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로고
[지키자! 미래유산] ③가평 ‘청평댐’, 우리가 몰랐던 근로보국대 희생의 흔적
문화 지키자! 미래유산

[지키자! 미래유산] ③가평 ‘청평댐’, 우리가 몰랐던 근로보국대 희생의 흔적

- 가평군민 노동력 대거 동원된 댐 건설
- 근로 보국대 43인 희생 고스란히

▲ 가평 청평면에 위치한 청평수력발전소와 청평댐 전경.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 테죠.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

편집자주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문을 보유한 가평 청평댐에는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가 있다. 겉보기엔 그저 육중한 토목건축물일 뿐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가슴 아픈 역사가 또렷하게 보인다.

80여년 전 댐을 만들기 위해 강제 동원된 지역 주민들, 혹독한 노동에도 공사를 강행한 일본, 그리고 6.25 전쟁이 남긴 파손과 반복된 복구작업까지. 산업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청평댐을 <지키자! 미래유산> 세 번째로 소개한다.

 

1944년 완공 속 새겨진 질곡의 역사

▲ 영하의 날씨에 청평댐 24개의 수문으로 흘러내린 물이 얼어붙었다.

눈이 날리고 강물이 얼어붙은 날, 청평면에 위치한 청평수력발전소를 찾았다. 도착하니 길이 470m, 높이 31m나 되는 거대한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북한강 수계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청평댐이다.

청평댐은 전력 생산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발전용 댐이다. 물이 흘러내리는 수문만 24개다. 수문은 1년에 1~2번가량 홍수기에만 열고 평상시에는 닫혀 있으며 발전소 쪽에 있는 취수문비를 열어 발전을 하고 있다. 4기의 발전소를 갖추고 있고, 최대 발전 용량은 139600. 이는 46500여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이다.

청평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부모 세대가 공사에 참여해 만들어졌다고 어렴풋이 기억한다. 현재는 청평댐을 기억하는 이들이 작고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지만, 다행히 댐 공사에 참여했던 주민의 생전 인터뷰를 담은 향토지가 남아있다. 가평군사편찬위원회가 2006년 간행한 <가평군지>. 여기에 수록된 이태용(1913년생·달전리)씨의 증언에 의하면 댐 건설은 근로 보국대가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 가평군사편찬위원회가 2006년 간행한 '가평군지'에 수록된 20대 시절의 이태용씨 모습과 1941년 근로 보국대에 동원된 청년들 사진. 

 

보국대라고 청평발전소 지을 때, 거기도(청평댐도) 각 군에서 전부(동원)해서 한 건데 나도 50여 일 동안을 ()했는데. 거기 가서 곡괭이질, 삽질하고 기술 있는 사람은 남포 하는 사람도 있고. 난 그냥 삽질 50일 동안 했는데, 일당은 생각이 안 나. 27살 때(1939)인데 그건 돈 바라고 하는 건 아니야. 군에서 나오라 해서. 배가 고파서 (했지). 날랜 사람들은 (밥을)푹 담아가지고서 어느새 4~5번씩 빈 그릇이 나왔지. 점심, 저녁을 주었어. ()도 다 갈았지. 우리는 키모토(木本), 집안이 다 갈았었어. 해방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

<가평군지>에 의하면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중이었던 일본은 인천에 있는 군수공장 전력 공급이 다급해지자 북한강 유역에 청평댐 건설을 계획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대용량의 전력 확보가 가능해 수력발전소를 짓기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8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19398월 한강계의 전원개발을 위한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 설립 및 댐 건설에 착수했다. 공사는 하청 건설사 카지마구미(鹿島組)’가 진행했다. 해당 공사에 투입된 노동력은 근로 보국대(조선인 노동력 수탈기구)’라는 미명 하에 강제 동원된 지역 주민들이다. 학생, 여성, 노인, 농부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하게 끌려 나와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주로 공사에 소요되는 모래와 자갈을 북한강 물에 씻는 작업에 투입됐다. 기초가 탄탄한 댐을 만들려면 골조부터 세척해야 한다는 방침 때문이었다. 청평댐이 오늘날도 튼튼한 이유가 골조를 깨끗이 씻어 썼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을 감수해야 했던 그들의 희생으로 1943년 청평댐이 완공됐다. (9,800용량의 1·2호기가 각각 7, 10월에 완성) 청평댐이 생김으로써 북한강에 면적 12.5, 저수량 18500만 톤 규모인 청평호반이 형성됐다. 그 결과 많은 근로 보국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 1.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공난자공양비(工難者供養碑)’ 앞면. 2. 비석 뒷면에는 희생자 43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현재 발전소 본관 앞 언덕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공난자공양비(工難者供養碑)’라는 기념비가 있다.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한강수력전기 주식회사는 청평발전소 공사를 소화 149월 착수해서 4년 동안 진행했다. 동원된 인원은 연 300만 명이다. 그들의 공로로 준공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증거를 남긴다. 공사 과정에서 홍수 방지나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노동은 매우 힘들었으며 그때 조난당한 사람은 실제 기록에 의하면 43명이다. 준공하면서 이곳에 희생자들의 명단을 표시한다. -소화 1891일 한강수력전기 주식회사 청평건설사무소장

비석에는 일본 히로히토(124대 천황) 시대의 연호를 사용했다. 소화 14년은 1939, 소화 18년은 1943년을 뜻한다. 희생자 43명의 이름은 비석 뒷면에 새겨져 있다.
 
발전소 측은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병엽 청평수력발전소 관리팀장은 당시 강제 동원된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다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 이름을 잘 안 지어주셨고 막동’, ‘막내이렇게 적기도 했다. 창씨개명한 사람도 많았다. 또 여성들도 강제 동원됐다고 하는데 여성 이름은 없다. 이름 없이 사망한 사람이 많아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비석 왼쪽 상단 네 번째 이름이 위치한 자리는 무언가에 맞아 깨진 듯 움푹 파여있다. 6.25 전쟁 때 훼손된 자국이라 한다. 지울 수 없는 질곡의 역사를 일제가 속죄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가 희생자들을 잊지 않도록 복원이 필요해 보인다.

 

댐 건설 때 자재 운반의 흔적 교각

▲ 1. 국가기록원에서 1965년 촬영한 청평댐 항공사진 속에는 댐 건설때 자재 운반을 위해 이용됐다는 다리의 교각 모습이 담겨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2. 현재 다리는 부서지고 교각만 남아있다. 

청평댐 앞 아래쪽에는 정체 모를 구조물이 있다. 7쌍으로 이뤄진 콘크리트 기둥들이다. 북한강 건너편의 강안에서 발전소 쪽을 향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세워진 모습이다.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무런 단서가 없어 그동안 사람들은 수위를 확인하기 위한 구조물일 것이다’, ‘심미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냐등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심지어 발전소 관계자들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살펴보면 해당 구조물은 교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댐을 건설할 때 자재나 장비를 실어 나르기 위해 공사장에 설치한 다리였다. 보수공사 이후 다리는 부서지고 현재는 교각만 남은 것이다. 이 교각으로 노동자들의 공사 작업 단서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극심한 피해...걸레로 누수 막은 보수공사

▲ 청평댐 수문 상층부 끝 외벽에 설립 연도가 새겨진 '청평제'.
▲ 청평댐 수문 상층부 끝 외벽에 설립 연도가 새겨진 '청평제'.

19458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며 청평댐의 주인은 대한민국이 됐다. 하지만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으로 청평댐이 북한 치하에 넘어가 발전실의 대부분이 파괴됐다.

한국전력공사의 한국전기백년사에 따르면 청평수력발전소는 1950928일 수복됐으나, 1951년 중공군의 침입으로 발전을 중지하고 직원들은 남으로 피난했다. 그 후 국군의 북진으로 같은 해 3월 초 재수복했으나 피해는 극심했다. 수문 전부 파편화 관통으로 누수가 심했고 문비조작전동기 5, 조작함 7, 변압기 전부가 파손됐다.

복구는 19517월부터 여러 차례 실시됐다. 하지만 전시 상황과 당시 기술로 제대로 된 보수가 진행될 리 만무했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발행한 수차와 원자로사보에 실린 김종주 전 한전부사장 회고담에는 해마다 많은 양의 걸레로 수문 옆 틈새 누수를 틀어막았다는 일화도 있다.

“195610월 어느 휴일, 수상에는 걸레를 가득 실은 작업선이 떠 있고, 잠수부는 작업선과 연결된 고무호스에 생명을 의지한 채 걸레 틀어막기 작업을 했다. 그런데 고무호스가 수문과 수문지주 사이에 끼어 잠수부를 끌어올리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행히 공기 공급 기능이 되었고 신속한 조치로 무사히 구조됐다

말도 안 되는 원시적인 방법이다. 열악한 재정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걸레를 사용한 물막이공사에만 의존했던 것이다. 당시 청평수력을 운영하던 조선전업의 상황이 어땠을지 가늠할 수 있는 사례다.

 

발전소의 역사를 지켜본 은행나무수위계

▲ 1. 발전소 내에 있는 수령 95년 된 은행나무. 2. 방수구 수위계. 3.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오래된 수위계. 4. 홍수 발생 연도와 수치를 기록한 홍수 표식계.

발전소 본관 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어른 두세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의 거목이다. 나무에는 1926년 생이라고 새겨진 작은 돌이 올려져 있다. 1943년 준공 당시에 이미 17년 된 나무라고 한다. 2022년 현재 수령 96년이 된 것이다. 댐의 탄생과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인 셈이다.

4호기로 향하는 길 3분의 1지점 아래에는 오래된 수위계가 설치돼 있다. 연도 표식이 따로 있지 않아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댐과 같은 콘크리트 시설물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 댐이 지어질 때 같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노후됐지만 상태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모습이다.

방수구 수위계 옆 외벽에는 홍수 표식도 있다. 범람한 강물로 검게 변한 흔적과 연식으로 한국전쟁 이후 침수 수난을 몇 차례나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66년 이전 표식이 불명확하다 것이다. 검게 변한 흔적 상단은 표식이 지워지거나 아예 없다.

은행나무와 수위계를 비롯해 홍수 표식계는 댐의 역사를 담은 발전소의 귀중한 재산이다. 하루 속히 표식을 명확히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병엽 청평수력발전소 관리팀장은 발전소 내에서도 홍수 표식의 중요성은 안다. 그래서 표식이 없거나 지워진 연식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문화재 가치 높아...역사관광자원화로 활용해야

▲ 청평수력발전소 4호기
▲ 청평댐 수문 위에서 바라본 청평수력발전소 4호기.

중일전쟁과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적 상황에서 건설된 청평댐. 아픈 역사와 군국주의가 연결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학계에서는 청평수력발전소와 댐 부속시설이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크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라고 있다.

문화재청도 2005년 청평수력발전소에 대해 문화재로서 가치평가 후 등록문화재 추진 계획을 세운 바 있다. 그러나 미지정됐다.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수력발전소는 화천이 유일하다. 화천수력발전소는 200494일 국가등록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됐다. 지정된 이유는 1944년 준공된 전력 공급을 위한 시설로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기념비적인 산업시설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양훈도 경기문화재단 박사(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청평수력발전소가 미지정된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화천발전소 만큼 미래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다. 등록문화재 지정과 견학코스 등의 개발로 역사관광자원화 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와 관련 이병엽 청평수력발전소 관리팀장은 발전소 운영에 문제가 없다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황혜연기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