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 산업마다 위기와 처방은 다르지만 일관되게 제기된 단어가 아키텍처(Architecture)의 부족이다. 세부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전체적인 시스템 설계 능력을 말한다. 결국 이 같은 능력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무형의 지식과 노하우가 있어야 가능하다.
메모리반도체와 원자력을 제외한 우리 산업에는 이 같은 아키텍처가 부족하고 이를 길러내기 위한 연구와 투자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방 추격형 산업발전 모델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아키텍처가 가능할 수 있는 인재의 개발과 축적의 시간을 강조한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서구의 기업들에는 그 역사가 수백 년에 달하는 강소기업들이 많다. 일본도 부품소재 등 기술력이 집약된 노하우로 대기업은 아니지만 저성장을 극복하고 각 산업분야별로 부활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단순히 내려온 전통이 아니라 현장의 경험자들이 축적해 놓은 노하우를 통해 그 시대에 필요한 창조적인 기술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광하는 산업 아이디어 대부분은 축적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창조는 이전의 이론과 경험이 만들어 낸 결과다. 하지만 우리현실은 기초적인 경험(기계중심, 노동중심)을 중단하고 변형과 창조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해있다.
축적된 경험의 중요성은 산업분야만이 아니다. 정치제도나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축적의 시간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사조도 그 시대정신을 담지 못할 때마다 새로운 사조에 퇴조 당했다. 시대 전체 흐름을 역류하며 탄생한 화가의 한 장의 그림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축적된 시간이 가져다준 결과다.
열광하는 맛집도 오랜 시간 고객과 함께 만들어 낸 그 집만의 노하우가 있어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별다른 맛의 차이가 없는데도 장소를 옮기거나 주인이 바뀌면 손님의 발길이 끊기는 것은 축적된 경험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오랜 농부여야 일소의 눈빛을 알 수 있듯이 우리사회가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축적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풍토가 절실하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미국독립선언과 프랑스혁명이 가져다준 민주주의가 지금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는데 250년의 역사가 있었다. 많은 국가들이 이 기간 동안 좌절과 성공을 반복했다. 대한민국의 촛불시민혁명도 실패를 거듭한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평화적인 집회로 새 역사를 쓸 수 있었다. 탄핵반대세력의 집요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끝까지 평화시위를 고수한 것도 이전의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에 평화집회가 가능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새로움은 기존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경험이 많음은 그 시기에 적절한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희망적인 것은 기간이 짧음에도 반복적인 민주화 운동을 축적하고 있다는 데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선택하는 대선이 시작됐다. 그 뜨거웠던 광장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의 태도는 이전의 축적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민주적인 제도와 제안이 산적한데도 사소한 사진 한 장으로 또는 말 한마디에 시간을 낭비하고, 표피적인 단어에 후보진영이 올인하는 여론전에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선은 재미있는 불구경, 싸움 구경판이 아니다. 후보자들이 만들어 낸 시민중심의 통찰을 보고 싶어 한다.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정치인은 살아남을 수 없다. 아니 그들에게 정치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촛불을 통한 경험이 증명해 주었다.
대선 후보들은 ‘위기의 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심화되는 불평등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초고령사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세계의 화약고가 된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축적의 역사가 증명해 주었다.
최종식 미디어전략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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