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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경기교육] 기후위기로 ‘다 죽는다’는 말이 가리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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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경기교육] 기후위기로 ‘다 죽는다’는 말이 가리고 있는 것

폭염·한파 재난재해 소외계층 집중 타격
전기세 압박에 냉·온방 시설 이용 못해
기후변화 대응 불평등 개선 함께 다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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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아 군포e비즈니스고

기후 위기가 이슈다. 우리는 기후 위기 등장에 “우리 다 죽는단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평소대로 살다가 죽을래”와 “우리 다 죽는단다. 뭐라도 하자” 등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둘은 다르지만, 공통점 또한 있으니 둘 다 미온적인 태도를 낳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우리의 상황을 아무리 봐도 임종 직전의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면은 절멸이라는 언어가 지닌 개인성에 있다. ‘우리 다 죽는다’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부각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것에 포함된 ‘나’다. 나의 죽음은 나의 소관이다. 내가 죽는 건 내 마음이다. 따라서 절멸이라는 언어에는 체념의 자유가 반드시 따라붙고, 기후 위기에 대한 행동을 개인 선택의 영역으로 격하시킨다. 결국 ‘다 죽는다’라는 깃발로는 많은 사람을 끌어모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다 죽을 것이냐에 있다. 분명 우리는 ‘다 죽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직시할 때 이른바 ‘종말론’이 가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다 죽지는 않지만, 우리 중 일부는 분명 죽거나 고통을 겪을 것이며,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일 거라는 점이다. 기후 위기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기후 위기는 불평등을 극대화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기후 위기는 우리를 모조리 죽이는 핵폭탄이 아니라 일부만을 노리는 정밀타격기다.

일례로 1995년 7월 전대미문의 폭염이 시카고를 덮쳤다. 40도가 넘는 기온에 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이 조건을 충족했다. ‘원룸에서 혼자 생활’, ‘노인’, ‘가난함’, ‘사회적 관계가 전무’. 이런 사람들에게 폭염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 어디 있었을까? 이때 시행되고 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복지의 조건으로 노동을 요구했던 터라 노인과 같이 노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복지 시스템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있던 에너지 지원 정책의 예산은 유례없는 폭염이 일어난 그해에 삭감됐다(물론 그전부터 지속적인 삭감추세가 있었다). 또 이들이 살던 지역사회는 치안이 나쁘고 사회 기반 시설과 공공시설이 크게 낙후된 지역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람은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빈곤층, 특히 노인들도 매우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 환기가 잘 안 되는 등 거주 공간의 구조와 에어컨, 전기료 부담 문제가 결합해 이들을 압박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상 공간과 수면 공간에서 훨씬 큰 더위를 느낀다. ‘견디기 어려운 정도’라고 한다. 이 같은 문제는 겨울에도 그대로 나타나, 이들에게 질병을 안겨준다. 이들은 더위를 피할 장소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필요로 하지만 아마 주변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 이들의 노동 공간은 십중팔구 야외이다. 집이 저지대에 있는 경우 폭우가 올 때마다 침수의 위험에도 노출된다. 이 극단에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생활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나는 이런 문제를 내 주변에서 찾아보기 위해 주변 노후 빌라들을 돌아다니면서 혼자 사는 어르신을 찾아다녔다. 처음엔 맴돌기만 하다가 겨우 용기를 내 한 분과 대화하게 됐다. 복잡한 사정을 빼면, 한 달에 30만원으로 생활하는 가난한 할머니였다. 에어컨이나 더위를 피할 장소가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그런 거 없어’라고 했다. 다리가 아파서 열심히 다니던 교회도 못 나가며 최대 활동 반경이 집 앞까지라는 말을 듣고 ‘더위의 포위’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열린 문 너머로 선풍기 하나 달랑 있는 단칸방의 모습을 봤을 때는 더욱더 그랬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다 죽는다’는 말은 기후 위기를 평등한 위협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는 우리에게 진정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게 한다. 또 그 말이 내재한 추상성은 기후 위기가 빠르게 진행되는데도 사람들은 평온하게 사는 이상한 현실을 낳는 데 일조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미지는 언제 도래할지 모를 지옥의 난장판이 아니라, 현재 고통을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이다. 여태까지 조명되지 않던 부분을 조명해 거기로 우리의 시선을 모아야 한다. 종말론은 자기 죽음에 쿨한 사람들이 에어컨 틀어놓고 드러누워서 과자 씹으며 문제를 회피하는 행태만 양산할 뿐이다.

즉, 우리는 이제 기후 위기의 불평등성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을 불평등 개선과 강하게 엮어야 한다. 이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시민들의 의무와 책임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이는 인권의 영역으로써, 그것은 배려나 온정이 아니라 인류가 발견한 위대한 ‘원칙’이다. 기후 위기 시대에 그것을 손에서 놔 버린다면 결과는 심각한 사회 혼란과 불안정일 것이다.

김건아 군포e비즈니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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