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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1. 경기감영 경기감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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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1. 경기감영 경기감영터

京畿 지명 1천년의 해… 옛 경기도청사 흔적을 찾다

경기감영도 일부 (왼쪽) 경기감영 자리에 들어선 한성부 건물 모습.
경기감영도 일부 (왼쪽) 경기감영 자리에 들어선 한성부 건물 모습.

경기도는 오랜 역사와 유구한 문화 자산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도시개발, 관리소홀 등의 문제로 사라지거나 제 모습을 잃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본보는 ‘경기 역사ㆍ문화를 기록하다’를 주제로 경기도의 역사 보여주는 문화 유산을 기록함으로써 경기도민에게 알리고 그 중요성을 환기시킬 계획이다.

앞서 경기문화재단도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 가치를 정립하기 위한 기록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지난해 옛 경기도청인 경기감영,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파주 금촌마을 등을 조사하고 문헌, 영상 등으로 기록했다. 이중에서도 경기감영 기록사업은 상당히 의미있었다. ‘경기’라는 지명을 얻었던 고려시대부터 경기감영이 설치된 조선시대, 그리고 근현대사 속의 경기도청까지 세세하게 살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쳐 지금의 경기도청이 설치되기까지의 여정은 한국 역사의 질곡을 보는 듯 하다. 재단은 경기감영을 조사하고 기록함으로써 경기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재조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총 8회에 걸친 기획기사에는 경기감영을 비롯해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파주 금촌 마을 등 재단이 진행했던 기록사업의 성과물을 되짚어 봄과 동시에 새로운 역사 문화 유산을 소개하고, 전문가 제언 등을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주

■ 고려시대 ‘경기’ 개념의 성립과 조선시대 경기감영’의 설치

올해는 ‘경기(京畿)’라는 지명이 생긴지 꼬박 1천년이 되는 해다. 1018년(현종 9) 왕경을 제외한 나머지 적현과 기현 12곳을 묶어 경기라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 현종대의 경기는 궁원전(宮院田)과 중앙관청의 공해전(公田) 등을 집중시켜 왕실과 관청의 경비 조달을 용이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됐다.

경기는 1069년(문종 23) 양광(楊廣)·교주(交州)·서해도(西海道)로부터 39현을 이입해 총 52현을 관할하는 규모로 확대됐다 재축소됐고, 1390년(공양왕 2) 44현 규모로 다시 확대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설치됐다. 이 때의 경기는 좌도와 우도로 분리돼 통치됐다. 조선이 개국하고 새로운 도성이 건립되면서 경기의 범위는 재설정됐다.

1395년(태조 4) 본래 경기에 속했던 7개 고을을 서해도로 옮기고 양광도에 속했던 9개 고을을 경기로 옮겨 한양 중심의 경기 영역을 구축했다. 경기의 행정 사무를 도맡던 ‘경기감영’도 이 시기 설치됐다. 오늘날의 경기도지사인 경기관찰사는 역대 집권세력이 중요시한 자리 중 하나였다. 경기가 8도 중 가장 큰 도이자 외교와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종2품보다 품계가 높은 대신(大臣) 반열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감과 대궐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경기관찰사의 업무에는 몇 가지 특이점도 있었다. 대궐에 입시해 왕을 친견하는 횟수가 잦은 편이었으며, 유지와 장계의 전달 및 처리 속도가 다른 도의 감에 비해 빨랐다.

경기감영터 표지석
경기감영터 표지석

■ 옛 경기감영의 모습

경기감영은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 밖 약 250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돈의문을 등지고 나와 좌측으로 말을 관리하던 관청인 고마청과 우측으로 빈관(객사)을 지나면 경기감영에 이르렀다. 경기감영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으면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과 은문으로 이어지는 의주로가 나왔다.

의주로는 명과 청의 수도인 북경과 한양을 잇던 길로써 외방도로 중 가장 발달했다. 주요 교통로던 만큼 외침과 내란 모두에서 도성 수비의 요충지인 동시에, 유통과 상업의 측면에서 도 중요도가 높은 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황토현(현 세종로사거리)에서 경희궁 앞을 지나 경기감영에 이르는 길의 폭은 약 17m으로 상당한 규모였다. 당시 경기감영의 모습은 ‘경기감영도’에 잘 그려져 있다. 작자 미상의 경기감영도는 조선후기 돈의문 밖을 그린 그림이다.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경기감영, 경기빈관, 경기중영, 고마청은 화면 한가운 데에 평행투시도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비교적 건축실상을 짐작할 수 있을만큼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경기감영의 진입은 다른 감영과 마찬가지로 삼문(三門) 체계로 돼 있다. 포정문 → 중삼문 → 내삼문을 거쳐 선화당 앞마당에 이른다. 외삼문 → 내삼문을 거쳐 정청으로 진입하는 이문(二門) 체계였던 중앙관아와 비교하면 경기관찰사의 위상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수원으로의 이전

경기감영은 1896년(고종 33)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13도제가 실시되며 수원으로 이전됐다. 1898년 남궁억과 나수연 등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1902년 4월11일자에는 “한성부는 평양대 문으로 정하고 이 부는 전 경기빈관으로 이전하여 이미 수리가 준공된 고로 본 월 11일에 들어가고 내부에 보고 하더라”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 기사에서 한성부가 들어서기 전에 평양대라 불리는 군대가 옛 경기감영 일대를 전용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으며, 1902년 4월께에는 한성부가 경기빈관 일대를 전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승정원일기’ 1901년(고종 38) 3월 기사에는 “불러 올린 평양 제2대대가 머물 장소를 한성부로 옮겨 정하라”라는 고종의 하명이 담겨 있고, 1902년(고종 39) 3월 기사 에는 “한성부와 한성재판소는 전 기영의 빈관을 함께 써서 그대로 머물고, 불러올린 평양 제2대대가 주둔할 곳은 해부(該府) 안에 나누어 정하라”라는 내용이 있다.

경기감영이 수원으로 이전된 직후의 전용 상황은 알기 어렵지만 1901년께에는 평양 제2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1902년 4월부터는 한성부와 평양 제2대대가 경기감영 터를 함께 전용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옛 경기감영터에서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송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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