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로고
[지키자! 미래유산] ⑩여주 ‘폐금광’, 금덩이가 넘쳐났던 황금광 시대의 흔적 (上)
문화 지키자! 미래유산

[지키자! 미래유산] ⑩여주 ‘폐금광’, 금덩이가 넘쳐났던 황금광 시대의 흔적 (上)

▲ 여주시 금사면 소유리 소유산에 있는 금광 갱도 입구.
▲ 여주시 금사면 소유리 소유산에 위치한 '팔보광산 갱도' 입구.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 테죠.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편집자주

 

금덩이가 탐이 나 몰래 삼킨 광부가 금덩이에 붙은 독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여주시 금사면에서 내려오는 속설이다. ‘황금광 시대라 불렸던 1930년부터 1970년 사이 동네는 금이 많이 나와 흥성했고,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처럼 금을 둘러싼 소동과 애환도 넘쳤다.

지금도 마을에는 그 시절 우리나라 광업사를 엿볼 수 있는 옛 금광이 남아있다. 소유리 팔보광산과 상호리 여수금산이다. 비록 폐광된 지 오래돼 알아보기 어렵지만 갱도 흔적은 또렷하다. <지키자! 미래유산> 열 번째는 금 열풍이 대단했던 금사면의 오래된 산업유산 폐금광이다.

 

(上) 소유리 팔보광산


6.25 전쟁 때 마을 주민이 피신했던 갱도

▲ 소유리 마을이장 박수헌씨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간 금광 갱도 내부는 조명 시설이 없어 한치 앞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깜깜하며, 바닥에 물이 발목까지 차 있는 상태였다.
▲ 소유리 마을이장 박수헌씨의 안내를 받으며 안동희 여주문화원 사무국장과 함께 들어간 금광 갱도 내부는 조명 시설이 없어 한치 앞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깜깜하고, 바닥에 고인 물이 발목까지 찰 정도였다.

금사면은 예부터 금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 지명도 그래서 금사(金沙). 아직도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금사면 북쪽에 위치한 소유리와 상호리에 금광으로 통하는 갱도가 여러 군데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지난 3일 기자는 안동희 여주문화원 사무국장과 함께 소문의 근원지를 방문해 금광 흔적을 찾아 나섰다.

먼저 소유리로 향했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한참을 헤매다 우연히 만난 소유리 마을이장 박수헌(78)씨의 안내로 팔보광산으로 통하는 갱도를 찾을 수 있었다. 위치는 마을 회관 옆길을 따라 소유산으로 약 2km 올라가야 된다. 밀양 박씨 묘역을 지나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 사이에 가려져 있어, 박씨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굴의 형태는 뚜렷이 남아있다.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갱도 안으로 들어가 봤다. 입구는 높이가 약 2m이며, 들어갈수록 크고 높아진다. 빛이 들어오는 약 10m 이후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 박 씨가 준비해온 헤드랜턴과 스마트폰 불빛에 의존한 채 진입했다. 바닥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 운동화가 다 잠길 정도였는데, 그나마 겨울이어서 이 정도라 한다.

▲ 1. 안동희 사무국장이 팔보광산 갱도 입구의 크기와 형태 등을 살펴보고 있다. 2. 동굴 벽 양옆에는 6.25전쟁 때 마을 사람들이 피신해 생활한 흔적으로 보이는 움푹 파인곳이 여러개 있다. 3. 군데군데 노란빛이 도는 돌. 4. 곳곳에 설치된 나무 지지대. 5~6. 굴 안으로 150m가량 들어가면 박쥐들이 천장과 벽에 가득 붙어있다.
▲ 1. 안동희 사무국장이 팔보광산 갱도 입구의 크기와 형태 등을 살펴보고 있다. 2. 동굴 벽 양옆에는 6.25전쟁 때 마을 사람들이 피신해 생활한 흔적으로 추정되는 움푹 파인곳이 여러개 있다. 3. 군데군데 노란빛이 도는 돌. 4. 곳곳에 설치된 나무 지지대. 5~6. 굴 안으로 150m가량 들어가면 천장과 벽에 가득 붙어있는 박쥐들을 볼 수 있다.

안으로 150m쯤 들어가자 굴의 높이가 약 5m로 부쩍 높아졌고, 천장과 벽에는 박쥐들이 가득 붙어있다. 주변에는 나무 지지대 등 금 채취와 관련한 흔적이 남아있다. 랜턴을 비추다 보니 군데군데 노란빛이 도는 돌도 눈에 들어왔다.

금일 수도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던 박 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금 캐러 다니시고, 난 어릴 때 여기 와서 돌 쌓으며 놀고 그랬어. 그때 이 굴에서 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어른들이 똥구덩이라고 불렀다니까. 금 욕심나서 금덩어리를 먹고, 집에 와서 이틀 뒤에 대변 봐서 금을 훔친 광부들도 있었다며 팔보광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동굴 벽 양옆에 움푹 파인 곳도 여러 개 보였다. 박 씨는 6.25 전쟁 때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해 생활한 흔적이라고 했다. 몇 발짝 더 걸으니 앞이 막혀있다. 세월이 흘러 흙과 돌이 무너져 내려 막힌 탓인지 이 갱도의 길이는 약 200m로 길지는 않다.

 

팔보광산의 두 번째 갱도 그리고 복대기 터

▲ 1. 팔보광산으로 통하는 두 번째 갱도가 있는 아시바 야적장 전경. 2. 두 번째 갱도 입구에는 각종 자재가 쌓여있어 들어갈 수 없는 상태다. 3. 금 제련에 사용했던 야적장 앞 연못. 4. 금광 관리사무소가 있었던 소유리 마을회관 전경.
▲ 1. 팔보광산으로 통하는 두 번째 갱도가 있는 아시바 야적장 전경. 2. 두 번째 갱도 입구에는 각종 자재가 쌓여있어 들어갈 수 없는 상태다. 3. 금 제련에 사용했던 야적장 앞 연못. 4. 금광 관리사무소가 있었던 소유리 마을회관 전경.

이곳을 빠져나와 팔보광산으로 통하는 또 다른 갱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두 번째 갱도는 마을회관에서 멀지 않은 아시바 야적장부근에 있다. 굴 입구에는 각종 자재가 쌓여있어 들어갈 수 없었지만 높이는 약 2m로 앞서 본 갱도와 비슷하다.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이 갱도가 남아있는 굴 중 가장 크고,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길다고 추측한다.

박 씨에 의하면 야적장 자리는 원래 복대기(금을 채취하고 남은 광석 찌꺼기)가 있었던 곳이다. 바로 앞 연못은 금을 제련하는데 사용했고, 마을회관 옆에 금광 관리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향토지 <상호리지>에는 1939년 찍은 이 관리사무소 사진이 실려 있지만 지금은 잔디가 깔려 있고 언제 헐렸는지 기록은 찾을 수 없다.

▲ 상호리지에 실린 1939년 금광 관리사무소 사진.
▲ 상호리지에 실린 1939년 금광 관리사무소 사진.

이처럼 갱도의 흔적은 2곳이나 뚜렷하게 남아있지만, 현재 금광까지는 확인하기 어려워 팔보광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다. 여주군(현 여주시)에서 1989년 발간한 <여주군지>를 살펴보면 1970년 팔보광산(삼정광업소) 금 생산량은 150t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팔보광산이 언제까지 운영됐는지에 대한 자료도 정확하지 않다. 여주문화원에서 1998년 발행한 <금사면지>에는 1932년 개광되었고, 6.25 이후 폐광됐다고 간략하게 적혀있을 뿐이다. 하편에 계속..

글·사진=황혜연기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