와 궁전 단지를 2009년 발굴 조사했다. 신전의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과 벽 외에도 인신공희로 희생된 사람의 목을 얹어 놓은 해골 기단인 촘판틀리(Tzompantli)에서 두개골 형상의 부조를 발굴했다. 그 외에도 아스텍의 달력과 우주관을 새겨놓은 태양의 돌(Aztec Sun Stone) 부조를 포함해 다양한 유물과 함께 49구의 유골이 안치된 대규모 무덤도 발굴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②

한 나라의 문화를 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광장과 시장이다. 시장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여론을 확산하기 쉽고,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도 시장이었다. 틀라텔롤코는 아스테카 제국에서 가장 큰 시장을 갖춘 도시였다. 아스테카 제국은 이 섬을 상업 중심지로 발전 시켜 메소아메리카 전역에 무역 체계를 구축했고, 생필품과 더불어 흑요석 같은 전쟁 무기 재료를 공급함으로써 막강한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틀라텔롤코 섬을 점령한 후 가장 인상 깊은 곳은 광장 주변의 시장이라고 기록했다. 코르테스는 카를 5세 국왕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 도시에는 여러 개의 광장이 있고, 그 광장에는 날마다 시장이 열리고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살라망(Salamanca, 에스파냐 대도시) 대광장보다 크기가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큰 광장이 하나 있는데, 광장 둘레에는 상점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날마다 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 물건을 사고팝니다라고 했을 정도로 틀라텔롤코 광장에는 거대한 상권이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황금과 보석이 필요했던 코르테스 일행에게는 단지 전설 속 도시 엘도라도(El Dorado)를 찾았을 뿐이다. 이 보고서만으로는 시장 규모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16세기 살라망카 인구가 2만 명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틀라텔롤코 섬에는 살라망카 인구보다 3배 많은 사람이 매일 시장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수치를 토대로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인구와 주변 부족의 유동인구를 고려해본다면 아스테카 제국이 얼마나 거대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①

여섯번째 에피소드 타이틀은 틀라텔롤코의 세 문화의 광장이다. 지금의 멕시코시티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만, 아스테카 제국 시절에는 드넓은 호수였다. 아스텍 사람들은 섬의 지형적인 이점을 살려 도시를 건설했고,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는 호수 안 섬 중에서 가장 컸다. 아스테카 제국은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섬과 육지 사이에 단 세 곳만 둑길을 만들어 연결했다. 틀라텔롤코에서 아스텍 전사들은 제국의 운명을 걸고 코르테스의 침략군에 대항해 최후 항전을 벌였으나 열악한 무기와 군사전략의 부재, 동맹 부족의 반란으로 패하고 말았다.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과 달리 틀라텔롤코는 상업 중심지로 아스텍 사람들의 역동적인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그 사실은 처절한 시대를 사랑한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작품 틀라텔롤코 시장에서 화려했던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스테카 제국은 1521년 패망하기 이전까지 약 200년 동안 멕시코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으나, 코르테스의 손에 철저히 파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처럼 새로운 문명은 기존의 문명을 파괴해야 탄생하는 운명일까. 누에바 에스파냐 건설이 시작되면서 멕시코는 새로운 혼혈(mestizale)의 시대가 출발했고, 그 실상은 틀라텔롤코 세 문화의 광장에서 엿볼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5-⑥

소칼로 광장 옆에 있는 콜로니얼 시대 전형적인 건물인 대통령 궁 계단 전면에 아스테카와 정복자 시대가 만나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작품으로, 매우 사실적이고 상징적인 것들이 오밀조밀하게 묘사돼 있다. 이 벽화는 지금의 멕시코가 세워지게 된 아스텍과 콜로니얼 두 시대가 만나 혼성(mestizale)을 통해 문화적 동질화(Aculturacion)가 이루어진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메스티소는 아스테카 제국 이후 멕시코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늘날 아스테카 문화를 이어가는 핵심이다. 어둠이 드리운 소칼로 광장에는 발목에 방울을 달고 짧은 치마에 망토를 쓴 젊은이들이 머리에 화려한 깃털을 꽂고 전통춤을 춘다. 그들이 펼치는 춤사위는 아름다움을 뽐내거나 성적인 자극과 거리가 멀다. 대부분 남성인 그들은 아스테카 전사처럼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선조들의 춤사위를 펼친다. 이제 그들은 전사가 아니라 역사를 알리고 문화를 이어가는 문화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여행 떠나기 전에 단편적으로 바라본 멕시코 역사에 대한 시각은 화려한 문명을 가진 국가고, 태양신에게 인간의 심장을 바치는 인신공희 풍습과 피라미드 정도 알았다. 하지만 아스텍 유적지와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콜로니얼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찬란했던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 그리고 메스티소의 탄생과 그들에 의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혼성의 현장을 봤다. 여행은 설렘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 편의 시네마스코프 드라마다. 떠나기 전에는 새롭게 만나게 될 것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설레고, 돌아와서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삶도 여행이다. 오늘도 인생이란 여행길에 추억의 공간에 돌을 쌓고,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여행을 꿈꾼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5-⑤

말린체는 비록 정복자 코르테스의 통역사와 정보원 노릇을 했지만, 그녀로서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코르테스의 정부가 됐지만, 이것 또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코르테스에게 말린체의 통역과 원주민 사회에 관한 정보가 없었다면 에스파냐의 아스텍 정복 역사는 어느 정도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 말린체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말린체는 두 시대가 충돌하는 불행한 시점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비련의 여인이다. 멕시코에서 그녀는 부재하면서도 항상 현존하는 사람(El personaje austente siempre presente)이라는 말로 그녀의 이미지를 함축성 있게 표현하고 있다. 식민시절 에스파냐 침략자는 하얀 피부를 가진 자신들의 후예 크리오요(Criollo)가 원주민의 피가 섞인 메스티소보다 혈통적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멕시코혁명 이후 주인은 이제 메스티소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메스티소의 이미지는 혁명 후 급격하게 바뀌었고, 혁명 정부는 메스티소를 통합된 국가의 전형적인 국민상으로 제시하며 새로운 혁명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상징으로 삼았다. 당시 혁명 정부의 지도자들은 원주민의 육체와 백인의 지성이 결합해 원주민의 적자생존 힘과 백인의 적절한 진보 성향이 조화를 이룬 것이 메스티소라고 극찬했다. 교육부 장관을 지낸 호세 바스콘셀로스(Jos Vasconcelos)가 메스티소를 미래 국민문화의 담지자이며 우주적 인종이라고 추켜세웠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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