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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2. 파주 금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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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2. 파주 금촌마을

일제강점기 경의선 금촌역 개설… 파주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

왼쪽부터 1980년대 금촌역, 2000년대 금촌역, 현재의 금촌역
왼쪽부터 1980년대 금촌역, 2000년대 금촌역, 현재의 금촌역

한 지역의 마을에는 수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 이야기 담긴 지난날의 역사는 앞으로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하는 큰 원동력이 된다. 이에 많은 지자체에서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문화재단도 지난해부터 급격한 도시화와 재개발 등으로 사라져 가는 지역의 문화자원을 발굴해 기록하는 ‘경기마을기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파주 금촌 마을 기록화 사업은 상당히 의미 있었다. 파주 금촌 마을은 한국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경의선 금촌역의 개설로 금촌장이 생겨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주의 행정중심이 됐다. 여기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지역 경제가 활성화 됐고, 수도권의 팽창으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다. 지금의 금촌이 파주의 행정, 상업, 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들이기도 하다. 재단이 진행한 금촌 마을 기록화 사업은 급격화 도시로 옛 모습을 잃어가는 금촌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함으로써, 금촌의 또다른 내일 위한 이정표가 됐다.

■ ‘새말’이 ‘쇠말’로

현재의 금촌은 일제강점기 초까지 아동면(衙洞面)으로 쇠재(金陵), 새꽃(新花), 새말(金村), 풀무골(冶洞), 검산(檢山), 맥금(陌金) 등 6개 마을로 형성돼 있었다. 각 마을마다 7~80호 정도의 호 수가 살았다. 1905년 경의선 철로가 부설되기 전까지 금촌은 대부분 논으로 돼 있었는데 10여 호 미만의 농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경의선 부설 당시 새말에는 30~40여 호의 집들이 있었고, 현 금촌역 주변은 모두가 논이었다.

일본인이 역 이름을 정할 때 새말을 가리키면서 “무슨 마을이야”고 묻자 한 촌로가 “새말”이 라고 대답했는데 일본인이 이 말을 “쇠말”로 잘못 알아들어 ‘금촌(金村)’으로 명명 되었다고 한다. 금촌역이 생기자 금촌역 주변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시가지를 이루면서 역명을 따라 이 일대 마을이름이 금촌(金村)이 되었다. 금촌의 땅이름과 관련해 파주지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또 다른 유래는 김정호가 조선후기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나와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이 지역이 ‘금성(金城)’이라 표기돼 있다. 현재 법정동인 금릉동(金陵洞) 지역은 본래 교하군 현내면 지역으로 쇠 또는 금이 묻혀있다 하여 쇠자(金尺)ㆍ쇠재ㆍ금 성(金城)이라 했으며 금성천(金城川, 지금의 공릉천)은 수 많은 상선들이 드나들어 상업이 번창 했던 곳이었다. 금촌의 땅이름은 경의선 금촌역이 정해지기 전부터 이 지역에서 많이 불리던 ‘금(金)’ 자의 지명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크다.

군부대가 동원된 경의선 부설 현장
군부대가 동원된 경의선 부설 현장

■ 금촌의 역사

금촌은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과 마주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먼저 금촌역의 개설이다. 금촌역은 1906년 경의선 개통에 이어 개설된 역사(驛舍)다. 당시까지만 해도 금촌은 교하군 아동면에 속한 시골 촌락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급행열차인 신의주-부산 간 융희호의 운행이 시작되고, 금촌역이 개설되면서 금촌은 순식간에 교하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됐다. 한국전쟁도 금촌에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금촌에 피난민 임시수용소가 마련되면서 인구의 유입이 급속도로 증가한 것. 장단면 등지에서 남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은 모두 금촌으로 모여들게 됐고, 이들 중 상당수는 휴전 후에도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금촌에 남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휴전선의 설치는 금촌이 파주의 유통과 행정의 중심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앞서 금촌역이 개설되면서 역 앞에 금촌장이 들어서 있었지만, 조선후기부터 경기 5대 장시로 불렸던 봉일천장과 문산장으로 인해 크게 주목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휴전선 설치로 한강 하구와 임진강의 물길이 막히면서 봉일천장과 문산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경의선을 배경으로 하던 금촌장만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금촌장이 경기서북부 지역의 유통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됐다. 아울러 행정기관이 대규모로 이전하게 됐다. 전쟁 이전 파주군의 행정기관은 대부분 문산을 중심으로 위치해 있었는데, 전쟁 중에 임시 이전했던 파주군청을 포함한 행정기관 등이 금촌(당시 아동면)에 완전히 머무르게 된 것이다. 미군 부대의 주둔도 금촌에 변화를 일으킨 주요 요인 중 하나다. 캠프 에드워즈(Camp Edwards)와 캠프 하우즈(Camp Howze), 캠프 스탠턴(Camp Stanton)이라 불리는 미군 2사단 공병부대의 존재와 비무장지대를 경계하던 미군 제7보병사단은 전쟁이 끝난 후 복구 시기에 금촌의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밑바탕이 됐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부동산 경기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수도권으로 인구가 계속 유입되면서 파주가 본격적으로 도시화되기 시작됐고, 금촌 역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다시 한 번 중흥의 기회를 맞게 됐다.

군사분계선 설치
군사분계선 설치

■ 지켜야할 금촌의 문화 유산

금촌이 있는 파주 일대는 그 역사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파주의 동서를 흐르 는 임진강 연안을 끼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임진강 연안지역 선사시대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영위했음을 짐작케한다. 특히 금촌동과 인접해 있는 월롱면 덕은리 옥석동 일대에서는 주거지 및 빗살무늬토기, 마제 석촉 등이 출토됐다. 150편에 달하는 빗살무늬 토기 파편들과 고인돌 밑에서 발견된 주거지는 신석기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아가 있던 마을이었다. 때문에 금촌에는 교하향교가 남아 있는데, 원래 1407년 갈현리에 창건했다가 이후 1731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현대에 들어서 1968년 담장을 보수했고, 1971년과 1973년에 대성전(大成殿)과 부속건물을 중수했다. 인물도 빼놓을 수 없다.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정태진 선생은 금촌에서 태어났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 큰사전> 편찬과 대학 강의 활동을 전개했지만, 195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정태진 선생의 생가터는 당시 주소로 경기도 교하군 아동면 금릉리 406번지인데, 지금의 주소로는 금촌2동 1018번지다. 당시 정태진 선생이 살았던 집은 멸실됐지만, 인근에 기념관으로 복원해 놓았다.

송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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