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숙인들, 한 칸의 쉼터도 없다 정치인들, 표에 눈멀어 잔인해졌다
-미셀은 집을 나온 노숙인이다. 원래 부유한 화가였다. 시력을 잃는 병을 얻자 가출했다. 그녀가 거지 알렉스를 만났다. 인생을 포기한 여성 노숙인과 전형적인 거지의 만남.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됐다. 공사 중인 퐁네프의 다리가 보금자리였고, 구걸해온 날 생선이 사랑의 만찬이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 우리와 똑같은 질투와 행복이 있었고 이별과 재회가 있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원제: The Lovers On The Bridge)이 그리는 노숙인의 생활은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그리고 그 위로 보통의 인간이 느끼는 사랑이 가감 없이 겹쳐졌다. 세상이 버린 자들이 만들어가는 세상과 똑같은 사랑 얘기다. 줄리에뜨 비노쉬(미셀)의 명연기가 아니더라도 소재 자체로 충격이다. 뉴욕 타임스는 이 노숙인들의 사랑 얘기에 ‘신이 내린 걸작’이라는 평을 선사했다.
검열로 난도질 된 이 영화가 상영되던 1991년, 우리에게 노숙인이라는 말은 없었다. 거지와 걸인, 부랑아가 다였다. 좌절과 절망에 길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이 등장한 건 그로부터 10년쯤 뒤다. IMF의 후폭풍이 낳은 모습이었다. 거지는 더 이상 타고 나는 팔자가 아니었다. 누구나 아차 하면 추락하게 되는 발밑의 현실이었다. 노숙인이 적선이 아니라 정책의 대상이 된 게 그때부터다.
그리고 또 10년이 지났다. 그런데 나아진 게 없다. 노숙인 대책은 여전히 잉여(剩餘)정책이다. 여유 있으면 챙겨주는 정책, 남는 돈 있으면 나눠주는 정책이다. 남성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여성 노숙인은 아예 고민과 적선의 대상도 아니다. 남성 노숙인부터 챙긴 뒤 남는 여유가 있으면 비로소 차례가 온다. 국가가 남성 노숙인을 버렸다면, 여성 노숙인은 그 남성 노숙인에게조차 밀려나고 있다.
통계랄 것도 없다. ‘전체 노숙인에 10~15% 정도’라는 추측만 수년째다. 엉터리다. 공무원들이 출장 나가는 역(驛) 주변은 힘있는 남성 노숙인들의 공간이다. 폭력과 성폭행을 감수하면서 그곳에서 버티는 여성은 없다. 모두 예배당, 병원 대기실, 건물 계단으로 몸을 숨겼다. 9개의 보호시설을 운영하는 경기도가 단 한 칸의 공간도 여성 노숙인에게 내주지 않는 게 이런 엉터리 통계때문이다.
그들은 가출한 게 아니라 출가 된 거다. 어느 복지 단체가 ‘왜 나왔느냐’고 물었다. 20~40대 여성은 배우자의 폭력을, 60~70대 여성은 자식들의 버림을 얘기했다. 폭력을 피해 나왔고 버림받아 쫓겨났다고 답했다. 그런 사람들이 또다시 사회에서 폭행당하고 쫓겨 다니고 있는 거다.
언제 들어도 참혹한 게 노숙인 얘기다. 안타깝지만 듣지 않으려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이런 얘기를 구태여 한가위의 풍요로움 끝자락에 붙들고 있는 이유가 있다. 너도나도 복지를 얘기하는 정치권의 추석 화두때문이다. 복지의 기본도 못하는 나라에서 복지의 천국을 얘기하는 게 하도 우스워서다.
복지의 기본이 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 보장이다. 아름답게 살고 풍요롭게 살아갈 복지는 이런 기본을 끝내고 나서의 일이다.
배급(?)으로 한 끼니를 때운 결식아동들은 나머지 두 끼니를 공복으로 버틴다. 추석명절이 괴로운 결손아동들은 놀이터가 싫어 연휴 내내 방안에서 지냈다. 하루 2천500원짜리 도시락을 기다리는 재가(독거)노인들은 혹시나 끊길까봐 명절이 두렵다. 남성에게 잠자리를 내준 여성 노숙인들은 멀쩡한 보호시설 옆 공원에서 종이상자로 밤을 지새고 있다.
복지의 기본이 이 지경이다. 이걸 못 본체 건너뛰어 복지 천국으로 가자는 건가. 결식아동과 재가 노인의 두 끼니는 계속 굶는 것이고, 결손 아동들의 명절은 계속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것인가. 남성 노숙인의 잠자리를 빼앗긴 여성 노숙인에게는 ‘서울(아가페의 집)로 가보라’는 말만 되풀이하면 끝이라는 건가.
퐁네프의 걸인들에게도 사랑은 있었는데…. 표와 복지 경쟁에 눈먼 정치인들이 점점 잔인해지고 있다.
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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